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기록
 정은실 사회활동가 완산칠봉 아래 자리한 셰어하우스 달팽이집을 나와 청년몰의 약속장소까지 가는 길에서 지나치는 골목과 골목에는 그 공간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흔적이 담겨 있다. 이 마을에 오래 살지 않았지만, 그 흔적의 기억을 어렴풋이 가늠해 볼 때면 애틋함이 가득해진다. 100살이 훌쩍 넘은 완산초등학교에 다녔던 수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 뛰어놀던 학교 운동장, 친구들과 오가던 길. 가족들과 산책하며 계절의 변화를 느꼈던 곳, 때로는 연인과의 이별에 아파하며 가로등 불빛도 슬펐던 그 골목. 곳곳에서 마을 사람들의 시간을 가득 품고 있다. 원도심의 골목은 사람들이 떠나고 다시 찾아오고에 상관없이 마을 입구의 오래된 나무처럼 그 자리에서 사람들의 기억을 품고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오래된 나무가 긴 시간을 살아내며 마주했던 햇볕과 바람, 빗방울이 나무를 자라게 하듯이 골목의 집들과 가게, 빈터들이 서로의 햇볕이 되어주고, 그들이 만드는 풍경이 바람이 되어 골목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또한, 골목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주변 환경과 분위기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골목은 완성되어 가면서도 최종적인 완성형이라는 정의 없이 끝없이 변하고 있다.
전주로 돌아와 완산동 살이 1년의 세월 동안 매일같이 마주하는 동네의 풍경이 기억의 단편으로만 스쳐 가는 것이 못내 아쉽다. 내가 사는 동네의 변화를 원도심의 정책적이거나 경제적인 변화 혹은 예고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마주한 이별에 앞서 사라질 수 있는 것과 연계된 안타까운 감정으로 정의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죽기 전까지 항상 어느 공간에 머물며, 시간을 경험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살아낸다. 우리의 삶의 전 과정이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며 다양한 행위를 통해 공간에 많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공간에 남은 흔적은 우리의 시간이자 기억이고 삶이다. 개개인의 삶에서 공간은 집, 학교, 회사, 가게와 같이 특정한 건축물일 수도 있고, 골목, 동네, 마을처럼 전체적인 풍경이기도 하다. 작은 건축물부터 넓은 풍경까지 짧은 순간 안에서 공간은 그대로이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공간은 끝없이 변화하고 있다. 공간의 변화는 물리적인 변화뿐 아니라 기억의 상호작용을 통한 변화를 품고 있다. 우리 삶의 모든 행위는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은 자연스레 사람의 흔적을 갖게 되고, 사람도 공간의 흔적으로 기억을 갖게 된다. 이때 생기는 서로에게 생기는 기억의 상호작용이 사라짐에 대한 아쉬움이다.
몇 해 동안 살았던 집, 매일 출근하는 사무실, 자주 가는 가게처럼 지속해서 머무는 곳은 반복적으로 보는 풍경으로 익숙해져서 새롭게 보지 못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삶의 경험이 모두 다르기에 같은 공간이라도 사용자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고, 쓰임이 달라질 수 있다. 익숙한 공간의 새로운 발견을 통한 낯섦이 우리의 기억을 자극해 새로운 감정과 자극을 만들기도 하며, 공간 안의 사물 또는 사용자인 나에게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 새로운 가치는 공간과 사물과 사람을 다시 보게 하고, 다시 봄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애정을 갖게 마련이고, 이 애정은 애틋함을 넘어 아낌을 실천하게 하는 동기가 될 수 있다.
공간의 기록은 공간의 흐름, 공간의 시간, 공간의 기억을 기록함에 따라 이미 익숙해 매일 스치기만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공간의 새로운 쓰임과 아낌을 만들어줄 수 있다. /정은실 사회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