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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읍사 (상)] 묵묵히 참고 따르는 '기다림의 미학' 절정

민족 고유 정서 이루며 문학 주요한 맥 형성 / 조선시대 '음탕한 글' 주장은 아무 근거 없어

▲ 정읍시 시기동 정읍사공원에 있는 망부상.

달님이어

 

높이 좀 돋으시어

 

어기야 멀리 좀 비취오시라

 

어기야 어강도리

 

아으 다롱디리

 

전주 시장에서 오고 계신지요

 

어기야 진데를 디딜까 두려워라

 

어기야 어강도리

 

어디든 짐을 벗어놓고 쉬시어라

 

어기야 내님 가는 길 저물까 두려워라

 

어기야 어강도리

 

아으 다롱디리

 

'어기야', '어기야 어강도리', '아으 다롱디리'는 모두 음악적 효과나 율동미를 높이기 위해 삽입된 여음(餘音)이다. 다른 백제가요와 마찬가지로 인고(忍苦)와 인종(忍從)을 바탕으로 한 기다림의 미학이 절정을 이룬 노래이다. 이러한 정서는 고려조 속요나 조선조 시가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면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이루었고 우리 문학의 주요한 맥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병욱, 조동일 등은 시조 장르의 원형이나 시원을 정읍사나 향가에서 3행 형식의 외형적 율조를 찾아내어 그 기원(起源)을 삼기도 했다.

 

고려사 악지조의 기록을 보면 전주의 속현인 정읍(井邑)에 살고 있는 한 행상인의 아내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 행여 도적들에게 범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진데를 디딜까 두려워라'라는 상징적 은유법(symbolic metaphor)을 써서 노래하였다. 우리네는 무섭거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는 으레 이러한 수사를 항용 관례적으로 써왔다.

 

예컨대 집안에 도둑이 들었을 때도 도둑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으로 '양상군자(梁上君子)'라 일러왔다. 아니면 '밤손님'이라는 미화법을 쓰거나 "불이야!" 하는 식으로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부당한 처지에 빠졌을 때도 '흙탕물 튀겼다'라는 은유적 수사(修辭)를 항용 써왔다. 내레이터인 정읍사의 여인도 이와 같은 지혜를 발휘하여 다정하고도 유정(幽情)한 남편의 위해(危害)를 걱정한 나머지, '진데'를 디딜까 두렵다는 조심스럽고도 섬세한 아름다운 발성을 토해냈다.

 

'즌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진 곳'을 의미하는 '진흙탕길'이다. 이것이 여성의 성(性)과 관련되었다거나 '화류항(花柳巷)'이나 '색주항(色酒巷)'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전거(典據)를 그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조선 중종 때 남곤(南袞)이 정읍사는 음사(淫詞)이므로 궁중의례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상소한 것을 그대로 따르거나, 양주동이나 지헌영, 박병채, 등이 주장한 주관적 해석을 맹목적으로 좇아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러한 연유를 '고려사'의 악지의 기록에서 분명히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정읍사의 내레이터인 행상인의 아내는 남편이 밤길에 도적들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운 나머지 '흙탕물의 더러움에 의탁했다'(恐其夫 夜行犯害 托泥水之汚)는 기록이 선명하게 남아있다는 말이다. '이수지오(泥水之汚)'는 '흙탕물의 더러움'이요, 정읍사 노래 속의 '즌대'는 즉 현대어 '진 곳'인 '진데'와 일치된다.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이란 우선 남편의 신변에 무슨 위험이나 있지 않을까 하는 일차적인 걱정으로부터 출발하기 마련이다. 그 다음 단계에 가서야 술집이나 다른 여인의 유혹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라는 이차적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읍사가 음사(淫詞)라고 보는 단초인 '즌대'란 이런 양면적인 인간본성의 이중구조로 파악하는 게 온당하다. 단순한 음행(淫行)으로 국한하거나, 선뜻 주색에 탐닉(耽溺)된 것으로 풀이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다시 말하면 임을 기다리는 심정이란 먼저 임의 신변상의 위해가 으뜸일 것이요, 다음으로 애태움과 초조 속에서 다른 여인에게 빠져버린 게 아닌가하는 의구심으로 전이되어 불안한 심리상태에 놓이게 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정읍사의 여인이 위험한 밤길을 걸으며 귀가하는 남편의 안전을 달에게 비는 모습은 엘리아데가 말한 달과 물, 여인의 3자에 의한 생생력환대(生生力環帶)를 이루어지게 되는 신이한 써클의 도식과도 일치된다. 달은 원시시대부터 신비스런 신앙의 대상이었다. 위험한 밤길에 귀환하는 임의 안전을 정읍사의 여인이 달에게 비는 모습은 달과 물, 여인이란 엘리아데의 생생력환대를 바탕으로 한 민속신앙의 기원(祈願)행위로 표출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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