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사 아닌 여필종부 미덕
루마니아 민속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는 달은 일정한 주기에 의해 탄생과 성장, 소멸의 과정을 반복하는 재생의 상징으로 보았다. 초승에서 보름, 그믐달로 이어지는 운행에 따라서 달의 인력으로 인해 조수 간만(干滿)의 차이가 생기게 되는데, 이는 여성의 생리주기 28일 혹은 29일과도 일치한다. 신은 여성에게 생명을 잉태케 하는 놀라운 능력을 준 셈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서해 바다가 동해나 남해보다 달의 인력에 의해 밀물과 썰물의 차가 심하기 때문에 각종 어패류들도 달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친 그믐달 이후에야 충실한 것이 많은 것과도 일치한다.
홍용희도 '창조신화의 세계'에서 논밭과 같은 대지는 씨(種子)를 뿌리면 이를 받아들여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풍요다산과 상관되는 자연현상으로 일치된다고도 하였다. 인간도 이와 같은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월 대보름 밤 동산에 떠오르는 달을 보고 아들, 딸 낳기를 기원했고, 달의 모양을 보며 한 해 농사의 풍·흉년을 예언한다고도 하였다. 이런 현상학적 견지에서 보면 정읍사의 여인이 행상나간 남편의 밤길의 위해(危害)를 흙탕물에 비유하여 달에게 무사안녕을 기원한 것은 민속신앙 그 이상 차원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밤길에 어떤 범해를 당할까 염려하는 정읍사 여인의 기우(杞憂)도 정읍사에선 용납되질 않는다. 정읍사의 기구(起句) '달하'는 일체의 부정(不淨)이 끼어들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 선언이요, 외경(畏敬)적 기원이기 때문이다. 호격조사 '하'는 '아'의 중세어로서 신격(神格)에만 사용되는 '극존칭호격조사'다. 자연만물의 생성과 소멸이 달과 물과 여인이란 3자의 요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정읍사 여인이 남편의 무사귀환을 비는 이와 같은 종교적 기원의례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왔고, 실제로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서도 왕왕히 그런 민속신앙의 모습들을 찾아 볼 수도 있다.
이렇듯 달은 물과 여자와 더불어 생생력환대(生生力環帶)를 이루어 그 속에서 달이 풍양(豊穰), 산아(産兒), 건강(健康) 등에 관련된 생생력 상징으로 인간에 의해 숭앙되었다는 사실은 김열규에 의해서도 지적된 바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손자나 아들의 과거급제를 기원하거나 무사함을 달님에게 비는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들의 기원의례가 지금까지도 전해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아름다운 성정이 남편의 무사안녕을 비는 행상인의 아내의 마음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나고 있다고도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목욕재계(沐浴齋戒)한 정읍사의 여인이 하늘에 덩실 떠있는 달을 보며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경건한 아내의 모습에서 차원이 낮은 일상인들의 의부증이나 부정이 일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즌대'를 터무니없는 육정(肉情)적인 해석이나 퇴폐적인 의미로 풀이함으로써 백제여인의 아름다운 정절을 폄훼(貶毁)하는 우(愚)를 범해서도 안 된다.
'고려사' 악지의 기록대로 혹여 행상나간 남편이 밤길에 어떤 범해를 입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여심이 '즌대'를 디딜까 두려운 것으로 비유된 것으로 보아야 옳다. 아무런 전거나 근거도 없이 자기 나름의 주관적인 인상(印象)이나 속단에 의지하여 정읍사를 터무니없이 음사라고 규정을 하고 여인의 성(性)과 관련시켜 엉뚱한 해석을 해서도 아니 된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 궁중악의 취택(取擇)과정에서 고려조의 속요들이 대부분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나 음사(淫詞)로 낙인 찍혀져 사리부재(詞俚不載)되었다. 그런 가운데 남녀간의 노골적인 사랑을 노래한 '쌍화점(雙花店)'이나 '동동(動動)',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 이상곡'(履霜曲)' 같은 육정적인 고려조 속요들을 조선 성종조의 '악학궤범'이나 '시용향악보', '악장가사'에 왜 실어놓았는지 그 까닭을 알 길이 없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면면히 이어온 궁중악을 하루아침에 바꾸기가 어려웠을 것이요, 또 바꾸었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익숙했던 노래보다 그만한 흥취나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 중종조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정읍사가 음사라는 상소가 왜 이어졌는지 모른다. 굳이 그러한 까닭을 찾는다면 신라를 계승한 고려의 집권층이 조선조에도 그대로 기득권층으로 이어진 결과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정읍사가 왜 음사로 논의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사실 정읍사는 백제가요이지만 이 노래에 담긴 정서가 그처럼 아름다울 수 없다. 그리고 내면에 면면히 흐르는 여필종부의 미덕이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철학에 이만큼 부합되는 노래가 없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조선조의 악장에 그 노래가사가 실려 오늘날까지 전해진 게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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