용서하기 힘들 때
 강주연 전북극동방송 방송부장 사회의 구성원으로 진짜 성인(成人)이 되었다고 인지할 때부터 인생은 왜 쉽지 않을까?를 묻고 또 물었던 기억이 있다. 살다보면 내 마음 같지 않을 때가 너무 많다. 열심히 학창시절을 보내면 입시가 기다리고 있고, 입시 후에는 취업, 어렵사리 취업을 해 결혼까지 골인한다고 해도 새로운 시작일 뿐이었다.
수십 년간 따로 살던 배우자와 맞춰가는 것도 힘든데, 시댁 또는 처가 식구들이 딸려온다. 사랑 속에 태어난 자녀들이지만 인내심의 한계를 자극할 때, 내가 이러려고 결혼을 했나 싶어 복잡한 마음이 든다. 이런 저런 생채기가 깊어질 무렵 분노로 폭발하고 만다.
때로는 더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한다. 믿었던 배우자의 배신, 재정의 궁핍, 사업의 실패, 고된 질병, 사춘기 자녀의 방황, 남모르는 아픔에 눈물을 훔친다. 잔소리와 회초리로 변화될 수 있다면 해보겠건만, 닦달하는 외침에 갈등만 커지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사랑하는 이가 준 상처는 마음에 깊이 파고들어 용서 할 수 없다는 사연이 라디오에 도착한다. 별다른 해결 방도를 찾지 못해 시간만 보내고, 마음은 그렇지 않아도 너무 멀리 건너왔다며 아쉬워하는 이들을 보며, 용서가 진정 어려운 일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제작하는 생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 유달리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았던 날, 퇴근 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데 이솝우화 해님과 바람을 오랜만에 펼치게 됐다. 해님과 바람이 누가 더 강한지 티격태격하다 힘겨루기를 한다. 지나가는 사나이의 외투를 누가 벗길 수 있는지 내기를 하며 바람이 먼저 세게, 더 세게 바람을 불어보지만 사나이는 옷깃을 여밀 뿐이었다. 이번에는 해님이 햇살을 강하게 비추자 더워진 나그네는 옷을 벗었다.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를 오랜만에 읽은 이야기를 통해 곱씹어본다. 강한 힘, 강압적인 방법이 결코 능사는 아니라는 것. 부드러운 온기로, 따뜻함으로 포용해 줄 때, 긍휼의 자비가 임한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용서의 위대함을 절실히 보여주는 소설이다. 빵을 훔친 대가로 19년의 옥살이를 하고 나온 장발장은 은접시를 훔친 위기의 상황에서 그의 부족함을 덮어준 미리엘 신부의 따뜻한 말 한마디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되길 다짐했다. 장발장이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체벌과 감금이 아니라 갚을 수 없는 감사를 느끼게 한 용서였다.
용서의 힘을 묵상한다. 용서는 먼저 내민 손이고, 새로운 기회로 이어지는 희망과 용기다. 이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아내지 못한 진심이며, 자존심을 이겨낸 용기이고, 삶의 또 다른 이유가 된다.
의학 전문가들도 말하길 자발적인 용서는 심신의 안정감을 주고, 부교감신경계를 활성화하며 혈압을 낮추고 각종 질병의 위험을 감소시킨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진정한 용서는 남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한 성숙한 의례 행위이자 인격 수양의 최고봉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를 주저하게 만들던 감정의 찌꺼기들을 과감히 떨쳐내고, 미래를 향해 시선을 돌릴 때, 용서가 결국 홀로 쥐고 있던 내면의 상처와 부정적인 감정을 치유하는, 스스로를 위한 일임을 깨닫게 된다.
마하트마 간디는 용서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용서는 용기 있고, 용감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죄를 용서할 만큼 강한 사람만이 사랑하는 법을 안다.
용서하기 힘들 때, 이제는 나를 생각하자. 상처 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닌, 사랑받을 만 하고 세상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나의 존재를 위해 이제는 외쳐보자.
나는 너를 용서한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강주연 전북극동방송 방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