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1-06 13:19 (Thu)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6. 정읍사 (하)] 믿음 바탕 여유로운 기다림 미학

한국여인 아름다운 정절의 원형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읍사는 백제오가 가운데 유일하게 가사가 전해오는 노래다. 정읍사에 담긴 정서가 이토록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내면에 면면히 흐르는 곱고 아름다운 여인의 기다림의 미학이 우리 고시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을 만큼 유려하다. 조선조의 건국이념인 유교윤리에 정읍사에 내재된 여필종부의 미덕이 이만큼 부합된 노래가 없기 때문에 백제오가 가운데 정읍사만이 '악학궤범'에 실려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흔히들 신라여인들은 자유분방한데 비해 백제 여인들의 성정을 지조(志操)와 정절(貞節)이라고 규정한 소이연도 여기에 기인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고려사'에 곡명과 더불어 노래의 내용만이 간단하게 소개된 정도이지만, 선운산, 정읍, 지리산, 방등산, 무등산 등의 백제오가나,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는 도미설화 등은 정절의 백제여인상을 대표하는 귀중한 자료다. 그러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여성들의 성정을 요약할 때 백제의 여인들은 다른 나라들 여성보다 비교적 아름다운 정절과 곧은 지조를 지녔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싶다.

 

고려조 속요들은 대부분 이별을 노래하거나 영원히 이별하지 아니할 것을 노래하는 것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에 반해, 정읍사는 그러한 정조를 노래하는 속된 심사와는 차원을 달리한 여인의 믿음을 바탕으로 여유 넘치는 기다림을 노래하고 있다는데서 그 미적 가치를 찾아볼 수가 있다. 그리움이나 기다림의 화자(話者)의 간절한 기원은 하늘에 높이 떠있는 보름달만큼이나 상승되면서 정읍사에 토로되어 절정에 이르기 때문이다.

 

정읍사의 내레이터인 행상인의 아내에게서 느껴지듯이 남편이 행상을 나가면 오랫동안 자유분방한 상태에 놓이게 됨으로써 고려조의 속요 쌍화점, 만전춘별사나 신라 향가 처용가처럼 다분히 다른 남정네들과의 에로틱한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읍사의 여인은 그런 부정(不貞)의 여지를 조금도 허용칠 아니한다. 신라의 처용이 달 밝은 밤 탑돌이를 나간 사이에 외간남자와 정을 통해버리고만 처용 아내의 유희적 방탕성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는 말이다.

 

행상인의 처라고 하는 제한적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일편단심 남편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정읍사야말로 인간의 본능과 감성적 욕망을 극복한 절창(絶唱)이 아닐 수 없다. 즉 사랑과 도덕, 낭만과 지성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어내는 이 작품은 본능과 현실적 도덕성간의 근원적 양면성이 동시에 내재돼 있는 노래라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 본연의 갈등이 표출되지 않은 채 절제되어 형상화한 시가가 바로 정읍사라는 점이 이 노래가 지니는 매력이다.

 

정읍사가 달을 주요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도 여느 작품과 다르다. 처용가의 달이 '유희(遊戱)를 위한 달'이라면 정읍사의 달은 기다림과 기원을 담은 '정절(貞節)의 달'이라고 할 수가 있다. 허소라 교수는 '정읍사 주제고(井邑詞主題攷)'에서 달이 밝을수록 그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임과 나와의 거리도 그 만치 가까워진다는 이등변삼각형의 기하학(幾何學)적인 특수구조를 보이는 노래라고도 하였다. 즉 기다리는 남편과 내레이터인 나 사이에 떠 있는 달이 높이 오를수록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진다는 원리를 통해 화자의 간절한 사랑이 더욱 깊어진다는 것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읍사는 달에게 내 마음을 전해달라는 유럽의 직소(直訴)적인 소야곡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노래다. 오로지 남편만을 걱정하는 기다림과 기원이 달을 매체로 함축적으로 형상화된 것도 이 작품의 품격을 고양시키는 점이다. 그리고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가 주장한 바와 같이 물-진흙탕물이지만-과 달, 여성의 3요소가 하나의 생생력환대(生生力環帶)를 이루어서 남편의 무사안녕을 비는 종교적인 기원은 숭고한 신성성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믿음을 바탕으로 한 백제 여인의 기다림의 미학은 오로지 사랑하는 임의 무사안전만을 위해 아무 곳이나 짐을 벗어놓고 쉬고 오라는 여유의 아름다움으로 표상된다. 이러한 믿음을 전제로 한 부부지정이 내면에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여유가 가능한 것이며, 남편의 무사함을 능가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름다운 여심(女心)으로 나타난다. 오늘밤의 무사귀환이야말로 순전히 남편에게 달려 있는 일이기 때문에 당신의 임의대로 해달라는 소박한 마음속엔 일체의 불안이나 질투, 잡념이 스며들 여지가 없고, 오로지 변할 줄 모르는 부부의 믿음만이 노래가사의 행간에 자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순지고(至純至高)한 여인의 사랑은 자기 스스로를 죽이고 남편만을 위하는 유교적인 윤리를 근본으로 하여 더욱 영롱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이러한 유교윤리적인 기다림의 미학은 이후 고려조의 속요인 가시리. 이상곡, 동동 등으로 접맥되었고, 현대에 이르러 김소월의 진달래꽃으로 승화 계승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읍사야말로 한국여성의 기다림의 미학의 정화(精華)요, 한국여인의 아름다운 정절(貞節)의 원형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지 않을까 한다. 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