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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있는 보물, 그 보물을 발견하자

신정일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우리 땅 걷기 대표 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서 아! 하고 말을 잇지 못하면서 경탄을 금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 아름다운 경관이 그 순간 가슴 속에서 잠자고 있던 영혼에게 말을 건넨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파우스트 박사의 영혼을 앗아가려고 온 메피스토텔레스에게 파우스트가 말한다,내가 순간을 향하여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말을 한다면 너는 나를 꽁꽁 묶어도 좋다. 그럼 나는 기꺼이 멸망해도 좋으리라. 그런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보고 경탄하면서 무아지경에 빠져 있을 때, 그때는 누가 내 목을 쳐가도 좋고, 나를 붙잡아가도 괜찮은 것이다. 일순간에 그 자신을 잊어버리는 보석같은 풍경들이 우리들 곁에 있는데, 그 보석의 진가를 아는 사람은 극히 적다. 경주시의 바닷가에 꽃처럼 펼쳐져 동해바다를 수놓고 있는 읍천리 주상절리가 있다. 그 주상절리가 온 나라에 알려진 것은 2011년 무렵이었다. 원래 군 초소가 있어서 2007년 부산 오륙도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해파랑 길을 처음 걸을 때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땅 걷기의 제안을 통해 해파랑 길이라고 명명된 그 길을 두번 째 걷고 있다가 초소에 사람이 없어서 들어갔는데, 그 초소 앞에 통천의 총석정에 기둥처럼 서 있는 주상절리와 달리 바다에 연꽃처럼 주상절리가 펼쳐져 있었다. 그때 그 경이로움과 경탄으로 촬영한 사진이 <우리 땅 걷기>를 통해 언론에 알려진 뒤 그때까지 집 한 채 없었던 그곳이 대처가 들어섰다. 후일담이지만 그때 나와 함께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그곳에 땅을 샀더라면 큰 돈을 벌었을 것인데, 그 진가를 너무 늦게 알았던 것이다. 중국의 장가계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 불과 몇십 년 밖에 안 된 것처럼 읍천리 주상절리가 있었던 것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얼마 전에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회에서 변산의 직소폭포 일원을 국가명승으로 심의 의결했다. 국립공원안에 있던 명소로만 알려졌던 것을, 산림청 국가 신림문화자산으로 선정했다가 이번에 국가 명승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전라북도에 그러한 곳이 여러 곳이 있다. 임실군 덕치면 구담리에서 동계면 회룡마을의 물돌이동을 지나 장군목에 이르는 구간, 용궐산과 무량산 사이의 섬진강이 바로 천하의 절경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곳이 국가 명승이라는 것을 모른다. 진안 용담의 섬바위에서 감동마을로 이어지는 금강 벼릿길이나. 조선시대 혁명가인 정여립이 꿈꾸었던 대동사상을 품고 있는 진안 죽도와 천반산 일대의 절묘한 풍경도 명승 중의 명승이다. 또한 부안 개암사는 백제 부흥운동의 역사를 간직한 우금산성이 있고, 이매창의 문학의 산실이기도 하며 원효굴이 있는 울금암의 절묘한 풍광을 간직한 곳이다. 변산의 아름다움은 그것만이 아니다. 전나무 숲이 아름다운 천 년 고찰 내소사와 변산의 풍경. 그리고 여암 신경준의 자취가 서린 순창 강천산 자락의 강천사 주변 풍경도 훌륭한 명승 유적이다. 이런 문화유적들을 국가에서 명승으로 지정하도록 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네 눈이 미치는 곳에 네 보물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6장에 실려 있는 말과 달리, 보물이 아니라고 여겨서 그런지 우리 곁에 있는 보물을 모른다. 사람도 역시 그러하다. 내 곁에 보물 같은 사람이 있는데, 그 보물을 알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그 보물을 찾고 있다. 우리 모두 내 곁에 있는 보물을 찾아내고 보존하자. /신정일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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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30 16:30

재난 가운데서 그리는 또 다른 미래

박문칠 다큐멘터리 감독우석대 교수 사상 초유의 코로나19 사태를 맞아서 많은 이들이 재난 영화나 좀비 영화를 찾고 있다. 위기의 순간 드러나는 인간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데에는 이만한 선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미 좀비 영화의 상상력을 뛰어넘은지 오래다. 전지구적 위기를 맞아서 우리는 이제껏 본 적 없는 풍경과 조치들을 목도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유례없이 재난 기본소득이 검토되고 있고, 해외에서는 통행금지, 한시적 해고금지, 일시적 병원 국유화 등이 단행되었다. 전시 상황이나 혁명정부 하에서나 볼 법한 조치들을 보면서 좀비 영화보다, 켄 로치 감독의 <1945년의 시대정신>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지난 세기를 뒤흔들었던 전지구적 위기를 꼽자면 2차 대전을 빼놓을 수는 없다. 역사책을 들춰보면, 당시 상황이 지금과 흡사하게 느껴진다. 각국 정부는 전쟁 승리라는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배분했으며, 시민의 안녕을 책임지기 위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식량배급이 실시되었고, 생필품과 군수물자 생산에 대한 국가 통제가 이뤄졌다. 전시라는 비상상황이라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흥미로운 점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이러한 경향이 한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전쟁이라는 삶의 위기는 사람들에게 각자도생보다는 함께 살기가 더 낫다는 교훈을 남겼고, 이런 정신은 전후 서구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결실로 맺어졌다. 영국의 경우, 노동당 정부가 집권하면서 전국민 무상의료시스템인 NHS (National Health Service)가 도입되었고, 국가 기간산업은 국유화되었으며,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보험(National Insurance)이 확대되었다. 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민의 삶을 책임지는 사회 시스템이 마련된 것이다.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에 직면해서 집단적으로 터득한 삶의 지혜, 즉 나 하나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정신이 전후 복구의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 당시의 시대정신을 담은 영화가 제목 그대로 <1945년의 시대정신>이다. 코로나가 지나가고 평온한 일상을 되찾을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 하지만 팬데믹과 같은 전지구적이고 체계적인 위기는 갈수록 늘어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꼭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전 세계는 이미 온난화와 생태계 파괴와 같은 기후위기, 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난민 문제 등 심각한 위협에 놓여 있지 않은가? 피할 수 없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 철저히 대비하자. 금번 위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이미 전시상황에 버금가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실천하고 있다. 헌신하는 의료진, 마스크가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내 것을 기꺼이 내놓는 사람들, 고생하는 택배기사를 위해 간식과 응원쪽지를 남기는 사람들. 그리고 정부와 지자체 차원의 획기적인 지원책들. 이렇듯 위기의 순간 발휘되는 공동체 정신을 바탕으로 취약계층을 보호하고 시스템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기여할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방법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방안들이 코로나에 대한 일시적인 조치가 아니라, 보다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중장기적인 사회개조 프로젝트의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2차 대전이라는 끔찍한 인류사의 불행을 딛고, 복지국가를 건설한 지난 세기의 교훈처럼 우리도 위기를 기회 삼아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사회를 예비해보면 어떨까? /박문칠 다큐멘터리 감독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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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23 17:39

매화가 지기 전에

이흥재 정읍시립미술관 명예관장 무릇, 옛 선비들은 사군자 중에서도 매화를 으뜸으로 여겼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화폐를 보더라도 오만원권 지폐에 매화가 그려져 있다. 오만원권 뒷면에 그려진 묵매는 조선 중기 화가, 설곡(雪谷) 어몽룡(魚夢龍, 1566~1617)이 그린 월매도(月梅圖)이다. 오랜 세월 풍상을 겪은 고목을 보름달과 함께 그렸다. 굵은 줄기의 중간이 툭툭 부러져 있고, 그 줄기에서 새로 난 가지는 힘차게 쭉쭉 뻗어 둥근달과 함께하고 있다. 가지에서 피어난 매화는 역경과 시련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강직한 선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여백을 한껏 살려 달에 닿을 듯 씩씩하게 뻗은 매화 가지의 조형은 오히려 시적이다. 천원권 지폐에는 퇴계 이황의 초상 옆에 매화가 그려져 있다. 1570년 겨울, 퇴계 이황 선생이 숨을 거두며 마지막 남긴 유언은 매화분에 물을 주라였다. 이 말은 평생을 매화와 함께했던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 퇴계의 정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오만원권, 천원권 지폐에 매화가 그려져 있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옛사람들은 매화가 피면 친구들을 불러 매화시를 읊고 감상하는 잔치를 열었다. 이를 매화음(梅花飮)이라 하는데 당시 문인들의 풍류문화의 하나였다. 꽃이 귀하여 하는 잔치이기도 하지만 꽃이 피면 찾아오는 봄이 반가웠던 것이다. 단원 김홍도가 생활이 어려웠던 만년 시절, 선금으로 받은 그림값으로 매화분을 사고 친구들과 매화음을 여는데 쓰는 바람에 식량 살 돈이 부족했다는 고사가 있다. 이를 보더라도 당시 사람들의 매화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 우봉 조희룡의「매화서옥도」는 매화 그림의 백미라 하겠다. 조희룡은 매화와 관련된 그림을 많이 그린 화가로서, 매화를 심어 감상하고 매화시를 읊으며 자신의 처소를 매화백영루라 했을 만큼 매화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는, 평생을 매화를 부인 삼아 살았던 임포의 삶을 동경하여 그 마음을 매화서옥도에 담았다.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는 난만하게 피어, 마치 함박눈이 내린 것처럼 흐드러진 매화에 둘러싸인 조그만 서재에서 선비가 글을 읽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매화서옥도는 향설해(香雪海) 즉, 매화의 향기와 꽃이 바다와 같은 풍경으로 펼쳐져 있다. 눈처럼 흩날리는 매화는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조희룡의 현대적 조형 감각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추사 김정희는 제자 조희룡을 문기(文氣)가 없다고 무시하기도 했지만, 의연하게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간 우봉 조희룡의 삶은 오히려 매화처럼 아름답게 피어난 것이다. 옛 그림을 읽는 것은 단순히 옛것을 보는 게 아니다. 옛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분으로 지속하고 있다. 우리는 이 지속성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일부를 다시 찾을 수 있으며 오랜 기억과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옛 그림과의 만남은 진정한 자기 회귀라 하겠다. 자기 회귀란 자신을 긍정하되, 자기에 갇히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통해서 자기를 재창조해 내는 과정이다. 여러모로 힘든 요즘, 잠시 짬을 내어 구례 화엄사 홍매화나 가까운 공원의 매화를 만나보자. 깊고 고운 색, 그윽한 향기를 직접 느껴보면 매화를 사랑했던 선비들의 마음과 그 사랑을 흠뻑 받은 매화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지 않을까? 흐드러진 매화를 카메라에 담으며 화하주(花下酒) 한잔으로 시름을 달래보면 어떨까? /이흥재 정읍시립미술관 명예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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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16 16:50

마스크가 드러내는 것들

이재규 우석대 교수 마스크 대란이라는 말이 연일 뉴스의 중심에서 오고간다.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코로나 시대를 증거하는 한 풍경으로 오래 기억에 남게 될 것이다. 1월말 중국 우한이 전격 폐쇄되고 역병이 밀려드는 기세를 보도하는 뉴스가 급증하면서 대중의 공포는 자꾸 덩치를 키웠다. 자가 격리, 모임 자제, 공공장소 폐쇄 등이 권고되고 마스크 착용이 거의 의무처럼 통용되면서 마스크 수요는 공급을 단숨에 앞질렀다. 빠른 속도의 진단과 격리, 치료에서 보듯 감염병에 대한 우리 정부와 의료진의 대응 수준은 세계가 주목할 정도이지만 일부에서 마스크 공급의 혼선을 정략적으로 오도하고 공격하면서 코앞으로 다가온 총선에서 마스크는 민심의 향방을 결정할 정도로 커졌다. 마스크는 본질상 차단하고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 내 코와 입을 가림으로써 외래의 것을 차단하고 본의 아니게 내가 피해를 주는 것을 막는다. 마스크는 의료 현장이나 재난의 장소에서는 이렇게 안전의 도구이지만 사회적 의미에서는 신분의 노출을 막는 가림막으로 쓰여 왔다. 영화 <조로>나 <베트맨>에서 사회악을 물리치는 숨은 영웅은 마스크를 쓰고 나타난다. <브이 포 벤데타>에서처럼 저항에 동의하는 익명의 군중들이 상징으로 내세우는 가면은 <조커>에서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가진 어릿광대 악당으로 전변하기도 한다. 마스크는 얼굴이 드러났을 때 확인되는 개별적인 정체성을 소거하고 무리 중의 하나로 개인을 위치시킨다. 위협이든 저항이든 어떤 의미에서이건 마스크는 그곳의 장소와 시간이 비상한 상황임을 드러내는 비일상적인 표지다. 모두가 마스크를 쓴 군중들로 가득한 도시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는 이는, 위기에 처한 공동체를 위협하는 외래의 것이거나 방종한 이탈자, 지극히 개인적인 사람으로 취급된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소망하는 것은 마스크를 벗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을 되찾고 개인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역병 소식이 돈 지 한두 달 만에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해버린 일상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존 버거의 소설 끝부분에는 많은 이들이 죽고 집이 파괴되는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이야기가 나온다. 희망은 일시에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초능력을 가진 구원자에게서 오지 않는다. 작가는 매 순간, 매일의 삶이 의존하는 규칙성에서 희망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규칙성에는 박자가 있어요. 아주 희미하고, 들리지 않을 때가 많고, 심장박동과 비슷하죠. 그곳에 환상이 들어설 자리는 없어요. 그 박자가 외로움을 그치게 해주지도 않고, 고통을 치유해 주지도 않으며, 전화로 그 박자를 전해 줄 수도 없죠. 그건 다만 당신이 어떤 공통의 이야기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줄 뿐이죠.우리의 삶이 끝없는 불규칙성에 빠져 버렸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 그것은 일상의 소중함이다. 끼니 때가 되면 주섬주섬 밥을 챙겨 먹고, 친구와 술잔을 나누고, 무용한 농담을 하다가 누군가를 돌려 욕하고 응원하며, 눈 오는 풍경 하나에 감탄하며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의 회복. 그것만이 종종 치욕을 안기는 이 삶을 지탱하게 한다. 다음 세대에게 이 불완전한 세계를 남겨주고서야 자연스럽게 종료될 내 소소한 일상이 이토록 그리운 것은 처음이다. 코로나가 물러가면 그동안 금지되었던 것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보복소비가 찾아올 것이라고 한다.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바람과 햇빛, 풍경, 좋은 사람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주는 다정한 목소리는 어떻게 보복해서 되찾을 수 있을까. 빼앗긴 시간을 두 배로 되찾을 순 없지만 소중한 것들을 비로소 깨달은 마음만큼은 오래 저장해두고 싶다. /이재규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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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09 15:46

당이 다르면 옷도 다르고, 인격이나 언동까지 다르다

신정일 문화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 화양동구곡이 있다. 그곳에 있는 암서재는 서인의 영수로 이름을 드높인 우암 송시열이 머물며 제자를 가르쳤던 곳이다. 바로 옆에 일명 큰절이라고 부른 환장사(煥章寺)가 있다. 환장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절 앞에 여덟 가지 소리가 난다는 팔음석(八音石)이 있고, 숭정황제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넉 자와 의종황제의 친필인 사무사(邪無邪) 석 자가 보관되어 있다. 화양동서원이 한창 드날리던 시절 이 절의 한 스님은 이곳에 들르는 사람들의 형태만 보고도 그 사람이 어떤 당파에 속해 있는 지를 정확하게 알아냈다고 한다. 예를 든다면 만동묘 앞을 지날 때 공경하고 근신한 뜻이 안 보이며 활달하게 떠들고 지나가는 사람은 진보적이던 남인(南人)이었다. 또한 만동묘에 이르러서 쳐다만 보아도 감개무량하게 여기고 몸을 굽혀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보수적인 노론(老論)이고, 그저 산수구경을 간단히 하고 만동묘 구경도 절차를 무시한 채 와서 절에 와서는 중을 곧잘 꾸짖었던 사람들은 혁신적인 노론(老論)이라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색에 대한 강인한 집념은 당색에 따라 옷의 디자인이나 헤어스타일도 달리하였다고 한다. 노론 가문의 부녀자는 저고리의 깃과 섶을 모나지 않고 둥글게 접었으며 치마 주름은 굵고 접은 수가 적으며, 머리 쪽도 느슨하게 늘어서 지었다. 이에 비해 소론 가문의 부녀자는 깃과 섶을 뾰족하고 모나게 접었다. 이처럼 모난 디자인을 당(唐)코라 불렀으며 소론 가문을 당코로 속칭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치마 주름 수도 많고 잘며 머리 쪽도 위쪽으로 바짝 추켜 지었고 이 같은 옷매무새나 머리모양은 그들 당의 정신과 너무나 잘 부합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곧 노소론의 분당 원인은 주자학(朱子學)을 둔 보수적 해석과 혁신적 해석 때문이며, 곧 보수혁신이 그 분당의 분기점이었던 것이다. 당코처럼 날카로운 디자인, 잔주름 많은 치마, 바짝 올려붙인 머리 쪽이 혁신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고, 완곡한 옷깃, 굵은 치마 주름, 느슨한 머리 쪽은 보수적 이미지를 물씬 나게 한다. 그들이 속해있던 당색이 인격이나 언동(言動), 그리고 옷차림새에까지 배어버린 것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이와 같이 당색과 인간이 절충 융합해 있었던 같다. 그러한 당색들이 오늘날까지도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동인과 서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져 왔고, 노론, 소론으로 이름은 계속 바뀌면서도 당색은 더욱 깊어져 갔다. 그러한 폐단 때문에 질곡의 세월을 보낸 끝에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의 말은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정사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이익만 도모하고, 실상 나랏일을 걱정하는 사람은 적다. 관직을 매우 가볍게 여기고, 관청을 주막같이 생각한다. 조선시대의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현대에도 당마다 옷 색깔이 다르다. 노란색이나 , 파란색, 또는 빨간색으로 당의 특색을 나타내고, 그들만의 고유언어로 상대방을 공격도 하고, 같은 당을 똘똘 뭉치는데 활용하기도 한다. 오랜 세월 속에 또 한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나하고 생각이 같으면 군자(君子)고, 나하고 생각이 다르면 소인(小人)이다라는 허균의 군자소인지변이라는 말이 하나도 변형되지 않고 진행되어 왔다. 그래서 제 눈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만 보인다는 속담이 무색하지 않은 세상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우파네. 좌파네 하며 서로의 등을 떠밀며 날 선 칼을 겨누고 있는 그러한 세상 속에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역사의 거센 풍랑에 흔들리고 있다. 이 배가 정박할 따사로운 항구는 어디에 있는가? /신정일 문화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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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02 15:36

아카데미 시상식과 소수자 재현의 문제

박문칠 우석대 교수 아카데미가 달라지고 있다. 올해 시상식은 여성, 유색인종, 장애인, 비인간 동물 등 다양한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애쓴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물론 그 화룡점정은 비영어권 영화 최초로 주요 상을 휩쓴 <기생충>이었다.?이런 변화는 아카데미가 그 동안 백인 남성 위주의 잔치라는 비판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넓게 보자면 이러한 움직임은 미디어 내 소수자를 올바르게 재현하려는 사회적, 문화적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과 관련된 담론에 대한 역풍도 심심치 않게 일고 있다. 먼저 가깝게는 트럼프 대통령. 그는 <기생충>의 수상을 조롱하며 자국 영화가 수상하지 못한 것을 개탄했다. 지난 해 게임 업계에서는 오버워치라는 게임의 간판급 남성 군인 캐릭터 솔져:76이 동성애자로 밝혀지면서 부자연스럽다는 유저들의 반발이 일기도 했고, 인어공주의 실사판 주인공 에리얼 역에 피부색이 검은 할리 베일리가 캐스팅되자 #나의 애리얼은 이렇지 않아(#NotMyAriel)라는 해시태그가 확산되고 디즈니를 상대로 한 캐스팅 취소 청원이 돌기도 했다. 우리도 이러한 역풍에서 자유롭지 않다. 최근 온라인을 중심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옹호하는 사람을 PC충이라고 비하하는 행위가 공공연히 이루어진다. 소수자 재현을 반대하는 목소리의 기저에는 소수자 기용이 부자연스럽다는 정서가 공통되게 흐른다. 우리가 어렸을 때 봤던 동화 속 인어공주는 피부가 하얀 색이었고, 총을 잘 쏘는 군인 캐릭터가 강인한 남성 이성애자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카데미는 미국인들의 잔치였으니 미국=백인의 나라라는 도식을 내면화하고 있는 우리에게 올해 시상식 풍경 역시 생경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인들이 대거 단상에 올라가고, 톰 행크스나 샤를리즈 테론 같은 내로라하는 할리우드 배우들이 객석에서 박수 치고 환호하는 장면은 필자의 눈에도 CG나 합성화면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중매체 속 소수자를 올바르게 재현하려는 운동은 바로 무엇이 자연스럽고 무엇이 부자연스러운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재정의하는 움직임이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많은 것들 안에는 이 사회의 지배적인 통념과 권력관계가 녹아들어 있다. 남녀가 키스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동성이 키스하는 건 왜 부자연스럽다 여기는지. 아랍인이 테러범으로 출연하는 건 자연스럽지만,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 되면 왜 부자연스럽게 느끼는지.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을 직면하지 않으면 이런 집단 무의식이 사회적 소수자 집단에 대한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미국인들만을 위한 무대라고 여겨졌던 아카데미의 단상에 봉준호 감독이 올라감으로써 이제 다양한 국가, 다양한 지역의 영화 감독들에게 나도 언젠가 저 무대를 밟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미국인들도 자국 영화 외에 더 넓고 풍요로운 영화의 세계에 눈을 뜰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조금 낯설고 잠시 부자연스러울 순 있어도 기존의 통념을 깨고 한 발 나아가는 기분 좋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기생충>이 열어젖힌 새로운 가능성이 반갑다면 비백인 인어공주나 다른 대중매체 속 소수자 재현에도 박수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박문칠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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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24 16:46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세계문화유산 무성서원

이흥재 무성서원 부원장 2019년 7월 6일,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무성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9개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무성서원은 이제 대한민국의 문화재일 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관심을 가지고 보존 관리해야 할 세계의 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정읍 칠보에 자리한 무성서원은 1615년, 고운 최치원의 생사당과 태인 현감 신잠의 생사당을 함께 모시고 태산서원으로 시작하였다. 고운 최치원이 지금의 칠보인 태산 태수를 역임한 후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모신 때부터는 1100여 년의 역사이다. 조선 초, 불우헌 정극인이 상춘곡을 읊고 성리학적 질서의 고현동 향약을 실현한 때부터 계산해도 600여 년 가까이 된다. 무성서원은 1696년 조선 숙종 때 사액(賜額)을 받아 무성서원이 됐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을 면한 전북의 유일한 서원이다. 1968년 사적 166호로 지정되었다. 오랜 기간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왔고, 선비들의 귀감이 될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뜻을 추모하며 계승하려고 노력한 점, 마을 주민들과 민주적인 공동체를 이룬 점 등이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 받아 전국 8개 서원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된 것이다. 논어 양화편에 공자는 제자 자유(子遊)가 무성 현감으로 부임하자, 다른 제자들과 함께 격려차 방문했다. 무성 고을 입구에 이르자 백성들의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려 무성 현감인 제자 자유에게 공자가 물었다. 어찌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려고 하느냐? 자유가 답하기를 예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군자가 도를 배우고 예악(禮樂)을 알면 곧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자, 공자가 앞에서 한 말은 농담이었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논어 양화편의 공자지무성(孔子之武城) 문현가지성(聞弦歌之聲)에서 인용하여 서원 이름을 무성(武城)으로 하고, 입구 누각을 현가루(絃歌樓)라 하였다. 최치원의 치적을 자유(子遊)에 비견한 것이다. 나라를 다스릴 역량을 가지고 있는 큰 인물이 작은 태산 고을의 태수를 지내며 감동적인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고운 최치원과 관련된 일화를 전하는 공간은 도처에 있다. 하지만 최치원을 주벽(主壁)으로 배향하여 사액서원이 된 곳은 무성서원이 유일하다. 서원 강당을 보면 가운데 마루 3칸이 벽체가 없이 툭 틔어있어 내삼문의 태극문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움의 담백함이라는 아름다움의 건축미를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공부하던 반듯한 선비의 모습을 닮았다. 한겨울 눈보라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반듯한 자세로 서 있는 강당의 모습은 선비들의 중요한 덕목인 신독(愼獨 - 홀로 있을 때 삼가야 한다) 그 자체인 것이다. 최치원은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고 했다. 고운이 말한 풍류는 유교, 불교, 도교를 아우르는 최고의 가치였다. 1100여 년간 고운 최치원의 풍류정신을 이어, 성리학적 유토피아를 구현해 온 곳이 무성서원이다. 무성서원이 이 시대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서원이 되기 위해서는 풍류와 선비정신을 구현하는 문화공간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무성서원이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거듭나 앞으로 또 천 년을 이어갈 서원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일이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 /이흥재 무성서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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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17 15:45

한 달 살이

이재규 우석대 교수 새해 첫 달을 제주에서 살았다. 요즘 트랜드라는 한 달 살이를 해본 것이다. 매일 제주 곳곳의 숲과 오름, 바다를 발길 닿는 대로 가보았다. 시간이 많아지니 눈에 담는 장소도 늘어났지만 일주일 이내 짧게 머물렀던 이전의 여행에 비해 무엇보다 마음의 자세가 달랐다. 겨우 한 달에 현지인이 될 수는 없으나 주마간산으로 다닐 때 놓쳤던 것들을 보게 되고 그곳에 대해 더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다. 풍광과 사람 모두가 새롭게 다가왔던 것이다. 국내 여행지 중에 제주는 한 달쯤 살아보는 데 최적의 장소다. 일단 섬이라는 특성상 일상에서 떠나왔다는 고립감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고 동서남북 적당한 면적에 숲과 해변, 오름마다 개성이 있어 돌아볼 거리가 충분하다. 들어서는 순간 식생대와 바다 물색이 바뀌면서 이역(異域)에 왔다는 느낌을 제주만큼 주는 곳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 제주만의 신화, 생존과 수난의 역사가 가세하며 뭍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주는 해안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보는 올레코스 총 26구간, 425km를 개발하면서 더 많은 이들이 찾게 되었다. 오로지 올레 완주를 위해 한 달 살이를 계획하는 이들도 상당수라 들었다. 실제 걸어보니 곳곳의 표지와 안내 시스템(책자, 사이트, 스탬프, 안내센터, 자원봉사자)이 잘 되어 있어 불편함이 없다. 디지털 지도 등의 기술 발전도 낯선 여행자에게 든든한 도우미 역할을 한다. 지자체에서 대중교통을 촘촘히 연결한 것도 평가할 대목이다. 먹고, 자고, 풍광을 즐기는 것. 여행지 품평에서 중요한 요소인 이 3박자를 골고루 갖춘 곳을 찾아서 사람들은 후기를 공유하며 여행정보의 빅데이터를 자율적으로 구축해간다. 정해진 패키지 구간을 가이드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여행은 이제 올드한 것이 되었다. 낯선 곳에서 장기 체류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여정의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어간다. 여행은 SNS 채널을 통해 개인사의 기록으로 남겨지고 공유된다. 장소의 인증과 감정, 정보의 공유를 빼놓고서는 폰카를 들고 여행지를 득템하듯 표류하는 현대인의 여행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 한 달 살이는 좋은 곳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다는 여행 트랜드 너머의 것을 말해준다.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붙박이로 한 곳에 묶여 신분과 재산에 따라 하나의 직업으로 평생을 살던 시대는 갔다. 그때의 여행은 일생에 한두 번 어렵게 나갔다 생존하여 돌아오는 귀향의 길이었다. 기본적으로 정주(定住)가 모형이었다. 이제 농경시대, 산업혁명을 거쳐 노마드의 세기가 왔다. 끔찍할 정도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한 사람의 생애 주기도 2막, 3막으로 길어졌다. 고용과 노동의 형태도 급속한 변화를 거치면서 우리가 기준점으로 삼는 성취, 생의 목표도 이전 세대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 되고 있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로 나뉘어 반목 대립해온 이 지루한 낡은 전쟁도 가까운 몇 세대 안에 종식될 수 있을지 모른다. 언어와 지역의 장벽이 무너지고 가족의 전통적 형태, 애정의 결합 방식도 바뀔 것이다. 옛 시대 낡은 감정과 관념들은 언제 그런 시기가 있었냐는 듯 썰물처럼 퇴조해갈 것이다. 집단의 결속보다 주체적 개인이 더 소중해지고 지금 여기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는 전환의 시대. 제주 바다로 지는 단 한 번의 노을을 바라보며, 이번엔 또 어디로 건너뛸까 미래를 당겨 사는 사람처럼 다음 한 달 여행지를 궁리해봤다. /이재규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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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10 18:50

흐르는 세월 속에 문화도 변하고 전통도 변한다

신정일 우리 땅 걷기 대표 옛날에는 백 리 마다 풍속이 달랐다. 안자춘추에 실린 글이다. 오랜 옛날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 않았던 시절 이야기이다. <서유기>에도 그와 비슷한 글이 실려 있다. 집을 떠나 3리만 가도 다른 풍속이 펼쳐진다. 같은 나라에서도 그럴진대, 하물며,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말해 무엇하랴, 만물이 오고, 만물이 가는 우주의 순환 속에서 오래 전 풍속과 현재를 비교해 보면 흐르는 세월 속에 사람들의 풍속과 문화가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유추해볼 수 있다.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의 임진강가에 징파도라는 나루터가 있다. 그 나루터에서 일어난 일이 이수광(李?光)의『지봉유설芝峰類說)』에 실려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양반집 귀부인들이 난을 피하는 와중에 징파도에 이르러 배를 타려고 하였다. 그때 여종을 데리고 온 귀부인이 있었는데, 배에 빨리 오르지 못하자 뱃사공이 그 부인의 손을 잡아당겨 올리려고 하였다. 부인이 크게 통곡하면서 내 손이 네 놈의 손에 욕을 당하였으니 내가 어찌 살겠는가?하고는 곧 물에 빠져 죽었다. 여종도 통곡하며 내 상전이 이미 빠져 죽었으니 어떻게 차마 홀로 살겠는가?하고 역시 물에 빠져 죽었다. 오늘날에 미투라고 할까? 다른 남자에게 손을 잡힌 것조차도 치욕이라고 여겼던 것이 그 당시 아낙네들의 전통적 사고방식이었다. 또 하나 진기한 이야기가 선조 때에 펼쳐졌다. 서울의 운종가에서 아내의 간통을 적발한 남편이 아내의 음부를 돌로 쳐서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성리학이 주가 되던 조선에서 여성의 음부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설왕설래 끝에 경상도 함양에 기인으로 소문났던 오일섭이라는 사람에게 찾아가 물었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그때 오일섭이라는 사람이 알려준 말은 이러했다. 모나지 않은 돌로 차마 보지 못할 곳을 쳐서 죽었다(以無方之石他殺不忍見之處). 그 뒤 조선이 막을 내리기 전까지 이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 음부를 표현해야 할 때는 꼭 쓰게 되는 법조문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인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에도 재미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속이 중국보다 나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미천한 여자도 절개를 지켜 개가(改嫁)를 하지 않는다. 그 당시의 풍속에는 재혼을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고, 아름다운 풍속으로 추앙받았다는 것을 실학자인 이익도 동조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하루에도 1,200쌍이 결혼하고 400쌍이 이혼하며 급기야는 결혼한 사람들 중 수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하기때문에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이혼율이 두 번째로 높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혼자 살겠다거나 결혼은 해도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불과 80년대 초만 해도 예비군훈련장에서 정관수술을 하면 5박 6일의 동원훈련을 빼주었는데 정부에선 인구 감소를 우려해 여러 가지 출산 정책을 입안하고 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거리마다 재혼하세요라 동남아 여자와 결혼하세요. 는 선전 문구가 범람하는 이 상황을 징파나루의 귀부인이나 이수광 또는 성호 이익이 저세상에서 볼 수 있다면 뭐라고 말할까?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유수와 같이 흐르는 세월 속에 전통도 변하고 사람의 마음도 변한다. 그 변화 속에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풍속과 버려야 할 풍속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가 없는 그것이 문제다. /신정일 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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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03 17:17

아카데미 최초의 한국 다큐멘터리 '부재의 기억'

박문칠 우석대 교수 곧 있으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다. <기생충>의 수상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다. 하지만 이 열기에 가려져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영화가 있다. 바로 한국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오른 <부재의 기억>(In the Absence)이라는 작품이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이 29분짜리 다큐멘터리는 국내 관객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처음부터 국내가 아니라 전 세계 관객을 대상으로 기획되었다. 작품을 만든 이승준 감독, 감병석 프로듀서 팀은 미국의 Field of Vision이라는 단편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팀과 공동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이 결과 사건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담백한 기록물이 탄생했다. 사실 그 동안 외국인들에게 세월호 참사가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게 왜 단순한 대형 참사가 아닌지.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는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이유도 마찬가지다. 표면적으로는 최순실, 국정농단 같은 원인들을 열거해 보기는 하지만,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의 속뜻은 여전히 설명하기 난망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어려운 과업을 29분 안에 해낸다. 그리고 작품이 거둔 세계적인 성공은 한국인이 세월호 이후 느꼈던 분노와 실망이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입증했다. 이 작품은 최초 공개된 뉴욕다큐멘터리 영화제(DOC NYC)에서 단편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세계보도사진협회(World Press Photo)에서 개최하는 디지털 스토리텔링 대회에서도 수상했다. 또한 미국의 저명한 주간지 뉴요커(New Yorker)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온라인 공개가 되었는데, 현재까지 조회 수 244만을 기록하고 있다.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당시 정권과 관료들에 대한 분노를 표현한 댓글들이 국적을 가리지 않고 달리고 있다. 이제 한국의 다큐멘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 세계에 전할 영상 언어와 실력을 갖추었다. 사실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의 극영화가 세계 시장에서 이룬 성과에 비해, 한국의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서구 선진국 중심으로 짜여진 국제 다큐멘터리 시장에서 한국 작품들은 주로 북한에 대한 서구인들의 호기심을 채워주거나, K-pop과 같이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들을 소개하는 이상으로는 뻗어나가기 어려웠다. 그나마 최근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휴먼스토리들로 한국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의 폭이 조금 확장된 정도이다. 한국의 독립 다큐멘터리는 한국사회를 뒤흔들어온 정치사회적인 문제를 탁월하게 다뤄온 오랜 전통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이 세계 시장에서는 너무 로컬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외면 받아왔다. <부재의 기억>은 이제 한국의 정치사회적인 이슈들도 전 세계적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서구인들의 시각에 갇혀서 그들이 보고 싶은 것만 내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치관과 언어로도 세계와 소통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세계적인 담론에 끼어들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면, 이제 우리는 한국의 어떤 이야기를 세계에 전할 것인가, 어떤 화두를 갖고 세계인들을 만날 것인가, 고민해볼 차례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부재의 기억>을 찾아보면서 이런 고민을 함께 해보면 어떨까? <부재의 기억> 관람하기: https://youtu.be/5_A8dq2fA5o /박문칠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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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27 15:20

개밥바라기별 바라기

이흥재 정읍시립미술관 명예관장 유난히 눈이 보기 힘든 올겨울 내내, 나는 개밥바라기별 바라기를 하고 있다. 개밥바라기별은 해바라기가 해 바라기를 하듯 저녁밥을 기다리는 개가 밥통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며 올려다보는 별이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인 금성에 붙인 별명이라고 한다. 요즘 같은 한겨울에는 해진 후 두세 시간 동안 서쪽 하늘에 있다가 사라져 버린다. 3월 하순부터는 아예 보이지 않다가 4월 중순 이후엔 새벽 해뜨기 전 밝게 빛나서 우리가 흔히 샛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금성은 항상 태양 근처에 머물면서 해보다 먼저 떠오르거나, 해가 지면 따라서 진다. 때문에, 태양이 뜰 때는 날이 밝아오는 동쪽에서 그리고 해가 질 때는 서쪽에서 찾아야 한다. 목동의 별이라고 불리는 샛별은 비너스신과 동일시하여 사랑, 기쁨을 상징한다고 한다. 2019년이 저무는 어느 날 오후, 구이저수지를 찾았다. 해가 질 무렵의 구이저수지는 푸른 하늘을 담고 있었다. 그 하늘 한켠에 소나무 한 그루, 모악산 매봉으로 금방 떨어질 것 같은 초승달, 그 위로 초롱초롱한 밝은 별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그 별이 바로 개밥바라기별이었다. 고창 구시포에서 만난 개밥바라기별은 푸르고 영롱한 구름 속에 떠 있어 마치 추상표현주의 회화 같았다. 색면 추상 화가들의 신의 숭고는 가장 단순한 자연현상에서 발견된다.라는 말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이런 푸른 하늘은 땅거미가 내려앉은 황혼 무렵이나 새벽 해뜨기 전에 나타난다. 어둠과 밝음 두 빛이 공존할 때 나타나는 푸른색을 트와일라잇 블루(Twilight blue)라고 한다. 불어권에서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흰 실과 검정 실을 나란히 늘어뜨리면 어느 게 흰 실이고 어느 게 검정 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시간이라고도 한다. 요즘 나는 이런 블루에 푹 빠져 있다. 일몰 후나 새벽녘에 사진 작업을 하며 푸른 하늘을 유영하는 새벽달도 보고 개밥바라기별도 만난다. 국립 경주박물관의 기획전시 신라를 다시 본다.에 초대받아 신라 고분과 왕릉을 촬영한 적이 있다. 이때 트와일라잇 블루를 만났다. 해가 진 후나 새벽에 고분의 주인공인 왕들을 만나러 가면 푸른 하늘이 나타났다. 그 황홀한 블루를 사진기에 담아 신라, 그 푸른 밤. 멀고도 가까운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하였다. 노서동 고분과 감나무가, 황남대총의 능선 위의 보름달이, 황남동 고분군 143호의 표주박형 곡선에 새벽달이. 경주의 밤은 그렇게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1,600여 년 된 노동동 고분에 살고 있는 느티나무 푸른 가지 사이로 초승달이 떠오르는 풍경은 아마 몇백 년은 되었을 것이다. 신라의 왕들과 우리는 푸른 하늘을 벗 삼아 수백 년 동안 함께 살아오고 있었다. 1960년대 초 누보 레알리즘의 이브 클랭(Yves Klein)이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International Klein Blue)라고 자신의 고유색으로 특허받은 파랑색을 클랭블루라고 한다. 그에게 푸른색은 가장 순수하고 무한한, 무(無)에 접근한 색채였다. 푸른색, 하면 떠오르는 바다나 하늘은 경계가 없어 블루는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의 색이기도 하다.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색이지만 정말 깊은 맛이 나는 색, 블루. 저녁식사 후, 따뜻한 목도리에 편한 신발 신고 푸른 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개밥바라기별을 만나러 나가보는 건 어떨까? /이흥재 정읍시립미술관 명예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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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20 16:34

말솜씨

이재규 우석대 교수 한 마디 말 때문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설화야 고금을 걸쳐 있었지만 요즘은 SNS를 통해 확산되는 속도와 파급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주워 담기도 전에 말은 네트워크를 타고 천리를 가버린다. 복제되는 것 뿐만 아니라 댓글이 줄줄이 달려 곳곳에서 불이 붙는다. 몇 명이 쑥덕거리던 우물가 담화가 순식간에 수천 수만 개로 증식되는 것이다. 말의 통로가 무한대로 확대된 디지털사회에서 말은 더욱 중요해졌다. 매일 말로 시작하여 말로 끝나는 정치인은 물론 언론인, 연예인, 작가 예술인 교수 등 발화자의 영향력이 높게 설정된 영역에서 말은 이들의 운명을 가르는 샷건이 된다. 멋진 말은 듣는 이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며 지지와 연대 행동을 불러오지만, 저열한 말은 비난과 품평의 대상으로 지목된 상대보다 먼저 발화자를 시궁창에 던져 넣기도 한다. 1인치 정도 되는 그 장벽(자막)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언어를 쓴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영화(cinema)라는 언어입니다. 영화 <기생충>으로 얼마전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짧은 수상 소감은 자막이 있는 외국어영화에 배타적인 미국 관객들을 향한 위트이자 영화예술의 보편성을 잘 드러낸 멋진 말이었다. 봉준호 감독은 그간 한국영화가 왜 한 번도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오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한 인터뷰에서도 오스카는 국제영화제가 아니다. 매우 지역적이다(The Oscars are not 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Theyre very local)라는 발언으로 화제를 모았다. 오스카는 LA지역에서 상영된 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지역영화제라는 당연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미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으로 여겨온 미국인들의 관념에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봉준호의 말이 품격 있는 언어가 넓혀주는 지평을 실감나게 하는 사례라면 지난 해 조국 사태 이후 여러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보여준 말의 추락은 우리 사회의 수준에 대해 깊이 회의하게 만들었다. 논객을 자처했던 몇몇 이들은 예전의 자신을 스스로 뒤집으며 사람이 궁색한 처지에 몰리면 어떻게 훼절되어 가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추락을 지켜보는 우리도 함께 오물을 뒤집어 쓴 듯 치욕스럽고 허탈했다. 말과 글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이 이전에는 고귀한 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구설을 자청하는 천업(賤業)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세상일이라는 것은 두부 자르듯이 한 번의 칼질로 선악 진영을 나눠 단순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때때로 시비는 우리 안에도 뒤섞여 있다. 종교나 정치 영역처럼 적과 아군, 구원과 지옥행을 선명한 대비로 가르고 이것만이 진리이니 믿고 따르자는 통속적 솔루션은 짧은 순간 명쾌해보이지만 속으로 깊이 든 멍은 결코 풀어지지 않는다. 결국 끊임없이 또 다른 적을 호명하며 배제와 단죄의 소용돌이를 반복해 가게 된다. 어떤 사회적 성취나 지위를 내세워 대표성을 자처하며 대형 스피커를 독점해온 이들은 자기 주장 뒤로 늘 사람들을 줄 세우려 한다. 그들은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단지 말싸움의 잔기술과 선동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만 든다. 숙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는 민주주의의 미래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다가오는 봄에는 정치권력의 향방을 놓고 또 한 차례 말의 전쟁터가 벌어진다. 휘황한 깃발과 장담들이 기세를 올릴 것이다. 이번에는 숙련되고 멋진 말솜씨를 가진 진짜 싸움꾼들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말솜씨의 최고봉은 제 입을 닫아야 할 때를 아는 것. 진실은 늘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전해질 때 비로소 현실의 힘이 된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사람을 뽑고 싶다. /이재규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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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13 16:39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신정일 우리 땅 걷기 대표 몇 년 전 일이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강의 요청이 왔다. 부여에서 개최하는 전국 행사에 주제발표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부여에 도착한 뒤 티타임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중에 한 사람이 뽀로로를 만든 최성일씨였다. 그는 부분 발제를 하기 위해 왔던 것이다. 전국 각 지역에서 온 3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강연장 맨 앞줄에 앉은 진흥원장에게 물었다. 원장님! 22가 얼마지요? 예, 4입니다. 최성일 선생님은 22가 얼마지요? 예, 저도 4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은 내가 듣고자 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새로운 문화를 총괄적으로 지휘하는 한국문화 콘텐츠진흥원장이고, 뽀로로라는 히트상품을 만든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와는 다른 대답이 나올 줄 알았던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 하면서 나는 김수영 시인이 쓴 <산문, 불온성不穩性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의 한 구절을 들려주었다.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인은 불온성이야말로 예술과 문화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고, 인류의 문화사와 예술사가 바로 이 불온의 수난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본 것이다. 김수영 시인의 산문만이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에도 그와 비슷한 글이 실려 있다. 하나님, 자연 법칙이나 산술법칙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입니까? 무슨 이유에서건 자연의 법칙들이나 둘 곱하기 둘은 넷이라는 산술법칙을 나는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22는 4라고 하는 이런 공식은 더이상 삶이 아니고. 차라리 이것은 죽음의 시작입니다. 나는 두 사람의 예를 들고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설의 주인공이 말했던 것처럼 수학에서 22가 4만 되는 것이 아니고, 6도 되고 8도 되고, 아니면 백도 되고, 천도 될 수 있는데 꼭 4만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왜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 것일까요. 삶 그 자체가 무한한 가능성인데, 그 가능성을 한정 짓고 살아가는 상황에서 어떤 새로운 창조물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새로운 문화 창조는 지금의 것에 만족하지 않고, 어딘가에 있을 그 무엇, 어쩌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는 그 무엇 에 대해 물음표, ? 즉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요? 내 말이 끝나자 최성일씨가 나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는 22를 절대 4라고 말하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렇다. 문화의 본질은 불온不穩한 것이라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향해서 움직여야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전북의 문화가 정체되어 있다. 오래전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고, 지금도 그렇게 말한다. 왜 그럴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정여립 사건이라고 불리는 기축옥사와 동학농민혁명을 겪으면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새로운 것을 꿈꾸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 당시는 불온성이 문제가 되었지만, 현재는 불온성이 새로운 창의성이 되고, 창의성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이다. 남이 뚫어 놓은 길을 따라서 가면 그것은 창조가 아니다. 전라북도의 문화, 새로운 꿈을 꿔야 할 때다. 전라도를 벗어나 대한민국, 아니 세계 속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때가 바로 지금이다. /신정일 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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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06 17:07

미래가, 사투리가 사라진다!

이종훈 전주시립극단 예술감독 우리나라는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펴내면서부터 표준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 나라의 말에 방언을 비롯한 많은 변종이 있어 국민 간에 의사소통에 불편이 생기고, 한 국가로서 통일성을 유지하는 일에 방해가 생기는 일을 막기 위하여 모든 국민이 지키고 따르도록 표준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탄생한 어휘를 쓰지 않고, 하나의 어휘로 고착시켜 대중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서울말을 표준어로 선정한 것이다. 이후부터 획일화된 표준어를 배우고 사용하다 보니 사투리가 점차 사라져 갔다. 급기야 근자에 이르러는 디지털언어, SNS 언어에다, 취업을 위한다고 표준말을 배우다 보니 사투리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지역마다 각기 다른 사투리가 사용되는 것은 지역의 언어습관에 맞게 말의 형태가 바뀌고, 음이 바뀌어서 그런 것이다. 사투리는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의 생각과 정서를 하나로 묶고 친밀감을 주는 기능을 한다. 또 우리말의 옛 모습과 특유한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말은 기록되기 어려워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다가 소멸되기 쉬운 게 현실이고 타고난 운명이다. 사투리에는 그 지역의 멋과 맛과, 힘과 맘이 있어서 정겨울뿐더러 성정이 담백하고, 찰 짓고 곰삭다. 투박하고 촌스럽지만 따스하고 알토란같은 맛이 난다. 그래서 어머니 같고 고향 같은 생각이 절로 난다. 그렇다. 사투리에는 특정지역과 특정시대의 문화가 그대로 자리 잡고 있어서 사투리가 사라지면 문화가 사라지고, 문화가 사라지면 사투리가 사라지고 미래도 사라진다. 2003년, <한국연극협회>에서는 서울 중심의 연극 편향에 반발하여 지역의 특유한 자연과 습성, 전통과 문화, 방언과 사투리, 숨겨진 설화를 발굴하고 사투리를 기반으로 한 향토언어를 사용하는 연극제가 필요하다는 연극인들의 요청에 의해 충남 공주의 공산성에서 <고마나루 향토연극제>를 시작했다. 한국인들의 정서와 흥과 멋이 고스란히 배어나올 수 있는 연극을 통해 세계 속에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좋은 취지로 시작된 이 연극제는 몇 해 못 가서 지역의 조그마한 연극제로 추락하고 말았다. 향토연극제의 취지를 살리지 못할뿐더러 투박하고 촌스럽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참가 작품들의 이야기와 구성이 짜임새가 부족하고 보편성이 떨어진다는 점과 연극적 미학의 결여가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후 지역의 사투리를 사용하는 연극을 관람하기가 힘들어 졌다. 이제는 지역에서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연극들이 자취를 감춰버리고 대신 표준말이라는 서울말을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 되어 버렸다. 머지않아 지역의 사투리와 억양이 사라지고 획일화된 표준말로만 연극이 공연될 때, 언어와 정서가 단조로워져 감정이 메마른 황량한 연극으로 변해버릴 것 같아 두렵기만 하다 2020년은 <연극의 해>다. 전주는 가장 한국적인 도시로서 한국의 얼을 흥과 멋으로 풀어내는 고장이다. 사투리가 넘쳐나는 <향토연극제>를 유치해 보는 것을 어떨까? <전주시립극단>은 올 해 전북의 작가 윤홍길의 완장을 김제 사투리로 공연한데 이어, 2020년 봄에는 임실 사투리로 공연하는 이강백의 봄날을, 초여름에는 조정래 작가의아리랑을 전북의 사투리로 공연한다. /이종훈 전주시립극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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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30 17:18

검이불루 화이불치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11월부터 시작된 송년 행사가 12월에 들어서자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어느 모임은 조촐하지만 대접 받은 느낌이 들고 어떤 모임은 비싼 음식에 대접도 받았는데 뭔가 개운치 않을 때가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런 경험을 일찍이 겪었다. 동승처럼 빡빡머리에 솜털이 보송보송 예뻤던 중학교 1학년 때 내게는 두 명의 동무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한 친구는 집이 못 살았다. 그런데도 그 친구의 집에 가면 마치 우리 집같이 편했고 특히 친구 어머니가 내어 주시던 따뜻한 밥과 된장찌개는 지금 생각해도 침이 고인다. 또 한 친구는 몇 번을 자기 집에 가자고 하기에 간 것인데 엄청 많은 책이 있어 읽을 욕심에 친하게 되었다. 그 친구의 집에 들어서면 응접실의 전면을 꽉 채운 고급 유리책장 속에 내가 보고 싶었던 50권짜리 브리태니커사전을 비롯, 국내외 현대문학과 고전문학, 셰익스피어, 그리스신화, 태평양전쟁, 일본 대하소설 등의 전집류가 금박을 번쩍거리며 양주병들과 함께 빽빽이 들어차 있었고 친구의 방에도 괴도 루팡, 셜록홈즈, 김찬삼의 세계여행, 시이튼 동물기, 역사 및 과학사전 시리즈 등의 전집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친구 어머니께서 나 때문에 아들이 책을 본다며 사골국물에 맛있는 반찬을 잔뜩 차려주셨다. 늘 먹어서 질려 버린 아들이 잘 먹는 내게 자극을 받아 다시 먹을 것이라는 기대였는데 점점 나만 먹어대자 점점 먹을 것도 줄이시고 쌀쌀맞아지셨다. 나도 슬슬 눈치가 보였지만 부지런히 전집들을 읽어나갔다. 읽는 책마다 내가 첫 손님이어서 더 신이 났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그랬듯이 책을 읽으러 갔는데 친구 어머니께서 이제 오지마! 내 자식은 안 읽고 너만 읽는 꼴을 더 이상 보다가는 울화병이 도지겠다. 그래서 중지되었지만 그 때의 독서량이 지금도 나를 버티어 주고 있다. 그 때 내가 너무도 눈치가 없었구나 싶어 미안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하지만 내게 그 집은 책과 사골국 이외에는 기억이 없다. 그 집은 모든 것이 풍족했고 여기저기 비싸고 번쩍이는 것들이 가득했지만 부럽기보다는 산만하고 값싸 보였던 이미지만 남아 있다. 한편 앞의 친구를 생각하면 늘 깔끔하던 방안의 내음과 벽에 걸린 하얀 옷덮개들, 장농에 개어 있던 정갈한 이불과 베개들,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던 손때 묻은 책들, 그리고 기어서 올랐던 우리의 아지트인 다락방과 앉은뱅이책상들이 새록새록 내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이 두 느낌의 차이는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을 더듬어보니 집에 들어설 때 눈에 띈 디테일의 차이였다! 작고 낡았어도 정성이 담긴 가지런함과 정갈함의 조화, 그리고 맑은 진정성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반면에, 각각은 고급스럽고 우아한 것들인데 과시를 위한 전시품으로써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여기저기서 그저 비싸다는 것과 번쩍이는 금테만 보여주니 빗물에 분장이 번져도 웃어야만 하는 거리의 피에로를 볼 때처럼 졸부의 천박한 사치에 질렸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시조 온조왕께서 궁궐을 지으며 하명을 하신다.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도록 하라. 이 말씀은 백제 예술의 근간이 되었다. 오늘의 예술인들도 명심해야 할 귀한 말씀이다. 가난한 친구네는 검이불루를 이루었고 부자인 친구네는 화이불치에 실패한 것이다. 아~ 온조왕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정말 보고 싶다!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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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23 17:09

전북에 의병정신 기념관 세우자

김호석 수묵화가전 전통문화대 교수 나는 항일운동으로 절명했던 고조부 김영상의 현손이다. 칠보 무성리는 나의 고향이자, 어린 시절 화가의 꿈을 키웠던 곳이다. 무엇보다 애국지사 김영상(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이 의병운동을 하던 삶의 터전이다. 그러나 최근 칠보를 방문하며 돌아본 나의 고향에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표식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소지동은 그의 손자 김균이 무성서원 창의를 기록하며 독립을 역설한 현장이다. 그는 이곳에서 조선의 대동천자문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뜻을 실천했다. 그러나 그곳 어디에도, 일하며 배우던 민족 교육의 터전은 남아있지 않다. 삼리로 가 보았다. 서당과 집 앞에 있던 비석거리는 옛 모습 그대로이지만 집은 비어 있다. 우물은 말랐고, 베를 짜던 살림집은 흔적조차 없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민족 고유의 정신과 얼을 저술하며 실천하려 했던 할아버지의 뜻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이 집이 고현 향약의 출발지였다는 안내 표지판만이 초라하게 서 있었다. 의병운동이나 독립운동 정신은 찾기 어려웠다. 어린 시절 원대한 꿈과 희망을 안고 두 눈을 치켜뜨며 일하면서 배웠던 배움의 현장을 보는 것은 설레는 경험이었지만 이내 마음은 우울했다. 눈물이 앞섰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할아버지의 뒤를 좇아 사당에 가서 조상께 문안 인사를 올렸다. 뭔지 모를 어린 마음에도 조석으로 초상화와 신주 앞에서 조상의 은공을 잊지 않고 자기를 완성시켜 국가와 백성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했다. 가문의 문화적 유전자는 가풍을 통해 면면히 이어지는 법이다. 지금 이 나라는 민족의 혼이 숨 쉬는 현장을 보존하고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조선은 초상화의 왕국이었다. 국가는 나라를 위해 몸을 던졌던 인물을 극진히 대접했다. 학문에 매진한 학자는 사회의 귀감이 되도록 국가에서 널리 알렸다. 왕은 그 근거로 초상화를 내렸다. 초상화는 단순히 그림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살아있는 정신의 현현물이다. 미국은 국가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의 삶을 끝까지 책임진다. 이런 국가철학과 사회적 분위기가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키우고 국가 번영과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역사의 거울이 없다. 정신문화는 정치적 활용가치나 정파성을 떠나 순수한 국익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인류의 보편성을 추구하고자 했던 선비 정신의 도저함은 지금도 변함없이 평화와 인류애를 추구하게 한다. 역사는 기억과 보존이다. 기억은 기억을 기억하게 한다. 자신이 살아 온 이 땅의 역사를 알고 그 속에서 부절히 이어온 역사의 혼을 자랑스럽게 느끼게 해야 한다. 정신의 무덤 앞에서 정신문화가 승리한 역사를 다시 보게 만들어야 한다. 역사가 증거 했듯 뼛속 깊이 절의가 스며있는 선조들을 기리고 후세의 역군으로 만드는 것은 남아있는 자의 몫이다. 우리민족의 역사와 혼을 보존하고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서는, 국립 의병정신 기록관이나 기념관을 세워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푯대를 세워야 한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의병들의 기록을 모으는 일부터 시작하자. 기록을 통해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그들의 이름을 되찾아 주는 일이다. 혹독한 일제를 거치며 일본 식민지교육을 거부한 자손들은 힘이 없다. 경제력이 없어 자신 하나 건사하기 힘든 애국지사 후손들은 조상 볼 낯이 없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후손들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전북이 조선의 혼을 살리는 마중물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김호석 수묵화가전 전통문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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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16 17:29

꽃 진 자리 그 상처 위에

문병학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열매는 꽃이 진 자리 그 상처 위에 맺힌다. 이것은 우주의 섭리이자 생명의 이치이다. 꽃 없이 열매를 맺는 무화과(無花果)도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항변해도 그 이치는 쉬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꽃 없이 맺히는 열매는 없다. 무화과에 대한 우리 인식은 시적(詩的)으로 용인될 수 있지만 사실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무화과를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 인식의 잘못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열매라고 여기는 무화과는 열매가 아니라 꽃이다. 정작 그 씨앗은 열매로 잘못 알고 있는 꽃의 내부에 촘촘히 박혀있다. 말하고 싶은 것은, 꽃 진 자리 그 상처 위에 열매가 맺힌다는 우주의 섭리, 생명의 이치를 우리의 삶이나 그 흔적인 우리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인 1894년, 안으로는 부패무능한 조선정부 폭정으로 백성들의 삶이 크게 위협받았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국권이 위태로웠다. 이때 낡은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외세를 축출하고자 척양척왜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전라도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그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고부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무장기포, 백산대회를 거쳐 정읍 황토현과 장성 황룡강에서 전라감영군과 서울의 경군(京軍)을 차례로 격파한 동학농민군은 파죽지세로 전라도 수부(首府)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크게 놀란 조선정부는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고, 호시탐탐 대륙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도 제물포로 군대를 상륙시킨 뒤 곧장 도성(都城)으로 들이닥쳤다. 조선정부의 철병요구를 거부한 일제(日帝)는 급기야 7월 23일 경복궁을 무단점령한 후 갑오왜란(甲午倭亂), 이른바 청일전쟁 도발로 침략의 본색을 드러냈고, 동학농민군은 일본군 축출을 위해 다시 거병(擧兵)하였다. 반일항전의 불길은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297년 전인 1597년 정유년 때 전라도로 진출하려던 일본군과 혈전을 벌인 만인의총의 고장 전라도 남원에서 솟구쳤다. 갑오년 당시 남원성을 장악하고 전라좌도와 지리산 너머 경상도까지 세력을 떨치던 김개남 장군은 9월 24일부터 동학농민군 8만여 명을 남원으로 불러 모아 반일항전을 천명하였다. 이 무렵 전라도 전역을 순회하며 일본군의 동태를 주시하던 전봉준 장군도 반일항전의 뜻을 굳히고 동학농민군은 삼례로 집결하라는 통문을 띄운 후 10월 8일 삼례로 나아가 대도소를 설치하고 반일민족항쟁의 대장정에 올랐다. 이후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서울로 북상(北上)하던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티에서 일본군과 관군 연합부대에 맞서 싸웠으나 무기의 열세로 크게 패배하였다. 갑오년 겨울, 우금티 산하에는 사지가 잘리고 심장이 찢겨진 동학농민군의 붉은 살점들이 나뒹굴었다. 아, 우금티 우금티! 시린 겨울산하에 흩뿌려진 동학농민군의 붉은 피는 곧 역사의 꽃이다. 양반과 상놈의 피가 서로 다르다는, 역천(逆天)의 허상을 짓찢고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는 만민평등세상 근대 민주주의 첫 새벽을 활짝 연 동학농민혁명은 장엄한 역사의 꽃이다. 그 상처 위에 항일의병,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중항쟁이 열렸다. 그 열매가 바로 오늘이다. 대한민국 근현대 민족민주운동의 백두대간(白頭大幹)인 동학농민혁명은 역사의 준령(峻嶺)에 피어난 외롭고 높고 쓸쓸한 꽃이다. 그 꽃이 진 자리 상처 위에 열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갑오선열의 넋을 되새겨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가 사람일 수 있다. /문병학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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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9 17:30

2020년은 '연극의 해'

이종훈 전주시립극단 예술감독 <詩> 꿈 / 귄터 아이히 깨어나라, 너희들은 악몽을 꾸고 있다! 잠들지 말라, 무서운 일이 서서히 닥쳐오고 있다. (중략) 유익하지 못한 일을 하라, 사람들이 너희들의 입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노래를 불러라! 불유쾌하게 살라, 이 세계라는 기계 속의 기름이 되지 말고, 모래가 되라! 반짝 추위가 찾아왔던 지난 20일에 경원동 1가에 있는 <창작극회 소극장>에서 독일의 작가 귄터 아이히의 <꿈>을 관람했다. 귄터 아이히(G?nter Eich,1907년~1972년)는 독일의 서정시인소설가방송극작가이다. 꿈속에서 현대인의 불안을 여러 각도에서 접근하여 묘사한 <꿈>은 통속적 의미의 방송극 차원을 넘어서 방송극의 독보적 위치를 굳혔다는 1953년도 작품이다. 평소 접할 수 없는 유명 시인의 작품을 연극을 통해 만날 수 있다니 이런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무대가 어두워지며 공연이 시작되자 기차의 달리는 소리가 심장을 요동친다. 소리가 익숙해질 무렵 어둠 속으로부터 겁먹은 가느다란 소리가 들리며 어둠에 갇힌 공포가 조금씩 보인다. 이 작품은 억압에 파먹힌 인간상에 관한 네 가지 이야기다. 기차에 갇힌 가족, 아이를 치료제로 사용하는 부부, 기억을 잃어가는 탐험대원, 흰개미로 인한 소리의 공포가 차례로 엄습해왔다. 연극은 다양한 폭력에 의해 기본적인 자유가 억압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전쟁과 폭력의 공포, 소리와 어둠의 공포,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의해 일그러진 연기자들의 표정이 섬 듯하다. 나는 기차에 갇힌 가족의 이야기와 딸과 사위를 만나러 온 마지막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억압에 순응된 인간이 오히려 억압을 올바른 것으로 여기는 장면은 당장 우리 주변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무거웠다. 우리도 어느새인가 보이지 않는 규범에 너무 길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지금 누군가에게 야금야금 속을 파먹히고 있지는 않은지, 연극을 보고 나오며 괜스레 어떤 소리가 몸속을 파고드는 느낌이 들어 한동안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연극 <꿈>은 독일의 시인 귄터 아이히를 이해할 수 있는 즐겁고 유쾌한 시간이었다. 겨울의 문턱에서 독일의 시인 귄터 아이히의 좋은 작품을 연극으로 감상하게 해준 <창작극회>의 연출자와 배우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문화관광체육부>는 내년 2020년을 <국립극단> 창단 70주년을 맞아 연극의 해로 지정해 연극인들이 단합하고 다양한 연극행사를 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서울의 대학로를 국내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공연 관광의 명소로 만들어 나가겠다 라고 하였다. 대학로를 관광명소로 만드는 것도 중요한 사업이지만, 열악하고 낙후된 지역의 연극발전을 위한 청사진이 없어 아쉽기 짝이 없다. 오히려 문화 비만증에 걸린 대학로를 정화하고, 문화 빈곤에 허덕이는 지역에 다양하고 품격있는 문화를 수혈시키는 작업이 시급하다. <문광부>는 전국을 아우르는 부서가 아닌가? 서울의 대학로는 서울시에 맡기고, 대한민국 연극발전을 위한 틀을 짜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전주의 <창작극회>는 내년이 창단 60주년이고, <창작극회> 소극장은 30주년이 된다고 한다. 2020년 연극의 해를 맞아 전북과 전주에서도 연극부흥을 위한 여러 계획이 수립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종훈 전주시립극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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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2 17:11

스타지망생 부모님들께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2019년 수능시험이 끝났다. 모든 수험생들이 오랜시간 준비한 만큼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 안착하기를 바란다. 그동안 수험생을 둔 부모님들, 가족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참, 소음 민원 해결사 경찰분들도. 수고하셨던 모든 분들이 잠시나마 후련함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후련해 볼 새도 없이 치열한 입시관문을 통과하고자 논술에 몰입한 실정이다. 그런데 논술보다 더 격렬하게 온 몸을 던지는 수험생들이 있으니 예술분야 지망생들이다. 그중에서도 연극영화 관련 지망생들의 경쟁률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고 있다. 특히 스타를 배출하는 학과의 경쟁률은 195:1까지 치솟았다. 이러한 현상은 한류의 영향 때문이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로 일으킨 국내 음악돌풍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90년대 후반 H.O.T가 중화권으로 세력을 넓혔고 젝스키스, god 등 1세대 힙합 아이돌이 합세하며 순식간에 아시아권을 장악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아이돌 그룹들의 미주진출이 시도되더니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세계를 말춤 도가니에 빠트렸다. 걷잡을 수없이 K-POP에 빠져버린 세계는 지금 BTS의 품에 안기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이름하여 K-P0P 제국! 해외에서 유행하는 한국대중문화를 일컫던 한류는 이제 K-POP이 대세가 되었다. 한류와 함께 자란 7080세대들이 지금의 중장년이 되었고, 이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아이돌이 되고자 할 때 그들의 부모세대와는 달리 적극적인 후원자로서 스타만들기에 나섰으며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준비를 해야 한다며 투자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이에 편승하여 대학에 관련학과 개설이 급증하였고 실용음악 대중문화 전문 고교들이 전국에 생겨났으며 열악하던 연예교육사업도 다양한 체인을 형성 확대되고 있다. 아이돌로 키우기로 작정한 부모는 자칭타칭 전문가의 조언과 인터넷에서 얻은 성공사례와 정보를 종합하여 전문교육기관을 찾아간다. 부모가 능력이 있어 보이면 재능 교육과 병행하여 연예인의 몸이라는 기준에 미흡한 신체부위를 개조하는 장기적인 계획도 병행 시행한다. 고교 2학년까지 여름방학 겨울방학마다 코, 눈, 치아, 턱은 물론 필요하면 키늘리기까지 체계적으로 시술하고 주기적으로 튜닝을 해 나간다. 어찌 보면 오싹할 일이지만 스타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 여기고 꼬박꼬박 정진하는 부모들도 있다. 이렇게까지 준비를 했건 안했건 지망생들의 일차 목표는 대학입학이다. 연극영화과의 시험은 내신성적과 실기가 평가의 주요 기준인데 특히 실기의 비중이 크다. 한예종 등 일부 학교는 실기만으로 선발하기도 한다. 이에 연기학원을 다니게 되는데 자칫 안 다닌만 못한 경우도 있다. 심사위원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낸 경우와 발전가능성에 높은 점수를 주는데 학원에서 가르친 대로만 하는 지원자는 심사위원들에게는 그 밥에 그 나물일 뿐이다. 심지어 어느 학원을 다녔고 누구에게 배웠는지도 파악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스타를 꿈꾸는 자녀의 첫 관문인 연극영화과 입시를 앞두고 있는 부모님들에게 한 말씀드리고자 한다. 이 길은 스스로 깨우쳐 가며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그러면서 누구나가 인정하는 개성을 만들어야 하는 자신과의 싸움판이니 지금부터라도 도와주지 마시라고, 하고픈 대로 하도록 그냥 두시라고, 늘 자식의 어깨 너머로 지켜만 보시라고. 그러다 아주 힘들어 할 때 슬며시 포옹 한번!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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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25 16:52

전주, 역사성 있는 미래도시로

김호석 수묵화가전 전통문화대 교수 도시는 단순히 현대적 이미지가 아니라 정신과 역사 그리고 장소와 시대 등이 반영되었을 때 보다 높은 생명력을 가진다. 전주는 조선 역사의 중심에 위치한다. 전주 이씨의 시조를 모신 조경단이 있고 국내 유일의 태조 어진이 봉안된 경기전이 있다. 그리고 전주사고가 있었다. 현재 전주는 선비, 풍류, 한지, 한식, 한옥. 판소리 등 다른 지역들에 비해 풍부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어낼 대표 개념이 모호하다, 지금 전주는 문화정체성을 확보하고, 이를 국제적 보편성으로 확대 발전 시켜야 할 시대적 소명 앞에 서있다. 규장각엔 조선시대에 제작된 전주지도가 있다. 보물 1586호로 지정된 지도는 동남서북의 전주읍성을 중심으로 성 밖 풍경까지 요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화풍으로 볼 때 겸재풍의 수묵 담채화로 산과 나무는 회화성 있게 그렸지만 건축물은 계화 기법을 차용한 조선시대 전통을 따르고 있다. 지도 그림에 주목하는 이유는 조선시대 전주의 상징을 특유의 나무 문화로 특화시켜 인간이 사는 이상사회를 구체적 계획으로 현실화 시켰다는 점에 있다. 지도를 보면 가장 먼저 봄꽃의 색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 속 나무는 키가 작고 흰색 꽃이 피는 수종이 가장 많다. 오얏나무이거나 매실나무로 추정된다. 키가 크고 흰색 꽃이 핀 나무는 벚나무로 보이고, 붉은 바탕에 흰색 꽃나무는 앵두와 살구나무를 형상화 한 것으로 해석된다. 붉은 색이 번진 꽃은 복사나무, 키가 작고 진한 홍색 꽃이 피는 나무는 일명 산당화라 부르는 명자나무이다. 그림 속에 묘사된 꽃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개화 시기는 4월 중순에서 말일 경으로 추측된다. 성안에 꽃은 없지만 키가 큰 나무들이 여럿 등장한다. 성 밖 하천변에는 버드나무와 선버들 그리고 갯버들이 있고 산자락에는 소나무를 중심으로 잡목도 다수 확인된다. 전주 이씨가 성으로 사용하는 李는 오얏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오얏은 자두나무 열매를 크게 개량한 것으로 중국이 원산지이다. 오얏나무를 중심으로 전주읍성을 조경한 것은 전주가 전주 이씨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시조묘(廟)가 있는 본향임을 의미한 것이다. 나무를 통해 상징을 부여한 점은 매우 의미 있는 정신문화의 구현으로 판단된다. 이는 조선 이미지를 나무로 표현한 전주만의 독특한 문화현상이다. 조선시대 지도 속에 오얏 꽃이 만개한 전주의 모습은 기쁨의 눈물 같은 희열을 선사한다. 물론 슬픔의 웃음도 있을 것이다. 꽃은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만든다. 동시에 꽃은 자기의 영화를 생각하게 하고 결실에서 미래의 성과를 기대하게 하는 등 상징이 함께한다. 궁궐의 내부에 조선시대를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그려져 있다면, 전주에는 꽃나무를 심어 생명력 있는 모습으로 반영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전주 모습은 어떤가. 다른 지자체와 달리 전주만의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품격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가. 전주시는 스스로 전주의 도시적 상징을 꽃심이라 명명하였다. 문학작품 속에서 차용해 온 단순한 용어만을 넘어 이제는 전주만의 실질적인 특징과 문화적 정체성을 부각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한지 또한 전주의 상징물이다. 오얏나무와 함께 한국 토종인 닥나무를 육종하여 가로수로 심는다면 전주의 문화적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찬란한 역사를 일구었던 본향의 전주가 나무와 꽃으로 근거와 본을 중요시 했던 것처럼, 현대의 전주가 일구어 나가야 할 시대적 소명은 무엇인가 공동지성과 함께 고민해야 할 때이다. /김호석 수묵화가전 전통문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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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1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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