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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 창출' 장사꾼? VS '시장 창출' 창업가!

미국 뉴욕에 가면 쓰레기를 파는 사람이 있다. 도시 한복판에 버려져 있는 쓰레기를 주어서 포장해 놓으면, 관광객들은 그것을 구매한다. 도시의 골칫덩이로만 여겨지던 하찮은 쓰레기가 뉴욕이라는 곳을 추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관광 상품이 된 것이다. 이 사업은 2001년부터 시작해 뉴욕뿐만 아니라 미국 내 40여 개 주, 나아가 30여 개 국가에서도 주문이 들어온다고 한다. 일본의 한 마을에서는 낙엽을 판다. 매년 처치 곤란할 정도로 많은 낙엽이 길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예쁘고 건강한 낙엽들을 골라서 다양하게 상품을 만들었다. 음식을 고급스럽거나 예쁘게 장식하는데 낙엽을 사용하도록 시장을 만든 것이다. 낙엽을 팔아 발생하는 수익금으로 온 마을 사람들이 먹고 살 정도다. 한국의 전주한옥마을에서도 비슷한 프로젝트가 진행됐던 적이 있다.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를 주어서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관광객들에게 선물이라며 돌멩이를 건네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쓸모없고 돌멩이를 받은 관광객들은 종종 당황하긴 했지만, 자신들의 SNS를 통해서 ‘전주한옥마을에서 선물 받은 돌멩이’라며 손바닥 위에 아기자기하게 올려놓고 찍은 사진들은 인터넷을 통해서 게시되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받은것인지, 누구에게 받은것인지’를 묻는 댓글도 눈에 띄었다. 2012년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아무리 사소한 돌멩이라도 사람이 사람에게 전달하면 의미와 가치가 생긴다는 나의 개똥철학이 기반되었고, 전주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돌멩이를 매개체’로써 이 곳, 이 곳에서 만난 사람을 기억할 수 있게 하기 위한 프로젝트 의도를 설명했다. 현재는 돌멩이를 받기 위해서 불가능공장을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생겼다.길에 버려진 쓰레기, 흔하게 떨어져 있는 돌멩이 등 두 가지 사례를 보자면 ‘무엇(WHAT)’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HOW)’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바꾸어 나갈 것인지 과정이 더 중요해 보인다. 창업을 시작했다가 ‘시기가 빨라서’, ‘아이템이 안 좋아서’라고 투정을 부려봤다면 ‘어떻게’라는 질문을 안고 다시 한번 생각해봐도 좋다. 기존에 형성된 시장에서 큰 자본이나 마케팅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장사와 기존에 없던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시장을 창출’하는 창업은 분명 다르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있듯이 창업에 있어서도 초기 자본의 중요성은 누구나 알고 있다. 돈 없고, 전문성 없고, 경험 없고, 인력 없고, 인맥도 없는 청년이 창업을 시작하게 된다면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까.수익을 창출하는 방향보다는 시장을 만드는 방향으로 접근을 차근차근 걸어나가 보자. 나만의 고객을 만날 수 있는 틈새시장도, 나만의 고객을 만날 수 있는 홍보 채널도, 나의 가치를 필요로 하는 동료를 찾고, 내가 변화시키고 싶은 세상에 대한 신념을 세우는 것이다. 물론 더 어려운 숙제라는 것을 알지만, 청년 창업가들은 마땅히 이 도전을 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자산 ‘시간’이라는 걸 최고의 무기로 사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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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3.04 23:02

휴학을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학생기자 시절, 처음 기사를 쓸 때 쉼표는 애매모호하고 어려웠다. 쉼표의 용법이 있지만 글을 쓰다보면 괜히 넣게 되곤 했다. 뭔가 끊어줘야 할 것 같았고, 모든 내용을 한 문장에 담으려 했기 때문이다. 쉼표를 넣다보면 문장이 길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은 여러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쉼표를 빼면 문장이 어색해졌다.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쉼표는 의미를 부각시켜주기도, 살을 이어주기도 하지만 제때 사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의미를 변질시켰다.며칠 후면 4학년이 된다. 새내기로 첫 발을 내디딘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끝이 보인다. 아직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회에 나갈 준비는 안 된 것 같은데 대학생활을 마무리해야 한다. 내 또래라면 한번쯤 휴학을 고민하고 있다. 학과가 적성과 맞지 않아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서, 사회에 나가기 전 잠시 쉬고 싶어서, 취업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물론 등록금이란 불가피한 이유로 휴학을 하는 이들도 있다.휴학에 대해 누군가는 한번쯤 필요하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시간만 버릴 뿐이라고 한다. 실제로 휴학기간을 알차게 보낸 학생이 있는 반면, 왜 했나 싶은 학생도 있다. 계획도 없이 어영부영 보내는 이들, 졸업과 취업 앞에 도피처로 삼는 이들이 적지 않다. 휴학 슬럼프에 빠져 뭐하나 제대로 못해보고 복학하기도 한다. 다들 한번쯤 하니까 따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휴학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자격증, 어학, 시험 등 공부에 매진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여러 경험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분명 ‘나만의 시간’이 필요한 이들에게 휴학이란 쉼표는 적절한 선택이다. 결국 휴학을 결정할 수 있는 열쇠는 스스로 갖고 있다. 우리는 각자 환경과 생각, 꿈이 다르다. 하나에만 집중할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학교를 다니며 취업을 준비하는 것이 나은 경우도 있다. 대학의 공부가 의미 없는 경우도 있고, 전공을 살려 진로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여러 상황들에 따른 판단은 스스로의 몫이다.지금 찍으려는 쉼표가 나란 문장에 있어 옳은 지점일까? 해답도 없고, 오답도 없는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고민하고 있다. 경험자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각종 사이트에서 정보를 찾아보기도 한다. 계획을 써내려가다 지우기도 한다. 삶에 어떤 계기가 될지 모를 시간을 결정하기 위해. 그 선택에는 어느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있길 바란다. 더불어 이미 내린 결정에는 흔들리지 말고 나아가길 바란다.소설가 황석영 씨가 「개밥바라기별」에서 작가의 말로 전한 메시지는 휴학에 대한 결정을 내린 이들에게 조금은 자신감을 줄 것 같아 마지막으로 남긴다.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다만 자기가 작정해둔 귀한 가치들을 끝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너의 모든 것을 긍정하라고 말해줄 것이다. 물론 삶에는 실망과 환멸이 더 많을 수도 있지만,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때려치운다고 해서 너를 비난하는 어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다. 그들은 네가 다른 어떤 일을 더 잘하게 될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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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25 23:02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올해 스물다섯 살. 키는 178, 몸무게는 67kg에 덩치에 비해 어깨가 넓고, 쌍꺼풀이 없는 매서운 눈에, 숫기가 없어 처음 보는 사람들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것을 못한다. 또 웃을 때 잇몸이 크게 보여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어색하게 웃는 버릇을 포함, 이런 눈에 보이는 몇 가지만을 가지고서 사람들은 나를 어려운 사람으로 여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지인들을 만날 때면 항상 아래와 같은 질문으로 사람들을 귀찮게 하곤 했다. “야, 네가 볼 땐 난 어떤 사람인 것 같아?”, “오늘 어때 보여?” 물론 눈앞에 있는 누군가를 당장 몇 마디의 말로 평가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나로선 행여 인상이 나쁜 사람으로 보이진 않을까, 또 약간 바보 같거나 촌스러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까 매번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들에게 내 성격이나 행동들을 확인받으면서까지 ‘좋은 사람, 멋진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들이 꽤 있을 거다. 모르는 것도 아는 척, 없는 것도 있는 척, 휴대폰으로 사진 찍을 때마저도 최대한 밝고 예쁘게 나오는 곳을 찾아낸 후 20, 30번을 연달아 찍은 사진 중 제일 잘 나온 것을 프로필로 설정해놓고는 그게 정말 내 모습인 것처럼 누군가를 교묘히 속이며 나를 감추는…. 이렇듯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하며, 진짜 내 모습이 아닌 내가 만들어 낸 ‘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치길 바란다. 나 또한 그런 행동들을 서슴지 않았는데, 중학생 때는 친구들 앞에서 남들 모르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힘들게 산 비싼 신발을 신고서는 엄마에게 선물을 받은 척을 하기도 하고, 20살이 돼 친구에게 소개받은 여자 앞에서는 친하지도 않은 유명한 가수들을 친한 형이라며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밖에서의 그런 내 모습들이 너무 ‘짝퉁’ 같이 느껴졌다. 애초에 명품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전에 ‘짝퉁’이 돼버린 학창시절 나의 모습은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그 생각을 하게 된 이후로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보이는지 지인들에게 일일이 물어 검사를 맡지 않았나 싶다. 남들이 보면 취향 독특하다 할지 몰라도 나는 여자라면,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에 평범한 운동복 차림의 여자를 좋아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화장을 하지 않은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 죽을 만큼 꺼려하고, 힐은 여자의 자존심이라며 이 세상에서 가장 도도한 표정으로 보도블록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지만, 내게 그런 모습은 말 그대로 여자들의 ‘겉치장’으로 느껴졌다. 하루는 그런 ‘겉치장’에 목매곤 했던 당시 여자친구에게 물었다. “난 화장 안한 네 모습이 더 좋아. 화장을 좀 옅게 하면 안 돼?” 그러자 그 친구는 화장을 하기 시작한 후로 거울을 볼 때면 화장을 하지 않은 자신의 맨 얼굴이 TV 속에 나오는 연예인들이나, 길거리를 쏘다니는 화려한 여자들의 얼굴들에 비해 너무 초라하고 초췌해 보여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렇다. 누구에게나 멋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존재하고, 그 욕망의 시작은 보통 외로움이나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서 시작되며, 결국 모두가 원하는 그 끝은 나를 보는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안타깝게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제아무리 감추고 숨겨봐도 ‘나는, 나’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언젠가는 깨닫게 돼 있다. 오늘 하루 중 거울을 보았을 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면 자신을 위해 한 번쯤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다. 그동안 잊고 있던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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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11 23:02

청년 복지가 잘 된 도시? 스스로 해결하는 청년 도시!

생각이 살아 꿈틀거리는 도시, 놀라운 실천력으로 변화를 이끌어가는 도시,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꿈의 도시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은 누구의 몫일까. 이러한 설레이는 상상을 하기 이전에 우리들이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있다.지방의 도시들은 젊은이들이 지역을 떠나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떠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많은 고민들을 한다. 이러한 현상들이 발생하게 된 것은 더 큰 세상에 대한 동경 때문일 수도 있고, 현재 살고 있는 공간에서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 때문일수도 있다.청년에 대한 문제점을 찾고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전북 지역에 살고 있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청년들의 어려움, 불편함, 혹은 필요한 것들을 먼저 조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지난달을 시작으로 전주시는 ‘청년다울마당’이라는 포럼을 정기적으로 진행을 하고 있다. 청년 정책을 만드는데 있어서 ‘성공한 좋은 정책’ 보다는 ‘정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무게 중심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첫 번째, 다양한 입장을 가진 주체의 참여가 필요하다. 스스로 위로 받고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친구들의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것, 문제의식조차 없는 등 여러 가지 입장이 있다. ‘기존 지역에 많은 관심을 두고 활동했던 활동가’를 넘어서 불특정 다수의 청년 참여를 이끌어 내자.두 번째, 의견을 축적하고 문화로 이어나갈 공간이 필요하다.비슷한 생각, 관심사를 가진 청년들이 함께 모여서 토론하고 공동 작업할 공간은 많은 시너지 효과를 가진다. 이것은 단지 하드웨어를 위한 관점 보다는, 소프트웨어를 위한 관점으로 봐야 한다. 소소하지만 용감했던 청년활동들이 단기간 안에 끝나고 증발되는 일이 많다. 이런 활동을 모아서 콘텐츠로 저장하고 축적해 문화로 발전시켜나가야 하는 공간의 기능을 강화시켜야 한다. 세 번째, 만들어줄 것인지 만들게 할 것이지 방향을 잡아야 한다.청년이 가진 문제의식에 대한 안건들을 지자체의 예산과 전문가의 투입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제공해 줄 것인지, 혹은 하고싶은 것이 있는 청년들에게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기회를 제공할 것인지 두가지 관점에서 방향성을 명확히 잡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지자체(민간단체, 기업)에는 각 분야별로 정해진 예산으로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그 일들을 청년들에게 해볼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어떨까? 그 과정을 통해서 경험을 쌓는 교육의 관점으로 청년들의 역량을 개발하고, 지역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돕는 것, 지역에 관심가지고 머물게 하는 것, 나아가 일자리를 스스로 만드는 것 등 이들에게 기회를 줘보자. ‘청년’이라는 단어가 나이를 의미하진 않는다고 다들 알고 있다. 청년다운 생각. 나보다는 타인과 사회에 관심가지고 고민하는 청년들이 그리 흔한 세상인가. 그래도 그 날을 기대해본다. 제 밥값은 제가 해결하고 전북이라는 지역에서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청년들이 많아지길 바란다.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청년 복지’가 잘 된 도시가 될 것이냐.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청년의 도시’가 될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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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04 23:02

전구는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다

가끔 빨리 나이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이 시기가 지나갔으면 좋겠다. ‘그땐 그랬지’하며 지금을 추억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싶다. 아름답고 빛나는 청춘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청춘이라, 젊으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겪어야 할 차별이 싫기 때문이다.젊음은 한번 지나가면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다. 청춘이기에 실수를 해도 실패하지 않을 수 있고, 틀려도 바로 잡을 기회가 있다. 노하우는 부족하지만 잠재력은 충분하다. 물론 전문가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 경험이 없어 서툴다. 배우면서 일을 하다 보니 느리다. 그럼 청년은 사회를 배움의 기회로, 경력 한 줄로만 살아가야 할까? 한 일, 들인 시간보다 대우를 받지 못해도 견뎌야만 하는 걸까? ‘너의 열정을 발휘할 기회를 줄게. 대신 임금은 바라지마(없어).’ ‘열정페이’ 덕분에 청년들에 대한 차별이 사회문제로 거론되고 있다. 몇몇 업계에서 거론된 청년의 부당한 대우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 견습, 인턴, 교육생, 알바 등으로 존재하는 비일비재한 모습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이유로 목소리 한 번 내기 어렵다. 억울하지만 ‘그것도 못 견디면서 뭘 하겠냐’는 말을 들을까봐 이 악물고 버틴다. 하고 싶은 일이 청춘들에게 독으로 다가온다. 열정은 꿈을 실현시키기보단 잔혹한 현실을 경험하게 해준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이들을 부러워하고 싶지만 그들의 현실은 슬프다. 열정을 가진 청춘들에게는 대우가 아닌 희생만 주어지고 있다.우리는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기도 전에 당장 몇 년 뒤 취직을 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꿈은 오래 전 현실적인 단어에서 이상적인 단어가 됐다. 대학에 가서 하고 싶은 것 하라던 어른들의 말은 안정적인 직장 잡으면 하고 싶은 것 찾아 취미생활로 즐기라는 말로 바뀌었다. 삶의 기준을 사회의 기준에 맞추려다보니 하나, 둘 포기하게 된다. 이젠 우리보고 연애, 결혼, 출산에 인간관계, 내 집 마련까지 포기했다고 ‘오포세대’란다. 우리가 포기했다기보다는 사회가 포기시켰다고 해야 맞는 말 같다.누구나 꿈은 있다. 젊음에 열정, 수많은 기회까지 있는 청년들은 오죽할까. 청년은 도전해보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이들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청춘의 현실은 열정의 보상이라곤 최저시급도 되지 않는다. 결국 마음 안에 있던 꿈과 열정은 더 깊숙이 집어넣게 된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따르게 된다.청춘들이 안타깝다고 굳이 위로를 보낼 필요는 없다. 따뜻한 말 한마디는 잠깐일 뿐이다. 지금 상황이 문제라고 느껴진다면 사회에 발을 내딛은 청년을 붙잡아 줬으면 한다. 지금까지 이어진 ‘열정페이’에 대한 악습을 끊고 청년의 열정을 제 값에 사주길 바란다. 안타깝다는 마음보단 변화를 위한 행동을 해주길 부탁한다. 청춘은 새 전구다. 빛날 잠재력을 갖고 있다. 전구의 종류가 다양하듯 각자 성격과 재능도 다르다. 전구는 아무리 아름다운 빛을 가졌다 하더라도 에너지가 없으면 그 빛을 낼 수 없다. 형형색색의 전구들이 있어도 한 곳에만 모아놓으면 의미 없기 마련이다. 사회가 청년들이 각자 제자리에서 빛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아름다운 빛들의 향연을 볼 수 있지 않을까?△김도연 전 편집장은 전북대 공과대학 도시공학과에 재학 중이며 전북대신문사 학생기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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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28 23:02

'용' 안 돼도 괜찮아

요즘 한국 사회를 묘사하는 말 중에 “개천에서 용이 못 난다.”라는 얘기가 있다. “용 난다는 개천은 시궁창 돼”라고 제목을 단 신문기사도 본 적이 있다. 거기 담긴 문제의식은 요컨대 더 이상 개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계급상승을 이룰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소위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뜻이며,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희박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학교 교육과 입시에서부터 잘 사는 가정이 더 유리하고, 소득은 양극화되며, 부동산 등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더 쉽게 이득을 보는 현실을 볼 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그런데 그런 얘기를 들으면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는 과연 어땠을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성공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좀 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이른바 ‘명문대’에 들어가고 고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분명 ‘용이 못 된’ 많은 이들이 있었으리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삶은 괜찮았던 것일까. 모두에게 원치 않아도 경쟁에 뛰어들라고 등 떠밀고 ‘등용문’을 노리는 법만 가르친 시대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노력하면 개천을 탈출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정작 개천의 부조리나 열악한 상황은 고쳐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신화는 그 밑바탕에 일종의 능력주의를 깔고 있다. 그리고 그 뒷면에는 차별의 정당화가 자리한다. 몇몇 성공의 사례들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겪을 불이익과 차별을 그들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잠자코 받아들이게 하는 근거가 된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가혹한 경쟁체제와 그 결과에 순응하게 한다. 경쟁교육, 학벌주의 등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먼저 성적과 학벌을 물으며 자격을 따지는 것은 그 한 단면이다. 용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피해를 입는 이들이야말로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말이다.과거에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안 된다, 다시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시스템을 개혁하지 않은 것 자체가, 어쩌면 차별을 누적시켜 양극화를 만들어내고 지금 ‘개천’을 ‘시궁창’으로 만든 하나의 원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용’의 신화 자체가 현재의 시스템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성공 가능성이 아니라, 개천에서의 삶 전반을 보편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애초에 개천과 바다를 나누고 용이 된 자만 박수와 보상을 받는 차별과 승자독식의 시스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자신의 출신에 상관없이 노력과 능력을 통해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모두가 ‘용’이 되어야 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미꾸라지, 송사리, 개구리, 붕어, 메기 등 다양한 삶이 있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들 모두가 나름대로의 모습으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경제 상황 속에서 다시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을 부활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도 의심스럽지만, 그건 애초에 잘못된 해결 방향이기도 하다. 복지제도이든 입시폐지이든, ‘용 안 돼도 괜찮은’ 사회를 만들어갈 방법, 그것이 지금 우리가 찾아야 할 길일 것이다.△공현 청소년 인권운동가는 월간지〈오늘의 교육〉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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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21 23:02

생각의 전환, 혼자서도 잘 노는 법

맞벌이를 하시던 부모님은 항상 집에 혼자 있는 나를 위해 일주일에 한번 씩 음반을 사와 들려주시곤 했다. 그로 인해 어릴 적부터 외동으로 자라 외동으로 커온 내 삶에 있어 가장 처음 느껴본 즐거움은 대 여섯 살 때 집에 있는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김건모의 ‘스피드’를 들으며 혼자 춤을 추던 때가 아니었을까.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가정, 다른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학창시절 같이 놀던 친구들, 또는 사회의 어떤 무리와 멀어져 혼자 있게 되는 순간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이를테면 학교, 학원, 직장 같은 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밖에 있다가 집에 들어와 신발을 벗을 때마다 허무함을 느끼는 그런 순간들 말이다.그렇다면 그런 순간들을 즐길 수는 없는 걸까?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의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친구들 중 유독 혼자 있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해 만날 때마다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며 매번 내 발목을 잡던 녀석이 있다. 하루는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CD를 몇 개 사더니, 어느 날 비어있던 책상에 디제잉 장비가 떡 하니 놓여있는 게 심상치 않았는데. 세상에 길은 많고 정답은 없다 했던가. 지금 그 친구는 하루에 몇 시간씩 시간을 쪼개 꼬박 꼬박 음악을 듣고 주말마다 클럽에서 디제이를 하며, 어느새 친구들 사이에서도 ‘재밌게 사는 놈’ 으로 불린다.사실, ‘혼자서 노는 법’ 따위는 나도 잘 모른다. 애초에 누구에게 고민처럼 말하거나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을만한 그런 거창한 일이 아니니 혼자서도 잘 먹고 잘 노는 법은 젓가락질 하는것 만큼이나 간단하다. 비록 남들이 보기엔 쓸데없는 짓처럼 보일지라도 내가 혼자 있을 때 심심함을 느끼지 않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누가 뭐라 한들 그것이야말로 ‘혼자서도 잘 노는 법’ 인 것이다.누군가 내 옆에 있을 때는 절대 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이던 ‘영화관에서 궁상맞게 혼자 영화를 보는 일’도 몇 번 해보고 나니 더 이상 여자친구나, 친구들에게 보고 싶은 영화를 양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재미가 들렸는지 요즘엔 혼자서 보고 싶은 영화들은 따로 적어두기까지 한다. 전에는 지겨워 한숨 나오던 혼자만의 시간들이 지금은 오히려 아쉬운 순간들이 되었다.그런 아쉬움들이 차츰 쌓일 때쯤엔 젊거나 늙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누구는 자전거를 탄다더라, 누구는 요리를 한다더라 같이 들리는 소문에 저절로 귀를 기울이게 되고, 나이와 내가 속한 사회의 직책을 떠나 앞으로 주어진 내 시간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 만큼 고민되는 일도 몇 없을 거다.존카니 감독의 <비긴 어게인> 이란 영화를 보면 마지막 즈음 이런 훈훈한 대사가 나온다. “이래서 내가 음악을 좋아해. 가장 따분한 순간까지도 갑자기 의미를 갖게 되니까. 이런 평범함도 음악을 듣는 순간 아름답게 빛나는 진주처럼 변하지. 그게 음악이야.”상투적 일 수도 있지만 뭐든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왠지 모르게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아주 간단한 생각의 전환만으로 늘 홀로 다니던 지옥 같은 출·퇴근길이 정말로 지옥처럼 느껴질 수도, 혹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걷는 산책로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미 이 문제의 답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긴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야 깨닫고 만다는 것이다. △문이랑 프로듀서는 인디레이블 YOUNG, GIFTED&WACK 소속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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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14 23:02

지식을 배우는 대학? 인생을 배우는 대학로!

“그게 세상을 바꾸고 있는 거라고?”2009년, 재학중인 대학교 인근의 동네 상가를 돌아다니면서 ‘쿠폰이라는 매체를 만들자’고 상인들에게 ‘땡깡’부리는 일은 학교 공부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게 했다. 취미나 전공으로 예술활동을 하고 있는 학우들을 찾아가 ‘길거리에서 공연 한번 해보자’며 음치 박치 몸치의 대표주자인 내가 이야기를 꺼내니 도통 설득이 되질 않는다. 기숙사에서 대학가 상권까지 걸어서 20분이나 떨어진 거리를 걸어다니기가 귀찮다는 핑계로 ‘버스를 만들자’고 아이디어를 냈지만 버스 운전부터 배워야 할 실정이였다.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냐?”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꼭 필요해 보이지 않은 일을 할 [시간]에 스펙을 쌓으라던 친구들, 일을 하려면 [돈] 되는 걸 하라는 상인들, 학과의 [전공]을 잘 살려서 그 분야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교수님들, 무엇보다 [안정적인 삶]을 선택하길 원하는 부모님까지도 먹고 살기 힘든 시대의 청춘들에게 걱정 넘치는 걱정을 보여주셨다. ‘하고 싶은 일 = 해야만 하는 일’이 공식이 성립되는 삶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가능 할 수도 있지만, 꼭 가능한 것에만 도전하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 또한 식상하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거라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지,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답을 찾기 어려웠지만 내가 이론을 만들어 간다는 생각에 설레임을 가질 때도 있었다. 대학이라는 곳은 전문지식을 배우는 곳일 때보다 ‘내 것’을 가지고 질문할 때 더 재미있다는 걸 졸업하고 나서야 알았다.“그러나, 여전히 상상하고 설렌다”술, 당구장, 노래방, 음식점으로 건물 틈새까지 가득 메운 상점들이 즐비한 대학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상상 ‘어디 갈까? 뭐 먹을까?’ 그 이상의 질문들을 해보자. 음식을 사먹는 식당 보다는 여자친구를 위해 맛집 스파게티 요리를 배우는 요리 학교 !음료 마시는 커피숍 보다는 비슷한 고민의 청춘들이 모여 지식을 공유하는 인문학 학교 ! 잠자는 원룸과 자취방 보다는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청춘들이 함께 사는 쉐어하우스 !전북대 뒷동 건지산 보다는 숲과 나무로 인테리어 된 전국 최대의 힐링 강의실 !대학생이기 때문에 더욱 실감하는 대학로의 문제점과 불편함을 기회로 바꿔낼 수 있는 시기가 온 것 같다. 올해부터 청춘들이 모이는 전북대 대학로가 20대 문화공간으로 변화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길 계획이다.우리 청춘들은 지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전북대 대학로를 ‘바꿀 사람은 누구인지,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은 누가 해야만 할까. 그 주역이 대학가를 이용하는 20대이면 좋겠고, 전북대를 잘 알고 있는 지역 청년이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는게 꼭 거창하지 않아도 되고 거창해 보일 필요도 없다. 꼭 내가 주역이 아니더라도 세상은 변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마을, 도시, 대한민국 이런 지역의 변화들 속에서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은 분명히 있다. 혹시라도 자신이 꿈꾸는 대학가를 상상해 본 경험이 있는 청춘이라면 지금! 여기! 시작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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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07 23:02

영웅이 될 청춘들에게

요즘 가장 뜨거운 대화 주제는 ‘땅콩리턴’이다. 땅콩리턴은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이 일등석은 반드시 땅콩을 그릇에 담아야 하는 매뉴얼을 어겼다며 항공기를 램프 리턴 시켜 승무원 사무장 한 명을 내리게 만든 사건이다. 슈퍼甲을 보여준 조현아씨는 지금 대가를 치르고 있다. 모든 보직에서 물러나고 있으며 법적인 책임도 져야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과에는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고개 숙여 사과하는 모습에서 무서운 눈빛을 비치는 등 사건을 더욱 크게 만들고 있다. 이에 반해, 10개월 전,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이 80대 택시 기사에게 베푼 4억 원 가량의 보상금을 포기한 선처는 다시 한번 재조명되어 칭찬을 받고 있다.이부진 사장의 행동은 당연히 칭찬 받아야 할 일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라는 말을 몸소 보여준 몇 안되는 재벌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람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 당연히 저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상황과 상대의 상황을 보고 상식적으로 상대방이 감당하기 어려우며 나에게 큰 피해가 아니었을 때 받아야 할 것을 ‘포기’한 이부진 사장은 특별한 일을 하기로 선택했다. 우리가 말하는 ‘영웅’이 된 것이다. EBS에서 만든 지식채널e 영상 중 ‘누가 영웅이 되는가’라는 영상이 있다.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한 시민, 목숨 걸고 유대인을 숨겨준 독일인,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반대한 백인 등 편한 길을 포기하고 용기를 내 한 행동으로 영웅이 된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하며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영웅이 될 수 있는 자질은 무엇인가요?”. 사람들의 대답은 같았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한 것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행동이 영웅적이어서가 아닌 당연히 사람이라면 그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하철 영웅 웨슬리 오트리는 “제가 한 일은 특별했지만,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이제는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일을 보고 감탄만 하고 있으면 안된다. 특별하지 않은 우리도 충분히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친절하고 상냥한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건네보자. 돈을 내고 밥을 먹을 때도 당연히 내가 누려야 할 서비스를 받는다고 생각하기 보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친절한 말을 해보는 것이다. 2014년 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슬퍼하며 울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점 더 매몰차졌다. 자신이 화가 나면 다른 사람의 것을 망설임 없이 부수고, 앞에서 사고가 일어나도 핸드폰부터 꺼내서 찍는 모습을 보여줬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내는 것이 특별하게 보일 정도로 차가운 사회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변한 사람들의 마음을 우리가 녹였으면 한다. 2015년을 힘차게 맞이해서 우리 청춘들이 ‘영웅’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친절한 인사를 건내고 웃으며 이야기 하고, 작은 일에도 감사하다고 말해주고 힘이되는 말만 하자. 누군가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줬을 때 “어? 그건 당연히 해야되는 일 아니야?”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회, 영웅들이 가득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이 희망은 우리가 반드시 이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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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31 23:02

탈핵, 우리의 미래

2011년 3월 11일. 원자로 격납용기의 수소폭발로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누출된 일본 후쿠시마 핵사고가 발생한다.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 사고와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사고에 이은 세 번째 대형 핵사고였다. 이로 인해 일본 전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방사능의 공포가 확산되었다. 그 후 3년여가 지난 2014년 현재,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핵발전소를 보유하고 있는 대한민국에 또 다른 공포가 밀려오고 있다.지난 3일,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는 부실자재 인코넬 600이라는 합금소재가 사용된 한국의 원전에 대해 경고했다. 원전의 핵심시설인 증기발생기와 원자로헤드 등에 사용되는 인코넬 600이 부식과 균열의 위험이 있어 최악의 상황에서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와 같은 대규모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광의 한빛 3, 4호기에서는 증기발생기 내의 전열관과 원자로헤드의 균열이 진행 중이다.사실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핵발전소를 계속해서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독일, 벨기에, 스위스 등의 유럽국가에서는 탈핵이 진행 중이다. 세계에서 핵발전 의존도가 가장 높은 프랑스도 뒤이어 탈핵을 위한 길을 걷고 있다.반면 한국은 현재 운영 중인 24기의 원전 외에 4기의 원전을 건설 중이고, 추가적으로 6기의 원전 건설을 계획하며 오히려 원전을 확대하고 있다. 이로도 모자라 삼척과 영덕에 신규 원전을 건설하기 위해 부지선정을 놓고 주민들과 마찰을 빚고 있으며, 노후원전인 고리·월성 1호기에 대해서는 수명연장을 심사하고 있는 실정이다.핵발전소를 확대하기 위해 정부는 핵에너지가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아 친환경적이고, 발전 단가가 저렴하여 경제적이라고 지속적으로 홍보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모두 사실과는 다르다.먼저 핵에너지가 친환경적이라는 주장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원전 건설과 우라늄 정제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의 양이 적지 않을뿐더러, 가장 중요한 핵폐기물 처리 문제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용 후 핵연료라고도 불리는 고준위 폐기물은 10만년 이상 보관해야하기 때문에 이것이 인간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가늠할 수조차 없다. 다음으로 현재 전기요금의 원가에는 원전폐로비용과 핵폐기물 처리비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다음세대가 짊어질 이 비용까지 생각하면 핵에너지는 결코 경제적인 에너지가 아니다.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태양광, 풍력 등의 재생가능에너지의 개발이다. 지금까지의 인식과는 달리, 처음의 시설 설치비용 외에는 연료비가 전혀 들지 않는 재생가능에너지의 원가는 시간이 갈수록 내려간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2010년 처음으로 재생가능에너지의 원가가 핵에너지보다 낮아졌다. 덕분에 2011년에는 재생가능발전이 핵발전에 비해 더 많은 전기를 생산했다. 더군다나 재생가능에너지는 자연의 힘을 이용하기 때문에 당연히 친환경적이다.이처럼 지금까지의 대형 핵사고와 잦은 고장, 그리고 후대로 전가된 부담들로 미루어보아 분명 핵에너지는 미래를 위한 에너지가 아니다. 따라서 이를 대체할 에너지를 개발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탈핵이라는 세계적인 흐름에 동참하고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전환이 필요한 이유다. 하루라도 빨리 탈핵에 대한 논의와 합의가 진행되어 안전한 대한민국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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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24 23:02

존중으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학교

벌써 일 년이 마무리되어 간다. 우리가 올해 이룬 것이 무엇인지, 내년 살림은 어떻게 꾸릴 것인지 이모저모 정리하느라 마음이 바쁜 시기다. 새해가 오면 새로운 모습으로 좀 더 온전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모두가 바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달력이 넘어가듯 자연스럽게 새로이 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정말 진리일지라도 말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동굴 우화의 형식을 빌려, 틀을 깨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동굴에 갇힌 죄수들은 동굴 벽에 그려진 환영에 사로잡혀, 스스로 동굴 밖에 나올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런 그가 동굴 밖에 나왔을 때 태양 빛의 찬란함을 보게 되었고 다시 동굴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자신이 보고 온 바깥 세계, 즉 새로운 세상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동료들의 불신과 냉대였다.이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이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몰고 온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혁신은 지속적 긴장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존까지 당연히 여겨왔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요구한다. 그렇지만 혁신은 해방이기도 하다. 우리는 혁신을 통해 스스로의 사고와 환경들을 변화시키고 재구축하여 진실된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다.변화하는 교육 환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요구한다.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가 행복한 학교를 건설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키워드를 공유할 수 있을까? 나는 바로 ‘존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존중을 실천하며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 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첫째, 학생의 다름을 존중하는 학생중심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학생들의 다양성에 따른 다양한 교육 방법들이 시도되고 이러한 변화가 존중받을 때 진정한 학생 중심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교사의 자발성이 존중받아 스스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교사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사회적으로도 신뢰받고 있을 때 전문가로서의 집단 지성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교사들 스스로 반성하는 성찰을 통해 전문성을 신장시키는 노력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우리에게는 이러한 움직임이 존중받는 문화가 필요하다. 셋째, 학교와 지역사회가 서로 존중하고 소통하는 교육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 지금까지 삶과 분리되어 있던 교육을 우리의 실제적인 삶으로 끌어오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일이 필요하다. 교육과 지역사회가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유기체가 되어, 학교가 지역 문화를 재생산하고 지역 감수성을 회복하는 장이 될 수 있도록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교육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바꾼다. 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세상을 다르게 이해한다면 삶에 대해 다른 태도를 지니고 다른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고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을 가졌다는 점에서, 교육을 일구는 학교 모두가 세상을 바꿔가는 혁명가들이다. 작은 풀꽃 하나하나로부터 시작하여 교육 구성원 모두의 생명력을 ‘존중’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다. 학생, 학부모, 교사, 지역사회 모두가 존중을 바탕으로 서로 대화를 열어갈 때 학교는 행복한 공동체의 장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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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17 23:02

위대한 판결, 그리고 우리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대 어느 겨울 밤, 뉴욕 즉결 법정에 한 노인이 서게 되었다. 사위는 실직하여 집을 나갔고, 노인은 굶주리던 손자들을 보다 못 해 빵집에서 빵을 훔치다가 붙잡히게 된 것이다. 초범이었던 데다가 노인의 딱한 사정을 듣게 된 방청객들은 선처를 기대했다. 그러나 판사는 단호했다. “사정이 딱하더라도 훔친 것은 잘못입니다.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방청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판사는 계속했다. “하지만 노인이 빵을 훔쳐야 하는 이 비정한 도시의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제 자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여기 모인 뉴욕의 시민들에게도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판사는 10달러를 모자에 넣고 방청객들에게 돌렸다. 곧 57달러 50센트가 모였고, 판사는 10달러의 벌금을 제외한 47달러 50센트를 노인의 손에 꼭 쥐어 주었다. 이 판사가 바로 뉴욕 시장을 세 번이나 연임하며 뉴욕 역사상 최고의 인물로 불리는 피오렐로 라 과디아다. 인류는 재물을 향한 탐욕에 중독되고 그로 인해 세계는 증오 속으로 던져졌다. 사람들은 돈 때문에 살고 돈 때문에 죽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도구적 이성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한다. 지식은 우리를 냉정한 존재, 냉소적인 존재를 만든다. 끝없는 탐욕에 중독된 기득권층은 그들의 지속적인 영위와 풍족함을 위해서 ‘없는 자들’을 더욱 착취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빼앗지 못하도록 성장의 길을 철저히 봉쇄한다. 국가의 1%들에게 나머지 99%가 귀속되는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그와 함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세계 속에서 인간들 사이의 정은 희귀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또한 기술의 발전으로 인류는 전 세계의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오히려 사람들의 ‘진짜 소통’은 점점 줄고 있다. 이제는 손바닥 크기의 기계가 없으면 지척에 친구를 두고도 만나지 못하는 시대이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본질적으로 깊은 감정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인류는 역사상 가장 급속도로 발전을 이룩하는 시대 위에 서 있지만 그와 동시에 역사상 가장 감정이 메마른 시대 위에 서 있기도 하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우려했던 대로, 과학 기술이 인간 사이의 소통을 뛰어 넘고 있다. 우리는 급속도로 발전을 이룩했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갇혀버리고 말았다. 하나의 기계와 지식보다는 소박한 인간성, 친절과 관용, 정이 더욱 많은 것을 해낼 때도 있다. 인류가 동물 사회에서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연대감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인류는 다 같이 화합하고 모두가 함께 나아가기 위해 발전을 거듭해 왔다. 하지만 그러한 업적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를 퇴폐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충분히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고 그 방법을 알고 있는데도, 실천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전자 기기는 잠시 내려놓고, 사람들을 만나자. 내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면 주위의 사람과 나누는 미덕을 가지자. 작더라도 실천하자. 피오렐로 라 과디아가 벌금형을 선고했던, ‘비정한 도시의 사람들’이 되지 말자.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우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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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10 23:02

11월의 명절

어느덧 겨울을 맞이한 우리 대학생들은 한 학년을 정리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나와 내 친구들은 벌써 수능을 본지 1년이 넘었다는 사실이 당황스럽고 어색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대한민국만이 가지고 있는 11월의 명절, 대학 입시를 위해 치르는 ‘수학 능력시험’. 11월의 한 목요일, 입실 시간 전까지 들어가야 하는 수험생들을 위해서 국가 차원으로 도움을 준다. 약 60만 명 이상의 수험생들이 같은 날, 같은 시간동안 시험을 보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대학, 아니 그냥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정해진 틀인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다. 수능 당일, 몇몇 수험생들은 시험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와서 회견을 열었다. 일명 ‘투명가방끈’이라 불리는 수험생들의 모임은 “우리의 꿈은 대학이 아니다!”를 외쳤다. 이렇게 수능을 거부하며 옳지 않은 사회를 비판하는 수험생들이 있는 반면, 수능이 끝난 후 헤드라인 기사를 장식하는 수험생들도 있다. 바로 자살한 수험생들에 관한 소식이다. 자신의 성적을 비관하며 자살하는 수험생들이 매년 등장한다. 수능 시험이 목요일에 치러지는 이유는 금요일에 등교한 학생들을 확인해 자살한 학생이 없는지 보려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진지하게 믿어질 정도로 수험생 자살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다. 이번년도에는 인터넷에 자살 예고글을 올리고 사라진 수험생을 찾기 위해서 경찰이 100여 명 동원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렇게 수능 시험 하나로 인해 파생되는 많은 일들은 한 해를 정리하는 겨울을 뜨겁게 달군다.많은 어른들이 말하듯이 수능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대학교를 입학하지 못한다고 해서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수능이라는 시험은 우리 부모님 세대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계속되는 걸까? 대다수의 수험생들은 고작 시험 하나로 우리를 평가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시험이 지나가면 그 사실을 까맣게 잊는다. ‘나도 치렀는데 당연히 다음 연도에도 해야지’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흔히 나라별 대학 입시제도를 비교할 때 독일을 많이 꼽는다. 독일은 대학 진학률이 20%밖에 되지 않으며 나머지 학생들은 자신이 하고싶은 일자리에서 교육을 받고 바로 취업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독일 사회를 우리는 부러워 하면서도 정작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자기 일에 집중한다.수능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바꿔야 한다. 앞으로 수능을 볼 학생들이 아닌 이미 본 우리, 성인들이 바꿔야 한다. ‘내가 했으니 너희도 해야돼’ 라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해보니 좋지 않구나, 그럼 앞으로 볼 학생들을 위해서 바꿔야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자. 지방대는 취업이 잘 안된다, 대학교 이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한다며 우린 불평한다. 이런 차별 속에서도 우린 어떻게 버틸지만 생각할 뿐 차별의 원인을 찾아서 없애보려고는 하지 않았다.사회는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더 평등해 질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도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우리가 가만히 있어서 생기는 일들이 아니다. 나보다 어린 아이들이 살게 될,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에 퍼져있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고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수능이 없어지면 겨울을 뜨겁게 달구는 기사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더 따뜻해 지지는 않을까? 나는 그런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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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03 23:02

을(乙)을 위한 나라는 없다

요즘 방송가와 극장가에서는 그야말로 ‘을’이 대세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억눌려 있던 ‘을’들의 이야기가 스크린을 타고 담담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중 한 코미디 프로그램의 코너 ‘갑과 을’은 이른바 갑의 횡포에 묵묵히 당하기만 하던 을이 상황을 역전시켜 복수를 한다는 설정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시청자들은 이를 통해 ‘갑질’에 유린당하는 을의 현실에 함께 분노하고, 이와 동시에 복수를 하는 을의 모습에서 통쾌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 같은 을의 반란은 방송이기에 가능 한 것일 뿐 현실 사회에서는 꿈과 같은 이야기다.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미생’에서는 이러한 을의 모습이 보다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갑들의 전쟁터에 뛰어들어 고군분투 하는 인턴과 계약직 사원, 상사의 눈치를 보며 고된 나날을 보내는 직장인, 남성 중심의 사내 문화에서 차별당하는 여성들의 고뇌 등 실제 우리들이 사회생활을 하며 겪는 일들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들은 소속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모를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일 뿐이다.지난 13일 개봉한 영화 ‘카트’에서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을의 비애가 좀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2007년 이랜드 홈에버 사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카트’는 부당해고를 당한 대형마트 비정규직 계산원들이 회사의 일방적인 해고와 탄압에 맞서 벌이는 512일간의 장기 점거 농성을 그림으로서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인 비정규직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영화 속 마트 여성 계산원들은 ‘고객은 왕, 우리는 을’이라는 교육을 받으며 잘못한 것이 없더라도 고객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는 모욕을 당한다. 이들은 회사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철저히 이용당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며, 이를 위해 기계의 부품처럼 언제나 바뀔 수 있는 운명에 처해있다. 그들의 정당한 권리 요구에도 회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돌아오는 것은 오히려 폭압적인 탄압뿐이다.그렇다면 실제 우리 사회 어떠할까. 아마도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봉제 노동자로 일하던 청년 전태일은 나이 어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부당한 처우 개선을 위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불길 속에서 산화한다.그리고 44년이 지난 2014년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계보다 못한 투명인간의 취급을 당하고 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고, 주민들의 비인격적인 대우를 이기지 못한 아파트 경비원이 급기야 분신하여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불평등하고 부당한 상황에서도 더 큰 피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하며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해야 할 정부 당국에서는 비정규직 고용기간을 연장하여 도리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어쩌면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을로 살아가기란 지옥에서 사는 것 보다 고된 것인지도 모르겠다.이 땅의 을들이 원하는 것은 갑이 되려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나 차별 없이 당당하게 권리를 인정받는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고 함께 공감해 주는 것이다. 갑과 을의 관계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 이것이야 말로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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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26 23:02

무한도전에 대한 무한긍정으로

수능시험이 다가오자 어김없이 한파가 찾아왔다. 온 나라가 한마음으로 수험생들이 무사히 실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며 하루를 보냈다. 한국에 사는 모든 학생과 부모님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 역시 교육 문제일 것이다. 사실 교육은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변화시키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구나 교육에 대해 말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바란다. 그만큼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사실 우리 아이들은 무한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이의 재능이 좋은 조력자를 만나 발굴되고, 거기에 남다른 자신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멋진 성취가 이룩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의 교육 시스템은 아이들의 숨겨진 재능을 억누르거나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선생님들이 어릴 적부터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거쳐 왔다는 것이 오히려 이런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교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모범적인 틀을 정해놓고, 그것에 맞추려 애쓰는 때가 많다. 이미 학교나 교육과정에서 정해준 틀로도 충분한데 말이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위험해 보이는 일이나 새로운 일은 아예 시도하지 않고 그저 안전하게 지나가는 것이 최고라는 분위기가 팽배하게 된다. 선생님들 스스로 잘 알고 있는 학교의 그 분위기 말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새로움에 대해 겁이 없고, 실수에 대해 두려움 없이 뭔가 시도하는 때가 많다. 그럴 때 선생님이 아이에게 질책하는가, 응원하는가에 따라 아이의 미래가 달라진다. 묘하게도 어른이 될 때쯤이면 대부분 아이들이 신선하고 독창적인 시도를 하는 힘을 잃어버린다. 대체 누가 실수에 대해 비난을 했던 것일까. 실수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는 교육은 아이들의 창의적인 역량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한다.토니 와그너는 아이들의 동기를 끌어내기 위한 3가지로 놀이(Play), 열정(Passion), 그리고 목적(Purpose)을 말한 바 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잘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더욱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주어야 하며, 학교 시스템은 혁신을 쉽게 할 수 있는 협업문화(Collaboration Culture)를 만들어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지식을 단순히 테스트하기 위해 서로를 경쟁자로 두고 시험을 보는 것보다는, 어떤 문제를 같이 풀어내기 위해 협업을 하는 지혜를 가르치고, 문제를 해결한 뒤의 성취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훨씬 좋은 교육시스템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아이들의 재능과 창의력을 발굴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대비하여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교육이 편안함과 안일함에 머무른다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기본 원칙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상상력이라는 재능이고, 우리는 이 재능이 현명하게 발굴되고 활용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교가 아이들의 창의적인 능력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풍부함을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미래를 정확하게 볼 수는 없겠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앞으로의 미래를 볼 것이고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열어갈 것이다.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교육이 정말로 중요한 교육일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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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19 23:02

하나의 정부보다 중요한 것은 용기 있는 민족

1962년 10월 8일 월요일, 서독의 시사 주간지 〈데르 슈피겔〉 에는 〈팔렉스 62〉라고 명칭된 나토의 군사 훈련을 분석한 기사가 ‘제한된 방어력’ 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는 서독의 국방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한 기사였다. 그러나 10월 19일 독일 연방 법원은 〈슈피겔〉의 편집자들에게 국가 기밀 누설죄와 공무원 매수 죄 혐의를 적용하며 영장을 발부하고 즉시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영장이 발부된 이후 〈슈피겔〉의 저명한 언론인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당시 서독의 총리였던 콘라트 아데나워는 ‘반역 행위’라고 발언하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당시 서독의 국방부 장관이던 프란츠 요세프 슈트라우스는 그간 국방부의 스캔들을 몇 차례 폭로한 바 있는 〈슈피겔〉과 〈슈피겔〉의 사주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을 매장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믿었다. 하지만 〈슈피겔〉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것은 바로 서독 그 자체였다. 서독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섰다. 시민들은 명백한 언론 탄압이라고 주장하며 체포한 언론인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전 세계에서 언론인들과 지식인들이 그들을 지지했다. 결국 〈슈피겔〉의 언론인들은 석방되었고, 프란츠 슈트라우스와 콘라트 아데나워 또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정부는 무너졌고,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슈피겔 사건〉이다. 결국 민주주의가 승리했고, 이후 독일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확실하게 보장되며 무려 2600여종의 신문이 발행되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슈피겔〉은 정확하고 공정한 비판과 보도를 통해서 세계 최고의 언론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독일은 국경 없는 회가 발표한 언론 자유 지수 (2013년)에서 13위를 차지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세계에서 언론 탄압이 가장 적은 나라 중 하나로 발전했고, 세계 최고의 강대국 중 하나가 되었다. 보통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고, 고위직에 대한 비판이 거리낌 없는 나라일수록 정치적으로 선진국이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에도 꽤나 실망스럽다. 공식적으로 드러난 경우는 없지만, 언론 탄압으로 사료되는 수많은 사례들은 아직 대한민국이 진정한 정치적 선진국으로 들어서지는 못했음을 반증한다. 하나의 글이 역사를 바꾼다. 하나의 보도가 역사를 바꾼다. 언론은 우리를 더 가깝게 연결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사람들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리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서 비판하며 잘못된 점을 개선하고 상황에 따른 올바른 대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언론의 일차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언론이 자신에게 유리한 보도를 하도록 지시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함과 동시에 민중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무슨 상황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그에 대한 대처도 할 수 없는 노예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합리화하며 비판 받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려는, 과거 노예를 소유하던 주인과 같은 심보인 것이다. 독일은 〈슈피겔 사건〉을 통해서 제국주의라는 이미지를 탈피하는데 성공했다. 정부가 언론을 탄압하는 국가는 제 아무리 민주주의라고 표방해도 민주주의라는 탈을 쓴 것뿐이다. 대한민국 또한 언론 탄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없다. 과연 진실이 중요한가? 국익이 중요한가? 적어도 훌륭한 저널리즘으로 불리는 〈디 차이트〉의 〈슈피겔 사건〉 당시 편집장 테오 좀머는 이렇게 말했다. “먼 훗날, 우리가 이번 사건을 회고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슈피겔 사건을 통해 하나의 정부를 잃었지만 용기 있는 민족을 얻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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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12 23:02

10대들의 잃어버린 자유

만 14세 이상 23세 미만의 수감자만 220여명인 교도소,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소년 교도소인 ‘김천 소년 교도소’이다. 올해 7월부터 8월까지 KBS에서 만든 청소년 기획 6부작 다큐멘터리 ‘세상 끝의 집’에서 김천 소년 교도소의 내부 생활을 방영했다. 나와 중학생인 내 동생 또래의 아이들. 자유 없이 철창 안에서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3년형, 4년형을 받은 수감자들이 있는 반면, 10년부터 20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죗값으로 받은 수감자도 있었다. 이들은 교도소로 들어갈 땐 어린 아이였지만 출소할 때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나오게 된다. 교도소 안에서의 생활은 철저하게 규칙적이다. 잠, 식사 등등 모든 것이 통제를 당한다. 또 제빵 기술, 자동차 수리 기술 등 교도소 내에서 많은 기술들을 가르쳐 준다. 사회에 나간 후 할 수 있는 일들을 알려주는 것이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이들을 만나러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몸이 아픈 할머니, 부모님, 먼저 출소한 친구들을 볼 때만큼은 행복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수감자들에겐 그런 행복도 주어지지 않는다. 만나러 오는 친구도, 심지어 가족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부러운 눈길로 흘깃 쳐다볼 뿐이다. 이런 생활 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음악, 연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각각 자신이 다루고 싶은 악기를 다루고, 노래도 부르며, 서로 호흡을 맞춰가며 연기도 한다. 몇몇 아이들은 웬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연습한 자신들의 음악, 연기를 큰 강당에서 가족들 앞에 선보일 기회가 찾아왔다. 무대에 오르기 전 가족들과 함께 짧은 식사시간을 가진 후, 자신들이 갈고 닦은 실력을 어느 때보다 멋지게 무대 위에서 선보였다. 가족들과 수감자들 얼굴엔 미소와 눈물이 가득했다. 그리고 모두가 떠난 후, 다시 반복되는 생활들, 철창 안에서 밥을 먹고, 배우고, 연주하기를 시작한다. 나는 당연히 죄를 지었으면 그에 따른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본 후에도 내 생각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를 보는 동안은 그들을 동정하게 됐다. 아프신 할머니를 죽이겠다는 협박에 저지른 범죄로 13년형을 받은 손자,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는 아들, 부모에게 버림 받은 청소년, 집나가 아빠 없이 장애를 가진 엄마와 형을 가진 둘째 아들. 마음이 아팠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가 끝나면 나에게 되물었다. 내가 저들이 저지른 범죄를 당한 피해자였다면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을까? 난 지금까지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들을 동정하는 내가 옳지 않은 것인지, 차갑게 그들을 보며 죗값을 치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난 모르겠다. 갑자기 나는 그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할 때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난 믿는다. 그들의 마음엔 어떤 상처가 있는지 들어주고 싶었다.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와서 나무들이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있다.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요즘 들어 김천 소년 교도소에 있는 아이들은 춥지는 않을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문득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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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05 23:02

행복한 공존

“냥냥아, 냥냥아.”오늘도 어김없이 아파트 화단 한 구석에 살고 있는 길고양이를 부른다. 이른바 캣맘(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자발적으로 보호활동을 하는 사람)을 자처하는 친구의 이야기다.이 친구가 길고양이인 냥냥이를 만난 건 올해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소에도 고양이를 좋아했던 그 친구의 눈에 유달리 경계심 없이 잘 따르는 길고양이가 들어온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다니면서 한 번씩 쓰다듬어 주던 것이 어느 날 부턴가 미리 사둔 고양이 간식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다 초여름 즈음 냥냥이가 새끼를 낳게 되자 아예 사료를 구입하여 주기적으로 밥을 주었고, 박스를 이용하여 튼튼한 집까지 마련해 주었다.냥냥이는 귀여운 검정 무늬 새끼를 낳았다. 하지만 태어난 지 두 달여가 지났을 무렵 새끼 고양이는 집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아파트 주차장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주차장을 지나가던 차에 치인 것으로 보였다. 로드킬을 당한 것이다.새끼 고양이를 잃은 슬픔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짧은 다리로 팔짝팔짝 뛰놀던 새끼 고양이의 모습이 선연히 떠올랐다. 어미인 냥냥이에게 괜히 죄를 지은 것 같은 마음에 슬픔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냥냥이가 다시 임신을 하여 이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친구는 구청에 문의하여 고양이 중성화 수술인 TNR(Trap-Neuter-Return)을 시키기로 했다. 동물병원으로 보내졌던 냥냥이는 며칠 뒤 한 쪽 귀 끝이 살짝 잘려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우리 주변에는 냥냥이와 같은 많은 길고양이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로드킬과 각종 질병의 위험, 그리고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2~3년 이내의 짧은 삶을 살게 된다. 여기에 인간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더해져 하루하루를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고 있다.길고양이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길고양이들로 인해 교통사고가 증가한다던지 쓰레기를 뒤지고 발정음과 같은 소음을 낸다는 이유로 극도의 혐오감을 나타낸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길고양이를 잡아 안락사를 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자생적으로 살아가는 길고양이는 안락사를 시키더라도 개체수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게 된다. 자신들만의 영역을 짓고 사는 고양이의 특성상 한 영역에서 고양이가 사라지면 다른 영역의 고양이가 번식해 들어와 오히려 개체수가 느는 ‘진공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199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에서는 TNR 사업이 진행됐고,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 과천시를 시작으로 전국 주요도시로 확대되고 있다. TNR을 시킬 경우 장기적으로 길고양이의 개체수가 감소되는 효과가 있고, 고양이 특유의 발정음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길고양이의 개체수를 적정수준으로 유지하여 주민의 불편을 줄이면서, 이와 함께 길고양이의 복지를 생각하여 인간과 공존하는 일종의 타협책인 것이다.지구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길고양이들은 이전부터 인간들과 생활 터전을 공유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도심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함께 살아갈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관심과 이해를 통해 생태적으로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머리를 맞대면 얼마든지 길고양이와 인간의 충돌을 완화할 수 있다. 길고양이들과의 행복한 공존을 위해 대화와 협의를 나누고 지혜로운 합의점을 찾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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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29 23:02

혁신 돕는 실행력 교육 필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가장 심각하고도 풀기 어려운 일이 ‘일자리’ 문제다. 일자리 구하기가 매우 만만치 않아, 인위적인 손길 몇몇으로 과연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마저 든다. 물론 사회적으로 기회와 규칙이 공정하게 적용되고, 청년들의 재능 발휘를 도와주는 지원들, 새로운 모험을 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제도와 장치, 그리고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만들어진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뭔가 창조할 수 있는 신선한 동력이 남아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모두가 의사와 공무원이 되려 한다면 새로움을 위한 마중물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결국 일자리 정책과 더불어, 긴 호흡을 바탕으로 교육과 같은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지원들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일자리 문제에 있어 심각한 점은, 과거에는 많았던 비교적 좋은 대우에 중간 정도 기술이 필요한 직업들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이제는 높은 지식과 창조성이 필요한 일자리들로 기회가 압축되고 있다. 따라서 아이들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고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는 새로운 교육 문화가 필요하다. 토니 와그너는 아이들에게는 입시교육보다 ‘혁신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가치를 더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건은 매우 좋아졌다.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언제 어디에서나 다양한 지식을 쌓을 수 있고, 무엇을 아는지 보다 아는 것을 실행하는 실행력이 더 중요해졌다. 이런 실행력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것이 바로 혁신의 출발이 아닐까. 실행력은 문제를 창의적으로 풀어내는 능력과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이것이 바로 혁신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만약 모르는 것이 있다면 바로 공부하며 적용하면 된다. 지식은 계속 늘어날 뿐만 아니라 변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문제를 찾아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 실천하는 태도는 오랜 교육과 경험을 통해 숙달되지 않으면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앞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 방법은 이런 부분이지 단순히 영어나 수학 실력이 아니다. 이미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삶의 밑거름이 되는 기초지식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에는 맹목적인 암기와 문제풀이식 교육이 지나치게 많다. 모든 배움의 출발점은 아이들의 ‘동기’이다. 그리고 이런 동기는 삶을 혁신하는 열정의 근원이 된다. 끊임없이 동기가 샘솟게 한다면 새로운 지식을 익히고 자신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일구어낸 작은 배움과 성취를 세상과 나누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을 남겨두는 것이 필요하다. 인터넷 시대의 블로그나 SNS 등은 지식 나눔을 돕는 훌륭한 자원이 된다. 이것들은 나중에 아이들의 디지털 포트폴리오 역할을 하여 자신이 필요한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다양한 능력을 지닌 청년들이 도전하여 재능을 풀어낼 수 있는 공정한 장이 마련된다면 사회 변화와 일자리 창출에 기여가 될 것이다. 단순하고 일회적인 지원보다도, 단순한 실행력과 혁신이 필요한 작은 문제들을 찾아내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축제를 마련하고, 다양한 시도를 허용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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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22 23:02

쇼핑 메카에 펼쳐진 '싸구려' 우산들을 보며

9월 28일, 수많은 홍콩 영화의 원천인 홍콩 경찰이 시민들에게 최루탄을 발사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공개되자 홍콩에서의 ‘작은 소란’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모두가 믿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억눌려온 홍콩 시민의 소리입니다.’, ‘중국 정부는 홍콩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도의 자치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중국은 거짓말쟁이입니까?’ 와 같은 말들은 홍콩 주민들이 얼마나 외면당했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자, 중국은 사회주의였음에도 불구하고 홍콩을 특별 행정구로 정해 고도의 자치를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이후 홍콩은 중국 정부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최근 홍콩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짐에 따라 중국 정부는 이제 ‘없어도 아쉬울 것 없다’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본래 직선제로 예정되어 있었던 2017년 행정 수반 선거가 사실상 ‘보통 선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홍콩에서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터져 나왔다.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비폭력 시민 불복종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사실 전문가들의 입장과 객관적인 사실을 놓고 본다면, 현재 ‘우산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중국이 들어줄 가능성은 낮다. 중국은 ‘갑’ 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분명 시민들은 지금 불리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시민 혁명도-혁명이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모두 유리한 입장에서 시작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비록 지금은 혁명이 실패인 것처럼 비추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추후에 중국의 성장세가 고착화되는 시점이 오고 중국 전역에 ‘민주화’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 잡는다면 중국은 민주화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성공할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밝혀졌다.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민주화를 이미 했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전면적인 자치권은 보장하지 않고 있다. 시민 의식이 성장하게 되면 시민들은 그들의 기본 권리에 대한 열망을 더욱 표출할 것이고, 결국은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우산 혁명’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우산 혁명’은 중국 민주화의 상징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 홍콩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한 마음으로 우산을 들고 광장을 점거한 모습은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먼저 ‘겁도 없이’ 덤비는 자들을 보며 홍콩 뿐만이 아닌 전 세계에서 자신이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상황을 그저 방관하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전 세계에 있는 많은 국가들은 경제적 성장을 이룩했다. 그리고 지구는 역사상 없었던 기술의 진보로 인해 그 어느 때 보다도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민주주의와 시민들의 의식은 퇴보한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기술로 인해 국가는 시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기에 더욱 좋은 환경을 만들었고, 일상에서 오는 것 같은 선전에 시민들의 정치적 판단력은 흐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경제 대국이지만 평화적인 시위를 향해 최루탄을 발포하는 중국을 보면서, 진정한 선진국은 시민이 자유롭게 시위를 하고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닌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세계에서 찾아오는 쇼핑의 메카에 펼쳐진 ‘싸구려’ 우산들은 국가의 억압을 막아내는, 민주주의의 방패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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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1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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