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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분이 대막리지셨군요.” 영빈관으로 돌아오는 계백에게 다가온 부사(副使) 화청이 열에 뜬 목소리로 말했다. 영빈관은 연개소문 대저택 안이어서 사신 일행은 걸어가고 있다. “무슨 말이야?” 계백이 묻자 화청이 옆으로 다가와 걷는다. 이제는 얼굴까지 상기되어 있다. “한솔, 제가 태원유수 휘하 막장이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랬지.” 이제는 부사(副使) 유만까지 옆으로 다가왔다. 화청이 말을 이었다. “저는 그때 성밖 검문소를 지키고 있었는데 유수한테 고구려 밀사가 왔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밀사가?” “예, 밀사가 유수를 만나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문이 났어?” 그때 화청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지금에야 내막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솔.” “무슨 말이야?” “그 밀사는 대막리지가 맞습니다.” “그런가?” “그런데 그 소문은 이세민이 일부러 퍼뜨린 것 같습니다.” 화청이 거침없이 말을 잇는다. “그 당시는 수(隨)의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가장 두려운 세력이 동북방의 고구려였지요. 양제의 대군을 두 번이나 몰사시킨 고구려가 쳐들어오면 반란군은 풍비박산이 될 것이었고 수는 단숨에 멸망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거든요.” “그렇겠군.” “그런데 대막리지가 다녀가셨단 말입니다.” 화청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떠올랐다. “어떤 소문이 난지 아십니까? 유수 이연의 뒤를 고구려 대군(大軍)이 밀어주기로 약속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하.” “그러자 주저하던 장졸들도 이연, 이세민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과연.” “이세민이 소문을 퍼뜨린 것입니다.” “간교한 놈이 맞군요.” 유만이 그렇게 말했지만 계백은 숨만 들이켰다. 이세민의 빈틈없는 성품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시(戰時)에 맞는 군주가 있고 평시(平時)에 어울리는 군주가 있다고 했다. 이세민이 전시에 어울리는 군주다. 그날 밤 침소에 들었던 계백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침대 옆쪽에 여자 하나가 앉아있다가 일어섰기 때문이다. “누구냐?” 놀란 계백이 묻자 여자가 시선을 내린 채로 대답했다. “밤 시중을 들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이런.” 방안에는 양초를 여러개 켜 놓아서 여자의 자태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림자가 분명한 밤에는 여자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진다. 여자는 미색이다. 분홍빛 치마 저고리를 입었고 허리끈을 맨 허리는 잘록했지만 가슴과 엉덩이는 크다. 한동안 여자를 응시하던 계백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반강이라고 합니다.” 고분고분 대답한 여자가 계백의 뒤로 가더니 겉옷을 벗겼다. 익숙한 태도다. 계백이 뒤에 선 여자에게 다시 물었다. “시중들 여자는 나한테만 왔느냐?” “아닙니다. 부사(副使), 사신 일행으로 온 군사까지 모두 여자가 갔습니다.” “어허.” 그러니 정사(正使)께서도 저를 그냥 보내지 마십시오.” 여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띄워져 있다. 겉옷을 벗은 계백에게 여자가 헐렁한 침소 옷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제 앞에서 본 여자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풀려 있다. “이곳은 고구려입니다. 고구려의 풍습을 따르시는 게 낫습니다.” 그때 계백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고구려 여자들이 기가 세구나.”
우리가 신고 다니는 ‘양말’이 한자에서 온 말이라고 하면 깜짝 놀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자어다. 원래 버선을 한자로 ‘말’(襪·버선 말)이라고 했다. 그런데 서양에서 이 버선과 비슷한 것이 들어오니까 버선을 뜻하는 ‘말’에 ‘양’자를 붙여서 ‘양말’이라고 했다. 버선하고 양말이 이렇게 해서 달라졌던 것이다. 이렇게 서양에서 들어왔다고 해서 ‘양’자를 붙이거나 ‘서양’을 붙여 만든 단어들이 꽤 있다. 그 예가 무척 많음에 놀랄 것이다. 몇 가지를 예를 들어 보자. ‘양철’도 ‘철’에 ‘양’자가 붙어서 된 말이다. 쇠는 쇠인데, 원래 우리가 쓰던 쇠와는 다른 것이 들어오니까 ‘철’에 ‘양’자만 붙인 것이다. 우리말에 ‘동이’라고 하는 것은 물 긷는 데 쓰이는 질그릇의 하나인데, 서양에서 비슷한 것이 들어오니까 여기에 ‘양’자를 붙여 ‘양동이’라는 단어를 만든 것이다. 또 양은은 구리, 아연, 니켈을 합금하여 만든 쇠인데, 그 색깔이 ‘은’과 유사하니까 ‘은’에 ‘양’자를 붙여 ‘양은’이라고 한 것이다. ‘양재기’는 원래 서양 도자기라는 뜻이다. 즉 ‘자기’에 ‘양’자가 붙어서 ‘양자기’가 된 것인데, 모음 역행동화가 이루어져 ‘양재기’가 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쓰이지 않는 말인데 서양에 다닌다는 뜻으로 ‘다닐 행’자 앞에 ‘양’을 붙인 무역회사를 ‘양행’이라 했다. ‘유한양행’이라는 회사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황금들판을 돌돌 말다보면, 지평선이다/ 지평선을 쭈욱 펼치다 보면, 황금 들판이다/ 지평선 사람들은 황금을 씨 뿌리고, 황금을 거두는 사람들이다/ 그들 자신들이 바로 황금이다.” 지평선시동인(회장 김유석)이 세 번째 시집 <민달팽이 한 마리가>를 펴냈다. 지평선시동인은 김제 지평선이라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을 창조적 정신문화로 계승·발전하기 위해 모인 단체. 지난 2010년 모임을 꾸린 이래 세 번째 시집을 엮었다. 시집에는 김유석, 김인숙, 나왕수, 문상봉, 박윤근, 배귀선, 안성덕, 이강길, 이승훈, 이영종, 이인순, 임백령, 장경기, 장종권, 전창옥, 지연 시인이 내놓은 시 72편을 수록했다. 농촌 마을의 일상적인 삶과 이를 통해 얻는 성찰, 지혜를 담담하면서도 심오하게 펼쳐놓았다. 김영덕 평론가는 “김제의 가없는 들판을 붉게 물들이며 지평을 장엄하게 넘어가는 석양을 보지 않고 고단한 삶의 진실이나 부평초 같은 인생의 덧없음을 논하지 말 일”이라며 “김제 출신 시인들에게는 가없는 지평선만큼이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남정휘 시인이 첫 시집 <그리운 고향 언저리>를 내놨다. 시집은 5부로 구성돼 있다. 제1부에서 4부까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제목으로 나뉘고 이에 걸맞은 시편들이 균배 돼 있다. 시인은 사계절을 추억하며 각 계절의 말미마다 그때가 ‘그리울 거’라고 반복해 강조한다. 마지막 제5부는 근황이란 제목으로 고향과 그곳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정겨운 시선, 사유가 담긴 시편이 수록돼 있다. “세월은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가고/ 시간은 소금처럼 짭쪼름히 폐부를 후빈다.” ( ‘세월과 시간의 숨바꼭질’ 전문) 시인이 걸어왔던 삶의 여정은 시간마다 힘들었다. 세월은 약이었다. 그것은 다른 인간도 함께 겪는 범상한 ‘시간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호병탁 문학평론가는 “시집 <그리운 고향 언저리>는 표제 그대로 ‘그리운 고향’과 ‘언저리’의 사계절과 그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풍광을 유연하고 넉넉한 관점으로 묘파하고 있다”며 “기품 있는 서정시의 경지에 달해있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남정휘 시인은 문학시대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정도학원장, 남정영어학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등이 있다.
지우개는 정말 지우기만 하는 물건일까. 연필은 정말 쓰기만 하는 물건일까. 사고의 전환을 통해 지우개와 종이가 펼치는 엉뚱한 세상에 빠져 보는 것은 어떨까. 전주 출신의 오세나 그림책 작가가 두 번째 신간 <지우개>(반달)를 냈다. 오 작가는 보름달을 보면서 저 달인 채워진 걸까, 비워진 걸까라는 생각을 종종했다면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사고의 전환,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질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림책 <지우개>에서는 연필과 지우개의 기능이 뒤바뀐다. 연필로 글씨 위를 까맣게 칠해 글씨를 지워버리고, 까만 바탕을 지우개로 지워 그림이나 글씨를 만들어낸다. 사물에는 한 가지 모습만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모습이 있고, 그 모습은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취지가 담겼다. 전북대 미술대학 한국화를 전공한 오 작가는 개인전도 5차례 열며 활발한 작업을 했었다. 하지만 거주지를 이전하고 출산을 하면서 의도치 않은 경력단절여성이 됐다. 그림 못지않게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 오 작가는 자녀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3년간의 준비 끝에 2013년 첫 그림책 <로봇 친구>가 나왔다. 오 작가는 요즘 그림책은 제10의 예술이라고 한다며 단순히 글과 내용을 묘사한 삽화로 구성된 과거의 동화책과 달리 요즘 그림책은 그림과 글이 결합된 새로운 예술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앞으로도 환경, 업사이클링 등 평소 일상에서 잘 생각하지 않지만 논의해봐야 할 주제에 대한 책을 쓰겠다고 덧붙였다.
일제강점기 전라도 토착민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그려낸 최명희의 소설 <혼불>은 역사민속신화제도 등 우리의 전통이 다양하게 담겨 있다. 특히 전라도 사투리와 무수한 표현의 우리말 등 언어적 전략과 전통 복원에 대한 진정성은 그 자체만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그 저항의 감성은 한국문학에서 큰 가치를 형성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읽을 때마다 다른 매력과 가치가 돋보이는 것이 소설 <혼불>이다. 서철원 전주대 객원교수가 소설가 최명희(19471998)의 20주기를 추념하며 <혼불, 저항의 감성과 탈식민성>(태학사)을 출간했다. 혼불학술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가 <혼불>의 문학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해 집필한 학술도서로, 소설에서 전통 복원의 의미가 민중의 역사와 민족 정체성 회복에 어떠한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가를 살폈다. 서 교수는 등장 인물의 생애와 체험적 요소가 작품 성격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며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첫째, 전통의 복원이 내용 전반에 깔려 있다는 것. 소설 속 매안마을 양반층을 중심으로 역사민속언어지리신앙신화 등이 다양하게 얽혀 내용이 이어진다. 거멍굴 하층민의 삶을 통해 민중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도 특징이다. 매안마을 양반층으로부터 부여받은 농토를 터전으로 한 소작농을 위주로 하위의 삶을 보여준다. 가진 자의 억압에 대한 저항도 포함돼 있다. 서 교수는 전통의 복원 의미와 민중의 역사는 거시적으로 민족 정체성 회복과 연관돼 나타난다고 강조했다. 그는 등장인물간 전통 신분 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갈등, 그리고 화해극복 과정과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한국인의 정서 한의 공동체가 담겨 있다. 이를 통해 <혼불>은 민중 중심의 역사의식 또는 식민주의 저항극복비판의 의미가 담겨있는 탈식민, 민족정체성 회복의 문학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 책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혼불>과 영화 아바타의 비교 연구를 담은 <혼불> 고쳐 읽기 부분이다. 서 교수는 <혼불>의 청암부인과 아바타 나비족의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에이와(Eywa)의 공통점으로 여성성모성성을 찾아냈다. 대모신의 지위와 입장을 통해 두 인물의 현실 극복 의지에 초점을 두고 공통점을 분석했다. 그는 그간 <혼불>에 관해 연구했던 논문 자료를 바탕으로 원고보다 향상할 수 있는 지점까지 수정보완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면서 글 안에 흔들리는 춤결이 혼불의 한 가지 빛에 가서 닿으면 다행이겠다고 말했다.
그때 연개소문이 계백에게 말했다. 나는 등에 붙은 거머리를 떼어내야 하고 그대의 백제는 옆구리를 물려는 여우를 쳐야 되지 않겠는가? 예, 전하.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연개소문은 당(唐)을 거머리로 비유했다. 엄청난 비하다. 어깨를 편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이제 백제가 신라 우측의 대야주 42개 성을 공취했으니 신라는 영토의 3할을 잃었다. 여왕의 안위도 위험해질 것이야. 계백의 시선을 받은 연개소문이 빙그레 웃었다. 상대등 비담이 차기를 노리고 있지만 김춘추가 만만한 놈이 아니야. 담로에서 성장한 계백은 신라 내부 사정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계백은 듣기만 했고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비담 일파는 왕위나 노리는 가소로운 놈들이지만 김춘추는 신라를 이끌어갈 놈이야. 더구나 김유신과 피로 엮인 사이다. 두 놈이 신라의 기둥이지. 예, 전하. 그때 무관들이 다가와 연개소문과 계백 앞에 국그릇만한 술잔이 놓인 작은 상을 놓고 갔다. 술잔에는 술이 가득 담겨 있다. 계백공, 들라. 술잔을 든 연개소문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중에 마시고 나하고 그대하고 먼저 한잔씩 하자. 예, 전하. 연개소문이 벌컥이며 술을 마셨고 계백도 술잔을 들었다. 단숨에 잔을 비운 연개소문이 술잔을 내려놓더니 계백을 향해 웃었다. 내가 20여년 전 대륙을 유람했었는데 그때 태원유수 이연과 그의 아들 이세민을 만났었네. 계백이 숨을 들이켰다. 이연은 곧 당의 고조(高祖)이며 이세민은 지금의 당 태종이다.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이연은 고구려 막리지의 아들인 나를 융숭하게 대접했는데 이세민을 시켜 근처 명승지를 안내해 주었네. 계백의 표정을 본 연개소문이 빙그레 웃었다. 이세민이 한 말이 기억나네. 내가 천하의 영웅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라고 하더군. 물론 내가 고구려인이라 듣기 좋게 한 말이겠지만 그때 이연은 수나라 태원유수였고 양제의 1, 2차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끝난 후였거든. 그렇군요. 이연은 이미 반심(反心)을 굳힌 터라 고구려 막리지의 아들인 나를 융숭하게 대접한 거야. 연개소문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그때 이세민이 그랬어. 제가 아버지를 부추겨 난을 일으킬 테니 고구려는 등을 치지 말아달라고 말이네. 이세민이 말씀입니까? 그놈이 그때부터 반란의 주역이었어. 애비 이연은 이세민이 시키는 대로만 했고. 과연. 그러다 이연이 장남 건성을 태자로 세웠으니 이세민이 가만있겠는가? 현무문의 난을 일으켜 건성, 동생 원길의 자식들까지 몰사시켰지. 전하께서는 이세민과 그런 인연이 있으셨군요. 그런 이세민한테 개처럼 굽신거렸던 건무는 왕이 될 놈이 아니었어. 이세민이 내가 건무를 죽이고 사지를 고구려 전역에 보내 전시했다는 것을 들었을 거야. 정신이 번쩍 들었겠지. 나한테 두 손으로 술잔을 건네었던 그때를 떠올렸을 것이라고. 영웅이십니다. 백제와 고구려가 힘을 합치면 이세민이는 쥐구멍에다 대가리를 박을 거야. 그때 계백이 의자왕의 밀서를 꺼내 연개소문에게 내밀었다. 백제 대왕께서 당과의 결전에 백제도 군사를 내놓는다고 하셨습니다.
평양성, 대막리지 겸 대대로, 5부(部) 전대인의 수장(首長) 연개소문의 저택은 왕궁 못지않았다. 계백 일행이 대막리지 궁(宮)에 닿았을 때는 다음날 오후 술시(8시) 무렵, 주위는 어둠에 덮여 있었지만 저택은 휘황한 불빛을 내품고 있다. 활짝 열린 대문 좌우로 군사들이 도열해 섰고 횃불을 밝혀서 대낮같다. 백제 사신을 맞는 것이다. 장군 복장의 사내가 대문 앞에서 말에서 내리는 계백에게 다가왔다. “대막리지 전하의 명을 받고 백제 사신을 맞습니다. 장군 윤현입니다.” “백제 사신 계백입니다.” 인사를 나눈 계백이 부사(副 ) 화청과 유만을 소개했다. 연개소문의 대접은 융숭했다. 대문을 2개나 통과하는 동안 도열한 군사는 수백 명이다. 계백일행은 안쪽 영빈관으로 안내되어 여장을 풀었다. “내일 오전에 전하께서 부르실 것이다.” 윤현이 계백에게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그동안 여독을 푸시기 바랍니다.” 영빈관은 2층 건물로 방이 수십 개에 청이 딸려있고 시중드는 하녀만 수십 명이다. 불은 대낮같이 밝힌 청에서 진수성찬으로 저녁을 먹으면서 화청이 감동한 표정으로 계백에게 말했다. “고구려 대막리지의 위용이 왕보다 윗길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렇군요.” 목소리를 낮춘 화청이 말을 이었다. “백제 입장으로는 건무가 왕이었을 때 보다 지금이 훨씬 유리하지요.” 영양왕 건무는 연개소문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에 온 몸이 토막으로 잘려 전국에 전시되었던 것이다. 당(唐)에 굴종한 모습을 보인 벌이었다. 더구나 왕이 참석한 대연회장에 모인 고구려 고관 2백여 명을 모조리 참살한 것이다. 한 명도 살려주지 않았다. 연개소문의 잔학성은 곧 공포심과 함께 위압감으로 만방(萬邦)에 전파되었다. 당(唐) 조정에서는 고관뿐만이 아니라 황제까지도 연개소문의 이름이 나올 때는 서늘한 기운을 느낀다고 할 정도다. 다음날 오시(12시) 무렵, 계백과 화청, 유만이 관복을 갖춰 입고 연개소문이 좌청하고 있는 내궁의 대정청으로 들어섰다. 사방 2백자(60m)가 넘는 대정청에는 1백여 명의 고구려 고관들이 좌우로 나뉘어서 앉아있었는데 앞쪽에 붉은색 천이 깔린 계단 5개가 놓여졌고 그 뒤에 연개소문이 앉아있다. 왕보다도 더 위압적인 배치다. 안내역을 맡은 관리가 계단 10보쯤 앞에서 멈춰서더니 연개소문을 올려다보았다. 말했다. “대막리지 전하, 백제국 사신이 뵈러 왔습니다.” “그러냐?” 연개소문이 그렇게 말을 받았는데 목소리가 우렁찼다. 그 순간이다. 연개소문이 선뜻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계단을 내려왔다. 계백은 숨을 들이켰다. 연개소문은 소문대로 칼을 5자루나 차고 있다. 양쪽 허리에 2개씩, 그리고 등에도 비스듬히 한 자루를 매었다. 날렵하게 계단을 내려 온 연개소문이 계백의 세 걸음 앞으로 다가와 섰다. 두 눈을 치켜뜬 연개소문의 모습에서 위압감이 풍겨나왔다. 계백도 장신이지만 연개소문은 비슷한 체구다. 그때 연개소문이 말했다. “계백공인가?” “네, 대막리지 전하.” 계백이 두 손을 모으고 연개소문을 향해 절을 했다. “백제 대왕의 사신 계백입니다.” “잘 오셨어.” 머리를 끄덕인 연개소문이 그 자리에 앉으면서 계백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계백공, 거기 앉게. 뒤쪽 일행도 앉아.” “예, 전하.” 파격이다. 계백은 놀라 숨을 들이켰다가 곧 무릎을 꿇고 앉았다. 뒤쪽의 화청과 유만도 앉는다. 관리들이 서둘러 연개소문과 계백 일행에게 방석을 가져와 앉도록 했다. 이윽고 편하게 앉은 연개소문이 웃음 띤 얼굴로 계백을 보았다. “계백공, 그대가 가야군주 김품석의 목을 베었다고 들었다. 맞는가?” “예, 전하.” “장하다. 오랜만에 용사를 보게 되는구나.” 연개소문의 목소리가 대정청을 울렸다. “기습군 1천으로 내성에 진입했다지? 성안에는 2만 가까운 신라군이 있었다면서?” 연개소문의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이때 연개소문은 43세다. 김춘추와 동갑이다.
▲ 신지원 순창초 4학년석회암 동굴 속에는 위에서 아래로 종유석이 쑥쑥~ 석회암 동굴 속에는 아래서 위로 석순이 쭈욱~ 캄캄한 동굴 속에서 종유석과 석순이 손을 잡는다. 모두가 친구다. △길이 보이지 않아도, 캄캄한 어둠이 닥쳐도 손을 잡고 마음을 열면 길이 보인다. 남과 북이 분단됐지만, 마음은 늘 하나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 마음이 전파를 타고 한반도를 하나로 통일시킬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친구이기 때문이다. /박월선(동화작가)
“소인은 아스카의 백제방(百濟方)에서 10년을 살았습니다.” 신주(新州)땅, 산비탈의 그늘에서 잠시 쉴때에 하도리가 계백에게 말했다. 오후 미시(2시) 무렵, 아침 일찍 항안성을 떠나 1백리쯤 북상한 것 같다. 아스카의 백제방 방주(方主)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다. 작년에 방주로 부임한 부여풍은 20세의 혈기왕성한 왕자다. 쪼그리고 앉은 하도리가 말을 이었다. “거기서 백제어를 익혔고 4년전에 극우 관직을 받고 본국 근무를 자원해서 항안성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하도리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하도리 또한 파란만장한 인생 같다. 화청이 한인(漢人)으로 투항한 무장이고 하도리는 왜인으로 귀화한 입장이다. 백제는 대륙에 속령인 ‘담로’를 설치하여 대륙 아랫쪽까지 영토를 넓힌 터라 다민족(多民族) 왕국이다. “네 왜 이름은 무엇이냐?” “예, 핫도리인데 백제어에 맞도록 하도리로 개명했습니다.” “무슨 하씨야?” “예, 물 하(河) 올시다.” “네가 물 하(河)씨 선조가 되겠구나.” “아래 하(下)를 썼다가 바꿨지요.” 옆에서 듣고 있던 하청과 사도부 장덕 유만까지 피식 웃었다. 하도리는 밝은 성품이다. 앉은키는 컸지만 선 키는 5자(150cm) 쯤 되었는데 상체가 크고 팔이 길어서 큰 원숭이 같다. 나이는 28세, 10살때 고아가 되어서 각지를 방황하다가 백제방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도리가 붙임성 있게 말했다. “한솔 나리의 명성을 들었다가 이렇게 모시게 되어서 광영이요.” “나는 전장(戰場)에서나 유용한 무장이야. 내 옆에 있으면 위험하다.” 계백의 눈 앞에 그동안 동고동락(同苦同樂)했다가 대야성 싸움에서 전사한 해준, 효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화청이 하도리에게 말했다. “내가 증인이야.” 화청이 주름진 얼굴을 펴고 웃었다. “전시(戰時)에 무능한 지휘관 휘하에 있는 것 만큼 불운한 무장은 없지, 난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렵다는 솔(率) 품급을 싸움 한번만에 따내었네.” “아, 그것참, 부러운 소리하시오.” 장덕 벼슬의 사도부 부사 유만이 혀를 찼기 때문에 계백도 웃었다. 그때 하도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성주가 평양성까지 모시고 갔다가 오라고 했으니 광영이요.” 하도리는 정탐조 조장으로 기마군 10명을 이끌고 신주(新州)를 제 집 마당처럼 쏘다녔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골짜기에 물고기가 많고 어느 들판에 짐승 잡는 덧이 설치되어 있는 것까지 다 알았다. 하도리는 기마군 둘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사신 일행은 총 25인이다. 하루만에 신주를 빠져나온 일행은 고구려 영토로 들어섰다. 고구려 국경 근처에 세워진 오금성에 전령을 보냈더니 금방 성주가 마중을 나왔다. “사신이 온다는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관복까지 차려입은 성주가 계백을 맞으면서 말했다. 대야성으로 찾아왔던 고구려 사신이 귀국해서 국경에 전령을 보낸 것이다. 저녁 유시(6시) 무렵, 사신 일행은 청에서 고구려 성주의 접대를 받는다. “평양성까지는 4백리 길이나 길이 잘 뚫렸으니 이틀이면 닿을 것입니다.” 옆쪽에 앉은 성주가 말했다. “조금전에 전령을 보냈습니다. 대막리지 전하께서는 내일 중에 사신으로 계백공이 오셨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이오.” 성주는 40대쯤으로 역시 무장(武將)이다.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대야주를 탈취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리오.” 술잔을 든 성주가 말했다. 동맹국의 승전을 축하하는 것이다. 따라서 술잔을 든 계백이 웃음 띤 얼굴로 답례했다. “성주께서도 대공을 세우시기를.”
사신 일행은 22명, 모두 말을 탔기 때문에 빠르다. 하루에 3백리를 목표로 삼고 1천리 거리인 평양성까지 나흘 일정으로 잡았으니 강행군이다. 둘째날에 일행은 백제령 동방(東方)을 지나 북방(北方)으로 들어섰다. 북방만 지나면 신라 신주(新州)를 통과해야 된다.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신라령이 가로막힌 셈이지만 허술하다. 그만큼 신라 전력(戰力)이 약해진 것 때문이기도 하고 면적이 넓어서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계백의 옆에서 속보로 달리던 부사(副使) 화청이 생각 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한솔, 제가 20여년 전 태원유수 이연의 휘하 군관이었다면 믿으시겠소?” “이연?” 놀란 계백이 화청을 보았다. 화청은 49세, 장년이다. 20여년 전이라면 2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화청은 귀화한 한인이다. 그런데 이연이 누구인가? 이연은 당(唐)의 고조(高祖)를 말한다. 지금의 당황제 이세민은 이연의 아들이다. 계백의 시선을 받은 화청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소장은 태원을 탈출해서 동쪽의 백제령으로 피신했다가 내해(內海)를 건너 본국으로 온 것입니다.” “진양(晉陽)에서 이곳까지 먼길을 오셨구려.” “나는 이연의 모반을 수양제에게 밀고하려다가 발각이 되었소. 내 가족은 모두 이연에게 몰살당했소이다.” 계백은 숨을 들이켰다. 수양제(煬帝) 양광(陽廣)이 죽은 것은 20여년 전이다. 화청은 양제의 충신인 셈이다. 수(隨)는 3대 37년만에 태원유수 이연(李淵)에 의해 멸망되었는데 이연의 둘째 아들 세민(世民)의 공이 컸다. 그러나 이연은 태자 건성을 후계자로 삼았다. 건성은 이세민의 형이다. 결국 이세민은 형 건성과 5명의 아들, 동생 원길과 아들 5명까지 모두 죽이고 황제에 올랐으니 지금의 당태종이다.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제 가족까지 몰사시키고 정권을 잡은 것이다. 이것이 현재의 당태종 이세민의 내력이다. 화청이 말을 이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힘을 합쳤다면 수나라 말기의 군웅할거시에 천하를 정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북쪽에서 고구려가, 동쪽의 백제령 담로에서 대륙으로 진군하면 반란군은 양국의 깃발 앞에 모였을 것이고 이연 또한 무릎을 꿇었겠지요.” 가능한 일이다. 수 문제(文帝)때 대륙을 평정한 최전성기 시절에 수(隨)의 인구는 890만호 4,600만이었다. 그러나 수십개 이민족을 합친 호구수인 것이다. 그러나 백제만으로도 69만호 720만 인구이며 고구려는 650만, 신라는 5백만이다. 백제와 고구려만 합쳐도 1400만이다. 단일민족으로 한족 다음의 세력인데다 최강연합군이 될 것이었다. 계백이 말에 박차를 넣으면서 말했다. “나솔, 아직 기회는 있소. 그래서 내가 지금 연개소문 공(公)에게 가는 것이 아니오?” 화청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 배를 붙이듯이 다가와 달린다. 그날 저녁 북방(北方)소속의 항안성에 닿은 사신 일행은 성주의 접대를 받는다. 나솔 관등의 성주 국우재는 30대 중반쯤으로 무장(武將)이다. 국경 지방의 성주 대부분이 무관(武官)인 것이다. 이곳에서 국경까지는 30리 거리여서 매일 정찰대가 오가는 최전선 지역이다. 청에서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국우재가 말했다. “한솔, 내일 떠나실 때 신주(新州) 지리에 익숙한 무관을 안내역으로 붙여 드리지요.” 국우재는 사신 일행이 온다는 전령의 기별을 받고 안내역을 준비시킨 것이다. 계백이 머리를 끄덕이자 국우재가 머리를 돌려 둘러 앉은 무관 하나를 불렀다. “하도리, 인사드려라.” “옛!” 무릎 걸음으로 앞으로 나온 사내는 어깨가 넓고 팔이 길었다. 다부진 턱, 가늘지만 반짝이는 눈, 그때 국우재가 말했다. “귀화한 왜인으로 16품 극우 벼슬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양치질’을 하지요? 이 ‘양치질’의 어원을 아시나요? 언뜻 보아서 한자어인 줄은 짐작하겠으나 간혹 ‘양치질’의 ‘양치’를 기를 양(養), 이 치(齒)로 써놓은 사전도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양치질’의 ‘양치’는 엉뚱하게도 ‘양지질’ 즉 ‘양지’(버드나무 가지)에 접미사인 ‘질’이 붙어서 이루어진 단어라고 한다면 믿겠는가? 그러나 실제로 그렇다. 고려의 계림유사에도 ‘양지’(버들 양, 가지 지)로 나타나고, 그 이후의 한글 문헌에서도 ‘양지질’로 나타나고 있다. ‘양지’ 즉 버드나무 가지로 ‘이’를 청소하는 것이 옛날에 ‘이’를 닦는 방법이었다. 오늘날 ‘이쑤시개’를 쓰듯이, 소독이 된다고 하는 버드나무 가지를 잘게 잘라 사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를 청소하는 것을 ‘양지질’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어원 의식이 점차 희박해져 가면서 이것을 ‘이’의 한자인 ‘치’에 연결시켜서 ‘양치’로 해석해 ‘양치질’로 변한 것이다. 19세기에 와서도 이러한 변화를 겪었다. 이 ‘양지’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음인 ‘요지’로 변했다. ‘이쑤시개’를 일본말로 ‘요지’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 중 일부는 아직도 ‘이쑤시개’를 ‘요지’라고 한다.
배움에는 나이도 없고 끝도 없다. 국중하 완주예총 회장은 이를 몸소 보여준다. 가장 가까운 가족, 기업이나 문학 활동을 통해 인연을 맺은 지인, 교육의 발표자나 토론자는 모두 그의 멘토다. 아홉 번째 수필집 <멘토 찾기 9번 타자>는 이 배움에 대한 열의가 담긴 책이다. 국중하 회장은 기업인이자 문학인으로 밤낮없이 배움을 위해 진력했다. 그가 좋아하는 인물은 미국의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 이외에도 교육계의 선구자인 이상주 전 총장, 조병화·황금찬 시인, 벨기에 출신 지정환 신부 등도 모두 그의 멘토들이다.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가족 여행과 여산재 생활 등 삶의 궤적을 짧게나마 짐작할 만한 글이다. 가족, 문화공간 ‘여산재’는 그의 인생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여산재와 여산장학재단은 이익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그의 마음을 반영해 설립한 공간이어서 더 의미깊다. 2부는 기업이나 문학 활동을 통해 만난 지우들과의 일화를 담고 있다. 3부는 완주예술제, 완주예총 자문위원회 워크숍, 완주소년소녀합창단 정기연주회 등 그의 지역 사랑이 엿보이는 글로 채워져 있다. 4부는 다양한 세미나와 연수 등으로 정보와 지식을 채우는 의미 있는 여정이 기록돼 있다. 국 회장은 “최고경영자의 사고와 철학은 기업의 성패를 가름하는 요체”라며 “최고경영자는 더 많이 배우고 노력해야 하므로 오늘도 멘토를 찾고 배움의 길을 닦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국 회장은 1998년 수필과비평 신인상으로 등단한 뒤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한국문인 수석부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내 가슴 속엔 영호남 고속도로가 달린다> 등 모두 9권의 수필집을 냈다. 여산장학재단 이사장, 우신 회장이다.
‘낙엽도 여기저기 흩어져 놀면 바람몰이에 시달리겠지만 수북이 몸을 포개고 있으면 따뜻한 모닥불로 타오를 땔감 구실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작업도 집합에 뜻을 두었다.’( ‘작가의 말’ 중) 김계식 시인이 최근 펴낸 시집 10권에서 작품을 골라 수록한 시선집 <청경우독>(신아 출판사)을 펴냈다. 2011년에 시집 10권의 작품 중 일부를 엄선해 만든 시선집 <자화상> 출간 이후 두 번째다. 그는 20년 째 매일 시를 쓰는 시인이다. 일기 대신 시를 쓰기 때문이다. 그가 총 20권의 시집을 낼 수 있었던 것도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고 창작에 전념한 덕분이다. 글 쓰는 것을 고행처럼 신성하고 경건하게 여기는 김 시인은 문학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이번 시선집 역시 올해 여든을 맞은 그가 <대나무는 어울려 산다>, <민달팽이의 독백>, <하얀 독백> 등 2011년 이후 펴낸 시집 10권을 돌아보며 문학인생 한켠을 정리하고 시심을 다잡기 위해 만든 것이다. 책은 총 200편의 시와 함께 그가 받았던 문학상과 약력, 문단활동과 문예지 및 회지 등에 발표한 작품 내용 등을 함께 수록했다.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2002), 한국창조문학 대상(2009), 한국예술총연합회장상(2009), 전북펜 작촌문학상(2012), 전북문학상(2014), 교원문학상(2017) 등 시상식 사진과 그의 작품을 시화전으로 엮어낸 전시작품 등이 눈길을 끈다. 김남곤 시인은 해설글 ‘내가 그린 시인 김계식의 초상’을 통해 “<청경우독>을 접하면서 인생 노정에 멈춤이라는 표지판을 용납하지 않는, 문학을 향한 그의 열정에 놀랐다”며 “시선집의 제호처럼 갠 날에는 땀 흘리며 노역을 하고 궂은 날에는 머리띠 매고 글을 읽는 의지가 오늘의 강인하고 집요한 시인 김계식을 존재하게 했다”고 밝혔다. 김 시인은 “아는 친구는 나이를 물으면 20살이라고 한다. 무거워서 60살은 집에 두고 다닌다고 농담하는 것인데 나 역시 나이를 생각하지 않는다”며 “여전히 기억력도 좋고 작품에 대한 열정도 크다. 여든이라는 나이에 얽매이기 보다는 계속 젊고 유연한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평소 게임과 노래방, 당구 치는 걸 좋아하는 평범한 고등학생들이 책을 냈다. 6개월간 발로 뛰며 생생하게 기록한 <고등학생이 발로 쓴 전북문화 탐방기>(북랩)다. 겨울방학도 반납하고 부지런히 전북을 누빈 10대 작가는 전주 신흥고 2학년에 재학 중인 손병관, 유태훈, 이경민, 채승윤 군이다. 이들의 여정은 전북교육청이 주민참여 제안사업으로 장창영 실버라이트 교육문화연구소 대표(전북대 교수)가 한 전북 역사문화 탐방 지도 제작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시작됐다. <전북문화 탐방기>는 이들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전북 문화의 현주소에 대한 감상을 모아낸 것이다. 장창영 대표와 함께 전주, 삼례, 익산, 군산, 김제, 부안, 고창, 남원, 정읍 등 우리 고장 구석구석을 답사하였다. 임실의 김용택 시인, 남원의 복효근 시인, 전주의 최기우 작가 등 현역 작가와의 대담을 통해 작품세계와 작가정신을 엿보는 인생경험도 했다. 가볍고 유쾌한 여행기가 많지만 학생의 눈으로 본 전북 문화관광지의 문제점과 보완점도 담겨 있다. 전주 한옥마을은 길거리 음식과 한복 사진 촬영 외에 전주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콘텐츠와 놀 거리가 부족하다는 것, 삼례문화예술촌은 입장료는 저렴하지만 어떤 체험이 있는지 정보를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점 등이다. 유태훈 군은 많은 곳을 다녔지만 어른들을 위한 문화 행사나 프로그램은 많은 대신에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은 매우 부족했다면서 앞으로 청소년 눈높이에 맞춘 프로그램의 발굴과 보급이 활발해지기를 희망했다. 고등학생이 공부 대신 탐방을 다녀도 되나?시작 전 걱정에 대한 학생들의 활동 후기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좋을 경험이었다. 우리 문학작품의 산실과 문화의 주요 배경지를 다니는 것은 교실이나 책에서는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기회였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손병관 군은 삶을 허무하게 보냈던 내게 너무나도 좋은 경험이었다며 어렵게 느껴지던 문화재 탐방이 주말 마다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것임을 느꼈고, 탐방을 다니고 책을 쓰는 과정을 통해 뭔가에 최선을 다했다는 뿌듯함과 책임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저는 게임, 스포츠 등에 관심이 많던 학생이었습니다. 이번 탐방을 통해 처음 여행이라는 것에 흥미를 가졌고 삶의 가치관이 변했어요. 여행을 느끼기 전에 왜 여행을 가고 싶은지, 또 여행을 해서 무엇을 얻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짚게 됐습니다. 이경민 학생의 소감이다. 채승윤 학생은 우리가 걸어온 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전북의 문화재를 아끼고 큰 관심을 갖자는 중요한 의미를 바탕에 둔 것이었기 때문에 힘들었던 만큼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또 고등학생이 책을 쓴다는 것은 흔한 경험이 아니어서 모든 부분에 열심히 임했고, 이 설렘과 긴장을 앞으로도 인생에서 계속 느끼고 싶다고 덧붙였다.
내실에 둘이 마주보고 앉았을 때 김춘추가 충혈된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장군, 내가 고구려에 가야겠소.” “무슨 말씀이오?” 놀란 김유신이 상반신을 기울였다. 고구려와는 60여년 전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했을 때부터 원수지간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그 후에 신라는 동맹관계인 백제를 배신, 한강 하류지역을 탈취하고 신주(新州)를 세워 다시 백제와도 원수가 되었다. 더구나 빼앗긴 땅을 탈취하려는 백제하고는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聖王)을 전사시킴으로써 불구대천의 사이가 되어있다. 김춘추가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리면서 말했다. “고구려도 백제의 기세에 위협을 느끼고 있을 것이오. 더욱이 연개소문은 북진정책을 주장하는 호전적인 인간 아니오?” 김유신의 시선을 받은 김춘추가 열에 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신라는 영토의 3할을 잃었소. 고구려는 앞쪽의 당(唐)을 치려면 등 뒤에 도사리고 있는 범부터 제압해야 될 것이오.” “대감, 백제와 고구려는 동맹관계올시다.” “서로 필요했기 때문이지. 지금 연개소문은 백제가 부담이 되고 있을 겁니다.” “대감, 그러면 밀사를 골라 보내시지요.” “누가 가겠소?” 김춘추의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떠올랐다. “비담 일파가 골라준 밀사는 그저 다녀오는 시늉만 낼 것이오.” “하지만 위험합니다, 대감.” “장군이 신주 북방까지 올라가 주시면 나한테 도움이 되리다.” “그거야 얼마든지 해 드리지요. 하지만…” “내가 연개소문을 만나겠소.” 어깨를 편 김춘추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유신을 보았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요. 비담 일당은 당황제에게 여왕을 비난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소. 이러다가 왕국이 망하게 되면 왕이 된들 무얼 하겠소?” “그 전에 죽임을 당하겠지요.” “이번 대야주 42개 성이 백제 수중에 들어갔으니 연개소문도 생각을 바꿀 것이오.” “대감, 차라리 소장이 가지요.” “아니오, 신라에는 장군이 필요하오.” 쓴웃음을 지은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나같은 왕족은 수십명이나 있지만 대장군은 그대 하나뿐이오.” “황공하오.” “장군이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 연개소문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 할 것이오.” 그때 김유신이 긴 숨을 뱉었다. “대감의 용기는 무장(武將) 100여명보다 낫습니다.” “딸과 사위를 한꺼번에 잃은 분노가 그렇게 만들었소.” 김춘추가 뱉듯이 말하더니 외면했다. “왕국을 잃으면 성골, 진골이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김유신은 이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계백이 의자왕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백제 사신으로 고구려로 떠나는 인사다. 의자왕은 계백과 부사(副 ) 유만, 화청을 밀실로 불렀는데 배석자는 성충과 윤충, 내신좌평 목부까지 셋뿐이다. 밀담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번 대야주 공취로 연개소문이 우리에게 위협을 느낄지도 모른다,” 의자왕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의 동맹이 내일 원수로 변하는 것이 어디 한두번이냐? 그러니 너는 이것을 연개소문에게 주어라.” 의자왕이 두루마리 밀서를 계백에게 내밀었다. 붉은 천에 금박 글씨로 쓴 왕의 친서다. “신라 신주(新州)를 공취하면 당항성만 백제가 차지하고 나머지 옛 고구려 영토는 고구려에 반환시키겠다는 밀서다.” 계백이 밀서를 두 손으로 받자 의자왕이 말을 이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면 당(唐)의 이가놈이 견딜 것 같으냐? 백제와 함께 북진하자고 해라.”
어떻게 죽었느냐? 김춘추가 묻자 무관이 엎드렸다. 백제 장수 계백이 베었다고 합니다. 무관은 15품 대오 벼슬의 하급 무장으로 가야성 내궁 경비를 맡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성벽을 넘어 탈출했다는 것이다. 성이 함락되거나 아군이 참패했을 때, 특히 궤멸 상태가 되었을 때 현장 보고를 받기는 어렵다. 그것은 보고를 다 듣고 나서 너는 왜 도망쳤느냐는 심문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춘추는 대야성이 함락된 지 엿새 후에야 지금 보고를 받고 있다. 동경성(東京城) 안 김춘추의 저택은 웅장하다. 청 아래쪽의 마당은 넓어서 마술 시합을 할 수도 있다. 청의 기둥 옆에 선 김춘추가 무관을 내려다보았다. 주위에 둘러선 가솔, 이찬 김춘추를 만나러 온 문무관원들까지 수십 명이 숨을 죽이고 있다. 그 때 김춘추의 목소리가 마당으로 울렸다. 계백이라고? 예,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 무관이 땀과 먼지로 얼룩진 얼굴을 들고 김춘추를 보았다. 백제 나솔 계백이 대야군주 김품석을 베었다라고 외침이 일어났습니다. . 저는 분이 나서 내성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지만 백제군 수천 명이 진입한 상황이었습니다. . 그래도 칼을 들고 싸웠다가 곧 성주의 목이 창끝에 꿰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 그래서 죽기보다 보고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그, 내궁 마님은 어떻게 되었느냐? 김춘추의 목소리가 바짝 마른 느낌이 들었다. 다시 마당과 청에는 무거운 정적이 덮여졌다. 그 때 무관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춘추를 올려다보았다. 뒤늦게 도망쳐 나온 군사들한테서 들었습니다만 내궁 마님은 칼로 가슴을 찔러 자결하셨다고 합니다. . 내궁을 점령한 계백이 마님의 목까지 베고 내궁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으음. 김춘추가 갑자기 기둥에 어깨를 붙이면서 신음을 했다. 놀란 집사가 그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가 멈췄다. 이놈들. 김춘추가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앞쪽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이 한(恨)을 꼭 풀 것이다. 그러더니 기둥에 등을 붙이고 서서 손을 저었다. 모두 물러가라. 그 때 마당 뒤쪽 문 앞에서 말굽소리가 들리더니 곧 서너 명의 무장이 들어섰다. 햇볕을 받은 갑옷이 번쩍였다. 앞장 선 무장은 김유신이다. 김유신의 어깨와 머리에도 먼지가 내려 앉아있다. 달려온 증거다. 대감, 들으셨습니까? 청에 선 김춘추를 보자 김유신이 소리쳐 묻는다. 마당에 서 있던 가솔, 관리들이 황급히 좌우로 갈라서서 길을 터준다. 김춘추가 눈의 초점을 잡고 김유신을 보더니 주르르 눈물을 쏟았다. 그렇소, 방금 듣고 있었소. 모두 내 불찰입니다. 청 앞에 선 김유신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춘추를 보았다. 의자의 간계에 속았기 때문이오! 김유신의 목소리가 마당과 청을 울렸다. 이때 김유신은 49세, 김춘추는 43세이니 장년이다. 김춘추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더니 기둥에서 등을 떼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김춘추가 휘청거리다가 김유신에게 말했다. 대감, 들어오시오. 상의 드릴일이 있소.
대야성에서 계백이 보낸 14품 좌군(佐軍) 벼슬의 아한이 칠봉성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신시 (4시) 무렵이다. 아한은 기마군 셋을 이끌고 왔는데 모두 땀과 먼지를 뒤집어써서 거지꼴이었다. 아한이 곧장 계백의 사택 마당으로 들어서자 덕조가 두 손을 내밀고 달려 나왔다. 그 뒤를 고화와 우덕, 그리고 종들이 따라 나와서 마당은 금방 사람으로 찼다. 아한은 계백의 위사대 조장(組長)이라 덕조와 아는 사이다. “좌군, 무슨 일이오?” 덕조가 긴장된 얼굴로 묻는다. 백제군이 대야성을 함락시켰고 대야주 42개 성을 공취해간다는 소문은 들었다. 승전보가 오가는 전령의 몇 마디 말로 전해지는 상황이다. 이곳 칠봉성은 전장(戰場)에서 멀 뿐만 아니라 사비도성과 대야성 사이에 위치해 있지도 않다. 그래서 소식이 늦는 편이다. 그때 아한이 소리쳐 말했다.“성주께서 대야성을 함락시킨 1등 공을 세우셨소. 그래서 대왕께서 한솔로 관등을 올려주셨소!” “만세!” 그 순간 두 손을 번쩍 쳐든 덕조가 소리쳤다. “천세! 내가 그렇게 되실 줄 알았어!” 와락 다가선 덕조가 어깨를 부풀리면서 물었다. “다들 무사하시오? 저기, 우리 아씨의…” 그때 호흡을 고른 아한의 시선이 고화에게로 옮겨졌다. “대아찬 나리는 전사하셨소.” 덕조는 입만 딱 벌렸고 고화는 아한에게 시선을 준 채로 굳어졌다.” “아이구머니!” 비명을 지르면서 주저앉은 것은 우덕이다. 땅바닥에 두 다리를 뻗은 채 주저앉아버린 우덕이 울부짖었다. “우리 아씨는 어쩌라고 가셨단 말인가!” 마당이 숙연해졌고 우덕의 외침이 이어졌다. “아씨를 살리시려고 나리께서 가셨구나!” “……” “아이고, 불쌍한 우리 나리!” 덕조도 숨을 멈춘 채 굳어졌고 아한은 물론이고 군사들도 석상처럼 말이 없다. 우덕의 외침이 마당을 다시 울린다. “아이고, 나리! 아씨께 말 한마디 못해주시고 저 먼 곳에서 가셨구나!” 그때 정신을 차린 아한이 품에서 기름종이에 싼 편지를 꺼내 고화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아씨, 한솔께서 아씨께 드리는 편지올시다.” 방으로 돌아온 고화가 편지를 꺼내 펼쳤다. 밖에서는 우덕의 울음소리만 울릴 뿐 조용하다. 주인 계백이 대공(大功)을 세워 한솔로 승급이 되었지만 부인의 부친이 전사를 한 상황이다. 고화가 편지를 읽는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내가 안고 있었소.” 편지를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버님이 날 올려다보시면서 힘껏 싸우다가 죽는다고 하시며 웃었소.” 고화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내가 대아찬이라고 불렀더니 다르게 불러달라고 하셔서 장인어른이라고 불렀소.” 고화의 눈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러더니 나솔, 내 딸을 부탁하네, 하셔서 염려하지 마시고 떠나시라고 했소.” 고화가 짧게 흐느껴 울었다. “그랬더니 사위, 자네를 믿는다고 하시길래 내가 아버님이라고 부르면서 끌어안았소.” “아버지.” 고화가 편지를 쥐고 흐느꼈다. “아버님께 극락으로 가시라고 했더니 내가 안심하고 가겠다고 하십디다. 그래서 내가 고화를 아끼고 살겠다고 했고 그 말을 들으신 아버님이 고맙다고 하시며 웃으셨소.” 고화가 머리를 들었다. 편지는 그것으로 끝났다.
“예, 대왕.” 사신 소준관이 어깨를 펴고 의자왕을 보았다. 청에 모인 백제 무장, 관리들의 시선이 모여졌다. 이곳은 전장(戰場)이나 같다. 신라 서부의 요지(要地)로 영토의 3할을 차지하고 있던 대야주를 백제가 정벌한 상황이다. 의자왕이 사신을 이곳으로 오도록 허용한 이유도 대백제(大百濟)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목적도 있다. 소준관이 입을 열었다. “대막리지께서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고 신라와 당을 멸망시킬 계책을 논의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오, 과연.” 의자왕이 상반신을 기울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백제와 고구려는 동맹관계인 것이다. 의자왕이 생기 띈 얼굴로 소준관을 보았다. “과인도 적극 협력할 작정이야. 이제 그대도 보았다시피 신라 서방(西方)의 대야주가 백제령이 되었다. 42개 성을 공취했으니 신라는 왼쪽 팔을 잃어버린 병신 꼴이다.” “오, 적임자가 있지.” 의자왕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담로 연남군에서 당군(唐軍)과 여러 번 접전을 했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이번에 대공을 세운 무장이 있어.” 의자왕의 시선이 단하의 계백에게로 옮겨졌다. “한솔 계백이야.” 계백이 머리만 숙였을 때 의자왕이 말했다. “한솔, 네가 막리지와 함께 고구려에 가라.” “예, 대왕.” 의자왕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대막리지의 제의에 적극 찬성이야. 과인도 진즉부터 그것을 논의하고 싶었지만 선왕(先王)이 소극적이었는데 잘 되었다.” “과연 명군(名君)이시오.” 50대의 소준관은 달변이었다. 바로 의자왕의 말 뒤를 잇는다. “따라서 대막리지께서는 계책을 논의할 백제 무장을 고구려로 보내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네가 대백제의 사신이다.” “예, 대왕.” “부사(副 )로 사도부 장덕 유만을 데려가도록 하고 무장(武將)은 누가 좋겠느냐?” “예, 나솔. 화청을 부장(副將)으로 삼고 싶습니다.” 한인(漢人) 출신의 투항무장 화청은 이번에 장덕에서 승진하여 6품급 나솔이 되었다. 의자왕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다. 사흘 후에 막리지와 함께 떠나도록 하라. 나도 그동안에 대막리지께 보낼 밀서를 준비하겠다.” 그날 저녁, 계백은 의자왕의 침전으로 불려 갔다. 죽은 김품석이 사용하던 침전에는 의자왕과 병관좌평 성충, 성충의 동생이며 남방방령인 윤충, 내신좌평 목부까지 넷이 모여 있었다. 계백이 말석에 꿇어앉았을 때 의자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를 고구려로 보내는 이유를 말해주마.” 계백이 숨을 죽였고 의자왕이 말을 이었다. “연개소문은 기(氣)가 센 무장이다. 당(唐)과의 결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데다 용병술과 지도력도 뛰어난 인물이다.” 의자왕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왕과 대신들까지 수백명을 한명도 살리지 않고 주살한 자야. 왕의 시체를 토막 내어서 전국에 떼어 보냈다던가? “…….” “네가 가서 대백제의 기(氣)를 보여라. 네 무용이 고구려에도 알려졌을테니 당당하게 연개소문에게 맞서서 전략을 논해라.” “예, 대왕.” “당(唐)과의 결전에 대백제도 군사를 내놓는다고 해라. 담로가 이미 널려있으니 고구려보다 대백제가 당의 영토에 우선권이 있지.” “예, 대왕.” 계백은 의자왕의 뜻을 알았다. 백제, 고구려 연합군은 당을 두조각으로 낸다. 신라는 염두에도 없다.
대야성에서 투항한 가야 출신 항장을 앞세워 백제군은 대야주의 성을 공략했다. 주성(州城)이 함락되고 군주 김품석이 살해된 상황인 것이다. 투항한 신라군만 1만여명이 되었으니 대야주의 41개 성은 대부분이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대야성이 함락된지 엿새만에 대야주 42개 성이 백제군(軍)의 수중에 들어온 것이다. 대야주에는 가야인 1백여만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거의 백제군에 저항하지 않았다. 대승이다. 대야성의 청에 앉은 의자왕이 도열한 신하들에게 말했다.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있다. 부왕(父王)이 이루시지 못했던 대업(大業)을 이루었다. 기쁘다. 오전 사시(10시) 무렵이다. 청에는 항장(降將)들도 둘러서 있었는데 삼현성에서 진궁과 함께 벼슬을 살았던 신라 급벌찬 전택과 대야성 수문장 여준의 모습도 보였다. 이제 전택은 백제의 7품 장덕이 되었고 여준은 9품 고덕이다. 신라에서보다 두계단이나 승진을 한 것이다. 백제 장수들도 논공행상에 의해 승진을 했는데 계백은 6품 나솔에서 5품 한솔이 되었고 선봉장 협반은 한솔에서 4품 덕솔에 올랐다. 그러나 계백의 수하 무장 해준은 전사했고 고덕 효성도 죽었다. 의자는 죽은 무장들도 일일히 승급시켜 그 녹봉을 가족에게 넘기도록 했다. 사후 처리를 잘해야 장병이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는 것이다. 여러번 전장을 겪은 의자는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의자가 남방방령 윤충에게 말했다. 고구려 사신이 왔다니 이제 들라고 하게. 예. 대왕. 기다리고 있었던 윤충이 소리쳐 지시하자 곧 의례를 담당하는 사도부(司徒部) 부장(副長)이 청 밖에서 한무리의 관리들을 안내해 왔다. 고구려 사신들이다. 사신들은 사비도성을 거쳐 이곳 대야성까지 내려왔는데 모두 말을 달렸기 때문에 평양성에서 엿새가 걸렸다고 했다. 백제 대왕을 뵙습니다. 고구려 관복을 입었으나 급히 바꿔입은 흔적이 났다. 얼굴은 먼지가 끼어서 씻을 겨를도 없었던것처럼 보이는 사신이 소리쳐 말하고는 청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구려 막리지, 태대형인 소준관이 인사드리오. 오, 막리지이신가? 의자왕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사신을 보았다. 막리지면 고구려의 5부(部) 대인(大人)격이며 태대형은 2품급으로 백제의 달솔급, 즉 장관급이다. 고위직 사신이다. 의자왕이 물었다. 그래, 고구려 대왕께서 보내셨는가? 아니올시다. 대왕. 어깨를 편 소준관이 의자왕을 보았다. 고구려의 대막리지이시며 대대로이시며 5부(部) 전(全)대인을 겸하고 계시는 연개소문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아아. 신음 같은 탄성을 뱉은 의자왕이 머리를 끄덕였다. 대막리지께서는 건녕하신가? 예, 대왕께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이 더욱 강고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소준관이 들고 있던 밀서를 두손으로 바치자 옆에 서 있던 사도부 부장이 받아 의자왕 아래쪽에 선 윤충에게 건네주었다. 의자왕이 소준관을 보았다. 당(唐)이 지금도 북변을 건드리는가? 전무가 처형된 후로 놀랐는지 잠잠합니다. 이때는 의자왕이 입을 다물었고 청안의 대신들이 술렁거렸다. 영류왕 건무를 처단하고 대신들을 모조리 살육한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동생 대양왕(大陽王)의 아들 보장(寶臧)을 왕으로 세웠지만 허수아비다. 소준관이 영류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현재의 왕을 언급하지도 않는 것이 그 증거다. 그때 소준관이 정색하고 의자왕을 보았다. 대왕, 대야주 정복을 경축드립니다. 고맙네. 사비도성에서 기다릴 것이지 이곳까지 급하게 내려온 이유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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