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의 한 이겨내려는 산천 유람 기행형 특징 / 4단락 3부문으로 구성
‘상사별곡’은 규방(閨房)가사이다. 내방(內房)가사, 부녀가사라고도 명명된 이런 가사들은 여탄형(女嘆型)이 주종을 이루지만, 이 외에 계녀(誡女)형, 야유(野遊)형, 기행(紀行)형 등의 유형으로도 대별된다. 특히 상사별곡이라는 명칭의 규방가사들이 많고 필사과정에서 조금씩 변이된 이본(異本)성의 가사들이 있기도 하지만, 이 작품처럼 전혀 별개의 상사별곡들도 많다. 이 가사는 필자에게 수강을 했던 익산군 함열읍 석매리에 사는 정대위 군으로부터 영인하여 받은 것으로 증조모가 소장해 오던 것인데 작자는 확실치 않다고 했다.
규방가사의 창작과 수용, 향유의 분포가 영남에 국한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이 상사별곡은 전북 완주군 봉동면에서 발견된 ‘홍규권장가’와 더불어 호남의 규방가사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사용된 어휘가 전라방언이 많고, 특히 ‘ㄱ‘의 ’ㅈ’화 구개음화현상이 뚜렷하며 ‘ㅎ‘ 도 ’ㅅ’이나 ‘ㅆ‘ 으로 바뀌는 음운변화를 보더라도 그렇다. 본문 중 ’한국충신 손중낭께 전하야다고‘라는 가사구로 보아 창작한 시기는 서기 1897년 광무 1년 이후일 것으로 보인다. 이 해는 고종 34년으로 그해 10월 일제에 의해 황제즉위식을 갖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했기 때문이다.
이 가사는 사별한 남편에 대한 연모의 정이 곡진할 뿐만 아니라, 상사의 한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산천을 유람하는 기행형을 취하고 있다는데 그 특성이 있다. 조선조 여인네들에게 있어 남편이란 하늘과 같았고 또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그런 남편이 갑자기 득병하여 횡사하는 건 하늘 무너지는 슬픔이며 극복할 수 없는 괴로움이다. 더불어 뼈 속 깊이 파고드는 상사의 그리움은 치유할 길은 없는 절망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산천을 유람하면서 그러한 고독과 괴로움을 극복한다는 것으로 일관한다는 다소 허구성까지 내포하고 있다.
구성을 보면 여자로 태어나 부덕을 닦은 숙녀로 성장한 후, 정혼에 따른 교배례(交拜禮), 초야정사와 신행(新行), 득병과 망부의 한 등 4단락으로 이루어진 상사(相思)의 정과 명산대천과 무변창해(無邊滄海) 유람, 악양루와 고소대의 승경(勝景), 봉황대와 강동의 범주(泛舟) 등 3단락의 유람기행, 1단락의 과부의 애소(哀訴)와 경계(警戒) 등 3부문으로 되어 있다. 어찌 보면 상사별곡과 기행가사 두 편을 묶어놓은 듯 보이는 이러한 구성은 조선 말기 개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규방가사의 변이형태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렁저렁 성인하여 십 오 세가 당도하니
옥안운발(玉顔雲髮) 고운 얼굴 만인 중에 빼어나매
우리부모 이르기를
당 명황 시절의 양귀비(楊貴妃)가 갱생한 듯
한나라 시절의 왕소군(王昭君)이 갱생한 듯
아무도 우리 천하는 우리 딸이 무쌍(無雙)이라
인근 읍의 유명하기로 구혼하는 매파(媒婆)들이
만수산의 구름이요
영주의 호결 뫼듯 사방으로 오고갈 제
우리 부모 나를 두고 이아니 고를소냐
직서(直書)하기 일을 삼아 각별히 가릴 적에
영웅군자 얻으려고 주사야택(晝捨夜擇) 하건마는
천생만민(天生萬民) 하올 적에 각각 짝이 있는지라
하늘이 정한 배필(配匹) 인력으로 어찌할까
상사별곡의 허두(虛頭)는 하늘과 땅, 해와 달이 차고 기울면서 우주만물이 생성하는 운행의 법칙 따라 각기 남자와 여자로 태어난다는 철학적 해석으로 시작된다. 주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지 않고 여자로 태어남이 분하다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남을 기뻐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즉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에 오히려 관심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재수 교수는 남자에겐 요조숙녀가 필요하고, 여자면 군자호구가 짝이 되어야 하는데 이 양성의 화합으로만 인간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상사별곡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향을 취하여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탄하거나 강한 불만을 토로하는 그런 일반적인 여탄류의 패턴으로 흐르지 않았다. 2, 3세에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여 7, 8세에 이르러서 공자, 맹자, 안자, 증자의 가르침을 받고 부모에게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를 익힌다.
그리고 여자의 덕목의 하나인 침선(針線)과 자수(刺繡)와 방적(紡績)을 배운 후, 나이 15세 꽃다운 나이에 들면 각별히 배필의 취택과정을 밟게 되는 순서가 상세하게 진술되고 있다. 부모의 눈에는 자신의 딸이 당나라 때 절세미인이라던 현종의 비 양귀비보다도 아름답고, 한나라 원제(元帝)의 궁녀였으나 흉노와의 친화정책으로 흉노족장에게 시집간 왕소군보다 더 예쁘고 아름답다고 비유하며 ‘우리 천하는 우리 딸이 무쌍(無雙)이라’고 기염을 토한다.
그런 보옥(寶玉)같은 딸이었기 때문에 ‘구혼하는 매파들이 만수산에 구름이요’라 자랑하지만 인간의 뜻보다 오히려 하늘의 뜻에 따라 이뤄진 운명을 어찌할 수 없다는 기박한 운명론이 바탕에 깔려 있다. 궁합을 보고 길일을 택한 후 다시 중단(中段)을 보아 각종 옥살(獄煞)을 피하도록 완벽을 기했던 혼사였지만, 종국에 가서는 그것도 무용지물이었다는 허망함을 노래한 규방여인의 한 맺힌 상사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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