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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한 보훈처 전주지청장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전주천변 산보객들의 양태는 다양하다. 자전거를 탄 사람, 힘차게 팔을 휘두른 사람, 부부간 손을 꼭 잡고 걷는 사람,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걷는 사람 등등. 이들 누구에게나 천변의 풍광은 보행로를 따라 흐르른 물이다. 김명한 국가보훈처 전주지청장은 전주천에 흐르는 물을 아름다운 교향곡으로 주목했다. 한벽루쪽으로 막 지나면 징검다리에서 돌을 피해가는 잔잔한 물결의 음악이 흐르고, 완산교 앞에서는 물결이 두 갈래로 나뉘면서 돌멩이 사이로 출렁일 듯 말듯 한 음악이 연주된다. 매곡교를 지나 새벽시장에서 채소 파는 아낙네들의 목소리와 자갈 사이를 통과한 물결들이 급하고 높은 소리로 클라이맥스를 예고한다. 싸전다리 밑에서는 그 규모와 웅장함이 절정을 이룬다. 그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교향곡은 덤으로 듣는다고 했다.김 처장이 이렇게 일상의 소소함 속에서 특별한 상식으로귀띔 100선을 모았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신아출판사).여기에는 숙면하는 방법운동은 언제 해야 하는가의사들의 건강 4대 비법 등 건강강식, 고위자가 축하받는 이유연설기법동반자 관리와 인맥 형성부탁의 요령즉흥 연설 이렇게 한다등 직장상식, 남자 여자 절하는 방법자녀에게 권하고 싶은 최상의 직업전원주택 이런 곳에 지어라등 가정상식 등을 저자 나름의 경험이 담긴 비법들이 소개됐다.상식과 함께 저자가 언론에 기고한 칼럼 50편을 함께 엮었다.전북대 초빙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미디어와 쾌락>(강준만 교수 공저)와 <당신이 잠든 곳에 우리마음 함께 있네> 등을 냈다.

  • 문학·출판
  • 김원용
  • 2014.01.03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청바지 백서 - 고동현

Y가 실종된 것은 12월 말, 해가 바뀌기 사흘 전이었다. 작업실에 있어야 할 그가 오후 네 시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의 한 쪽 귀퉁이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은 투명 유리로 둘러쳐져 있었는데, 그가 사라진 것을 의식한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관리하는 전산부장은 하루 종일 이어진 마라톤 회의에 진이 빠진 나머지 그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타 부서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Y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가 수리해야 할 컴퓨터는 밀려 있었다. 전산 부장은 Y를 파견한 외주 업체에 따졌다.Y가 소속된 외주 업체는 부랴부랴 대체 직원을 보냈다. 작업실에는 컴퓨터 두 대가 분해 된 채 바닥에 널려 있었고, 프로그램을 설치하다 만 노트북이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전산부장은 몹시 화를 냈다. 임시로 갈음된 직원은 밤늦도록 일해야 했다. 외주 업체는 Y와 연락할 길이 없었다. Y의 인사기록부에는 가족 사항이 공란이었고 관계자의 연락처는 단 하나만 적혀 있었다. 그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지만 없는 전화 번호라는 메시지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평소 그와 가깝게 지내는 직원들도 없었기에 그의 행방을 찾기란 묘연했다. 그 업체에서는 이틀을 넘기지 않고 Y와 연락하기를 포기했다. 언제나 임시직으로만 인원을 뽑아 왔기에 인사 처리는 간단했다. 새 직원을 뽑는 것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Y의 부재가 가져다 준 혼란은 잠시였다. 그 뒤로 Y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었다. Y 대신 작업실을 차지하게 된 새 직원은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몰랐다. 실내는 몹시 어질러져 있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온갖 전선과 키보드, 마우스 따위를 상자에 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공구를 모아 서랍에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서랍 속에는 노란색 표지의 노트가 한 권 있었다. 작업일지나 매뉴얼일거라 생각하며 무심코 펴보았는데, 의외로 그것은 Y의 개인 노트였다. 그는 노트를 덮고 표지를 보았다. 작은 글씨로청바지 백서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용을 훑어보았다. 수많은 도표와 차트, 그리고 상표별 청바지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간간이 청바지 사진을 프린트해서 붙여 놓은 데도 있었다. 무슨 마케팅 보고서를 연상시키는 노트였다. 그것은 불과 서너 장을 남기고 끝맺어져 있었는데, 마지막 페이지에는 멋을 내듯 쓴 붉은 문구가 한 가운데 적혀 있었다.「무한한 선택의 자유는 최고의 구속이다.」Y의 불행은 넉 달 전에 선물로 받은 셔츠 한 벌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전산부 직원들이 마련한 Y의 생일 선물이었다. 그 회사 직원들은 생일을 맞으면 케이크와 상품권을 받았다. 그 회사 소속이 아닌 Y에게는 그런 혜택이 돌아오지 않았다. 선물은 그의 처지를 감안한 배려였다.Y는 당황하며 선물을 받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선물 상자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상자 뚜껑에는 금빛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선물을 받아 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친척도 없이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아 왔던 그는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을 처지가 못 되었다. 생일 선물이래야 어머니가 요리해준 도미찜이 전부였다. 어머니가 죽은 뒤 혼자 살게 되면서부터는 아예 생일이라는 날을 달력에서 지워버렸다. 그를 축하해 줄 친구도 없었다. 온갖 간섭을 늘어놓는 사람들과 엮이기 싫었던 그는 혼자 지내는 게 편했다.그는 상자를 열고 안에 담긴 셔츠를 펼쳤다. 회사에서 언뜻 보았을 때와 달리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다. 원단은 푸른빛이 어린 쥐색 니트였다. 두 팔에는 흰색으로 줄무늬가 새겨져 있고, 가슴은 명치까지 지퍼가 내려오는 스포티한 디자인이었다.청바지에 잘 어울릴 거예요. 이번 야유회 때 입고 오실 거죠?선물을 건네던 여직원이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마음이 불편했다. 선물이란 언제나 그것에 상응한 무언가를 요구하는 법이었다. 여직원의 말은 야유회에 너저분한 모습으로 오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았다.청바지라.그는 비키니 옷장의 지퍼를 열고 속을 들여다봤다. 한 가운데에는 검은 양복 두 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두 벌 다 낡은 정장이었다. 바지의 엉덩이 부분은 닳을 대로 닳아서 반질거렸다. 허름한 베이지색 남방이 두어 벌 옷걸이에 걸려 있었고, 그 안으로는 비슷한 색상의 면바지가 있었다. 그는 겨울옷을 넣어둔 비닐 봉투를 풀어 속을 뒤졌다. 두툼한 겨울옷가지를 모두 끄집어내자 그가 찾던 청바지가 보였다. 그것은 무릎 부근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고 표백제로 빤 것처럼 색이 바랬다. 그는 청바지를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 그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원치 않은 선물 때문에 청바지를 사야 한다는 사실이 성가셨다. 그는 생각을 접기로 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궁상떤다는 말을 들어 온 터라, 그런 이미지를 벗어버릴 기회라고 여겼다.그주 일요일, 그는 청바지를 사러 갔다. 그가 들른 곳은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상설 할인 매장이었다. 그는 옷을 거의 사지 않는 편이었고 한 번 산 옷은 너덜거릴 때까지 입었다. 매장에 들어선 그는 한 번도 청바지를 사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바지는 학창시절에나 입어보았을 뿐이었다. 더구나 그때는 어머니가 옷을 사다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른여덟이 될 동안 그에게 필요한 옷이라고는 많지 않았다. 양복과 와이셔츠가 각각 두 벌씩, 면바지와 남방 한두 벌 정도로 충분했다.그는 청바지 코너로 가서 상품을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사이즈가 작고 굴곡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전부 여성 청바지였다. 그는 점원에게 남성 청바지는 없는지 물었다. 점원은 고개를 저었다.그는 밖으로 나오면서 조금 짜증이 났다. 필요한 옷은 언제나 그 매장에서 구할 수 있었다. 옷을 사러 다른 곳까지 가자니 귀찮았다. 그는 버스 정류장을 향했다. 네 정거장 거리에 있는 할인 마트에 가기로 했다.마트에 도착한 그는 사 층에 있는 의류매장에 발을 들여 놓았다. 벽을 따라 이어진 가게는 대부분 여성복을 파는 곳이었다. 매장 가운데에는 낮은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가게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그는 그곳에 다가가 둘러보았다. 모두 캐주얼 의류를 파는 곳이었다. 언뜻 훑어보기에는 가게마다 옷이 그게 그거인 것 같았다.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한 가게에서 나온 여점원이 다가왔다.- 어떤 옷을 찾으세요?Y는 단발에 눈 화장이 짙은 여점원의 눈을 들여다봤다. 여점원은 바로 코앞에 서 있었다. 그는 청바지를 찾는다고 대답했다.- 둘러보시겠어요? 어떤 스타일을 원하시죠?여점원이 묻자, Y는 순간 당황했다. 스타일이라니?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둔 적은 없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냥 평범한 것을 찾는다고 했다. 여점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미소를 떠올리며 진열대에서 청바지 한 벌을 꺼냈다.- 어때요?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부츠컷이에요. 다리가 길어 보이거든요.Y는 여직원이 가져 온 청바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무릎 부분이 약간 좁고 그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어지는 나팔바지 같은 형태였다. 그는 집에 있는 청바지를 떠올려 보았다. 그것은 선이 밋밋하고 특색이라고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보다 평범한 것은 없냐고 물었다. 여직원은 다른 청바지를 꺼냈다. 이번 것은 선이 곧게 빠졌으나 군데군데 물을 뺀 것 같은, 어떻게 보면 얼룩이 진 것처럼 보이는 색상을 띠고 있었다. 여직원은 한 번 입어보라며 청바지를 넘겨주었다. Y는 탈의실에 들어가 자신의 허름한 면바지를 벗고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헐렁한 느낌이었다. 밖으로 나와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허리 사이즈는 맞았지만 통이 너무 넓었다.- 기장은 줄이지 말고 그냥 힙합 스타일로 입으셔도 돼요.힙합이라는 말을 듣자, Y는 얼굴을 찌푸렸다. 왠지 학생들, 그것도 자유분방한 학생들과 어울리는 말일 것 같았다. 그는 청바지 진열대로 가서 직접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가 예전에 입었던 청바지와 같은 디자인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하나같이 선물 받은 셔츠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가게에서 나왔다. 복도의 자판기에서 청량음료를 뽑아 들고 벤치에 앉았다. 캔을 따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곳에 있는 모든 가게에 들러보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려면 자신이 좋아 하는 TV 프로그램을 포기해야 했다. 그것은 신작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고작 청바지 한 벌을 사느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음료수를 비우고 일어나 매장을 둘러보았다. 캐주얼 의류를 파는 가게는 모두 일곱 개였다. 그는 일찍 집에 돌아갈 생각으로 서둘렀다. 하지만 가게에 들를 때마다 첫 번째 가게에서 겪었던 경험을 되풀이해야 했다. 두 군데는 청바지를 팔지도 않았다. 그의 겨드랑이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마지막 가게에 들어 설 때는 신에게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행히 그럭저럭 무난한 청바지가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그 청바지를 입어 보았다. 느낌이 이상했다. 탈의실에서 나와 거울에 서기까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음에 드세요?점원은 Y 옆에 서서 이를 드러내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Y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왜 이상한 느낌이 드는지 원인을 알아내었다. 바지의 허리가 배꼽보다 한참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바지를 걸치다 만 기분이었다.- 이 허리부분이.Y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말끝을 흐렸다. 점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골반 바지에요. 요즘은 거의 이런 디자인으로 나와요.Y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정장이건 캐주얼이건 배꼽 부분에 허리가 있는 바지만 입어 왔기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마지막 가게에서도 청바지를 고르지 못했다.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뒤돌아서는 그에게 점원이 말했다.- 배바지를 찾으시나보죠? 길 건너편으로 조금 올라가면 청바지 전문 매장이 있거든요. 거기에 한 번 가보세요.Y는 기분이 복잡했다. 전문 매장이라면 확실히 다양한 종류의 청바지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청바지 하나를 사기 위해 또 다른 매장에 들러야 하다니 무척 짜증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의식처럼 행해온 영화 관람은 포기해야 했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그는 낮잠을 자다가 영화관을 향했다. 영화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영화관에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스크린을 향해 바라보지만 아무도 서로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는 그 어둠 속에서 묵은 피로를 씻어 낼 수 있었다.그는 복도에서 왔다 갔다 하며 골똘히 생각했다. 그의 시선을 끄는 것은 창가에 쏟아지고 있는 햇볕이었다. 그것은 흐릿하고 지저분한 느낌을 주었다. 탁한 햇볕.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먼지투성이 같은 공간 속에서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 용해되고 있었다.중학교 졸업식이 있던 날이었다. 같이 참석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그에게 돈을 내밀었다. 무엇을 해도 좋으니 의미 있게 쓰라고 했다. 적지 않은 액수였다. 그는 그런 큰돈을 처음 만져보았다. 졸업식을 마친 뒤, 그는 번화가로 갔다. 몇몇 친구들이 신고 있는 운동화를 생각했다. Y가 가진 돈이면 그런 운동화를 사기에 충분했다. 신발 가게에는 생각보다 많은 운동화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는 차례로 신어 보다가 가게를 빠져 나왔다. 자신이 입고 있는 남루한 옷과 어울린 만한 운동화는 없었다. 그는 장난감 가게에서 멋진 모형들을 보면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막상 사려고 하면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옷가게에도 들러보았고 가방을 파는 곳도 거쳤다. 그럴 때마다 시계, 음반, 장식물, 축구공이나 어머니를 위한 선물 같은 대안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번화가를 다 둘러보았지만 한 푼도 쓰지 못했다. 어머니가 차라리 무엇을 사라고 꼬집어 주지 않은 게 원망스러웠다. 그 날, 늦겨울의 햇살은 무척 탁해 보였다.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졸업식에 오지 않은 한 친구를 만났다. 수업을 빈번하게 빼먹던 친구였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Y는 별 생각 없이 친구를 따라 갔다. 친구가 이끈 곳은 전자오락실이었다. Y는 친구와 함께 신나게 버튼을 눌러대었다.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그곳에서 나왔고, 남은 돈은 친구가 빌려갔다. 그제야 그는 전기가 만들어 낸 영상의 흐름 속에 자신의 돈을 탕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밤중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그는 절도범으로 잡혀 있는 친구를 경찰서에서 보아야 했다. 친구는 Y가 빌려준 돈으로 절단기 따위를 구입해 그 오락실을 털은 모양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Y는 물건을 고르는 일이 피곤했고 가능하면 돈을 쓰지 않았다.- 어머, 미안해요.Y의 엉덩이에 묵직한 느낌이 와 닿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중년 여자가 쇼핑 카트를 밀며 지나가고 있었다. 카트는 넘칠 듯이 가득 차 있었다. Y의 기준으로는 한 달 내내 먹어도 남을 만큼의 식료품이었다. 그는 그 여자가 저 많은 상품을 사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들였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러고는 창가에 바싹 붙어 길 건너편을 응시했다.청바지를 지금 사지 않으면 언제 사야 한담? 평일에는 안 돼. 평일에 무리해서 돌아다니면 다음 날 힘들어질 거야. 무엇보다 여기까지 나오는 게 부담이잖아. 여기 나온 김에 끝장을 봐야 해. 그러지 않으면 오늘 써버린 세 시간이 아깝잖아? 영화는 어쩐담? 그래. 포기하자. 세탁소에 마름질을 맡기려면 오늘 사는 게 좋아. 야유회는 다음 주잖아.그는 발걸음을 재촉해 건너편 매장을 향했다. 내리쬐는 초가을의 햇볕은 묵직했다. 매장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입구 위에 진 마니아라는 글자가 네온사인으로 밝혀져 있었다. 제법 큰 이 층 건물이었다. 유리벽 안으로 온갖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마네킹이 보였다. 그는 이 피곤한 싸움이 곧 끝날 거라고 기대하며 문을 열었다. 다가오는 남자 점원에게 청바지를 골라 줄 수 있겠냐고 말했다. 점원은 마치 녹음테이프를 틀어 놓은 듯이 물었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세요? 부츠컷? 일자? 스키니? 힙합? 아니면.Y는 점원의 말을 자르며 일자바지를 원한다고 말했다.- 색상은요? 인디고? 연청? 블랙? 그레이? 와싱된 것으로 원하시나요? 아니면 그냥 단색으로?Y는 잠시 망설였다. 청바지는 말 그대로 청색 바지 아닌가. 청바지의 색상을 고른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예기치 못한 생각들이 가지를 쳤다. 그가 찾고 있는 청바지라고 해봐야 이십 년 전의 스타일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식 셔츠에 복고풍 청바지를 받쳐 입는 꼴은 아닐까? 스포티한 셔츠가 평범한 청바지와 잘 어울릴까?그는 점원에게 쭉 둘러보고 싶다고 했다. 이제 자신이 어떤 청바지를 원하고 있는지도 헷갈렸다. 점원은 이 층으로 안내하며 물었다.- 원하시는 브랜드는 있나요?브랜드. Y는 그 말을 듣고서야 아차 싶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청바지의 브랜드를 알고 있다면 지금처럼 고생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젓자 점원은 천천히 둘러보라며 물러갔다.이 층에 오르자 청바지가 벽을 두르며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Y는 숨이 막혔다. 이 많은 청바지를 모두 둘러봐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진저리가 났다. 그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진열대에 다가갔다. 두세 벌의 청바지를 살펴보던 그는 한숨을 쉬었다. 청바지 한 벌의 가격이 그렇게 높을 줄은 몰랐다. 어떤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싸구려 정장보다 비쌌다. 청바지를 입을 일이 거의 없는 그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새로 등장한 이 가격 문제까지 따지려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다행히 브랜드별로 가격 차이가 컸다. 그는 가격이 낮은 브랜드일수록 꼼꼼히 살폈다.매장 한 쪽 벽에 걸린 시계는 두 시 사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초조했다. 잔인한 휴일의 오후가 그를 짓밟는 기분이었다. 그는 구석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매장에서 옷을 고르는 사람들은 저마다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젊은 여자는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재잘거리며 옷을 골랐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거울에 비추어 보기를 반복했다. 그녀를 지켜보던 친구들은 잘 어울린다며 한마디씩 던졌는데, 그녀는 매번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인다든지, 디자인이 튄다든지, 쉽게 싫증날 거라든지 하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썼지만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돌아갔다. 그 여자는 그렇다 쳐도 같이 따라온 두 친구는 불필요하게 시간을 허비한 셈이었다. Y는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뒤이어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몰려왔다. 그 중 한 명은 처음부터 생각해 둔 청바지가 있었는지 곧장 한 쪽으로 걸어갔다. 다른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청바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통이 넓고 뒷주머니가 엉덩이보다 훨씬 밑에 달려 있는 청바지였다. 그 학생은 가격표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그 학생더러 과감하게 지르라며 부추겼다. 그 학생은 결국 청바지를 손에 쥐고 내려갔다. 들어올 때보다는 표정이 어두웠다. 맞은편에는 젊은 부부가 옷을 고르고 있었다. 여자가 이것저것을 꺼내들어 남자의 몸에 대어 보았는데, 남자 쪽은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건 어때? 하고 여자가 물으면 남자는 그저 괜찮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둘은 가끔 낄낄거리곤 했다. 여자는 열 벌이 넘는 청바지를 남자더러 입어보라고 했다. 남자가 옷을 갈아입고 나올 때마다 여자는 남자의 의견을 물었다. 남자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들은 남자가 제일 처음에 입어 보았던 청바지를 들고 아래층을 향했다. Y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남자 쪽의 취향이 아닌, 여자의 취향에 맞는 옷을 고른 것 같았다. 그럴 거면 남자에게 왜 의견을 물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그 남자는 별 고민 없이 청바지를 고른 셈이었다. 뒤이어 Y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이는 남자가 미소를 띠며 걸어왔다. 남자는 진열대를 한 번 훑어보는가 싶더니 두 벌의 청바지를 꺼내 번갈아 입어보고는 그 중 하나를 들고 돌아갔다. Y는 그 남자가 부러웠다.그는 이제 무언가를 계산하고 따지는 일에 지쳤다. 점찍어 놓은 일곱 벌의 청바지 중 하나를 선택해 이곳에서 빠져 나가고 싶었다. 그는 인내심을 가슴에 꼭꼭 누르며 일곱 벌을 차례로 입어 보았다.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하나를 입어보면 그 전 것이 더 나은 것 같았고, 그 전 것을 다시 입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였다. 좀처럼 딱 이거다, 하고 마음을 끄는 청바지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선물 받은 셔츠와 어울리는 청바지란 어떤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탈의실에서 나올 때마다 땀이 뻘뻘 흘렀다. 시야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봐도 입고 있는 청바지만 눈에 들어올 뿐, 자신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눈이 침침했다. 바지의 색상조차 구분하기 힘들었다. 짧은 현기증이 일기도 했다. 허기를 잊은 위장은 그대로 굳어 버린 것 같았다. 숨은 점점 거칠어졌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이마를 유리에 대고 숨을 가다듬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휴일의 오후는 부풀렸던 열정을 식혀가고 있었다. 옆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마네킹이 입술을 실룩이는 것 같았다.거리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는 점원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온 그는 빈손이었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몸은 땀투성이였다. 도대체 저렇게 많은 청바지 중에 사람들이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는지 알 수 없었다. 거리를 걸으며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휴일의 소중한 한나절을 몽땅 날려버려 속상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애써 자위했다. 금전적으로는 크게 손해 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어쨌거나 셔츠에 어울리는 청바지를 찾아내야만 했다.집으로 돌아온 그는 냉장고를 열고 반쯤 남아 있는 소주병을 꺼내들었다. 생수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매트리스에 몸을 던졌다. 온몸에 쌓여 있던 피로가 혈관을 타고 심장에 몰려드는 것 같았다. 잠이 드는가 싶었지만 옅은 잠이라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인터넷, 인터넷이 있었지.어쩌면 인터넷 쇼핑몰에서 맘에 쏙 드는 청바지를 찾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해 본 적은 없었다. 회원으로 가입하고 신용카드 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등 개인 정보를 노출시키는 일은 꺼림칙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컴퓨터를 켜고 웹 브라우저를 띄운 뒤, 포털 사이트에 청바지라고 입력했다. 검색 결과를 본 그는 좌절하고 말았다. 수십 개의 청바지 판매 사이트가 앞 다퉈 광고를 하고 있었고, 청바지와 관련된 수많은 질문과 대답이 쌓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질리게 한 것은 이십만 건이 넘는 비교 쇼핑 리스트였다. 남성 의류로 카테고리를 좁히자 육만 건 정도로 줄었으나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숫자였다. 카테고리를 좁혀가자 리스트는 점점 줄어들었다. 남성 의류도 남성 일반 의류와 캐주얼 브랜드 의류로 나뉘었다. 그런데 문득 캐주얼이 무슨 뜻일까 궁금했다. 셔츠와 어울리는 스타일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캐주얼의 정확한 뜻을 알아야 했다. 그는 인터넷으로 캐주얼과 관련된 정보를 검색해보았다. 그러다가 흥미로운 사실과 마주쳤다. 그것은 뉴요커라는 잡지에서 다룬 기사였는데, 캐주얼에는 적어도 여섯 가지 이상의 종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활동적 캐주얼, 남루한 캐주얼, 스포티한 캐주얼, 정장식의 캐주얼, 깔끔한 캐주얼, 비즈니스적 캐주얼 등이었다. 그렇다면 Y가 추구하는 캐주얼은 도대체 어떤 것이란 말인가. 야유회라면 분명 스포티한 캐주얼이 어울릴 터였다. 그런데 스포티하다는 것과 활동적이라는 것의 차이는 무얼까?Y는 인터넷에 매달려 수없이 이어지는 의문을 풀며 노트에 정리했다. 곧 끝날 것 같았던 의문은 자정이 지나도록 더 많은 가지를 뻗어 내렸다. 언제나 자정이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었던 그는 애가 탔다. 새벽 두시를 넘겨서야 겨우 컴퓨터를 끌 수 있었다. 노트는 스무 장 정도가 메워져 있었다.새벽 여섯 시가 되기까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에게는 무척 긴 밤이었다. 잠시 잠이 들면 긴 꿈을 꾸었고 깨어나 시간을 확인하면 겨우 십여 분이 지나 있었다. 그렇게 토막난 잠을 이어갔다. 꿈속에서는 어머니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어머니는 Y에게 규칙적이고 성실한 생활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강요했었다. 그는 엄격한 어머니에게 불만을 가질 처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이어진 가난은 그럴 수밖에 없는 틀로 그의 삶을 얽매었다. 그는 성적이 나쁘지 않았지만 국비로 운영되는 전문대학에 입학해야 했다. 대학 시절에는 수업과 아르바이트로 이어지는 삶 외에는 관심을 가질 틈이 없었다. 그는 삶이란 주어진 환경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장을 골라야 하는 일은 어려웠다.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첫 직장은 적성을 떠나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명확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입사했는데, 영세한 곳이라 디자인도 맡아야 했다. 그 디자인이라는 것이 무척 까다로웠다. 팀장은 활기찬 느낌이나 고급스러운 느낌을 요구하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안정감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색상을 써야 하는지, 어떤 크기의 이미지들을 사용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주어진 매뉴얼대로 일하는 생산직이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대학까지 보내놨더니 기계 밥 먹을 생각밖에 못하냐며 울먹였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사무직 쪽의 일자리를 알아보아야 했다. 그것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었다. 컴퓨터를 수리하는 일은 사무실에서 일하기는 하나 사실상 생산직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손에 금전이 쌓여갔지만 그는 필요한 액수를 제하고는 고스란히 적금통장으로 옮겼다. 여행, 취미생활, 쇼핑, 연애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저 톱니바퀴처럼 잘 짜여 굴러가기를 바랐다.어머니가 세상을 떴을 때, 그는 완전히 홀로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스스로 가정을 꾸리지 않는 한 가족도 친척도 없을 것이었다. 그는 잠시 묘한 해방감에 빠졌다. 그러나 곧 현실적인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신경 써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이 널려 있었다. 식사 때마다 무슨 반찬을 해야 하며 요리 재료는 어디에서 어떤 요령으로 구해야 하는지, 세제는 어떤 것을 써야 하는지, 속옷 따위는 어디서 사는지 등의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그는 어머니의 습관을 떠올려 그 문제를 해결해 왔다.그런데 청바지 하나 구입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그는 차라리 그에게 옷을 골라줄 애인이나 아내, 또는 억지로라도 그의 등을 떠밀어 줄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알람시계가 요란히 울려대며 그를 어수선한 잠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는 개운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세면대 앞에 섰다. 솔이 양옆으로 누워 납작해진 칫솔에 치약을 묻히고 양치질을 했다. 세숫비누로 거품을 내어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은 뒤 토스터기에 식빵 두 개를 넣었다. 평일 아침마다 기계적으로 밟았던 순서였다. 그런데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른 낱말이 그 리듬을 깨뜨렸다. 회귀분석.그래. 내가 선택하기 어렵다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미리 분석하면 되는 거야.그는 책꽂이에 꽂혀 있는 몇 안 되는 책들 가운데서 회귀분석론이라는 책을 뽑아들고 집을 나섰다. 대학교재로 쓰였던 책인데,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데이터나 영향 등을 통계적으로 예측하는 이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전철을 타고 회사에 가는 동안 자신의 성향에 대한 데이터를 떠올렸다. 그 모든 데이터로 분석하면 자신이 선택하게 될 청바지가 가려질 것 같았다.그는 회사에서 짬짬이 분석에 몰두했고, 점심까지 거르며 시간을 썼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청바지의 종류와 브랜드별 특성에 대한 정보, 그리고 구매자의 평도 인터넷으로 수집했다. 분석 작업은 수요일 오전까지 이어졌다.수요일 오후, 직원들이 점심을 마치고 되돌아 올 때였다. Y의 작업실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그것은 비명이라고 하기엔 소리가 짧았다. 차라리 순간적인 신음 또는 감탄에 겨워 내뱉는 소리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무슨 소리가 났던가? 하고 지나쳐 갈 뿐이었다. Y는 작업실에서 손가락으로 볼펜을 굴리며 입을 헤벌린 채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앞 컴퓨터 모니터에는 한 청바지 업체의 사이트가 펼쳐져 있었다. 그를 나흘 동안 옥죄던 갈등이 걷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미소를 잃었다. 그 업체는 청바지를 온라인으로는 판매하지 않았다. 그는 조바심을 달래며 업체에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여자는 동대문과 강남에 납품하고 있다며 두 군데의 가게를 알려주었다. 회사에서 가까운 곳은 동대문이었다. 그는 전산부장에게 사정해 잠시 외출할 것을 허락받았다. 동대문에 도착한 그는 상인들에게 여러 번 물어 가게를 찾았다.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를 어린 여점원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다짜고짜 청바지의 모델명을 말했다. 여점원은 청바지가 진열된 곳을 뒤적거리더니 사이즈를 물었다.- 28입니다. 아니, 28이나 30이면 됩니다.Y가 대답하자 여점원은 32 사이즈 이상만 남아 있다고 했다. Y는 여점원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며 서 있었다.- 이, 이것 봐요. 저는 그 청바지를 사야 하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저는 그 청바지가 꼭 필요합니다.여점원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어디인가로 전화를 걸어 사무적인 어투로 통화한 뒤 Y를 바라봤다.- 강남 매장에도 사이즈가 없네요. 수입하는 거라 물량이 수시로 있지는 않거든요.Y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낡은 구두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제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은 모양인데, 저는 그 청바지가 없으면 안 됩니다. 이건 심각한 문제에요. 청바지를 내 놓으란 말입니다. 제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는지.여점원은 어이없다는 듯 Y를 바라보았다. Y는 굽히지 않고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점원의 눈은 이제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Y의 시선을 피해 맞은편 가게의 청년에게 눈길을 돌렸다. Y는 떨고 있는 그녀의 두 손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운지를 깨달았다. 그는 뒤돌아 고개 숙인 채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금요일까지 그는 평소처럼 일했다. 가끔 노트를 펼쳐 자신의 분석이 틀린 곳은 없는지 되짚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청바지를 포기하고 있었다. 비슷한 가격과 디자인의 청바지도 있었지만 성에 차지는 않았다.토요일, 회사는 예정대로 야유회를 가졌다. 그는 모이기로 한 시간보다 사십 분 늦게 나타났다. 하의는 낡고 색 바랜 그의 유일한 청바지였다. 선물 받은 셔츠를 입기는 했지만 검은 점퍼를 걸쳐 보이지 않았다.전산부장은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다른 직원들도 흥에 겨워 담소를 나누었고,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큰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초가을의 햇살은 따뜻했고, 하늘은 깊었다. 직원들은 Y에게 한마디씩 던지기는 했지만 건성이었다. 셔츠를 건네준 여직원도 Y에게 다가와 밝게 인사했을 뿐, 주로 젊은 남자 직원들과 어울렸다. 한 번도 웃음을 띠지 않은 사람은 Y뿐이었다. 여직원은 기억을 못하는지 그에게 셔츠를 입은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았다. Y는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평소답지 않게 술을 많이 마셨다. 지금까지 누구와 인연을 맺는 것은 성가신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가족이 있고, 관심을 두는 사람이 있고, 소속된 조직이 있는 그들은 무척 편하게 삶을 사는 것 같았다. 그는 그들이 입고 있는 옷 하나하나를 둘러보았다. 하나씩 따져보면 모두가 개성 있거나 평범해 보이는 옷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평범하거나 점잖은 옷이 밝고 활동적인 옷을 잘 견제하고 있었다. Y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장 자유로워야 할 사람은 Y 자신이어야 하지 않은가. 가족과 조직과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간섭하고 간섭받는 저 사람들이 더 자유로워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그때였다. 그의 눈앞에서 사람들의 옷이 잿빛으로 변해 갔다. 그 위로는 수많은 곡선이 그려졌다. 그의 노트에 통계를 내기 위해 그렸던 그래프와 흡사했다. 그것은 하늘을 향해 뻗어 가며 다양한 수식과 기호들을 뿜어냈다. 그가 노트에 정리했던 모든 작업들이 옷가지 하나하나마다 되풀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옷은 바래졌다. 그와 동시에 그들을 등지고 있는 나무들과 잔디밭과 하늘은 점점 뚜렷하고 맑은 색을 띠었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는 차츰 작아지더니 귓속에서 한 점으로 뭉쳐버렸다. 곡선들이 다가와 그의 머리를 칭칭 감는 것 같았다.야유회 이후로 Y는 가능한 모든 걸 잊고 업무에 열중하려 했다. 물론 일주일 동안 쏟아 부었던 헛된 노력이 떠올라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은 뜸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청바지 사건은 잊히는가 싶었다.마침 추석 연휴가 그를 기다리고 있어서 그는 여유를 되찾을 기회로 여겼다. 명절이라고 해도 혼자 지내야 하는 그는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다만 그토록 혹사시킨 자신을 위로라도 해주었으면 했다. 여행을 떠나볼까 생각하다가 그만 접고 말았다. 어디로 떠나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자니 머리가 아팠다. 고민 끝에 그는 음식이라도 배불리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연휴 첫날, 그는 거의 정오까지 잠을 자다가 일어났다. 마음은 가벼운 흥분 속에 싸여 있었다. 양치질도 하지 않은 채 얼굴만 대충 씻고 모자를 눌러썼다. 자전거를 끌고 거리에 나선 그는 한산한 거리를 기분 좋게 달렸다. 날씨는 조금 흐렸으나 바람은 부드러웠다. 이십여 분을 달려 대형 할인 마트에 도착한 그는 일 층 식품 매장을 향했다. 거리와 달리매장 안은 북적거렸다. 그가 물건을 사러 마트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백 원짜리 동전을 넣고 카트를 뽑아 느긋하게 매장을 둘러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그려 놓은 리스트는 잡채, 아귀찜, 돼지갈비, 그리고 정종이었다. 잡채에 들어갈 재료는 손쉽게 구했다. 시금치와 양파, 느타리버섯과 당근이면 충분했다. 그는 아귀찜에 쓸 미나리와 콩나물, 그리고 대파 한 단을 카트에 넣고 수산물 코너로 갔다. 미더덕 한 팩과 큼지막한 아귀 한 마리를 사고 육류 코너를 향할 때였다. 서너 명의 판촉점원이 서로 자기 상품을 홍보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었다. 어떤 점원은 할인을 강조했고, 어떤 점원은 맛과 신뢰성, 신선도 등을 강조했다. 순간 그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같은 국내산 고기가 서로 다른 브랜드로 팔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동네 정육점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돼지고기는 그냥 돼지고기였다. 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눌러두고 싶었던 노트가 펼쳐지고 있었다. 야유회에서 경험했던 이상한 그림들이 또다시 그려질 것 같았다. 그는 그 덫에서 벗어나고자 뒤돌아섰다. 그런데 빠져 나오는 길에 이어진 쌀 코너를 보며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수많은 브랜드의 쌀과 마주했다. 가격과 기능과 지역과 작농 방법에 따라 각기 다른 포대에 나뉜 쌀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쌀 한 톨 한 톨마다 싹을 틔워 곡선을 뿜어낼 것 같았다.그는 카트를 내팽개치고 마트에서 나왔다. 앞으로 쇼핑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연휴 내내 즐겁지 않았다. 식사는 대부분 라면으로 때웠고, 남아도는 시간은 지루했다그의 비극에 정점을 찍은 것은 집 문제였다. 갑작스럽게 쌀쌀해진 늦가을, 그는 자신의 집이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 집은 그냥 집이었다. 이사를 해 본 적도, 계획해 본 적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살아 온 지금의 집이 있을 뿐이었다. 집 문제는 그에게 가혹한 판단을 요구했다. 크기와 가격, 위치와 교통편, 주변 환경과 소음 등 따져야 할 점이 너무 많았다. 이 문제에 비하면 청바지를 구입하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맘에 들지 않는 청바지는 입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집은 옷 갈아입듯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그는 또다시 노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청바지 백서의 몇 갑절에 달하는 분량이었다.그는 휴일마다 집을 알아보느라 발이 퉁퉁 붇도록 걸어야 했다. 휴식을 취해야 할 휴일은 직장에서 일하는 평일보다 피곤했다. 차츰 그는 식사 시간에 메뉴를 고르거나 간단한 생필품을 사는 데에도 떠오르는 곡선들을 보았고, 그것과 싸우느라 하루하루가 끔찍했다. 그는 가끔 먼 산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선택할 필요가 없는 동물들의 삶이 부러웠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만 할 뿐인 그것들이 자신보다 더 행복할 것 같았다. 그는 아무도 없는 숲을, 그 속에서 동물처럼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종종 떠올렸다.그가 실종되었을 때, 그의 집은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현관 앞에는 여러 권의 노트를 불태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4.01.02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소감] "좌절의 수렁 속에서 글로써 희망 찾아"

7년 전, 젊음을 바쳤던 직장을 정리하고 집에 돌아 왔을 때였습니다. 창문을 열고 의자에 앉아 창가에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바람에 출렁거리는 블라인드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며 그 리듬에 맞춰 제 삶을 회고했습니다. 그러다 잠이 들었습니다. 꿈을 꾸었는데, 무척 생생했습니다. 배경은 미국이었고 두 남자가 조직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속이고 배신을 거듭하다가 마지막 반전을 일으키는 내용이었습니다.어쩌면 그 꿈은 아직도 진행형일지 모릅니다. 그때 잠든 뒤로 나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처럼 글쓰기를 시작한 시점부터 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됐습니다.처음에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을 때, 모든 것이 막막하고 무모해보였습니다. 문학에 대해 아는 게 없었으며 읽은 책도 미천했습니다. 소설을 쓰는 일은 흉내 내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꾸었던 꿈을 복기하며 의문을 떠올렸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긴 내용이, 그것도 제가 접해보지 않았던 경험이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하며 꿈이 되었을까.생각해보니 제가 글을 전혀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십여 년간 꿈을 기록해왔습니다. 꿈의 내용은 일반적인 논리로 재구성하기 힘든, 언어화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제가 해왔던 작업은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꿰맞춰 글로 재탄생시킨 것이었습니다.그렇게 생각하자, 놀라운 용기가 솟았습니다. 나는 쓸 수 있다. 내 내면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풍부한 글감도 가지고 있다.지난 7년 간, 숱한 좌절의 수렁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오늘로서 내면의 열정은 끝이겠구나 하고 포기하려는 마음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음 날이 되면 작은 희망이 샘솟았고 그것을 붙잡고 써야하는 것이 제 운명이라고 느꼈습니다.제 글에서 가능성을 발견해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드립니다. 그간 여러 선생님께 지도를 받았는데, 가장 긴 시간 동안 인내하면서 이정표를 제시해 주신 김기우 교수님께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쫓기보다는 먼 길을 내다보게 하신 그의 지도는 탁월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활발한 문집 활동을 하고 있는 소설탄생의 모든 선생님들과 함께 영광을 나누고 싶습니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4.01.02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심사평] "현대사회 개인 소외 치밀하게 다뤄"

신춘문예는 문학인의 추억을 불러오고, 문학 지망생들이 꿈을 꾸게 한다. 등단 작가 치고 신춘문예 때문에 가슴 설레지 않았던 이가 누가 있겠는가.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이라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의 길로 들어서고자 하는 꿈을 꾸게 마련이다. 우리 심사위원은 응모작을 추억보다는 꿈에 중점을 두고 읽었다. 김경락, 서귀옥, 고동현, 김만성, 황지호, 성보경 등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일상사를 평상적으로 다룬 작품들은 문학을 지망하는 이들의 꿈과는 거리가 있다고 판단해서 제쳐놓았다. 그 결과 김경락의 〈폭설 내린 날〉, 서귀옥의 〈낙화(烙畵)〉, 고동현의 〈청바지 백서〉 세 편을 놓고 검토했다. 김경락의 〈폭설 내린 날〉은 개척교회 목사가 겪는 현실의 문제와 목회자로서 성찰과 내면의 갈등을 무난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착한소설로 평가할 수 있는 안정성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치열한 내면의 고뇌는 스쳐갔다는 허전함이 남는 작품이다. 일상에 매몰된 작품은 의식의 지평을 열기 어렵다. 폭력과 마모되는 육체와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인간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그리고 있는 〈낙화〉는 응축된 플롯 속에 사태를 다루는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심리묘사가 치밀하고 플롯 구성이 탄탄하다. 그러나 소설적 자유라는 점에서는 작가의 자기해체나 자기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았다. 소설적 근성이라는 것을 살려 보기 바란다.〈청바지 백서〉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소외되는 메커니즘과, 결국은 실종에 이르고 마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 억압을 치밀하게 그린 작품이다. 외주업체에서 어느 회사 전산실로 파견된 주인공이 생일선물로 받은 셔츠 한 벌이 계기가 되어, 그 셔츠에 맞는 청바지를 구입하러 돌아다니다 끝내 실패한다. 선물로 받은 티셔츠에 맞는 청바지를 끝내 찾지 못하고, 상표로 헝클어져 존재하는 현실의 톱니바퀴에 물려 실종하고 만다. 그것이 단편양식이란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소설은 개인 이야기를 넘어 사회적 관심으로 확장되는 이야기값을 지녀야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소설미학의 어느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아도 좋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소설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장치에 대해서는 새로운 감각을 살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대 사회의 중요한 문제를 소설로 다루어 나가는 진지한 추구를 기대한다. 응모한 분들이 문학적 열정을 부단히 지펴올리고 소설작업에 정진하기를 빈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4.01.02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붕어빵 잉어빵 형제 - 김정미

남동생 승하가 우리 학교 병설유치원에 입학했다. 그래서 요즘 엄청 신경 쓰인다. 동생을 챙기는 게 힘들어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다. 내가 얼마나 듬직한 형인지 알 사람은 다 안다. 승하도 나를 굉장히 잘 따르고 말이다.하지만 승하랑 등교하는 건 정말 조마조마한 일이다. 오늘도 친구들이 성가신 질문을 할까봐 가슴이 콩닥 거렸다. 친구들이 동생 이름표를 못 보도록 숨기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언젠가는 모두 알게 될 것이다. 승하도 언젠가는 물어볼 텐데, 그땐 뭐라고 말해야 하지?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3교시 수업이 끝났을 때, 누가 나를 불렀다.박준하, 네 동생 왔어!나는 화들짝 놀라 문을 쳐다봤다. 복도에 노란색 유치원복을 입은 승하가 서 있었다. 나는 재빨리 복도로 뛰어갔다.여기 왜 왔어?말도 없이 찾아온 승하를 보니 화가 났다. 승하는 뭐가 좋은지 헤벌쭉 웃고만 있다. 친구들이 승하 이름표를 보면 어쩐담? 나는 승하 손을 잡고 계단으로 끌고 갔다.승하가 내 걸음을 따라잡지 못하고 철퍼덕 넘어졌다. 승하는 바보처럼 엉엉 울고만 있었다.빨리 안 일어나?나는 승하를 일으켜 세우면서 엄마가 말할 때처럼 또박또박 무섭게 말했다.형 미워! 엄마가 크레파스 안 챙겨줘서 빌리러 왔단 말이야.그러게 진즉에 준비를 했어야지!크레파스를 꺼내러 사물함에 다녀왔는데 우리 반 송이가 승하를 달래고 있었다. 송이는 3학년 중에서 제일 예쁘다.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해서 인기도 많다. 혹시 송이가 승하 이름표를 본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둘이 붕어빵이다.송이가 승하랑 나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생글거렸다. 송이 오른쪽 볼에 보조개가 움푹 파였다. 가슴이 쿵쾅거렸다.승하랑 내가 붕어빵이라고? 나는 승하 얼굴을 오래 들여다봤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시커먼 눈썹, 낮은 콧대랑 까무잡잡한 피부가 나랑 닮은 것도 같았다.승하를 돌려보내고 송이랑 함께 반으로 들어갔다. 송이가 눈을 깜빡거리며 내게 질문을 했다. 준하야,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마음속에서 새 한 마리가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자신 있는 수학 문제를 물어보면 좋으련만. 그럼 멋지게 대답해 줄텐데.너는 왜 남동생이랑 성이 달라?송이의 질문에 노래 부르던 새가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아까 승하 이름표를 봤나 보다. 갑자기 머릿속이 함박눈 내린 운동장처럼 새하얘졌다.내 성은 원래 남동생이랑 똑같은 김씨였어. 그런데 어릴 적 시골 할머니 댁에서 오래 살아서 성이 바뀌었어. 할머니 성함이 박 복자 순자시거든. 그래서 내 성도 박이 되어 버린 거야.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내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다행이도 송이는 내 말에 속아 넘어가는 눈치였다.와, 부럽다. 나도 성 바꾸고 싶어.송이는 양 씨다. 그래서 별명이 양송이버섯이 됐다. 친구들이 아무리 놀려대도 송이는 늘 당당했다. 그런데 많이 힘들었나 보다.나도 할머니랑 오래 살면 성이 바뀔까?글쎄. 그, 그럴 지도.나는 대충 둘러대고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꾹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송이가 내 말을 믿어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승하랑 내가 왜 성이 다른지 말하려면 마음속에 꼭꼭 담아뒀던 비밀을 다 끄집어내야 한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친 아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 엄마가 지금 아빠랑 결혼해서 남동생 승하를 낳았다는 것, 그래서 승하랑 내가 성이 다르다는 것 모두 말이다.내가 말을 배운 후 아빠라고 부른 사람은 지금 아빠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아빠를 가짜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사실을 말해주려면 지금 아빠를 새 아빠라고 불러야 한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나도 가짜 아들이 돼버릴 것 같아 무섭다.내 성을 김씨로 바꿔달라고 졸라댔던 적도 있다. 하지만 시골에 계신 할머니가 반대해서 바꿀 수 없었다. 친 아빠를 낳은 할머니는 내가 박씨 가문의 삼대독자라서 성을 바꾸면 절대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조상님들이 화가 나서 벌을 내린다는 거다. 할머니가 아주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기 때문에 더 이상 조를 수가 없었다.쉬는 시간, 이번에는 유치원 선생님이 나를 찾아왔다.승하가 아직도 안 와서 찾으러 왔어.네? 아까 크레파스 줘서 보냈는데.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선생님 표정도 어두워졌다.선생님과 나는 서로 흩어져서 승하를 찾기로 했다. 먼저 4층을 돌아봤다. 4층에는 3학년 교실과 어학실, 과학실이 있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 사이에 승하는 보이지 않았다. 3층으로 내려갔다. 2학년 교실과 컴퓨터실, 방송실 순으로 둘러봤지만 승하는 없었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2층으로 내려갔다. 화장실까지 샅샅이 뒤져봤지만 승하가 없다. 눈물이 찔끔 삐져나오려고 했다.나는 한숨을 쉬며 창밖을 내다봤다. 그때 생태 연못에 노란색 옷을 입은 꼬마가 쪼그려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승하가 분명했다.나는 재빨리 연못으로 뛰어갔다.승하야, 김승하!승하가 뒤돌아봤다.형!너 여기서 뭐해?유치원에 가려는데 길을 잃어버렸어. 형! 이거 봐봐. 잉어들 정말 크지? 새끼도 있어!연못 안에는 알록달록 고운 옷을 입은 잉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그때, 승하가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잉어들은 좋겠다. 이름도 없으니까 성이 왜 다르냐는 질문도 받지 않을 거 아냐.갑자기 머리가 띵했다.왜? 친구들이 형이랑 왜 성 다르냐고 물어봐?승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승하에게도 사실을 말해 줄 때가 되었나 보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머리가 뒤죽박죽 했다.이따 집에 갈 때 형이 왜 그런지 말해줄게.나는 승하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얼른 유치원으로 데려다 줬다.수업을 받는 내내 승하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걱정이 됐다.학교 수업을 마치고 유치원으로 가면서 머리를 굴려봤지만 뾰족한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유치원에서 날 기다리는 승하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30분이 걸린다. 승하 혼자서 다니기엔 정말 먼 거리다.약국 사거리에 도착했을 때 승하가 내 팔을 당기며 말했다.형! 붕어빵 사 줘.약국 앞 포장마차에서 턱수염이 숭숭 솟은 아저씨가 붕어빵을 굽고 있었다. 승하랑 나는 붕어빵을 가장 좋아한다. 달달한 팥을 혀로 살살 녹여먹으면 정말 맛있다.아저씨는 숟가락으로 팥을 떠서 틀 안에 열심히 담고 있었다. 노릇노릇 구운 붕어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용돈으로 받은 2천원을 주머니에서 꺼냈다.아저씨 붕어빵 주세요.이건 붕어빵이 아니라 잉어빵인데?아저씨가 손가락으로 종이봉투를 가리켰다. 황금 잉어빵 출시라고 써있었다. 잉어빵은 붕어빵이랑 생김새가 똑같았다. 뱃속에도 단팥 앙금으로 꽉 차있다. 냄새도 붕어빵처럼 고소하다. 그런데도 왜 잉어빵이라고 부르는 건지 모르겠다.붕어빵이랑 똑 같이 생겼는데 왜 잉어빵이라고 불러요?그냥 이름만 다르지, 둘이 형제야 형제.아저씨가 붕어빵, 아니 잉어빵을 뒤집으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생김새도, 뱃속에 팥을 품고 있는 것도 똑같은데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잉어빵이 나처럼 느껴졌다.우리는 붕어빵을 한 손에 들고 집으로 걸어갔다. 내가 잉어빵의 바삭바삭한 테두리를 깨작깨작 뜯어먹으니까 승하도 날 따라했다. 갑자기 승하가 나를 불렀다.형아, 형아.응?붕어빵이랑 잉어빵도 아빠가 다른 가봐. 둘 다 이름은 어빵인데 성이 붕이랑 잉인 걸 보면 말이야.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너 알고 있었어?옛날에 형이랑 시골에 놀러갔을 때 할머니가 하는 말 다 들었다 뭐.승하가 나에게 혀를 쏙 내밀었다. 나는 승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곤 잉어빵을 한입에 넣어 버렸다. 승하도 나를 따라 잉어빵을 입속에 욱여넣었다. 우리는 복어처럼 빵빵해진 서로의 볼을 쳐다보며 키득거렸다. 달달한 팥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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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02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소감] "외롭고 쓸쓸한 아이들에 힘이 되길"

어느 날 불쑥, 제 안의 작은 아이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떠드는 동안 무척 신났습니다. 이 즐거움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동화를 쓰기 시작했습니다.동화를 쓰면서 알게 됐습니다. 제가 만난 그 아이가 바로 제 자신이었다는 것을요. 어른이 되는 순간, 어릴 적 제 모습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잊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어요. 어린 시절 저는, 사랑스럽지도 귀엽지도 않은 불만에 가득 찬 심술쟁이였거든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심술을 잔뜩 부린 이유가 외로움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작고 외로운 아이를 꼬옥 껴안아주었습니다.지금도 어딘가에 살고 있을 외롭고 쓸쓸한 아이들에게 제 동화가 힘이 되어 준다면 참 기쁠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자신이라는 걸 이 땅의 아이들이 모두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른들이 내미는 볼품없는 잣대로 아이들의 가치가 나뉘지 않는 세상이 오길 꿈꿔 봅니다. 그때까지 저는 열심히 동화를 쓸 것입니다. 부족한 작품을 기꺼이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전북일보사에 감사드립니다. 저를 동화의 세계로 이끌어주신 정해왕 선생님, 윤정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나와 평생 함께할 글벗 파란의자, 화동요 식구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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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4.01.02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심사평] "흔한 소재 이용 아이디어 높이 살만"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은 참새 할머니, 땅꼬마와 거북이 아저씨, 바위소나무 붕어빵 잉어빵 형제, 네 편이었다. 작품마다 소재와 유형이 다르고, 나름대로 특징을 지닌 작품들이기에 동화 창작의 잠재력에 박수를 보낸다. 먼저 참새 할머니는 폐휴지를 수거하여 내다파는 외로운 할머니가 병든 참새를 간호해 주는 사랑의 마음을 담은 작품이다. 참새의 병을 고치기 위해 동물병원을 찾아다니고, 쥐의 사체가 사라진 참새인줄 알고 망치로 벽을 부수는 등 유머와 재치를 살린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글 전체가 어둡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땅꼬마와 거북이 아저씨는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고 따돌림 당하는 아이가 가출한 아버지를 생각하며 거북이처럼 쪼그리고 앉아 살아가는 노숙자에 대한 연민의 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아저씨의 혼잣말이나 아저씨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공놀이를 하기까지 이어지는 문장은 주독자인 어린이들에게는 다소 난해한 서사였다.바위소나무는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못생긴 소나무가 다른 소나무와 비교되며 힘든 삶을 살았지만, 주변에 공원이 조성되면서 오히려 예술적 가치로 높이 평가되어 고향을 지킨다는 내용의 의인화 작품이다. 하지만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속담을 패러디한 느낌으로 다가와 소재의 참신성과 독자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데는 성공한 작품으로 볼 수 없었다.네 편의 작품 중, 붕어빵 잉어빵 형제를 당선작으로 미는 이유는 동생과 성이 다른 가족관계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아동의 심리를 리얼하게 잘 표현한 작품으로 글의 구성이 비교적 탄탄했으며, 결말 또한 무리 없이 마무리하여 다른 작품에 비해 우위를 차지했다. 시종일관 간결체를 고집하여 생긴 문체의 유연성 문제와 묘사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으나, 길거리에서 만난 흔한 소재를 동화 속으로 끌어드린 아이디어도 높이 살만 했다. 당선자를 축하하며, 이어서 독자들에게 상상력과 감동을 줄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 거듭 생산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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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02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시소가 있는 풍경- 노동주

시소는 늘 기울어 투석기처럼한쪽 팔을 바닥에 떨구고 있다빈둥거리는 그 사내의 엉덩이가 얼마나 무거울까쏘아 올리기에는 시소의 두 팔이 너무 길다곤장이라도 맞은 듯 매번 엎어져 있다사내도 굄돌처럼 하늘을 인 듯 무겁다햇빛 그늘진 저 받침점이란 건 뭔가? 가슴팍에점 아닌 섬처럼 박힌 저것누구도 그 중심에 안착해 본 적 없다시소는 늘 중심을 빗나간 기웃거림의 형식으로흔들리며 웃고 운다, 끽끽거린다아이를 데리고 나온 할머니가 가볍게 시소에 앉는다브라보콘을 흘리는 일곱 살의 오후가 번쩍 들린다그 기울어진 시소의 경사면을 따라문득 이삿짐 트럭이 오르고 영구차가 내려간다눈길에 미끄러지는 출근길이 열리고이부자리에 맨발을 모으는 저녁 냄새가 피어오르기도 한다사내의 엉덩이도 시큰거린다중심으로부터 몸이 무거울수록 가깝게가벼울수록 멀리 앉는 게 균형을 맞추는 법이라지만늘 빈손인 사내는 거구여도 뒷자리에 앉고천근의 추를 몸에 단 흐릿한 얼굴은 맞은편에 앉았다 간다시소는 땅 속에 처박히거나아니면 나무처럼 직립하고 싶겠지만 지금은 아니다시곗바늘처럼 좌우로 훅훅 언젠가 돌 수도 있겠지만지금은 아니다, 누가 뭐래도 진짜 시소의 균형이란때를 기다리는 것, 엉덩이 짓무르도록방아를 찧을 때마다 꺽꺽 시소가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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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02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소감] "문우들에 대한 고마움 잊지 않겠다"

경적이 울립니다. 뒤돌아보니 택시입니다. 혹시나 싶어 앞사람 등짝에 툭 던지는 소리, 그 생활의 방식을 시라 믿습니다. 굳게 뒤돌아선 사물의 뒤통수에 대고 오래 말을 걸곤 했습니다. 돌아오는 게 늘 퇴짜일지 몰랐지만, 힐끔 고개 돌린 옆모습이라도 기억했다가 그걸 받아 적는 밤은 늘 깊었습니다. 영혼의 반을 시인이 되는 길에 걸었습니다. 내 반쪽만을 통과한 사람들아, 아이들아 미안하고 고맙다. 퇴근 후 방문을 닫고 무언가 헛것만을 쓰고 있는 아들의 어깨를 보며, 아버지 어머니는 어떤 시간을 사셨을까. 오래 살아계시라. 아들의 이야기를 이제부터 들으소서. 금이 번진 벽에 새로 도배를 하던 날, 몇 번의 귀얄질로 벽지 속 국화꽃이 천장까지 피어오르던 오후가 있었습니다. 쥐가 달그락거릴 때마다 아버지가 천장을 치대던 그 밤도 생생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 삶의 실금 위로 떨어져 내려쌓인, 그 따뜻한 국화꽃잎의 기억으로. 평생을 사는 나. 시 쓰는 삶에 한 아름 꽃잎을 보태주신 종호 선배, 지웅 형, 안성덕 선생님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박성우 선생님, 정양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제 생활의 반인 가족과 친구와 진봉초 식구들에게 고마움 전합니다. 나를 시인처럼 살게 해준 하연, 사랑합니다. 문우들에 대한 고마움은 생활로써 대신 갚겠습니다. 졸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두 선생님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매번 제 시의 뼈대를 부러뜨리던 강연호 교수님, 저는 언제나 강골이 될까요. 은혜가 깊지만 갚을 수 없는 깊이이므로 갚지 않겠습니다. 더 빚을 지렵니다.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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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02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시 정신의 집중과 몰입 매우 뛰어나"

지금 시는 산업화 광속의 감각 때문에 멀미를 앓고 있다. 인쇄 언어의 앞날이 걱정이다. 그럼에도 시와 시인은 여전히 존재하고 증가하면서 진화하는 추세에 있다. 한 마디로 시대적 아이러니이다.본심의 작품들 중 「금강」외3편(이인애),「거울을 긁다」외2편(박평숙),「즐거운 독」외4편(문화영),「장수 한우축제」외4편(이근영),「생골 아지매」 외 3편(임미성) 등은 모두 한 사람이 쓴 작품처럼 진술 형태가 비슷비슷하다. 평범한 어조에다 일상적 서정이 주조(主調)를 이루고 있다. 관객이 무용 공연장에서 춤은 사라지고 패션만 보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시는 사라지고 언어만 난무한다면 헛심이 팽길 것이다. 옥석을 가리는 작품에서 언어와 시정신은 섬광처럼 빛나야 한다. 끝까지 남은 작품으로 「나무의 관상(觀相)」(한병인)은 서정 묘사에 치중, 비교적 안정된 심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나무에 대한 깊은 인식과 언어 구조의 층이 얇아 주제 의식을 드러내기에는 버거워 보이는 것 같다. 「바다의 구두」(이지산)는 사람 중심의 편견에 의한 자연(바다)의 희생과 새만금 방조제와의 불협화를 풍자한 생태학적인 시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미래파적 추구 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인데 35연의 청신한 진술에 비해 끝부분 89연은 긴장이 풀어져 어색한 상투성과 불투명하고 난삽한 언술로 되어 있다. 짱짱하고 단단하게 응축시켜 공력을 살려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 작품이다. 당선작 「시소가 있는 풍경」(노동주)은 인간 사회의 중심축과 평형감각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에 천착, 치열하게 형상화된 작품이다. 언어의 함축적 의미나 비유의 정확성과 긴밀성, 그러한 심층 구조의 역동성에 의해 흡인력과 시안(詩眼) 전개의 안정감도 돋보인다. 덧붙이면 대상의 내면을 투시할 줄 아는 시정신의 집중과 몰입, 언어가 함의하고 있는 상쾌하고 투명한 미의식 등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는 점에 심사위원 두 사람의 의견도 일치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와 더불어 초심을 잃지 말고 이제부터라는 각오로 더욱 정진하여 한국 시인들의 중심에 우뚝 서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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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02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뜨개질 - 한경희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시작했다. 먼지가 햇빛의 그물망에 갇혀 온 방을 떠다닌다. 내 유년의 엄마가 햇빛 드는 창가 쪽에 앉아 뜨개질을 할 때도 그랬다. 먼지는 엄마 손끝에서 머리까지 이리저리 부유했다. 엄마는 해가 떨어질 때가 돼서야 숙인 고개를 들었다. 뜨개질을 멈추면 엄마 주변에 갇혀있던 먼지도 풀려났다. 책상 후미진 곳에 쌓인 먼지가 보인다.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데로 무늬가 새겨진다. 그 무늬에는 어떤 과거가 갇혔을까. 밤사이 풀려난 먼지는 내 낙서 위에 고요로 덮였다.그는 목이 유난히 길고 추워 보였다. 나에게 여섯 살 때 헤어진 엄마 이야기를 했다. 내 손으로 감쌀 수 없는 그의 목에 꼭 맞는 목도리를 뜨기로 했다. 내가 뜬 목도리가 그의 목을 데워줄 생각을 하면 내 가슴이 훈훈해졌다. 절로 손이 빨라졌다. 벌집무늬는 난해하다. 잠시라도 정신을 팔면 무늬가 흐트러진다. 틀린 코를 풀어 다시 바늘대에 끼우기를 반복하며 마지막 코를 마무리했다. 목도리를 내 앞자락에 펼쳐보았다.엄마는 뜨개질 도중에 간간이 나를 불렀다. 미완의 뜨개옷을 내 가슴에 대어보며 길이를 가늠했다. 한 코로 시작한 스웨터는 날마다 옷의 형태를 갖추어갔다. 내가 백 점을 맞아 온 날이었다.아이고, 우리 딸 잘했네. 일주일만 기다려.엄마의 손놀림은 더 빨라졌다. 엄마는 계획한 일주일을 다 채우지 않았다. 이틀 먼저 내 옷은 완성되었다. 내게 새 스웨터를 입히며 함박웃음을 거두지 못하던 엄마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엄마를 생각하다 벌집무늬가 흐트러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그를 불러 세우고 싶다. 목도리로 그의 목을 폭 감싸고 싶다. 언제나처럼 나를 보며 웃는 모습이다. 넌 참 좋은 내 친구야. 그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감은 눈 속에서만 또렷한 그다. 눈을 뜨면 이내 사라지는 그. 내 목에 목도리를 둘러보았다. 길이는 짧고 폭이 너무 넓다. 거울 앞의 내가 목에 깁스를 한 것 같다. 좀 더 따뜻하라고 두 겹으로 떴더니 너무 뻣뻣했다. 마감한 코를 죄다 풀어 되감기를 시작했다. 엄마는 늦가을이 되면 집안을 거두는 일 외에는 늘 뜨개질이었다. 내 옷을 뜨는 엄마 주변을 나는 기분 좋게 맴돌았다. 헐렁한 옷 대신 날선 맵시의 스웨터를 빨리 입어보고 싶었다. 엄마는 항상 조금 큰 새 옷을 사왔다. 키가 클 것을 예비해서다. 하지만 뜨개옷만은 내 몸에 꼭 맞게 떴다. 뜨개옷은 되풀어서 다시 짤 수 있다. 쌀쌀한 바람이 불면 한 해 동안 자란만큼 내 뜨개옷은 작아져 있었다. 엄마는 작아진 스웨터를 풀어 실뭉치로 감았다. 라면발 같은 실을 끓는 주전자 뚜껑에 끼워 주둥이로 뽑아냈다. 스팀을 받은 털실은 다시 살아 곧게 펴진다. 실뭉치를 풀어주는 건 내 몫이었다. 꽈배기 무늬 유행이 벌집무늬로 바뀌면 내 스웨터는 또 풀렸다. 유행에 쳐진 털옷은 입어 본 적이 없다.실을 펴는 주전자의 뜨거운 김은 엄마의 가슴에 고인 한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굽이굽이 마음속에 쌓인 한숨은 무엇으로 곧게 펼까.다시 떴던 목도리가 완성되었다. 그냥 심심해서 떠 봤어. 실뭉치가 굴러 다니 길래그의 덤덤한 표정이 맹꽁이 같다. 그래도 나는 추운 날 항시 그의 목에 감겨있기를, 그리고 잠시라도 내 생각을 하며 목에 두르기를 바랐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을 목도리 올올에 담았다면 거짓일까. 그날 전화선을 타고 온 그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무섭도록 쿵쾅 찧었다. 그가 긴 여행을 갔다 온 후 처음으로 넘어 온 전화 목소리였다. 즐거운 긴장이 몰려와 내 주변의 공기가 팽팽해지는 걸 느꼈다. 반가운 김에 내 응답이 떨렸나보다.목소리가 왜 그래? 감기 들었니?아니 그냥. 저.아, 그래. 뭐 하나 물어볼 게 있어. 그 친구 전화번호 바뀌었더라. 네가 친하니 알 것 같아서으응내 심장은 이내 끝을 모르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친구의 새 번호를 더듬더듬 알려주었다. 며칠 후 친구가 전화를 했다. 그 사람이 고백을 했다.고 설레는 목소리였다. 내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내 눈에는 뭍사람들 속에서 그만 보였다. 그가 나에게 건넨 말 하나하나가 커다랗게 다가왔었다. 나는 내 마음의 방 속에 그의 말들을 꽁꽁 가두고 수시로 꺼내어 들었다. 그를 알고부터 무의미했던 내 삶에는 생기가 돌았었다. 의미가 커질수록 그의 방도 커져갔다. 그 방에 푸른 물이 점점 차오르더니 넘실대며 아름답게 빛났다. 그때부터였다. 그리움이란 당의정이 내 입 속에 들어온 것은. 달달한 맛에 빠져들었다가 그 쓰디쓴 약의 속살에 치를 떨곤 했다. 다시 뱉고 싶었지만 이미 내 속은 달고 쓴 맛으로 꽉 차 있었다.그는 전화 이후로도 나를 보면 그전과 똑같이 환하게 웃었다. 나는 내 속의 모든 것들을 금방 비우지 못해 허덕이고 있었는데.나는 대바늘이 아닌 코바늘로 자동차 방석을 뜨기로 했다. 엄마에게 일부러 복잡한 무늬를 부탁했던 내 마음을 그는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너무 어려운 무늬였다. 1분 1초라도 설사 그게 그에 대한 생각일지라도 다른 생각을 하면 뜬 만큼 다시 풀어야 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해서였을까. 한 줄이 완성되기도 전에 무늬는 흩어졌다. 생각의 조그만 포말은 파도가 되어 어느새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한참을 허우적거리면서도 손가락이 일정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나는 자동인형처럼 코를 떴다. 절정에 이른 파도가 힘을 다하여 사구(砂丘)를 밀쳐 내고는 바다로 되돌아갔다. 그러면 또 내 손에는 엉망으로 뒤틀려버린 무늬만 남아 있었다. 방석을 다 완성하기까지 나는 수 없이 풀고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해가 져도 아빠가 돌아오지 않을 때면 엄마의 뜨게 무늬는 사정없이 흩어졌다. 아빠는 술 속이 좋지 않았다. 술을 마신 날은 집안이 시끄러웠다. 엄마는 돌부처처럼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았다. 그런 날의 엄마는 굳은 표정으로 뜨개질만 하였다. 한숨소리에 실을 엮었다. 엄마는 뜨개질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뜨개질을 했다는 걸 나는 방석을 뜨면서 깨달았다. 털실과 바늘대와 손놀림의 반복, 그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끼어들면 스웨터고 방석이고 무늬는 엉망이 된다.코와 그 옆의 코가 맞닿아 무늬가 되기까지 나는 실을 짜는 게 아니라 생각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짜고 있었다. 점점 머릿속은 비워지고 그에 대한 감정이 다 정리될 때쯤 내 생각의 너비만큼 큰 방석이 완성되었다. 나는 방석을 그의 차에 깔아주었다. 비로소 그를 향한 내 마음도 실려 보냈다. 그에게 방석을 준 후 열네 번의 봄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 그에게 줬던 방석이 낡기도 전에 그는 나를 잊었을 것이다. 방안의 먼지가 햇빛의 그물망에 걸려 끝없이 떠돈다. 이리저리 부유하다 언제든 내 속에 들어와 뿌옇게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뜨개바늘을 잡을 것이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4.01.02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소감] "묵묵히 내면의 여정 따라 달릴 터"

언제부터였을까. 마음속에 빈방 하나가 생겼습니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였습니다. 점점 커져 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습니다.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절박함 속에서 수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잊혀진 기억들을 찾아 헤맸습니다. 밥을 먹으며 책을 읽으며 거리를 걸으며 찾고 또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만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젖혔을 때 아픈 지난날들이 어둠 속에서 별이 되어 빛나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수필을 쓴다는 건 그 별을 하나씩 따서 허기의 공간에 들이는 일이었습니다. 매번 뒤엉켜 있는 단어의 뭉치에서 실 한 가닥을 뽑기까지 쓰고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그 실로 남루한 나의 일상을 기웠습니다. 다시 꿈을 꾸었고 오래 기다릴 생각이었습니다. 당선 소식은 준비운동을 채 끝내기 전에 울린 마라톤 출발 신호 같았습니다. 설레면서도 두려웠습니다. 묵묵히 내면의 여정을 따라 성실하게 달리겠습니다. 오늘의 저를 만들어준 모든 인연들이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내 동생들 지연, 상율이와 고마운 시댁어른들께도 이제 면목이 섭니다. 응원해 준 임정, 현정, 순희, 세영, 소현 씨, 미숙 언니, 승미 언니, 나의 소중한 벗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귀한 가르침을 주신 박영학 교수님, 채규판 교수님과 문우들께 감사드립니다. 신공 카페 회원들과 영광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힘들어 할 때마다 용기 주시던 박시윤 수필가님께 고마울 따름입니다. 손잡아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전북일보사에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남편에게 참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보다 더 기뻐할 유일한 사람, 엄마에게 못했던 말을 전합니다. 엄마 고마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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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4.01.02 23:02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심사평] "한땀 한땀 '뜨개질 구성' 돋보여"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수필이라고 했다. 옳은 말이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붓 가는 대로 쓰다 보면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주관적인 감상이나 관념을 장황하게 나열하기 십상이다. 이야기의 전후맥락을 살피지 않고 신변잡기를 단선적으로 풀어놓기 일쑤다. 읽는 맛을 낸다고 멋스러운 단어를 고르는 일에 집착하기도 한다. 자신이 쓴 글로 읽는 이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어깨동무를 하고 가야 하는데, 제 흥에 도취되어서 멀찍이 앞서가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니 읽는 이는 감동을 얻기 어렵다. 적잖은 공을 들여서 썼을 것으로 짐작되는 박금아(가명)의 <유산>, 박세정의 <슬픔은 내 삶의 원천>, 허숙영의 <화로>, 윤미애의 <박>, 전성옥의 <가로수의 마지막 여름>, 박시윤의 <빗살무늬토기>, 이정인의 <마당>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 그랬다. 이 일곱 편의 수필을 쓴 이들은 하나같이 사물을 바라보는 눈길이 깊고 따뜻하다. 문장력도 웬만큼 갖추었다. 그건 분명 수필가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작품들에는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삶의 진솔한 얘기가 부족했다. 당선작으로 고른 한경희의 <뜨개질>은 그런 점에서 앞선 일곱 편과 달랐다. 제목 그대로 이 작품의 글감은 뜨개질이다. 작중화자가 어린 시절에 곁에서 보았던 어머니의 뜨개질하는 모습과, 과거에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위해 손수 뜨개질했던 일을 한 땀 한 땀 뜨개질하듯 구성한 점이 돋보였다. 한때 그를 사랑했던 작중화자의 애잔한 감정에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보았던 인고의 시간을 교차시켜서 잘 녹여내었다. 읽는 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를 조금 더 유연한 문장으로 빚어낼 수 있는 능력만 보완한다면 앞으로 좋은 수필을 쓸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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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4.01.02 23:02

[2014 희망전북 10대 어젠다] 응답하라, 책 읽기 ● 프롤로그

전북도민들에게 책읽기를 제안합니다. 단순한 독서가 아닌, 독서토론입니다. 토론은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입니다. 독서토론이 이뤄지는 도서관과 작은도서관 등은 스스로 깨닫는 과정을 알아가는 배움터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전북지역의 독서인프라를 꼼꼼하게 들여다보겠습니다. 새로운 책읽기, 새해부터 시작합시다.시대가 불확실하고 미래에 관한 전망이 어두울수록 근원에 대한 관심은 증폭된다. 그 근원 찾기 중 하나가 책읽기다. 오랜 세월 그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은 책은 인생의 지혜를 전하고 미래에 대한 삶의 나침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한국사회는 정작 책과 교감하는 시간이 점차 줄고 있다. 전북만 하더라도 지역을 대표했던 서점들이 갈수록 위축되고 젊은 세대들이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탓에 출판시장에 냉기가 돈 건 꽤 오래 전이다. 이에 본보는 앞으로 10차례에 걸쳐 책 읽기와 관련한 전북의 인프라를 살펴보고 지금 이 시대에도 왜 책읽기가 필요한 것인지 질문하고자 한다. △전북 서점출판가는 불황불황지난 10월 출판 시장에 출판사인 쌤앤파커스의 매각설이 떠도는 해프닝이 빚어졌다. 쌤앤파커스는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스님), 장사의 신(우노 다카시)을 통해 최근 3년간 가장 많은 베스트셀러를 출간한 출판사 중 하나다. 해마다 수백여 개의 출판사가 생겼다가 문 닫는 현실에서 돈 버는 출판사의 매각설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 것은 그만큼 출판시장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2000년 3400곳이 넘었던 전국의 서점은 지난해 1700개까지 줄었다. 전북의 출판 시장 역시 깊은 불황의 늪에서 좀처럼 빠져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역의 중소 서점과 토박이 책방출판사도 10년 가까이 위기에 놓였지만 뾰족한 대안마저 없는 게 현실이다. 1963년부터 시작된 홍지서림은 본점과 효자점아중점삼천점 등 분점으로 골목 상권에 자리잡고 있으나, 서신점은 이미 간판을 내렸다. 지난 1970년부터 호흡해온 민중서관고 이미 2011년 본점은 문을 닫은 채 서신점평화점 등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 25년 된 군산 한길문고는 폭우로 10만 권이 잠긴 시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자원봉사로 다시 문을 여는 기적을 일구기도 했지만, 알라딘 중고서점의 입점 등으로 인해 지역 서점가는 내리막길에 놓여 있다. 양계영 홍지서림 대표는 10년 전만 해도 2080 원칙이 지켜졌다. 상위 20% 출판사가 시장의 80%를 지탱한다는 것이라면서 그러나 지금은 상위 5% 출판사가 시장의 95%를 잠식한다고 밝혔다. 더욱이 도서정가제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다 보니 책의 50%가 온라인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면서 심지어 유명한 출판사의 경우 온라인 서점에만 공격적 마케팅을 강구하고 선인세를 높여 베스트셀러 작가를 확보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질 뿐 지역 서점과의 거래를 끊은 지 꽤 됐다고 했다. 신아출판사 서정환 대표도 지역을 대표하는 출판사가 건재하는 것이 전북 문단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여겨 사명감으로 버텨왔다. 그러나 기획력이 좋거나 시장에서 반응이 좋을 만한 책의 경우 공격적 마케팅 등을 이유로 작가들이 수도권 출판사에 맡기려고 한다면서 결국 좋은 책을 만들어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도서관은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남미의 작가 보르헤스는 천국을 상상해보다가 천국은 도서관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낙원까진 아니더라도 빈부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도서관은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이다. 돈 없이도 책을 얼마든지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도서관은 정보격차를 줄이는 핵심 민주기구와 다름없다.전북도는 2004년부터 생활 속 문화환경 조성을 위해 작은도서관 조성사업을 추진하는데 고심을 거듭했다. 현재 14개 시군에 127개 작은도서관이 조성됐다. 다만 가장 시급한 건 운영의 활성화다. 도서관 건립이 정치적 상상력과 관계된 문제라면, 그 운영과 프로그램은 문화적 상상력과 관계된 문제다. 핵심은 전문성 갖춘 인력의 확보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 전북도가 고민 끝에 내놓은 묘책은 독서지도도서논술 등 관련 자격증을 가진 문화기획자를 배치하되 인건비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작은도서관에 배치될 인력 중 관련 자격증을 가진 105명(91%)이 됐다. 작은도서관 활성화 여부는 아직 장담할 순 없지만, 완주 기찻길 작은도서관(이하 완주도서관)의 사례를 보면 낙관적인 전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완주도서관이 도내 최우수 작은도서관으로 꼽히게 된 것은 주민 참여 주도로 이뤄진 재능기부 프로그램 덕분이다. 주부독서회 활약으로 독서회 회원 중 영어강사, 퀼트공예 자격증을 갖춘 이들이 자연스레 재능기부를 하게 되면서 수요자 중심의 독서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점이 높게 평가받았다. 완주도서관의 단골이용자인 김상규씨(75)도 눈과 귀가 어두워져 고전을 읽고 싶어도 여의치 않았다면서 아이들의 추천으로 만화로 된 고전을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며 웃으며 말했다. 5년 전부터 매일 아침 20분씩 책읽기를 독려하고 있는 전북대 사대부고 장남석 교장는 과거엔 독서였다면, 이제는 토론이라면서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는 과정은 책 읽기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이를 토대로 학습의 기본이 되는 사고력 훈련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전북도의회도 책읽는 학교 만들기를 거들고 있다. 지난해 책의 날을 기념해 학교 독서교육 조례를 발의해 통과시켰다. 조례에는 독서교육 활성화를 위한 전담부서 설치, 독서행사 활성화, 행정 지원의 근거 등을 담고 있어 도서관의 장서인프라 확충, 예산 편성에 도움이 되고 있다. 이처럼 학교의 독서 문화를 중요한 정책 의제로 삼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사회의 기본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일 것이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4.01.02 23:02

김유석 시인, 8년만에 두 번째 시집 〈놀이의 방식〉

‘레일처럼 깔고 나아간다, 그것들은 / 그림자를 / 문양처럼 몸에 두르고 다닌다. // 몸통이 기다란 것들, / 무언가 생략된 듯한 형체의 것들은 / 꼬리를 밞으면 쭈욱 벗겨질 것 같은 / 징그러운 비밀을 가지고 있다(‘패러독사’중)‘유혈목이가 삼키던 두꺼비를 꾸역꾸역 게워내고 있다. / 독으로도 삼키지 못하는 독(‘독사서독’중)첫 시집 이후 8년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낸 김유석 시인(53)이 잔뜩 ‘독’을 품었다. 시집 〈놀이의 방식〉(시인동네 시인선)의 제목이 주는 널널한 느낌과 달리 강렬한 이미지로 긴장시키는 시들로 엮어졌다.시집 첫 작품부터 범상치 않다. ‘나를 연민하는 자 / 독하게 두들겨 패라’(‘북어’전문)고 시인은 들이댄다. 그저 아름답고 고운 모습들을 정겹게 마주할 수 있는 시는 그의 이번 시집에 없다. ‘달팽이’를 통해 나선의 미로와 고행, 뫼비우스띠를 연상한다. 심지어 ‘감자’마저도 ‘애꿎은 기생나비들이나 꼬여 먹이다가 나머지는 스스로 시들어가는 일에 쓴다’고 탄식한다.표제작인 ‘놀이의 방식’에서도 시인은 거미·사마귀·개미·카멜레온·해파리 등을 등장시켜 냉소한다.문학평론가 이형권씨는 시집 해설을 통해 “김 시인은 부조리와 모순으로 미만한 이 세상을 냉소하면서 날카로운 비판적 언어를 구사하는 데 능수능란하다”고 했다. “그의 냉소는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저항의 일종이자 그러한 세상너머를 꿈꾸기 위한 노둣돌이다. 시인은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한 현대사회를 독 혹은 독사의 세상이라고 명명하면서 냉정한 고발정신을 발휘한다”고 보았다. 세상에는 독을 품고 타살의 욕망으로 가득하다는 사실, 그들은 또한 비정상성·잔학성·집단성·허위성·모순성·작위성·나르시시즘·비굴함·동족상잔 등의 속성을 간직한다는 사실, 시인은 이러한 사실들을 접하면서 비판적 시니시스트가 된다는 말로 그의 시세계를 압축했다.시인 자신 또한 “부조리는,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또 다른 부조리를 낳는다. 그런 삶에 관한, 나는 서투른 시니시스트일 것이다”는 짧은 말로, 사회 부조리에 대한 냉소적 관찰자임을 드러냈다.이에 대해 평론가는 ‘서투른 시니시스트가 아닌, 우리시대 진정한 시니시스트로서 주목할 만한 시인이다’고 했다. 시인의 시니시즘은 대상을 향한 핀잔의 포즈가 아니라 대상을 극복하기 위한 공격의 형식이라고 본 것이다. 시인의 냉소는 부조리한 세상을 넘어서기 위한 디딤돌이기에 그 너머의 세계를 향한 열망과 내통한단다.김제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 시인’이기도 하며, 19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와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됐다. 시집 〈상처에 대하여〉(현대시)가 있다.

  • 문학·출판
  • 김원용
  • 2013.12.2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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