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06 21:30 (Thu)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문화마주보기

늦은 가을, 모과에게 꾸지람을 듣다

문병학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어느덧 가을이 깊었다. 대체로 평일에는 직장의 업무처리로 경황이 없고, 주말에는 결혼식이나 이런저런 행사에 참석하느라 분주한 것이 현대인들의 삶이다. 그래서 계절이 바뀐 것도 모르다가 특정의 자연현상과 맞닥뜨린 후에야 계절의 변화를 절감한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경황없이 살고 있는데, 어쩐 일로 지난 주말 여유가 생겨 자동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도심을 벗어나던 중 신호등에 걸려 차를 멈추었을 때 도로변 여염집 담장 위 봐야 별 볼일 없는 세상을 기웃기웃 넘보던 샛노란 모과와 눈이 딱 마주쳤다. 모과는 사람들을 자주 놀라게 한다. 사월이면, 우둘투둘한 억센 줄기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여린 연분홍꽃을 피워 올려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내 그 꽃잎이 지고, 꽃 진 자리 상처 위에 작은 열매가 맺힌다. 이 작고 푸른 열매는 한여름 폭풍우를 지나면서 울퉁불퉁 아주 못나빠진 모습으로 변하여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한다. 과일 망신은 모과가 다 시킨다는 눈총을 받으며 한 여름 뙤약볕과 초가을 태풍을 겪으면서 모과는 제 몸통을 샛노랗게 물들인다. 노랗게 익은 울퉁불퉁 못생긴 모과는 제 몸통에 깃든 격조 높은 향기로 또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과연 모과의 향기는 일품이다. 과일가게 망신은 모과가 다 시키고, 생선가게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는 투의 말은 빈말로라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외양(外樣)만으로 사람이나 사물을 섣불리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자칫 동시대 사람들과 생명에 대한 무례(無禮)로 이어질 수 있다. 겉모습으로 본질까지를 단정지어버리는 현대인들의 편협한 인식을 모과가 꾸짖는 것 같아 씁쓸하다. 현대인들은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이를 수용하는 것에 많이 인색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뉴스나 다양한 정보들이 감당할 수 없을 지경으로 쏟아지는 시대상황에서 표면(表面)과 함께 그 이면(裏面)까지 들여다봐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자칫 공염불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에 사로잡힌 인식의 태도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려는 의지 없이 외양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지는 인식은 당사자는 물론이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 여기에 자기중심적 사고까지 덧씌워진다면 우리 삶은 돌이키기 어려운 나락으로 곤두박질 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인식패턴의 전환을 적극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본질에 접근하려는 진지한 태도를 바탕으로 차이와 다름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폭을 넓히는 방향으로 인식패턴의 전환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외양 중심, 개인주의가 덧씌워진 주관적인 판단이 안고 있는 위험성을 심각하게 인식하면서 나 이외의 모든 존재가 지닌 의미와 그 존재 안에 내재된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윤택해질 수 있을 것이다. 모처럼 나선 가을나들이, 문득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둥 몇 개 / 저 안에 벼락 몇 개 //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라는 장석주 시인의 시 대추 한 알이 떠올라 가만히 읊조리면서 먼 산을 바라본다. 산정(山頂) 위 가을하늘이 창창(蒼蒼)하다. /문병학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 오피니언
  • 기고
  • 2019.11.11 16:57

덕진공원 연못에 예쁜 고래를 키우자!

이종훈 전주시립극단 예술감독 1980년 12월에 개관한 덕진예술회관을 시민들은 반공회관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택시를 타고 덕진예술회관을 가자고 하면 아, 반공회관이요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2015년 8월 덕진예술회관은 시설의 노후화로 공연시설 리모델링을 거쳐 다목적 공연장으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지금도 계속되는 민방위교육으로 민방위교육장이라는 이름이 고착화되고 있으며, 다양한 아마추어 행사들로 인해 예술적 공간으로서의 이미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민방위 교육은 다른 공간을 활용해도 얼마든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전주시립예술단은 산하에 전주시립교향악단, 전주시립국악단, 전주시립합창단, 전주시립극단을 두고 명실공히 전주 문화예술의 선두주자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이들 4개 단체의 주 공연장은 덕진예술회관이다. 하지만 이들 4개 단체는 갈수록 이 공연장을 기피하면서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내 모악당이나 연지홀로 공연을 옮겨가고 있다. 덕진예술회관이 공연장 시설도 열악할뿐더러, 공연장으로서의 이미지로 인해 관객을 불러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40여 년 간의 연출 경험과 극장 경험을 통해 덕진예술회관이 변모할 수 있는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덕진예술회관은 성냥갑 형태의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다. 예술회관이라는 단어가 민망할 정도의 구태의연한 촌스러운 건축물이다. 그래서 덕진예술회관은 외형의 옷부터 새롭게 갈아입어야 한다. 먼저, 회색빛 콘크리트 외벽면을 대형 캔버스로 만들어 화가들에게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그림을 그려줄 것을 의뢰하고, 원통형의 기둥에 웹아티스트들의 웹아트물을 설치하여 덕진구의 예술적 명소가 될 수 있게 한다. 둘째, 극장 앞 광장과 로비는 시민들과 관객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젊은 연인들이 선호하는 스토리가 있는 문화광장으로 꾸밀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셋째, 객석은 관객들이 어머니의 모태 속처럼 편안한 자세로, 무대 가까이에서 살아 숨쉬는 연기와 연주를 들을 수 있어야 하며, 심미적 미장센이 최대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무대의 기능들은 100% 발휘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객석을 높이고, 무대 상부와 조명시설을 보강해야 한다. 넷째, 극장은 엄선된 레파토리를 통해 즐겁고 행복한 예술적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 속에서 재미만이 아닌 아름다움을 알게 하고, 세련된 감각을 유지하게 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됨으로써 시민들이 극장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전주시립예술단 홍보를 위해 덕진공원 연못에 고래 한 마리를 키우자! 전주시립예술단은 공연을 할 때마다 홍보의 어려움에 직면한다. 예산이 부족해 언론은 물론 미디어 홍보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4개 단체의 홍보예산을 하나로 묶어 예쁜 고래 한 마리를 사자. 그 고래를 덕진공원 연못 위 상공에 띠워 대형 예술단 광고판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바다가 없는 전주에 고래가 나타났다고 시민들이 즐거워하지 않을까? 나는 셋째 사항만 뺀 나머지는 시민과 상생하는 기업의 협조로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덕진공원처럼 아름다운 주위환경을 갖추고 있는 덕진예술회관이 명실상부한 문화예술 전용공연장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나는 매일 꿈꾼다. /이종훈 전주시립극단 예술감독

  • 오피니언
  • 기고
  • 2019.11.04 16:47

출근길에 만난 개미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나는 165번 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길의 혼잡을 피할 수 있어 좋고 차안에서 하루일과를 정리해보는 나만의 시간이 생겨서 참 좋다. 매주 월요일은 우리 전당을 둘러보고자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리기도 하고. 오늘 아침도 나는 실내배드민턴장조경단 정류장에서 내리려고 버스정차버튼을 눌렀다. 버스가 서고 차문이 열리는데 보니 운전기사께서 보도블록과는 좀 떨어져 차를 세워서 가볍게 한 발짝을 뛰어야 보도에 착지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폴짝 뛰며 무심코 착지할 곳을 보니, 우와! 이게 웬일-지금부터 전개되는 이야기는 아마도 버스문에서 보도에 착지하기까지 아마도 0.1초 사이에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과 결정의 기록이다. 0.1초 사이에 이렇게 수많은 생각과 결정이 이루어지다니 놀랍다- 나의 발이 착지할 곳으로 신원미상의 개미 두 마리가 뭔가를 입에 물고 빠른 속도로 진입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안 보였으면 모르지만 봤는데 두 생명이 밟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급히 내 발의 착지 장소를 최대한 옆으로 옮기고자 허공에서 하강 중인 발의 방향을 바꾸느라 애를 쓰고 있는데 개미들은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른 채 자꾸 착지 지역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계속 허공에서 발을 옮겨갔지만 착지 순간 나는 개미가 안 밟혔을 거라는 확신이 없어지며 마치 엄청난 유성이 지구와 충돌하듯 허둥대며 착지했다! 이 순간 등골에 땀이 솟으며 두 가지 생각이 솟아났다. 하나는 개미가 눈에 띄지 않았다면 편히 일상적으로 착지했을 텐데 죽거나 말거나 상관없이라는 개미를 향한 원망과 이들을 밟았으면 뒤처리를 어쩌나. 그냥 보도블록에 구두바닥을 훑어버려? 아니면 발을 들어 밑창을 들여다 봐? 그러다 혹여 개미의 신체 일부가 붙어있기라도 한다면 어쩌지?하는 불안에 머리는 빙빙 도는데, 나도 모르게 시선은 현장을 살피고 있다. 아이구! 하나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안 밟은 것이었다! 글자 그대로 머리칼 한 올 차이! 간발의 차이였다. 그런데도 이 두 개미는 -두 마리라고 못 부르겠다- 저희들은 엄청난 생과 사의 갈림길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한 점 흐트러짐이 없이 내 발을 피해 우회를 하며 자기들의 길을 가는 것이었다. 내 엄지손톱의 6분의 1 크기 밖에 안 되지만 제 몸보다 열 배도 넘을 초록 이파리를 입에 문 채. 생명을 살렸다는 엄청난 안도감을 느끼며 숨을 들이키는데 퍼뜩 장자가 떠오르며 내가 저 개미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내가 걸어 온 길은 물론, 앞으로 갈 길에 전혀 생각하지 못 하는 위험이 있는데 운 좋게 피해 온 것은 아닌가. 문화예술기획자들이 모두 개미가 되어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개미를 밟을 지도 모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개미가 사람이 되어보면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죽을지 살지 모르는 길이었음을 알므로 해서 앞으로는 갈 길을 미리 살펴보고 가면서도 조심할 터이니 살 확률이 높아질 것이고, 개미가 되어본 기획자는 내가 하는 기획 때문에 뜻하지 않게 아파하거나 생명을 해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구나 살펴 볼 테니 말이다. 그날 이후 나는 버스를 내리는 시간이 1.5초가 더 길어졌다. 혹 지나가시는 개미가 있는지 살펴보려고. 그리고 사무실로 향하며 나는 다짐한다. 나는 개미가 되어 본 사람이다라고. 내가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기면 저기 우리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 싱그럽게 다가와 나를 안아준다. 우리는 이런 사이다!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19.10.28 17:54

세계 속의 수묵화, 예향에서 외면 받아서야

김호석 수묵화가전 전통문화대 교수 너른 들과 평온한 바다, 순박하고 포근한 기운,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여백이 많은 사람들, 세상이 위태로울 땐 숨어 있는 변혁의 기상이 결기를 세워 평화를 이뤄낸 땅, 이러한 풍토와 역사 속에서 자란 예술은 어떤 모습일까? 전북도립미술관에서 동아시아의 공통 양식이면서 한국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의미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수묵정신전이다. 이 전시를 관람한 재미의 유명 화가는 부조화와 모순이 만들어 내는 상충의 조화가 아름답다고 평가했다. 수묵화는 이처럼 서로 대립되는 것이 공존함으로써 발생되는 에너지이자, 불과 물이 만나면서 형상에 의미를 더하는 뜻 그림이다. 불과 물이라는 상극이 만나 상생하는 조화의 원리가 근본이다. 그것은 우주 생성의 원리이자 생명의 본질이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 오래된 질문 앞에 서 있다. 화가가 도달하려고 하는 것은 인격완성이자, 진선미 일치다. 결국 자기 도야를 거쳐 성인과 같은 식견을 지녀 그림을 통해 세상에 은택을 베푸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의 실현을 위해 화가는 독서와 실천, 주유와 반성 그리고 좌망을 한다. 따라서 깨어 있는 지식인들은 흑과 백으로 의미를 표현하는 수묵화를 선택했다. 가장 단순한 색으로 천변만화하는 자연의 이치를 담는다. 장식적인 표현과 색은 허례와 허식일 뿐이다. 장식성은 진선미와 거리가 멀다. 고요적조한 세계와도 괴리가 있다. 담박소쇄의 세계는 더더욱 아니다. 가장 단순하면서 간단한 근본만으로 뜻을 사물에 의탁하려 했다. 그러다보니 표현은 절제되고 힘은 빠져 있으며 습관적인 붓질조차 허락하지 않는 탈속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설명을 줄이면 의미가 증축된다. 수묵화에는 고도의 축약된 정신이 존재한다. 형상을 그려 형상 너머의 뜻을 함축한다. 수묵은 정신을 표현하는 최적의 방편이다. 예술은 자기 성찰의 결과물이다. 자연스러움과 꾸밈이 없는 천연성을 최고로 친다. 내가 나의 사고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의 상태에서 공존을 생각한다. 내가 나를 순화 시키고 우리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선을 쓰되 최소한의 붓질로 골격만 드러낸다. 본질을 파고 들어가는 경계, 힘을 뺀 상태임에도 강한 기질이 느껴지는 상태, 그 고요함과 순수함 속에 수묵문인화의 세계가 있다. 전북은 한국수묵화의 본고장이다. 역사 속에서 전북의 서화인들은 인격 함양을 목표로 자신을 충일하는데 집중했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포용력 있게 이웃을 껴안았고 함께 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치열하게 격동기를 살았다. 그 속에서 수묵화는 하나의 수단이고 형식이었다. 사람들은 수묵화를 통해 시대를 읽어냈고 담담하고 힘 있게 삶을 이야기했다. 오늘날 수묵화는 조형성과 정신표현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더불어 전북문화에 대한 관심이 두터워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전북의 지자체장들은 지역 문화와 예술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듯하다. 지역문화가 곧 세계로 통하는 출구이다. 지역경제에 대한 고민을 문화와 접목시켜야 한다. 세계 뮤지컬의 중심 뉴욕처럼 전북은 세계 수묵화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수묵화의 저변을 넓히고 다양한 수묵 전시를 상시화 해야 한다. 수묵을 공부하기 위해 세계인들이 전북을 찾게 하고, 아시아 수묵화 전당설립도 고민해야 한다. 한지, 붓, 먹 등 수묵과 관련된 산업도 발전시켜야 한다. 수묵화는 한국인의 독특성과 품격 있는 정신을 그리는 중심이다. 이제 막 세계에서 인정과 주목을 받는 수묵화가 본 고장인 전북의 새로운 활력이 되기를 바란다. /김호석 수묵화가전 전통문화대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19.10.21 16:31

다시 피는 녹두꽃, 그 역사의 희망

문병학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잦은 태풍, 아프리카 돼지열병, 검찰개혁 등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다. 국내문제들이 뒤엉키면서 일본의 경제도발로 촉발되었던 일제불매운동 등이 가라앉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지금, 우리에게는 광화문촛불과 서초동촛불을 반일운동으로 통합시키려는 지혜가 절실하다. 이러한 때 한글날이던 지난 주 수요일 완주군 삼례읍 일원에서 반일운동을 되살리려는 의미 있는 예술제가 개최되었다. 125년 전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내쫒고자 반일항전(反日抗戰)의 기치를 올린 역사의 현장,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에서 마당극, 음악극, 설치미술전, 설치서예전 등으로 반일민족항쟁의 의미를 되살린 제16회 전북민족예술제가 그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북도에서 발원하여 전국으로 확대전개된 반봉건 민주항쟁이자 반일민족항쟁이다. 1894년 2월 고부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무장기포, 백산대회 등을 거쳐 군대로서의 대오를 갖춘 동학농민군은 그해 5월 황토현전투, 황룡전투를 통해 전라감영군과 조선정부군을 차례로 물리쳤다. 연전연승한 동학농민군은 파죽지세로 전라도 수부(首府) 전주성을 점령하였고, 크게 놀란 조선정부는 긴급대신회의를 열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정치정세의 혼돈 속에서 대륙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자 1885년 3월 청일간 체결된 톈진조약을 빌미로 조선에 군대를 진출시켰다. 예기치 못한 일본군 진출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청일 양국 군대 철병의 명분 마련을 위해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노비문서 소각 등 근대적인 폐정개혁안을 수용하고 동학농민군을 전주성에서 철수시켰다. 이내 조선정부는 청일 양국에게 철병(撤兵)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조선의 문명개화 운운하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급기야 7월 23일 밤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하고 친일내각수립, 청일전쟁 도발 등의 폭거(暴擧)로 동아시아 정치정세를 격동시켰다. 전주성에서 물러나와 전라도를 순회하며 집강소를 통한 폐정개혁 단행에 힘을 쏟던 전봉준 장군은 9월말 전라도 각 지역에 통문을 띄우고, 10월 8일 삼례로 나아가 대도소를 설치, 반일민족항전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제16회 전북민족예술제는 전북의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작품을 제작하여 일본의 경제전쟁 도발이라는 시대상황에 정면으로 대응한 뜻깊은 행사였다. 특히, 세계인들에게 자신 있게 내놓을만한 특출한 자연경관이나 여타의 문화관광자원이 풍부하지 못한 전북에서 우리 지역의 역사를 문화예술작품으로 되살리려는 노력은 전북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추구해나가야 할 바람직한 사례일 것이다. 전북(전주)은 풍패지향(?沛之鄕), 조선 건국자의 본향이라는 역사적 위상을 지니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동학농민혁명 본고장으로서 만민평등 구현 1번지라는 위상을 지닌 역사적인 고장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만민평등(萬民平等), 근대민주주의를 시작한 전북의 역사적 위상을 문화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전북의 문화예술과 문화관광 발전에 기여하는 것은 21세기 문화관광 트렌드 변화에도 부합하는 것으로 전북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견지해야할 의무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성취는 물론이고 전북의 문화예술과 문화관광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의미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문병학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 오피니언
  • 기고
  • 2019.10.14 16:58

불멸의 셰익스피어, 가을에 만나다!

이종훈 전주시립극단 예술감독 영국의 국민 시인이며 가장 훌륭한 극작가로 인정받고 있는 셰익스피어는 1564년에 태어났다. 그는 37편의 희곡과 4편의 소네트를 발표했는데 그의 작품은 지금도 세계에서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연된다고 한다. <황무지>라는 시로 유명한 미국의 시인 T.S.엘리엇은 그를 가리켜 어느 사람도 셰익스피어만큼 자신의 작은 지식을 바탕으로 이처럼 엄청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없다라고 했다. 또 어떤 평자는 그의 극을 가리켜 삶, 죽음, 인간, 우주에 대한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명상록이라고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세계문학의 고전이면서 동시에 현대성이 가장 풍부한 작품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4대 비극인 <햄릿> <오델로> <리어왕> <맥베드>는 세계 희곡 문학의 결정체라 불린다. 셰익스피어가 극작가로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21년 5월부터 1922년 말까지 <개벽>이라는 잡지에 연재된 <하믈레트>를 통해서라고 한다. 또한 국내 최초의 셰익스피어 공연은 1925년 경성상업고등학교 어학부에서 원어로 공연한 <줄리어스 시저>다. 해방 이후 셰익스피어는 한국인들에게 매우 친숙해졌다. 오죽하면 전쟁의 한가운데인 1951년과 1952년에 <햄릿> <오델로> <맥베드>가 대구와 부산에서 성황리에 공연될 정도로 그 저변은 넓어졌다. 이에 비해 전주에서는 1996년 <리어왕>을 기점으로 2007년 <맥베드>, 2013년 <햄릿>을 공연하기에 이르렀으니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소개가 너무 늦게 이루어진 셈이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전주시민의 목마름에 보답하기 위해서일까. <전주시립극단>이 매년 가을 명작무대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올린다. 2019년 <오델로>를 시작으로, 2020년 <햄릿>, 2021년 <맥베드>, 2022년 <리어왕>을 공연한 후 2023년엔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한 달 동안 연속공연하는 국내 연극계 초유의 기념비적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20명의 단원이 4대 비극 속의 등장인물로 변신하면서, 10시간 분량의 대사를 암기하며 연기를 하는 멋진 모습을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설렌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고 견디는 것이 장한 일인가? 아니면 거친 파도처럼 밀려드는 재앙에 맞서 싸워 물리치는 것이 장한 일인가? (햄릿 중에서) 햄릿은 복수라는 고통스러운 수행과제를 부여잡고 번민한다. 맥베드는 악랄한 자신의 과오를 상기하고 양심의 송곳에 찔려 내적 고통에 빠지고, 오델로는 의심과 질투의 화염 속에서 몸부림치고, 오만한 리어왕은 잘못된 판단으로 배신의 늪에 빠져 허우적댄다. 한결같이 불완전한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작품들이다. 셰익스피어는 작품을 통해 자신이 탐색한 수많은 인간의 모습을 기록했다. 인간은 무엇인가? 연극은 세상과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래서 연극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이 가을, 셰익스피어를, 아니 우리 자신을 만나러 가보자! /이종훈 전주시립극단 예술감독

  • 오피니언
  • 기고
  • 2019.10.07 17:25

인증샷? 깜상, 돼지엄마, 앙드레김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표의 역할은 관객이 결제하고 입장하고 지정좌석에 앉는 것, 그리고 중간출입 시 확인하는 증서 정도? 글쎄다. 표에 대해 알려면 우선 극장의 변천사를 알아야 한다. 70년대 공연장은 거의 미지정석이었고 80년대 들어서며 좌석제와 등급제가 나타난다. 초기에는 A석과 B석 정도의 구분이었는데 세종문화회관 등 대형공연장이 자리를 잡아가고 해외공연들이 들어오자 S석이 생겨났고 88년을 전후하여 볼쇼이 발레 등 더 큰 공연들이 들어오며 R석이 생겨났다. 지금은 R석 보다 더 높은 등급으로 VIP석이 생겼고 영화관에는 연인들을 위한 커플석과 심지어 풀코스 요리가 제공되는 럭셔리 영화룸도 운영 중이다. 지금같이 카드결제와 인터넷 예매 그리고 좌석제가 정착되기 전에는 표에 얽힌 애환이 시대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읽어버린 표를 찾아주다 사랑이 싹트기도 하고 웬 횡재냐 하던 주은표로 절도범이 되기도 하고, 최고의 고객관리용 선물이었다. 지금도 K팝과 뮤지컬 공연 등에서 인터넷으로 암표거래를 한다니 격세지감이다. 가끔 전자결제로 사기를 치는 자들도 있다하니 아날로그시절에 마치 인생의 막장인 듯 몸으로 때우던 암표상하고는 차원이 다르다싶다. 암표사고가 나면 인간적으로 책임을 지던 모습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전국교교야구대회, 영화개봉관 등에서 암표장사로만 자식들을 키워 국내 대기업에 다닌다고 자랑하던 전설의 암표상 깜상 아저씨와 돼지엄마가 생각난다. 불법인 걸 알기에 극장 담당자가 나타나면 체면을 살려주려고 헐리우드액션으로 엄청나게 줄행낭을 놓고는 했었다. 이런 암표상들이 제작자들에게는 흥행의 바로미터였다. 그래서 제작자나 주최 측에서는 암표는 사지도 말고 팔지도 말자고 캠페인을 했지만 티켓오픈 전날은 암표상이 안 나타나면 어쩌나 잠을 못 이뤘고 새벽부터 매표소에 나아가 안 그런 척 암표상이 나타나기를 노심초사 기다렸다. 그러다 암표상이 나타나면 부서장에게 보고를 드렸고 전직원들이 환호를 지르기도 했다. 예전에는 제일 싼 표부터 매진이 되었다. 필자도 B석에서 보고 R석에서 본 것 이상으로 자랑했었는데 이제는 R석부터 매진이 되는 추세다. 돈을 잘 버는 직장인들은 당연해 보이는데 여유가 없는 대학생들도 알바로 번 돈은 물론 가불까지 하여 R석을 구입한다고 한다. 인증샷을 올리려고. 통계자료는 없지만 통설로 80년대 말까지 관객 구성비율은 전체의 80%가 여성이고 그중의 80%가 여대생 여대생의 80%가 모여대라고 하여 그 학교만 공연단체들이 앞다투어 전단을 나눠주던 풍경이 생각난다. 그런데 지금은 관객의 70%가 여성이고 여성의 70%가 직장여성으로 추세가 변했고 남성의 비중도 높아졌다. 티켓을 사업에 가장 잘 사용한 분은 앙드레킴일 것이다. 그는 흥행의 바로미터이기도 해서 주최사는 앙드레김이 예매를 했나 안했나에 일희일비하기도 했다. 그는 늘 객석의 맨 앞줄을 구매했다. 앙드레킴석이라 불릴 정도였다. 사실 앞줄은 고개를 들어야 해서 등급이 낮은데 앙드레김 때문에 R석이 되었다, 그는 예종이 울려 모든 관객이 막이 오르기를 기다릴 때 흰색옷의 본인과 아들이 귀족처럼 성장을 한 국내외 인사들과 귀부인들을 안내하여 무대 앞까지 나아가면 관객들은 뭔가 싶어 이 행렬에 집중을 하게 되니 이보다 더 좋은 홍보 기회가 있겠는가! 앞으로 티켓의 잠재적 가치는 인공지능과 연계하여 인류 문화의 발전을 위한 소중한 자료로서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19.09.30 16:55

안타까운 전주 어진박물관

김호석 수묵화가전 전통문화대 교수 초상화에서 어진(御眞)은 정점에 있다. 태조 어진에는 새 왕조가 지닌 자신감과 당당함 그리고 위엄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6년간 재임했지만 그의 권위는 조선왕조 500년 내내 계속 되었다. 최근 경기전을 찾았다. 어진을 모시는 공간은 50년 전이나 똑 같았지만 1872년에 이모한 어진이 1999년 모사한 것으로 대체되어 있는 것만이 달랐다. 어진의 정신적인 힘보다는 형식화한 공허함이 느껴졌다. 새로 모사 한 어진은 족자의 향 좌측 비단이 훼손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족자의 세로축 면이 안으로 말려 누추하기 이를 데 없었다. 150여 년 전에 완성한 어진과 장황이 지금도 날이 선 것처럼 반듯한데 이모한지 겨우 20년밖에 안된 모사본이 뒤틀려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몹시 불편했다. 지금의 어진 박물관은 태조 어진 박물관이라 명명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경기전과 어진 박물관에는 태조 어진이 5점이나 소장되어 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태조어진이 6번 모사된 것에 비해 최근 들어 특별한 계기도 없이 많이 그렸다. 문제는 같은 초본에 옷 색만 다르게 하거나 얼굴만 다르게 한 복제본이다. 특히 1837년 준원전 태조 어진에 대해 실록은 홍색의 용포 홍곤포라고 분명히 기술되어 있고 《영정모사도감의궤》에 안료 등 물량에 대한 내용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 성급히 판단하고 사업이 진행 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어진은 공산품이 아니다. 어진 박물관은 관내에 닫집을 만들어 어진을 모시고 있다. 닫집의 크기를 건물에 맞추다 보니 실제보다 작아졌다. 이러한 착오 때문에 어진과 공간이 만들어 내는 신성함과 당당함은 사라졌고 단순히 관람객을 위한 관찰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어진을 고정시키는 방식도 전통 방식이 아닌, 서양식 강철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곳에 1872년 본 어진이 1년에 한번 전시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감실은 비워 놓은 채 문을 닫아야 옳다. 어진은 어진에 맞는 격을 갖춰야 한다. 어진의 배치 및 박물관의 관람동선도 문제다. 남향으로 모신 어진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난 지금의 동선은 어진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건물 구조상 어진을 봉심하는 기본적인 공간이 확보되지 않는다. 나아가 어진 박물관이란 명칭에 걸맞게 어진을 그리는 목적이나 재료, 제작 과정, 장황의 단계와 장식 요소 그리고 완성 후 봉심에 이르기까지 전 제작 과정을 남겼어야했다. 이에 대한 전시 내용은 없었다. 박물관의 지하에는 모사된 다른 왕의 어진 6점이 전시되고 있다. 과거 왕의 어진은 모두 동일한 의미와 위치를 갖는다. 그런데 어떤 왕은 위에, 어떤 왕은 아래에 걸려있는 등 원칙이 없다. 형식 또한 액자와 족자로 기준이 없다. 어진에는 창작자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어진은 숭배의 대상이자, 왕조의 상징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진 중에는 화가의 이름이 전면에 병기되어 있는 것이 있다. 또 자신의 낙관까지 보란 듯이 찍었다. 참람한 일이다. 어진의 위엄을 훼손하는 일이다. 전시관의 위치도 문제이다. 정전은 남쪽을 향한다. 어진 박물관은 정전의 뒤쪽인 북쪽에 건립했다. 어진이 가지는 의미와 역사성을 볼 때 정전 뒤쪽에 어진을 모시는 것이 타당한가? 터 잡기 할 때 규봉은 극히 꺼리는 법이다 박물관에서 어진이 바라보는 방향은 전동성당의 종탑과 일치한다. 이런 점은 과거 고종이 영희전에 모신 어진의 방향이 명동성당의 종탑인 것을 알고 부끄럽다 며 진영을 경령전으로 옮긴 과거의 교훈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정신을 그린 찬란한 역사가 있다. 그것의 중심이 전주였다. 붓이 다하였어도 뜻만은 영원한 법이다. /김호석 수묵화가전 전통문화대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19.09.23 16:59

전북의 역사, 문화예술작품으로 거듭나야한다

문병학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일정이 여의치 않아 그동안 애만 태웠던 전북관광 브랜드 공연 뮤지컬 홍도 1589를 지난 주말에 관람하였다. 시내버스 광고판이나 거리에 게시된 배너 등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홍도? 홍도?? 고개를 갸웃거렸다지만, 이미 원작 소설을 읽은 나는 이 작품이 임진왜란 이전에 전라도를 중심으로 조직된 정여립의 대동계(大同契)를 빌미삼아 1589년 전라도와 충청도 등 전국의 수많은 선비들을 죽음으로 내몬 이른바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알려진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다룬 뮤지컬이며, 전북문화관광재단이 심혈을 기울인 전북관광 브랜드 공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연 관람을 위해 전북예술회관 긴 계단을 오르는 동안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울에서 온 이들은 지인의 권유로 전주한옥마을과 뮤지컬 홍도 1589를 연계하여 관람하고자 한 달 전에 입장권을 예매한 후 전북을 방문하였다고 했다. 전라북도가 문화관광 트렌드 변화에 발맞춰 전북의 역사를 문화예술작품으로 재구성하여 상품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 성과가 이렇게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도민 한 사람으로서 흐뭇하였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나라 혹은 도시에는 상징적인 기념물이나 시설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물이라든가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1889년 준공된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미국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가 선물한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그리고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광장,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등등이 그 나라와 해당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land mark)다. 한편, 기념시설물 이외에도 해당 국가와 도시를 상징하는 문화예술 공연들이 있는데, 중국 북경의 경극(京劇)이나 일본 도쿄의 가부키(歌舞伎) 등이 그것이다. 중국의 오페라라고도 불리는 경극은 베이징 관광의 필수코스로 포함되기도 하고, 전통음악과 춤, 연극을 융합시킨 일본의 가부키 공연장도 일본 관광의 필수코스로 포함되기도 한다. 말하고 싶은 것은 21세기 문화관광의 트렌드 변화에 발맞춰 우리 전북에서는 무엇을, 어디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가? 이점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답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 20세기 관광은 특정 국가나 도시를 찾아 유명한 기념시설물 앞에서 김치~하고 사진을 찍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21세기 문화관광은 그 나라와 도시의 문화를 느끼고 체험하는 패턴으로 확연하게 변화하였다.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전북에서도 그동안 새만금상설공연, 전주세계소리축제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런 속에서 지난 해 전북문화관광재단에서 뮤지컬 홍도 1589를 기획제작하여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고 상설공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작품이 21세기 전북관광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브랜드 공연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전라북도의 적극적인 지원과 전북도민의 다함없는 성원이 절실한 것 같다. 조선중기 정여립이 추구한 대동세상이 조선후기 동학농민혁명 최고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에 이르러 구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여립과 전봉준 등 전북의 역사와 인물을 문화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거듭남을 모색하는 것이 21세기 초입(初入) 전북문화관광 발전의 엄중한 시대적 요청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언사(言辭)일까? /문병학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 오피니언
  • 기고
  • 2019.09.16 17:27

전주(全州) - 한복(韓服)을 입다!

이종훈 전주시립극단 예술감독 전통한옥 양식으로 지은 전주역사(驛舍)는 전북을 대표하는 정거장 답지 않게 작고 아담해서 소담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 안으로 들어서니 한복을 입은 안내원이 밝은 미소로 전주를 찾아온 승객을 맞는다. 손님을 맞이하는 친절함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주변을 보니 편의점과 커피숍의 판매원들도 개량 한복을 입고 분주히 손님을 맞는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아 정감이 어린다. 밖으로 나와 택시를 기다리는데 의외로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 청바지에 재킷을 걸친 내가 이방인처럼 느껴진다. 택시를 타자 친절한 미소로 안녕하세요, 어디로 모실까요라며 인사하는 기사님이 선글라스에 개량 한복을 입었는데 구레나룻이 너무 멋져 꼭 영화배우 같다. 전주역을 벗어나 S자로 휘어진 마중길로 들어서니 밝고 화사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명주한복을 입은 두 중년부인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화안대소하는 표정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전북대 한옥 정문 앞에 이르자 염색을 한 듯 다양한 한복을 입은 삼삼오오 무리의 젊은 대학생들로 인해 마치 조선시대 향교 앞을 연상시킨다. 택시가 백제대로에서 팔달로 방향으로 좌회전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거리에는 마고자를 입은 남자와 두루마기 차림의 남자들이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양반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순간 이 택시가 나를 조선 시대로 안내하는 거로 착각하고 설렘에 들뜨기 시작한다. 기사 아저씨. 지금 이곳이 어디인가요? 예, 저기 건물 가운데 한옥 지붕이 보이는 곳이 전주 시청이지요. 두루마기와 마고자 차림의 남자분들은 시청 공무원들이고요. 전주시 공무원들은 한복차림으로 근무하는 걸 큰 자긍심으로 여긴답니다 이제 나는 오백 년 전의 조선 시대 한가운데로 와있다고 생각한다. 중앙시장 앞에 이르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이로 무명 한복차림의 아주머니가 백설기처럼 보이는 떡을 분주히 나른다. 무지개떡과 꿀떡 덕분인지 기름이 반지르르한 무명한복에도 무지개가 아른거리다 사라진다. 시장의 골목길을 바라보다 도착한 한옥마을은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로 인산인해다. 조선 시대에 이처럼 많은 외국인이 있었던가? 청사초롱 아래 파란 눈의 어린아이부터 금발의 팔순 노인네까지 다양한 한복 차림의 외국인들이 사진을 찍느라 좁은 길을 헤쳐 나가기가 힘들 지경이다. 너무 많은 인파에 밀려서 들어온 경기전 안에도 형형색색의 한복들을 입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베여 있고, 한국적인 정(情)과 전주의 꽃심이 고즈넉하게 담겨있는 옷인데 언제부터 외국인들에게 이처럼 사랑받는 옷이 됐단 말인가? 이곳은 전주-꽃심의 도시이자 양반의 도시요, 한복의 도시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민족 고유의 전통 복장을 하는 도시로 알려져, 세계 각 나라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라 시민들의 한복에 대한 자긍심과 애착이 뛰어난 곳이다. 올 추석 한가위-전주는 한복으로 인해 행복해지는 원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먼저 한복을 입고 전주 시내로 나설 때 전주는 행복한 한복의 도시로 탈바꿈한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시는 한복의 일상화가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생활이 되도록 뒷받침한다면 한복의 도시, 전주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한복으로 활기가 가득한 곳, 전주가 한복의 도시임을 전 세계에 알리는 날도 머지않았다. /이종훈 전주시립극단 예술감독

  • 오피니언
  • 기고
  • 2019.09.09 17:10

확대냐 축소냐 기로에 선 유료회원제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7월 1일 예술의전당은 연회비 10만원인 골드회원 기프트카드를 판매하기 시작했고, 세종문화회관은 신규회원가입을 중단했다. 유료회원제란 극장이 충성 관객을 확보하기 위하여 일정회비를 내면 일반 고객이 누릴 수 없는 입장권 할인을 비롯하여 주차, 연계 상품 및 부대시설 이용권과 할인, 회원 무료 초청공연, 특강, 공연안내물 발송 등의 혜택이 따른다. 나아가 무대 리허설 관람과 백스테이지 투어에 이르기까지 혜택의 영역은 끝없이 개발되고 있다. 그러자 공연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무료와 할인혜택만 쏙쏙 빼먹는 영악한 회원들이 생겨났으니 이른바 체리피킹족이다. 이들의 급증은 극장운영에 손해를 가져올 정도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예술의전당은 1989년부터 골드, 블루, 그린회원 등 3등급으로 유료회원제를 시행하여 현재 1만5천명 인데, 신임 대표의 독려 속에 이런 서비스 부담을 감내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미래 관객 발굴은 물론, 10만 계좌를 유치하면 생기는 100억 원을 창작기금화 한다고 쾌도난마의 기세로 진행 중이다. 한편 세종문화회관은 예술의전당보다 11년 뒤인 2000년 유료회원제를 도입하여 현재 연회비 5만원의 골드회원, 연회비 10만원의 프리미엄 회원등 2천500여 명이 가입되어 있는데 공연 할인, 선예매, 주차권, 식음료 교환권 등이 제공된다. 세종문화회관 관계자는 주차권과 프로그램북 제공 등 간접비용은 계속 증가하는데 충성고객 발굴 효과는 감소하고 있다. 또 인기 공연을 먼저 예약하려고 유료회원제에 가입했다가 바로 해지해버리는 일도 다반사 라고 하며 이미 할인이 적용된 시즌제 티켓에 유료회원 추가할인까지 중복되는 문제도 있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그렇다고 유료회원제 자체를 폐지하는 건 아니다. 기존 회원 혜택은 유지하되 신규가입만 잠정 중단하고, 내년에 새로운 회원제를 론칭할 계획이라며 무료회원을 대상으로도 다양한 마케팅을 진행하겠다고 여운을 남겼다. 유료회원제에 대한 위기는 점차 대규모 극장들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이와 같은 위기의 배경에는 체리픽킹 문제 외에도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1987년 호암아트홀을 시작으로 2010년대 초반까지 유료회원카드는 문화예술 애호가들의 자랑으로써 급성장 추세였다. 이를 주시하던 결제카드사들의 회원확보와 공연계 및 극장들의 수익증대 욕구가 맞아 떨어져 회원제와 별도로 할인혜택을 주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유료회원카드의 혜택과 크게 차이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티켓전문 사이트에서 유료회원제보다 훨씬 파격적으로 할인하는 사례가 늘어나 유료회원 가입자들의 공분을 사는 경우도 왕왕 생기고 있다. 하여 점차 유료회원제 존치에 대한 회의가 심각히 거론되고 있는데 한편에선 이제껏 무관심했던 무료회원들에 대한 혜택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번 양대 극장의 대조적인 대처법이 이러한 현실을 극명하데 보여주고 있다. 그럼 우리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의 회원제는 안녕하신가? 한편으로는 예술의전당의 적극성과 세종문화회관의 고민이 부럽기도 하다. 회원제를 확대할 것이냐 축소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고민 좀 해 봤으면 싶다. 물론 우리전당도 관리비용 대비 회원확대지침을 마련하여 실행 중이다. 아직은 여유가 있고 새롭게 독신자를 위한 회원제도 마련하였으니 누구나 바로 가입하시어 마음껏 혜택을 누리시라고 안녕함을 전한다.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19.09.02 17:42

전북도립미술관의 쇄신을 위한 제언

김호석 수묵화가전 전통문화대 교수 전북도립미술관은 도민들의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다. 또 문화 전북의 위상을 높이는 디딤돌이다. 그런데 도립미술관이 심하게 앓고 있다. 특정 문화 권력의 횡포와 인사권 전횡, 관장의 미래 비전을 방해하는 악습 등이 그것이다. 이런 내용은 국감이나 특별 감사를 통해 바로 잡아가야 할 일이다. 뜻있는 미술인들은 도립미술관의 구태를 일소하지 않은 이상 어떤 능력 있는 미술관장이 부임해도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나는 누구보다 전북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도립미술관의 환골탈태를 위해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전시 기획력이다. 전시 기획은 미술관의 꽃이다. 학예사는 전시로 말한다. 그래서 기획력은 역량을 평가하는 잣대다. 상당수 전북의 주요 미술가들은 기획력 부재를 첫 손에 꼽는다. 그 원인의 하나로 학예직이 비전공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거론한다. 현재 관장이외에 미술관학이나 미학 미술 비평, 미술사 등을 전공한 전문가가 없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비전문가로는 미술관의 순기능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라고 한 목소리를 낸다. 둘째, 합리적인 인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술관은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대부분의 미술관이 5년 임기 계약을 하는 이유는 창의력을 생명으로 하는 직업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혁신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전문가를 과감히 고용하여 정체된 미술관을 쇄신해야 한다. 그러나 전북도는 학예사 선발과 운용에서 전문성과 능력을 위주로 선발하지 않았다. 관장도 동의하지 않았고 도에서도 재임용을 거부 한 인사를 공모 형식을 통해 임용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심지어 특정인을 선발하기 위해 면접 때 질문 할 내용까지 상의했다는 소문이 미술계에 파다하다. 능력 있는 큐레이터가 절실한 상황이다. 셋째, 아카이브 구축에 대한 완성도 문제다. 전북 미술은 전북만의 독특성을 담고 있다. 문인화 정신과 선비문화 그리고 수준 높은 풍류에 기인한 바가 크다. 이런 인문 지리적 환경은 전북만의 예술적 성과물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대한민국 문화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왔다. 전통성의 구심점에 서있는 이삼만, 이정직, 최석환, 채용신, 송기면, 송성용 등은 전북 미술의 보배이면서 한국 서화의 원형 자원이다. 이들에 대한 아카이브가 얼마나 완성도 있게 구축 되어 있는지, 전담 학예사가 있는지 전공자에 의한 연구 성과는 어느 단계까지 진척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넷째, 도민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문화 향유 기회다. 전북 미술만의 정체성 이해와 한국 미술의 흐름 그리고 세계 미술의 현장도 중요하다 그러나 자기 차원을 문화적으로 향상 시킬 수 있는 실현 방안을 찾는 게 더 절실한 문제일 수 있다. 다섯째, 전북지역과 당대의 대표적인 미술품 수집과 평가 문제다. 미술관은 의미 있는 작품 수집에 집중해야한다. 시대와 역사의식을 반영한 작품 탄생 배경과 제작 과정까지 소상히 채록하고 연구해야한다. 작가의 작업 노트와 완성에 이르는 흔적까지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전북 지역에서 활동했던 작가, 예를 들면 군산지역에서 활약했던 박래현, 전주에서 간판 집을 하며 전통 수묵화의 재창조를 위해 예술혼을 불 태웠던 이응로부터 한국 수묵화의 국제적 위상 정립을 완성 시키려한 송수남까지, 이들에 대한 자료 수집과 작품 연구의 진척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묻고 싶다. 도립 미술관은 수집된 작품을 통해 도민의 문화 갈증을 풀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바로 줄탁동시의 조화다. 아울러 문화를 통해 동락과 대동 세상을 만들어가는 공간이 돼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기득권을 넘어 문화 창달을 위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작금의 사태가 일종의 춘화현상과 같은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상처는 치유 되어야 한다. /김호석 수묵화가前 전통문화대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19.08.26 16:09

탈구입아, 일본은 서구에서 벗어나 아시아로 귀환하라

문병학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온 나라가 뜨겁다. 한여름인데다가 일본 정부의 대(對)한국 수출규제 강화 조치,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 배제에 따라 항일 촛불집회와 함께 일제 불매운동이 불붙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올 여름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씀이 각별하다. 역사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사실을 바탕으로 그 역사적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 특히, 한국근대사에서 동학농민혁명 전후 10년의 맥락을 면밀히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동학농민혁명 10년 전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10년 후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2019년 여름 일본이 도발한 경제전쟁의 본질과 문제해결의 실마리 또한 이 시기를 찬찬히 살피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884년 갑신정변은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가 주도하여 3일천하로 끝난 실패한 정변이었다. 정변을 주도한 세력이 일본의 근대계몽사상가이자 엔화 1만엔권 초상화 주인공인 후꾸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와 그가 설립한 사립학교 게이오 기주쿠(慶應義塾) 등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놓치지 말아야할 대목은 갑신정변 직후 후꾸자와 유키치를 비롯한 일본 지배계층의 움직임이다. 갑신정변 당시 청나라는 프랑스와 베트남 지배권을 두고 전쟁 중이었음에도 조선에 군대를 보내 정변을 진압했다. 이런 상황은 김옥균 등 개화파를 움직여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일본에게 낭패스러운 것이었다. 그 낭패감은 갑신정변 사후처리를 위해 청나라와 일본이 맺은 텐진조약(1885.3.4.) 직후인 3월 16일 일본의 일간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를 통해 후꾸자와 유키치가 주창한 이른바 탈아입구(??入歐,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구라파로 들어간다)에 여실히 드러난다. 이후 일본은 영국, 프랑스 등과 연계하여 근대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특히 군사전략과 무기체계의 근대화에 혈안이었다. 일본의 이런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한 조선은 동학농민혁명 때 섬나라 일본이 대국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며, 설령 일으킨다 해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있었다. 현실은 정반대로 일본이 청나라를 물리치고 승리하였다. 그리고 다시 10년 뒤 러일전쟁에서도 영국 등 서구의 지원을 받은 일본이 승리하였다. 그 연장선상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놓여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19년 여름 일본이 국제질서를 어지럽히며 대한(對韓) 경제도발에 나섰다. 우리는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면서 항일 촛불집회, 일제 불매운동 등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일본의 경제도발 근원과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였는가를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한편, 동아시아와 세계 지성(知性)에게 물어야 한다. 태평양 패권을 장악하려는 세력과 그 행동대를 자처하면서 군국주의 부활에 사활을 건 아베와 일본의 극우세력을 두고만 볼 것인가? 탈아입구 이후 동학농민군 대학살, 난징대학살을 비롯하여 세계대전 당시 도처에서 행해진 양민학살과 성노예 문제 등 일본이 저지른 천인공로 할 만행을 잊었단 말인가? 일본에게 경고와 함께 강력히 요구한다. 아시아의 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하여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책임 있는 사죄와 함께 즉시 탈아입구를 폐기하고, 탈구입아(?歐入?), 서구를 벗어나 아시아로 귀환하라! /문병학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 오피니언
  • 기고
  • 2019.08.19 17:05

연극은 영혼의 치유소!

이종훈 전주시립극단 예술감독 20세기의 출발과 함께 시작된 한국연극의 여정은 가파르게 변화하는 정치사와 경제적인 곡선에 따라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면서 소용돌이와 정체를 거듭하며 힘겹게 굴러왔다. 여기에는 배우와 단체와 연극의 생성과 소멸, 유입과 변형, 갈등과 화해, 도전과 반응의 흔적들이 산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활동하고 있는 전북연극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전북에서 활동하는 연극인에 의하면, 연극만을 통한 자신의 월 평균 수입이 30만원 정도라는 말을 들었다. 연봉 사백만원에도 못 미치는 이 액수는 도시 서민의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수치라 망신스럽기도 하고, 예술의 자존심과 관계되어 차마 주변 사람들에게는 밝히기가 어려웠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공연(연극) 시장은 외형적으로는 서울을 중심으로 눈부시게 성장되었지만 지역은 하드웨어에 속하는 공연장만 설립되었을 뿐 소프트웨어인 창작콘텐츠 발굴과 연극인들의 창작 활동 지원 분야는 아직도 미세하고 불안정하여 기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형상이다. 전북의 연극인들 대다수는 지원금에만 의존하든지, 연극인 강사와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수입을 창출한다. 따라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창작 활동을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지원금을 타기 위한 정체모를 생소한 단체들, 눈을 씻고 들여다봐야 알 수 있는 공연 홍보, 그나마 공연 횟수 1~2회, 연극적 가치는 찾아보기 힘든 민망스런 열정만 돋보이는 연극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 전북연극의 현실이다. 이는 소액 다건의 지원금들이 주는 폐해들이다. 잘 쓰인 작품을 발굴하고 개발하여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을 통해 좋은 작품을 만드는 안목이 절실하다. 또한 미래의 관객 시장 확보를 위해 일찍부터 어린아이들에게 연극을 가르치고 관람하게 하여 문화가 자연스럽게 생활화되는 예술교육의 습관을 키워야 한다. 미국의 <국립예술교육협회> 선언문은 미국인들의 연극에 대한 의식을 잘 드러내 놓고 있다. 우리들이 아이들에게 연극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연극은 과학이기 때문입니다. 연극은 수학입니다. 연극은 외국어와 같습니다. 연극은 역사입니다. 연극은 신체훈련입니다. 연극은 말하기를 가르쳐주는 예술입니다. 연극은 사업입니다. 연극은 기술입니다. 연극은 경제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극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학생들에게 연극을 전공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연극을 공연할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편하게 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재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알게 하고> <세련된 감각을 유지하게 하고> <세상 속에 감춰져 있는 무한한 것에 다가가게 하기 위해서> <더 많이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더 많은 동정심과> <점잖음과> <착한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 한 마디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인지 학생들이 알 수 있도록 우리는 학교에서 연극을 가르칩니다 연극은 삶이요, 학교요, 영혼의 치유소다 라는 말처럼 연극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주는 좋은 문장으로 우리가 깊이 음미해 볼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종훈 전주시립극단 예술감독

  • 오피니언
  • 기고
  • 2019.08.12 15:42

기획자들의 타산지석, 고 남기남 감독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7월 24일, 남기남 영화감독께서 돌아가셨다. 평생을 소위 B급 영화감독이라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당당하게 살아오신 발자취를 관조해보면 누구보다도 자기만의 일관된 선택을 해 오신 삶이었다. 그는 영화계에서 짜투리 필름을 남기지 않아 필름을 왜? 남기남으로 불렸고 영화 빨리찍기의 대가로서 외화쿼터(quota)제에 얽힌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외화쿼터제는 1963년부터 1987년까지 외화수입으로 번 돈을 열악한 한국영화 발전에 재투자하게 하는 정책으로 일정 편 수 이상의 영화를 제작하거나, 영화상을 수상한 제작자에게, 외화수입권을 주는 제도였다. 이에 연말이면 의무제작 편수를 못 채운 영화사들은 편수 채우기에 피가 말랐고, 이들의 구세주가 촬영 5일에 편집 3일, 후반작업 2일, 합해서 열흘이면 뚝딱 영화를 만들어내는 남감독이었다. 이를 방증하는 유명한 일화가 출연 배우들이 상대 배우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남감독이 시키는 대로 자기 대사만 찍고 현장을 떠났고 스텝들도 너무 빨리 찍어 뭘 찍었는지 모르겠다 하는데도 나중에 남감독이 편집한 완성본을 보면 영화문법상으로 완벽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지금같이 현장에서 바로 확인하는 편집기가 있던 시절도 아닌데 남감독은 자신이 콘티요 편집기인 천재이셨던 것이다. 아마도 지금쯤 남감독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섰을 것이고 세계 각처에서 먼저 와 있던 수많은 영화천재들로부터 경배를 받고 있지 않을까 상상을 해 본다. 그는 24세 때부터 10여 편의 조감독을 거쳐 서른에 내 딸아 울지마라(1972 김지미 주연)로 데뷔하였고 다시 5년간 조연출을 한 후 불타는 정무문(1977), 불타는 소림사(1978)등 액션영화와 한국 B급 영화를 대표하는 평양맨발(1980)을 감독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87년 쿼터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빨리찍기 대가로서 명성을 쌓았고 이후 저예산, 속성제작, 어린이 관객, 개그맨 영입, 유행어를 전략화 한 남기남식영화제작기법을 완성한다. 이 5가지 전략은 당시 아이들의 유행에 맞춘 것으로 심형래 등 젊은 개그맨들을 끌어들여 기상천외하고 좌충우돌 활극인 아동영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그는 영구와 땡칠이9(1989)로 270만이라는 당대 최고의 관객동원을 기록한다. 이후 영구시리즈를 이어가던 그는 심형래씨가 영화제작에 뛰어들자 슬쩍 비켜서며 2000년대의 신세대 개그맨들과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큐라(2003)를 선보이는 등 노년에도 왕성하게 제작활동을 하셨다. 고희를 바라보며 달무리(2011년) 라는 작품을 준비하신다 들었고, 3년 전에 옛 제자들과 술잔을 기울이시는 모습을 충무로에서 보았다는 지인의 전언 이후 근황을 몰랐었는데...그동안 당뇨로 투병생활을 하던 중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40여 년 동안 100여 편의 영화를 남긴 그는 제47회 영화의 날(2009년)공로영화인상을 받았다. 내게는 아직도 평양맨발의 결투 장면이 생생하다. 삭풍이 불어대는 평양 강변에서 빵꾸 난 란닝구를 입은 이주일씨가 박치기를 하자! 갑자기 화면이 빨간 번개장면으로 바뀌며 뼈 부스러지는 뿌드드 소리와 함께 슬로모션으로 쓰러져가던 일본악질 마영달씨!- 남감독님의 부고를 받고 오히려 기획자로서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의 기상천외한 도전정신과 창의력, 영화콘티와 편집의 천재성, 흥행본능 등은 A급 기획자들에게도 타산지석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19.08.05 17:32

문화재의 숲을 만들자

김호석 수묵화가전 전통문화대 교수 제사 때 쓰이는 신위는 반드시 밤나무로 제작된다. 제기는 노각나무가 사용된다. 노각나무의 주산지는 지리산이다. 무분별한 벌채로 노각나무가 없어지자, 노각나무는 거제수 나무로, 그리고 물오리나무로 대체되었다. 1967년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벌목을 할 수 없게 되자, 은행나무가 제기의 주된 재료로 떠올랐다. 먹감은 곶감과 식초를 만드는데 최적이다. 이 나무의 중심 부위에는 탄닌이 산소와 결합하면서 생성시킨 검은 색 무늬가 있다. 조선 목가구의 단순하면서 쾌활한 멋은 이런 재료 선택에서 나온다. 지금도 임실과 고산의 먹감나무는 한국을 대표하는 진귀한 자원임이 분명하다. 전통 악기 특히 거문고에 사용되는 중요한 재료는 오동나무이다. 한국산 오동나무는 가볍고 탄성이 커 진동을 잘 전달한다. 울림이 풍부하고 음향 교환률이 높다. 나이테가 조밀하여 연륜 폭이 좁고 균일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무가 소리를 만들었다. 현실은 타이완산 오동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중국산 오동나무로 만든 악기는 공명이 적다. 우리는 옛 악기의 소리를 잃어버리고 있다. 옻나무는 가장 검은 색을 구현한다. 칠흑 같은 밤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옻은 따뜻하고 부패를 방지한다. 전국 어느 곳이든 잘 자란다. 옻은 한국 특유의 색상으로 깊고 공간이 숨 쉬는 특유의 서사가 숨어 있다. 대부분의 목조 문화재는 옻칠과 관련돼 있다. 도료로서 옻은 즙을 채취하여 생칠로 사용한다. 옻의 생즙 채취는 원주가 유일하다. 품질이 뛰어난 옻은 일본으로 수출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쓰이는 옻은 대부분 중국산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옻을 외면하는 사이에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은 옻칠로서 세계 공예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충북 옥천군이 옻나무 생산 단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신선하다. 전북은 칠보, 쌍치, 복흥, 장수, 진안 등 곳곳에 옻나무 자생지가 널려 있다. 찬란하고 섬려한 문화유산이 후손들의 무지로 시대의 주목을 받지 못함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무만 그런가. 고려조선시대 섬려한 문화를 창출했던 쪽 풀이 사라졌다. 지금 쪽 염색에 사용되고 있는 식물은 일본산이다. 1980년대 토착화 된 조선쪽이 사라진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예용해 선생이 일본으로부터 쪽 씨를 국내로 들여 온 이래 현재에 이르렀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염장은 일본산 쪽 풀로 염색하며 한국의 색을 자랑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문화재의 재료가 되는 나무와 풀은 위에서 거론한 실례를 훨씬 뛰어 넘는다. 소나무, 돌배나무, 느티나무, 솔송나무, 물푸레나무, 대나무, 신이대, 시누대, 참죽나무, 황칠나무, 닥나무, 꾸지나무, 애기닥나무, 산뽕나무, 황벽나무, 모시풀, 삼. 목화 등은 중요한 문화적 근거가 된 일차 재료다. 이런 재료들이 한반도에 어떻게 분포하는지, 경제적 수령이 된 나무가 얼마나 되는지, 실태 조사한 보고서를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고건축에 사용되는 소나무에 대한 실례는 있다. 2008년 숭례문 화재 사건이 나면서 삼척의 준경묘에 있는 것을 사용한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이 소나무 숲마저 문화재의 숲으로 지정된 것은 아니다. 산림청에서 지정한 문화재의 재료는 없다. 이것이 후손들이 계승하고 발전시켰다는 이 땅 임산자원의 현주소다. 지금부터라도 최소 100년을 내다보고 문화재의 재료가 되는 다양한 수종의 숲을 조성해야 한다. 문화재 별로 복원에 필요한 정확한 재료와 최적의 숲 조성을 위한 로드맵을 만들자. 전북은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임실의 먹감나무와 순창의 돌배나무, 닥나무. 부안의 소나무, 꾸지나무. 위봉산의 거제수나무. 대아의 애기 닥나무. 고창의 동백나무 등은 이미 최적의 자생지로서 의미를 지닌다. 전라북도는 산림을 자원화 할 수 있는 산림환경 연구소가 있다. 지금 부터라도 전국 최초로 문화재의 재료가 되는 나무를 모두 조사하여 전북 자체만이라도 산림문화를 선점해 나가야 한다. 눈 밝은 단체장이 필요한 이유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9.07.29 17:05

동학농민혁명 문화콘텐츠 개발 절실하다

문병학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전봉준이다. / 한 지경(地境, 고부군)의 인민이 강제로 빼앗김을 당하는 해(害)를 입었는데 너는 홀로 해를 입지 않았다 하니 무슨 까닭인가? 학구(學究)로 업을 삼아 전답(田畓)이라 하는 것이 3두락(斗落)밖에 되지 않아 아침에 밥을 먹고 저녁에 죽을 먹을 뿐이니 빼앗길 게 없었다. / 너는 해를 입은 것이 없는데 왜 난을 일으켰는가? / 일신의 해를 위해 기포(起包)함이 어찌 남자의 일이겠는가! 중민(衆民)이 원통하여 한탄(恨歎)하는 까닭에 백성을 위하여 해를 제거코자 일어섰다. / 다시 (삼례에서) 기포한 이유는 무엇인가? 너희(일본)가 개화(開化)라 칭하고 한 마디 말도, 한 장의 격서도 없이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都城)에 들어와 야반(夜半)에 왕궁을 격파하여 국왕을 핍박하기에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마음으로 일어나 너희들과 접전(接戰)하여 그 책임을 묻고자 했다. 위 문답은 전봉준 장군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된 후 일본 영사와 조선정부의 법무아문 심문관에게 조사를 받은 첫 번째(1895년 2월 9일) 심문기록의 부분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부정부패로 얼룩진 낡은 중세사회를 개혁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추구하였고, 일제의 침략에 맞선 반일구국항쟁이었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은 일제강점기와 해방이후 세계사적 차원의 동서냉전체제 구축시기에 빚어진 민족내부의 좌우대립, 민족분단,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반란사건으로 왜곡축소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져왔다. 그러다가 지난 1994년 혁명 100주년을 전후하여 전국에서 역사바로세우기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결실로 2004년 3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그로부터 15년 후인 지난 2월 동학농민혁명 국가 기념일(5월 11일)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지난 5월 1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정부주관으로 제125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동안 역사학계, 시민사회단체, 문화예술단체 등이 중심이 되어 동학농민혁명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민주운동, 근대민족운동, 근대개혁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제는, 국가기념일이 제정된 지금 기념사업의 새로운 지평 모색에 나서야할 때인 것 같다. 새로운 지평을 모색함에 있어 이성보다 감성에 어필하는 문화예술작품을 제작하여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제작공연된 뮤지컬 [금강]이나 음악극 [천명]을 비롯한 여러 연극이나 마당극 작품들은 대체로 갑오년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에서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에 방점이 두어졌다고 볼 수 있다. 흔히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말한다. 이제는 동학농민혁명의 동아시아, 세계사적 의미와 그 위상을 되찾아 21세기 한반도의 새로운 비전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문화콘텐츠 개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열흘 전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녹두꽃]이라는 방송드라마가 종영(終映)되었다. 지난 4월부터 총 48부작으로 제작방영된 이 드라마는 본격 역사드라마로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첫 번째 사례로 그 의미가 크다. 국가기념일 제정 등으로 형성된 이런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문화예술계에서 동학농민혁명 문화콘텐츠 개발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인 것 같다. 세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프랑스혁명을 꽃피운 뮤지컬 [레미제라블]과 같은 동학농민혁명 주제 문화예술작품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는가? /문병학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 오피니언
  • 기고
  • 2019.07.22 17:01

도시는 꽃심으로 활력에 넘쳐야 한다

이종훈 전주시립극단 예술감독 지난해(2018년) 10월 <전주시립예술단>의 전속단체인 <전주시립극단>의 상임연출로 부임한 다음 날, 주말을 맞아 산책을 할 겸 집 근처인 조경단을 찾았다. 전주 이씨의 시조인 사공 이한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라기에 전주 이씨인 나는 족보 책에서만 읽었던 조상님을 뵙는다는 마음에 감회가 새로웠다. 허지만 조경단 문이 잠겨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아쉬움에 문틈으로 묘역과 비각만 바라보면서 조상님께 인사를 올렸다. 주차장으로 내려온 나는 주변의 울창한 나무숲을 바라보다 주차장 나뭇잎 사이에 가려진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 연극인 박동화선생의 흉상이었다. 연극인 흉상이 숲속에 설치된 것은 전국에서 오직 하나뿐이다. 전주에 와서 연극을 하게 된 나로서는 전북을 대표하는 연극계 원로선생님을 뵙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흉상 앞에 잠시 묵념을 드렸다. <소리의 전당> 공연장인 연지홀 앞이나, 연극인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에 자리 잡았더라면 더욱 좋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전북 연극인들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발길을 돌려 지척에 있는 전주의 대표적인 소설가 최명희 묘가 있는 <혼불 문학공원>을 향했다. 문학공원이라 이름 붙여져 많은 사람이 오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사람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고 낙엽만 바람에 실려 바닥을 쓰는 모습이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돌 판에 새겨진 작가의 글들을 읽으니 혼불의 등장인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글을 읽을 때마다 청암부인, 강모, 허요원의 삶의 흔적들이 스치듯 지나간다. 꽃심의 작가 최명희는 전주를 꽃심의 도시로 만들어 주었지만, 그녀의 묘에는 빛바랜 꽃잎이 볼품없이 떨어진 꽃다발 세 개가 몸을 비틀며 주인을 지키고 있었다. 전주 시민이 된 지 8개월이 지난 요즈음 건지산을 산책하며 즐거운 상상력에 빠진다. 전주는 꽃심의 도시고, 전주의 정신이라고 하는데 꽃을 피워내는 힘, 새로운 문화와 세상을 열어가는 강인한 힘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는 없을까? 전주를 처음 찾는 사람들에게 아, 이래서 전주를 꽃심의 도시라고 하는구나 라고 보여줄 그 방법은 무얼까? 꽃심 전주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특징이 무엇일까라는 고민 때문이다. 연극을 하다 보니 상상력은 나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은 미래의 시사회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전주역 앞의 마중길을 사시사철 꽃길로 장식하면 어떨까? 마중길은 850m라는데 너무 짧지 않을까? 경기장 사거리 로터리까지 꽃길로 장식하고 로터리엔 대형 꽃밭을 만들어 꽃심의 정점(꽃심을 상징하는 조각상)을 설치한다. 나는 전주를 찾는 사람들이 자신을 마중하는 꽃길을 보며 전주가 꽃심의 도시임을 떠올리는 생각을 하며 즐거워한다. 전주는 한옥마을로 대표되는 도시다. 그래서 양반의 도시라고도 하는데 한옥마을엔 양반이 없다. 어딜 가면 양반들을 볼 수 있을꺄? 아니다, 양반들을 거리로 불러내자! 품격있는 양반 조각상들을 만들어 전주시내 광장이며, 정거장, 공원, 쉼터로 불러내자! 다양한 모습의 양반 조각상으로 그들을 도시의 시각적 이미지로 디자인하자! 뉴욕의 황소상(charging bull)과 겁 없는 소녀상처럼! 도시는 꽃심과 양반으로 활력에 넘쳐야 한다! /이종훈 전주시립극단 예술감독

  • 오피니언
  • 기고
  • 2019.07.15 17:20

귀한 만남의 초심을 늘 간직하겠습니다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올 1월 나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를 맡은 이래 바쁘게 지내오며 간간이 틈이 날 때면 한 분을 찾아보곤 했다. 18년 전인 2001년 개관을 앞둔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의 예술감독을 맡아 밤새워 일을 해도 -그 덕분에 9월 11일 새벽, 잠을 쫓으려고 켜 놓았던 TV에서 뉴욕 무역센터가 재난영화의 한 장면같이 무너지는 현장을 전율 속에 지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손으로는 끊임없이 일을 하며- 시간이 부족하던 때에 큰 도움을 주신 분이셨다. 어린 딸아이와 사내아이를 둔 어머니셨는데 개관 초창기 홍보와 관객 모으기에 당신의 일처럼 참여하셨고, 극장예절 정착에도 솔선수범 하셨으며, 자녀들 또한 적극 참여시켜 당시 오즈의 마법사 공연에 동물역으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고마워하는 우리에게 그분은 아이들에게 문화가 무엇인지 어려서부터 알게 하고, 본인도 문화활동에 참여한다는 즐거움 때문이라 하셨다. 개관 후에 나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떠나게 되었고, 그후 늘 이분께 고마움을 전하지 못한 부담을 느껴왔다. 그래서 부임 후 나는 우리전당의 회원명부도 들여다보고, 개관 때부터 근무 중인 직원들에게도 물어보고 했지만 어디서도 그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3월 12일 오후 2시 11분. 우리직원이 외부에서 온 전화인데 대표님을 찾는다고 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니 맞아, 목소릴 들으니 서현석 감독님이 맞네요. 저 ㅇㅇㅇ예요, 감독님. 순간 나도 알았다. 바로 내가 찾던 분이라는 걸. 너무 기뻐 눈물이 날 것 같다는 말씀에 나도 눈물이 날 뻔했다.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서현석? 혹시나 동명이인인가? 확인하고자 전화를 하셨다니 잊지를 않고 계셨음에 가슴이 잠에서 깨어나듯 뭉클 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분과 나는 서로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등등 얘기 끝에 내가 아이들도 많이 컸겠네요 하니 웃으시며 딸아이는 시집을 갔고 아들은 대학 졸업반이에요.라고 하셨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는 그저 똘망똘망 아이들로 남아 있었던 거였다. 나도 올 9월이면 할아버지가 된다는 등 신변얘기가 이어졌고, 빠른 시일 내에 뵙기로 하고 나의 전화번호를 알려드렸다. 그 때가 오후 2시20분경 이었다~ 반가움을 가라앉히고 업무 중인데 4시가 조금 넘었을까, 웬 아저씨가 내 사무실로 들어 오길래 손님이신가보다 했더니 꽃배달을 왔다며 수령증에 싸인을 하라셨다. 싸인을 하며 1월에 축하 꽃은 거의 받았는데 누구지? 하며 예쁜 카드가 있어 열어보니 바로 ㅇㅇㅇ 어머님께서 보내신 꽃바구니가 아닌가! 아마도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보내셨나 보다. 이렇게나 큰 감격은 내 아내가 드디어 결혼해주겠다고 한 순간 이후 처음이었다.18년 동안을 잊지 않고 나에 대해 궁금해 하고 찾으셨다니, 이런 대접을 언제 또 받을 것인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또 한 번 울컥. 나에게 전당을 떠나 있던 18년은 안타깝지만 잊어야 하는 아릿한 추억의 편린이 아니라 숙성의 시간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깨닫도록 자긍심을 북돋아주신 고마운 그분께 다시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내년 개관 20년을 맞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은 예향 전북의 자랑이요 도민의 삶 속에 한부분이 되도록 더욱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ㅇㅇㅇ어머님 같은 도민 여러분의 성원과 참여가 더해지면 금상첨화가 될 것입니다! 도민 여러분의 행복과 번창을 기원합니다.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19.07.08 17:18

한지를 한지라 하지 못하고…

김호석 수묵화가전 전통문화대 교수 한지는 없다. 아니 지금까지 우리가 한지라고 부르고 있던 종이는 한지가 아니다. 전주는 조선시대 최상품 한지 생산지였다. 그 한지 위에서 맑고 투명한 조선 미술이 꽃을 피웠다. 다양한 기록들이 세계적 유산이 되었다. 그러던 한지가 중국, 일본에 밀려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이다. 중국 전통 종이인 쉔지는 2009년, 일본 전통 종이인 와시는 2014년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 이유에 대해 짧은 글로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또 한지의 우수성을 연구 용역을 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한, 한지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첨단 과학시대, 현대 한지의 질은 어떤가. 조선시대의 것과 비교했을 때 물리화학적 특성에서 크게 뒤떨어진다. 전국의 한지 장인 대부분을 참여시켜 조선 정조 시대의 한지를 재현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기준이 되었던 전통한지와 재현한 한지를 비교한 결과 전반적으로 차이가 두드러졌다. 이에 대해 한 한지 전문가는 이 시대의 장인들이 조선시대 수준의 한지를 만들기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원형을 되살려 재현한 한지로 정부포상을 수여하려는 계획도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나서서 전통문화의 원형을 발굴, 조사하여 미래 자원을 위한 동력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연구는 일회성에 그쳤다. 더 나아가지 못했다. 문화수준의 한 단면을 보는 듯 했다. 한지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서화와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기본이 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전주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한지 원형 재현 사업은 늦었지만 고무적이다. 조선시대의 종이를 재현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더 나은 미래로 가기 위해 지난날의 잘못과 한계를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 조선시대 한지 제작 방식을 알지 못한다. 특히 한지의 특성인 질기고 윤기가 있는 수준의 품질은 현재의 장인 기술로 따라가기 힘들다. 한지 수명을 결정짓는 섬유의 배향과 인쇄성을 높이는 평활도는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다. 둘째, 한지의 재료가 되는 닥나무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부족하다. 한국 토종인 닥나무가 애기닥과 꾸지나무와의 사이에서 생성된 잡종임은 최근에 밝혀졌다. 닥나무 품종에 관한 기본 연구조차 안 되어있다. 조선시대에는 각 지역마다 특색이 있는 닥나무가 존재했다. 지역 특산 닥나무 품종에 대해 실태 파악도 안 되어 있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통일되어 단품종 만이 존재한다. 이 또한 암컷만 있음으로 인해 종이의 품질이 향상되지 못했다. 제대로 된 연구를 위해서는 애기닥나무와 꾸지나무를 키워 1대 잡종인 닥나무를 생육 시켜야 한다. 닥 섬유의 연구는 한지 연구의 출발이며 기본이다. 과학적이고 실천적인 연구가 절실하다. 셋째, 정부가 시행한 정책과 사업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정부는 한지의 본질적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지에 대한 개념 정립이 안 되어 있고 품질 기준조차 없다. 심지어 K.S 표준조차 터무니없다. 문화재 수리 규정에 전통 한지를 사용하라는 규정조차 없다. 정부 부문에서조차 한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정부의 이러한 무지는 현재까지 진행된 주먹구구식의 한지사업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넷째, 민간부문에서 전통한지 소비 시장이 무너졌다. 한지에 대한 품질 규정이 없으니 공예용 한지가 주를 이룬다. 이러다보니 전통한지를 구입하려해도 구입 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한지제조 업체가 1996년 64곳이었던 것이 2018년 현재 21곳으로 줄었다. 이에 대해 중요무형문화재인 지장은 인간문화재가 된 것은 가문의 영광이지만 국가에서 종이 한 장 사가지 않아서 서운했다는 말을 남겼다. /김호석 수묵화가전 전통문화대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19.07.01 18:02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