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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오동진

송준호 우석대 교수 어느 분야든 남다른 성과를 거둔 이들에게는 그만의 노력과 노하우가 반드시 있는 것 아닐까. 맨주먹 붉은피로 맨땅에 헤딩하면서도 눈앞의 이윤보다 고객의 즐거움을 앞세울 줄 아는 you first 마인드로 남부럽지 않게 부를 이룬 많은 이들 가운데 하나가 내 가까운 곳에도 있다. 적어도 등소평보다는 키가 훨씬 큰 그를 나는 속으로 작은거인이라고 부른 적 있는데, 오동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내 친구 얘기다. 금속회사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3년 만에 퇴사한 그는 서른 살 비교적 어린 나이에 석재 절단용 톱을 생산하는 작은 공장 하나를 동업으로 꾸렸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은 동창생들 사이에서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사업가로 인정받고 있다. 이 친구가 얼마 전에 작은 책 하나를 펴냈다. 그간 몸소 부딪치거나 생각한 바를 정리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오늘을 만든 숨은 까닭을 그간의 여러 술자리를 통해 웬만큼은 알고 있었는데, 막상 책장을 넘기다 보니 새삼스레 눈길을 끄는 대목이 하나 있었다. 1984년 4월,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무렵 나는 도서관을 거의 매일 드나들고 있었다. 드넓은 캠퍼스 제일 높은 곳에 자리잡은 도서관 로비 한쪽에는 그날 발간된 몇 가지 일간신문이 게시되어 있었다. 어느 날인가는 도서관에 들어섰다가 그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중국 덩샤오핑 주석의 생애를 정리한 기사가 보였다. 그 무렵 중국은 개혁개방의 아이콘인 덩샤오핑 주석이 통치하고 있었다. 저 유명한 흑묘백묘 이론을 주창한 덩샤오핑은 시장경제를 적극 도입해서 오늘의 중국 경제를 이룩하는 초석을 다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정규 학교 교육을 하나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신문기자가 덩샤오핑에게 물었다. 주석께서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신 걸로 압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토록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까? 덩샤오핑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매일 두 시간 이상 신문을 열심히 읽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이나 지혜의 대부분은 신문을 통해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이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날부터 지금껏 35년 넘게 하루 한 시간 이상을 할애해서 신문을 열심히 읽고 있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자산이 되어주었다. 나는 지금도 활자신문을 읽어서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읽고 지혜를 얻는다. 기사의 행간에 숨겨진, 학식과 식견이 풍부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공유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좋은 습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건 세상을 살아가는 훌륭하고도 유용한 자양분이 된다. 그걸 꾸준히 실천하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이 생긴다. 또한 성공의 지름길로 들어서는 최선의 방법일 거라고 믿는다. 내 경우는 신문 읽기가 그 역할을 대신해주었다. 활자신문 읽기의 소중한 가치를 한눈에 요약한 대목 아니고 무엇이랴. 그건 공돌이 출신인 그만의 노력과 노하우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던 것이다. 내 친구 오동진이 앞으로 며칠만 지나면 명실이 상부한 예순 번째 생일을 맞는다. 적어도 80살까지는 나한테 밥과 소주를 사겠다고 굳게 약속한 바 있는 이 친구한테 그날만은 내가 술을 한잔 내려고 한다. 우리 앞의 노을빛 고운 나날들을 소주잔에 담아 정겨운 대화를 이어가기에는 아무래도 서해가 넓게 펼쳐진 어느 창 넓은 횟집이 제격 아닐까 한다. /송준호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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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25 16:36

상량, 상량식, 상량문

김병기(전북대 명예교수) 신축하는 전북대학교 컨벤션센터가 멋진 모습을 드러내며 한옥 세 채에 상량식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8월 18일에는 주건물인 컨벤션실의 상량식이 있었고 10월 중에 나머지 두 건물에 대한 상량식도 가질 것이라고 한다. 상량은 한옥 구조의 맨 윗부분에 해당하는 종도리(宗道里)를 이르는 말이다. 종도리는 마룻도리, 마룻대라고도 하는데 서까래를 걸기 이전에 마지막으로 올리는 재목으로서 상량을 올린다는 것은 곧 집의 골격이 완성되었다는 뜻이며 이를 기념하는 의식이 상량식이다. 상량의 한 면에 건물이 영원히 보존되고 사는 사람이 큰 복을 받기를 축원하는 상량문을 쓴다. 양 끝에는 대개 용(龍)자와 귀(龜)자를 쓰고, 이어 상량을 올리는 연월일시를 쓴 다음, 그 아래에 두 줄로 축원의 문장을 써 넣는데 이게 곧 상량문이다. 대개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 비지상지오복(備地上之五福)이라고 쓰는데 하늘의 3광(해, 달, 별)에 부응하여 땅위에 5복을 갖추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상량문은 반드시 앞 구절과 뒤 구절의 서로 대응하는 각 글자(應-備, 天-地, 三-五, 光-福 등)가 같은 품사로 이루어지는 대구(對句)로 지어야 한다. 집을 짓게 된 내력이나 의미를 자세히 기록하여 보전하고자 할 때는 장문의 상량문을 따로 지어 오동나무 상자에 담아 상량에 홈을 파서 그 안에 넣고 뚜껑을 덮는다. 이런 상량문은 훗날 그 집의 역사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필자는 전북대학교 컨벤션센터에 들어서는 세 채의 한옥에 상량문을 짓고 또 글씨를 썼다. 컨벤션실의 상량문은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이집천하만사함초상(集天下萬士咸招祥), 비지상지오복(備地上之五福)이성세계일화공장춘(成世界一花共長春)이라고 지었다. 하늘의 3광에 부응함으로써 천하의 많은 선비들을 모아 함께 상서로움을 불러들이고, 땅위의 5복을 구비함으로써 세계가 하나의 꽃을 피워 다 함께 봄날을 오래 누리세라는 뜻이다. 앞부분의 응천상지삼광, 비지상지오복은 상용문투를 그대로 따오고 뒷부분만 지어 붙였다. 컨벤션실이 장차 천하의 학자들이 모여 세계평화를 논의하는 장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글이다. 커피숍 건물에는 상용문투 뒤에 득광명정대지정신(得光明正大之精神), 온함영저화지아취(蘊含英咀華之雅趣)라는 상량문을 썼다. 광명정대한 정신을 얻고, 좋은 문장을 가슴속에 새기는 고아한 흥취를 쌓아가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세계의 석학들이 커피숍에 모여 광명정대한 정신으로 고상하게 담론하기를 축원하는 마음으로 지었다. 또 다른 한 건물에는 양백년청풍지상금(養百年淸風之爽襟), 개만대태평지성세(開萬代太平之盛世)라고 썼다. 영원히 맑은 바람이 부는 상쾌한 가슴을 함양하고, 만대로 이어지는 태평성세를 열게 하소서라는 뜻으로 천하의 학자들이 청백한 마음으로 태평성세를 열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혹자는 굳이 한문으로 써야할 이유가 뭐냐고 할지도 모르나 한문이 아니고서는 좁은 공간에 이처럼 함축적인 말을 써넣을 수 없다. 우리에게 한문은 영어권의 라틴어와 같은 의의가 있음을 헤아려 한문을 내치기보다는 오히려 배우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가장 과학적인 소리글자인 한글과 의미심장한 뜻글자인 한자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큰 복을 받은 나라임도 자각해야 할 것이다. /김병기(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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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8 16:39

알바트로스의 꿈

송희 전 전북시인협회장 <알바트로스의 꿈>은 크리스 조던의 작품 중 가장 사랑받는 다큐 영화이다. 크리스 조던(Chris Jordan 1963~ 미국)은 문학과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활동하기도 한 작가이다. 그는 미국과 전 세계의 미술관, 화랑에서 100회가 넘는 개인전과 그룹전을 가졌으며, 한국에서는 첫 전시이다. 팔복예술공장에서 크리스 조던의 사진전을 감상했다. 그의 렌즈는 우리가 막대하게 소비하고 버리는 쓰레기에 고정되어 있다. 매분 마다 미국에서 낭비되는 전기 32만 킬로와트, 10초마다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비닐봉지 24만 장, 미국 한 나라에서 30초마다 소비되는 10만 6000 개의 캔, 매일 농약으로 죽는 새의 숫자 18만 3000 마리, 매주 미국에서 접수되는 개인 파산 건수, 2만 9000 등등을 백열전구, 폐기된 핸드폰, 버려진 신용카드 등으로 꾸몄다. 명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던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등의 그림에 패러디한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환경오염 때문에 어떤 행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오래 전부터 외쳤다. 그런 외침을 듣고 사람들은 쓰레기 하나라도, 화학제품 조금씩이라도, 줄이고 있는지 궁금하다. 누구라도 오염을 줄이고 있다면, 모두 실천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살아날 거라는 희망 때문이다. 그의 사진전과 영화는 천 마디 외침보다 폐부에 깊숙이 닿았다. 무딘 감각을 두드리며 환경오염이 인간의 책임임을 명료하게 전해 주었다. 작가는 인간이 전 지구적 생명의 그물망에 가하는 거대하고도 다층적인 파괴의 양상이 있다고 전한다. 또한 현대의 대량소비문화에는 누구도 제어하기 힘든 군중심리가 숨어 있다고 토로한다. 익명을 핑계 삼아 아무도 책임지려 들지 않는 집단적 환각 상태 속에서 우리는 지구 생명체와 우리 자신의 영혼까지 회복 불가능하게 만드는 폐해를 끼치고 있다. 열린 눈으로 세계의 고통을 함께 직시해야 협력, 인간적 사랑에 기초한 글로벌문화 구축이라는,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촉매가 될 것이다며 이런 미래를 꿈꾸기에 작가는 힘겨운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외침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가슴을 두드릴 것인가. 태평양 한 복판 미드웨이 섬을 8년 간 오가며 알바트로스라는 새를 관찰한 작가는 부모 새가 물어 나르는 먹이를 먹고 아기 새가 죽어가는 걸 목도한다. 왜 죽는 줄도 모른 채, 죽어가는 것이다. 바람이 죽은 새의 살을 서서히 데려간 뒤, 속을 보여줬을 때, 새의 몸속에는 병뚜껑, 라이터 등 온갖 플라스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 세계 해양에는 2015년 기준, 1억 5천만 톤의 쓰레기가 있다고 한다. 그 물과 물고기를 먹고 사는 우리 몸속에도 이미 미세 플라스틱이 스며든 지 오래이다. 그래서 계속 희귀병이 생겨나는 게 아니겠는가. 또한 충격적인 말도 들었다. 산모가 출산할 때 양수에서 세제와 락스 냄새가 진동한다는 것이다. 석유 찌꺼기로 만든 그 독한 것을 어떻게 사용했길래. 아픈 아이가 탄생하는 것은 어른의 책임이다. 용기 뒷면에는 써야할 용량이 표기돼 있는데, 보통은 그 양보다 더 넣는다. 무의식적으로 많이 쓰고 버릴 때, 본인이 자기의 생명을 해치고 있는 것이다. 친환경 제품을 사용하자. 쓰기 전에 1초만 생각하자. 의식으로 먹고, 의식으로 사용하고, 의식으로 버리자. /송희 전 전북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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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1 16:49

힐링 시네마, ‘정화적’ 영화보기

이승수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회장 정화적 영화 보기란 영화관람을 통해 기쁨, 슬픔, 분노, 우울감 등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웃고, 울고, 화를 내다보면 감정이 더욱 증폭되고 내면의 억압된 감정을 방출하는 정서적 환기(Emotional Ventilation)를 느낄 수 있다. 이른바 카타르시스(Catharsis, 淨化)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지금도 후련함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당시는 특히 비극〔슬픔의 정서〕의 정화적 힘이 강조되었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해 우울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답답함, 불안과 두려움, 무기력 등. 전문가들은 지금 내가 왜 우울한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감정을 관리하는데 영화도 효과적인 도구임을 강조하며 치유 요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첫째는 감정의 승화이다. 영화를 보면서 체면 보지 말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억눌림을 승화시킨다. 여기서 승화란 정서적 긴장이나 원초적 욕구를 타인과 사회가 용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형시키고 적응하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 영화 <플랜맨>은 강박과 우울에 절어 사는 한 청년을 조명한다. 자기 프레임에 갇혀 직장 생활도 사랑도 원만하지 않아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인데, 영화는 상담 장면을 계속 보여주며 문제를 탐색하고 해법도 제시한다. 둘째는 심리적 위로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관객과 마찬가지로 삶의 여러 문제로 고민하고 고통받는다. 예술치료가 닐은 고통이 들어오는데 내보내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 우리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는 서번트 스킬인 천재 피아니스트 진태와 그의 외제(外弟)인 한물간 복서 조하가 나온다. 엄마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가율은 형제가 꿈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다. 모두 몸이 아픈데. 영화 내내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이 이들을 감싸준다. 셋째는 대리만족이다. 영화의 요소와 메시지는 고통받는 현실과 여러 가지 문제로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도록 돕는다. 정서적으로 고양된 상태에서 현재 문제와 결부된 감정들을 탐색할 힘을 얻는다. 영화 <조커>가 세상에 나오자 많은 사람이 열광했다. 뉴욕시 브롱스 난개발을 배경으로 했다는 영화는 사회적 모순에 대항하는 광대 아서 플렉을 앞세워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을 자행한다. 혼란의 가장 큰 미덕은 공평함이라 했던가. 영화에서 Joker(우스갯소리를 잘하는 사람)는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사람이다. 관객은 이런 모순을 보며 자기 분노의 실체를 알아차리게 된다. 감정과 정서는 문화와 관습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물려받은 게 극기복례(克己復禮)다. 감정이나 욕심, 충동 따위를 이성적 의지로 눌러 이기자는 것. 화병(火病)이 자기 소진 적 신경증과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삐친 감정을 자주 삼킨다. 영화 <이퀄리브리엄>에는 감정 없이 이성만으로 살자고 주장하는 세력이 등장한다. 전쟁도, 이기심도, 질투도 없는 세상. 감정을 느낀 자는 처형 당한다. 당신은 왜 살지? 심문자가 묻자 여인이 답한다. 느끼기 위해서요. 그것은 숨 쉬는 것만큼 중요해요. 사랑이 없다면, 분노나 슬픔이 없다면, 숨 쉬는 것은 시곗바늘이 내는 소리와 같을 뿐이에요. 감정은 사람의 활동을 뒷받침한다. 고통이 들어오는데, 내보내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승수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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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04 16:39

세상에 대한 예의와 범절

송준호 우석대 교수 책 한 권을 다시 읽었다. <비밀정원>이라는 제목의 장편소설이다. 제4회 혼불문학상 당선작인 이 소설은 노관이라는 이름의 유서 깊은 종갓집을 배경으로 가문의 질서를 거역할 수 없어서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만 남녀의 올곧고 강렬해서 더욱 안타까운 모습으로 다가온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문학작품을 읽으면 교훈과 미적/언어적 감흥 두 가지를 동시에 얻게 된다는 걸 아주 오래전 <문학개론> 강의시간에 구체적으로 배웠다. 그 가운데 소설은 작가가 그려낸 인물의 독특한 성격이나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의 힘을 빌려서 간접적으로나마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실제로 그걸 읽다 보면 작중인물의 몇 마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곤 한다. <비밀정원>에도 그런 게 있었다. 젊었을 때 경계해야 할 것은 무지와 천박이란다.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고 예절을 익히렴. 예절이란 단순한 생활 범절을 넘어서 세상을 예우함을 말하는 거란다. 사람은 물론이고 자연과 사물에 대한 애정과 온순한 마음가짐이 바로 예절이지. 나는 그의 조카 요와 함께 주인공 율이 삼촌이 건넨 이 말에 귀를 기울이며 거기 적힌 활자에 눈길을 잠시 멈추었다. 무지와 천박을 경계하라는 말은 일부러 못 본 체하고 지나쳤다. 이제는 젊었을 때를 훌쩍 지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오만해서거나. 내 마음의 눈길을 붙든 말은 세상을 예우함하고 온순한 마음가짐이라는 두 구절이었다. 세상을 예우할 줄 아는 온순한 마음가짐을 몸에 배도록 익히라는 것, 언제 어디서든 그처럼 낮은 자세로 사물과 사람을 대하면서 살아가도록 노력하라는 것. 그 대목을 속으로 몇 번 더 읽다가 나는 책을 잠시 내려놓았다. 이십여 년 전에 들었던 말씀 하나가 마치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되살아나서였다. 지금 일하고 있는 대학의 전임교수 발령을 앞두고 나는 학과의 어른들 가운데 한 분인 정양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그분이 사시는 아파트를 방문했다. 시골집 골방처럼 퀴퀴한 냄새가 배어 있는 서재로 내 손목을 이끄신 선생께서는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다면서 교수가 되신 걸 축하한다는 덕담부터 꺼내셨다. 그런 다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끝에 선생 특유의 굵고 낮은 소리로 내게 이런 당부 말씀을 들려주셨다. 우리나라 교수들은 사회적으로 대접을 비교적 높게 받는 편이라고, 누릴 수 있는 게 참 많은 직업이라고, 그럴수록 연구하고 학생들 가르치는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머리를 꺼낸 선생께서는 내게 따뜻한 시선을 건네면서 이렇게 덧붙이시는 것이었다. 오로지 혼자만의 노력으로 교수가 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말았으면 해요. 그 어려운 공부를 해낼 수 있는 재능을 부모님께서 물려주셨지 않습니까. 송 선생의 오늘이 있기까지 옆에서 희생하고 도움을 준 사람들의 정성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우리 사회 도처에는 교수가 가진 역량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참 많지요. 그들에게 더욱 낮은 자세로 다가가도록 하세요.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눠 쓰는 일이야말로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도리이고 예의가 아닐까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돌이켜보니 그날 그 어른이 내게 들려주신 말씀도 세상을 예우하는 온순한 마음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바로 교수이기에 앞서 더불어 살아가는 한 개인이자 사회인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예의와 범절이었던 것이다. /송준호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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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27 16:28

광개토‘대왕’이 아니라 광개토‘태왕’으로 칭해야 할 때

김병기(전북대 명예교수) 지금 서울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단체인 한국서예단체총연합회(서총)가 기획한 「광개토대왕비-필혼을 깨우다」전이 열리고 있다(10월 30일까지). 우리 민족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의 금석문인 광개토대왕비에 담긴 서예의 혼을 이 시대에 다시 느껴보자는 취지를 담은 전시이다. 한국의 대표서예가 160여명이 광개토대왕비를 주제로 쓴 가로100세로240(㎝)의 대형작품을 전시한다. 서예의 고장 전북의 도민으로서 관람해 봐야 할 전시이다. 광개토대왕은 18세에 등극하여 39세에 서세할 때까지 21년 동안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우리 역사상 가장 넓게 영토를 확장하여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중심세력이 되게 한 왕이다. 이러한 부왕의 훈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 장수왕은 거대한 훈적비를 세웠는데 비석에는 대왕(大王)이 아니라 태왕(太王)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대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일까? 대왕과 태왕은 같은 말일까? 비석에 새겨진 바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의 정식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처음의 국강상은 나라의 언덕 위라는 뜻으로서 왕의 묘가 자리한 곳을 밝혔다. 다음의 광개토경은 국토의 경계를 널리 넓히신이라는 뜻이고, 평안호태왕은 나라를 평안하게 하신 좋고 크신 왕이라는 뜻이다. 전체를 연결시켜보면, 나라의 언덕 위에 묻히셨으며 국토의 경계를 널리 넓히셨고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린 좋고 큰 왕이라는 뜻이다. 이 시호를 줄여서 우리는 광개토대왕이라고 불러왔는데 비문에는 분명이 태왕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다. 太는 大보다 훨씬 크고 강한 개념이다. 대왕은 제후국의 왕을 높여 부르는 칭호이고, 태왕은 황제의 지위에 비견되는 칭호이다.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영락이라는 연호를 독자적으로 사용한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당시 국제적으로 황제에 비견할 만한 지위를 가진 왕이었기 때문에 비문에 태왕이라고 새긴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광개토태왕이라고 불러야 한다. 중국이나 일본은 결코 광개토태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광개토 즉 나라의 경계를 널리 넓혔다는 뜻은 곧 고구려의 영토가 현재의 중국 땅 깊숙이까지 들어왔었다는 뜻이니 중국은 물론 일본도 광개토라는 말을 사용할 리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호의 끝 세 글자를 따서 호태왕(好太王)이라고 부른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광개토왕이라고 기록한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줄곧 왕이라는 칭호로 불러왔다. 1880년대 초, 광개토태왕비가 발견되었을 때 비문에 분명히 태왕이라고 새겨진 것을 확인한 후에도 일제는 광개토태왕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고, 우리 또한 태왕으로 고쳐 부르지 않았다, 이번에 광개토태왕비 서예전을 기획한 서총도 관습에 따라 자연스럽게 광개토대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런 관습은 이제 버려야 한다. 비문에 황제와 동격인 태왕으로 새겨져 있는데도 대왕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미안한 일이다. 한국서예의 중흥을 꿈꾸며 기획한 서총의 이번 전시를 관람하면서 우리 함께 광개토대왕이 아닌 광개토태왕의 필혼을 느껴보도록 하자! /김병기(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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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3 16:38

에캄세계평화축제(Ekam World Peace Festival)

송희 전 전북시인협회장 아프가니스탄 유혈사태가 극에 달해 있는 지금, 한쪽에서는 평화를 위한 축제가 한창 준비 중이다. 인간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광경이 영화의 한 장면 같을 뿐 믿어지지 않는다. 에캄세계평화축제가 올해로 4회를 맞았다. 에캄세계평화축제는 평화를 향한 대규모 운동이다. 6천만 명이 넘는 평화주의자들이 참여하여, 세계 평화를 위한 명상과 기도를 한다. 평화로운 상태를 가져오는 것은 지도자 한 명의 책임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재 글로벌 위기를 감안했을 때, 우리 모두가 평화를 향해 하나의 집단으로 일어나야 할 때이다. 글로벌 전염병으로부터 18개월이 지났다. 지구의 어떤 나라는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으나, 어떤 나라는 여전히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 머지않아 글로벌 전염병이 지나가겠지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받은 고통을 잊어버릴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얻은 교훈마저 금세 잊을 것이다. 삶은 이제 전과 같을 수가 없다. 모든 인간은 평화로운 의식으로 깨어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인종으로서의 몸의 모든 형태, 외모, 색깔을 넘어서, 모든 종교적 신념을 넘어서, 우리의 모든 생물학적, 정서적 성향을 넘어서서 하나의 우주적 현실, 즉 하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가능한 일이다. 평화가 어떤 조건에 의해 좌우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평화라고 할 수 없다. 평화가 건강에 의해 좌우된다면 평화가 아니다. 평화가 돈이나 환경으로 좌우된다면 평화가 아니다. 평화란 깊은 내면의 통찰로 얻어지는 존재의 상태이다. 고요함의 용기이다. 어떤 소란이나 시련과 상관없으며 그것도 막아낼 수 있는 힘이다. 문제가 없는 삶은 없다. 그러나 평화가 우리 삶의 기초가 된다면, 모든 배움, 행동 모든 통치의 밑바탕이 된다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진화한 시대가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시대는 오랫동안 조화로운 지구가 지속될 거라고 현인들이 말하던 그 시대이다. 인도의 위대한 현자인 마하라 라마리쉬도 성직자이건, 세속적인 사람이건, 어떤 마을에도 평화가 깃들 거라고 했다. 평화의 열쇠는 우리를 분열시키는 공동체, 카스트제도, 문화에 대한 모든 개념을 놓아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이 평화는 모두에게 가능하다. 러려면 올바른 사고를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통합적인 인식, 남을 배려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상태가 필요하다. 세상의 현자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한결같이 모든 인류가 평화롭게 살도록 일깨워주려 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들은 평화를 위해 명상을 했고, 그들 안에서도 평화를 찾았으며, 평화만이 이 세계가 직면한 도전과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에캄세계평화축제는 인간의 의식을 갈등에서 평화로 바꾸는 글로벌 명상축제이다. 매일 수만 명의 개인과 가족, 사업체, 기관들이 평화를 이루려는 하나의 큰 뜻을 위한 명상을 온라인 Zoom을 통하여 함께 한다. 경제적 불안, 분리심, 지구를 치유하자는 큰 목적에 많은 저명인사들이 동참하고 있다. 세계 영적 지도자이며, 인도 O&O (명상대학과 아카데미)의 설립자인 슈리 크리슈나지와 프리따지에 의해 시작된 이 운동은 세계 평화로 가는 길에서 인류 의식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한다. 자신과 이웃의 평화는 물론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싶은 분들의 참여가 절실하다. /송희 전 전북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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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06 16:31

힐링시네마, ‘지시적’ 영화 보기

이승수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회장 영화 어떻게 봐야 해요? 많이 받는 질문이다. 한 유명 감독은 그냥 보세요라고 말한다. 중국집 가서 짜장면 먹을 때 주방장 불러놓고 무엇을 넣었고 맛의 비결은 무엇인지 묻느냐며. 다양한 관점을 강조한 말인 줄 알지만, 힐링시네마 생각은 조금 다르다. 레시피는 물론 맛의 깊이를 알아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힐링의 숲으로 안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시적, 연상적, 정화적 접근법이 있다고 전술한 바 있으며 먼저 지시적 접근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지시적 접근(The Prescriptive Way)은 영화를 교육적지시적 목적으로 보고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영화를 정보제공의 원천으로 여기며 교훈이나 모델링을 위한 도구로 가정한다. 치유요인을 세 가지로 소개한다. 첫째 객관화이다. 주관적인 시각을 제삼자적 관점으로 돌려 자기를 돌아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경험과 생각을 보며 대리로 세상을 알게 하는 심리적 거리 두기 기법이다.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하는 중학생들에게 영화 <안티고네>를 보여 줬다. 안티고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테베 왕 오이디푸스의 딸이다. 전쟁터에서 죽은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에 모래를 뿌려 장례 의식을 행하였다가 처형당했다. 안티고네는 캐나다 정착을 위해 몸부림치는 한 이민 가정의 여학생 이름이다. 어느 날 큰 오빠가 총에 맞아 절명하고, 작은 오빠가 감옥에 갇힌다. 안티고네는 약자를 마구 대하는 불합리한 사회제도와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다. 둘째 생각과 행동의 명료화이다. 생각과 감정을 보다 잘 이해하도록 돕고 이를 언어화명료화하는 것이다. 처한 상황에 대하여 더 나은 관점을 개발하도록 해준다. 기발하기도 하고 합리적이기도 한 등장인물을 보며 이를 기준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도록 도와준다. 우리 영화 <더 킹>에는 건달 아버지를 둔 말썽꾸러기 고등학생 태수가 나온다. 어느 날 아버지가 검사에게 혼쭐이 나는 것을 보면서 자기도 검사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지독한 노력 끝에 서울대를 나와 검사가 된다. 정치 검사들의 번지르르한 모습에 매료되어 그 길을 따라 걷다가 검찰에서 쫓겨난다. 셋째 모델링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이 자신과 비슷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보여 주고, 다양한 문제 해결책을 제시한다. 캐릭터의 문제 해결방식을 그대로 모사하거나 자신의 문제에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좋은 모델과 나쁜 모델의 변별력을 갖는 게 중요하다. 태국영화 <배드 지니어스>는 시차를 이용하여 SAT(미국 대학입시 자격시험) 국제 커닝을 하는 천재 학생의 심리와 이를 둘러싼 주변 인물의 반응을 다룬다. 주인공 린은 포스터에 대고 나쁘지만 다 하고 싶잖아!라고 쓰고 있다. 중학교 또래 상담에서 나쁘지만 다 하고 싶은 것을 물어보니 게임이라는 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 개인의 생각을 물었는데 사회적 인식을 말하고 있다. 프랑스 영화 <까밀 리와인드>에 나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이 등장한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평정. 그리고 그 차이를 아는 현명함. 주인공 까밀은 삶을 원하는 지점으로 리와인드(되감기) 해줘도 예전처럼 산다. 지시적 접근은 길잡이가 필요하다.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경계, 영화에서 찾아보자. /이승수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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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30 16:32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

송준호 우석대 교수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가진 것을 알아서 주거나 뺏어간 적 없는데도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누군가 얼마나 못마땅한 짓을 일삼으면 그런 소리를 다 할까. 그 반대말은 받는 것 없이 예쁜 사람이겠다. 물론 그보다 훨씬 마음에 차는 건 내가 가진 것을 얼마든지 내주어도 예쁜 사람일 것이다. 동료교수가 부친상을 당해서 고창에 갔다가 후배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전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후의 한적한 국도를 달리는데 이른 가을비가 참 예쁘게 내리고 있었다. 이런 날 저녁에는 파전에 막걸리가 딱인데, 아니 그렇습니까? 후배는 그렇게 말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 말뜻을 모르지 않았지만 가족모임이 잡혀 있어서 나로서는 그와 함께할 수가 없는 게 좀 아쉽고 미안했다. 괜찮아요. 제가 아는 술꾼들 중에 어느 한 친구한테는 틀림없이 연락이 올 거예요. 아니면 뭐, 빗소리 안주 삼아 혼술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죠? 이런 날 술 마시자고 연락하는 놈 하나 없다고, 가끔 투덜거리곤 했던 게 떠올라서 나는 빙긋 웃고 말았는데, 바로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블루투스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후배가 전화로 나누는 이야기를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후배의 친구 하나가 거의 1년 만에 전주를 다니러 왔다. 그 친구는 후배에게 이따가 저녁에 만나서 소주나 한잔 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후배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아이고, 하필이면 이 노릇을 어쩌냐? 사실은 우리 학과 선배 교수님 한 분이 부친상을 당하시는 바람에 문상을 하려고 지금 부산으로 내려가는 중이거든. 밤늦게나 내일 새벽에 돌아올 것 같아서 말야. 자네가 모처럼 와서 연락을 주었는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나로서는 그 말이 좀 의아스럽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통화를 서둘러 끝낸 후배는 그런 내 속내를 눈치채고는 씁쓰레한 미소부터 내비쳤다. 제 고등학교 동창이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를 만나면 한마디로 피곤하고 짜증이 나서요. 듣는 사람 생각은 않고 지 자랑만 실컷 늘어놓기 일쑤거든요. 주식 투자를 해서 얼마를 벌었다느니, 상가 건물 세입자들이 월세를 제때 안 내서 골치가 아프다느니 하는 식이죠. 하긴 그 정도까지는 친구 사이에 못 들어줄 것도 없죠. 그런데 이 친구가 좀 취했다 하면 주위 사람들하고 시비 붙는 게 일이라서.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은 애초부터 세상에 없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연락을 준 친구라 해도 그와 술 한잔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간절히 보고 싶은 사람이 있고, 그런 마음이 별로 안 드는 사람도 있는 것이었다.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문자라도 보내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먼저 연락해 온 안부 문자조차 씹어버리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이었다. 전화 연락을 준 친구한테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낸 후배에게도 어쩌다 연락을 받으면 웬만한 약속은 뒤로 미뤄서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왜 없겠는가. 문상을 마치고 돌아온 그날 나는 숙제 하나를 얻은 기분이었다. 나를 알고 있는 적지 않은 이들에게 나는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세상 그 어떤 일도 다 저 할 탓이라고 했던 어른들의 말이 떠올랐다. 미운 사람이든 예쁜 사람이든 그들의 생각을 결정하는 건 나 자신일 게 분명했던 것이다. /송준호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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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3 16:36

8·15, 독립인가 해방인가 광복인가?

김병기(전북대 명예교수) 지난 15일은 제76주년 광복절이었다. 그런데 혹자는 독립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해방이라고 했다. 광복이라고 하는 사람은 오히려 많지 않았고 해방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았다. 8월 15일, 같은 날에 대해 이렇게 독립, 해방, 광복이라는 말을 다 사용해도 되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독립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유사 이래 우리의 모든 역사가 예속의 역사가 되고 만다. 그래서 노태우 정부 때 천안에 독립기념관을 지을 때에도 큰 논란이 있었다. 우리의 국권을 우리 스스로 행사하기 위해 싸운 선열들을 독립투사라고 부르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8월 15일을 독립기념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본래부터 독립국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독립국인 우리의 주권을 일제가 강탈했으므로 독립투사들은 그것을 되찾기 위해 피 흘려 싸워 마침내 주권을 회복했다. 이 회복을 마치 우리의 역사상 처음으로 독립을 얻은 것으로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중문대사전》은 한국의 한에 대해 1897년에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국호를 한국이라고 고쳤다. 일본에 병탄되었다가 2차 세계대전 후에 독립하였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우리 역사 전체를 중국의 속국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판국에 우리 스스로 독립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유사 이래 처음으로 독립을 맞은 민족을 자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해방(解放)이라는 말은 더더욱 사용해서는 안 된다. 풀어줄 해와 놓을 방을 쓰는 해방은 타동사이므로 링컨이 노예를 해방하다처럼 목적어를 갖는데 바로 우리가 목적어가 되어 일본이나 미국으로부터 풀어 놓아 줌의 은혜를 받은 꼴이 되고 만다. 독립투사들의 노력도 허사가 되고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도 의미를 잃는다. 게다가 미군은 남한에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들어와 3년 동안 미국 군정을 실시했다. 북한이 소련의 군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내걸고 김일성이 실권을 행사한 것과 많이 다르다. 중국이 사용하는 해방은 중국 공산당이 봉건지주의 착취로부터 인민을 해방했다는 의미이다. 8월 15일은 광복절이고 우리는 당연히 광복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빛 광과 회복할 복을 쓰는 광복(光復)은 빛을 회복함이라는 뜻이다. 한 국가가 일시적으로 나쁜 일을 당하여 체면을 손상당하고 실색했다가 사태가 호전되어 실색했던 빛을 회복함으로써 본래의 제 빛을 찾는 것이 광복이다. 중국 진(晉)나라의 장수 환온(桓溫)이 올린 상소를 보고 황제가 옛 수도를 광복하고자 하는 뜻을 알겠다.라고 답한 데에서 광복이라는 말이 처음 쓰였다. 우리는 1945년 8월 15일에 처음 독립한 것도 아니고, 일제나 미국이 해방을 해준 것은 더욱 아니다. 우리 스스로 노력하여 국권을 되찾아 나라의 빛을 회복하는 광복을 하였다. 광복을 위해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조직하여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그런 법통을 이었기 때문에 광복절이라는 이름으로 국경일을 제정하였다. 더 이상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왜곡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는 독립이나 해방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고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반영하고 우리의 정당한 투쟁을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우리의 국격을 세울 수 있는 용어인 광복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김병기(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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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6 16:55

심리적 거리 좁히기

송희 전 전북시인협회장 삶은 관계이다. 소속, 누구의 부모, 직업 등, 여타 관계를 떠나 이름만으로 나를 설명하기 어렵다. 코로나로 인해 밀착해 있던 일, 사람, 상황 등 물리적 관계마저 제 대로 할 수 없는 시대에 돌입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대적 고통을 겪으며 성장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소통이 끊긴 것으로 보이나, 내면적 성장을 가져올 좋은 기회이다. 몇 년 전부터 음주가무 문화가 줄고 삼삼오오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커피숍 문화로 변했다. 마음을 터놓고 담소를 나누는 것이 얼마 만인가, 조짐이 따뜻하다. 정서적 갈증을 분출하는 풍경이다. 본격적으로 삶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변한 것은 우리에게 그런 세상이 필요해서 온 것이라 본다. 각종 미디어가 세계의 많은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공유해준다. 각자의 능력, 존재감을 온라인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유명세, 근거 상관없이 확인된 바 없는 정보도 받아들인다. 모든 것을 드러내어 가며 개인이 특별해지는 시대로 변했다. 개의식의 공간에서 공동의식의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다. 공동선을 지향하는 세계적 협업의 시대로 진입했다. 우리가 지향하는 온전한 시대가 오는 조짐으로 보면 어떨까?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인도의 신비가 이고 철학자 이며 세계의 교사로 알려진 krishnamurti (1895~1986)의 책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 부분을 인용한다. 혁명, 개혁, 법률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종교조차도 인간의 본성을 바꾸는데 실패했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도 완전히 실패했다. 경쟁과 잔인성과 공포에 기초한 이 사회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가? 마음이 선해지고 새로워지고 천진天眞해져서 완전히 다른 세계를 이룩할 수 있을까? 인간으로서 세계의 어떤 곳에서 살게 되었고, 또 어떤 문화에 속하게 되었든지 간에 세계 전반의 상태에 대해 전적인 책임이 각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그런 세계를 세울 수 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인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귀한 일인가? 자식을 때려죽이고 창밖으로 던지는 사건도 뉴스일 뿐인, 이 세상은 수시로 침략과 치욕을 당한 우리 각자의 두려움과 공격성의 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전투적일 수밖에 없는 내 행동만큼, 세상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세상이 바뀐다는 것이다. 타인을 조종하고, 돈으로 명예를 사고파는 작금의 현실에서 상상도 안 된다. 이 시점에 가당키나 한가 싶지만 삼강오륜(三綱五倫)에서의 알맞은 관계가 절실해진다. 관계에서의 적당한 거리두기가 존중의 품새로 해석된다. 존중 속에는 관대와 자비가 포함되어 있다. 곧 사랑이다. 사랑이란 사람이나 사물을 몹시 귀하고 아끼는 마음이다. 심리학에서의 해석은 사랑이란 상대가 피어나도록 온전한 여유 공간을 넓혀주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전 세계가 바이러스 공포를 공동운명처럼 겪으며 하나로 어우러지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실감이 나지 않지만 조심스럽게 단언한다. 에고가 줄고 집단지성, 인류의 지혜가 부상하는 중이라고. 원래 살았던 그 시대, 베풀고 나누기 좋아하는 서로 의존적인 시대로 돌아 갈 것이라고. 자신이 스스로에게 정직해지는 것으로부터 자유가 얻어진다. 내가 잘 사는 것은 자연과 주변의 덕이라는 감사가 회복될 때, 따뜻하고 안정된 세상이 당겨질 것이다. 그런 세상을 물려준다면 후손에게 덜 미안할 것 같다. /송희 전 전북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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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9 16:22

힐링시네마, ‘자기 조력’을 위한 영화 보기

이승수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회장 자기 조력(Self Help)이란 스스로 돕는 것을 말한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또 고난과 역경에 처했을 때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해결하는 지혜이자 능력이다. 무엇이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존감, 자기효능감이 쑥쑥 올라가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나의 첫 기억은 중학교 1학년 때 자전거를 배운 일이다. 페달에 발도 닿지 않던 나는 하숙집 아저씨에게 자전거를 빌리고, 옆방 형에게 뒤를 잡아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삼중고를 겪어야 했다. 땀에 범벅이 된 채 꼬라박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훗날 형을 뒤에 세워놓고 시원하게 달릴 때의 쾌감을 잊을 수 없다. 성인이 되어 무엇인가 내 힘으로 해결하고 득의양양할 때면 어김없이 자전거의 추억이 떠오른다. 자기 조력의 방법은 각 분야에 다양하게 존재할 터지만, 힐링시네마에서는 긍정적 정서, 자기성찰, 인간관계, 인지적 틀, 삶에 대한 태도와 지혜에 초점을 맞춘다. 생애 주기별로 적용하고 노년층에 대해서는 삶에 대한 깊은 이해로 자아 통합을 이루도록 돕는다. 지식기술의 충전을 강조하는 평생학습, 자기조절 능력을 강조하는 자기 주도적 학습과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강박이 똑똑>이란 스페인 영화가 있다. 강박증에 노출된 여섯 사람(남, 여 각 3명)이 서로 힘을 합쳐 강박장애를 극복한다는 내용이다. 이들은 숫자, 세균, 반복, 선(線을 밟지 못하는), 건망증, 틱 등의 강박이 있다. 영화의 처방은 자기 개방과 스스로 해결하기이다. 중년 여성 열 명이 이 영화를 같이 보고 자기 조력에 대하여 나누고 있다. 시작할 때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불안과 걱정이다. 코로나, 남편, 아이, 경쟁 환경, 돈, 돈...... 건망증, 결벽증, 잡생각,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떨고, 반복적으로 숫자를 헤아리고, 버리지 못하는 습성 등. 망설임 없이 자기 개방을 하는 모습에서 집단과 영화의 힘을 느낀다. 그동안 자기와 세상에 대하여 이해하던 생각과 행동을 조금씩 바꿔보자는 쪽으로 목표를 정하고 계속하고 있다. 자기 조력을 위한 중고등학생 대상 추천 영화로 <극한직업>을 꼽고 싶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으면 찌질이들을 가리킨다. 임무 수행을 잘못하는 형사들을 보며 공부 앞에서 자꾸 작아지는 자신과 동일시한 것 이리라. 영화에서 형사들이 통닭집을 열고 반전을 꾀하는 모습을 함께 보며 자신의 꿈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탐색한다. 영화는 나를 비추는 천 개의 거울이란 말이 있다. 영화 속에서 천 개도 넘는 자기를 발견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영화 볼 때 몸을 비틀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자꾸만 치고 올라오는 생각이 있다. 흘려보내지 말고 연상 작업을 해보자. 영화가 관객의 삶에 브리징(다리 놓기)을 시도하는 것이니. 자꾸 말을 거는 영화를 선정해서 자기 삶과 연결하면 무엇인가 발견하게 되고 해법도 찾을 것이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남주인공 데니스가 여주인공 카렌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를 다른 사람의 삶의 끝에서 발견하고 싶지 않아요. 내 삶은 내가 책임져요. 자기에게 스스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삶, 아름답지 않은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했다. /이승수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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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2 16:38

우리 같은 어르신 분들

송준호 우석대 교수 우리말을 처음 배우는 외국인들이 몹시 어려워하는 게 있다. 다양한 존대 표현을 올바르게 가려 쓰는 일이다. 어쩌랴. 그게 한국어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것을. 동방예의지국다운 언어 특성을 두고 딴지를 걸자는 게 아니다. 요즘 들어 그런 존대 표현이 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아서다. 존댓말의 인플레라고나 할까. 커피 나오셨어요.라든가 모두 6,500원이세요.와 같은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쯤은 이제 상식에 든다. 그래도 딱 한 번만 더 짚어보자. 이런 해괴한 말 습관이 나타난 까닭은 무엇일까. MZ 세대의 기본적인 상식 부족 탓인가. 그런 점도 있겠지만, 천만에다. 까닭은 다른 데 있다. 갑질을 경계하다 보니 생겨난 말 습관이라는 것이다. 고용주와 손님은 갑이고, 카페나 편의점 알바생은 당연히 을이다. 그런데 그것도 관계에 따라 돌고 돈다. 음식점 사장도 자신이 직접 서빙할 때는 음식 나오셨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던가. 어느 옷 매장 알바생이라고 절친한테까지 그 빨간 티가 정말 잘 어울리세요.라고 말할 리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3인칭으로 가리켜 부르는 말이 있다. 그놈, 그 자식, 그 새끼 등에는 악감정이 담겨 있다. 무난한 건 그이나 그 사람이다. 상대를 높여 이를 때는 그분을 쓴다. 그런데 요즘 들어 높임말 분이 가는 곳마다 차고 넘친다. 고객분들, 관객분께서 등이 그런 경우다. 고객님분들도 들은 적 있다. 팬분들도 빼놓을 수 없다. 팬(fan)은 운동선수나 인기 연예인 같은 이들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운동선수나 연예인들 입장에서 팬들은 모르긴 해도 손아랫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런데도 분을 꼬박꼬박 갖다 붙인다. 팬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식이다. 그냥 팬들의 기대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팬분들이야말로 갑이라는 걸 잘 아는 까닭이다. 그냥 갑이 아니라 숫제 슈퍼갑이다. 어쩌다 실수로 말이나 행동 하나라도 잘못 까딱했다가는 SNS를 통해 뭇매를 두들겨 맞을까 두려운 것이다. 알아서 기는 거라고나 할까. 이와 비슷한 현상을 보여주는 말이 또 있다. 바로 어르신이다. 어른보다 한 단계 위에 드는 존대 표현이 어르신이라는 것쯤 누가 모를까. 어르신은 본디 남의 아버지를 높여 직접 부를 때 써온 말이다. 그런데 이게 언젠가부터 노인을 대신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60세 이상 어르신들의 백신 접종 예약률이 70%에 이른다.라는 식이다. 3인칭으로 가리켜 부르는 말이므로 그냥 60세 이상 노인들의라고 계속해서 쓰면 안 되는 걸까. 노인이 무슨 비하하는 말도 아니지 않은가. 혹시 사사건건 간섭하면서 꼬장이나 부린다고 늙은이나 꼰대라고 불렀던 게 마음에 걸려서 이제라도 인심을 쓰는 거라면 또 모르겠다. 하긴 미국에서도 요즘에는 old man 대신 senior citizen을 쓴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다.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듣다가 실소한 적이 있다. 어떤 행사를 리포터가 찾아가서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소개하는 코너였는데, 그 노인회 대표분께서 이렇게, 그것도 아주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는 걸 들었던 것이다. 우리 같은 어르신 분들 입장에서는 이런 행사를 자주 열어줘야 건강에도 좋은 겁니다. /송준호 우석대 교수 △송준호 교수는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소설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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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6 16:26

코로나19시대를 사는 지혜

김병기(전북대 명예교수) 코로나19의 신규 확진자가 1500명 선을 넘나들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집콕을 하자니 답답함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폭염까지 기승을 부리니 짜증이 더한다. 최근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장기간 자가격리와 거리두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멍한 느낌이 지속되는 팬데믹 브레인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경고를 했다고 한다. 늘 하던 일의 순서를 잊어버리거나 TV드라마를 보면서도 줄거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런 답답한 생활을 계속해야 할까? 코로나19사태를 맞기 전, 어쩌면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동적이고 외부지향적인 생활을 했는지도 모른다. 주말이면 으레 들로 산으로 여행을 떠났고 휴가철이면 해외여행을 즐겼다. 각종 스포츠 경기를 구경하며 응원의 함성 속에서 열광했고 불금이면 음식점과 술집, 노래방 등은 불타는 정열을 발산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처럼 몸을 움직여 운동하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즐거움을 갈구했고, 가슴에 쌓인 것들을 외부로 거침없이 발산하면서 속 시원함을 추구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 가족과 주말여행을 가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체력단련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테니스나 골프, 등산 등 동적인 취미활동을 하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여기며 아등바등 그 길을 향해 달렸다. 이에 반해 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집안에 앉아 독서나 명상을 한다든지 고전음악을 듣거나 서예를 하면서 영혼의 청정함을 추구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처럼 동적인 활동과 외부를 향한 발산의 문화를 편애하던 우리에게 갑자기 코로나19가 닥쳐 발을 묶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주말여행을 가지 못하고 불금을 즐기지 못하는 현실이 마치 감옥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짜증은 날로 더하고 다투는 일도 많아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19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안으로 나를 돌아보고 들여다보는 생활을 일상화할 필요가 있다. 옛 사람들은 온갖 감정을 외부로 발산하기 보다는 안으로 수렴하여 청정하게 승화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생활을 추구했다.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와유오악(臥遊五岳:자리에 누운 채 오악에 노닒)하고 좌견천리(坐見千里:앉아서 천리를 내다봄)하는 지혜를 터득했고 몸을 움직여 발산하는 춤을 추지 않아도 춤 이상의 흥과 여유를 누리는 생활을 했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학(鶴)」 이라는 시에서 학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누가 널더러 춤을 잘 춘다고 하더냐? 한가롭게 서 있을 때가 더 아름답던 걸(誰謂爾能舞 不如閒立時). 코로나19 시대에 우리는 춤만 추려들지 말고 잠시 서있는 지혜를 터득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이전의 우리는 돈을 벌어 돈을 쓰며 온갖 감정을 다 발산하면 갈증이 풀리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행복하기는커녕 오히려 맹물을 마실 수 있는 청정한 행복을 팔아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설탕물을 사서 들이켰는지 모른다. 갈증이 풀릴 리 없다. 이제 코로나19 앞에서 우리는 한번쯤 기대해볼 필요가 있다. 동적 정열과 외적 발산을 절제하고 내적 수렴과 성찰과 각성을 추구하는 청정한 삶을 지향할 때 코로나19는 언제 사라진지도 모르게 우리 곁에서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김병기(전북대 명예교수) △김병기 교수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을 역임했으며, 강암연묵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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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9 16:44

글로벌 바이러스

전 세계가 글로벌 바이러스를 경험하고 있는 지금, 하루 수만 명이 죽어가고 있다.이 바이러스는 인간이 공동으로 만들어 낸 창조물이다. 예언가들은 문명의 괴물이 만들어질 거라고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힘든 상황을 해결할 것인가? 인간의 본성이 순수함과 아름다운 상태로 돌아갈 수는 있을까? 일단 우주의 순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물질세계인 우주는 중력의 법칙, 부력의 법칙, 관성의 법칙과 같은 법칙에 의해 좌우된다. 물질의 법칙에 대한 발견과 이해는 과학과 기술의 대단한 발전을 이끌었다. 중력의 법칙으로 비행기를 발견할 수 있었고, 관성의 법칙은 전기산업에 놀라운 발전을 일으켰다. 기본 법칙의 이해와 적용은 위대한 발전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삶 또한 법칙들에 의해 움직인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삶을 좌우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고대문명은 우주흐름에도 패턴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 리듬은 네 가지 사이클인데 첫 번째는 의식과 물질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고 보는 황금기이다. 이 시대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성했으며, 자연과 소통하는 시기였다. 두 번째 사이클은 물질이 조금씩 진화되면서 모든 생명이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관점이 다소 약해지는 은의 시대이다. 의식과 물질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물질의 중요도가 커진 시대이다. 세 번째 사이클은 의식이 물질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느끼는 청동기시대, 물질과 의식의 격차가 심한 시대이다. 마지막 사이클은 물질에는 전혀 생명이 없으며 의식의 노리개 정도라고 인식하는 철의 시대이다. 지금의 시대인 철의 시대는 인성(人性)보다는 물성(物性)이 압도적으로 강하게 드러난다. 인간이 기능적으로 발달하고, 공격성이 극에 달한 시점인 것이다. 우주는 이 사이클로 순환하고 있으며, 이 사이클이 한 바퀴 도는 데는 2만6400년 정도 걸린다. 마지막 사이클이 끝날 때가 2012년이었다. 일부 예언가들이나 선각자들이 지구의 멸망이 올 거라 예언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2012년은 마지막 네 번째 사이클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지구멸망을 부르짖은 집단도 있었고, 그 정보로 지구멸망에 관한 상상적 영화도 많이 등장했다. 물론 지구의 핵 부분이 더 과열되어서 파괴될 수도 있었겠지만 아슬아슬하게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자생할 힘을 찾는 동안, 우리는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지금 겪고 있는 네 번째 사이클이 지나가면 지구가 폭발하지 않는 한, 다시 첫 사이클, 황금기로 돌아간다. 우리는 넷째와 첫째 사이클을 경험하고 목격하는 중대한 시기에 걸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누렸다. 위태로운 이 시대에 후손에게 물려줄 지구를 살려내는 소명에 앞장서야 한다. 적어도 이 혼란이 지나가면 황금기의 사이클에서 정신적 물질적 평화를 경험하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철의 시대의 영향으로 황금기가 안정적이 되기까지는 앞으로도 10여 년이 더 필요하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으로 인구는 계속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우수한 민족이다. 지구를 몸으로 비유하자면 우리나라는 간(肝)과 같다. 쓰러져도 빠르게 회복하는 저력이 있다. 바이러스와의 종식에도 선두가 돼야 한다. 절망에 빠진 온 세계가, 몇 년 전부터 한류를 부르짖으며, 우리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은 한국이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 한다고 했던 많은 선각자의 예언을 떠올리게 한다. /송희 전 전북시인협회장 △송희 전 회장은 전북문화관광재단 이사와 인문학 강사로 활동하며 상담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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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2 16:43

힐링 시네마(Healing Cinema)

이승수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회장 치유 의미로 사용하는 Healing의 어원은 그리스어 Holos에서 찾아볼 수 있다. Health의 어원이기도 한 Holos는 Holy(신성한)와 Whole(전체성)을 뜻한다. 전체성이란 매우 복잡하고 다의적인 용어인데, 칼 융의 개성화란 말을 통해 이해하자면 인간 속에는 정신의 분열을 지양하고 통일하게 하는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데 이것이 자기, 혹은 본연의 자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화로 힐링한다고 하니 질문이 많다. 한 어르신은 영화 보면 암이 나아요? 이렇게 물었다. 세상에 치유 도구가 많이 있는데요. 영화도 그중 하나입니다. 어떤 치유 도구든 활용해서 도움받으세요. 이 어르신 조금 뒤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를 보고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린 후 말했다. 내가 저렇게 살았어! 덕수는 한국전쟁 이후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 캐릭터다. 되고 싶었던 것, 하고 싶었던 것도 많았지만 가족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다가 늙었다. 영화를 치유의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연구하고, 임상에 적용하고, 인력을 양성하는 일을 주로 하는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가 창립 13주년을 맞았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을 영상영화심리상담사 라고 하며 현재 국내에 130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힐링 시네마란 교육, 상담, 심리치유 시 영상과 영상매체를 활용하는 모든 방법을 지칭한다. 주재자가 피교육자나 내담자에게 치유를 촉진할 수 있는 영화를 선택하고 주재자-내담자(피교육자)-영화 간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대안적인 해결 방법을 습득하거나 자신과 타인에 대해 정서적인 통찰을 깨우치도록 하는 과정이다. 개인의 성장과 치유를 위해 영화를 활용하는 것은 구어체가 시작되면서 유래한 이야기 하기와 자기 반영 사이의 오랜 연장선에 있다. 영화 보고 자기를 반영 하는 것, 치유의 핵심이다. 방법을 개략적으로 소개하자면 첫째, 영화 보고 목록을 작성한다. 대상은 아동청소년, 가족, 부부, 페미니즘, 노인 등 생애 주기별로 나눈다. 이후 연도별, 국가별, 사용 빈도별로 범주를 세분화한다. 둘째, 영화 만들기 작업이다. 시나리오 작성에서부터 영화 촬영 기법, 상영회까지 주관한다. 청소년 영화(진로, 또래 관계, 학교폭력, 성교육, 자존감, 다문화 등 다양), 가족영화 앨범, 영상 자서전 등 적용 범위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셋째, 사진 작업이다. 사진 찍기와 사진 지각의 주관성에 초점을 맞춘다.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내담자(피교육자)가 반응하기까지 심리적 과정, 감각, 지각, 인지를 다룬다. 넷째, 내담자와 함께 영화를 보고 영화 속 메시지를 현실과 연결하고 포커싱 한다. 항상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영화를 보며 지각하는 것은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라는 사실이다. 주요 기법으로는 영화를 통해 통찰하도록 안내하는 지시적 접근, 잊힌 경험과 기억에 접촉하도록 돕는 연상적 접근, 감정의 방출과 정서의 환기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연결하는 정화적 접근이 있다. 영화는 경험과 접촉하고 무의식으로 이끌며, 이를 통해 의식을 확장하고 다른 세상과 만나는 기회를 제공한다. 방어를 해제하고 본연의 자기와 만나 기쁨을 만끽하도록 하는 경지, 힐링 시네마가 추구하는 세계다. /이승수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회장 △이승수 회장은 가천대학교 겸임교수, 단비심리상담센터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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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05 17:00

알바트로스와 자전거

천세진 (문화비평가시인) 팔복예술공장 <크리스 조던:아름다움 너머> 전시를 보며 말문이 막혔다. 시작부터 충격을 받았다. 작품 「침묵의 봄」은 농약으로 숨진 18만 3천 마리의 새들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새들임을 알 수 있는 형상 외에, 구별할 수 없는 무수히 작은 점들마저 모두 인간에 의해 사라진 새들이었다. 분명 아름다웠지만, 너무 아픈 아름다움이었다. 전시의 마지막 순서였던 다큐멘터리 <알바트로스>는 마음이 아파 끝까지 보지도 못했다. 함께 사는 생명체들에게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지를 다시 통렬하게 실감했다. 보들레르는 시집 『악의 꽃』, 「알바트로스」에서 이렇게 썼다. 뱃사람들은 아무 때나 그저 장난으로, / 커다란 바닷새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네, / 험한 심연 위로 미끄러지는 배를 따라 / 태무심하게 나르는 이 길동무들을. / 그자들이 갑판 위로 끌어내리자마자 / 이 창공의 왕자들은, 어색하고 창피하여, / 가엾게도 그 크고 흰 날개를 / 노라도 끄는 양 옆구리에 늘어뜨리네. / 이 날개 달린 나그네, 얼마나 서투르고 무력한가!알바트로스는 거대한 날개 때문에 활주 공간이 없으면 날아오르지 못한다. 인류 문명은 알바트로스의 활주공간을 계속해서 파괴했고, 더는 날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크리스 조던의 작품 중에 「미드웨이 : 자이어의 메시지」라는 것이 있다. 나선형, 소용돌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Gyre는 아일랜드 태생의 시인 예이츠가 인류 문명이 2천년 주기로 순환한다는 이론을 만들었을 때 사용하기도 했다. 자이어론을 문명발전론에 대입한다면 같은 모습이 순환하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명이 순환하며 점진적으로 나아간다는 이론을 거부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문명은 그렇게 변모해왔다. 그런데 그런 이해가 인간의 삶을, 멈추는 순간 쓰러지는 무한질주의 자전거타기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중학교 시절, 체육대회 때마다 빠지지 않았던 경기가 자전거 천천히 타기였다. 넘어지지 않고 가장 늦게 결승점에 닿는 사람이 승리하는 경기였다. 지금 우리는 그 경기 규칙을 배워야 한다. 문화는 거꾸로 가면 안 된다고 믿겠지만, 얼마든지 거꾸로 갈 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은 바로 그렇게 해야 하는 시간인지 모른다. 이제껏 질주하며 만든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후세에게 물려줄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멈추고 뒤돌아서는 것도 문화다. 앞으로만 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전의 문화를 불완전하고 미개한 수준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맞는 생각일까? 우리가 찬양하는 모든 문화는 과거의 것이다. 한편으로는 찬양하며, 한편으로는 나아가야 한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불일치를 갖고 있다. 구르는 것은 언젠가는 멈춘다. 시간의 장단이 있을 뿐이다. 인류는 지금의 예측치보다 더 오래 구를 수 있었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을 실현하며 구를 수 있었다. 앞으로도 더 구르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이끼는 끼지 않는데, 바퀴를 부식시키는 독이 자꾸 끼고 있다. 바퀴를 더 잘 구르게 하려고 윤활유를 쳤는데, 그게 독이어서 바퀴를 부식시키고 있다. 자전거는 멈출 때의 자세가 중요하다. 너무 속도를 낸 자전거는 멈추기 어렵다. 속도를 줄인 뒤에야 안정적으로 멈출 수 있다. 멈추자는 것이 아니다. 천천히 달리며 더 많은 풍경을 오래 보자는 것이다. /천세진(문화비평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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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8 17:29

힘이 되는 문화예술경영…창작활동과 행정지원의 뉴딜

이기전 전북문화관광재단 대표 오늘날 예술 활동은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 감정 등을 창작할 수 있는 순수함이 있지만 르네상스시대만 하더라도 후원이란 주문자였고 작가와는 주종관계에 가까웠다. 그 시대에는 모든 예술분야를 장려하고 후원하는 진정한 의미 보다는 특정가문의 사회적 지위상승과 정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한수단으로 삼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거장 중 한 사람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는 피에타(성모 마리아가 죽은 아들 예수를 안고 있는 슬픈 모습을 묘사한 예술작품의 통칭) 조각 작품을 23세의 젊은 나이에 완성했으니 천재 중의 천재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작품의 명성으로 미켈란젤로는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되었고 피에타로 인한 명성에 힘입어 1501년에는 미켈란젤로의 예술 여정에 정점을 찍는 작품제작 주문을 받는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 다비드(다윗)을 조각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대리석의 크기가 5m 정도 거대한 돌덩이를 다룬다는 것은 당시의 유명조각가들도 엄두를 내지 못할 작업이었으나 26세의 패기 넘치는 미켈란젤로는 감동적으로 완성을 했다. 다비드를 조각해 나갈 때 재미있는 갑과 을의 일화가 하나 있다. 다비드 작품을 주문한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의 위원들은 간혹 작품에 대한 말 한마디씩을 던지곤 했는데 다비드상의 머리 부분이 너무 크지 않느냐고 계속 시비를 걸어 왔다. 원래 말도 없고 사교성이 없던 미켈란젤로는 대꾸도 하지 않고 작업에만 여념이 없었는데, 하루는 머리가 커 보인다는 시비에 견디다 못해 돌가루를 한줌 쥐고 조각상 위로 올라가 조각도로 깍아 내는 시늉을 하면서 돌가루를 떨어뜨리자 위원들은 그제 서야 입을 닫았고 다비드상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사람의 큰 키 높이정도 되는 단 위에 설치되었는데 관람객들은 상당한 높이에 위치한 조각상을 보기 위해 고개를 젖혀 올려다 보아야 한다. 멀리 있는 부분은 실제보다 작아 보이니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 제대로 된 비례로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미켈란젤로의 생각을 성당의 추진위원들은 알 리가 없었다. 행정적인 지원을 하는 위원회와 작업현장의 미켈란젤로의 심리적 갈등은 서로의 입장에서 근본적으로 이해를 달리할 수밖에 없다.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활동할 수 있었고 천지창조, 최후의심판 등 위대한 작품들을 탄생시킨 배경에는 당시 교황 율리우스2세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고 거대한 과시적 목적과 작업에 열광하는 두 사람의 의기충천 하는 기질의 충돌은 주와 종의 관계 또는 갑과 을이 되어 이루어진 결과물들이다. 예술지원행정과 실행되는 예술의 현장은 상호 의존 관계지만 예술경영, 현장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은 작가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의 권한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기 때문이다. 기관은 공적 자원을 집행하기 때문에 공익실현과 절차상의 투명성 등 신뢰성을 바탕으로 전체적인 진행에 개입할 수밖에 없지만 예술 활동의 매끄러운 진행을 위해 수직적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적 파트너십의 적극적인 협치가 필요하다. 예술가들은 전문성, 소통, 이해의 부족을 구실로 행정부서를 갑 이라 하고 행정부서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리한 요구와 민원제기로 한계를 넘어서는 예술인들을 오히려 갑이라고 하는 불편한 진실을 자유로운 창의성 보장과 행정지원의 효율성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뉴딜, 즉 새로운 계약관계가 이루어지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이기전 전북문화관광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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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1 17:37

한(恨)과 천이두

이병초(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그의 쑥대머리를 기억한다. 서울, 누구의 혼인식(1998년 1월)에 참석했다가 전주로 돌아오는 관광버스 안에서 찰지게 쑥대머리를 불렀던 것이다. 일국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인 분이 관광버스 안에서 판소리를 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천이두 교수이다. 그는 근대문학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김소월, 서정주, 김동리, 황순원 등의 작품뿐만 아니라 1970년대를 풍미한 작품들까지 면밀히 분석했다. 첫 저서인 『한국 현대소설론』(1969, 형설출판사)에 수록된 「한과 인정」을 통해 한(恨)을 언급한 이래 『한의 구조 연구』(1993, 문학과지성사)에 이르기까지, 한에 몰두한 연구가이기도 했다. 그는 한에 슬픔이 내재된 것은 사실이지만 원(怨)과는 차원이 다른 웅숭깊은 정신문화임을 밝혔고 이를 멋과 슬기로까지 끌어올렸다. 한국 정신문화의 뿌리인 한(恨), 여기에 깃든 슬픔의 내력을 천이두 교수도 비껴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폭이 넓고 깊었다. 평생을 뙤약볕에 그을려 얼굴이 더 이상 하얘질 가망이 없는 민중의 삶을 사랑했다. 갯벌에서 바지락 캐다가 저녁놀과 눈 맞추는 잠깐, 산자락에서 취를 뜯다가 한숨 쉬는 잠깐, 감자 캐다가 논두렁 깎다가 깻잎 따다가 시름 뉘어보는 잠깐에 선명히 새겨지는 이 땅의 집단적 그리움을 아꼈고 아파했다. 갑오년 죽창과 일제의 수탈과 분단과 625의 떼죽음, 보릿고개와 유신독재와 5월 광주의 학살로 모질게 이어지는- 근현대사의 비참한 숨소리가 아직도 삶과 역사를 핍박한다는 사실에도 집중했다. 그의 글줄 안팎에 철저하리만큼 한국적 빛깔이 충만해 있음은 이를 증명한다. 이 지점에서 그는 한(恨)을 만났을 것이다. 사람들이 형벌처럼 짊어진 슬픔 속에 슬픔을 넘어서고 싶은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꿰뚫어본 지점도 삶의 현장일 터이다. 여기서 그는 한이 불행한 삶을 견디게 하는 동력이자 윤리적 조절정치라는 탁견에 닿았고, 진정한 화해를 바라는 정한(情恨)에 이르렀으리라. 모두가 정의에 굶주려 원통절통함에 갇혀 있을 때 천이두 교수는 역사의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민중의 억울함을 한(恨)으로 껴안고 피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은 엄정하다. 모순으로 점철된 시대의 한복판에서 붓끝을 벼렸으되 그의 언어미학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다. 예술에 앞서 삶이 먼저라는 것을 깨친 냉철한 학자였던 것이다. 한을 멋과 슬기로 끌어올린 어른. 그의 업적은 단지 업적만으로 치부될 수는 없다. 콜라와 햄버거와 AI를 끼고 사는 세대에게 한국 문화의 원천인 한(恨)을 명징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유는 또 있다. 외국 문예이론과 사회담론에 속박됨 없이 시와 소설과 판소리를 명쾌하게 분석해간 글줄을 읽다보면 제발, 한국의 자존심을 지키고 살라는 그의 엄한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천이두 교수는 오래 전부터 겨레의 스승이었다. 요즘 그를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고 들었다. 부귀영달과 먼 분이었으므로 갈수록 잊힐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의 품에서 일가를 이룬 학자들과 시인작가들은 오늘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은사님의 학문적 순결성과 치열성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오는 7월 7일이 천이두 교수의 4주기이다. 당신의 제사상에 찰진 쑥대머리 한 자락 올려야 하리라./ 이병초(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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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14 16:45

이제 겨우 시작인 일들

이지선 전주동네책방네트워크 회장 열 한 살 아들의 입에서 뜻밖의 질문이 흘러나왔다. 엄마,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지 순간 멍해졌다. 아이의 눈에도 지구가 빠르게 병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나 보다. 자신의 하루만 봐도 플라스틱을 쓰는 일은 너무 많고, 학교에서 재활용교육을 받고 분리수거를 해도 교문 밖만 나가면 세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문구점에서부터 정체모를 비닐과 플라스틱에 담겨있는 과자를 먹는 일부터 시작해서 친구들이 플라스틱에 들어있는 음료수를 날마다 먹는다고 말한다. 아들이 이 질문을 던진 것은 환경의 날을 앞두고 시작된 크리스 조던 : 아름다움 너머 전시회를 팔복예술공장에서 보고 나온 직후였다. 7월 11일까지 진행되는 크리스 조던 사진전은 우리에게 자연 생태계의 위기를 보여주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의미있는 전시다. 크리스 조던은 환경예술 분야의 독보적인 작가로 손꼽히지만, 본인 스스로는 환경운동가나 예술가가 아니라며, 현재의 삶을 직시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전하는 메신저일 뿐이라 말한다. 인디고서원에서 출판된 크리스 조던의 책에는 「세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슬픔에 대해서 느끼려고 하는 것, 아름다움을 알려고 하는 것, 이 세계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자연에 대한 슬픔까지도 온전히 알아주는 일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의 대표작인 플라스틱 쓰레기로 가득 찬 알바트로스의 사진은 지금의 인류가 만든 환경 문제의 비극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플라스틱 조각을 먹이로 착각하고 자신의 새끼에게 먹이는 알바트로스는 결국 이유도 모른채 죽임을 당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너무 편리하기만한 소비문화와 산업성장이라는 이유로 분별력을 상실한 채 쓰레기를 생산해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 겨우 탄소발자국과 제로웨이스트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은 다수가 아닌 소수다. 그럼에도 고마운 것은 패스트푸드점에서 차츰 빨대가 사라지고 있으며, 환경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점이다. 책방을 운영하며 생태코너의 책들에 늘 주목했다. 1회용품을 쓰지 않기 위해 나부터 플라스틱을 쓰지 않고 재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갔다. 그러나 개인이 하는 것에는 늘 한계가 느껴졌고 매일매일 무섭게 쌓여가는 배달음식들의 플라스틱 쓰레기나 택배박스들을 보면 순간 절망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크리스 조던의 전시회를 통해 다시금 지구의 슬픔과 분노를 직시하며 극복해야 하는 용기와 마주했다. 그리고 주위를 다시 둘러보니 이를 함께 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1회용품과 플라스틱제품을 전혀 쓰지 않고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마켓을 지향하는 불모지장 팀은 전주의 가게들과 연합하여 우유팩과 플라스틱 뚜껑을 모아 재활용을 시작하고, 플라스틱 화장품 용기를 바꾸기 위해 화장품회사를 공격하는 캠페인을 벌이며 두려움을 희망으로 바꾸고 있다. 음식가게에서 음식을 담기 위해 용기(그릇)를 내기 시작했다는 용기캠페인처럼 우리는 지구를 위해 모든 용기를 총동원해야한다. 그리고 아들에게 절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을, 우리가 살아있는 한 희망은 계속되어야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기 위해서라도. /이지선 전주동네책방네트워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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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0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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