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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쁜 야나가와

제주도 보다 아래쪽에 있는 일본 규슈 지역의 야나가와에는 벌써부터 여름이 시작된것 같다. 오후만 되면 해가 쨍하고 밤에는 벌레들이 노래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꽃샘 추위는 이곳을 빼먹고 지나가 버렸나 보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별별 꽃나무들이 만개한 모습은 정말 보기 아릅답다. 야나가와는 아직까지 시골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동네라서 곳곳에 작은 숲과 밭이 많다. 주말이면 느지막하게 일어나 동네를 구경하는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오래 다녀도 온 지 얼마 안되어서 그런지 질리지가 않는다. 야나가와로 들어올때 거쳤던 도시들과 이렇게 다를 수 있나 싶다. 저번 글에 언급했던 사람들의 무심함이 여기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아, 정말 평화로운 곳이다. 사람들도 동네를 닮는다고 했던가. 동네처럼 주민들도, 학교 친구들도 하나같이 순박하다. 전주에서, 또 미국에서 살았을 때 아침마다 모르는 사람들과 정겹게 아침 인사를 나눈 기억이 없다. 여기서는 아침 인사를 하지 않는 사람이 더 이상하게 보인다. 나도 이제는 익숙해져 아직은 서투른 일본어로 인사를 한다. 학교 앞의 편의점 아주머니랑도 친근하게 인사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학생들이 자주 가는 곳이라 아주머니께서는 학생들 이름을 다 외우신다! 학교 분위기도 느긋해서 전혀 경쟁이 없다.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 갈 때면 운동부 선수들의 힘찬 훈련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모든 게 부드럽고 느긋한 기분이다. 최근에는 한 친구가 반 아이들 모두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나보다 먼저 유학온 친구가 일본인들은 예의를 엄청나게 지킨다기에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여기 사람들은 쉬이 마음을 열지 않는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다가가야 한다. 이번 기회에 갔다가 실수하면 어쩌나 하고 마음을 졸였다. 가기 전날 예의바르게 말하는 방법까지 공부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친구의 아버지는 무척이나 재미있는 분이셨고, 초대받은 아이들을 직접 차로 데려다 주셨다. 야나가와 외각에 위치해 있는 집은, 정말 시골같은 분위기였다. 집 안으로 들어선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정말 전통적인 일식 다다미 방에는, 긴테이블 가득히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친구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주방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셨다. 정말 놀랐다. 친구들이 온다고 무슨 뷔페에 온 것처럼 점심을 차려주시다니. 국제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은 모두 즐겁게 어울리며 근사한 점심을 먹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뭐 또 그러면 어떤가. 손짓 발짓 모두 섞어가며 대화 하는것도 나름대로 즐겁다. 주 요리는 우리나라의 김밥 처럼 삼각형 모양의 김 위에다 밥을 올리고, 마음에 드는 재료를 골라 먹는 것이었다. 비슷하지만 또 다른 맛이 있어 흥미로웠다. 친구의 어머니께서는 식사가 끝난 후 향 좋은 홍차까지 직접 우려내어 대접해 주셨다. 너무 잘 대해주셔서 나중에는 죄송한 마음까지 들었다. 모두들 배가 부르자 밖에 나가 열심히 뛰어 놀았다. 친구네 집에 놀러가서 휴대전화만 만지작 거리고, 같이 텔레비젼을 보는 것 말고 땀을 흘리며 열심히 논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다시 초등학생이 된 듯한 하루를 보냈다. 확실히 일본이라고 다 이런 것도 아니고, 더 큰 도시로 나가면 분위기가 다르겠지만, 이곳 야나가와는 참 예쁜 동네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앞으로 이곳에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할 생각을 하니 기대가 된다. 한번쯤은 여기 느긋한 곳으로 여행을 와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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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14 23:02

당신은 어떤 색을 띠고 있습니까

영상을 만드는 감독으로서 포기할 수 없는 작품철학이 몇 가지 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대규모의 작품이 아니라면, 배우를 섭외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 첫 걸음이다. 나는 배우에게 필요 이상의 변신을 요구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그 어색한 느낌에 예민한 때문이고, 카메라가 꺼지면 바뀌는 모습이 아직까지도 어색하게 느껴지는 때문이다.그래서 항상 등장인물과 최대한 같은 분위기가 흐르는 사람, 혹은 성격이나 버릇 등 겹치는 부분이 가장 많은 사람을 배우로 섭외한다. 꼭 연기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평소라면 카메라 뒤에 있어야 할 스태프들을 무대에 세운 적도 적지 않다. 이렇게 직업과 지위를 막론하고 나의 프레임 안에 담긴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대부분은 영화의 캐릭터처럼 참 개성있고 한결같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들에 대해 물으면 ‘아, 그 친구는 이런 친구야’라는 대답이 서스럼없이 나온다. 게다가 어딜 가서 물어봐도 그 대답에 있어 한 치의 오차 없이 모두 하나의 색깔을 떠올리는 것이 신기하다.좀처럼 쉽지 않은 일임에도 모두가 그들 각각에 대해 변하지 않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만이 가진 확고한 캐릭터가, 확고한 색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자신만의 캐릭터를 가진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 빛난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명확하고, 자신의 장단점에 솔직하며 자기답다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들과 대화하고 있으면 가끔은 영화의 등장인물과 마주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 때마다 그들에게서 흔들리지 않는 묵직한 뿌리 비슷한 것을 느낀다. 신념과 자존감을 비롯한 수많은 요소들이 모여 그 사람만의 독특한 색채와 향기를 만들어 낸다. 그에 반해 무채색의 사람은 항상 어딘가 붕 떠 보인다. 분명 존재감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를 정의할 어떤 알맹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2008년 개봉한 코미디 영화 ‘트로픽 썬더’에서는 이른바 ‘연기병’에 걸린 한 배우가 등장한다. 소문난 명배우지만 한 번 연기에 빠지면 일상 생활에서까지 그 배역이 되어 산다. 흑인을 연기하면 다음 배역을 맡기 전까지는 피부를 까맣게 태우고 흑인 말투를 쓰는 등 자신의 배역에 기생하며 사는 식이다. 끝내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어느 곳에든 있었지만,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자신만의 색을 가진 사람들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꽤 요란한 작품이 나올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다들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양한 색으로 현란하게 꽉 채워진 배경 앞에 특정한 색이 꾸준히 덧칠되어 주인공이 되어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지금까지 색이 짙은 많은 사람들을 지켜본 바로는, 여러 색을 겪어본 후에야 비로소 자신만의 색채를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다양한 색깔이 되어본 후 비로소 찾은 하나의 색을 끊임없이 덧칠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내가 달려가고 있는 20대의 세상은 먼저 수많은 색으로 배경을 채우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열심히 캔버스를 요란하게 꾸미고 있을 나의 주변인들이 그 와중에 조금씩 도드라지는 색을 보며 기뻐했으면 좋겠다. 이 색이 꾸준히 짙어질지, 새로운 색이 덧씌어질지 고민하며 흔들리는 나날이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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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07 23:02

세상을 바꾸는 방법

많은 젊은이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옳지 않으며, 반드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저 마음만 있을 뿐,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알지 못해 자포자기하거나, 무작정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다가 좌절하고 만다. 필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차마 포기할 수 없어 끊임없이 배우고 생각해보니, 세상을 바꾸는 방법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된 듯하여 그 내용을 공유해보고자 한다.세상을 바꾸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영향력의 원’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한 개인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를 뜻한다. 이 말은 반대로 영향력의 원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음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의 노력은 바로 이 ‘영향력의 원’ 안에 존재하는 대상에게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러나 대부분 사람에게 영향력의 원은 좁다. 이 때문에 바꿀 수 있는 범위도 적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한계에 부딪힌다. 그나마 요즘엔 SNS가 등장해서 조금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약간의 범위가 늘어났을 뿐, 여전히 한계는 명확하다. 또한 영향력의 원안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친인들조차, 아니 나 자신조차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 역시 이런 한계에 좌절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시절,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를 읽으면서 약간의 단초를 얻었다. ‘언어는 어떻게 변화하는가?’라는 화두를 가지고 책을 읽다 보니, 언어의 변화는 생물의 진화와 닮아 있었다. 변화되는 환경에 잘 적응한 생물만 살아남듯, 변화되는 세계를 정확하게 표현한 말과 글이 언어에 수용되었을 때 언어가 변화했다. 즉, 한 개인이 보다 세계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내뱉은 ‘발화(發話)’가 다수에게 수용되어 언어에 반영되는 것이었다. 다만 이 변화는 단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변화가 누적되어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개인의 발화가 언어를 바꾸듯, 개인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세상을 바꾸는 수단은 우리가 가진 유일한 도구인 언어와 행동이었다. 언어로써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행동(혹은 노동)으로써 세계에 영향을 주다 보면, 작은 변화가 누적되어 언젠가는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재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개인이 세계를 바꾼 가까운 예로 ‘민주화’가 생각났다. 현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있던 군사독재 시절만 해도, 재판을 끝내자마자 사형을 집행해 죽여 버리는 ‘사법살인’이 가능한 나라였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 바쳐 노력한 끝에 군사독재를 끝내고 1987년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즉, 수많은 개인들의 노력 끝에 군사독재라는 폭력을 몰아내고 대한민국을 바꾼 것이다.따라서 현재는 감히 감당할 수 없어 보이는 신자유주의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사실 이는 근대의 성격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다. 다만 지금처럼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행동할지 알 수 없는 단계에서는 먼저 배우고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그래야만 세계를 바꾸기 위해 우리가 말해야 할 것과 행동해야 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연후에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 조급해하지 말고 내 영향력의 원 안에서 변화의 결과물들을 쌓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보다 나은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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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30 23:02

엄마 밥이 그리운 날

살다보면 가끔,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이고, 그러다 아프기도 하고, 주눅이 들어 눈물 나는 날도 있다. 맛있는 거 먹을 때는 남자친구 먼저 챙길 거면서, 꼭 이렇게 힘들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은 엄마, 그리고 엄마가 해주는 밥. 돼지고기 듬뿍 넣고 끓인 김치찌개, 제사 때마다 끓여주는 시원한 소고기 무국, 백숙 해먹고 남은 닭고기로 끓인 육개장까지. 하다못해 시원한 보리차에 찬밥 한 덩이 말아먹는 것 뿐인데도 엄마가 해 주면 왜 그렇게 맛있는지. 암만 해도 엄마가 밥에다 뭘 타는 모양이다.우리엄마는 딸에게 ‘황여사’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내가 엄마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건 아마 4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매 끼니마다 고슬고슬한 냄비 밥을 좋아했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밥상에 다시 올라오는 걸 제일 싫어했던, 입맛 까다롭고 유난스러웠던 아빠가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 이후였다. 밥상을 차리느라 매일이 분주했고 하루 중 가장 큰 고민이 저녁메뉴였던 엄마였기 때문에, 아빠가 떠나고 한동안은 뭘 해야 할지를 몰라 했다. 그런 엄마에게 남편이자, 애인이자, 친구이자, 든든한 자식이 되어주고 싶었다. 아직도 엄마는 아빠의 제사상 앞에서 절을 올리는 자식들을 차마 못 보고, 주방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빠는 저 세상에서도 엄마 밥이 그리운 모양이다.작년 여름, 휴가기간을 이용해서 엄마와 제주도 여행에 다녀왔다. 2박3일 짧은 시간이었지만 엄마와 단둘이 여행은 처음이라, 엄마도 나도 잔뜩 설레서 출발 전날부터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엄마와 팔짱을 끼고 제주도 성산일출봉을 걷다가 문득 엄마가 했던 이야기가 왠지 모르게 가슴을 저몄다. “요만하던 니 손잡고 초등학교 입학시키면서 가슴이 뭉클해져서 눈물 날 뻔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니가 엄마 손을 잡고 다니네.”2박3일 동안 본인이 차려내는 밥 말고, 남이 차려주는 밥들을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니 엄마는 너무 맛있단다. 반대로 제주도 어느 맛집을 가도 엄마가 차려주는 밥만은 못했던 나는, 어쩔 수 없는 엄마 딸인가 보다. 엄마의 밥에는 분명 치유의 힘이 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툭 떨어질 것만 같이 마음이 고단한 날, 연락도 없이 엄마를 찾아가 가만히 앉아있으면 엄마가 묻는다. ‘밥은?’ 그리고 뚝딱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작은 상 위에 올려서 축 늘어져 있는 내 앞에 갖다놓고는 말없이 숟가락을 내민다. 밥을 넘기며 목 위로 차오르는 울음을 누르다보면, 어느새 그릇이 비고 배가 든든해진다. 엄마의 따뜻한 밥 한 끼는, 그렇게 다 큰 딸의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져주곤 한다. 딸에게 늘상 늘어놓는 잔소리는 ‘밥 먹었냐’부터 시작해서 ‘라면 먹지 말아라, 병원 좀 가 봐라, 김치 가져가거라, 이불빨래 가져와라’까지. 이런저런 핑계로 대통령 못지않게 바쁜 척 일색인 딸이지만, 이번 주말에는 바쁜 척 그만하고 엄마한테 가서 ‘나 밥 줘.’ 하고 투정 한 번 부려봐야겠다. ‘얼씨구’ 하며 맞장구 칠 황여사를 생각하니 괜스레 웃음이 난다. 함께 밥 한 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밥상머리에서 도란도란 투닥투닥 젓가락 부딪혀가며 얼굴을 마주하는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새삼스레 눈물 나게 감사한 일이 되어버렸다. 아직 세월호 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아이들도, 어서 돌아와서 엄마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 맛있게 먹을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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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23 23:02

April 13, 2014

세계 어디를 가나 일본인들은 참 평판이 좋다. 조용하고, 예의바르고, 특히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작년 여름 봉사활동을 다녔던 전북 환경운동연합에서 내 또래의 일본인 친구들을 초대해 한일 교류회를 열었다. 한국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이 번갈아가며 서로의 나라를 방문하는 형식이었다. 내 나이의 일본인들은 처음 만나보는지라 꽤나 긴장했었다. 부산에서 하카타 항 까지 배편으로 두 시간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가까운 나라이지만 굉장히 다른 모습에 놀랐다. 옷차림, 행동, 말투까지 너무나 달랐다! 취침시간이 지났어도 선생님들을 조르며 꿋꿋이 놀았던 우리와 다르게 일본 학생들은 종이 땡 치자마자 군말 없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리 놀자고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즐길 줄 아는 우리나라와, 규칙을 지킬 줄 아는 일본이랄까. 하지만 굉장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걸로 기억한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 있지만 모두가 아직 때묻지 않은 청춘이기에 가까워 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일본에 와 있다. 여행객으로써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민으로서 살아간다. 모든 나라가 그렇겠지만 겉에서 간만 봤을 때와 수박의 안을 맛보는 것은 매우 다르다. 미국이 그랬던 것 처럼 역시 일본도 당연하다. 두어 달 전 사랑하는 외삼촌께서 한국을 오랜만에 방문하셨을때 견학 차 내가 등교할 일본의 학교에 짧게 다녀왔다. 항구에서 나와 처음 느낀 이미지는, 아! 이곳은 참 깨끗한 나라구나! 였다. 부산에서 출발해 도착한 하카타는 서울보다 조금 작은 도시다(생각해보면 은근히 크다). 거리에 흔한 쓰레기 하나 없는게 신기했다. 게다가 대부분 표지판에 한국어 표기가 되어있어 이동하기 편리했다. 일본인들은 남에게 전혀 피해를 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 났다. 거리를 여기저기 쏘다니는 동안 사람과 부딪히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 점원들은 또 어찌나 친절한지. 사실 그 짧은 삼 일간 일본에 반하고 말았다. 하지만 잠깐의 친절한 모습으론 절대로 그 나라의 이면을 알 수가 없다. 드디어 기숙사에 짐을 옮기려 두 번째로 출발한 일본 여행은 첫 걸음부터 순탄하지 못했다. 그 많은 짐가방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옮기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갈때는 마치 내가 일본을 아는 것 같아 자신 만만 했는데 몇 시간만에 환상이 깨졌다. 계단 앞에서 큰 짐들을 들고 낑낑거리는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무원들도 우리를 쳐다보기만 할 뿐 물어보기 전까지는 도와주지 않았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라는 말은 무서운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잠깐 동안은 편할지 몰라도 서로에게 무신경한 사회는 위험한 사회가 아닐까. 일본에서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행동이 한국보다 더 자유로운 걸 보고 열린 사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뒤집어서 보면 각자 자기만의 공간이 확고하여 생기는 현상일지도. 힘든 하루를 보내니 정 넘치는 한국이 그리웠다. 분명 한국에선 누군가 도와주었으리라 믿는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살짝 어려웠다. 나보다 먼저 유학온 학생들은 일본 친구들은 마음을 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나에겐 아직도 삼년이란 긴 사간이 남았고, 그중에 겨우 일주일이 지났다. 지금은 이 알쏭달쏭하고 말 그대로 멀고도 가까운 나라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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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16 23:02

집 나간 영혼을 찾습니다

오늘도 별 일 없이 하루 일과가 끝났다. 피곤은 쌓일대로 쌓인지 오래다. 그대로 의자 등받이에 쓰러지듯 기대어 머리를 잔뜩 뒤로 꺾자 천장이 눈을 꽉 채운다. 형광등 빛이 따가워 그대로 눈만 감았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울어본 게 언제였더라.아니, 그 전에, 지난 몇 주간 다른 사람이 눈물을 보이는 모습은 본 적이 있었던가. 까마득하다. 그럼 격정적으로 화내는 모습은? 본 적 없음. 가벼운 웃음이야 그렇다 쳐도, 시종일관 웃음을 터뜨려 가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역시 기억에 없다. 뒤늦은 깨달음, 요즘 누군가가 얼굴 근육을 어느 정도 이상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다.짧은 영화의 촬영을 앞두고 스태프들이 좁은 작업실에 모여앉아 이런저런 회의를 나누던 날이었다. 이야깃거리가 너무 많아져 짧은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슬쩍 스쳐지나가며 보니 한 스태프가 페이스북을 뒤적거린다. 웃긴 글이라도 건졌는지, 엄지손가락이 닳도록 연신 ‘ㅋ’ 버튼을 두들기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웃긴가보다 하며 슬쩍 얼굴로 시선을 옮겼는데, 이런, 웃음기 하나 없이,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방금 웃긴 거 보지 않았냐, 고 묻자 오히려 이상한 사람 보듯이 받아치는 거다. 아니 엄청 웃겼는데요 하고.그가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리던 그 페이스북 세상에서는 얼마 전까지 ‘영혼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인기였다. 어디 나사가 한 군데 풀려 있거나, 혹은 그런 것처럼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아 보이는 행동을 두고 ‘영혼 없는 칭찬’이라던가 ‘영혼 없는 리액션’같은 말로 우스꽝스럽게 포장했던 것이다.내 추측은 이렇다. 그 포스트에 달려 있던 수백 개의 댓글은 아마 그 친구가 그랬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적혔을 것이다. 이것 좀 보라느니, 진짜 웃기다느니, 글로만 봤을 때는 시장통을 방불케 했을 그 모든 감탄사와 남발되는 초성들은 엄지손가락만 놀리는 그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으로 차곡차곡 꼬리에 꼬리를 물었을 것이다. 입꼬리를 올리는 수고조차 필요 없이, 즉, 영혼 없이!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폭이 줄어들 때마다 인간은 조금씩 죽어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감정을 진심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사실 크던 작던 내면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얼굴에 표정을 띄우는 것조차 꽤 피곤한 일이다.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에너지원이 신통찮으면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것부터가 고달프기 때문이다. 나는 그 에너지원을 ‘열정’이라고밖에 정의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나는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사람들이 그 동력원을 끊임없이, 아낌없이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혼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다른 표정을 짓고 다양한 감정을 만끽하며, 그렇게 매 순간 생기를 마음껏 뿜으면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자신에게 물어보면 알겠지만, 보통의 경우 그 에너지는 사실 남아도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내는 것만큼 낭비는 없다. 화장실 거울을 들여다 봤다. 간만에 이런저런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구길대로 구겨 봤다. 안 쓰던 몇 군데가 뻐근하다. 아직은 탱탱한 얼굴. 잡티 하나라도 더 생기기 전에, 지금까지 몸 쓰고 머리 쓴 만큼 열심히 ‘얼굴 쓰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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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09 23:02

부품되기 VS 사람되기

세계화의 열풍과 IMF의 혹풍 이후,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비정규직으로 삶을 연명해야하는 ‘88만원 세대’로 만들었다. 결국 그들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가 되었다. 그래도 아직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젊은 청춘들은 바늘구멍과 같은 취업관문을 뚫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인터넷 사이트와 SNS를 통해 수많은 정보들을 공유하는데, 그 중에 ‘대기업 인사팀 18년차의 조언’이라는 글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글을 거칠게 요약하면 ‘대한민국의 재벌은 수출위주 제조업 중심이므로 공대를 가라.’, ‘문과는 서강대 경영이 대기업 입사 커트라인.’, ‘수도권 대학 못 갈 거면 차라리 지방 국립대 공대가 낫다. 대기업에서는 지방의 공단에 인력수요가 있기 때문.’, ‘경영, 영문 같은 학과는 포화상태라 이젠 나와도 의미가 없다. 차라리 희귀한 전공의 틈새학과를 가라.’, ‘여자는 이대나 숙대를 추천한다.’ 등등의 내용이 있다. 참으로 대한민국의 지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현실적인 조언’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갖은 노력 끝에 대기업에 들어간다 해도, 결국 소모되고 대체되는 ‘부품’이 된다는 또 다른 현실은 간과한 조언이다. ‘공밀레’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말은 아이를 쇳물에 넣어 종을 완성했기 때문에 ‘에밀레’하고 울린다는 성덕대왕신종에 얽힌 설화에서 나왔다. 즉, ‘공돌이’를 갈아 넣어 물건을 완성한다고 할 정도로 착취당하고 버려지기에 ‘공밀레’라고 하는 자조적 표현이 나온 것이다.하지만 우리는 부품이 아니라 사람이고, 부품으로 착취당하며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게다가 우리의 삶은 단 한 번뿐이다. 호스피스 전문의가 암 말기 환자들을 상대한 경험을 정리해 적은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가지’라는 책에서도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이라고 후회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단 한번뿐인 인생, 돈 벌려고 취직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그러나 이것 역시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첫 번째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찾는 것 자체가 어렵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자신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경험을 하면서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학창시절에는 ‘좋은 대학’만을 강요하고,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취직’만이 전부인 한국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다가는 자칫 ‘낙오자’ 혹은 ‘패배자’ 취급받기 쉽다. 두 번째로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도 ‘너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니 돈을 적게 받아라.’라는 논리로 노동력을 착취한다. 이게 바로 ‘열정 페이 계산법’이다. 상식적인 자본주의 사회라면 있을 수 없는 괴상한 논리이지만, 우리나라에는 버젓이 통용되고 있는 ‘상식’이다.단 한 번뿐인 인생, 하고 싶은 걸 하고 살기도 참 힘들다.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늘 자신을 성찰하며 꾸준히 노력한 결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젊음과 미래가 가능성과 희망이 아닌, 불안함과 절망을 가리키는 시대라 할지라도, 우리는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포기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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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02 23:02

2014년 결혼방정식

2014년에 들어서서 벌써 결혼식만 다섯 번 째다. 주말마다 늘 남의 결혼식만 이리 줄기차게 다니고 있는 내가, 정작 버진로드를 행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나 할지. 아무래도 30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의 경과 때문인지, 나보다도 내 주변 사람들의 성화가 더욱 나의 서른을 힘들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가 유행가 가사의 첫 구절이 서른의 나이를 더 쓸쓸하게 만든다. “서른이 넘기 전에 결혼을 할는지….”어쨌든 올해만 다섯 번의 결혼식을 다녀오면서, 결혼에 대한 ‘환상과 현실의 이면’도 다섯 번을 더 생각하게 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평생 딱 한 번 가지게 되는 통과의례인 결혼식. 그만큼 누구에게나 특별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안타깝게도 보는 이들의 시선에서는 결혼식장으로 출발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전쟁 같은 시간이다. 뭘 입고 가야할지 며칠을 고민하다가 고른 불편한 옷을 입고, 겨우겨우 결혼식장 인근을 뒤져 주차에 성공. 주례사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지만 마지막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가,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또 겨우겨우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음식을 가져오기 위해 접시를 들고 수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뷔페 순례를 다녀와야 한다.두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에 진행되는 이 과정들이 내가 다녀 온 다섯 번의 결혼식에서 반복되었다. 그 날 그 결혼식이 누구 결혼식이었더라, 헷갈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결혼식의 장본인들은 이 결혼식을 위해 몇 달을 준비했을까. 결혼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린 뺄 건 다 빼고 꼭 필요한 것만 했다고 이야기 한다. 나는 사실 아직도 모르겠다. 뺄 건 뭐고, 꼭 필요한 건 또 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몇 달이라는 시간과 몇 천만원이라는 비용이 필요한 건지. 혼인은 두 사람의 약속이고 사랑의 결실이지만, 이것이 사회 안에서 하나의 제도가 되면서 수학문제를 풀듯이 똑같은 방정식에 대입된다. 그 당연한 방정식들은 결혼식에 드는 ‘비용’으로 산출되어 양가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요즘은 작은 결혼식, 두 사람만의 특별한 결혼식도 심심치 않게 모습을 드러낸다. 혼인신고를 마치고 나온 구청 앞에서 두 사람만의 세레모니로 결혼식을 대체하거나 지인들과의 작은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다만 연예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난 3월 15일, 경인여대 학생들이 가진 재능을 통해 형편이 어렵거나 작은 결혼식을 추구하는 이들을 위한 특별한 결혼식이 진행되기도 했단다. 어릴 때 엄마 손 잡고 따라갔던 막내 삼촌의 결혼식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촌스러운 흑백사진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진지하고 경건하게 결혼식을 지켜봐 주었던 하객들과, 지금처럼 화려한 뷔페는 아니지만 뜨끈한 불낙전골과 오가는 소주잔으로 기쁜 마음을 나누었던 밥상 위의 경치가 왠지 모르게 그리워진다. 결혼식만 끝나고 나면 모든 게 다 끝날 것만 같다는 친구의 이야기에 마음은 더 씁쓸해진다. 내 나이 서른, 직장생활 3년차, 집이 있을 리도 만무한데다가 대학원까지 다니면서 마일리지처럼 쌓여온 학자금까지 생각하면, 새로운 출발을 준비해야 하는 결혼이라는 과정에 너무 많은 에너지와 자존심을 쏟아 붓게 되는 것은 아닐지, 또 지레 겁부터 먹게 된다. 그나저나, 다음 주 결혼식에는 또 뭘 입고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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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26 23:02

March 15, 2014

생각해보니 내가 미국에 가 있었던 3년을 제외하곤 우리 가족은 항상 대가족이었다. 아기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부모처럼 날 키워주셨기 때문이다. 아파트에 살때도 지금 주택에서도 이층에는 나와 부모님이, 아래층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사신다. 거기다 동물 가족들도 열마리나 산다. 이렇다 보니 우리집은 항상 북적북적 소란스럽다. 아마 식구들 밥 챙기고 강아지 고양이들 식사 준비 하는것이 우리집에서 가장 큰 일과가 아닐까. 빨래도, 바닥의 먼지도 끝이 없고, 현관은 치워도 치워도 신발들로 넘쳐난다. 가끔 셔츠나 양말 몇 켤레가 주인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사실 집에 항상 사람들이 있다 보면 불편할때가 있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인지라 조용히 혼자 시간 보내기를 좋아한다. 당연히 우리집에서 그런 시간을 바라기란 조금 힘들다. 또 집에 혼자 있고싶은 날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는 법. 나는 우리 가족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아프고 힘들때 서로 도울 수 있고, 언제나 든든한 내 편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이렇게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고, 하루의 끝에 다 같이 모여 영화를 볼 가족들이 있어 참 다행이다. 나의 어머니께서 지난 며칠간 건강 문제로 병원에 입원하셨다. 일주일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만, 어머니의 빈 자리가 크게 느껴졌던 한주였다. 다행이 가족들이 있었기에 빈 자리를 조금씩 나눠 채울수 있었다. 강아지들 고양이들 밥은 내가, 운전 기사 역할은 할아버지께서, 그리고 청소는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했다. 내가 없을때 내 자리를 누군가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3년간 외국에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가족의 빈자리가 느껴졌던 때였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이리도 긴 시간을 보낸 건 처음이었다. 더이상 응석 부리거나 떼 쓸 처지가 아니었다. 갑자기 철없는 아이가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바보같게도 텅텅 빈 집이 한동안 무서웠다. 학교에서 학예회를 하거나 내가 속한 동아리 공연에 오시는 친구들의 부모님이 부럽기도 했다. 그때 외삼촌이 안계셨으면 참 외로운 3년이었을 것이다. 외삼촌께서 나머지 가족들의 빈자리를 채워주셨기에,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제 2주만 지나면 다시 외국 생활을 한다는 사실이 조금 섭섭하기도 하다. 나 뿐만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떨어져 산다. 요즘에는 대가족도 찾아보기 힘들다. 기숙사에 머무는 학생들, 타지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들…솔직히 나는 약과가 아닐까? 나 하나 바다 건너가도 우리집은 여전히 붐비겠지만, 핵가족에서 아이나 아버지가 없다면 집이 꽤 쓸쓸할 것이다.이 밤중에 왜 우리나라엔 유독 갈래 갈래 찢어져 사는 가족들이 많은지 생각해 본다. 너무나 성공적인 미래에 대해서만 생각해서가 아닐까. 함께하는 시간보다 나중을 바라보며 앞으로 달려가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일단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같이 하는 저녁식사 보단 일과 학업이 우선이다.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학교에선 한밤중까지 보내주지 않고 회사는 야근에 회식까지. 하지만 자꾸 미루다 보면 영영 못 이룰지도 모른다. 티비에 근사한 여행지가 나올때마다 ‘나중에 시간나면 가야지’ 혹은 ‘돈을 더 벌게되면 가야지’ 하고 말만 하지 않는가? 미래에는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현재에 충실하는게 맞지 않을까. 사랑하는 가족들과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시간을 보내는게 중요하다. 더 늦기 전에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도록 하자(나 자신도 포함해서). 나중에 이미 떠나버린 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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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9 23:02

만국 공통, 청춘 만세다

해가 떨어지자 공기가 더 추워졌다. 코쿠코엔(航空公園)역 근처의 마트에 들러 맥주 여섯 캔과 냉동 춘권을 사들고는 마을버스에 올라 조금 더 구석진 곳으로 들어갔다. 예고 없이 내린 두 번째 폭설 때문에 인적이 드문 곳은 이미 허벅지 높이만큼 눈이 쌓여 있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찾아간 일본에서의 두 번째 날 밤이었다. 현지에서 예술을 공부하는 유학생 친구를 만나 10여 분을 눈밭에서 뒹굴다시피 하며 걸었을까, ‘짱구는 못말려’에서나 봤을 법한, 꽤나 깔끔하고 넓어보이는 집에 도착했다. 근방의 모든 친구들이 편하게 들락날락하는 ‘아지트’라고 했다.그날도 정작 집주인은 영화촬영을 나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빈 술병이며 담배 꽁초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그 사이사이로 동년배로 보이는 몇 명이 앉아 있었다. 외관만 봐도 모두 하늘을 뚫을 듯한 개성을 자랑하던 그들에게 나를 한국의 영상학도 쯤으로 간단히 소개한 뒤 사온 맥주를 나눠 마시며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콧수염을 적당히 기른 요시키는 가끔씩 질문에 답하는 때만 빼면 거의 말이 없었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고 했다. 덧붙여 그 무리 중에서 가장 주당이라, 일본주 한 병을 자기 몫으로 따로 가져와 혼자서 여유롭게 입에 털어넣고 있었다. 춤을 좋아해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가끔 혼자 몸을 흔들곤 했다.훈이는 일본의 드라마에 빠져 대학까지 일본으로 진학해버린 별난 유학생이었다. 빨갛게 물들인 머리를 한쪽으로 넘긴 탓에 인상이 꽤 강렬했다. 사서 고생하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라 요즘은 현지에서 막노동부터 영화 엑스트라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있다고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요리를 잘 하기로 정평이 나 있어서, 그날의 안주는 모두 그의 책임이었다.아츠키는 어렸을 때부터 현장에서 활약했던 아역배우였다. 한국 영화에도 출연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경험에 비해 꽤나 겸손한 친구라 절대 먼저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는 일은 없었지만 새로운 화제거리가 나올 때마다 항상 그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쏟아내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기껏 일본까지 왔는데 이런 촌구석에서 시간을 보내도 되냐, 며 누군가 장난스레 물었다. 어차피 이러려고 왔다, 고 답했다. 일거리를 내팽개쳐두고 일본행 비행기에 오른 데에는 사실 ‘다른 나라의 청춘은 뭔가 다를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던 터라, 그 어떤 것보다 사람 만나는 자리가 고팠으니까.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기대감은 그날로 인해 보기 좋게 무너져 버렸다. 며칠 밤을 샌 촬영으로 고생했다던가, 이번 수업의 교수가 어떠했다던가 하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모두가 비슷한 불안감을 공유하고 있었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하나같이 눈을 반짝이며 열띤 토론을 펼쳤다. 서로의 시행착오를 나누는 낯익은 풍경, 어쩌면 국가를 막론하고 젊은 날은 그래서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상치 못했지만 그만큼 만족스러운 결론이었다. 그날 밤은 결국 이런저런 이야기에 모두 취기가 올라 꽤 시끌벅적한 자리가 되었다. 가끔씩 내가 공감할 수 없는 그들끼리의 이야기가 오고가는 와중에 요시키의 춤사위는 더 격해졌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아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눈은 끝없이 내렸고 우리들의 목소리는 높아져만 갔다. 만국 공통, 청춘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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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2 23:02

21세기 대한민국 절양가

우리 집에는 감나무가 세 그루 있다. 각각 맛난 홍시와 단감이 열리는 감나무였다. 그러나 집 앞에 건물이 들어서 햇빛을 가리고 땅이 습해지면서, 이제 감도 잘 열리지 않고 열리는 감도 예전의 맛이 나지 않게 되었다. 맛난 감이 열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엉뚱하지만, 그런 감나무를 보고 있자니 정약용이 지었다는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절양(絶陽)’은 남자의 생식기를 자른다(!)는 뜻이다. 이 시는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당해 지내던 1803년에, 가혹한 군포(軍布) 징수를 감당할 수 없었던 남자가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이야기를 듣고 슬퍼하며 지은 시이다.이런 현실은 조선 후기 군역(軍役)과 세금수취제도의 변화가 원인이라고 한다. 먼저 조선시대의 군역은 지금의 징병제처럼 모든 양민이 군역을 져야 했다. 하지만 군역은 예나 지금이나 고되고 힘들었다. 그래서 조선후기에 포를 내고 군역을 회피하는 폐단이 성행하자, 결국 나라에서도 군역 대신 포(布)를 받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세금수취제도의 경우, 본래 조선초기에는 개인이나 토지에 직접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조선후기가 되면서 지방 군현에 일괄적으로 일정액을 부과하여 징수하는 비총제(比摠制)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군역제도 및 세금수취제도의 변화는 구조적 부패를 낳았다. 즉, 직접 노동력을 제공하는 군역은 착복할 수 없지만, 포로 내는 세금은 착복이 가능했다. 그리고 중앙정부에 올려 보낼 세금은 정해져 있었다. 때문에 지방 수령과 서리는 많이 걷은 뒤, 정해진 양만 서울에 바치고 나머지를 착복했다. 그래서 군포 징수의 대상이 아닌 갓 태어난 어린아이에게조차 군역을 씌워 포를 받아내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이미 죽은 사람도 군적에서 빼지 않고 계속 수포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가 자행되었다. 〈애절양〉의 주인공은 그런 구조적 부패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문제는 자신의 생식기를 스스로 잘라야했던 조선시대 양민의 이야기가 그저 옛날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에 있다. 비록 원인은 다르지만,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년들도 사실상 〈애절양〉이 지어지던 시절과 비슷하게 아이를 낳아 기르기를 포기하고 있다. 과학이 발달해 스스로 성기를 자르지 않아도 피임을 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2013년 현재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1.19라는 사실이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개인의 입장에서 스스로의 선택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환경적, 구조적 문제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무척 불행한 일이다. 게다가 이런 낮은 출산율이 해결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무척 암울해진다. 2060년에는 노년층 비율이 40.1%가 되는 사회가 된다는 예측도 있다. 이렇게 구조적인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출산율에 관한 문제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유전자를 남기는 생물 본연의 본능적 의무를 포기할 수 없다. 물론 단순히 아이를 많이 낳자는 말이 아니다. 포기하지 말고, 조건과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식물인 감나무와 달리, 좋지 않은 환경을 벗어날 수도, 개선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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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05 23:02

어느 젊은 예술가 이야기

얼마 전, 경주에서 벌어진 부산외대 신입생 환영회의 참사. 온 국민을 안타깝게 했던 불의의 사고는 채 피지도 못한 아깝고 아까운 열 송이의 목숨을 앗아갔다. 동계 올림픽의 열기 속에서도 사고 소식과 더불어 사고의 경위를 밝히는 기사들, 세상을 떠난 아홉 명의 부산외대 학생들에 대한 애도의 물결이 연일 보도되었다. 그리고, 시들어버린 열 송이의 중에 이벤트 회사 직원으로 알려진 또 한 사람, 최정운씨. 그의 나이는 올해로 마흔 셋이었다. 세상이 보내는 그에 대한 관심은 딱, 여기까지였다. 고인이 된 최정운씨는 사고가 일어나던 날 밤, 부산외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의 레크레이션을 진행하고 있었던 그의 직업은 예술강사였다. 그의 죽음에 주목하며 엄숙하게 목소리를 내는 이들 역시, 예술강사들이었다. 예술강사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문화예술교육 활성화를 위해 학교로 강사를 파견하는 지원사업이다. 연극뿐만 아니라 공예, 디자인, 만화, 애니메이션, 국악, 무용, 영화, 사진 분야의 강사들을 선발하여 전국의 초·중·고교로 배정하고 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곳이 이러한 예술강사들을 광역단위에서 관리하고 있는 곳이다 보니, 자연스레 주위의 예술강사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최씨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예술강사라는 직업은 예술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아이들을 만나는, 참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적 재능을 타고났다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인데, 이들은 예술하는 교육가이자, 교육하는 예술가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학교로 파견되는 예술강사들의 생활은 그리 예술적이지도, 우아하지도, 그리고 녹록하지도 않다. 현재 예술강사를 직업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을 유심히 보면, 예술강사 한 직종의 벌이만으로 생활을 이어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배정받을 수 있는 수업 시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한 달 임금이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1년 중 2개월은 실직상태이며, 아이들이 방학을 맞으면 예술강사들의 통장도 방학을 맞은 학교처럼 텅 비어버린다. 고(故) 최정운 선생님이 그 날 밤 대학 신입생들의 레크레이션 강사로 마우나리조트에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예술 한다는 사람이 무슨 돈타령이냐며, 아이들 가르치는 사람이 돈 때문에 알바를 한다는 게 말이 되냐며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문화를 매개하는 일. 예술을 창조하고 예술로 사회와 소통하는 일, 이것은 도덕적 기준도 아니고 종교적 신념도 아니다. 선악을 가늠하는 눈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을 가진 것이 예술이다. 그런데 누가 이들의 현실적인 고통 앞에서, 그리고 결국 그 현실 때문에 다 피우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 최정운 선생님 앞에서 도덕적 가치관의 잣대를 갖다 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은, 이토록 머리가 어지럽게 아픈 마음보다는, 떠나간 최정운 선생님을 기억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만히 그의 지난 삶을 되새겨보려 한다. 10여년 동안 어린 학생들에게 연극을 가르치는 일을 기쁨으로 여겼다 했고, 극단 생활을 할 때도 늘 열정적이었지만 교육자의 삶을 더 소중히 여겼다 했다. 유쾌하고 다정한 선생님이었다는 그 분의 넋을 기리며, 고인이 먼 곳에서나마 늘 평안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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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26 23:02

생명에 대한 예의

2010년 미국에 유학을 갔던 해 여름, 외삼촌 친구 분들이 멀리 공부하러 온 것을 환영한다며 나를 그들 집으로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처음으로 외국인 집에 가서 받은 인상은 우리네와 많은 것이 달랐다. 도심생활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빽빽한 숲들과 그 숲 사이에 있는 친구분 집은 외관이 주는 느낌도 달랐지만, 특히 자유롭게 집안과 마당을 왔다 갔다 하는 작은 강아지, 집 마당에 놀러오는 새를 위해 먹이를 주는 나무 위의 먹이통, 자기 집처럼 들락거리는 고양이, 그리고 가끔씩 사슴도 집 주변에 나타난다고 하니 동물을 대하는 그들의 배려가 재미있고도 한국의 일상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분들의 초대는 어린 나에게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간단한 점심 후 우리는 카약을 가지고 근처 강으로 나갔다. 처음 손으로 노를 젓는 카약을 타는 것도 무척 재미있고 마음 속 모험심을 자극하는 것이었지만 나를 놀라움 속으로 빠지게 한 것은 바다 물개와의 멋진 만남이었다. 바다 근처 폐목 위에서 햇볕을 받으며 낮잠을 즐기던 자연 속 물개를 나는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그들은 우리를 경계하지 않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관찰하며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외삼촌 친구 분의 초대는 나에게 자연 속 다른 생명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바꿔놓았다. 처음으로 세상은 사람들 것이 아니란 생각을 해보았다. 전주에 우리 집 역시 다른 집과는 사뭇 다른 환경이다. 마당을 누비는 4마리의 강아지, 2층 베란다와 거실을 점령하고 있는 6마리 고양이, 아침이면 시끄럽게 우는 산새무리, 가끔 나타나 햇볕을 즐기는 작은 꽃뱀, 어쩌다 출몰하는 고라니까지. 이렇게 우리집에 동물 가족이 많은 것은 우리 엄마의 동물권 활동의 결과이다. 동물권 활동가이신 엄마는 다른 동물과의 공존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번 기회가 될 때마다 나에게 얘기하신다.요즘 AI 관련 뉴스를 보면서 ‘생명’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다. 우리가 잡아먹는 동물들이기에 언젠가는 죽임을 당하겠지만 요즘 뉴스를 장식하는 대량 생매장에 대해서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고병원성 AI는 결국 인간이 값싼 고기를 원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는 생각에 우리가 바꿔놓지 않으면 또 다시 이런 대량 살처분은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아무리 우리의 먹거리 식재료로 길러지는 동물이지만 그들은 나와 똑같이 살아있는 생명체 이다. 우리는 너무 이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다. 또한 나는 우리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기르는 동물들이 왜 이렇게 쉽게 병에 걸리는지에 대해서.결국 싼 고기를 위한 공장식 밀집사육이 그 문제라고 본다. 최소비용을 들여 최대한 이익을 내고자 하는 극단적인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공장식 밀집 사육은 다른 생명에 대한 예의가 없는 ‘지옥’일 수 밖에 없다. 문제를 알았다면 합리적이고 성숙된 사회라면 어떻게하면 공장식밀집 사육을 줄여나갈 것인지 모두가 고민해서 답을 찾아야 한다. 동물권 활동가인 엄마와 많은 이야기 속에 나름대로 내가 찾은 해결책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먹거리를 선택하는 소비자들이 싼 고기소비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의식적 소비활동이 시장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방법이 한꺼번에 변화를 이끌지는 못하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임이 분명하다. 둘째는 동물보호법 등 동물을 대하는 법과 행정이 바꿔야 한다. 이 방법은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이해를 이끌어 내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우리와 같은 청소년기에 다른 생명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도록 교육받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세대가 어른이 되었을 때 다른 동물에게도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어서 빨리 AI확산 뉴스가 잠잠해 지기를 바라며, 아침이면 나를 잠에서 깨워주는 산새들의 노래가 들리는 세상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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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19 23:02

'노킹 온 헤븐스 도어'와 바다·데킬라

부산에서 짧은 강연이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관계자 분들과 짧은 인사를 나눈 후 자리를 빠져나와 곧바로 자갈치시장으로 향했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터라, 때마침 좋은 돔이 들어왔다던 97호 횟집 아저씨의 말을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었다. 꽤 저렴한 가격에 배를 빵빵히 불리고 나서 천천히 걸을 겸해서 바다로 나갔다. 노을을 받아 주황빛으로 넓게 펼쳐진 바다는 내륙 토박이인 내게 있어 좀처럼 보기 힘든 장관이었기에 한동안을 눈에 꾸역꾸역 담아넣느라 애를 먹었다.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혼자 자주 가던 바를 찾았다. 데킬라 반 병을 앉은 자리에서 깔끔히 비웠다. 저마다 떼를 지어 왁자지껄하게 수다판을 벌이는 사람들 중에서 내게 왜 데킬라를 혼자 마시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조금 유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내게 왜 데킬라를 처량하게 혼자 마시고 있느냐고 물었다면 나의 대답은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 그야 물론 바다를 봤으니까. 토머스 얀의 1997년작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g on Heaven‘s Door)’는 그런 영화다. 음악을 하는 지인의 소개로 영화를 처음 접했다. 한 번 보면 머리 속에서 제멋대로 바다와 데킬라가 하나로 꽁꽁 묶여 일종의 조건반사를 만들어 버리는, 조금은 곤란한 영화다.이 영화는 어딜 봐도 ‘없어보이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루디는 세상을 너무 무겁게 살아서 없어보이는 남자다. 평생 자신을 규율에 끼워맞추며 바르게만 살다 보니 융통성이라고는 눈을 아무리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반면 마틴은 세상을 너무 가볍게 살아서 없어보이는 남자다. 그에게 있어 규칙은 당연히 깨라고 있는 것이고, 진지함은 메마른지 오래라 어딜가나 여자를 홀리고 다니기 일쑤다.완벽히 상반되는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두 가지 있다. 각각 골수암과 뇌종양으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같은 병실에서 서로를 만났다는 것과,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다는 것. 병실에서 우연히 발견한 데킬라를 마시며 가까워진 둘은 술김에 병원을 탈출해 바다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을 떠난다.사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가 다루고 있는 스토리-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마지막 꿈을 이룬다는 주제의 이야기는 ‘버킷 리스트’ 등 여러 영화에서 익숙하게 찾아볼 수 있는 소재다. 더군다나 이 영화가 연출에 있어서 섬세하고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참신한 컷연출이나 시각효과보다 거칠고 투박한 구성이 영화의 주를 이룬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작년 국내에서 재개봉될 정도로 아직까지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은 작중 최고의 백미로 알려진 마지막 씬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슷한 류의 로드 무비가 늘 그렇듯 둘은 결국 바다에 도착하게 되는데, 스크린을 꽉 채운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히 데킬라를 들이켜는 둘의 모습과, 그 뒤로 흐르는 밥 딜런의 동명의 노래 ‘Knocking on Heaven‘s Door’가 어우러진 이 장면은 말 그대로 압권이다. 만약 당신이 그 뒤 자연스레 올라가는 크레딧 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게 된다면, 축하드린다. 필자가 그러했듯, 당분간 바다를 보면 자연스레 데킬라가 떠오르는 후유증을 얻게 되셨다.다음에 바다에 가게 됐을 때는, 친구를 데리고 데킬라 한 병을 따로 챙겨가야겠다. 어릴 적 즐겨 듣던 휴대용 CD 플레이어에 밥 딜런 아저씨 노래를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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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12 23:02

우리 사랑할 수 있을까

칼럼 제목이 마치 사랑을 다룬 드라마 제목 같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요즘 젊은이들의 현실이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당시 젊은이들을 ‘X세대’라고 했다. 1980년대의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풍요 속에서 자라나, 당시의 기성세대와는 다른 사고방식을 보였기에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지금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은 ‘3포 세대’라고 불린다. 이는 ‘연애, 결혼, 출산’, 이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라는 뜻이다. 연애결혼이 일반적인 현대에 있어, 연애의 포기는 자연스레 결혼과 출산의 포기로 이어진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는 풍조와 낮은 출산율 등의 통계가 이런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비참한 이유는 아마도 비용의 증가 때문일 것이다. 연애의 경우, 아마도 가장 흔한 데이트 코스가 아마도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일 텐데, 모두 돈을 써야만 한다. 어찌어찌 연애과정을 넘어가 결혼을 한다고 해도 내 집 마련을 위한 부동산 문제가 신혼부부의 발목을 잡는다. 출산도 마찬가지이다. 분유 값, 기저귀 값은 물론 병원비도 만만치 않다. 이런 비용의 문제를 악화시키는 것은 그들이 충분한 돈을 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젊은이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기업과 자본의 이윤 증가가 더 이상 직원의 임금상승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3포 세대’는 빈익빈 부익부와 노령화 등 대한민국의 음울한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거시적인 사회·경제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 미시적으로 개인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3포 세대를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것은 ‘사랑’을 포기한다는 뜻과 같다. 그것이 남녀 간의 사랑이든, 부모자식간의 사랑이든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포기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해리 할로우(Harry F. Halow)라는 심리학자의 실험은 간접적으로나마 그에 대한 답을 준다. 그는 차가운 철사로 만들어졌지만 젖을 주는 어미 원숭이와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젖을 주지 않는 어미 원숭이를 만들어 우리에 집어넣었다. 그 우리 안의 새끼 원숭이는 오랜 시간동안 부드럽고 따뜻한 어미 원숭이와 지내다가 배가 고플 때만 잠깐 차가운 철사로 만든 어미원숭이에게 가서 젖을 먹으러 갔다고 한다. 이렇게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갈구하는 새끼 원숭이의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다. 때문에 몸과 몸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랑표현은 남녀 간은 물론 부모자식 간에도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사랑 없는 삶이 얼마나 삭막하고 우울한지를. 따라서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사랑은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결국 앞서 제기한 ‘우리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사랑해야만 한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하는 비용의 문제를 넘어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상상력이 부족해 적절한 해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고, 연대(solidarity)가 약해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가 실패할 수도 있다. 그래도 사랑은 사치가 아니라 필수다. 우리는 사랑하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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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05 23:02

바로 지금, 청춘의 찰나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나 똑같은 깊이로 또는 길이로 보내지는 않는 시절, 청춘. 우리는 무얼 하며 보냈을까? 혹은, 무얼 하며 보내고 있을까? 보통은 10대에서 20대 정도의 젊은 나이를 일컬어 청춘이라 부르지만, 이에 대한 이견을 내놓는 세 남자가 있다. 이름 하여 청춘 사진관! 올해로 서른 살을 맞은 나에게, 이들의 청춘 스토리가 더할 나위 없이 큰 자극제가 되었다. 스튜디오, 포토그래퍼, 이런 세련된 이름들 놔두고 구지 ‘사진관’이라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추구하는 데에도 뭔가 이유가 있을 듯싶다. 그 아날로그적 감성을 한 번 이해해 보자는 취지로, 필자도 노트와 연필을 꺼내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귀찮아져보기로 했다.말은 사진관이긴 한데, 사실 이 세 남자의 사진관은 사진관이라 부를만한 공간도, 그럴싸한 장비도 갖추지 않은, 이상한 사진관이다. 세 남자 자체가 청춘사진관의 실체이며 그저 나이만으로도 청춘이기에 충분한, 20대 대학생들이다. 대학에서 같은 수업을 들으며 만나게 되었고, 마음 잘 맞는 청춘들끼리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작당해 보자는 취지에서 이 ‘거창한’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세 청년들이 카메라라는 작은 기계 하나로, 사람들의 어떤 찰나를 담아낸다는 것. 청춘 속에 수많은 찰나의 순간들이 있고, 돌아보면 너무나 아쉽고 소중한 순간들이지만, 꼭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는 모순이 있다. 그런 ‘찰나’를 사진으로 담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의 순간을 되돌려주는 이 세 남자의 청춘의 시절. 얼마나 신나는 청춘들인가. 청춘사진관의 활동에 동경을 느끼는 이유는, 나의 청춘을 더 신나게 즐기지 못한 데에 대한 반성이라고 하겠다.누구나 머릿속에 한 장면쯤은, 평생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복을 입었던 열아홉 살의 졸업식, 어렵게 공부한 끝에 선생님이 되어 첫 제자들을 만난 날, 살면서 흔하게 다가오지 않는 감동의 순간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은 지나가버리면 다시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의 흐름 위에 있어, 더욱 소중하고 아깝게 느껴지곤 한다. 필자가 가장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대학시절 풍물패에 들어가 첫 공연을 했던 날이다. 몸집보다도 더 커다란 장구를 둘러메고 뭐가 그리 신났는지 벌건 얼굴로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나를 보면서, 객석에 있던 엄마는 조용히 울었다고 했다. “왜?” 하고 물으니, “그냥, 너무 예뻐서.”란다. 그 때 눈물 그렁했던 엄마의 눈으로, 나의 모습을 다시 담아보고 싶다. 지금이라면 다시 못 할 것 같은, 그 때 그 순간의 나였기 때문에 보여줄 수 있었던 그 표정이, 내 청춘의 표상이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불평 투성이었던 나의 청춘. 하지만 조금만 비틀어서 생각해 보면, 미래가 빤히 보이는 인생은 얼마나 재미없고 절망적인가. 알 수 없는 인생이라 더욱 아름다운 거라고, 이문세 아저씨도 노래하지 않던가. 같은 청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과거에 연연하거나 미래를 걱정하면서 현재를 또 아깝게 흘려보냈던, 우리의 청춘에게도 이제는 고하고 싶다. 좀 더 용기를 내 보자고,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청춘의 시절을 다시 시작해 보자고. △ 김주희 코디네이터는 문화재청 무형문화유산 온라인전수조사 보조연구원, 전북발전연구원 전라북도 관광객 실태조사 보조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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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29 23:02

January 17, 2014

나는 시험 기간에 선생님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일이 종종 있다. 아니, 교칙을 어겨서도, 버릇없게 군 것도 아니다. 우리의 미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시험 기간에 책을 꺼내 읽는다는 이유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려러니 하고 넘겼으나 하루는 선생님께서 내 머리를 탁! 치며 말씀하셨다. “다를 애들 다 공부하는데 너만 딴짓하냐? ” 그런데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하다. 독서도 당연히 공부의 한 부분이다. 모든 교과 수업의 시작은 교과서를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또한 복습과 시험공부도 책을 읽으며 다시 되짚어보는게 기본이다. 그런데 책 읽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니! 참으로 모순되는 말이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미국에서의 중학교 졸업, 그리고 고등학교 일학년 과정을 수료하면서 배우고 느낀게 정말 많다. 물론 미국이라고 다 좋은게 전혀 아니었다. 사회적인 문제들도 한국에서 간간이 듣는 것과 그 속에서 직접 체험하는건 다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현재 미국의 공립학교는 맘놓고 갈 곳이 아니라는건 확실하다. 하지만 내가 다녔던 사립학교(유학생 신분으로는 공립학교 입학 불가)에서 ‘와 이런건 정말 괜찮은 방법이구나’ 했던 것이 몇가지 있다. 하나를 꼽자면 독서의 중요성 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버리한 한국 중학생이 처음 한게 ‘그룹 독서 활동’ 이었다. 소설책 다섯권 중에서 그룹마다 한 권씩 골라 같이 읽으며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선생님께선 우리가 매일 밤 한 단원씩 책을 읽어오게 하셨고 그 내용을 토대로 토론을 하고, 발표도 하며, 단어도 배우고, 문법도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하기도 늘고, 쓰기도 늘었다. 그럼 시험은 어떻게 보냐고? 시험은 내가 한국에서 보았던 시험이랑은 사뭇 다르게 진행된다. 어찌보면 대학교에서 보는 시험을 연상시키는 시험이었다. 번호를 고르는 문제와 단답형 문제도 조금 있었지만 진짜 핵심 문제는 많아야 세개였다. 요구하는 바는 간단했다. ‘당신이 읽은 책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무엇이며, 그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무엇인가?’ 혹은 ‘당신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와 증거를 서술하라’ 등의 질문이었다. 당시 나는 그 첫 시험을 망쳐버리고 말았다. 수업, 시험공부, 시험과 소설책, 나의 의견을 완전히 다른 분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서운 첫 경험 이후에도 몇번 더 넘어지고 깨진 후에야 공부는 그저 정도껏 외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익숙해졌다. 나는 책이 나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이해하고 시간을 들여 생각하는 일이 공부라고 생각한다. 내용물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는지 알아보는 일이 시험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되돌아온 지금 또 다시 암기 전쟁을 하고 있다. 수 많은 공식들을 외우고, 조선시대 시조들을 외우면서 정말로 그것들을 제대로 ‘공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꼭 시험 보는 방법을 배우는 것 같다. 문제들을 풀고 나면 벌써 암기한 내용들이 가물가물 해져간다. 나 스스로 느끼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력 수준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오죽하면 한국에서 수학을 잘한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한 내가 미국에서는 수학 천재라는 칭찬을 들었을까. 나 뿐만 아니라 미국 학교에 다녔던 거의 대부분 한국 학생들도 항상 미국학생들은 우리를 ‘역시 한국인이다! 쟤내들은 천재야!’ 라고 평했다. 하지만 이런 한국천재들은 책을 읽고 진행하는 수업에는 언제나 취약했다. 발표나 글쓰기도 마찬가지. 모두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고 인생에 도움이 되니 무조건 읽으라고 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독서를 “딴 짓” 이라고 한다면 책이 어떻게 삶을 풍족하게 바꿀 수 있는지, 진짜 인생 공부가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온태현 학생은 미국 워싱턴주 올림피아시 소재 NCHS 고등학교 1학년을 수료하고 일본 후쿠오카 야나가와 고등학교를 입학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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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22 23:02

막걸리 아저씨 예찬

스무살의 봄, 홍대에서 저녁 술약속을 잡았다. 상대는 홍대 바닥에서 8년 정도 밴드생활을 한 잔뼈 굵은 음악가. 부스스하게 늘어뜨린 긴 머리가 한때 그의 트레이드마크였기에, 나는 그를 ‘예수 형’이라 불렀다. 예수 형은 직업이 음악을 만드는 사람인지, 술을 마시는 사람인지 헷갈릴 만큼 애주가셨고, 나는 술김에 털어놓는 그의 소싯적 밴드 무용담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길가에서 가벼운 인사를 나눈 우리는 캔맥주 하나씩을 들고 근처 놀이터로 향했다.밤의 홍대 놀이터는 여느 때처럼 길거리 음악가들의 공연으로 시끌벅적했다. 적당한 곳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데 저만치서 낯선 모습의 남자가 다가왔다. 다 늘어나고 색이 바랜 옷차림이었지만 그가 끼고 있던 면장갑만큼은 유독 깨끗했고, 그가 끌고 온 커다란 리어카는 온통 막걸리 병으로 가득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그 괴이한 존재에 깜짝 놀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예수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았다.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예수 형과 그의 대화는 편하고 즐거워 보였다. 그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쩌렁쩌렁하고 쾌활한 그의 목소리는 멀리서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음색이었다. 악수에 포옹까지 요란한 인사를 치루고 돌아오는 예수 형의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막걸리 세 병이었다. 다 마신 맥주캔을 내려놓고 종이컵에 갓 사온 막걸리를 따르며 예수 형으로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통칭 막걸리 아저씨. 그가 홍대에 처음 모습을 나타낸 것은 10년도 더 전의 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막걸리로 가득한 리어카를 끌고 홍대를 누비는 명물이라고 했다. 이름도, 고향도 불명. 일이 끝나면 벤츠를 몰고 다닌다느니, 근처의 건물 몇 채가 그의 소유라느니 하는 출처 모를 소문들이 무성하지만 워낙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보니 진위여부를 가릴 수도 없다.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막걸리를 한 잔 들이켰다. 기막힌 맛이었다.그 후에도 홍대에서 가끔 막걸리 아저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신출귀몰한 사람이라, 찾으려 하면 절대 나타나지 않다가 생각 없이 홍대 거리를 걸을 때면 불쑥 나타나곤 했다. 그와 마주친 날이면 항상 그의 막걸리를 두어 병 사들고 집에 돌아갔다. 그의 막걸리가 탁월한 맛을 자랑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와 대화를 나눈 뒤에는 항상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는 항상 웃고 있었다. 잔뜩 쉰 그의 목소리는 항상 격양되어 있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끝자락에 가서는 서로의 목소리 싸움이 되기 일쑤였다. 그것이 그와 대화를 나누는 방법인 듯 했다. 한 병에 3000원, 두 병에 5000원. 세워서 보관하고, 취객 되기 싫으면 반 병만 마실 것. 총알같이 쏘아대는 아저씨의 유쾌한 상품 소개에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이면 어느새 손에는 막걸리가 들려 있고(어째선지 절대 한 병만 사는 일은 없다), 뭐가 좋은지 배시시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집에 돌아와서 생각했다. 내가 산 건 사실 5000원어치의 웃음이고 서비스로 막걸리 두세 병 얻어온 거라고, 횡재한 거라고. 그러면서 혼자 킥킥대다 기분좋게 취해서는 간만에 행복한 숙면을 취했다. 스무살의 봄, 이것이 내가 나의 청춘을 예찬하는 방법이었다.△이신혁씨는 서울국제초단편영상제 최연소 초청감독을 맡았으며, 현재 아티스트 창작브랜드 Project SH대표, 총괄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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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15 23:02

'지니어스' 이준석과 홍진호

한 고려대 학생이 쓴 아날로그적 감성의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유행했다. 스마트폰과 SNS로 대변되는 21세기에 손으로 직접 쓴 대자보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러한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에 대한 반응들 중,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이었던 이준석이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청년들의 고단한 삶과 철도 민영화 문제를 연결시키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비판한 것이 눈에 띄었다.먼저 이준석이란 사람은 ‘지니어스’라고 말할 수 있다. 서울 과학고를 졸업하고 하버드대를 나왔으며, 20대의 젊은 나이에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을 역임했다. 하지만 내가 이준석이란 사람을 처음 본 것은 TVN의 예능 프로그램인 ‘더 지니어스 : 게임의 법칙’에서이다. 이 프로그램은 연예인을 포함한 각계각층의 13명이 플레이어로 참가해, 매주 게임을 통해 대결하여 1명씩 탈락시킨 뒤, 최종우승자를 가리는 프로그램이다. 그는 1회에서 프로게이머 홍진호와 연합해 비상한 전략을 세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탈락자를 가리는 데스매치에서 자기가 1회 메인매치 우승자로 만들어준 홍진호에 의해 탈락하고 만다. 다만 이런 홍진호의 배신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룰라의 리더였던 이상민이 홍진호가 잃어버린 가넷(지니어스 게임의 화폐)을 주워 다른 탈락 후보인 김민서에게 줬고, 김민서는 홍진호의 것을 마치 자신의 가넷을 주는 것처럼 속여 홍진호를 회유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자신을 우승하게 도와준 이준석과 자신에게 가넷을 준 김민서 사이에서 고민하던 홍진호는 이준석을 탈락시키는 선택을 했다. 이는 홍진호가 이상민과 김민서에게 속은 탓이기도 하지만, 이준석이 김민서보다 위험한 경쟁자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모략과 배신이 판치는 현실의 축소판인 ‘지니어스 게임’에서 ‘지니어스’ 이준석은 가장 먼저 떨어졌다.반면 1회에서 그를 떨어뜨린 홍진호는 이준석과 대조되는 사람이다. 일단 편모슬하에서 성장했고, 일반인은 ‘게임폐인’ 정도로 생각하는 프로게이머로 활동했다. 게다가 정규 리그에서 대부분 준우승을 해, 2등으로 유명한 프로게이머였다. 더군다나 1회부터 남에게 속아 넘어가는 어수룩한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프로게이머 시절의 실패와 고난을 통해 단련된 그는, 3번이나 떨어질 뻔 했으나 자신의 실력으로 끝까지 살아남아 ‘더 지니어스 : 게임의 법칙’에서 최종우승을 했다. 물론 이렇게 글을 썼다고 해서 이준석이라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새누리당 계열의 정치인이지만, 엘리트다운 자신감과 젊은이다운 열정을 방송에서 보였다. 또한 결승전에서 자신을 떨어트린 홍진호를 지지하며 그의 우승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현실의 ‘지니어스’ 이준석과 ‘더 지니어스 게임’ 우승자 홍진호를 나란히 놓고 보면, ‘안녕들하십니까’에 대해 이준석이 지적한 ‘논리적 비약’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서로 ‘안녕들하십니까’라고 물어야만 하고, 청년들이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철도민영화와 똑같이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현실이기 때문이다. 즉, 그가 ‘더 지니어스’에서 1회만에 탈락한 것처럼, 현실의 ‘지니어스’ 이준석조차도 안녕하다고 말할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눈앞의 현실과 그 이면의 구조적 문제를 제대로 봐야한다. 그들의 문제가 곧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문경득씨는 고려대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 사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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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08 23:02

잠시 내려놓기

헤라클레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신화의 영웅으로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엄청난 힘의 소유자였다. 신의 땅인 올림푸스에 올라가기 위해서 해라가 그에게 주어준 12가지 과제를 수행해야 했고 결국 누구보다 힘든 생애를 보내야만 했다. 헤라클레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들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해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면 그에게 주어져 그의 일생을 힘들게 만든 12가지 과업이 모두 헤라 여신의 속임수였는데도 말이다. 심리학자인 타이비 킬러는 헤라클레스 이야기가 인간의 중요한 심리적 태도를 보여준다고 했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인가를 이룬 다음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일단 집을 장만한 뒤에, 대학에 들어간 뒤에, 아이들이 좀 큰 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자” 등과 같이 말이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욕심이고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야만 나중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현재를 희생하고, 하고 싶은 일을 미래로 미루며 살아간다.대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취직을 하지 못한다. 지금 대외활동, 봉사활동을 해 놓지 않으면 내게 밝은 미래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정신을 옥죄고 몸을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기거나 친구와 잠시 여행을 떠날 시간이 생겨도 또 다시 자신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엇인가를 찾아 나선다. 물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어느 정도의 희생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꼭 내 젊음의 한 순간을 포기하면서 단순히 스펙을 위한 봉사활동이나 대외활동을 한다고 해서 혹은 1박 2일 동안의 여행 대신 TOEIC 책 한 번 더 본다고 해서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정말 다양한 대답들을 들을 수 있다. 기타를 배우고 싶다. 여행을 가고 싶다. 하루 종일 누워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와 같은 말들이다.어느 대학에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자신이 이틀 후에 죽는다면 지금껏 하지 못해 아쉬울 것 같은 일들을 종이에 적어보라고 했다. 학생들은 교수님의 말대로 내일모래 죽는다고 생각하고 못했던 것 하고 싶었던 것 들을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모두 적고 난 후 교수님이 학생들을 향해 “종이에 적은 것들을 지금 당장 실행 하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사실 지금 당장 바빠서 하지 못하거나 위 사례처럼 죽기 이틀 전에 후회할 만한 일들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아마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잠시 미뤄둔 것들도 많을 것이다. 기타를 배우고 싶었다면 지금 당장 친구, 선배 혹은 학원이라도 찾아가서 배우면 되고 하루 종일 누워서 아무 것도 하기 싫다면 잠시 하던 일들을 멈추고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된다.앞으로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걸음 물러나거나 멈추어서 숨을 고르는 것도 필요하다. 이제 2013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이 소중한 시간을 희생하면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 지금껏 미래를 위해 포기하고 옆으로 미뤄놨던 일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당장 시행해 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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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2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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