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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병원에 가야해

친구들과 놀러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뒤늦게 내가 버스를 놓쳤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로도 버스는 40분 째 오고 있질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을 즈음, 매우 슬픈 일이 생긴 것처럼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몸이 떨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 숨을 쉬기 힘들어졌다. 함께 놀러가기로 했던 친구들에게 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애인은 40분 걸리는 거리를 찾아와주었다. 애인이 버스 정류장까지 오는 동안 울음은 조금 멈추었지만 떨림이나 힘이 빠지는 증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대로 쓰러지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곳에서 내가 왜 이러지, 하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애인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몸을 집으로 옮길 수 있었고 밤 아홉시가 되어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조금 진정되고 다시 생각해보니 단단히 잘못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내가 한 만큼 몸에게 다시 되돌려 받는 것 같았다. 나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데. 애인은 해야 하는 일을 줄줄 읊는 나를 말리고 밥을 먹였다. 열심히,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은 좋지만 몸에 무리가 온 것 같다며 오늘은 일찍 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애인이 집에 가고 나서, 일찍 잠들지는 못했지만 그의 말 대로 얌전히 잠들었다. 잠드는 순간까지도 일 생각을 떨치지 못했고 핸드폰의 카카오톡 회의 내용을 다시 읽었다. 지금 글을 쓰는 전북일보 원고를 포함해서, 여러 행사와 맡은 역할들을 해야 했다. 아- 언제 하지, 하면서도 확실히 피로했는지 눈이 감겨졌다.예전에 누군가는 내가 연락이 되지 않는 동안 죽을 줄 알았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그러다가 죽는 거 아니냐고 했다. 설마 이정도로 죽을까, 하고 웃어 넘기고 있긴 하지만, 애인의 눈빛을 보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가끔은 이러다 비참하게 죽으면 어쩌지 걱정이 되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기도 했다. 즐거운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 비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무리 즐거운 일을 한다고 해도 지금 몸 상태라면 비참하게 죽는 것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죽음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면서도 아직은 죽기엔 이르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아직 다 못 끝낸 미련이 들기 때문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들, 비록 내가 해야만 해서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지만 어떻게 라도 끝은 내고 싶었다. 끝을 내고 나의 결과물로서 받아들이고 싶었다. 많은 일로 힘들 때 버텨야 하는 이유는 일 때문이었다는 것이 굉장히 역설적이었다.병원에 가긴 가야지, 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한다. 나의 죽음을 걱정하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아주 슬프게도 이 사람들에게 느끼는 고마움 때문만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 끝까지 보여야할 내 모습이 더욱 마음에 걸렸다. 주변 사람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기 보다 나의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병원에 갈 것이다. 동시에 내가 약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해서 병원에 가는 것이 꺼려진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병원에서 나를 약한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정말로 무언가 단단히 잘못 되기 전에 내가 강하지 않다는 걸 마주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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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28 23:02

기획자도 돈을 벌어요

기획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분야의 일들과 우리 일상 속에서 굉장히 많이 쓰이는 말이다. 그 중 내가 하는 기획인 공연기획, 축제기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나는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항상 기획이란 무엇일까? 많은 고민을 하고 끊임없이 생각해왔다. 하지만 기획을 정의하고 기획에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스스로 정립하기엔 기획은 항상 너무나 어려운 단어였다.단어의 의미로는 어떤 대상에 대해 그 대상의 변화를 가져올 목적을 확인하고, 그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행동을 설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 이야기하지만 나에게 기획이란 사전적 의미 이상의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는 단어였기 때문이다.공연기획은 연극, 뮤지컬, 대중음악, 국악, 등 다양한 장르를 포함한다.그리고 성공적 기획을 위해서는 관객, 무대, 아티스트 그리고 콘텐츠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여기까지는 이론적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어있고 기획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이야기일 것이다.하지만 나는 여기에 기획자가 갖춰야 할 추가적인 덕목이 있다고 생각을 했다.첫 번째로 당당하게 돈을 버는 일이다.예술경영을 하는 기획자는 예술가도 아니고 사업가도 아닌 중간 입장의 사람이다. 예술가의 입장을 취해서도 안 되고 사업가의 입장만을 취해서도 안 된다. 예술의 발전을 고민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수익구조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당당한 나만의 기획과 당당한 수익구조를 함께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예술가는 예술을 할 수 있도록, 관객은 공감할 수 있는 만족스러운 공연 그리고 편하게 좋은 공연을 볼 수 있도록 말이다.두 번째는 내가 기획한 공연을 위해서 여러 가지 자본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내가 만난 여러 기획자들 중에는 여러 가지 자본 중에서 정부지원사업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자본 확보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기업, 정부지원사업 , 개인투자자, 자기자본투자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 중 하나에만 치중해서도 안 되고 여러 가지 방법을 어떤 기획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 고민해서 자본 확보에도 다양한 방법을 취사선택하는 고민을 해야 한다.그러는 과정에서 다양한 투자유치에 지원사업은 플러스가 되는 일이지 기획을 위해서 지원사업부터 찾고 지원사업이 1순위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또한 기획자는 자기자본투자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예술경영을 하는 기획자는 그리고 나는 궁극적으로 자본을 예술시장으로 끌어와서 예술시장의 규모를 키우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런 생각 속에서 내가 주의해야 할 점도 있었다. 그건 바로 기획의 목적이 수익만이 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예술 경영적 기획은 예술의 본질을 흐리지 않으며 멀리 보았을 때 예술시장의 확대와 활성화를 위해야 함에 있어서 예술의 본질을 흐리는 일은 주의해야한다고 생각했다.지방에는 전문 기획자가 많이 없는 게 현실이고 아티스트가 기획을 하게 되면서 기획에 아티스트적 사고가 많이 묻어나오는 게 많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아티스트의 입장과 관객 그리고 경영자의 입장의 중간에서 모두가 목표하는 바를 만족스럽게 이룰 수 있는 기획을 하는 그런 기획자가 되고 싶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기획에 대하여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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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21 23:02

고통을 대면한다는 것

작년 모 영화제로부터 제작지원을 받아 올해 4월에 제주도에서 촬영을 마쳤다. 현재 후반작업이 진행중이다.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사실 10년 전 썼던 시나리오를 가지고 만들었다. 노무현 정부 때 썼던 시나리오를 이명박 정부 때 모 단체에서 주관하는 시나리오공모전에서 수상을 했고 박근혜 정부 때 제작지원을 받아 문재인 정부 때 완성을 했다며 아주 긴 여정의 영화라고 농을 치고 다니는데 사실 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비극의 역사를 소재로 창작을 한 다는 건 조심스럽고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해서다.제주도민의 삼분의 일인 3만명이 희생당한 43사건은 제주공동체의 파괴 뿐 아니라 여전히 제주도민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죽음을 숫자로 치환하는 걸 경계하지만 43은 한국전쟁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온 그야말로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사회학자 모리스 알박스는 기억의 사회성을 처음 지적하였는데 한 사회에서 무엇이 기억할만 것이며 어떻게 그것이 기억되는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그는 집단적 기억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는데,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서로 공유하는 기억이 있다고 한다. 제주도민에게 43은 집단적 기억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엊그제는 무장대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어제는 경찰에 의해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오늘은 오빠가 누군가에 의해 끌려가고, 집이 불타고. 구술생애사 논문을 읽으면서 더 이상 활자로 이 비극의 역사를 마주한다는 게 고통스러워 논문을 덮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왜 굳이 이 비극을 재연하려고 했을까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럼에도 제작비는 받았으니 그 책임에서 또 자유롭지 못했기에 꾸역꾸역 해를 넘기고 봄을 맞이하고 결국 4월에 촬영에 들어갔다. 유채꽃이 만발했던 제주에서 전주, 서울, 대구, 제주 등지에서 모인 스탭과 배우들이 매일 새벽에 기상하여 산으로 들어가 촬영을 했다. 산책 나온 주민들이 지나가면서 촬영하는 우리들에게 혹시 43 영화를 찍냐. 잘 찍어라고 할 정도로 그 만큼 43은 주민들에게 집단적 기억, 나아가 외부인인 우리들에게는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아야 할 사회적 기억으로 인식됐다. 역사적 소재를 가지고 카메라로 재연해야 하는 창작자들의 입장에서 윤리적 태도와 책임감은 실제 그 사건이 일어났던 공간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무거웠다.제주에 갈 때마다 항상 들르는 곳이 있다. 이틀 동안 400여명이 학살당했던 북촌리. 거의 같은 날 제사가 진행되는, 대가 끊겨져 무남촌(無男村)이라고 불리는 곳. 6월에 사운드 믹싱 작업을 하러 제주에 다녀왔을 때 다시 한번 들렸던 북촌리에는 해녀분들이 작업장에서 열심히 해산물들을 손질하고 계셨다. 보기에 일흔이 넘는 할머니께서 굽은 등을 벽에 기댄 채 해산물을 다듬고 계셨다. 총에 맞아 죽어가는 엄마의 피젖을 빨던 갓난 아기가 혹시 저 할머니는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해봤다.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생존과 사투를 벌이며 묵묵히 오늘을 보내고 있다.고통스러운 준비기간이였지만 작업이 마무리되면서 하나를 알아간다. 고통과 대면하는 일이야말로 잘못됨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것. 43사건의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희생자 가족들의 슬픔에 깊은 위로를 보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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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14 23:02

김지영이 김지영을 알아보는 세상

어, 잠깐만 책을 읽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적지 않은 당황스러움에 휩싸였다. 이 소설이 3인칭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105페이지, 소설의 절반 정도를 읽었을 때 깨달았다. 거의 모든 페이지에 등장하는 김지영씨라는 4글자를 왜 인식하지 못했을까. 잠시 책 읽기를 멈추고 소설에서 한 발자국 빠져나왔다. 나는 충분히 몰입해 있었다. 내가 겪은 경험이 아니었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 나는 김지영씨라는 글자 위에 나를 덮어 읽고 있었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묘사한 소설이다. 대통령에게 노회찬 정의당 대표가 선물해 화제가 된 책이자 올해 약 7달간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기도 하다. 베스트셀러가 크게 의미를 갖지 않는 동네서점 북스포즈에서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책 중 하나다. 김지영은 1982년생 여성 가운데 가장 흔한 이름이다. 소설 속 김지영씨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으며, 가정폭력의 희생자도 데이트 폭력의 희생자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온 여성이다. 하지만 여자라면 한 번쯤 겪게 되는 성차별과 과한 농담을 견디며 살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개체성을 상실한 채 엄마로 호명되고 있는 여성이기도 하다. 김지영씨는 얼굴형도 예쁘고 콧날도 날렵하니까 쌍꺼풀 수술만 하면 되겠다며 외모에 대한 칭찬인지 충고인지도 계속 늘어놓았다. 남자 친구가 있느냐고 묻더니 원래 골키퍼가 있어야 골 넣을 맛이 난다는 둥 한 번도 안 해 본 여자는 있어도 한 번만 해 본 여자는 없다는 둥 웃기지도 않는 19금 유머까지 남발했다. 무엇보다 계속 술을 권했다. 주량을 넘어섰다고, 귀갓길이 위험하다고, 이제 그만 마시겠다고 해도 여기 이렇게 남자가 많은데 뭐가 걱정이냐고 반문했다. 니들이 제일 걱정이거든. 김지영씨는 대답을 속으로 삼키며 눈치껏 빈 컵과 냉면 그릇에 술을 쏟아 버렸다. 작가는 왜 주인공 시점이 아닌 관찰자 시점을 택했을까. 소설의 일화가 주관적인 견해가 아닌 객관적인 사실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관찰자를 내세운 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익숙하다는 이유로 당연시되는 이야기들을 밖으로 꺼내기 위해서 필수 불가결했던 걸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불편함을 이야기하기 어려워졌다. 예민충이나 프로불편러라는 딱지가 붙기 시작하면서 정말 내가 예민한가? 자기검열에 빠지게 되고, 결국 많은 이들이 발화의 기회를 잃게 되었다.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사안이 묻히지 않도록 작가는 외부의 목소리를 빌렸으리라. 공교롭게도 소설 후반에 등장하는 화자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세상이 있었구나라며 자기반성에 빠지는 40대 남성 정신과 의사이며, 조남주 작가는 시사교양 프로그램 작가 출신이다. 책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내가 구상하는 좋은 세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 이는 아주 일상적으로는 끼니마다 밥 차리는 엄마의 고단함을 남편과 아들이 알아보는 것이고, 음식점이나 경비실에서 일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하는 것이다. 특별한 경우일지 모르지만, 북스포즈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찾는 손님은 여성보다 남성이 2배 많았다. 지난주에도 남성 손님이 이 책 4권을 주문했다. 쉽게 사라지지 않을 김지영이지만 그녀의 삶을 가만히 헤아리는 또 다른 김지영들이 더 많아질 것 같아 마냥 씁쓸하지는 않다. /노유리 북스포즈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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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07 23:02

전시되는 처절함

작년, 청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킴이 활동에서 매사냥을 취재하며, 나는 내 진로를 무형문화재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풀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해 그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었다. 우리가 그 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전칠기장의 공예품을 보며 이 공예품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와닿게 할 수 있을까, 매사냥을 어떻게 하면 사람들어 즐길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하지만 나는 최근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며 나는 내가 무형문화재들을 좋아하고 내 또래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했다. 무형문화재 기예능 보유자 선생님들의 경제적인 문제를 내가 사람들에게 무형문화재를 알림으로써 도움이 되고 싶었다. 최소한 나의 노력이 언젠가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얼마 전, 해녀는 노동자로 분류되지 않아 4대보험에 가입할 수 없으며 그에 따라 민간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다는 글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수많은 무형문화재 기예능 보유자분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옛 기술을 선호하지 않고, 수작업으로 제작되는 공예품의 특성상 그 가격이 비싸지니 많은 이들이 찾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지원되는 금액은 적고 무형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적어 벌 수 있는 돈이 꾸준하지 않다. 그 때문에 생업과 병행하거나, 부부 중 한 사람이 가장이 되거나, 끝내 기예능을 포기하기도 한다. 내게 유형문화재보다 무형문화재가 더 나에게 와닿았던 이유는 그것이 사람에 의해서 현재까지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사람의 손을 타고 말을 타고 전해지는 것이 가슴 벅찼다.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 기예능을 위해 신체를 혹사해야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그저 장인의 아름다움 수준으로 방관한 경우가 많았다.물론 단순 무형문화재 기예능 보유자의 문제만이 아니다. 개인의 노오력이 성공 사례로 자꾸 떠오를 수록, 노오력해서 할 수 없는-제도적인 차별이나 사회문화적인 낙인을 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노오력이 강요된다. 잔인하게도 사람이 처절하게 노력하는 것이 아름다워진다. 그리고 그 처절함이 마치 성공사례처럼 전시되고, 노오력하면 된다는 풍토는 노력할 수 없는 사람들을 나무란다. 처절함은 전시되고,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워진다는 것은 너무도 끔찍했다. 그래서 처절함이 전시되는 것은 결국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면 변화시키기 못했지, 절대로 상황을 낫게 하지 않는다. 또다른 처절함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전시될 뿐이었다. 마치 다 꺾여버린 장인의 손처럼, 육지 위에서 숨을 쉴 수 없는 해녀의 굽은 등처럼.나는 무엇을 해야할까. 이런 문제점을 알아갈 수록 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많이 슬프다. 한 기예능 보유자 선생님께서는 무형문화재를 취재하는 나에게 좋은 일 한다며 나를 다독였었다.하지만 기록하는 일이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관심은 너무나도 잘 끓고, 잘 증발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잔인한 현실에 고민이 멎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접근성을 지니는 3분여 시간 동안 나는 무슨 이야기를 담아내야 하는가. 내가 이 처절함을 전시하는 데에 일조하는 것이 아닌가. 나 역시 오늘도 누군가의 처절함을 아름다워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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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31 23:02

나는 꼰대가 아니야

세상엔 꼰대가 많다. 꼰대란 무엇일까? 사전적의미의 꼰대는 기성세대나 선생을 뜻하는 말에서 비롯된 은어이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꼰대들을 만나왔다.예를들면 중학교때 나의 꿈을 뒤로하고 목표없이 공부만을 강요했던 선생님들과 대학은 무조건 졸업해야된다고 조언하는 어른들이 모두 꼰대이지 싶다.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게되는 청년들이 사회에 나가서 더 많은 꼰대들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수많은 꼰대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한다.앞서 언급했듯이 사전적 의미의 꼰대는 단순히 기성세대나 선생을 뜻하는 은어에 불과했는데 기성세대 어른들이 마치 자기가 나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것처럼 나의 삶을 조언하기 시작했다. 이게 꼰대의 시작이다.이상적인 삶과 현실적인 삶에 대한 갈등에서 비롯되는 나의 고민들은 내가 고민하고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정답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턴가 우리는 타인의 조언과 강요에 의해서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나는 중학교 2학년때 공연기획자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막연히 음악이 좋아서 갖게된 꿈이 지금 나의 삶의 방향의 척도가 되었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내 꿈을 믿었고 나를 믿었다. 그리고 나의 실력을 갖추기위해 끊임없는 고민과 공부를 했다.꼰대들은 대부분 자기의 관점에서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우리는 아직 나의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고 나의 꿈을 꾸기에 충분하다.모두가 원하는 삶은 다를 것이다. 행복이 우선이 되는 삶 , 금전적 여유가 우선이 되는 삶, 관계가 우선이 되는 삶 등. 각자 다른 삶의 목표가있다.나의 삶의 목표를 정하고 주위의 조언에 내 방향을 바꾸는게 아닌 내 방향을 내가 만들어가는 삶이 필요하다.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한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 대한 믿음과 실력이라고 생각한다.내가 하는 이야기를 정답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정답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주체적인 삶 누가 뭐라고 해도 절대 굴하지 않고 나의 실력과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 된다.이런 이야기속에서 하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건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다. 꼰대의 이야기를 듣지않고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라라는 말이 마음의 문을 닫으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나의 이야기를 만드는데 있어서 때로는 배워서 도움이 될 부분은 나의 이야기중 일부로 채우고 더 멋진 그림을 그릴 필요도 있다는 말이다.우리는 더 멋진 어른이 될 수 있다. 나의 방향을 설정하고 함께하려고 할 때 세상을 바뀔것이고 우리는 성장할 것이다. 오늘도 나와같이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이정로 대표는 다부부컴퍼니 총괄프로듀서로 다양한 공연을 기획하고 실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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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24 23:02

미안함에 대하여

송구합니다 작년 국정농단 사태 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청문회에서 계속 중얼거렸던 말이다. 그는 도대체 누구에게 송구한 걸까.죄송합니다 최순실이 귀국 후 첫 검찰 출두 후 흐느끼며 중얼거리던 말인데 누구에게 죄송하다는 건지, 구속 된 이후 특검사무실 앞에서 민주주의 특검이 아니다 라고 취재진을 향해 고성을 지른 걸로 보아 국민에게 죄송한 모양은 아닌 듯 하다.국민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다 탄핵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검찰 출석 때 언급한 단 두 마디의 말이다. 국립국어원에 의하면 이재용부회장과 박근혜 전대통령이 사용한 송구스럽다 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의미와는 약간 거리가 있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죄송하다 미안하다라는 단어를 쓰는 게 맞다고 한다.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며 삶을 지탱하던 시민들이 작년 국정농단 사태를 바라보며 얼마나 상처를 받았고 분노했었던가.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서 (가만히 있으라는 한마디에 우리는 2014년 4월을 어떻게 보내왔던가) 가을을 거쳐 겨울의 추위에 바들바들 떨며 전국의 광장에 나가 마침내 피청구자 박근혜를 파면한다 라는 문장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파면된 전직 대통령은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를 마지막으로 그 뒤 단 한 번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은 억울하고 재판을 끌기 위해 꼼수를 부리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는 요즘이다.미안하다는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운걸까? 개인적으로 힘든 한 해를 보냈다. 같이 작업을 했던 스탭이 제작비를 횡령했던 일이 있었다. 정말 믿었던 사람이라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로감이 몰려 나의 노동에도 지장을 줄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는 단 한 번도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이 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했을 때 그때서야 카카오톡으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던졌다. 물론 그 말은 송구하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당연히 괴로움은 내 몫이었다.사건사고가 빈번한 한국에서 유독 애도의 언어로 빈번하게 사용하는 게 바로 미안하다 라는 단어다. 세월호가 그랬고 강남역 살인사건이 그랬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가 그랬다. 나라는 개인이 가만히 있으라 라며 승객들을 놔두고 도망간 선장도 아니고 골든타임을 놓친 해경이 아님에도 그저 미안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아서 미안함과 분노로 강남역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애도했다.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세상을 떠난 젊은 노동자에게 실질적으로 사죄해야하는 건 열악한 노동조건을 제공한 서울메트로 측이지만 우리는 sns를 통해, 혹은 직접 구의역에 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애도했다.이렇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어렵지 않은데 한 나라를 쥐락펴락 했던 사람들 입에선 이 말 한마디 나오는 게 쉽지가 않은가 보다. 나는 아무리 정권이 바뀌고 제도가 바뀌어도 진짜 변화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잘못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이건 저 위정자들 뿐 아니라,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에도 해당된다고 본다. 미안하다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있는 사회야 말로 좀 더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싶다.폭염으로 노인분들이 힘드실까 걱정이고, 폭우로 농민분들이 밤잠을 설치시진 않을까 고민이 깊은 여름이다.△최진영 감독은 영화 〈반차〉 〈뼈〉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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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17 23:02

나는 쿨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사랑은 가르칠 필요도, 배울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애를 책으로 배웠어요.는 모태 솔로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말이다.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아는 척해야 한다. 쿨하게. 조금 진지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면 으~아직 어리구나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그런데 한 번쯤은 그 쿨함이 무엇이고 왜 쿨해야만 하는지 의문을 가져볼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올 어바웃 러브>의 저자 벨 훅스는 사랑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랑은 저절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낯 간지러움을 잠시 접어두고 찾아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잘 모르기 때문에 찾는 과정은 서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 듣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에게 영감을 받은 정신의학자 스캇 펙은 사랑하려는 의지를 갖고서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진짜 사랑은 시도하고 변화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이자 교감인 것이다. 우선 사랑에 빠졌다라는 표현부터 바꿔야 한다. 빠졌다는 것은 주체적인 선택이 아닌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벨 훅스는 빠진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 사랑하고 있어라거나 나 사랑할 거야라는 교정된 표현을 알려준다. 이렇게 변화는 사소한 부분부터 시작된다. 사용하는 언어를 바꾼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인식의 프레임을 바꾸는 것이다. 말하는 방법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면 행동으로 이행해야한다. 의지를 가지고 사랑을 선택했다면 더더욱. 하지만 생각처럼 쉽진 않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솔직하게 표현하기란 어렵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여주기 싫은 모습까지 꺼내고 싶지 않다. 자존심이 강한 나의 경우 힘듦에 대해 쉽게 말하지 못한다. 상대방에게 나의 불안한 감정을 털어놓는 다는 것이 고통을 전가하는 것은 아닐지 혹은 선입견으로 바라보면 어떡하지 등의 생각이 꼬리를 문다. 결국 언젠가 헤어질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왜 그래야 해, 주말인데 즐거운 이야기만 하자, 세상 사람 다 힘든데 뭐로 생각 매듭이 지어진다. 쿨함을 지키는 대신, 깊이 있는 대화를 잃고 있었다. 솔직하기 말할 수 없다면 둘 상의 관계가 진전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 훅스가 대안으로 제시한 모든 것을 공유하려는 마음자세를 당장 따라 할 자신은 없다. 겁쟁이인 나에게 오히려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은 시도조차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하나씩 이야기해보기로. 아플 땐 아프다고 슬플 땐 슬프다고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 조금은 쿨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쿨하지 않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혜택은 생각보다 크다. 우리는 온전히 감정을 발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아이처럼 엉엉 울 수도 있고 충분히 화낼 수도 있다. 상황에 몰입함으로써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도 있다. 쿨함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지만, 알 듯 말듯한 자존심의 방패를 잠시 내려놓기로 한다. 나의 특정한 면만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조금 더 편안해지고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사랑의 범위가 너와 나에서 나와 나로 넓혀질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노유리 디텍터는 전북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으며 월간샘터 대학생 기자, 헤럴드스포츠 인턴기자 등을 경험했다. /노유리 북스포즈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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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10 23:02

오늘 하루도 현실이었어

서울에서 내려오는 버스 안이면 괜히 우울해졌다. 창 밖으로 막힌 도로를 내다보면서 한숨을 쉬기도 하고, 방금까지 있었던 술자리에서 찍은 셀카를 한참 들여다보기도 했다. 서울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일들이 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서울에 간다. 전주에서 서울으로 올라갈 때면 한없이 기뻤던 기분은 전주로 돌아가며 바닥에 내리꽂혔다.서울에 올라가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내가 가치있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대체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방에 사는 나를 그리워하고 나의 존재를 반가워하기 때문이다. 전주에서 나를 반가워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닌데, 서울에 올라갈 때면 전주에 살고, 지방 대학교에 다니고,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노동자인 권화담이 아닌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를 특별한 존재처럼 여겨주는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유리될 때 울적해졌다. 서울에서 미스핏츠 회의를 하거나, 택견 배틀 매니저로 활동하거나, 무형문화재를 취재하는 일은 모두 전주에서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전주에서의 나는 현실이지만 서울에서의 나는 꿈 속의 존재였다. 그 곳에 있을 때면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 전주로 내려오는 것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전주에서 날 찾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전주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전주에서 충분히 활동할 수 있었고, 친구들도 많았다.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주에서 활동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와 같은 이들도 누군가는 시작하겠거니 생각했던 것을 결국 스스로가 하게된 경우가 많았다. 개중에는 영원히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방은 느리다. 서울에서 어떤 영감을 얻어야만 시작할 수 있는 일들도 있었고, 그 형태를 서울에서 빌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흔히 영남을 보수의 성지로 말하지만 어느 지방이든 변하기가 쉽지 않다. 정치적인 성향을 떠나, 지방은 고정되어있었던 것을 선호한다. 새로운 일을 하기에 나는 서툴었고 고정된 도시는 나에게 나는 하찮다고 말했다. 난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건가. 그런 이유에서인지 나는 항상 서울에 있는 사람들을 동경했고 그리워했다. 동시에 그 사람들과 있으면 즐겁지만 별천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하루는 여전히 이어지지만 기차나 버스를 통해 나의 하루는 거기에서 끊기기 때문이었다. 전주로 돌아가면 나는 서툰 단계에 머물러있었다.하루는 전주로 돌아가는 무궁화호 기차에서 지인과 카톡을 했다.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카톡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지인은 오늘 하루도 현실이었다고 답을 해주었다. 맞다. 오늘도 현실이었지. 내가 전주에 조심히 내려가길 인사하는 사람들도, 전주에서 나와 여러가지 고민을 함께하는 사람들도 있는 현실이었지. 나는 이 곳에서 서툴기도 하고 저 곳에서는 신이 나서 어리광을 피우기도 한다. 내 생업이 존재하는 곳과 조금 멀어 가끔 다른 세상 일 같지만 그렇다고 정말 다른 세상은 아니었다. 두 일은 별개의 일이 아니라 모두 나의 현실이었다. 전주로 내려가는 무궁화호는 덜컹거려 창문에 이마를 기대면 머리를 부딪히기 쉬웠다. 아팠다.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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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03 23:02

새 희망을 향한 청춘협주곡 '아리랑'

아리랑은 한민족의 역사와 같이 한 노래로써 수천 년의 역사와 함께 고려 말 절개를 지킨 두문동의 충신들 중 일부가 정선에 가서 전해졌다고 하는 정선아리랑과 갑오혁명의 아리랑, 일제 강점기와 구한말(舊韓末) 항일독립운동 때의 아리랑 등 전국 곳곳에 수없이 많은 아리랑의 흔적들이 한민족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그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아리랑 중에 하나인 정선아리랑은 625전쟁을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당시 육군의 위문공연에 우리의 민요 정선아리랑과 한오백년이 김옥심과 김란홍 등 인기 가수들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김옥심이 정선 엮음 아라리를 자기 소리에 맞게 바꿔 부른 정선아리랑은 - 정선아리랑은 옛날부터 정선 지역에서 불리던 토속민요(土俗民謠)와 서울 지역에서 불리던 통속민요(通俗民謠)가 다르게 전해진다. 김옥심이 부른 정선아리랑은 정선 지역에서 전해지는 아라리(강원도 지역에서 불리는 향토민요)와는 다른 당시 시대에 맞게 편곡되어진 곡조이다.- 식민지시대의 암담한 삶과 광복 이후 전쟁에 시달린 우리 민족의 울분과 한이 이입되어 설움과 한을 쓸어내리는 카타르시스 작용을 해 급속도로 대중 속으로 파고들며 전쟁 이후 가장 인기를 끈 민요가 되었다.후일담으로 신경림 시인은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은 내게는 노래이기 이전에 내 정서의 깊은 샘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필자는 작품 활동을 해오며 아리랑을 주제 혹은 소재로 쓴 악곡이 유독 많았다. 그것은 우리의 민족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전달 표현이기도 했다.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래의 설계가 또한 역사다. 아리랑이 가지고 있는 포괄적 의미는 아리랑은 이런 것이다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아리랑 그리고 우리 안의 아리랑을 끄집어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리랑을 생각하며 작품을 쓰는 그 순간만큼은 나와 나의 민족이, 나와 우리의 역사가 하나가 되는 소통이 이루어지는 시점이며, 협연자와 오케스트라가 음악으로 빚어내는 화합이 시간의 축적이라는 물리적 행위를 보이는 인내와 고통이기도 하다.이제 우리는 그 화합과 통합의 정의로운 아리랑 시대정신으로 새 희망을 향한 청춘협주곡을 연주해야 한다. 청춘협주곡 아리랑은 국민의 힘으로, 청춘의 힘으로 어둠을 뚫고, 밝음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장르여야만 한다. 그것은 침몰하지 않을 것이고, 이 땅의 청춘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삶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625전쟁이 발발하고 한반도 분단의 역사가 시작된 지 67주년을 맞았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역사적 참극이며 비극이었다. 한민족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었고, 수많은 희생이 따랐으며 가늠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 속에서 국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배고픔에 떨며 전쟁에 대한 공포로 숨죽여 살았다.필자는 칼럼을 집필해오며 청춘의 삶을 전통과 역사에 빗대어 음악이야기를 했지만 분단의 역사는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 아니던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처럼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올바른 역사관과 나라를 지키려다 전쟁터에서 쓰러져간 수많은 호국영령과 순국선열들의 희생을 우리 청춘들은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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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26 23:02

소녀의 상처

외국에서는 살인죄만큼 강하게 처벌되지만, 국내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하며 넘어가는 죄가 있다. 바로 성범죄이다. 나이가 어리다, 우발적이다, 심신미약이다, 잘못을 뉘우친다, 초범이다 등등. 성범죄는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타국에 비해 처벌수위가 약한데다 양형은 기본, 선처까지 해주곤 한다. 적어도 현재의 대한민국은 삼촌이 초등학생 조카를 성폭행하고도 다음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회사를 출근할 수 있는 세상이다.나는 대한민국 여성으로 살면서 감히 털어놓지 못했던 기억들을 지면을 빌려 꺼내보려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다. 오빠와 함께 놀이터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아저씨가 우리에게로 다가오며 살갑게 이야기를 건냈다. 놀이터의 모래와는 어울리지 않는 광나는 구두를 신은 그 남자는 노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그러니 한 번씩 안아보면 안되겠냐고 물었다. 크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금세 오빠를 한 번 업어보고는 나를 안으려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내 치마를 걷고 팬티 속으로 손을 쑥 집어 넣는게 아닌가. 그렇게 들려진 나는 그 당혹감과 불쾌감을 그저 작은 외마디 비명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작은 아이였다. 오빠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순식간의 일이었다. 목표를 이룬 그 남자는 유유히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그 후로 나는 누구에게 말도 못한 채 긴 시간동안 불쾌한 마음의 통증을 안고 지내야만 했다. 처음 느껴보는 충격적인 기분이었다.그땐 몰랐다. 점점 더 이런 고통스러운 일들을 자주 겪게 될 것임을. 고등학교 때 노래방으로 불러내 성폭행 하려 했던 선배 자식. 믿고 따르던 선생님이 내가 성인이 된 후에 보인 성추행적 발언과 행동들. 3년 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가 내가 화장실 간 사이 내 술잔에 약을 타던 모습. 그림을 가르쳐 준다며 본인 작업실로 불러들여 예술영화랍시고 포르노를 틀고 마사지를 알려주겠다며 내 다리사이로 손을 밀어 넣던 작자.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더 클 수밖에 없는 고통이고 상처였다.그 외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당했던 성추행, 성희롱들을 나열하자면 모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더 가슴 아픈 것은 대부분의 가해자들이 사건 전후로 너무나도 뻔뻔하게,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태연하다는 것이다. 사과는 커녕 되레 나에게로 화살을 돌릴 때도 있었다. 잘못된 행동이라는 인식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조차도 성범죄를 마치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생각하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가벼운 마음일지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가해자 대부분의 성별인 남성이 여성과 마찬가지로 성범죄에 노출되어있는 피해자 입장이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리 가볍게 여기지 못할 테니 말이다.나의 이러한 상처들은 그럴 수도 있지하며 지나가려는 사회 속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나는 인천의 작은 놀이터에서 초등학생이던 내 팬티에 손을 넣던 남자를 기억한다. 성범죄는 나 같이 인천에서 별 볼일 없던 여자애에게도 너무 쉽게 일어나는 것들이었다.지금의 대한민국은 뿌리 깊게 박혀있는 잘못된 성 평등 인식으로 145개국 중에 양성평등 수준 115위를 차지할 만큼 수준이 굉장히 낮다. 이젠 그럴 수도 있지 대신에 그러면 안 된다고 분명하게 못을 박자.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정의가 흔들린다면, 놀이터에서 작은 칼을 마주해야 했던 아이들이 흘린 피는 무관심속에 계속 흘러야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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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19 23:02

비수기를 보내는 법

직업 중에 성수기와 비수기가 있는 직업들이 있다. 일반 직장인이나 공무원 같은 1년 내내 규칙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이 아닌 특정 분야에서 사업이나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직업의 경우는 명확하게 성수기와 비수기가 있다. 운동선수에게는 시즌과 비시즌이 있고, 학교와 관련된 직업에는 학기와 방학이 있듯이 말이다. 이것도 모두 큰 의미로 보면 성수기와 비수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비수기란 사전적 의미로 상품이나 서비스의 수요가 많지 아니한 시기이다. 쉽게 말해 해야 할 일이 적고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말 할 수 있다.필자 또한 이벤트 MC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성수기와 비수기가 아주 명확한 직업 중에 하나다. 행사가 있어야 MC의 수요가 있으므로 행사가 많이 있는 날씨가 야외 활동하기 좋고 학교들이 학기 중인 봄과 가을이 성수기이고, 반대로 야외활동이 어렵고 학교가 방학 중인 여름과 겨울은 상대적으로 행사가 적은 비수기이다. 사실 바쁠 성수기에는 다른 생각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행사 문의를 받고, 행사 미팅을 하고, 행사 준비를 하고, 행사 진행을 하고, 행사 서류 처리를 하며 정신없이 보낸다. 하지만 비수기에는 홍보를 위한 블로그 작업, 장비 관리 말고는 고정적으로 해야 할 일이 없는 게 사실이다. 이렇다 보니 사실 비수기에는 굉장히 느슨해지고 나태해지기 좋은 환경이다.하지만 필자는 비수기를 다르게 보내고자 한다. 이 비수기가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최고의 기간이고 남들과 차이를 낼 수 있는 기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성수기에는 남들과 크게 다를 수 없다. 왜? 다른 업체, 다른 사람도 동일하게 일하느라 바쁘고, 나 또한 일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수기는 쉬고 멈춰있으면 0이지만 비수기의 나를 성장시키면 100만큼을 이룰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수기의 기간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이 든다.하지만 이벤트MC의 특성상 거의 대부분 혼자 운영하거나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 보니 혼자서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이상 그 어디서도 터치를 받지 않는다. 이 부분이 굉장히 애로사항이기도 하다. 그래서 필자는 일부러 비수기에는 다른 노력보다 가장 먼저 하는 노력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성수기에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 후배들, 선배들을 만나며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 요즘 생각하는 이야기들을 공유하며 내가 해야 될 일을 찾고, 또 요즘 사회 돌아가는 상황도 파악한다. 나에게는 멈춰있지 않고 무언가를 하고 싶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렇게 사람들과 만나서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본격적으로 그것에 대한 구상을 하고 할 사람들을 찾아 나서 움직이다 보면 크게 무언가를 이루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움직임 속에서 나도 모르게 조금 성장해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또 한 마지막으로 필자가 하는 방법은 억지로라도 나를 어느 단체든 모임이든 소속을 시켜 놓는 것이다. 소속되면 억지로라도 그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참석하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생각의 폭도 넓히고 인맥도 넓히는 방법으로 사용 중이다.학생도 방학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수준이 확 달라진다. 운동선수도 비시즌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시즌 활약도가 달라진다. 우리는 성수기를 잘 보내기 위한 준비과정 그리고 나를 성장시키는 기간으로 비수기를 활용한다면 비수기가 지루하고 할 것 없는 기간이 아닌 더욱 기대되는 최고의 시간들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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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12 23:02

잘 할 수 있는 사람

휴학을 한 지 일 년 반이 지났다. 처음 휴학을 할 당시에는 여러가지 계획을 세우고 분명 내가 세운 그 계획들에 맞춰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잘 해왔고,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세운 계획들 중 대다수는 빛을 보지 못했다. 탈락했거나, 불합격했거나. 물론 휴학을 한 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단 일이 안됐다는 것 자체도 내가 경험한 일이었고 내 계획과 다르게 진행된 일도 있었다. 하지만 휴학을 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들: 너는 휴학을 좀 하고 쉬어야 해, 넌 잘 해왔으니까 앞으로도 잘 할거야 그리고 네가 앞으로도 그렇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사이에서 많은 것들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어쨌든 그동안 해왔던 일들이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마무리되었다. 나에겐 새로운 상황이 다가왔다. 복학할 것이고, 새로운 거주공간을 마련했다. 프로젝트들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학교에 적응하기 위해 준비를 해두어야 하고,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러 나는 다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전과 다르게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전처럼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계속 실패만 거듭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잘 해야 하는데., 내가 잘 해온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하는데. 복잡한 생각들이 가득했다. 예전이라면-휴학을 하기 전이라면- 이까짓 게! 라며 쉽게 털고 일어났을 것만 같았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고, 이유를 찾고 싶었지만 큰 이유가 없을 것만 같았다. 사실 없다. 너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가수 유미의 노래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뮤직비디오에서 유명해진 배우 정우성의 대사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은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다. 나의 탓이다.잘할 수 있다와 잘 해야한다는 분명 다르다. 나에게 와닿는 정도도 다르고 애초에 문법적인 뜻도 다르다. 휴학을 하고 내가 잘해왔던 일들이 서툰 일이 되자 상당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잘 할 수 있다라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일들에 나는 잘 해야한다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가족들이 내 휴학을 반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에 대한 신뢰이기도 했다. 나는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렇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잘 해야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하게 되고 누군가에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잘 해야한다고 계속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이것이 내가 잘하는 일은 아니니까. 잘한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지치지 않고 해낸다는 것, 내가 노력을 쏟은 만큼 결과를 낸다는 것. 너무 매달렸던 탓일까 내 목을 매단 것 같았다. 쉬면서 새로운 일을 해보고자 휴학을 한 내가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했던 것은 나의 탓이었다.이제 다시 복학을 할 것이다. 새로운 일자리도 구할 것이다. 새로운 일들을 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까? 여전히 걱정이 많이 들고 누군가가 나에게 손가락질을 할 것 같아 두렵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말해준 대로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나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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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05 23:02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그 꽃이 아름답고 그 열매 성하도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아니하므로 흘러서 내를 이루어 바다에 가느니’ 1449년(세종 31년)에 간행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2장에 전하는 내용으로 뿌리가 깊은 나무와 샘물이라는 자연물이 아무리 센 바람과 가뭄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찬란히 꽃을 피우며 시내를 이루는 강한 생명력처럼 조선 역시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이어진 전통이 깊은 나라라는 것이다. 조선이라는 나무가 태어나고 성장하기까지 여러 선조들의 뿌리가 있었고 그 좋고 튼튼한 뿌리를 기반으로 나라가 흔들리지 않으므로 꽃과 열매가 성하다는 의미로써 조선 왕조의 영원한 발전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튼튼한 국가의 기반과 문화가 융성해 그 결실이 풍부함을 상징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청년 일자리·창업적 문화 지원 시급그러나 우리가 바라보는 현 사회는 어떠한가. 이제야 좋은 모종을 땅에 심어 뿌리가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다듬는 상황으로 새 정부는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가 산더미일 것이다. 그 중 가장 첫 번째가 청년의 일자리창출 및 창업적인 문화지원이 가장 시급한 현안이 되어야 한다. 우리 세대는 새로운 직업 뿐 아니라 새로운 목적을 찾아 개혁을 해야 하는 세대이다. 과거에 존재하던 직장의 개념은 포화상태이며, 고여 있을 뿐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긴 어렵다. 각 분야마다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고 사업화하여 이를 통해 새로운 직업을 창출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타 분야와는 달리 특히 예술 계통의 학문으로 진학하는 전공자들은 나름의 목적의식을 갖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예술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하지만 현 사회 구조가 이를 모두 수용할 수도 없을 뿐더러 우리 세대는 우리가 갈고 닦은 다양한 능력을 통해 새롭고 다양한 문화를 개발·개혁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개개인 및 단체의 노력을 정부는 충분히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한다. 이것은 우리 세대가 원하던 진정한 행복을 위한 열쇠이자 사회를 진보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청년과 장년 및 노년이 분리되어 있는 세상이 아닌 모두가 함께 갈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이것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바로 문화다. 문화는 한쪽으로 편향된 문화가 아니라 다양성을 갖춘 제대로 된 ‘진짜 문화’로 거듭나야만 한다. 예향의 고장 전라북도와 문화선진도시 전주시는 이러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개발해 우리 지역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벤치마킹하고 싶어 하는 ‘진짜 문화’ 도시로 우뚝 서야만 한다. 정부·지방자치단체, 청춘들 지원을뿌리 깊은 나무는 바로 청년 시절 마음속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순수함과 열정이 아닌가. 그 목적의식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단발성으로 지켜만 줄 것이 아니라, 뜨거운 열정이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충분한 재정적 지원과 체계적인 정책을 통해 이 땅의 청춘들이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해야 마땅하다. 필자는 상반기 청춘예찬 칼럼을 집필하며 ‘개인’을 이루는 가장 극명한 시기인 ‘청춘’에 대한 나름의 주장을 펼쳐왔다. 변화의 시작은 작은 곳에서 이뤄지며, 튼튼한 뿌리를 내려 어떠한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 땅 청춘들의 밝은 미래를 위해 앞으로도 지역사회의 든든한 청춘 예찬론자로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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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29 23:02

쥐며느리의 노력

2015년 언제인지 모를 어느 날, 점점 몸이 약해지시는 엄마와 번듯한 직장도, 결혼생활도 않고 있는 자식들과 아직 어린 손녀까지 있는 집에서 오랜 시간 다니던 직장으로 마지막 출근을 하러 나서시던 아빠의 가슴을 억누르는 책임과 압박의 무게는 과연 내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예술가의 차가운 현실과 비슷한 모습 ‘예술가 신은미’라는 여섯 글자와 ‘돈’과는 놀랍도록 아무 상관이 없었다. 부끄럽지만 서른까지 나는 대학의 감투를 써오다 이제 막 예술가인척 하려던 당신의 백수 딸이었다. 나의 화려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 한결 한결에는 당신의 깊은 주름들이 패여 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부모님의 품을 떠나 전주까지 홀로 뛰쳐나온 이유다. 예술가라는 잡기 힘든 꿈도 꿈이지만, 이제는 당신에게 고생의 주름보다 웃음의 주름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그렇게 뛰쳐나온 처음 만난 예술가의 현실은 차가웠다. 사람들은 내가 그린 그림을 살 때 만 원 짜리 한 장도 쉽게 쓰는 일이 없었다. 월세는 무서웠고, 만만하게 시작했던 현실 예술가의 길은 통장 잔고가 계속 0을 향해 달려가는 느낌이었다. 다 포기해버리고 싶던 어느 날 밤에 나는 마감을 하려던 나의 가게에서 작은 쥐며느리가 뒤집혀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뭇 분위기가 심각하다. 어쩌다가 몸이 뒤집어진 건지 아등바등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얼른 휴지로 감싸서 버렸겠지만, 이번에는 자세하게 보고 싶어졌다. 꼭 전주 한복판에서 아등바등 하는 나의 모습 같았다. 온몸에 돋아있는 수많은 다리들과 더듬이가 그대로 드러난 채 발버둥치는 움직임이 신박하기까지 했다. 몸을 둥글게 움츠렸다 피는 반동을 이용해보기도 하고 한쪽 다리들만 움직여서 몸의 중심을 옮겨 보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정신없이 움직이다 지쳤는지 이따금씩 미동이 없어질 때도 있다. 그러다가도 금방 다시 그 움직임들을 반복한다. 한낱 미물이라고 생각했던, 생각이란 것을 하지 않을 것 같은 그 작은 생명체가 살기위해 꽤 현명하게 몸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수 분 동안 보고 있노라니 성공할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에는 내입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고 어느 순간 진심으로 그 쥐며느리의 뒤집기를 응원하고 있었다. 쉼 없이 노력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져 결국 내 작은 힘을 보태기로 한다. 나에게는 힘이라고 표현하기도 민망한 정도의 손가락 움직임이었지만 그로인해 그 쥐며느리는 생명을 되찾았다. 자유를 얻은 쥐며느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열심히 기어 내 손 옆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마치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듯이. 불과 몇 분 전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그 손이다. 나는 조심스레 종이로 그 녀석을 들어 올려 문밖의 편평한 땅위에 내려주었다. 징그러운 벌레에 불과했던 그 쥐며느리는 나에게 작은 응원가를 보내주고 있었다.할 수 있는데까지 혼자 힘으로 노력을누구든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있다. 그럴 때 금방 포기하고 남에게 쉽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할 수 있는데 까지 혼자 힘으로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전자와 후자 중 누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지, 그로인해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는 과연 그렇게 행동하며 살아왔나. 가장 하찮게 여기던 그 벌레 한마리가 준 감동을 나는 과연 다른 사람이 느끼도록 행동했던 적이 얼마나 있을까.자립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경제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는 캥거루족, 유사시 부모의 방어막 속에 숨어버리는 자라족, 그리고 일할 의지조차 없는 니트족이 매년 늘어가고 있다. 정부제도의 문제를 당당히 외칠 수 있을만큼, 앞서 그대는 노력으로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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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22 23:02

관계속의 오해들

사회생활을 할수록 다양한 활동을 하는 사람일수록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또 그 속에서 많은 오해들로 어려움을 겪는다. 처음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맺을 때는 좋은 감정, 좋은 관계, 좋은 인연을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처럼 그 관계가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관계를 맺고 같이 지내다 보면 사사로운 오해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의 의도는 그렇지 않은데 상대가 잘 못 이해해서 생기는 오해, 나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잘못 전달되어 생기는 오해, 각자의 시선에서 상대를 바라보면서 생기는 오해 등 다양한 이유로 생기는 오해들로 인해 결국 관계가 끊어지거나 최악에는 적이 되는 경우도 너무 많다. 사회생활서 대화하고 관계 맺기 중요그러면 이러한 오해들로 생긴 서로의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 하면 개선해 나갈 수 있을까? 사실 대부분 오해를 풀려고 시도하는 것은 대화이다. 하지만 대화를 하다가 오히려 오해가 더 커져 불신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러한 경우는 오해를 풀 준비가 되지 않은 채 대화를 시도하면 그런 경우가 다반사 인 것 같다. 오해를 풀러 가기 전에는 먼저 확실한 준비가 필요하다. 바로 상대방의 배려, 상대방의 입장 등을 고려하며 서로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하지, 잘잘못을 따지고, 시비를 가리려는 마음은 오히려 오해를 더 키우는 경우가 많다. 사실 우리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관계를 맺어가는 사회에서 어떻게 다 좋은 관계로만 지낼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 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 오해를 잘 풀 수 있는 마음, 그리고 더 나아가 관계를 잘 지속하는 능력이 있어야 사회생활에서 더 나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많은 사람들과 어우러져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이제는 오해를 풀고 대화를 하고 관계를 맺는 것 또한 사회생활에서 너무나 중요한 스펙이고 능력이다. 이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주변 사람들과의 트러블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관계속의 스트레스로 인해 힘들고 지친 삶을 살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상담을 받고 스트레스를 받는 요인을 찾아보면 인간관계가 빠지지 않는 항목으로 나온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것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관계의 어려움의 요인은 다양하게 있을 것이다. 성격의 문제, 의사소통의 문제 등 하지만 필자는 그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문제 해결능력 이라고 본다. 보통 서로의 부딪힘이 생기는 이유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고 본다. 그러니 그 오해를 풀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면 훨씬 더 원활한 관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상대방 배려하고 입장 존중해줘야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관계를 맺을 때는 우리 모두 긍정적인 목적, 이상적인 관계를 위해서 관계를 맺는 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는 입장차이, 시선의 차이로 인해 반드시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입장을 존중해주며 대화를 통해서 오해를 푼다며 반드시 아무리 큰 오해도 다시 화합하며 좋은 관계를 지속할 수 있으며 오히려 그 오해를 푸는 시간을 통해서 서로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끈끈해질 것이라고 본다. 관계를 맺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오해가 너무 많은 요즘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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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15 23:02

우리는 언제나 나쁜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전래동화에서부터 디즈니 명작 동화까지도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말을 한다. 나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을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숱한 어른들은 나쁜 사람에 대한 경각심을 항상 주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에서 나쁜 사람은 특정한 행위를 한다. 보통은 누군가에게 위협을 끼치거나 누군가의 일을 방해하는 등, 특정한 상대에게 물리적으로, 직접적으로 나쁜 일을 한다. 남매의 어머니를 잡아 먹고 둘을 나무 꼭대기까지 몰았던 호랑이, 백설공주에게 독이 든 사과를 주었던 계모. 우리는 누군가에게 직접 위협을 가하는 것이 나쁜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살면서 나는 나쁜 사람이 되었다. 나쁜 짓을 하지 않았지만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어른들은 알려주지 않았다.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나쁜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나쁜 사람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누군가는 내가 왜 나쁜 사람이냐고 되레 화를 내곤 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나쁜 행동을 한 사람보다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평범한 사람에게 더 화가 나곤 했다. 나는 저런 사람과 달라라는 외침이 나쁜 행동을 한 사람이 아닌, 당신도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이나 나쁜 행동을 당한 사람에게 향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의미 없는 행위이다.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지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우리가 배웠던 나쁜 행동들은 생각보다 간단하고 구체적이었다. 때리지 말 것, 겁을 주지 말 것, 독이 든 사과를 주지 말 것. 우리는 일련의 행동들을 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리고 나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좋은 사람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좋은 사람인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면 백설공주의 계모가 백설공주에게 독사과를 주겠다고 마음 먹은 동안 말리지 않은 거울 같은 것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독사과를 앞에 둔 수많은 거울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혹은 당신이었다. 우리는 독사과를 먹을 일이 없으니 쉽게 말했다. 거울은 백설공주를 직접 해치지도 겁을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과연 거울은 좋은 역할일까? 글쎄.억울함을 넘어서나는 억울하곤 했다. 너는 나쁜 사람이야라는 말은 칭찬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모욕에 가까운 말이다. 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도 나쁜 행동이었다. 내가 피해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저 일은 내 일이 아니야라고 말한 후에 따라오는 것은 억울함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이어야했다. 내 일이 아닌 일에 눈 감을 수 있다는 것, 나쁜 행동에 피해를 받는 사람들의 울음에 창문을 닫고 다시 곤히 잠들 수 있는 당신의 밤을 누군가가 뼈저리게 부러워한다는 것. 나의 억울함조차 누군가가 부러워할 수 있다는 것도 공감이 되지 않는다면 우린 이제 인정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언제나 나쁜 사람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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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08 23:02

우리가 원하는 우리나라

다시 5월이다. 하지만 여느 때와는 다른 역사적인 5월이 될 것이고, 모든 국민이 염원하듯 정의로운 시대, 진정한 통합의 시대를 맞이하는 대한민국이 우리들 눈앞에 기다리고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지만 직장과 가정을 오가며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비정규직이 난무하고, 고시원과 알바를 전전하는 청춘들에겐 더 이상의 꿈조차 꿀 수 없는 지금은 헬조선이라 일컫는 나라가 아니던가.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은 여섯 명의 대통령을 선출했고, 두 번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되짚어보면 혼란스러웠던 정부와 국회를 바라보며 겉으로는 정경유착을 뿌리 뽑겠다는 강한 슬로건을 내걸지만 속으로는 억약부강(抑弱扶强)의 모습으로 언제나 약자의 편이 아니라 기득권 편이었음을 우리 국민은 지난 세월을 통해 충분히 경험해왔다.청춘들에겐 꿈조차 꿀 수 없는 헬조선현재 우리나라 문화예술 정책은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예술위원회가 주도하는 중앙 중심적 구조이다. 그에 대한 제도적인 구체적 실행방안도 없는 터라 문화예술의 재정은 타 분야에 비해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하물며 블랙리스트라는 명목 하에 예술인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고 문화예술의 가치를 저해하며 법적 책임까지 지고 있는 정권이 사과문을 발표하는 정도로 셀프 사면을 하고, 현 정권이 저지른 잘못과 관련한 블랙리스트 방지법 입법을 자신들이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급박한 현 시점에서 왜 이러는 것일까.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다음 정권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반드시 차기정부에서는 블랙리스트 방지법 입법과 문화예술 관련법을 더욱 세밀하게 정비하고 보완하여 지원사업의 공정성을 강화시키고, 위법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또한 예술지원사업 및 예술인 육성에 대한 체계적인 정책을 수립하여 사후지원까지 확충될 수 있는 지속사업이 유연하면서도 복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평생 1회 밖에 지원이 되지 않는 신진예술인 대상의 예술지원금을 고려한다면 무조건적인 지원이 필요하며, 평가는 그 후의 몫이다. 전문 예술인 양성지원을 위한 예술대학에 대한 국가 지원이 강화되어야 할 것이며, 전라북도처럼 문화예술에 대해 유구한 역사와 애착심이 강한 지역의 경우 지역대학의 선제적 구조 개혁에 전통분야를 단지 상업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전문 예술인 양성지원을 위한 예술대학에 지원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졸업 후 예술 활동을 장려하는 정책이 지속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차기정부 또한 문화예술의 가치를 저해한다는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공정한 사회로 청춘에게 희망 주어야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를 쓴 대한민국은 국민의 힘으로 어둠을 뚫고, 밝음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것을 촛불역사가 다시금 보여주었고, 이것이야말로 억강부약(抑强扶弱)의 휴머니즘을 우리 스스로 실천에 옮긴 것이 아니던가. 이제 5월이 지나고 나면 우리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다시 그려본다. 공정한 사회로 이 땅의 청춘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는 정부, 정경유착과 불공정을 뿌리 뽑는 재벌개혁, 걱정 없는 복지사회, 국가의 역사를 상징하며 국가가 보장하는 전통과 문화예술이 살아 숨 쉬는 사회,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 그리고 통일의 문을 열어줄 정부가 들어서길 국민 모두가 가슴 깊이 염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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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01 23:02

전화하는 날

전주에서 서울까지의 거리 KTX로 약 1시간 30분. 집인 인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 또한 약 1시간 30분이 걸린다. 대학 진학 후부터 서른이 넘어서까지 거의 매일같이 인천에서 서울, 왕복 3시간씩을 오갔던 나다. 그런 나였기에 전주에 내려올 때만 하더라도 인천 그까짓 거 하며 자주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거의 두 달에 한 번씩 가는 수준이라니. 며칠 전 역시나 두 달 만에 집에 올라갔다. 연락도 없이 갑작스레 올라와놓고 엄마 얼굴 보자마자 맛있는 거 해달라는 철없는 딸내미의 주문에 엄마는 분주하게 장을 봐 오신다. 고작 2박 3일 머무는데 장을 두 번 보신다. 두 번째 장바구니는 고스란히 딸내미 챙겨 보낼 찬거리가 된다.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엄마의 마음무겁다고, 과일은 가서 사먹어도 된다며 챙기지 마시라는 말에도 이게 달고 맛있다며 한보따리 가득 우겨넣으신다. 이따 전주에 내려가면 비가 올 거라며 우산까지 내미시는데 그놈의 우산 챙기기는 어쩜 이리도 항상 귀찮은 건지. 마다하는 걸 엘레베이터 앞까지 나오셔서 챙겨가라는 통에 하릴없이 받아오며 투덜거린다. 그렇게 전주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순간 싫은 소리 들어도 내 새끼 비 맞게 하기 싫은 어미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툭 가라앉는다. 유리창에 새겨지는 빗자국과 함께 내 볼에 눈물길이 생기고 있었다. 난 여느 딸내미들처럼 애교 많고 살가운 딸이 아니었다. 오히려 말수 적고 혼자 있기 좋아하는 무뚝뚝한 편이었다. 매번 어떤 주제로 대화를 시작 하던지 간에 끝은 항상 비슷한 엄마의 잔소리로 마무리 되는 것이 싫었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층 한층 벽을 쌓아갔고 그 벽으로 인해 끝없는 대립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난 그렇게 일정부분이 결핍된 채로 성장했고 그 결핍은 지금까지도 부모님에게 자주 연락드리는 것조차 익숙지 않은 나를 만들었다. 마냥 듣기 싫었던 엄마의 잔소리가 당신만의 대화 방식이란 걸 이제는 안다. 엄마 또한 나의 그것과 닮은 결핍으로 인해 굳어진 연약한 사람이었으리라. 하나라도 더 챙겨 보내려는 어미의 몸짓으로 이미 나에게 따뜻한 대화를 건네고 계셨다.항상 한결같이 나를 보듬어주시는 아빠. 말없이 내려오고 나면 저녁쯤 치킨 사왔는데 벌써 갔냐며 전화해서 아쉬워하시는, 언제나 나에게 그늘을 제공해주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와 같은 존재. 전주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이 힘들면 그냥 정리하고 올라오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제 일하며 잘 버티고 있는 딸이 대견해 허허 웃어 보이시는 당신. 무심한 딸보다 항상 먼저 전화하시어 자주 연락 달라고 말씀하시는 그 음성이 애틋해 고운 손수건에 고이 담아 심장 가까운 곳에 보관해놓고 당신 그리울 때마다 꺼내 보곤 한다.부모님을 보며 더 잘 되겠다고 다짐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가 생기면 내 새끼 때문에 더 힘을 내서 일을 하고 생활을 하게 된다지만 나는 부모님을 보며 내가 더 잘 돼야겠다고 다짐한다. 처음으로 나의 이야기가 실린 기사와 방송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으시던 그 모습이 나의 마음을 움직이고, 처음으로 나를 믿고 응원해주신 그 모습이 나의 몸을 움직이게 한다. 아마 지방에 홀로 떨어져 생활 해보지 않았다면 쉽게 알지 못했을 감정이었으리라. 아직도 녹록치 않은 전주생활이지만 지금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이렇게 이야기해본다. 엄마가 싸준 반찬이 맛있어서 힘이 나서 그런지 오늘 일도 잘 풀릴 것 같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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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24 23:02

청년 둘이 만든 벚꽃축제

필자는 MC로 활동하면서 청년들과 문화 예술 활동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실 축제라는 것을 많이 보고 경험했다. 사람이 모이고 그곳에 다양한 콘텐츠 가 결합하면서 하나의 축제가 완성이 된다. 요즘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축제가 존재한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을 콘텐츠로 한 축제들, 공간을 콘텐츠로 한 축제들, 학교나 단체가 주최가 되어서 하는 축제 등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장소시스템 섭외 등 모든 것 처리하나의 축제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기획 단계부터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어간다. 그래서 대부분 기관이나 단체들에 의해서 축제가 기획되고 진행이 된다. 사실 개인이 축제를 연다는 것은 어려움이 많은 부분이 한 둘이 아니다. 가장 크게 부딪히는 부분은 비용부분일 것이다. 축제를 열기 위해서는 시스템, 인력, 홍보 등 다양한 부분에서 비용이 발생되고 그 비용도 축제의 규모에 따라 매우 상이하겠지만 적은 비용이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용이 많이 들어가야만 축제가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비용을 들여 만든 축제도 사람이 하나 없어 흥행하지 못하는 축제도 볼 수 있다. 실패 요인에는 굉장히 다양한 것들이 있기에 이것들을 다 맞춰야 성공을 할 수 있으니 어떻게 보면 참으로 어려운 것이 축제의 흥행이 아닌가 싶다. 야외에서 진행되는 축제라면 날씨도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장소, 접근성, 인지도, 일자, 시간, 콘텐츠, 홍보채널 등 신경 쓸 것이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니다.필자는 이러한 어려움이 많은 축제를 청년문화기획자 겸 MC 한 분과 함께 봄의 벚꽃축제를 기획하고 진행하게 되었다. 사실 고민이 많았다. 처음 시작은 축제를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원 벚꽃야간개장 행사에 맞춰서 간단한 이벤트나 버스킹 공연을 생각하던 중에 동물원이 AI확산으로 인해 휴장을 하게 되면서 봄에 가장 좋은 콘텐츠 중에 하나인 벚꽃을 보러 갈 곳이 없다는 안타까움에 아! 우리가 한번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벚꽃축제를 만들어보자라고 생각하고 급하게 축제를 기획하고 준비하게 되었다.장소 섭외, 시스템 섭외, 푸드 트럭 섭외, 주류업체섭외, 프리마켓 팀 섭외, 자리배치, 무대행사 팀 섭외, 스태프 섭외, 홍보물 제작, 홍보, 사전예약관리 등등 작은 것부터 큰 것 까지 청년문화기획자 2명이서 준비해나갔다. 사실 사비로 준비하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도 많이 하고 도움도 많이 받으며 준비해나갔다.경험에서 온 깨우침 매우 커그렇게 축제 당일이 오고 주차문제로 조금 난항을 겪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잘 해결이 되었다. 이제 축제를 시작하려고 하니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열심히 준비한 축제가 철수 위기까지 가게 된 것이다. 정말 머리가 하얘지고, 답답했다. 하지만 상황 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기존 준비한 축제의 시간보다 훨씬 단축된 시간에 축제를 진행하게 되었다. 수많은 노력으로 수많은 사람과 함께 준비한 축제였지만 장소 협의 문제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니 난항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많은 걸 깨우치게 한 축제였다. 정말 어렵게 준비하면서 귀한 사람을 얻었고, 축제 준비하고 기획하는데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경험을 통해 몸소 배우니 아쉬움도 남았지만 너무 귀하고 값진 시간 이였다. 경험에서 오는 깨우침은 너무나 큰 것 같다. 청춘이니깐 가능한 배움의 방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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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1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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