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학자들은 공주 취리산에서 의자왕의 아들이며 무왕의 손자인 웅진도독 융과 신라 문무왕이 체결한 맹문(盟文)인 ‘당평백제국비명(唐平百濟國碑銘)’에 백제 선대왕들을 성토하고 특히 의자왕의 실정을 거론하는 대목에서 ‘동벌친인(東伐親姻)의 결정적 단서를 제시하였다. 동벌친인의 ‘친인’은 어머니를 지칭하는 것이며, ‘동벌’은 동쪽 신라를 쳤다는 뜻으로 의자왕은 천륜을 그르치고 어머니 선화모후의 나라인 신라를 무례히 침략했다는 의미를 지니는 말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사택왕후는 선화왕후 사후에 맞이한 계비나 빈이었다는 사실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또 〈일본서기〉 642년 백제조에도 의자왕은 무왕의 왕후가 죽자마자, 자신의 동생인 교기와 국주모(國主母)의 여동생 4명 등 총 40명을 섬으로 추방하는 숙청을 단행했다는 기록을 제시하였다. 이는 자신의 왕위등극을 반대했던 세력이 ‘국주모’라 적힌 후비 사택적덕의 딸이 명백하다는 것으로 무왕의 왕후는 선화공주라는 것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의 기록 가운데 ‘무왕 39년 봄 3월 왕은 빈과 더불어 큰 연못에 배를 띄워 놀았다’라는 사실도 제기했다. 이를 보아도 왕은 왕비와 여러 명의 빈(嬪)을 거느렸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고, 따라서 봉안기에 적힌 사택적덕은 빈이었거나 계비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법왕조에도 〈고기〉(古記)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무왕은 가난한 어머니가 물속의 용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로 어릴 때 이름은 서여, 즉위한 뒤에 시호를 무왕이라 했다. 이 절은 첫 왕비와 더불어 이룩한 것이다’라 씌어 있다. 여기서 말한 ‘첫 왕비’는 선화왕후였을 것이며, 따라서 사택적덕의 딸은 선화왕비가 죽은 후에 무왕이 맞이한 계비나 빈이었음이 명백하다. 2009년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는 서기 639년에 제작봉안된 것이요, 이 해는 무왕이 사망하기 2년 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전거(典據)에 따르면 〈삼국유사〉 무왕조의 기록은 한낱 설화 쪽의 기록이라기보다 역사적 사실임에 틀림없다. 무왕이 미륵산(일명 용화산) 사자사로 불공을 드리러 가는 도중에 나타난 미륵삼존불을 기려 선화공주가 무왕에게 절을 짓자는 간청대로 회전(會殿)과 탑, 낭무를 3곳에 세운 일과, 무왕이 사자사 지명법사의 신력(神力)에 힘입어 연못을 메웠다는 사실이 발굴과정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미륵사가 사자사로 가는 길 용화산 아래에 있었다는 것이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또한 미륵사의 창건년대도 2009년 서탑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1370년 전(무왕 40년 서기 639년)인 ‘금제사리봉안기’의 기해년 정월 29일과도 일치한다.
미륵사는 1980년부터 1996년까지 16년간 발굴조사를 했다. 이 작업에 참여했던 원광대 김선기 박물관장은 절터에서 갈대잎이 섞인 뻘층이 나왔는데, 이는 유사의 기록대로 연못을 메워 절을 지었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셈이며 발굴과정에서도 엄청난 물이 솟아났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1994년에는 사자사(현 사자암)를 나타내는 1322년 고려 때 만든 기와가 출토되어 ‘삼국유사’의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와편은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외에도 1916년 ‘말통(마동, 맛동이 후에 음전된 것)대왕릉’이라고 전해오는 ‘쌍릉’을 일제가 발굴했는데 그 결과 묘제(墓制)가 백제왕릉과 일치했다는 사실과 금마 마룡지 근처엔 실제 서동의 어머니가 집을 짓고 살았음을 알 수 있는 주춧돌이 출토되었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인근의 금구와 김제에서 일제 때부터 개발한 금광과 1970년부터 1980년대까지 많은 양의 사금을 채취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서동이 유사의 기록대로 인근에서 생산된 많은 양의 금을 오금산(五金山)에 쌓아놓고 선화공주에게 보여주었다는 유사의 기록과도 상통된다는 것이다.
공주대 사학과 정재윤 교수도 무왕에 대한 이설이 많은 건 역설적으로 말하면 무왕이 적자가 아니어서 다음 왕을 이을 수 있는 적자개념으로 표현하기 위해 법왕의 아들로 표기하였고, 그러므로 유사에선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낳은 지룡지자(池龍之子)라 한 것이라 하였다. 실제 27대 위덕왕은 재위 38년간에 아좌태자인 법왕에게 왕위를 넘기지도 못하고 고령인 동생 혜왕에게 왕권을 넘겼다. 그러나 혜왕은 1년 만에 죽었고 그런 연후에야 위덕왕의 아들 법왕에게 왕위가 넘어갔지만, 법왕도 혜왕처럼 1년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서 등극한 왕이 법왕의 아들인 제30대 무왕이다.
이러한 왕위의 승계과정을 보면 이 시대는 신권(臣權)이 왕권보다 강했고, 그 다툼도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적국인 신라의 선화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여 어려운 국면을 전환시키고자 했던 무왕의 정치적 행보가 가능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과 선화공주가 무관하다면 신라향가가 기록된 책에 서동요가 실려 전해질 까닭이 없다. 그리고 절세미인인 신라공주가 적국의 백제인을 사랑했다는 드라마틱한 낭만적인 러브스토리가 만들어져 신라인들에게 구전되어 전해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서동요의 작자는 익산 금마에서 마(薯)를 팔아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간 서동인 무왕이며, 유배 길에 서동에게 한눈에 반해버린(遇爾信悅) 선화공주 사이에 얽힌 역사적인 노래가 서동요임을 부정할 길이 없다. 그리고 정사(正史)에서 기록할 수 없었던 신이(神異)한 무왕의 역사적 사건들을 일연은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 실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일연의 〈삼국유사〉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익산 미륵사지에서 2009년 출토된 ‘금제사리봉안기’에 가려진 역사적 사건들, 예컨대 무왕의 첫 왕비가 선화였고, 서동이 서동요를 지은 백제 30대 무왕이었으며, 선화왕후의 청으로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사료라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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