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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진안 마이산 - 전종용

▲ 전종용나의 고향은 진안 마령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안군 마령면 원강정마을과 월운마을 사이에 있는 외딴 집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500m쯤 떨어진 월운마을에 놀러 가서 해가 질 때 돌아오곤 했다. 마을에서 놀 땐 어김없이 나무로 만든 칼을 들고 장군 흉내를 내면서 떼 지어 함미산성 성터에 올라 소리를 지르며 성터 주위를 한 바퀴 돌아왔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후백제 시대에 도적떼가 많아 함미성에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를 지어 놓고 지키던 곳이었다고 한다. 성안에 기왓장 파편이 많은 걸로 보아 확실하다. 지금은 마이산 등산길이 되어 함미성터 옆을 통과하고 있는데 이 등산길을 따라 가노라면 광대봉을 지나 마이산에 이르게 된다. 특히 11월 중순 무렵 이 길을 오르면 왼쪽 월운계곡에 붉게 물든 숲과 오른쪽 마령 들이 보이는 절벽 모습이 절경 중의 절경이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6년 동안 가을 소풍은 항상 금당사와 마이산으로 갔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고적과 역사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 소풍을 가서도 마이산 탑들의 절경 그리고 역사 이야기에 빠져 가장 늦게 머물러서 붙여진 별명이 느림보 고적 박사였다. 진안에서 오랫동안 교장선생님으로 계셨던 이규형 외숙으로부터 마이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산묘와 금당사 탑사 은수사를 거쳐 천왕문을 찾았던 추억이 남아 있다. 외숙께서는 내가 마이산에 대해서 물으면 이름의 유래와 탑의 전설 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마이산은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서다산이라고 했으며 조선 태종이 남행했을 때 모양이 말 귀와 같다고 하여 마이산이라 칭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또 마이산은 용출산, 용출봉이라고 불렀고 마령 사람들은 속금산이라고 했다. 외숙께서 전해주신 마이산 전설 이야기에 의하면 전에는 부부산신이었다고 한다. 삼천일을 수도한 뒤 마침내 승천할 날이 닥치자 남산신은 사람들이 승천 장면을 보면 부정을 타니 한밤중에 떠나자고 했다. 그러나 여산신은 품 안에 곤히 자고 있는 아들을 보고 새벽에 떠나게 되었는데 마침 새벽에 물 길러 나왔던 아낙네가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놀라는 바람에 승천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화가 난 남산신은 여산신의 품에서 아기를 빼앗고 발로 차 지금 애기봉이 아빠봉 곁에 있고 엄마봉은 죄스러워 다소곳이 외면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게 되었다고 한다. 진안 쪽에서 보면 숫마이봉 옆에 아기봉이 붙어 있고 암마이봉은 오른쪽으로 다소곳이 고개 숙인 모습이다. 마이산은 계절 따라 이름도 각각인데 봄에는 돛대봉, 여름에는 용각봉, 가을에는 마이봉, 겨울에는 문필봉이라고 한다. 외숙께서는 탑사 이야기도 해 주셨는데 큰 탑은 예부터 있었으나 나머지는 탑사 주지였던 이갑용 처사가 쌓은 탑이라고 주장하지만 주탑인 천지탑과 일광탑, 월광탑, 약사탑 등 큰 탑은 예부터 있었고 한 줄로 쌓은 외줄탑 정도는 쌓았을 수도 있었다고 했다. 마이산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탑사 주변에 산비둘기들이 많이 날고 있다. 진안의 명산 마이산은 우리 진안 사람들의 품이다. 나는 지금도 고향 생각이 나면 마이산을 찾는다. 지금은 벚나무를 많이 심어 4월 하순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금당사, 담락당 시비를 지나 마이산과 신비한 돌탑을 찾으면 항상 마음이 포근하다. △전종용 씨는 진안 출생으로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했다. 지금은 한학에 심취하며 취미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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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31 19:23

느림의 미학 되새기며 긍정의 힘으로 - 안홍엽

▲ 안홍엽새해를 맞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5월이다.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이 실감 난다. 똑같은 일상이 되풀이되다보니 시간이 더욱더 빨리 가는 것 같다.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일상은 그날이 그날이다. 과거나 미래로의 시간여행을 상상해 보지만 시간의 역사가 규명해 줄 수밖에 없는 가고 옴의 오묘한 조화다. 몇 년 전 나는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선정한 서강대학교 장영희 교수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글로 접했다. 저자 ‘헬렌 켈러’는 앞 못 보는 맹인으로 2차 대전 때 부상병구제운동을 주도해 ‘자유의 메달’을 받은 미국인이다. 그는 눈을 뜨고 볼 수 있는 3일 동안 친절과 겸손과 우정, 밤낮이 바뀌는 웅장한 기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며 집에 돌아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암흑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1933년에 발표된 이 글은 당시 대공황의 후유증에 허덕이던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헬렌 켈러가 그토록 보고자 소망했던 일들을 우리는 날마다 일상 속에서 특별한 대가도 없이 보고 있다. “내일이면 귀가 안 들릴 사람처럼 새들의 지저귐을 들어보라. 내일이면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사람처럼 꽃향기를 맡아보라. 내일이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보라.” 80여 년이 흐른 오늘 우리에게 헬렌 켈러의 글이 새삼 간절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기도하는 마음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안목이 필요해서다. 그동안 우리 민족의 숙원이었던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라는 옥동자가 탄생한 요즈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투쟁이 아니라 협력이고 분열이 아니라 통합이며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고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또한 살고 죽음이 삶의 한 과정이듯 고통과 시련도 삶의 한 과정이라면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거기에서 찾도록 해야 한다. 뒤돌아 보기에도 너무나 아쉽고 민망한 지난날들이었다. 이제는 정말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상이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극복의 꿈만 있다면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는 행운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다짐을 한다. 한 점의 착오도 없도록 하기 위하여 우선 삶에 쉼표를 찍으면서 살아야겠다고... 여행 작가 정연희 씨는 “쉼표가 없는 일상은 대팻밥이나 톱밥처럼 우리들 본래의 삶에서 시나브로 깎여 나가는 부스러기가 되고 말 것이다. 쉼표가 없는 문장을 읽으려면 숨도 차고 얼른 터득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긍정의 힘을 신앙처럼 굳게 믿겠노라고... 인생을 바꾸는 ‘긍정의 힘’, No가 Yes로 바뀔 때 모든 일은 해피엔딩으로 장식된다. 수 세기 동안 단 1%만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은 놀랍게도 긍정의 힘이었다.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당선으로 미국의 역사에 기록될 대사건도 긍정의 힘 때문에 일어났다. “Yes, We Can.” 이 한마디가 미국을 열광케 했다. 변화를 추구하고 희망을 일구어가는 국민임을 세계에 과시했다. 모든 유기체는 변화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음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기회가 왔다고 너무 서두르지 말고 느림의 미학을 되새기며 긍정의 힘으로 희망을 추구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기다리자.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타고르의 말이다. △안홍엽 씨는 전주 MBC 편성국장을 역임했으며 퇴직 후에는 원광대, 우석대, 전북대, 백제대 등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한국방송대상과 전북문화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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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4 20:06

나누는 행복과 건강을 위하여

▲ 유명석우리는 태어나면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공부하고 직장에서 근무를 하다가 퇴직을 하면서 평생을 보낸다. 나도 남들이 하는 일상대로 따라서 살다가 퇴직을 하였다. 그런데 막상 퇴직을 하고 나니 다음 날부터 내가 할 일들이 사라졌다. 따라서 아침에 시간을 맞춰 일어난다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매일같이 출근을 하다가 갑자기 갈 곳이 없고 규칙적인 생활이 되지 않으니 몸에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몇 시까지 오라는 곳도, 나가 있을 자리도 없다. 나대로 살아야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조언 받을 곳도, 따라 할 사람도 없었다. 그 흔한 검색 사이트에도 그런 걸 알려 주는 곳이 없다. 눈 뜨면 일어나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몇 날들을 허둥댔다. 무언가 하기는 해야 하는데 내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일을 재밌게 할 수 있다는 건 행복의 조건 중 하나라고 한다. 그 일이 무얼까? 이 고민은 퇴직 몇 년 전부터 시작했지만 다 못한 숙제였다. 선배들은 퇴직 후엔 우선 건강부터 챙기고 재미있는 일을 찾아보라고 권했다. 50년 전에 일찍 작고하신 아버님도 나에게 “일왈강신(一曰强身)”이라고 하셨다. 건강 챙기는 것이 제일이라는 말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건강생활의 전문가들이다. 그 걸 다 따라 하려면 몇 백 년을 살아도 못할 것 같았다. 아마 삼천갑자 동방삭이도 그렇게 살았으리라. 그래서 나도 남은 세월 건강하게 살려면 남의 말을 쫓을게 아니라 나름의 건강법을 정립하기로 했다. 건강이란 유전 반, 환경 반이란다. 부모님에게 받은 육신은 고혈압과 고콜레스테롤이니 땀 흘리며 살아야 하겠고 섭생에서는 저염식, 저지방식이여야 한다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유전적 생체리듬을 살리며 먹는 것만 잘 맞추며 살면 남들 사는 만큼은 살 것 같다. 부모님의 생활방식은 하루 종일 움직이고 땀 흘리며 농사짓고 사셨다. 이것이 나에게도 물려받은 생체리듬이 되었다. 따라서 땀 흘리고 푸성귀 먹고 부모님 같이 사는 게 딱 맞는 처방이다. 아파트 살며 헬스장이나 등산하며 땀 빼면서 살든지, 부모님처럼 시골서 일하면서 먹을 것 길러 먹고살든지 선택해야 하는데 나에게는 후자가 익숙하다. 그래 시골에 살기로 했다. 일어나자마자 하루 종일 일하는 논밭 한 바퀴 돌아보고 꼬리치는 강아지 한번 쓰다듬어 주고 푸성귀 뜯어 밥상 앞에 앉으면 상큼하다. 땅 세 마지기만 가지면 쌀만 빼고 잡곡과 애들 다섯 가족 푸성귀는 건강식하고도 가까운 친구들까지도 가끔 인심 쓸 수 있다. 먹어서 맛이 아니라 나눔이란 봉사에 버금가게 마음이 흐뭇하다. 각박하게만 살아온 내 인생 말년에 하찮은 것이나마 나눌 수 있다는 건 신나는 일이다. 뿔뿔이 흩어져 사는 손자들도 내가 보내주는 택배를 받을 때는 할아비를 마음 가운데 놓을 것이라는 기대도 하면서 혼자 히죽이 미소를 짓는다. 자식 식구들이 방학을 할 때는 먹을 것이 많은 우리 집으로 몰려온다. 빠듯한 봉급쟁이 살림살이를 하는 며느리 사위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유기농 먹거리로 먹고 노는 걸 다 해결해 주니 그런 횡재의 시골행을 마다할 리가 없겠지. 우리 내외가 건강해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 일하며 땀 흘리며 나누며 살고 싶다. 움직이며 건강하고 나눔의 행복으로 여생을 보내고 싶다. △유명석 씨는 한국교원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김제중앙초에서 교직자로 정년을 했다. 현재는 영농을 하고 있으며 취미로 산행과 수필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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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0 20:59

과유불급 - 김범재

▲ 김범재어떤 미인이 다이어트를 하다가 영양실조로 굶어 죽었다. 어느 특정 후보를 위해 지나치게 지지하다 독이 되어 낙선의 빌미를 제공한다. 이럴 때 흔히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을 쓴다. 이는 “지나친 것보다 미치지 못하는 것이 낫다.”라는 뜻으로 잘 못 알고 사용하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예를 들면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다가 너무 지나쳐 오히려 건강을 해쳤다거나, 음식을 적당히 섭취해야 영양에도 좋은데 너무 많이 먹어 영양 과잉으로 다른 병을 유발할 경우 등을 말한다. 그리고 정치가들이 너무 도에 넘치는 지나친 말을 하여 오히려 역효과를 볼 때 흔히 쓰고 있다. 그런데 이는 과유불급의 본뜻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과유불급은 논어에서 나온 말이다. 논어 선진 편에 보면 <子貢問師與商也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말을 해석하면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자 중에 자장과 자하가 있는데 어느 쪽이 더 어질고 낫습니까?”라고 물었다. 이는 전기 제자인 자공이 스승에게 후기 제자들에 대해서 물은 것이다. 그러자 스승 공자가 대답을 했다.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했다. 그러자 다시 물었다. “그럼 자장이 낫단 말씀입니까?”하니까 공자는 “아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라고 대답했다. 과유불급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자 유(猶)자의 훈(訓)을 보면 ‘오히려’, ‘차라리’, ‘같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즉 부사로 쓰일 때는 ‘오히려’, ‘차라리’가 되지만 서술어로 쓰일 때는 ‘같다’로 해석해야 된다. 그러므로 “지나침은 오히려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해석은 잘 못 된 것이며, “지나침과 모자람은 같다.”로 해석해야 맞다. 따라서 “지나친 것보다 미치지 못하는 것이 낫다.”라는 뜻이 아니라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하는 것은 같다.”라는 뜻이다. 조선조 황희 정승이 길을 가던 중 소 두 마리를 몰고 밭을 가는 노인을 만났다. 그래서 황희가 그 노인에게 물었다. “두 마리의 소 가운데 어느 소가 더 밭을 잘 가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밭에서 나와서 귓속말로 오른쪽 소가 더 잘 간다고 했다. 그러자 황희가 밭에서 말해도 되는데 왜 밖으로 나와서 말을 하느냐고 하였다. 농부는 소도 귀가 있는데 잘한다고 해야 좋아하지 못한다고 하면 되겠느냐고 했다. 황희는 정치를 하면서도 이 말을 되새겨 후세에 청렴결백한 재상이 되었다고 한다. 밭을 가는 노인도 이것을 아는데 공자께서 자공에게 두 제자 중 누 가 더 났다고 얘기를 했겠는가.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잘 못된 해석을 인용해 “지나침은 오히려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뜻으로 잘 못 사용하고 있으니 무척 안타깝다. 골프는 공을 홀 안에 넣어야 되는데 홀에 미치지 못한 것을 지나친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차이가 얼마가 되든 미치지 못한 것이 나 지나친 것은 똑같다. 공자 말씀대로 우리도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던지 보양식을 먹던지 어떤 일을 하던지 과유불급하게 하면서 건강하고 행복한 일생을 살자. △김범재 씨는 전북교육청 초등교육과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평생교육원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교육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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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03 21:03

자만동 찾아서 - 이대영

▲ 이대영조선왕조의 후예로 전주에 살면서도 자만동 마을이 생소해서 불현듯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피서 겸 쉬엄쉬엄 먼저 한벽당에 올랐다. 좌우를 살펴보니 왼편으로 멀리 중바위가 보인다. 아래로는 슬치고개 박이뫼산에서 발원하여 상관 계곡을 지나 이곳 한벽당에서 몸을 틀어 전주 도심을 감싸고도는 전주천이 흐르고 있었다. 한벽루의 풍광을 즐기고 최담 유허비가 있는 조그마한 계곡 길을 따라 올라가니 고갯마루에 이정표가 있었다. 왼편 산자락을 따라가면 옥류동이 있고, 좀 더 가면 자만동 마을이 있다. 가는 길을 뒤로하고 고개 넘어 낙수정 마을로 향했다. 마을 가운데 오래된 우물이 있었는데 계곡의 물이 이곳에 낙수 되어 우물을 이룬 낙수정이 확실했다. 뒤돌아 고갯마루에 서서 주위를 살펴보니 자만동은 승암산자락을 따라 한벽루 이목대 오목대를 잇는 능선 밑으로 형성된 향교 북쪽의 경사진 마을이었다. 옥류 2길을 따라 내려오니 입구가 나왔다. 오목대 쪽으로 평지 길을 가다 보니 드디어 자만동 마을이 보였다. 자만동2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자만동금표라는 표지석이 어느 집 담장 밖에 외로이 서 있었다.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자만동 일원을 조선왕실의 성지로 조성하고 이를 수호하기 위해서 나무를 베거나 몰래 묘지를 쓰는 것 등을 금하는 표지석이었다. 원래는 4개가 있었으나 다행히 남의 집 담장 돌로 사용되었다가 발견되어 이곳에 세워졌단다. 아마도 오목대와 이목대를 성역화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왕조의 정신을 읽어내는 중요한 자료인 만큼 보호각이라도 만드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재질은 전주에서 나오는 ‘전주석’으로 쑥돌이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불현듯 이곳이 배산임수에 좌청룡 우백호를 갖춘 명당자리임이 확실했다. 뒷산 발리산과 좌우를 감싸주는 날개며, 왼편에서 흘러들어와 마을을 감싸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전주천의 형국이 풍수에 문외한인 내 눈에도 전주에서는 아마 이만한 형국을 갖춘 마을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씨왕조가 일어난 산이라 하여 발리산이라고도 하며 이목대의 이(梨)자를 이(李)자로 바꾸어 이목대(李木臺)라고 칭하기도 했나 보다. 자만동 그 이름은 녹엽성음(綠葉成陰) 자만지운운(子滿枝云云) 옛 시가에서 나왔다고 전하는데 자만(滋滿)은 자만(子滿)으로 자식이 많이 불어난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마을 아래편에는 향교가 오랜 역사를 간직한 채 묵묵히 지키고 있다. 자만동1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옥마을 외곽에 자리한 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평범한 마을이었다. 이곳은 이성계 고조할아버지 이안사가 나고 자란 곳인데 최근에 이곳을 벽화마을로 조성했다. 마을 아래편 기슭에는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라고 쓴 유허비가 있다. 조경단을 조성한 그 이듬해인 1900년 목조대왕 구거지로 전해지고 있는 자리에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비와 비각을 건립했다. 그런데 오목대 맞은편 육교 아래 있다가 철로가 철거되고 기린로가 뚫리면서 주택가 쪽으로 이전된 것이다. 경사진 계단을 따라 협소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며 미안한 생각에 고개를 숙였다. 자만동 마을을 돌아보며 잠시나마 조상들의 옛 자취를 생각해볼 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빨리 대우받지 못한 조상의 발자취를 본래의 위치로 돌려놓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이대영 씨는 전주 서신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을 했으며 현재 어진박물관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잊혀가는 옛말 모음집 <그게 시방 무신 말이디아>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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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6 20:56

백구와의 이별 - 김금례

▲ 김금례너와 작별을 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구나. 네가 떠나는 날은 나의 한쪽이 떨어져 나가듯 아팠다. 시간이 가면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너와 함께했던 시간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외출하고 집에 들어오면 두 발로 서서 반겨주고 대문이 열려 있어도 너는 나가지 않고 우리를 지켜준 일등공신 수문장이었지. 어느 가을인가는 뜰에 낙엽을 쓸다가 내가 잃어버린 묵주를 찾아 현관에 갖다 놓아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었지. 자녀들이 떠난 빈자리를 허허롭지 않게 채워주었던 너는 개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귀염둥이였지. 마지막까지도 우리 가족에게 충성을 다하고 순종하며 떠난 너의 모습에 나는 오늘도 잠 못 이루고 몸을 뒤척인다. 아파트로 이사를 하려고 했지만, 너와 살기는 이곳이 좋아 함께 살려고 리모델링까지 했는데 네가 없는 우리 집은 쓸쓸하기만 하구나. 백구는 막내아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구입해 가슴에 품고 들어왔다. 눈은 까맣고 귀가 늘어진 하얀 옷을 입은 귀여운 풍산개 족보였는데 털이 희어서 백구라 이름 지었다. 엄마와 떨어져 울만도 한데 아들과 함께 있으니 낮에는 방마다 다니며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런데 아들이 취직되어 서울로 떠나면서 집에 남겨두고 갔다. 백구는 투정하지 않으며 밥만 주면 충성을 다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분가한 아들딸 가족들이 오면 꼬리를 치고 반긴다. 손자들은 그런 백구가 좋아서 개 껌과 소시지를 가져다준다. 백구는 천성적으로 성격이 비둘기처럼 양순했다. 손자들이 목마를 타고 귀찮게 해도 다 받아주었다. 사람을 가려 짖으니 개답지 않다며 동네에서도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런데 세월 이길 장사 없다더니 백구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14년의 노구로 누워 있는 때가 많았다. 내가 밖에서 들어와도 앉아서 꼬리만 흔든다. 모임 갔다가 남은 음식물을 가져다주면서 ‘백구야, 올해는 황금 개띠 해란다. 힘을 내라!’라고 하면 남편은 눈살을 찌푸린다. 그래도 평소 좋아했던 족발을 보면 일어나 맛있게 먹는다. ‘그렇게 맛있어?’ 나는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며 장수를 염원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힘이 부치는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개를 숙이고 모퉁이에서 비스듬히 누워 불러도 움직이지 않았다. ‘갈 때가 왔구나!’ 운명을 직감하고 고기와 우유를 주어도 먹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백구는 현관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아들이 흰 베에 싸서 가슴에 안고 화장터로 가는 모습을 보니 마치 친정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같았다. ‘백구야! 다음에는 개로 태어나지 말고 사람으로 환생하렴.’ 아침저녁으로 밥을 주었던 남편은 지금도 잊지 못하는지 큰아들이 백구 집을 치우려고 하자 아무 때나 밥 먹고 놀다 가게 그대로 두라고 했다. 백구야, 추운 겨울을 보내고 지금은 따뜻한 봄이 왔다. 앞뜰 감나무는 새잎을 품고, 모과나무와 동백나무는 꽃이 피고 새싹들이 나왔다. 하얀 꽃은 너의 분신처럼 우리 가슴속에 오래도록 피어 시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 부부도 노년의 삶을 살고 있다. 100세 시대라지만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 이제는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건강을 챙기며, 잃어버렸던 내 인생을 찾아 취미 생활을 하면서 검소하고 천박하지 않게 베풀며 사람답게 살다 가려고 한다. 백구보다 더 예쁜 개를 보내 줄 테니 슬퍼하지 말라고 막내아들한테서 전화가 왔지만,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아 우리 부부는 봄의 햇살을 받으며 쉬엄쉬엄 건지산에 올랐다. △김금례 씨는 수필시대로 등단하여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행촌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수필집 <꿈의 날개를 달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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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19 20:18

나는 행복 합니다 - 이석효

▲ 이석효행복은 사랑에서 온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누구에게나 사랑을 나눌 줄 안다. 사랑은 배경이 아주 중요하다. 겸손한 자에게만 사랑이 있다. 우리 주변에는 의롭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올곧은 사랑을 가진 정직한 사람 찾기는 귀하다. 나는 일생을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을 배우고 실천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진리다. 우리가 충실하고 성실히 살아도 욕심은 한이 없다. 그 욕심을 가득가득 채우면 말세가 온다. 그 욕심을 채우려 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보상을 받으면 만족과 기쁨을 맛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나를 버리고 이타적인 또 다른 나를 위해 살아야 사랑을 유지할 수 있다. 나는 어린 시절 4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 속에 살면서 증조부로부터 한문과 기도를 배웠다. 새벽마다 사랑채 할아버지의 사서삼경 읽는 소리와 아버지의 아름다운 필체 속에서 화목한 대가족의 삶이 좋았다. 증조부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잘 몰라서 ‘무엇하세요’하고 물으면 기도한다고 하지 않고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웃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셨다. 이 말이 훗날 나의 신앙생활에 씨앗이 되어 지금까지 행하고 있다. 방안에서는 언제나 여인네 향수 같은 먹 냄새가 있었다. 새벽마다 곱돌 화로에 꺼지지 않은 불씨를 담아다가 쇠죽 솥에 불을 지피고 안채에는 밥을 지었다. 이런 나는 어릴 때부터 언제나 증조부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구두를 신고 다녀서 별명이 뾰족 구두였다. 상급학교 시절 또한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특히 역사 선생님은 3년 동안 한 번도 빠짐 없이 나에게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물어보셨다. 그래서 친구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고,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은 어느새 꿈 많던 나를 훌쩍 노년기까지 싣고 왔다. 그동안 세상을 살다 보니 착하고 정직한 사랑을 베푼 사람이 그리 흔치 않았다. 세상에서 빛없이 살 수 없듯이 우리 자신에 사랑의 빛이 가득 차면 건강한 힘이 솟는다. 세상 종교가 이것을 찾고 있으나 육신의 욕망에 가려져 있어 빛을 찾지 못한다. 사람이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리는 영의 세계다. 천국은 죽은 뒤 가는 곳이 아니다. 빛 안에 사는 삶은 외롭지 않으며 심심하지도 않다. 세상의 고난도 어려움도 위로가 넘치며 어떤 환경에서도 고난이 크면 클수록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아무런 동기도 없이, 심지어 감사를 요구하는 것조차 없이 그냥 사랑하는 것이며, 자기가 사랑할 수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해 그냥 행복해하는 것이다. 받을 것을 기대하고 주는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감추어진 아름답지 못한 욕망이다. 천국은 죽은 뒤 가는 곳이 아니다. 빛 안에 사는 삶은 외롭지 않으며 심심하지도 않다. 세상의 고난도 어려움도 위로가 넘치며 어떤 환경에서도 고난이 크면 클수록 한없는 사랑을 베푸신다. 나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며 사는 만족과 기쁨, 즐거움으로 나를 가득 채워 줄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사랑 안에서 온 세상이 하나가 될 때를 바라는 소망이 있어 행복하다. △이석효 씨는 아시아 서석문학에서 시로 등단했으며, 현재는 징검다리수필문학회 회원과 전북문인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신앙 시집 <하늘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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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12 19:31

세월을 타는 즐거움

동지 팥죽도 설날 떡국도 두 그릇을 절대로 먹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동지 팥죽과 설날 떡국을 먹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는 한 살의 나이라도 더 먹는 게 아쉬운 심정에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필자도 10대 때는 나이를 빨리 먹어 어른들처럼 무엇이든 내 맘대로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느새 고희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지금 세월이라는 열차를 타고 끊임없는 인생 여행 중이다. 흔한 말로 인생 열차는 나이대로 속력을 내서 10대 때는 10㎞로 달리고 50세는 50㎞로 달린다더니 어느새 나의 인생 열차는 70㎞의 속도까지 치닫고 있다. 이 세월의 인생 열차는 브레이크가 없어서 멈출 줄 모르고, 영어를 몰라 U턴할 줄도 모른다. 종착역을 알려주지도 않고 쉼 없이 달리면서 승객들의 애를 태우기만 한다. 과속 신호 위반이나 단속 카메라도 없어 무사통과다. 다만 멀미가 나서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이 스스로 중도하차를 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 인생 열차의 기관사는 누구일까? 바로 나 자신이다. 인생 여행을 즐겁게 해주거나 혹은 괴롭게 해주는 주도권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관사인 내가 어떤 마인드로 운행하느냐에 따라 세월을 타는 기차의 맛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요즈음 와서야 나는 우리 연령대의 속력이 세월을 타는 가장 안정적이고 행복한 속도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60㎞는 좀 더디고, 80㎞ 이상은 과부하가 생겨 어지러워 70㎞대가 편안하고 경제적인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속도가 바로 지금 우리들 세대의 인생 속도인 것이다. 인생을 마음의 부담 없이 만족하게 즐길 수 있는 때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또래들은 정말 좋은 시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공자는 일찍이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에서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즉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말은 70대가 인생의 가장 황금기임을 말한다. 달력 한 장 한 장 뜯겨지는 것을 한탄할 게 아니라 뜯는 재미를 찾으면 이 또한 크나큰 즐거움이 아닐까? 도전지락(挑戰至樂)! 도전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다. 젊은이만 도전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내가 좋아하는 것에 도전해 보는 열정. 목표를 성취했을 때 느끼는 희열,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젊음으로 되돌리는 생명수가 되는 것이다. 나날이 성숙해가는 손주들을 보는 재미도 나이 먹는 즐거움일지고. 늘어나는 주름살, 바닥나는 체력, 희망이 없는 삶 등 이렇게 비관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흘러가는 세월에 먹는 나이인데 남들이 뭐라 하던 내 취미를 살려 한 번쯤 도전정신으로 재미를 느끼고 또 주변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이 같은 노년의 즐거움이 어디에 있으랴! 가을 날 물들어 가는 감나무 잎처럼 뜨겁고 어두웠던 마음들을 널어 말리며 이제는 온 힘 다해 살지 않기로 하자. 싹이 돋고 잎이 자라 낙엽이 지는 사이 자박 자박 누군가 오고 또 누군가 가버린 인생 여행의 순례에서 그대와 나의 발자국을 하나로 포개보는 일이다. 다시 한 번 천천히 햇살에 나를 꺼내 말리며 살아갈 일이다. 인생 열차가 멈출 때까지 세월을 타는 즐거움을 만끽해보자. △김재균 씨는 전주 양지초등학교 교장으로 42년 공직생활을 마쳤다. 교단 재직시 가족이 함께 하는 교육에 힘써 한국일보사가 제정한 한국교육자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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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5 21:11

작지만 소중한 봉사 - 문진순

▲ 문진순노인복지관에서 재능 나눔 봉사 활동이 있으니 참여해달라는 권유가 인연이 되어 월요일 오전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을 하게 되었다. 복지관 식당 주방에서 만들어준 음식을 공익요원과 같이 도시락을 싸서 직원이나 봉사자가 운전하는 봉고차에 오른다. 무릎에 올려놓은 따뜻한 도시락을 들고나와 현관문을 두드리며 ‘도시락 왔습니다.’ 하며 손잡이를 돌리면 미리 문을 열어 놓고 계시는 집이 많다. 어느 날, 원룸 3층 현관문을 노크해도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키로 문을 열고 손잡이에 걸려있는 막걸리 두 병과 도시락을 들고 들어서며 할아버지를 불렀다.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가 양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나오셨다. 이제 일어나셨느냐고 물으니 기운이 없어 누워계셨단다. 가지고 온 도시락과 막걸리 봉지를 내려놓으며 지난번에 배달한 도시락통을 드니 열어보지도 않았다. “할아버지, 식사는 안 하시고 막걸리만 드세요?”라고 묻자 막걸리는 목에 걸리지 않고 잘 넘어가서 가끔 이웃집 아주머니께 부탁하여 사다 마신다고 했다. 혼자 계시는 것이 불안해서 요양원으로 가시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여쭈었더니 먼 산만 바라보셨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마지막 배달지인 할머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을 들어서자 누워계신 할머니는 아랑곳없이 텔레비전만 혼자 떠들고 있었다. 목까지 이불을 덮은 채 눈을 감고 계실 때는 가슴이 덜컥했다. 할머니도 역시 배달된 도시락은 열어보지도 않고 머리맡에 베지밀만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며 이렇게 식사를 안 드셔서 어떡하느냐고 걱정을 했다. 밥은 넘어가지 않아 잘 먹지를 않은데 어느 날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을 때 몇 모금 마시려고 받는다며 미안해하셨다. “괜찮아요. 한 모금이라도 필요할 때 마실 수 있다면 배달은 해야지요.” 밥이 그대로 남아있는 도시락을 답답한 마음으로 들고나와 마루에 걸터앉았다. 들고 간 도시락을 내려놓고 빈 도시락을 챙겨 나오면 고맙다고 손을 놓지 못한 분, 골목까지 따라 나와 인사를 한 분, 걸음이 불편하여 현관문 안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기다리는 분, 나름대로 성의를 보이며 배려해 주신다. 집에 매어있던 개들도 처음에는 목줄 끝까지 뛰어오르며 짖어대더니 이제는 발소리만 듣고도 기다리다가 들어서면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 방학하자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손자 손녀들이 찾아와서 2주 동안 배달을 쉬다가 갔더니 열쇠가 3개 중 하나가 줄었다.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다리가 풀리면서 종일 마음이 쓰였다. 지난번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새끼발가락 골절로 2개월 고생하고 그 뒤 혼자 라면을 끓이다가 발등에 화상을 입어 2개월 고생하며 회복이 늦어 꼼짝 못 하고 집에 갇혀 있었던 분이다. 따뜻한 밥을 기다리는 노인들에게, 정성과 사랑으로 만든 도시락을 들고 찾아가는 일을 이 나이에 내가 한다는 것은 이웃을 돕는다는 조그만 자부심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그 작은 일이 다리가 불편하여 쉬고 있으니 마음도 같이 불편해진다. 작은 일도 건강해야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아쉬움이 크다. 목적을 가지고 누군가 찾아갈 수 있는 그 작은 시간의 가치를 다시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추억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가을쯤엔 다시 도시락배달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문진순 수필가는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영호남수필 사무국장, 대한문학 작가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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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9 20:04

지게꾼에서 택배회사로 - 윤재석

▲ 윤재석지게로 물건을 나르는 지게꾼은 옛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낯익은 모습이다. 비록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지게꾼들은 하나의 직업으로 출발하였는데 세상이 변하여 이제는 회사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게는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짐 운반 도구인데 허술해 보여도 균형을 잡는 기술이 필요하여 만약 균형을 잡지 못하면 넘어지고 만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지게질을 해 본 경험이 있다. 처음 지게에 짐을 얹고 일어서면 지게는 내 등을 마다하고 제멋대로 놀며 자꾸 등에서 멀리 떨어지려고 했다. 실랑이 끝에 겨우 일어서면 이제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려 나는 그때 비로소 지게꾼은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경험 때문에 지게꾼의 하루 고달픔을 잘 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등과 이마가 땀으로 젖어있는 모습으로 봄이면 논밭에 거름을 나르고, 가을에 추수할 때면 농작물을 거두어들인다. 이렇게 시골의 지게꾼들은 힘든 일만 하는 농사꾼들이다. 그런데 도시로 나와 중학교에 다니며 마침 사촌 형, 누님과 함께 자취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촌 누님과 함께 시골에서 가지고 온 자취용 쌀을 기차에서 내렸다. 동이리 역에서 내려 개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 지게꾼이 마구 달려들어 쌀자루를 가져갔다. 나는 그때 시골에서 보았던 지게꾼들이 도시에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님은 쌀자루를 가져가도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지게꾼을 따라가며 누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주현동 구세군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발견은 도시 지게꾼과 시골 지게꾼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시골 지게꾼은 몇 번을 쉬는데 도시 지게꾼은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자취방까지 도착했기 때문이다. 누님에게 품삯을 받고 가는 지게꾼을 보면서 시골은 하루 일이 끝나야 돈을 받는데 도시에서는 시간마다 돈을 받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게꾼의 수입은 땀과 비례했다. 즉 짐을 많이 나르고 땀을 많이 흘리면 돈도 많이 벌고, 짐도 적고 땀을 적게 흘리면 돈도 적게 벌었다. 시골을 자주 왕래하며 시골의 지게꾼은 대부분 농업이 직업이지만 도시의 지게꾼은 직업도 지게꾼이라는 것도 알았다. 지게꾼은 기차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게꾼이 짐을 운반해 주는 직업이다 보니 버스 정류소, 시장 등 짐이 있는 곳에는 지게꾼들이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세상이 변하다 보니 지게꾼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지게꾼이 나르던 짐을 지게가 아닌 리어카(손수레)로 대신하며 직업도 리어카꾼이 된 것이다. 그리고 리어카로는 한 번에 많은 짐을 운반하니 짐을 가진 사람들이 리어카을 선호하게 되자 자연히 지게꾼의 직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리어카도 작은 용달 자동차가 등장하자 오래가지 못했다. 이렇게 지게꾼에서 리어카도 리어카에서 용달차로 이동을 하더니 이제는 짐을 전문적으로 배달해 주는 택배 회사가 생겨나서 아주 호황을 누리고 있다. 택배 회사는 21세기에 뜨는 직종의 하나가 되었다. 전화 한 통화면 전국 방방곡곡 아니 전 세계로 짐을 가져다 배달해 준다. 이런 택배사업은 개인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인 우체국과 항공사들까지 한다. 이렇게 앞다퉈 경쟁을 하는 것을 보니 돈벌이가 꽤 쏠쏠한 모양이다. ‘지상에서 우주로’가 ‘지게꾼에서 택배 회사로’가 되었다. △윤재석 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한 수필가이자 서예가다. 안골은빛수필, 영호남수필, 행촌수필 회원이며 한국문인화협회 전북지회장으로 활동했다. 수필집 <삶은 기다림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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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2 19:36

아! 전라감영 - 국중하

▲ 국중하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서울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8도로 나누어 각각 감영을 설치했다. 그리고 8도 관찰사 아래 목, 군, 현이라는 요즘의 시군체제를 갖추기도 했다. 관찰사는 종2품으로 행정, 사법, 군사권을 가졌으며, 2년 임기 동안 관할 지역을 순찰하던 제도인 순력체제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감영에 머물면서 다스리던 유영체제로 바뀌었다. 전주성 내 중앙동 옛 도청사와 경찰청 자리에 한강 이남에서 최대의 전라감영을 설치하고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호남지역을 전라감사가 총괄하는 행정기관이었다. 전라감영은 감사가 집무하는 포정문,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선화당, 감사의 주거 공간인 연신당, 지방관아에 있던 안채 내아, 감사가 친히 나가 농정을 관람하던 관풍각, 내삼문 등 40여 채의 웅장한 규모를 갖추었다. 또한 행정의 중심지로서뿐 아니라 19세기 말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자치기구인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가 설치된 자리로도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곳이다. 그 밖에도 부채를 제작하여 임금에게 진상했던 선자청과 나라에 공물로 바칠 종이를 만들던 지소, 책을 만들던 인출방이 있었다. 그리고 대사습놀이와 관련된 통인청도 있었다. 이렇듯 전주는 조선 500년 동안 전라도 전체를 다스리는 관찰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총체적인 문화의 중심지가 바로 전주 중앙동에 위치했던 전라감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전라감영이 자취를 감추고 자료마저 대부분 소멸되어 보존하지 못한 애석함이 너무도 크다. 다행히도 조선 말의 전주 모습을 담은 고지도가 아직 남아있고, 전라감사의 집무처인 선화당의 사진이 구술기록과 함께 전해오고 있으니 만시지탄이지만 지금이라도 국가기록원의 배치도면을 면밀하게 살펴서 이를 복원자료로 활용함은 전라감영을 한국 근대사에서 위상을 높이는 일이다. 이미 감영 복원을 마친 경상, 충청, 강원 감영은 좋은 본보기다. 일찍이 풍수와 지상가들이 전주를 물길을 헤치고 나아가는 행주형으로 많은 사람과 재물을 한배 가득 싣고 계류하고 있는 형상이라 설파했다. 상제님께서도 군산이 세계 물류의 중심지가 될 것이며 “군창-군산)이 천하의 곳간이 될 것 이니라.”라고 예언했다. “지유군창지 사불천하허 地有群倉地 使不天下虛/왜만리청만리 양구만리 倭萬里淸萬里 洋九萬里/ 피천지허 차천지영 彼天地虛 此天地盈” 이 땅에 군창(군산)이 있으니 천하를 비우게 하지 아니 하리라. 왜국과 청국이 멀고 서양은 더욱 머나 저곳은 텅 비고 이곳은 가득 차리라. “군창이 천하의 큰 곳간이 될 것이니라.”라는 뜻이다. 전주는 예로부터 풍광도 수려하고 먹거리도 풍부하여 한양 평양 다음으로 번성해 사람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그러던 전주가 어떻게 해서 전국 30대 도시로 쇠락하여 매어둔 배가 밧줄이 끊어져 향방 모르고 표류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늦었지만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전라감영에 대해서 충분히 조사하고 연구해서 당시의 문화와 가치관을 되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찬란했던 역사를 똑바로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요즈음 인산인해를 이루는 한옥마을과 객사 그리고 연지공원, 건지산, 산성, 치명자산까지를 포함한 벨트를 조성하여 관광콘텐츠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만 구도심도 살아나고 관광산업도 육성시킬 수가 있다. ‘삼락농정’ 미래의 경제 동력 ‘새만금’을 풀가동하여 떠내려가는 뱃머리를 다시금 전주성 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단단히 붙들어 매서 환골탈태해야 한다. △국중하 씨는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해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예총 완주지회장으로 있다. 우신산업(주) 대표이사로 있으며 <별빛 쏟아지는 여산재>를 비롯해 8권의 수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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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5 18:38

악을 미분하고 선을 적분하면 - 서상옥

▲ 서상옥 까마득하게 잊혔던 옛날, 어느 천재 소년의 일기 한 구절이 생각난다. 악을 미분하고 선을 적분하면 얼마나 좋은 나라가 될까?라는 어린 소년의 티 없이 맑은 글이다. 2014년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세월호는 한국의 침몰이라는 뉴스로 해외 토픽에 오를 만큼 지구촌에 큰 충격을 주어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4월의 잔인한 봄바람이 아름답게 피어날 꽃송이들을 검은 파도 속에 묻어버렸다. 그야말로 온 민족에게 슬픔과 분노를 안겨준 대한민국의 침몰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서해훼리호 사건에 이어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와 대구지하철 참사 등 사전 대책이 없었던 인재를 겪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진도 앞바다에서 안전 불감증 없이 대형 사고를 유발했다. 소위 조선 강국이 되었다고 떵떵거리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하필 일본에서 20년이 다 되어가는 폐선을 사들여 균형을 잡지 못할 정도로 5층까지 증축해서 평형수도 빼낸 채 과중한 선적으로 운행하다 참변을 당했다. 무책임한 선장과 비정규직인 선원들이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들을 고스란히 배 안에 묻어놓고 자기들만 빠져나온 장면을 보고 온 국민들과 유족들은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세월호 실소유주가 전 세모그룹 회장 유병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구원파 교주로 종교를 빙자한 사기범이었으며 그 아들과 일가친척들이 모두 신도들로부터 거둬들인 재산으로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었단다. 우리나라 사회문화와 정치, 경제, 교육, 국방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구멍 난 곳이 어찌 이런 종교 단체뿐이었던가? 그야말로 악의 원천인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모두 도둑놈 천국이라는 유행어가 또다시 회자되었다. 황금만능주의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 우리 사회는 윤리 도덕이 무너지고 개인의 영리에만 눈이 어두운 욕망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국민 소득이 아무리 높아가도 OECD 국가 중에서 삶의 만족도와 행복지수가 하위권이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그동안 큰손으로 경제를 흔들었던 사건이나 정계를 어지럽혔던 각종 게이트는 모두 우리나라 부정부패의 표본이었다. 민주투사를 총칼로 다스리던 정권이나 당리당략에 혈안이 된 정치가들이 오히려 사회를 불안하게 했었다. 또한 일류대를 나온 엘리트들이 그들의 시녀가 되어가는 현실들에 가슴이 너무 무겁다. 때로는 과연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가 염려된다. 이제부터라도 진정 부실하게 살아가는 악의 뿌리는 하나도 없이 미분해야 하지 않을까? 항상 지난날을 망각하고 사는 우리 민족의식이 새로워졌으면 한다. 우왕좌왕하지 않고 오직 진리를 찾아 정의롭게 살아가는 지혜가 아쉽다. 진리는 부정할 수 없는 공리다.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인 것처럼 자명한 것이라고 본다. 국가사회를 바르게 이끌어가는 지혜,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사회, 선을 쌓아가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악을 미분하고 선을 적분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그동안 좌절과 허탈감으로 가득했고 이러한 상처들을 치유하며 살았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좋은 나라는 국민을 향한 리더십, 성숙한 국민의식, 개인의 노력 3박자가 갖춰져야 한다. 준비된 국민들이 더 좋은 국가와 리더를 만들 수 있다. 날이 갈수록 성숙하는 대한민국을 기대해본다. △서상옥 씨는 대한문학 수필, 월간 한국시 시로 등단한 수필가이자 시인이다.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옛날은 가고 없어도>, 시집 <아득한 별들의 고향> 등 다수가 있다. ■ 고 유병언 전 회장 관련 정정 및 반론 보도문 본 인터넷 신문은 2018년 03월 08일 오피니언면에서 「악을 미분하고 선을 적분하면 - 서상옥」이라는 제목으로 세월호 실소유주가 전 세모그룹 회장 유병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구원파 교주로 종교를 빙자한 사기범이었으며 그 아들과 일가친척들이 모두 신도들로부터 거둬들인 재산으로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었단다.라고 보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확인 결과, 고 유병언 전 회장은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 관련 주식을 소유하지 않았으며, 최근 관련 재판에서 청해진해운 주식의 실소유자라고 특정할 수 없다고 판결한 바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고 유병언 전 회장 측은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에서 교주로 추앙받은 사실이 없으며, 유 전 회장의 자녀 및 일가친척들이 신도들의 재산을 착취한 사실이 없다고 밝혀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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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08 21:20

눈 내리는 날의 시 한편

▲ 황정현누군가는 나름대로 이유를 내세워 겨울의 찬가를 노래하기도 하지만 나는 계절 중 겨울이 가장 싫다. 무엇보다 추위의 칼날이 내 몸에 스치면 괴롭기 짝이 없다. 바람결에 차가운 냉기가 나에게 퍼부어질 때마다 나는 오싹 떨면서 가능한 한 추위를 피할 수 있는 피한지를 찾거나 따뜻한 안방을 찾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얀 눈이 내리는 날은 겨울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하얀 눈이 내리고 온 세상이 하얗게 되면 내 마음도 함께 하얗게 채색되어 간다. 보고 싶은 마음도 그리움으로 까맣게 타버린 가슴도 하얗게 채색되어 또 다른 사랑이 꽃이 되어 아득한 그리움의 나락으로 빠져든다. 함박눈을 보면 더욱 마음이 가라앉고 어떤 전설이 내 귀에 들릴 듯싶다. 동심에 빠져들고 저 깊고 넓은 눈의 춤사위에 나도 흔들며 둥둥 떠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현실의 삭막하고 힘든 삶의 생채기를 잠시 잊은 채 천지에 내리는 눈들이 만들어 낸 하얀 군무를 넋을 잃고 바라본다. 눈 내리는 산촌을 하염없이 걷는 연인들을 보면 무대에 등장하는 연극의 주인공들처럼 느껴진다. 도란거리는 사랑의 밀어조차 흰 눈처럼 맑고 순수한 정으로 가득 찰 듯싶다. 날리고 흔들리며 하강하는 눈과 더불어 나도 가볍게 춤추듯 걷는다. 내 마음을 채우는 생기가 눈의 군무와 어우러져 천지간에 퍼지면 기쁨으로 시심(詩心)이 솟는다. 적막강산을 하얗게 뒤덮으며 내리는 눈의 소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사락사락 내린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소르락소르락 내린다고 써야 할까. 아니 이런 의성어는 눈의 춤사위를 표현하는 시어가 아니라는 감정이 앞선다. 아득한 하늘, 저 위에서 한없이 부드럽게 내리는 눈의 소리가 시가 되어 학춤으로 날아오르는 아스라한 광경을 표현해 볼 일이다. <전략>천지는 순백의 그림책이다/무수한 눈의 혼들이 저마다/외로운 율동을 기억한 채/묵묵히 냉랭한 여행을 떠나며/하얗고 하얀 종교를 만났구나/처량하도록 가볍게 내려와서/새벽 기도를 어루만지고/천지신명을 유혹하더니/바람의 장단에 맞추어/춤을 추었던 소리를 찾는가/종적도 없이 사라지는/허망한 춤을 추었던 설아/거룩하다/안타깝다/슬프다 나는 시의 말미에 눈에 대한 떨림, 가벼움과 열광의 지순한 감상에 젖어 ‘거룩하다/ 안타깝다/ 슬프다’로 마무리했다. 그런데 새벽꿈에 홀연히 결미의 시어가 너무 눈답지 않고 눈의 춤으로 날고 있던 장쾌함을 흔들어 놓는 딱딱한 표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잠시 생각하고 고민하며 고쳐 쓰느라 잠이 달아났다. 고요하고 처연한 밤 풍경이 선연히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 내리는 밤 어머니와 싱건지를 꺼내먹던 옛 시절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눈의 세계를 시의 세계에 비벼 넣으려니 별별 생각과 상념이 뇌리에서 떠돌았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비비적대다 뭔가를 썼는데 스르르 잠이 다시 찾아왔다. 내 감각으로 금방 깊은 잠이 든 듯싶었는데 비몽사몽 간에 아내가 내 얼굴에 언어의 소나기를 퍼붓고 있었다. 시를 짓는 과업은 크든 작든 시련을 겪으며 쓸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거룩하다, 안타깝다, 슬프다, 라는 직설적이거나 작위적인 연민을 다소 부드럽고 은유가 스민 시어로 바꾸어야 좋겠다는 생각이 불꽃처럼 떠올라 고심 끝에 나의 의중에 맞는 의미의 시구로 고쳐 썼다. 거룩한 군무(群舞)를 지어/어둠 속을 날았던 사랑의 설/바람에 실려간 꿈이 그립다. △황정현 씨는 계간 『시선』과 『에세이 문학』을 통해 시와 수필에 등단했다. 시집으로 <계절의 연가>가 있다. 전북문인협회, 영호남수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북문예 회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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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01 20:47

주꾸미의 반란 - 김재희

▲ 김재희사람들은 가끔 숨 막히는 일상에서의 탈출을 시도한다. 주꾸미 철이 한창인 작년에 의기가 투합한 사람끼리 모여 희희낙락 부안 나들이를 나섰다. 나이가 많건 적건 어딘가를 찾아 떠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몇 대의 차로 끼리끼리 나누어 탄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이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코에 스며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격포항이다.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발걸음들을 잡는 호객이 더욱 구미를 당겨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식당부터 들렀다. 먼저 자리한 사람들이 마치 주인처럼 우리들을 반긴다. 이미 준비된 식탁 위엔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즐비하다. 냄비에서는 육수가 끓고 있었고 그 옆엔 아직 살아 꿈틀거리는 주꾸미가 접시 밖으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나가 보았자 부처님 손바닥이지만 생존을 위하여 필사적으로 몸부림하는 모습이 사람들에는 구경거리다. 거기다가 매정하게도 간신히 벗어나면 다시 제자리에 옮겨 놓는다. 어느 날 갑자기 덫에 걸려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포로가 된 세상에서 갈 길을 잃고 허둥대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일까. 거부할 수도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삶의 한순간이 되어 버렸다. 다리에 힘을 주고 한없이 넓은 공간으로 떠다니던 자유를 갈망하고 먹이사슬 속에서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공생하며 살았던 팽팽한 삶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들에게 잠시나마 남아 있는 시간은 참으로 짧고도 귀한 시간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저들은 삶의 끝임을 알지 못하고 다만 전처럼 자유롭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을 뿐이다. 촉수를 곤두세우고 있다가 무언가가 몸체에 닿은 듯싶으면 반사적으로 반응을 보인다. 어떤 놈은 까만 먹물을 쏘아 댄다. 아주 당차고 야멸친 반란이다. 자신을 찾고자 하는 반란,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에게 주어진 본능이리라. 종족을 번식시켜야 하는 본능,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 더 나은 생활을 위한 경제적 자립, 남보다 잘나가고 싶은 욕망 등의 울타리 안에 갇혀 우왕좌왕하고 있는 우리 또한 어느 신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삶이다. 우리가 주꾸미의 앞일을 알고 있듯 우리 또한 신이 알고 있는 주어진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이 어느 쪽인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를 맞이하는 순간까지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생명이다. 이제 지나온 시간보다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마음 아픈 일도 많았지만, 세월이 약이라는 노래처럼 좋은 일에 묻혀 이만하면 잘 살아온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나이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폭풍이 불어올지 모르는 일이다. 잘되어 간다고 믿었던 일이 어느 순간에 구멍이 날 수도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 설령 그렇더라도 나름대로 대처해 나가는 방법을 터득한 나이라고 자위해 보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객관적인 입장에 서 있을 땐 누구나 긍정적이고 너그러운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자신이 당하는 일 앞에선 이성을 잃기 쉽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인성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언제나 하찮은 감정 앞에서도 우왕좌왕하는 인간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어쩌면 지금 어느 막다른 골목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르고 헛된 욕망과 절망과 질시와 미움으로 기운을 다 소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주꾸미를 닮은 몸짓으로 어설픈 반란을 일으키며 갈 길을 찾아 더듬거린다. △김재희씨는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장승’으로 등단한 뒤 수필집 <그 장승을 갖고 싶다>, <꽃가지를 아우르며>를 냈다.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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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22 21:18

立春大乞

또 봄, 봄이 왔다.엄동설한이 다 지나가고 또 봄이 왔다. 산골짜기 얼음 녹아내리는 물소리가, 굳은 땅밑에서도 돋아나는 새싹들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고, 금방이라도 개구리가 머리를 치켜들고 뛰쳐 나올 것만 같은 새봄이 왔다.잠깐 지난해 봄을 생각해 본다. 지난해, 2017년 봄은 촛불 시위 최대 결전의 계절이었고 결실을 보는 계절이었다. 2016년 늦가을부터 시작했던 촛불시위는 추운 겨울에도 계속되었고 새봄이 언제 오고 가는지도 몰랐다. 온 국민은 분노로, 절망감으로, 배신감으로, 그러나 오직 한 가닥 새 나라의 소망을 담아 촛불에만 정성을 모았었다. 그 결과로 총성은커녕 안전사고 하나 없이 지성이면 감천, 결국 촛불 혁명을 이루어 냈다. 드디어 탄핵은 이루어졌고 박근혜 정권은 무너졌다. 지금 국정의 썩은 치부들이 모두 파 헤쳐지고 목하 관련자들의 엄중한 심판이 진행되고 있다. 국정농단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라를 경영해 보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이 이런 수준의 사람들이었던가 하고 극심한 배신감을 넘어 분노와 비애를 금할 수 없다. 어찌 됐던 우리는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보도를 보니 외국에서도 우리를 프랑스 혁명보다 더 값진 혁명을 이루어 낸 위대한 국민이라 칭찬해 마지않는다 한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통쾌한 일인가. 이러한 일들이 어찌 우리 하나님의 보우하심이 없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진심으로 감사할 뿐이다.우리가 누구이던가. 작은 나라이지만 천여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아오면서도 반만년 역사를 지키고 발전시켜 오늘을 이루어낸 우리가 아니던가. 일제 치하는 접어두자. 독립 후 70여 년, 그 질곡의 세월을 겪어 오면서도 약소국이던 우리가 세계 7위의 수출 대국을 이루어 낸 것은 세계사에 없는 기적이라 하지 않던가.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이제 또 4차 산업혁명이다 AI의 시대다 하며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요즘, 우리의 역량을 다시 한번 모아내기만 한다면 또 무엇인가를 이루어 낼 만한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랴. N포 세대라 자포자기하며 울부짖는 젊은 세대들을, 금수저, 기득권, 갑을, 철밥통에 낙담하며, 헬조선은 내일에 희망을 걸 수 없는 세상이라며 절망하며 주저앉아 버린 저들을 어찌할 것인가.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정부가 앞장서 나서야 하는 때인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청년세대의 좌절감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일 것이다. 젊은 청년들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들의 넋에 새로운 정기를 불어 넣어 되살아나게 해야 한다.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일어나 뛰게 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 약속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약속했던 대통령의 말이 담보되는 세상을 반드시 이루어 내야만 한다.또 봄, 새봄이 왔다.지금의 우리 젊은 세대들이 “일년지계(一年之計)는 재어춘(在於春)하며 일생지계(一生之計)는 재어청(在於靑) 하느니라” 하신 옛 어르신들의 가르침을 가슴에 되새기며 이 봄, 새로운 포부로, 새로운 패기로 벌떡 일어나 앞을 향하여 돌진해 나아가는 당찬 모습들을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立春大乞” 이렇게 말이다.△주진우씨는 2005년 문학세계 수필 부문으로 등단했고 전북문인협회, 두리문학회 회원으로 있다. 전북대 서기관, 전북대병원 상임감사 등으로 30여 년간 근무했다. 전주금암교회 장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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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09 23:02

가시 뽑기

지난여름은 36도의 불볕더위와 가뭄이 맹위를 떨쳤다. 농민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을 태웠고 나도 아픔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다가 하필 손톱눈이 아파서 매일 소독하고 약도 먹었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병원에를 갔더니 의사가 확대경으로 보더니 3㎜ 정도의 가시를 뽑고 붕대에 반창고까지 붙여 주었다. 그러나 통증은 6일 동안 계속되었고 삼복더위에 샤워도 못 하고 음식도 만들 수 없었다.고문 아닌 고문을 당한 꼴이어서 병원을 옮겨 덜 빠진 가시를 뽑고 또 싸매 놓았다. 확대경으로 보고도 가시를 뽑아내지 못한 의사를 찾아가서 항의하고픈 생각도 있었으나 그만두었다. 잘못 치료한 의사 덕택에 10일간 더위와 씨름하며 인내의 극기 훈련을 한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리고 평소에는 별로 쓰지 않던 새끼손가락이 이렇게도 소중함을 깨달았다.지난여름의 아픈 새끼손가락은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행복이란 순간이며 행복에는 지속성이 없어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다.”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과 행복은 지금 이 순간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우리에게는 몸을 찌르는 가시뿐만 아니라 마음을 찌르는 가시와 삶의 가시가 있다. 예를 들면 흡연의 가시는 성인뿐만 아니라, 중고생을 유혹한다. 20여 년 전, 필리핀 초등학교에서 ‘금연’을 교훈으로 정한 때가 있었다. 이 망국의 풍조가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도시 초등학교 교장실에서 흡연학생과 필요한 학생들의 대화 창구를 운영하고 있다. 이 사업이 나비의 날갯짓 같은 작은 변화가 폭풍우와 같은 커다란 변화를 유발하는 나비효과로 나타나기를 기대한다.언젠가 P중학교 옆을 지나는데, 학생들이 체육복을 입고 농구, 축구, 배드민턴 등 그룹별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5~6명의 아이들은 나무 그늘 아래서 예사롭게 흡연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못 볼 것을 본 충격 때문에 가슴이 뛰었다. 수업 시간에 저럴 수가? 우리나라의 미래와 그들의 부모와 학생들이 염려스러웠다. 학교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싶어 슬펐다.순간 1980년도 초반 중학교 3학년 담임 시절 어느 제자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그 남자아이가 골초라는 소문을 귀띔으로 듣고 수시로 호주머니와 가방을 열어 보았는데 담배가 안 나와서 내심 기뻤다. 그런데 뒤에 알고 보니 뒷동산 소나무 가지에 숨겨 두고 즐기는 것이었다. 지금쯤 50대 중반은 되었을 텐데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싶다. 그 아이에게는 담임교사가 눈엣가시였을지도 모른다.나이는 과거를 되돌아보게 한다. 한 명이라도 더 상급학교에 합격시키려는 욕심 때문에 밀고 끌기를 하다 보니, 미처 따라오지 못한 학생들은 아픔을 감내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닌데 그때 나는 좋은 교사가 아니라 가시 같은 교사가 아니었을까?이제 나는 여생 상처를 싸매주는 붕대가 되고 싶다. 사람들은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며 산다. 부부와 부모, 자녀, 형제, 친척, 상사와 동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삶의 수레바퀴가 지구가 궤도를 따라 돌듯이 나도 지구를 감은 둥근 붕대처럼 살면 윤기 나는 삶이 될 것이다.비움의 소통을 연습하련다. 봄에는 회사한 빛깔로 하늘거리던 꽃잎도 여름에는 생명의 창일함이 온 누리를 덮던 초록의 향연도, 꽃보다 더 고운 단풍도,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며 떠난다. 인생은 용서하며 용서받으며 살아간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휴지통이 하나씩 있다. 이 휴지통에 모든 탐욕을 비우고 베풀며 살고 싶다.△박순희씨는 남원 출생으로 한국방송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국문인’으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행촌수필문학회, 영호남수필문학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수필집 ‘꽃으로 말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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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02 23:02

푸른 숲의 내 고향 전주 - 김덕남

몇 년 전 여름 전주의 불볕더위가 대구 분지를 앞지르며 연일 전국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 도시의 난개발 공사로 숲이 훼손되고 아파트 난립으로 바람길이 막혀서 그렇다며 시민들의 불만이 높았다. 더욱이 상대적으로 낙후되다 보니 다른 도시로의 인구 유출도 막아내지 못한 채 재정 자립도가 전국 최하위를 면치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도시, 그리고 정겹고 아름다운 내 고향 전주를 사랑한다.태어나서 자라고 배운 내 고향 전주는 멋과 맛으로 이름난 예향의 도시다. 이름에 걸맞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다정다감하고 유순하였으며 학자와 양반의 풍모를 지녀 어린 시절만 해도 이름난 교육도시였다. 그리고 그 규모로도 전국 5대 도시에 들었었다.그런데 언제부턴가 산업화 바람으로 도시들은 공장이 들어서 검은 연기를 내뿜고 빌딩들이 치솟기 시작했으며 몰려드는 인구를 소화하기 위해서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리하다 보니 도시들이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전주의 규모는 후순위로 밀려났지만 나는 별로 부럽지 않았다. 오히려 발전은 좀 더디지만, 비교적 맑은 공기와 적당한 문화 공간이 있고, 체계적이고 부족함 없는 의료시설과 편리한 교통 등은 내 정신적, 육체적 삶을 전혀 불편 없는 전주가 좋았다. 도시가 아담하여 길거리를 나가면 정겨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도시 풍경도 소박해서 아름다웠다.사변 뒤의 어린 시절은 나무들이 주 연료여서 산의 나무들은 물론 심지어 풀조차 남아나지 못했다. 중학교 때 선생님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우리나라 민둥산의 사진과 부강한 나라의 울창한 숲을 비교하여 보여주며 우리나라 산에 나무를 심기를 역설하시곤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크게 실감하지 못하고 먼 나라 그림으로만 받아들였다.하기야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때도 까맣게 물들인 군복 하나 입고 어깨에 힘주던 시절,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청춘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산사태를 연례행사처럼 받아들이기만 했지 잘 먹고 잘사는 일이 무엇이며 ‘참살이’가 무엇인지 알 리가 없었다. 당시는 한 뼘의 빈 땅이라도 있으면 화초보다 채소 한 포기 심는 일을 더 중히 여겼다. 푸른 산이 국력이라며 학창 시절부터 직장인이 되어서까지 꾸준했던 나무 심기는 그나마 애국심으로 뭉쳐진 선각자들의 산림정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마다 식목일 즈음이면 소나무와 잣나무 묘목을 들고 나무 심기 행사에 나섰던 내 등 뒤로 따사롭게 내리던 봄 햇살이 학창시절의 그리움으로 되살아난다.그런데 이제는 어디서고 녹음 짙은 울창한 숲이 나를 반긴다. 푸른 숲에 들어서서 적당한 숨을 몰아쉬면 빈 의자는 넉넉한 마음으로 내게 쉴 자리를 내어준다. 햇살을 품은 초록과 연두 잎은 영롱한 빛으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 내게 다가오며 평화를 준다. 내 몸 안의 모든 찌꺼기가 다 빠져나가는 청량감을 준다.요즘 들어서는 삭막했던 길거리에 푸른 숲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구간마다 융단처럼 돋아난 새파란 잔디에 내 눈의 피로를 씻는다. 많은 이들의 노력이 내 고향 전주를 아름답게 바꿔가고 있다. 전주, 바로 이곳이 ‘참살이 생활’을 추구하는 진정한 우리네의 삶터다. 여름 불볕을 사정없이 되쏘는 포장길에서 강렬한 태양으로 헉헉거리며 뜨거운 숨을 잠시 쉬어갈 도심의 가로수 길은 사막의 오아시스요, 생명수다.△김덕남 씨은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했다. ‘에세이스트’로 등단했고 아람수필문학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물사랑 공모전 은상, 글벗문학회 동상을 수상했다. 수필집으로 <아직은 참 좋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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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26 23:02

흐른다. 전주천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물끄러미 듣는다. 쏴- 쏴! 옹알거리는 여울물 소리. 조잘조잘 재잘재잘.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이야기인 듯, 옛날이야기인 듯, 물소리에서 숨은 이야기들이 기어 나온다.오목교라 이름 지은 다리를 처음 걸어본다. 전주한옥마을과 지금의 국립무형유산원 사이를 잇는 새 돌다리다. 국립무형유산원은 옛날 전주수목원 자리였다. 다리 가운데서 동쪽을 바라보면 승암산의 풍경이, 남쪽으로는 남고산성이, 서쪽으로는 남천교 위, <청연루>의 날렵한 지붕이 완산 아래로, 마치 병풍 그림을 펼쳐놓은 듯 아름답다. 다리 밑으로 내려와서 예부터 있던 징검돌다리를 건넌다. 너럭바위 같은 징검돌을 하나하나 짚어본다. 물오리 몇 마리와 왜가리 한 마리도 산책을 나와 청량한 물 위에서 유유히 놀고 있다. 돌 틈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전주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처럼, 추억이 된 옛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아서 한 바윗돌에 걸터앉아 새삼 그 이야기 소리를 노래처럼 새겨듣는다.경남 땅이 고향이던 내가 어쩌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전주에서 보낸 인연으로 전주 사람이 되기까지 반세기가 훨씬 넘었다. 지금은 상관에서 전주천의 발원지인 슬치 고개에서 내려오는 물길인 대흥천을 따라와 한벽교를 거의 매일 지난다, 한벽당 벼랑에서 청연(靑煙)을 이룬 물보라가 서쪽으로 흐르게 되니, 여기서부터 전주천이라 불린다. 아주 먼 옛날에는 대흥천 물길이 오목대를 휘돌아 금암동, 구 전주방송국 앞, 거북바위 앞으로 흘렀다 한다. 오목대와 거북바위에 배를 대었다고 하니, 상전벽해가 거꾸로 몇 번이나 뒤집어졌는지 까마득하기만 하다. 삼각산 얼음물이 녹으면 청계천 굽이진 냇가에는 여기저기 방망이 소리가 요란했다고 했지. 방망이 소리가 잦아들면서 한강의 기적은 지금의 서울을 이룩했다. 전주천 또한 마을을 품어 오늘의 전주 역사를 이루어왔지 싶다.여고 시절 언니 따라 한벽당 아래의 빨래터에 온 적이 있었다. 광목천 홑청 같은 것을 빨면 삶아주는 직업도 있었다. 빨래를 자갈밭에 널어 말리던 풍경도 떠오른다. 그렇듯 전주 사람들도 전주천의 빨래터를 이용했다. 전주 십경의 하나였던 남천표모(南川漂母)는 온데간데없지만, 여전히 전주천은 전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전주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을 때, 내 생일 날 그이는 오모가리탕을 사준다고 나를 전주천으로 데리고 왔다. 옛날 빨래터의 흔적은 없어졌지만, 천변에 천막을 친 평상들이 즐비했다. 나는 그때 오모가리가 물고기 이름이 아닌, 오목한 뚝배기 이름인 것을 알았다. 전주 팔미 중의 하나라는 것도. 여름철에 내 생일이 있기에 시원한 나들이가 되었다. 지금은 오모가리탕 집이 많이 사라지고 한두 집이 명맥만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물고기를 잡을 수도 없다.전주천을 정화한 뒤, 맑은 물에서만 사는 쉬리와 멸종 위기였던 야생동물인 수달까지 사는 깨끗한 하천이 되었다. 천변을 공원화하여 철마다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니 시민들의 운동 장소와 산책로가 되었다. 천변 길을 따라 내려가면 전주의 역사성을 지닌 남부시장과 장군봉의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지고, 삼천까지 올라가는 둘레길의 길목마다 전주 사람의 사연이 깃들어 있다. 전주 고도에 쌓인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주천의 물길 따라 흘러서 삼천을 만나고, 다시 고산천과 합류하고 흘러서 만경강을 이루어 새로운 역사의 바다로 흘러가리라.△조윤수씨는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해 목포문학상과 행촌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전북문인협회 이사, 수필과비평작가회 부회장으로 있으며 <나의 차마고도> 등 3권의 수필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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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19 23:02

노을 - 김연주

산책은 몸과 마음을 한결 가뿐하고 개운케 한다. 나는 가끔 황방산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산책을 한다. 그런데 매일 같이 다니면서 가끔 산의 모습이 다른 걸 느끼게도 한다. 여느 날과 달리 발걸음을 재촉하며 하산하는 산모롱이에서 서녘 하늘의 노을 지는 풍경을 만났다. 우연히 마주친 일몰의 풍광. 발걸음이 멎었고 내 가슴은 벅차올랐다.서해의 낙조도, 망해사의 일몰도 아니지만 참으로 아름답다. 오늘 하루의 시름을 안고 산 너머로 떨어지는 또렷한 윤곽의 붉은 해,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모습이 아닌가. 지는 해가 가슴에 불을 놓는 듯하여 오늘 하루도 무사함을 감사하며 완전히 기울 때까지 바라보았다. 화가라면 한 폭의 그림으로, 시인이라면 한 편의 시를 남길 수 있을 텐데…. 노을에 사로잡힌 마음을 추스르며 내려오니 대지의 미물들은 귀가를 서두르라고 덩그런 조명들을 켜 준다.일몰에 취한 나는 마음까지 노을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일몰인가, 일출인가 분간할 수가 없다. 절정에 달한 붉은 일몰을 보노라니 일출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우연히 볼 수 있는 일몰에 비해 일출은 기다림이 따른다는 것 외에 거의 같았다.너무도 아름답게 내리는 낙조의 찬란함은 밝음의 끝이고, 어둠의 시작이다. 내일을 열기 위해 고요를 꿈꾸며 사라지려는 찰나다. 한 폭의 거대한 그림이 덮인다. 장편의 시를 읽은 것 같다. 이 순간을 홀로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구름밭 같기도 하고 해면 같기도 한 산 능선 너머로, 주황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노을 속으로 태양이 미끄러지듯 잠겨 버린다. 순간 서서히 어두운 빛이 내리기 시작하고 허정 무심한 마음이 된다. 산의 정적을 뒤로하고 차들이 숨 가쁘게 달리는 신작로로 내려왔다. 차들의 소음과 전조등이 얽히고설키는 대로를 향해 나왔다. 귀가를 서두르는 차들의 불빛 행렬과 아파트 빌딩 사이로 스러져 가는 노을빛이 번득인다.인생의 황혼도 저처럼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풍경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새삼스레 내 인생의 황혼빛은 어떤 색깔일까. 생각해 보며 그저 꿈에 그리던 고고 지순한 삶이 어른거린다. 삶은 연습이 아니다. 정말 내 인생의 황혼에 서서 당당하게, 후회 없이, 아름답게 살았노라 말할 수 있을까.어느 여름날, 후배의 시집 출간 기념 모임이 있었다. 뒤풀이로, 청운사 하소백련지에 다녀오는 길에 선생님의 노모를 뵈러 갔다. 가지고 간 시집을 드렸더니 책표지의 소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 “이건 그냥 노송이 아니다.”고 말문을 여셨다. 노송의 등걸과 가지마다 한 여자의 일생이 살아 숨 쉬는 게 보이시는 듯 “자식은 여자가 가르치는 거지. 노송 한 그루에 길이 있고, 자식이 있지. 어머니의 마음 씀씀이를 보면 자식들의 사람 됨됨을 알 수 있는 거야.” 소곤소곤 속삭이듯, 소나무 등걸을 마디마디 짚으신다. 그 모습이 꼭 친정어머니 같았다. 그림은 글을 쓰듯 그리고, 글을 그림 그리듯 쓰라는 말같이 책 표지만 보시고도 한 편의 수필을 줄줄 읊으신다.요즘 노인들을 볼 때마다 ‘저게 바로 내 자화상이지’하고 생각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 느끼는 그 많은 자화상을 보며 스스로를 반추해 본다. 향기롭게 늙어 가는 선생님의 노모. 그 모습이 먼 훗날 내 모습이라면 좋겠다. 그러면 열심히, 멋지게 살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노을에 묻혀 집을 향해 걷는 동안 노을 덕분에 노년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김연주 씨는 교직에서 퇴직한 수필가·아동문학가다. 소년문학 신인상과 작촌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전북문인협회, 색동어머니 동화구연가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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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12 23:02

첫 눈 - 한일신

와- 첫눈이다! 잿빛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더니 갑자기 눈이 펑펑 쏟아진다. 첫눈이 이렇게 소담스럽게 내리니 나도 모르게 왠지 가슴이 설렌다. 날씨가 영상이라 눈은 바닥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물방울을 남긴 채 금세 사라진다. 하지만 머리와 어깨 위에 내린 눈은 수북이 쌓였다. 잠시 쌓인 눈을 털고 사무실을 들어서니 먼저 온 동료가 아직도 눈이 오냐고 물어보는데 뒤를 이어 들어온 문우들이 대답 대신 눈을 털어 보인다.오늘은 편집위원들이 모여 원고를 검토하고 교정하여 다시 편집장에게 주는 날이다. 한두 사람이 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여럿이 하니까 재미도 있고 한결 수월했다. 내가 문학에 발을 들여놓은 지도 어느덧 10년째가 되는데 지금까지는 쓰는 데만 급급했었다.그런데 오늘은 이렇게 다른 사람 원고를 검토할 기회를 주어 참 고맙다. 그동안 내 글도 이렇게 누군가가 검토하고 수정하거나 교정하여 주었으리라 생각하니, 그분들의 수고에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어제가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하여 점차 겨울 기분이 든다는 소설이었는데 오늘 이렇게 눈이 오다니, 옛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절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24절기가 있다. 이 절기 중에는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이라고 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시작을 알려준다. 각 절기는 한 달에 두 번쯤 들어 있는데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우리나라는 이 절기를 따라 농사를 지어왔다.그렇다고 절기는 농경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어업과 관혼상제를 치르는 데도 필요했다. 이렇듯 절기는 계절의 변화를 알리고 농사의 때를 가늠하여 할 일을 제때에 하며 가끔 절기 음식으로 정을 나누며 자연과 더불어 오순도순 살아가는 풍습을 낳았다.몇 개 남지 않은 나뭇잎들이 하나둘 힘없이 떨어졌다. 떠난다는 것은 항상 슬프고 아픈 일이다. 하지만 가을 나무는 이제 모든 걸 훌훌 털고 갈색 그리움만 남긴 채 눈꽃으로 채웠다.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언제부터인가 봄과 가을은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가고, 여름과 겨울만 존재하는 것 같다. 이러다가 봄과 가을이 아주 없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봄옷이나 가을옷은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계절이 바뀌니 말이다.우리의 삶도 어찌 그리 시간이 빨리 가는지 때론 야속하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는 시간 잡을 수 없고, 오는 시간 막을 수 없다면, 우리도 떠나는 그들과 더불어 한 몸이 될 수밖에.눈이 그쳤다가 또 내린다. 살면서 가슴 설레는 일이 어찌 오늘뿐이겠는가? 중학교 입학하던 날도 있고, 늦깎이로 취직하여 첫 발령을 받았을 때도 얼마나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같이 첫눈 오는 날이면 특별히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언제였던가, 첫눈 오는 날 만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서울사람이어서 얼마간 편지로 교제하다가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날을 기다리는 순간부터 그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으로 밤잠을 설쳤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어찌나 가슴이 뛰던지 두 손을 모아 기도까지 했었다.하지만 막상 만나고 나서 그 사람과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늘 내린 첫눈이 땅에 닿자마자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 뒤에 다 지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이렇게 첫눈이 오는 날이면 어디서 그 사람이 갑자기 나타날 것 같아 두리번거린다.어찌 보면 사람이 살면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누구나 다반사인데, 아직도 아련한 추억이 남아 있는 것은 나만의 일일까?△한일신 수필가는 공무원으로 정년 퇴임한 후 수필에 입문해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영호남수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내 삶의 여정에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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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0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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