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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정극인 상춘곡 (하)] 담양의 면앙정가단 형성, 조선조 가사문학의 원천

‘상춘곡’의 허두(虛頭) ‘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생애 어떠한가 / 옛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미칠까’는 세속을 떠나 산 속에 은거하고 있는 풍류가 고인의 멋에 비교해 보면 어떨까라는 발화자의 서정적 표출로 출발된다.

 

이러한 풍류는 상춘곡의 결사(結辭)와 같이 부귀공명도 뜬구름이요, 단표누항(簞瓢陋巷)에 쓸데없는 생각을 아니하고 살아가는 티끌 없는 청정(淸淨), 그것은 청풍명월이 유일한 벗일 뿐이라는 사대부의 절제 있는 스토우어시즘(stoicism)적 미의식의 표출로 발산되었다. 백년행락 자체는 청풍명월을 벗하며 사는 안빈낙도의 도취적 감흥을 영탄한 것으로서 서사를 외연으로 한 서정성의 복합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사실 가사 작품 속에서는 규방가사의 계녀(誡女)가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정적 정신보다는 서사적 방법을 통한 교술(敎述)적 정신이 근간을 이룬 작품들이 많다.

 

이러한 경향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문학 장르의 역사 사회적 변모에 따른 분파, 내지는 변이(變異)화로의 한 전이형태라고 보아야 하고, 또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술한 바와 같이 서정, 서사, 교술성의 복합성에서 출발된 어느 한 성격의 극대화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상춘곡’과 같은 은일(隱逸)류의 가사는 서정이 주조를 이루고, 서사와 교술은 이를 뒷받침하는 보조적 성격을 이루는 장르의 복합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발화자의 감흥이 객관적 대상에 머물지 않고 서정적으로 미화되어 향유자(독자)에게도 동일한 방법으로 감흥을 일으키고 공명(共鳴)을 얻게 된다. 그런 까닭에 텍스트를 통한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수용되고 향유되는 특별한 장르라고 보고 싶다.

 

정극인의 이러한 은일류의 가사는 담양의 송순의 ‘면앙정가’로 이어지고, 이 ‘면앙정가’의 영향 아래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연결되는 ‘면앙정가단’이라는 가사의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중종 5년(1510년)에 쓴 ‘향약’ 발문을 보면 취은 송세림은 불우헌 정극인보다 30년 후에 태어났으므로 선생을 직접 만나 가르침이나 인도를 받을 수 없는 것을 한탄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정읍 태인 고현학당을 차운(次韻)한 머리에 ‘학당은 본시 고(故) 불우헌공 정극인이 교수하던 곳인데, 취은 송세림에게 또 곧바로 이어졌다’는 기록만 보면 송세림은 같은 고을에 살았던 정극인을 얼마나 존경하며 사숙했는지를 알만하다는 것이다.

 

송순은 일찍이 중종 13년(1518년) 송세림이 능성현감으로 있을 때 직접 찾아가 사사를 받았는데, 그 때 스승으로부터 정극인의 〈불우헌유고〉를 접할 수 있었고, ‘상춘곡’이나 ‘불우헌가’와 ‘불우헌곡’도 읽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정극인과의 간접적인 문학적 영향관계를 엿볼 수 있다.

 

중종 22년(1527년)에 세자 호의 동궁에 작서(灼鼠)의 변과 요사스런 현패(懸牌)사건이 일어나고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억울하게 사건의 주모자로 몰리게 된 경빈 박씨와 아들 복성군을 죽이라고 간하자, 송순은 이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2년 후인 중종 26년 고향인 담양 기촌으로 돌아와 면앙정을 짓고 자연과 벗하며 살았다.

 

마침 세조찬탈의 정국을 겪으며 태인 칠보로 은거한 정극인이 험난한 세상과는 무관한 것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봄날의 아름다운 정경을 그려낸 ‘상춘곡’처럼 송순은 중종조에 세자를 둘러싼 정치적 변란을 피해 담양 기촌의 면앙정에 유유자적하면서 은일가사 ‘면앙정가’를 창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심수경은 「견한잡록」에서 송순의 ‘면앙정가’는 그윽한 산천과 넓디넓은 전야의 형상이라든가 정대(亭臺)의 높고도 낮게 굽이도는 지름길의 형상을 두루 포서(鋪敍)하고, 사시사철 변모하는 아침저녁의 경치를 빠짐없이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문자를 섞어가며 운치 있게 도는 것을 지극히 잘 표현했음으로 진실로 볼만하고 가히 들을만함으로 송순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으뜸 작이라 절찬하였다.

 

이러한 평설은 홍만종의 〈순오지〉에서도 동일하게 찾아 볼 수가 있는데, 순국어의 자유 자재로운 구사나 조사법의 기발한 솜씨, 조어의 공교로움, 이에 따른 절절한 정감 등은 가히 가사문학의 가치를 한껏 고양시킬 수 있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한문만을 진서(眞書)라 숭상했던 조선 사대부들의 평설로 본다면 대단한 작품평이 아닐 수 없다. 1960년대 김동욱이 잡가에서 원문을 발견하기 이전에는 〈면앙집〉에 ‘신번(新飜) 면앙정장가 1편’이라는 부(賦)형식의 번역가만 실려 그 진가를 알 수 없음으로 아쉬웠다. 하지만 김동욱 교수에 의해 잡가에서 발견된 ‘면앙정가’ 원전을 보게 됨으로써 심수경이나 홍만종 등이 절창이라 평설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음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송순의 제자인 박상이나 김윤제, 기대승, 김인후, 임억령 등에게 배운 정철은 이들을 통해 면앙정 송순을 사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송순의 ‘면앙정가’를 본받아 성산(별뫼; 무등산자락)의 사계에 따른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성산별곡’에 담아냄으로써 이들을 중심으로 한 면앙정가단이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송순은 스승 송세림을 통해 정극인의 ‘상춘곡’을 본받아 ‘면앙정가’를 창작하였고, 정철은 송순의 ‘면앙정가’와 같은 ‘성산별곡’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극인의 ‘상춘곡’은 조선가사문학의 효시(嚆矢)요, 남상(濫觴)이 아닐 수 없고, 담양에 면앙정가단을 형성케 함으로써 조선조 500여년을 이어 온 한국가사문학장르의 원천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전북 태인 칠보를 발상지로 한 정극인의 ‘상춘곡’은 담양의 면앙정가단으로 이어지고 호남가단을 형성함으로써 조선조 사대부가사문학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임진란 이후에는 부녀자, 평민 등으로 작자와 향유자가 확대되면서 국민적 장르로 발전하여 조선조 국문학의 질량을 드높였다고 생각된다. ·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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