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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상징 폭력에 반하여

▲ 조미애 시인전북시인협회장 한때는 이름 난 화가의 전시회나 동숭동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서 밤 열차를 예매하고 이웃집 아이들과 집단을 이루어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한 모습이 사라지게 된 것은 분명 민선지방자치 시대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주민의 선택을 받은 지방의 수장들이 지역문화예술정책을 공약하고 실천함으로써 굳이 서울행 버스를 타지 않아도 상당 수준의 문화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발전한 지역문화예술이 전문예술인과 예술동호인들의 간극과 차별화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문적인 문화예술 영역은 본질적으로 일반인들의 문화적 인식과 구별된다. 예술동호인들의 다양한 활동은 개인적 만족감을 넘어 지역 주민의 삶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주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전문 예술인들의 태도는 예술동호인들과는 서로 다른 아비투스를 생산한다. 예술동호인들의 행위는 전문예술인들의 형식을 모방하는데 주위를 집중하는데 반해 전문예술인들은 새로운 문화를 개발함으로써 더욱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 행동은 우월한 것과 저급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이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서 평가되기 때문에 전문인과 동호인에 대한 정체성의 충돌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전문예술인들은 스스로 문화의 대중화를 선호하다고 하고 있지만 희소성의 객관적 토대인 문화적 독특함을 보존하는 데는 불안해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에 살았던 장자(莊子)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는 대지한한(大知閑閑) 소지간간(小知間間)이라고 했다.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여유가 있고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은 남의 눈치만 살핀다는 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겸손하고 너그럽지만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자신을 내세우려고 애쓰며 사소한 것에도 시비를 가리려 한다. 그러기에 전문가는 진지하면서도 너그러워야한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분명해야 하지만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항상 이겨야한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이러한 장자의 가르침은 오늘 날 많은 시인들에게 문학적 상상력을 북돋아 주었으며 이것은 곧 예술적 상상력으로 승화되어 문화와 예술이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사실 정통문화에 대해 예술인들의 논쟁은 문화자본과 사회적 권력의 지배원리를 규정하기 위한 투쟁의 한 단면일 수 있다. 상당 부분 문화는 사회 계층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섬세한 상징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전문예술인들이 자신의 영역을 고집하고 생활동호인의 비전문적이고 비문화적인 요소를 비판만 계속한다면 지금보다 더 고립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대중으로부터 외면 받게 될 것이 자명하다. 사회적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각각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자본을 동원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교양과 학식을 동일시하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예술 작품은 구별 관계를 객체화한다. 예술동호인의 활동은 화려하게 활성화되어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다지만 전문예술인의 질적 성장을 추월할 순 없다. 높은 수준의 문화예술 미학은 유치하지 않으며 질박하고 소박하다. 더구나 수단의 절약과 같은 미덕에 가치를 둔다. 그럼에도 민선시대 문화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양적인 평가만을 우선시함으로써 질적으로 우수한 문화적 가치가 무시되고 상대적으로 지원이 부족한 것은 깊이 우려되는 일이다. △조미애 시인은 한국문인협회 이사이며 시집 <꽃씨를 거두며>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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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16 20:29

고향 사랑으로 전북의 몫을 찾자

왕기석 국립민속국악원장 [달님이시여! 높이 높이 돋으시어 멀리 멀리 비춰 주십시오] 이 노래는 현재 전해지고 있는 백제 유일의 가요로 알려진 정읍사(井邑詞)의 첫 머리입니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이 노래에 대한 배경과 그의 증표에 해당하는 망부석이 잘 소개되고 있으며 노래는 악학궤범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읍사에는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한(恨)이 담겨 있습니다. 백제의 노래 정읍사는 남도의 노래입니다. 남도의 노래 판소리는 한(恨)의 예술입니다. 정읍이 고향인 나는 소리꾼입니다. 나의 세포 하나 하나는 전라북도의 바람과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는 태생적으로 전북을, 남도의 한을 노래 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고향(故鄕)! 불씨처럼 가슴에 담고 사는 말. 내 가슴속에는 전북의 산천이 언제나 펼쳐지고 굽이쳐 흐르고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산업화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는 고향의 현실에 미치면 울분을 떨칠 수 없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곳, 생각할수록 아늑한 내 영혼의 안식처, 그곳이 바로 내 고향 전북입니다. 나는 40여년 가까이 서울에 사는 동안 경동시장에 가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특히 모과와 석류가 나오는 가을에는 꼭 한 차례씩 들르곤 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고향의 냄새를 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무신으로 개울물 품어 가며 잡았던 미꾸라지가 추억을 거슬러 올리듯 꿈틀대고 있고 어머니와 같은 과일, 모과가 있기에 그곳에 갑니다. 모과를 보면 어머니가 생각나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고향이 떠오릅니다. 모과 향기는 어머니의 손길입니다. 나무 등걸처럼 굽어진 손으로 배앓이 배를 쓰다듬어 주시고, 골 깊게 패인 주름 속 잔잔한 눈길로 머리맡을 지켜주신 어머니를 나는 모과로 하여 만나곤 했습니다. 나에게 어머니는 고향입니다. 내 고향 전북은 모과처럼 은근한 곳이고, 어머니의 손길처럼 인정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해거름엔 저녁 짓는 연기가 낮게 깔려 갔던 고향마을! 판소리꾼인 나는 내 영혼의 원천인 그곳의 삶처럼 은근한 소리, 속 깊은 소리를 하고 싶습니다. 그 시장에 가면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고, 화장기가 없기에 더 건강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으며, 목청을 높이며 악착을 보이는 아줌마가 있고, 큰 돈보다 한 푼이 더 소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논에 발을 묻고 허리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했던 어머니가 그곳에 있습니다. 9남매를 기 안 죽이고 거두기 위해서, 남들만큼은 가르쳐 보겠다고 두 팔을 걷어 부쳤던 생전 어머니의 모습을 그곳에서 보게 됩니다. 판소리꾼인 나는 고향사람들처럼 건강한 소리, 어머니처럼 생명력이 약동하는 소리를 하고 싶습니다. 나아가 정읍사의 달처럼 높이 돋아서 우리 소리 판소리를 백두에서 한라까지 이 강산 구석구석에 메아리치게 하는데 손색없는 전북인으로 활약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우리 전북인은 더욱 높이 높이 돋아서 이 나라 이 민족의 앞길을 밝히는 빛나는 존재로, 내 고향 전북은 문화와 예술이 숨 쉬는 고장으로 거듭날 것이라 확신합니다. 올해는 전라도 명명 천년이 되는 해입니다.이제 웅비하는 전라북도, 새로운 천년을 준비할 때입니다. △왕기석 원장은 제31회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부 장원이며 전북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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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09 18:46

사소한 문화 활동과 심리적 자본

▲ 정정숙 전주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 활동은 예술 행위를 포함하여 사회관계 속에서 취하는 삶의 방식과 가치와 신념과 전통적 활동 등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특히 예술은 장르별로 인식되기도 하고, 최근에는 장르별 융합이 자주 일어난다. 이렇듯 예술을 포함하는 문화 활동이라는 것은 사회 구성원의 고유한 정신과 물질, 지적감성적 특성의 총체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문화 활동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생활 속에서 우리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예술 행위이건 지적 대화이건, 전통에의 몰입이건 간에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분명 폭력적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물리적인 폭력 혹은 정신적인 폭력 혹은 그 둘 다 일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엇인가를 통해 즐기지 못하는 경우에는 늘 주변의 누군가를 대상으로 하여 삶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특성을 지닌 생명력 있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고, 움직임은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나타난다. 때로는 희생이라는 생활양식으로 누군가 상대방을 위한다는 생활방식을 끝내 고집하다가 결국 그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희생을 즐기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삶의 방식일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현재 즐거운 상태인가를 확인할 책임이 있다. 즐겁지 않다면 곧바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술 장르로 돌진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최소한 영화관이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PC방으로라도. 그래야 비로소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활동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다. 프레드 루턴스(F. Luthans)는 2006년에 심리적 자본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가 말하는 심리적 자본은 모두 네 가지로, 희망(hope), 자기효능감(Efficacy), 복원력(resiliency), 낙관주의(optimism)이다. 이 네 가지 심리적 자본의 앞 글자만 따서 단어를 만들면 영웅(HERO)이 된다. 우리가 심리적 자본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잘 축적하면 어느새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비유적 해석이 가능한 것은 아닐까. 어느 순간에도 이러한 심리적 자본이 자기 통장에서 제로 상태 혹은 마이너스 상태가 아닌지 꺼내보아야 할 것이다. 어디서나 손쉽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을 통해서, 손쉽게 볼 수 있는 영화를 통해서, 손쉽게 읽을 수 있는 만화나 시나 소설을 통해서 이러한 심리적 자본을 다시 채워 넣을 수 있다면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굳이 부러워할 필요가 없으리라. 심리적 자본과 유사한 개념으로는 정서지능 혹은 감성지수라는 것도 있다. 피터 샐로베이(Peter Salovey)와 존 메이어(John D. Mayer)가 일반적인 지능지수(IQ)와는 질이 다른 정서지능을 언급하였다. 즉 마음의 지능지수라는 것이다. 첫째, 자신의 진정한 기분을 자각할 수 있으며, 이를 존중하는 자기인식이다. 둘째 충동을 자제하고 불안이나 분노 같은 스트레스를 제어하는 자기관리 지능이다. 셋째, 어떠한 목표를 추구하다가 그 추구가 실패로 끝났을 때에도 좌절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격려할 수 있고, 계속적으로 동기유발을 하는 자기확신이다. 넷째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다. 다섯째 집단 내에서 조화를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할 수 있는 사회적 지능이다. 프레드 루턴스가 언급한 자기효능감과 복원력이라는 심리적 자본과 공통점이 있음을 눈치 채셨을 것이다. 정서적 지능은 아직 정형화된 테스트 방법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최소한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의 심리적 자본이 튼실해지는 여름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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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02 19:46

시선으로부터의 여유

▲ 김승희 국립전주박물관장 여름 바캉스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이국의 풍광을 즐기기 위해 국외로 떠나는 여행객들이 매년 늘어나고 청년 이상 중년의 사람들이 모이면 해외여행 이야기로 대화의 꽃을 피우기 일쑤다. 굳이 발품을 팔지 않아도 TV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안방에서도 충분히 해외 여러 나라의 자연과 문화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린다. 그 중에서 요즘 나의 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노래 잘하는 가수들이 유럽의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래뿐 아니라 유명 팝송들도 기량을 다해 불러주어 시청자가 충분히 귀호강을 할 수 있게 하고, 더불어 고풍스런 건축물들을 품은 아름다운 그 나라의 자연을 감상하는 눈호강도 하게 해준다. 그들은 내가 아는 한, 또는 느끼는 한, 우리나라 탑가수들이다. 당연히 거리의 구경꾼들은 그들의 노래에 감탄하고 소박한 환호의 박수를 보내는데, 마음 조리던 그 가수들은 그런 반응에 안도하고 시청자도 함께 뿌듯해하고 으쓱해한다. 이봐, 우리가 코레안이야, 우리 이 정도야, 알겠어? 하는 느낌이랄까. 아직도 한국인은 외국인의 호응에 유난히 배고파한다. 그리고 어린사람들의 음악이라고 관심 없던 K팝이 미국 빌보드에 상위권을 차지하면 그 그룹을 평소에는 몰랐어도, 노래를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어도 덩달아 어깨 으쓱하며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좋아한다. 방탄소년단이 그만큼의 칼군무와 노래실력을 갖추기까지 기울였던 피나는 노력, 그것을 뒷받침한 소속사 스텝들의 노력이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 있었던 건 아니지 않겠는가. 그들의 아름다운 성공일 뿐이다. 그들의 성공을 애국으로 연결 짓는 행위는 요즘 젊은이들에겐 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다. 전후세대라 불리는 기성세대가 살아온 세상은 국가의 탄탄한 설립 위에 개인의 성공도 있어왔지만 그 2세, 3세들에겐 국가의 존재감이 개인의 존재감보다 옛날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지향해나가는 국가발전형태도 개인과 인권이 우선 존중되고 국가는 서비스의 기능에 충실해져야함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영화 비긴 어게인에서 모티프를 딴 그 신선한 프로그램을 보면서 온전히 릴렉스하게 즐기지만은 못하는 시청자 부류의 한 사람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한번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시청자로서 유명가수들의 노랫소리를 충분히 즐기는 것은 물론 호강이고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어디서든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고 충분히 자리매김되어 있는 가수들이다. 그들보다 아직 자리매김에 허기진 신인, 또는 무명의 실력있는 가수들(혹은 가수지망생들)이 우리나라에 많고 많은 걸 안다. 버스킹이란 그런 이들에게 주어져야 할 무대가 아닐까. 외국인들이 우리 프로가수들의 노래실력에 얼마만큼 감탄하는지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었다면, 실력파 아마추어들이 도전하는 경험을 쌓게 해주는 것으로 포커스를 옮기는 건 어떨까 싶다. 그 아마추어들도 충분히 박수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점은 박수를 받지 못해도 좋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승자독식으로 만연한 사회의 일면을 이 아름답고 여유로운 프로그램에서까지 내비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한다. 저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두려움보다 그냥 나는 무엇을 어떻게 얼마만큼 보여줄까에 핵심을 두는 여유로운 사회가 늘 그리운 심정에서 한번 욕심을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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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5 18:41

남북교류에 문학이 가장 앞서야 하는 이유

▲ 윤철 전북수필문학회장 세기적 사건인 612 북미정상회담이 잘 끝났다. 지난주에는 어느 자리에서나 북미정상회담이 화두였다. 일부에선 성과를 깎아내리기도 하지만 처참한 전쟁까지 겪었던 지난날의 대립과 갈등의 얼음이 녹아내리고 화해와 평화의 온기를 느끼기에 충분한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한다. 작년 이맘때를 돌이켜보자. 내 책상에 핵 단추가 있다라는 김정은의 말 폭탄과 핵실험, 미사일 발사에 미국은 코피 전략으로 북한 핵 관련 시설을 정밀 타격하겠다는 북미 간의 대립이 고조되어 이 땅에 전운이 감돌고 대다수 국민은 불안에 떨지 않았던가. 이제 전쟁의 위협은 사라졌다. 통일의 시야를 가리던 짙은 안개도 지난 여섯 달 사이에 빠르게 걷혀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통일이 보인다. 제대로 된 통일의 밑그림을 그리고 준비해야 하는 『통일의 시대』가 온 것이다. 나뉜 땅덩어리가 합해지고 남북한의 기존체제를 무너뜨려 새로운 단일체제가 태어난다고 해서 그것을 진정한 통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통일이란 땅 위의 경계선을 허물고 하나로 합하는 물리적 개념뿐 아니라 같은 민족으로서 혈연적 유대성, 지역적 인접성, 문화적 동질성, 정서적 연대성, 즉 생활문화를 공유하는 정신적 개념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지난 73년 세월 동안 남과 북의 생활문화는 정반대 방향으로 너무나 다르게 변화하고 발전하였다. 격차 또한 극심해진 탓에 충분한 준비 없이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조정하기 어려운 사회 혼란으로 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쪽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탈북자들의 남한 사회 적응을 모델로 통일 이후의 문제점을 꼼꼼히 짚어봐야 한다. 탈북자 대부분이 적응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가 생활문화 차이 때문이란다. 이념과 체제에 의한 통제가 정당화된 획일적 사회주의 체제에서 교육받고 세뇌된 사고와 가치 기준으로는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유를, 경쟁이 치열한 시장 경제를, 이질적인 것이 공존하는 다변화 사회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음은 당연한 현상이다. 탈북자가 늘어나면서 이것이 사회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제 남북한은 문화적 동질성, 정서적 연대성만으로 본다면 단일 민족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고 생각한다. 체제 안전을 보장받은 북한의 다음 수순은 경제발전을 위한 개혁개방이다. 북한의 개혁개방 결과로 남북 사이에 사람과 교통수단의 왕래가 자유롭게 되고, 전화와 편지 인터넷 통신에 제한이 없으며, 관세나 수량 등의 규제 없이 상품을 교역할 수 있다면 그것이 실질적인 통일이리라.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져 서로를 이해하는 섞임과 스밈 가운데 문화 격차가 자연스레 줄어들고 없어진다면 휴전선의 있고 없음을 떠나 통일은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남과 북의 심각한 생활문화 격차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해소를 위한 노력이 진정한 통일의 디딤돌이며 통일 이후 사회 혼란과 통일 비용을 가장 최소화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평생 직접경험으로 체득하는 것보다 간접경험으로 알고 익히는 것이 훨씬 많다. 지금으로선 남과 북이 서로를 직접 경험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간접경험을 통해 생활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밖에 없다. 간접경험으로나마 서로의 생활문화 차이를 이해하고 습득하며 단절점을 이어 붙이는 유용한 방법을 찾자면 문학만 한 장르가 없다. 보통 수준의 사고와 가치 기준이 바탕을 이루는 일상의 삶을 진솔하게 그려낸 문학작품은 미지의 사회를 간접 경험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북교류에 문화교류가, 그것도 문학이 가장 앞에 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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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18 18:50

배고픈 예술계

▲ 염광옥 한국무용협회 전북지회장 문화예술이 밥 먹여 주냐? 이런 비아냥은 이제 구식이다. 지금 이 시대에는 문화예술이라는 것이 밥만 먹여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서 문화는 어느 한 지역이나 나라의 대외 이미지를 좌우하는 브랜드로서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술가를 가장 빈번하게 수식하는 단어는 가난 아닐까 싶다. 가난은 모더니즘 사조가 예술계를 지배하던 시기부터 예술가들을 따라다녔던 꼬리표였다. 예술 그 자체만을 위한 예술이라는 가치 아래 가난은 예술작품의 고결함과 깊이를 더해주는 혹독한 주문이 되었다. 음악의 아버지라 추앙받는 바흐도 가족의 생계를 걱정했고, 세기의 천재 모차르트도 빚에 쪼들렸다. 가곡의 왕으로 불리는 슈베르트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다. 그래도 반 고흐에 비할까.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채 고독하고 비참하게 살다 권총 자살로 37세의 삶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반 고흐의 작품들이 모두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생전에 단 하나의 작품밖에 팔지 못했다. 다른 나라 예술가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비운의 천재 화가 이중섭의 인생도 극심한 빈궁과 처자식을 일본으로 보낸 후의 애절한 고독으로 가득하다. 예술가의 숙명이라고 해야 하나. 예술가의 가난은 시대가 변해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물론 본질적으로 예술의 미학적 가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의 노동과는 대항적 위치에 놓여야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 예술가들이 처한 현실적 상황을 직시하면 예술가처럼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노동 착취를 당하는 직업군도 찾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시간제 아르바이트의 시급에도 못 미치는 대가와 전문적 기능과 기술을 제공하면서도 사회적으로 받는 무시와 편견은 이들로 하여금 자기 직업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각종 예술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직업적 특성을 감정노동이라는 단어를 생성시킴으로써 설명하듯 예술 노동 또한 무엇보다도 정신노동이라는 기본 전제를 그 특징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 행위는 육체적 노동을 수반하는 정신적 노동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술인복지법이 만들어지고 복지재단도 설립됐다지만 예술가들의 빈궁한 처지가 개선됐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예술가를 돕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도 적지 않다. 자기가 좋아 선택한 예술인데 왜 국가가 나서서 이들을 도와야 하느냐는 것이다. 자영업자가 망하면 국가가 도와주는 것을 보았냐는 말이 덧붙는다. 어떤 이들은 예술가는 가난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일한 대가만큼은 정당하게 지급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예술가는 가난하기 마련이라고 외면해야 할까. 열심히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상황이 정상은 아니다. 예술가들도 돈 버는 일이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경제에만 매달려 물질적인 예술을 창조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문화예술은 지역국가의 브랜드로서만이 아니라 국민과 지역 주민으로 하여금 문화 체험과 예술 경험을 통해 긍정적 판타지와 인생의 전환점을 경험하고 사회와 삶을 진지하게 탐색할 수 있도록 이끄는 매개이기도 하다. 문화예술은 건강한가? 아직도 문화예술인들이 춥고 배고픈 세상은 한낱 공허한 빈 수레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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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11 19:04

선거와 문화다양성

▲ 정정숙 전주문화재단 대표이사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일인 6월 13일을 앞두고 있어 길거리가 활력이 넘친다. 한편 소음 때문에 괴롭다는 분들도 있다. 피곤할 때는 소음이 더욱 힘겹다. 이 소음이 전국의 공간에서 6월 12일이라는 시간까지는 지속될 것이므로 공간과 시간의 양 측면에서 견디는 경험이 축적될 기회이다. 오히려 소음이라는 현상에 시선을 두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나 취미활동 쪽으로 신속히 방향을 전환해 듣거나 보거나 뭔가 하는 것이 현명한 대응일 수 있겠다. 후보들은 시민들에게 자신을 지지해주기를 호소한다. 자신의 경력 중 장점 그리고 정책 공약을 타 후보와 차별화해 제시한다. 경력 중의 장점은 선명한 편이지만 정책 공약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므로 그 근거나 공약의 준수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불명확하고 자기중심적인장담에 가깝다. 그래서 정책 공약에 대한 유권자들의 판단은 후보자의 논리적 설득력뿐 아니라, 후보자가 보여주는 확신에 찬 태도나 신념에 의존하기도 한다. 하지만 후보자가 가진 신념은 객관적이고 진정한 안목을 지닌 시민들과 소통과 공유 되지 않을 경우, 스스로 거는 최면에 그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신념은 그 시대와 공간의 제도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선택되는 것이고, 유권자의 공통적인 희망사항과 맞닿을 때 이해되며, 특히 자신의 이익에 기반 하지 않은 모양새이지만 실은 자신의 이익에 기초하는 예측성 명제들이기 때문이다. 일자리 증가나 국가예산 증액 등의 공약 수단과 신념은 시민으로 하여금 풍요에의 접근과 행복의 증진이라는 미래의 열매를 기대하게 한다. 결국 이런 꿈들을 현실화 시킬 수 있다고 믿는 후보자 자신을 선택하여 주기를 원하고, 선택 받으면 해당 임기 동안 자신의 정치적 힘을 행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 권력은 합의된 선거제도로 보장한다. 현재 선거운동을 보면 공약이 크게 다르지 않듯이, 문화적으로 다양한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름이 적혀 있는 현수막과 명함, 정당 이름과 번호와 후보자 이름으로 장식된 소형 트럭의 확성기와 간혹 소형 트럭에 서 있는 후보자들, 교차로에서 율동을 하는 선거운동원들의 모습에서 성별, 연령별, 분야별, 지역별 표현의 다양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들의 획일적인 노동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어찌 보면 정치적인 의정과 행정활동이라고 하는 기능적 혹은 전문적 탁월성을 중시하는 분야에서 문화다양성을 논의하는 것이 부적절해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부서가 인간과 인권중시, 과정과 소통중시, 관계와 지속성 중시, 예술과 놀이와 휴식을 중시하는 문화적 부서가 되는 날을 꿈꾸는 문화계의 입장에서는 선거에서도 문화다양성이 발현되기를 바란다. 짧은 선거운동 기간이라는 한계 상황에서 효과적인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가장 효율적이라고 여겨지는 선거운동 방식으로 획일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조차 다양한 표현과 행동 방식이 자연스럽게 여겨지고 펼쳐지는 선거운동의 풍경을 기대한다. 오전에는 선진국 버스기사였다가 오후에는 개발도상국, 저녁에는 후진국 기사가 된다는 허혁 작가의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라는 책에서 볼 수 있듯이, 이번 선거 결과 우리 시민들이 오전에는 선진국 시민이었다가 오후에는 개발도상국, 저녁에는 후진국 시민이 되지 않고, 늘 선진국 시민으로 생활할 수 있는 사회가 앞당겨지기를 바란다. 버스기사들, 정치인들, 회사원들, 농민들, 교사들, 청년 직업 대기자들, 학생들 너나 할 것 없이 선진국에서 선진국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나의 이웃들이 이 선거기간 동안에 무례한 상황에 놓이지 않는 선진국 시민으로 생활하도록 나는 나의 의무를 충실히 행하고 예를 갖출 수 있을까. 그리고 일과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있을까. 자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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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04 20:04

좀비 영화를 보며 정치를 생각한다

▲ 김승희 국립전주박물관장 지방선거가 가까워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매번 선거 때마다 어떤 기준으로 일꾼을 뽑아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러던 중 최근에 우연히 좀비를 다룬 영화를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영화들이 자꾸 만들어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우리 역사 속에서 좀비와 비슷한 귀신을 살펴보고자 하는 흥미가 생겼다. 우리의 전통 귀신은 보통 죽은 자의 혼을 말한다. 귀신은 보고 들을 수는 있지만 붙잡을 수 없는, 즉 질료적인 한계가 분명한 존재이다. 그런데 일부 억울하게 죽은 자의 귀신이 이승에 개입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한 귀신은 한 사회 집단의 존속을 방해하는 존재가 된다. 반면에 좀비는 질료적 한계는 없으나 가사(假死)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그 형상에서는 내면화된 분노를 표상하고 있다. 그들은 떼를 지어 다니며 전염을 통한 무한 증식을 한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우리나라는 작은 빙하기라 불리는 소빙기(小氷期)를 맞는다. 기후학자들은 이 소빙기의 절정을 1550~1700년에 걸친 약150년으로 상정하는데, 이때 조선 사회는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선조 때(1567~1608)에는 전쟁과 절대적인 기아상태에서 사람들은 시체를 베어가고 서로를 잡아먹기에 이른 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1594년에는 식인행위를 금지하는 조치가 내릴 정도였다. 숙종대의 을병대기근(1695~1699) 때에는 400여만 명이 죽었는데, 전체인구의 23~33%로 추정한다. 이 시기에 서양에서는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된 가운데 전쟁과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기근과 역병으로 1693~1694년 프랑스에서는 1/10의 인구가 사망하였다. 조선 사회에 불어닥친 기근과 혹독한 재앙은 백성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민간에 떠도는 흉흉한 귀신 이야기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반영 내지는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도 있는 죽음에 대한 불안 심리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에 국가에서는 불안한 민심을 잡기 위한 정치적 대안이 필요하였다. 조선사회에서는 유교의 천도관(天道觀)에 따라 천재지변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으므로, 인간사회의 질서를 바로 잡는 방도에 천착하여 이를 해결해나가고자 하였다. 당시 조선은 유교 이념에 따라 예(禮)를 강조하는 사회로 가고 있었음에도, 한편으로는 불교의식인 천도재를 열어 억울한 귀신을 위로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천도재는 죽음으로 비롯된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해결하는 정치적인 행사였던 것이다. 이렇듯 재앙으로 인하여 국가적 상황이 위급할 때에는 설령 통치 이념에 반하는 것이라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게 바로 정치의 일인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좀비를 다룬 영화나 소설 등의 매체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좀비는 모순으로 가득한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에 미국 영화에 처음 등장했다. 좀비는 원하지 않는 전쟁에 동원되거나 노동시장에 몸을 맡겨 사물화한 인간을 상징하고 있다. 좀비의 행태는 온라인의 익명성을 이용해 하나의 이슈에 몰려들거나 쇼핑몰을 배회하며 해방감을 찾는 모습과 비교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귀신은 치자(治者)가 죽음 뒤의 세계에까지 뻗은 사회적 화합의 통찰을 보여준 예라면, 좀비는 삶과 죽음의 권리 자체도 박탈당한 채 세계와 절연된 적개심에 가득 찬 존재를 투사한 모습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좀비를 자신의 자화상처럼 여기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번 선거에서는 이런 젊은이들의 아픔을 읽고 포용할 정치적 리더가 선출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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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8 19:39

'문화예술인 지원 펀드' 설치를 제안한다

▲ 윤철 전북수필문학회장 문화예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예술가라고 한다. 예술가의 삶이 늘 새로움을 추구하며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개척해가는 탓인지 사람들은 예술가를 고상하고 특별한 사람으로 선망하기도 한다. 예술가는 분명 보통사람과 다른 면이 있지만 먹고사는 일에서는 보통사람과 다르지 않다. 본인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이면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문화예술 활동이 밥이 되고 돈이 되어 생계수단으로 충분하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직업은 없겠지만 2016년 3월에 발표된 예술인 실태조사를 보면 1년간 예술 활동을 통한 수입의 중간값이 300만 원이며 36.1%는 수입이 전혀 없었다. 일부 유명 예술가들의 높은 소득을 포함해도 평균수입이 1255만 원에 불과하다. 문화예술 활동으로 생계 해결을 넘어 부자가 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생활에 구애받지 않고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다. 주업은 교수나, 교사로 교육자이면서 창작 활동을 하는 겸업 예술가들은 신이 내린 사람이고 예술가의 절반이 예술과 전혀 다른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도 프리랜서나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보니 노후 대책의 보루인 국민연금 가입률은 56.8%에 불과하다. 대부분 전업예술가는 지금도 막막하고 미래는 더 불안한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술가 다섯 명 중 한 명은 자치단체의 보조금을 받은 경험이 있을 정도로 창작 활동 경비를 외부 지원에 많이 의존한다. 그러나 그 보조금이란 것이 정말 새 발의 피다. 병아리 눈물만큼 주는 보조금도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하다. 그나마 것에 목을 매는 예술가의 약점을 이용하여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못된 발상까지. 예술은 우리의 얼이며 자존심이다. 그것이 생활 속에 녹아들어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전통문화로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게 된다. 천혜의 자연경관도 없이 관광 대국을 이룬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나라를 보자. 왕실과 귀족의 뒷받침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던 예술가들은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문화유산이 후대에 와선 소득 창출의 자산이 되고 있지 않은가. 예술은 단순소비재가 아니다. 회임 주기가 다소 길다뿐이지 생산재임이 틀림없다. 한국지엠을 살리는 데 정부가 7조7000억 원을 투자한단다. 말이 7조7000억 원이지 보통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지방정부도 기업 유치나 생산 지원을 핑계로 벤처기업과 중소기업에 몇백 억 원 정도는 아깝지 않게 퍼준다. 그러면서도 문화예술지원엔 좀생이 짓을 하는 지방자치단체는 각성해야 한다. 예술가들이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세계적인 문화예술품을 창작하도록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소모적 경비가 아니라 미래의 먹거리를 만드는 생산적 투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하고 싶은 일에 신명을 바칠 수 있는 바람직한 일자리 창출의 방법임을 알아야 한다. 예술가들은 먹고사는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창작 활동만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흔히 최고은 법이라고 부르는 예술인복지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뿐 아니라 생계까지도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문화예술인지원펀드를 자치단체마다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공감은 하지만 재원이 없다고 예산 타령부터 할 것이 분명하다. 자치단체장들이 지지표를 사기 위해 꼼수로 여기저기 분산해 놓은 선심성 예산만 제대로 모아도 작은 자치단체는 몇십 억, 큰 자치단체는 몇백 억 원의 재원 마련이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뽑히는 자치단체장들의 통 큰 결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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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1 20:58

문화예술과 정치

▲ 염광옥 (사)한국무용협회 전북지회장 예술분야에 활동하는 사람은 당연히 자기만의 창작 생활에 만족하며 사는 건 어쩌면 최고의 행복일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어느 때 부터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정치를 하 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것 또한 한계의 벽에 부딪히게 되고 예술인들이 정치인들에게 끌려가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 도 지금의 상황이다. 세상은 변하고 여기저기 문화발전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많은 변화들이 생겼지만 정작 예술인들에게는 여전히 배고픔이 난무한 사회다.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하며 예술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지혜를 모아 해결해야 하는지 진심을 다해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정치인들의 내건 공약들 대부분도 지역개발 같은 인기 영함 주위의 공약이 대부분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가운데 문화예술 공약은 빈약하다 못해 거의 전무했다. 문화예술 공약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은 후보자들의 머릿속에 전라북도의 문화예술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눈에 뛰는 공약을 살펴보자면 문화 예술 활동 기획 지원의 일원화 정도이다. 사실상 나머지 문화예술 공약은 지금까지 지역에서 논의돼 왔던 공약들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전라북도 예술계를 지켜 줄 수 있는 후보도 없는 마당에 예술사업의 장밋빛 전망을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과한 욕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문화예술의 양적, 질적 발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전라북도 문화예술의 과제와 올바를 시책 추진 방향에 대해 논의가 지금부터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은 그동안 주체적으로 활동하기보다는 주변인의 입장에 서있었다고 보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예산을 쥐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에 얽매여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제는 문화예술인들이 한 목소리를 내고 당당히 요구하는 변화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문화예술인 스스로가 문화예술발전을 위한 올바른 정책을 제시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힘을 하나라도 모아야한다. 예술기금확대와 예술인 창작확대는 물론이고 문화예술분야 고용확대를 위한 정책 수립을 요구하는 등 지원책 마련도 당당히 요구해야 할 것이다. 예산 몇 푼을 위해 끌려 다닌 다면 전라북도의 문화예술의 퇴보는 물론이고 문화예술이 주인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정치인들이 문화예술계는 소위 정치면에서 득표로 연결이 잘 되지 않는 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문화예술을 표로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불쾌하기는 하지만 정치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원인의 한축에는 문화예술계의 책임도 반드시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예술계가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문제와 스스로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한 달 뒤에는 변화가 일어나겠지만 전라북도 문화예술인들은 이번 선거 공약을 유심히 지켜보고 판단해 주었으면 한다. 장 미셸 지앙의 문화는 정치다라는 말도 문화예술인 모두가 정치인이 돼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세상을 풍요롭게 바꾸는 일에 문화예술이 관여를 해야 하며, 정치도 결국은 이를 함께 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하고 싶다. 지금 한창 선거 기간이다. 전라북도의 문화예술 정책을 제대로 된 시각으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대책 방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리더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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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4 18:45

축제 마당과 문화다양성

▲ 정정숙 전주문화재단 대표이사 축제일에 비가 오면 관객과 연출가 모두 마음이 어수선해진다. 행사를 간단히 취소할 수 없어서다. 물론 돌풍과 같은 자연의 위력으로 관객의 생명 자체가 위험해진다면 취소를 결단하겠지만, 바람이 동반되지 않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곧 그칠 듯 기대를 부풀린다. 이렇게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질서 앞에 사람은 무력해진다. 하지만, 이 경험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후속 조치를 낳지는 않는다. 자연의 질서에 대한 경험들을 반성의 재료로 활용하는가 아니면 무력감이라는 본능적인 불쾌함을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그녀 혹은 그에게 떠맡겨버리는 방식으로 처리하는가에 따라 사람 간의 관계 맺는 방식과 생활태도 는 달라질 수 있다. 비 오는 축제 마당에도 전문적인 예술행사와 생활문화프로그램과 체험부스는 다양하게 구성된다. 어르신들은 민요와 장구 협연을 하시고, 중년들은 7080 음악을 즐기고, 어린이들은 동요와 무술퍼포먼스에 환호하며, 청년들은 시음과 나이트 뮤직 쇼에 참여한다. 축제에서 펼쳐지는 세대별 혹은 성별 문화다양성은 프로그램 외에도 주차장이나 도로나 장터에서 교통을 통제하는 스태프들과 관객들의 접촉에서도 드러난다. 축제 현장에서 프로그램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고,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행동에서 성별, 세대별 문화다양성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상대방을 무시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언어와 행동은 문화다양성이 아니라, 폭력으로 해석되는 것이 정확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주행하고자 하는 도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교통을 통제하는 여성 스태프에게 분노하여 차에서 내려 반말을 하며 삿대질을 하고 스태프의 몸을 밀치는 중년 남성의 언행양식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여성에게는 반말을 하거나 손찌검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생활해 온 경험들이 반성 없이 계속 축적되고 강화된 결과일 것이다. 마치 최근 공감되고 있는 갑질 고성과 욕설의 문제와 닮았다. 이것은 문화다양성이 아니고 인권 침해 및 업무 방해 행위이다. 애초에 교통 통제가 없는 축제는 불가능한 것일까? 마을이나 동 단위의 축제로 기획하여 규모를 줄인다면 축제의 숫자는 늘어나더라도 교통 통제와 같은 불쾌한 강제는 사라질 수 있다. 만일 불가능하다면 교통 통제를 자연 질서처럼 수용하고 느긋하게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약간 불편한 질서를 지켜야 하는 국면에서 여유가 나타나려면 개인이 일상 속에서 행복한 삶을 운영해 원망의 습관이나 태도가 축적되지 않아야 한다. 또한 화부터 내고 보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그렇게 해서 일단 상대방을 윽박지르려는 문화는 반성과 복기의 가치를 값없이 여기는 사회에서 태어난다. 우리 사회는 반성을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고귀한 성찰활동이라기보다 열등한 자들의 자책으로 비하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고용 및 복지정책과 함께 행복감의 원천을 발굴해내고, 행복을 느끼는 방법론을 공유하는 교육이나 문화정책, 술과 폭력에 의존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서적 표현이 가능하도록 이끌어주는 문화사업, 타인을 거칠 게 대하는 것이 힘이라고 가르쳐 온 권위주의적 생활양식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정밀하고 구체적인 정책과 사업들이 반성과 복기의 힘으로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동시에 모색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색된 정책과 사업들은 사회의 지도자 그룹에 시범 적용하여 폭력이 아닌 진정한 문화다양성이 발현될 수 있도록 파급효과를 높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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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07 16:27

전북에서 만나는 가야이야기

▲ 김승희 국립전주박물관장 최근 가야사 연구와 복원이 새 정부의 국정과제에 포함되면서 가야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대두되고 있다. 그동안 한반도 고대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중심으로 서술되었고, 가야에 대한 사료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가야의 역사는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1970년대 이후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가야 유적이 발굴조사 되고 있으며,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가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크게 나아졌다. 그러나 영남지역 밖의 가야에 대해서는 아직도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특히 전북 동부 산악지역에 위치한 가야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행히 전북지역 연구자들의 관심과 노력의 결과로 최근 많은 가야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1982년 남원 월산리 고분군을 시작으로 최근의 장수 동촌리 고분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적이 발굴조사 되어 우리 지역 가야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전북지역에서 확인된 무덤들은 기본적으로 땅을 깊게 파서 돌로 덧널을 만드는 구덩식 돌덧널무덤이라는 구조에 많은 토기와 무기 등을 부장하는 가야의 장례풍습을 따르고 있다. 부장된 토기의 모양이나 조합 관계는 대체로 경남 고령지역 대가야의 것과 유사하다. 흔히 고고학에서의 장례문화는 상당히 보수적이어서 큰 사회적?정치적 변화가 없다면 오랜 기간에 걸쳐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다고 본다. 이런 연유로 많은 연구자들이 전북 동부 산악지역의 가야 유적을 대가야와 관련지어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전북 지역 가야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대가야와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토기는 형태적으로는 대가야와 유사하지만 보다 곡선적이며 무게의 중심이 아래쪽으로 쏠리는 등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점이 확인된다. 또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영남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 중국 청동거울과 중국 남조에서 만들어진 천계호(天鷄壺)라고 부르는 닭머리 모양 주둥이를 가진 청자 주전자, 그리고 금동신발 등이 출토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당시 최고위층이 사용했던 것으로 백제 중앙정부가 주변지역의 여러 작은 나라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건낸 위세품들이다. 이러한 유물이 나왔다는 것은 백제가 이 지역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다. 흔히 역사학자들은 『일본서기』나 「양직공도(梁職貢圖)」 등에서 나오는 기문국(己汶國)을 섬진강 유역으로 비정한다. 그리고 이 지역 정치세력이 백제와 대가야 사이에 있으면서 번갈아 복속되었던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 유물의 출토 양상은 어느 한 세력의 일방적인 형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결코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전북 동부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정치세력들이 인접한 가야의 장례문화를 받아들여 가야와의 동질의식을 표방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면서도 백제와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독립적 존재로서의 위상을 찾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오늘날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러한 특성은 문화의 혼종화나 혼합문화가 당시 성립되어 있음을 표상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간 전북 가야 의 독자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천오백년 전 전북 동부 산악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꿈과 살아가던 모습을 무덤 속, 또는 여러 생활터전에 남겨 놓았다. 그들이 남겨놓은 꿈과 다양한 흔적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기술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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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30 18:39

균형있는 문화정책이 아쉽다

▲ 윤철 전북수필문학회장 문화만큼 멋진 말도 드물다. 민중문화, 청년문화, 사회문화, 조직문화처럼 어떤 단어에 붙여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가 않다. 다소 부정적 의미의 단어와도 적절히 호응하며 뭔가 있어 보이는 것처럼 격을 높이기까지 한다. 예술이란 단어도 그렇다. 예술은 문화와 분명히 다른 개념이지만 전문 예술가에 의한 순수예술의 영역을 넘어 대중화에 이르면 문화와 예술의 이미지가 서로 융합되어 구분이 어려워진다. 요즘엔 아예 한데 묶어 문화예술이란 복합어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고 정책 분야에서도 문화와 예술을 포괄하는 문화정책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 이러한 언어적 변화를 굳이 따지는 것은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정책이 대중예술에 편중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어서다. 동네 주민자치센터 곁을 지나다 보면 낭자한 장구 소리가 따스한 봄볕처럼 온몸을 휘감을 때가 있다. 나는 그럴 때 만화방창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지방자치가 실시된 이후로 주민자치센터나 문화의 집에 가면 노래, 춤, 요가, 서예, 글쓰기 같이 예술이든 문화든 여가를 즐기며 끼를 발산할 수 있는 꺼리가 아주 많다. 마음만 먹으면 이곳저곳을 순회하며 하루 종일 취미 생활을 누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 지천에 널렸다. 이것들의 대부분은 대중예술분야임에도 그냥 대중문화라고 부른다. 어쨌든 지방자치로 인해 대중문화가 만화방창의 호시절을 맞은 건 사실이고 칭찬의 박수를 받을 일이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 소프트웨어적인 대중문화 프로그램은 양적, 질적으로 크게 팽창했지만 하드웨어적인 문화기반시설은 상대적으로 더욱 취약해졌다.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된 지난 20여 년 동안 자치단체가 주도적으로 건립한 문화시설이 몇 군데나 되는지 손을 꼽아보면 그 실상을 쉽게 알 수 있다. 선출직들은 임기 내에 성과를 드러내고 그것을 표로 연결해야 다음 선거에서 이길 수 있으므로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이 조급하다. 그러니 장기간이 소요되고 예산이 엄청나게 필요한 문화기반의 확충보다 시간과 돈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고 효과가 속 빠른 대중예술 프로그램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문화정책에 대한 이런 인식이 20여 년 이상 누적된 결과, 주민들의 대중문화 향수 기회는 크게 늘었지만 우리 도내의 문화시설은 부끄러울 정도로 낙후되어 있다. 전라북도예술회관은 건립된 지 35년도 넘어 화장을 진하게 한 노파의 주름진 얼굴 형상이다. 지역 문화의 계발과 전승을 주도하도록 지방문화원진흥법에 의해 설립된 전주문화원은 어떠한가? 전국 문화원의 작년도 예산 평균이 4억9000만 원인데 비해 전라북도는 2억4000만 원으로 전국평균의 절반을 밑돈다. 그나마 도청소재지인 전주문화원은 1억3000만 원에 불과하여 문화진흥사업은커녕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실정이다. 독립된 원사(院舍)도 없이 과거에 동사무소로 사용되던 건물의 한 모퉁이를 빌려서 쓰고 있다. 도청소재지는 물론 우리 전주와 규모가 비슷한 도시 중 독립된 문화원 건물을 가지지 못한 도시는 전주가 유일하다. 인접한 논산시의 경우 문화원만 해도 대지 2000평에 건물이 525평 규모로 우리 도의 예술회관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부럽기도 하고 우리의 현실이 부끄럽기도 하다. 우리 지역 자치단체장들의 균형 있는 문화정책이 아쉬운 대목이다. 건물이나 시설이 그 지역 문화예술의 척도는 아니지만 문화기반시설은 문화예술발전과 지원에 대한 정책적 의지의 표현에 다름없다. 누가 뭐래도 전주는 문화예술의 도시 아닌가. 대중문화 확산에 걸맞게 전주의 랜드마크로도 손색이 없는 문화시설 하나쯤 건립한다고 해서 토를 달거나 반대할 시민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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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3 21:03

진정한 축제의 의미

봄기운이 완연하여 온 세상이 파스텔 빛으로 가득한 이 시기에 주말을 이용하여 가족 또는 연인과 행복한 주말을 보내기 위해 관광지나 축제장으로 나들이를 떠난다. 전국적으로 축제와 행사가 많은 이 시점에 예술을 하는 사람들도 함께 행사와 공연으로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수많은 축제나 행사 등을 생각하면 공연관계자들이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임하고 있는 지 의문이 생긴다. 시민들, 즉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함께 즐길 수 있는 행사인지 혹은 상업성만을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행사인지를 묻고 싶다. 전국적으로 열리고 있는 축제나 행사의 경우 각 지역성을 고려한 특산물이나 해외 관광객을 위한 여러 가지 콘셉트를 활용하고 있다. 의미와 색깔과 목표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속성만을 유지하려다보니 실질적으로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과 같이 겉은 화려하고 속은 텅텅 비어있는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인 즉 전반적인 내용을 잘 파악하며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전문성을 가진 기획자나 예술 감독을 부르지 않고 이벤트성으로만 사람을 현혹시키기 위해 단순 흥미만을 유발하는, 우리가 머릿속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늘 하던 식의 뻔한 행사만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행사의 주는 그 지역의 관공서나 큰 기획사가 주가 되어 행사를 준비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축제나 행사 공연 등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했고 컨셉과 분위기를 걸맞게 만들 수 있는 전문가와 함께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문성 없고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어설픈 행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성공적인 예로 천안 흥타령 춤 축제를 들 수 있다. 이 축제는 춤을 주제로 5일간 천안 삼거리 공원에서 펼쳐진다. 전국에서 5000여명이 참여하는 춤 경연과 시내 중심가에서 춤과 음악으로 구성, 전 세계 무용인들 참여하여 거리 퍼레이드를 경연 방식으로 진행한다. 축제장에서는 매일 댄스 왕 선발, 비보잉(b-boving), 스포츠 댄스, 재즈 댄스 등의 행사를 통해 다양한 장르의 춤을 배울 수 있으며 또한 누구나 참여해서 춤을 출 수 있는 자유로운 무대 운영을 하고 있다. 전국 유일의 춤을 테마로 참여하는 국제화 축제, 천안 시민이 스스로 만들고 모두가 참여하는 함께하는 축제라는 점에 최우수 축제로 모범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든 축제가 성공한 이유는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며 시민들이 주가 되어 축제를 준비하여 관광객들이 함께 숨 쉬고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온 국민이 함께하는 전문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진행하여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행사가 된다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성공한 축제라고 해서 그 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해서는 안 된다. 지역과 풍습이 다름으로 자기 것을 노력해서 만들어 내야한다. 큰 기획사나 관공서 직원이 아니라 그 지역을 잘 알고 있는 지역민을 기획자나 연출자로 만들어내서 축제를 지켜나갈 수 있도록 지원을 해 매년 축제를 즐겁게 준비하며 손님들을 자랑스럽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옳다고 본다. 천막에서 파는 파전과 막걸리, 대형 가수만을 부르는 이벤트성으로 행사의 본질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 비용을 절감하여 지역민들이 주인이 되어 부족하지만 지역민들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특색을 지켜나가고 공부하며 가꾸어내는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면 지역발전과 더불어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크고 작은 축제와 행사들 모두 내실 있게 만들고 가꾸어 낸다면 모두가 기다려지는 진정한 축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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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16 19:41

인권과 문화다양성

▲ 정정숙 전주문화재단 대표이사 국가들이 제정하는 헌법의 기초가 되는 세계인권선언은 전문과 총 30조로 구성되어 있다. 제1조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누구에게나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가 있다. 인간은 타고난 이성과 양심을 지니고 있으며, 형제애의 정신에 입각해서 서로 간에 행동해야 한다이다. 24조에는 휴식과 여가를 요구할 권리, 27조에는 문화권이 명기되어 있다.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는 과연 인권을 잘 지키고 누렸는지 자문해본다. 새삼스럽지만 이 지면을 통해 늦게나마 서 지현 씨에게 감사의 표현을 하고 싶다. 윗사람에 대한 순종과 굴종의 차이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8년을 견디고 기다려 온 그녀의 노고와 용기에 놀랐다. 어느 누구도 그녀가 성추행을 당하고 인사 불이익까지 겹으로 받은 고통을 대변해줄 수 없었다.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직접 그녀의 입을 통해 피해와 고통을 발언하고, 그 고통의 시간 속에서 깨달은 진리도 요약해주었다. 첫째, 피해자가 입을 다물면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째, 잘못에 대한 사과는 당사자에게 직접 해야 한다. 셋째 피해자는 잘못이 없다. 오직 가해자의 전적인 잘못이다. 따라서 피해자는 부당한 죄책감으로 피해자 자신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권력이 중심이 된 문화, 약한 자들의 인권은 논외로 취급되던 역사는 이제 재를 남기며 사라질 수순을 밟고 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저지른 폭력적 행태와 질서를 걷어내는 마라톤과 같은 혁명이 시작되었다. 인권은 표현될 때 지켜진다. 묵종, 굴종이 가정과 조직과 사회를 위한 미덕이던 시대가 떠나간다. 생존에 대한 불안과 위기감을 지닌 모든 약자들에게 세뇌되어 온 묵종의 미덕은 권력자의 지시를 숨죽이고 따르도록 억압하는 시스템으로까지 강화되었고, 우리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전략적 가치관으로 변질되어 우리 인권의 날개는 꺾였다. 커피 수다가 좋고, 가맥 수다가 좋은 것 중의 하나는 억압적 질서를 해방시켜 자유롭게 정서와 분노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억압의 반대편에서 우리가 진정 원했던 이해와 소통과 인정에의 갈망이 임시적으로나마 그 수다의 공간에서 충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런 수다의 공간에서도 어김없이 폭력의 유혹이 상존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인권의 잣대와 인권의 횃불을 늘 목숨처럼 붙들어야 하지 않을까. 인권 중의 하나인 문화권은 문화적 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권리이며, 2000년 이래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증진은 전 세계의 문화인이라면 주목한다. 서로 다른 사람들, 서로 다른 문화가 서로를 억누르지 않고 표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연다. 이제 문화다양성은 사회통합에 장애가 되는 문제 꺼리가 아니고, 오히려 사회가 정체되는 것을 막고 발전을 모색해갈 수 있는 발전적 자원이며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여겨진다. 우리 스스로 정직하게 표현하고 또 누군가가 표현하는 것을 경청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고 인정해가는 인권 존중의 사회를 만들 의무가 문화다양성 증진을 통해 성취될 것으로 기대한다. 다시 돌아가, 모든 국가와 국민이 합의한 세계인권선언 1조에는 인간은 타고난 이성과 양심이 있다는 틀림없는 명제가 있는데, 2018년에도 욕망의 노예가 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크고 작은 일상의 권력들에 의해 그 명제가 냉소적으로 무시되고 있지 않은지 우리 각자가 차분히 점검해 봐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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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9 18:42

전통문화에 대한 단상

▲ 김승희 국립전주박물관장 전통문화는 우리 선인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우리의 자존감이기도 하다. 자존감은 자기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고 존중하는 데서 세워진다. 그리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개인의 능력은 그가 속한 집단의 문화가 얼마나 역동적으로 견고한 지와 연관되어 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단순한 견고함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이 가능할 수 있는 열린 구조의 견고함에서 비롯된다. 개인이 갖는 자존감이 사회적 신념으로 발현되는 것이 문화적 자긍심이다. 그렇게 볼 때, 전통문화는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와 현재의 우리에게 자긍심을 갖게 하는 동력이라 할 수 있다. 전통문화는 공동체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국가나 지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통문화를 보호하고 발전시키며, 사라진 문화유산을 복원하여 전통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면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전통이란 자연스럽게 계승되어 온 것처럼 보이지만, 정부 정책의 흐름에 따라 그 시대만의 패러다임이 조정되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한때 구호처럼 외쳐 우리 귀에 익숙한 찬란한 민족문화는 혹독한 식민통치를 경험하면서 얻은 전통에 대한 열패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전통에서 충효와 호국이 필요 이상 강조되었던 때도 노동집약적 산업구조 속에서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을 달성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와 같은 예는 전통문화가 당시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때론 과장되거나 어느 한 부분이 강조되며 제시되었던 모습이기도 하다. 이처럼 진정성이 결여된 전통에 대한 과도한 자긍심의 고취는 집단 구성원에게 공허한 구호로 인식되게 한다. 그간 활동하기 불편하다고 외면당해왔던 한복이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다채로운 한복 물결이 관광지를 활보하는 현상은 그동안 무겁고도 거북하게 느껴졌던 전통문화가 새롭게 패러디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가부장적인 엄숙함으로 포장된 전통문화가 이제는 전통체험이라는 놀이의 방식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전통문화는 지금도 여전히 그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선택되거나 확대되면서 생존과 번영의 유효한 수단인 것처럼 포장, 재생산되기도 한다. 정치나 과도한 상업주의에 경도된 전통은 오히려 전통을 왜곡시키거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통문화는 더 늦기 전에 철저히 고증되고, 왜 필요한지에 대한 근본부터 다시 검토하여 재해석되어야 한다. 복원의 기준도 다시 세워야 한다. 가령, 수입 자재를 사용하여 실용성을 간과한 외형만 전통양식으로 꾸민 가구를 진정한 복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규격화된 비빔밥은 과연 전통의 맛을 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즈음에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문화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국수적으로 전통문화를 추종할 경우, 또다시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거나 타문화와의 소통을 막는 장벽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오늘날 다원화된 문화 환경 속에서 전통은 개방적이고 창조적인 계승을 통해 진정성 있는 새로운 전통의 탄생을 모색해야 한다. 전통문화는 숨 쉬는 공기처럼 편안하고, 무엇보다도 행복해야 한다.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과 별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전통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미래의 무형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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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2 20:05

왜 중앙 정치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인가

▲ 윤철 전북수필문학회장 613 지방선거가 시작됐다. 입지자들은 하나같이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겠음을 약속하고 있다. 선거 때만 되면 깜도 안 되는 어중이떠중이까지 뒤섞여 엄정해야 할 선거판을 난장판을 만드는 일이 허다하다. 옥석을 가려야 한다. 이번만큼은 맑은 정신으로 냉철하게 판단하고 제대로 분간하여 잘 뽑아야 한다. 역대 정부의 두드러진 홀대 속에 호남의 변두리로 전락하여 곁불이나 쬐고 있는 우리 전북이 반전을 이룰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통령 하나를 잘못 뽑아 국정이 농단 되고 나라가 절단 난 경험이 있다. 믿고 뽑아준 단체장이 연달아 구속되고 낙마했던 지역도 있다. 오로지 지역발전과 주민이익의 잣대로 사안을 판단하고 정책을 결정해야 함에도 중앙정부에 휘둘리고 대기업의 술수에 말려들어 주어진 밥상을 차버린, 그러고도 그 경위를 당당히 밝히지 못하는 단체장도 있었다. 지난 일을 곱씹는 것은 같은 잘못을 되풀이 말자는 뜻이다. 나는 모든 출마자에게 일일이 묻고 싶다. 꼭 그 자리에 앉아야만 지역 발전을 위해 봉사하고 주민들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이 지역의 발전을 위해 지난 4년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왕 묻는 김에 하나 더 물어보자. 중앙정부로부터 더 많은 예산을 따와서 지역발전과 주민복지를 위해 풀어놓을 비전과 구체적 방안은 있는가? 지방자치의 가장 현실적 문제는 재정이다. 지방정부 수입의 근간이 되는 지방세가 전체 조세액의 20%에도 못 미치는 세수구조 아래서 지방자치단체들의 자치재정 확보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지방정부의 자치권에 대한 제도적 보완 없이 정치적 타협으로 지방자치제도를 졸속하게 시행한 탓이다. 자체수입으로는 공무원들의 인건비도 해결하지 못하는 자치단체가 절반이 넘고 평균 재정자립도가 30%에도 못 미치는 우리 전북의 도와 시군은 재정의 대다수를 중앙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 때문에 전북이 낙후와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세 번째 질문이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앙정부에서는 국가예산의 배분권을 무기로 지방정부를 통제하고 길들이기까지 하는 마당에 예산을 받아내는 일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더구나 사회간접자본을 늘리고 산업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대형 사업을 정부정책에 반영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다름 아니다. 자치단체마다 더 많은 국가예산을 확보했다고 홍보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주시와 어느 예비후보의 논쟁처럼 성과를 부풀리고 여론을 호도하는 숫자놀음에 불과한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수십 년을 끌어온 새만금사업을 마무리해야 한다. 또 새만금에 버금가는 대형 개발 사업을 발굴하여 선순위 국가사업으로 반영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가 있다. 일자리 확대와 소득을 높이기 위해 먹거리 사업 예산도 최대한 받아내야 한다. 때마침 문재인정부와 우리 전북 정치권의 관계가 아주 돈독하다고 한다. 전국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로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기도 했다. 전북 홀대를 환대로 바꿀 절호의 기회다. 그러나 높은 지지나 좋은 관계만으로 국가예산을 알아서 증액하고 두둑이 배정해주는 중앙정부는 없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중앙정부를 우리 전북에 호의적이고 유리하게 움직일 수 있는 정무적 능력과 배경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 몫을 제대로 받아오고 덤으로 그간에 빼앗겼던 몫까지 찾아올 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번 613지방선거에서 그런 사람이 도지사나 시장군수 그리고 교육감으로 뽑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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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6 20:03

전라북도 예술의 뿌리

▲ 염광옥 (사)한국무용협회 전북지회장 21세기는 문화예술이 국력이라는 말을 한다. 국민행복과 함께하는 문화융성을 국정비전으로 제시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경제와 같은 생존이 관련된 문제에 비해 예술은 순위에서 다소 밀리곤 한다. 아마 사회적 역할로 이어지는 예술의 즐거움을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술의 사회적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을뿐더러 경제의 수치처럼 측정하기 힘들다 보니 말로 하는 주장만큼 증거를 내어 놓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예술과 사회의 영향관계를 보자면 예술로부터 얻게 된 개인적 만족과 기쁨이 공감능력을 향상시키고 인식능력을 신장시켜 연대나 공동체적 의미를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에 딱딱한 정책만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예술과 결합하게 되면 한 층 부드럽게 해결점을 찾게 되고 민감한 문제들이 예술이라는 다른 차원으로 제3의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결과로 보자면 전국적으로나 세계적으로 해년마다 벌어지는 축제들과 다양한 행사들 큰 프로젝트들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것이 문화 예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인들을 인정해주고 발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할 공적기관에서 조차 예술인들의 노력을 기부형태나 하청업체의 직원 정도의 대우로 끝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목격되고 또 격 고 있는 현실이다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기관에서 조차 이를 당연시 여기기 시작하고 주도해버리는 입장이라면 뿌리를 내리고 예술혼을 불태운 이곳의 문화예술은 더 이상의 발전도 갈 곳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여 다른 곳에 편승하거나 사사로운 욕심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어느 순간부터 예산의 문제나 주변 여건들로 인해 흔들리고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는 몇몇 예술인들로 인해 예술인들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눈초리를 받고 있다. 특성과 다양한 생각들이 달라서이지만 분명히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생각하는 방식과 표현방법이 일반 사람들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예술인들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바라봐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봐라봐 줄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닌 예술인들이 주체적으로 똘똘 뭉쳐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어여 할 때가 온 것 같다. 전라북도에 원로 예술인들께서 뿌리를 내려 싹을 나게 하고 튼튼한 나무가 될 때까지 열심히 수호신처럼 굳건히 지켜 오신 이 자리들을 소중히 지켜가면서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젊은 예술가들이 예술가적 마인드를 지니고 우리지역의 예술을 격상 시키는 예술지킴이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뿌리 깊은 역사, 성숙한 문화, 풍요로운 예술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물질적 풍요의 가치가 드높아질 것이라 믿는다. 또한 예술이 살지 않으면 국가는 결코 발전 될 수 없으며 단단해 질 수 없다. 그간 묵혀두었던 사람들의 갖가지 소망과 희망들이 봄꽃처럼 피어올라 오는 시점이며 예술가들이 왕성하게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입으로만 예술인들을 위한 다는 말보다 예술인들의 본연의 의미를 존중해주고 그에 대한 인정과 대우를 해준다면 지켜온 뿌리만큼 전라북도의 문화예술이 도민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나갈 것이다. 우리가 현재 지키고 있는 예술의 힘을 믿고 당당한 행보를 했으면 한다. △염광옥 회장은 예진예술원 이사장과 한국보훈무용예술협회 부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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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9 21:16

우리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

▲ 정정숙 전주문화재단 대표이사 지금도 사이먼 앤 가펑클의 더 박서(the boxer)를 들으면, 노랫말 속의 주인공이 추운 도시 뉴욕을 떠나 고향으로 가고 싶어하는 그러나 결코 갈 수 없는 그 정서와 현실에 공감한다. 뉴욕이라는 미국 동부도시 겨울의 매서운 바닷바람이 주는 물리적인 추위 뿐 아니라 지극히 가난하고 평범한 시골 청년이 자본주의 첨단 도시에서 자본과 후원자 없이 견디는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이고 심리적인 추위가 느껴지는 것이다. 저녁이 되면 고향이 그리워질 것이다. 듣는 청자인 나도 불쑥 고향의 이미지가 있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기도 한다. 인간이라면 예외 없이 느낄 법한 보편적인 정서이다. 보편적인 정서는 표현하는 언어나 표현 방식은 달라도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기에 우리는 보편적 정서에 기초한 인류애와 같은 보편적 가치도 추구한다. 다만 인류애를 우리 스스로 실천하고 싶은 가치라기보다는 슈바이처나 한비야와 같은 그 누군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거나 혹은 타인을 평가할 때 적용하는 잣대 가치로 여겨 오히려 우리들 서로에게 추위를 더 가하고 마는 선언적 가치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인류애보다는 자기애가 일방적으로 앞서고, 문화다양성보다는 자문화애의 무의식적이고 편향적인 집착이 인류애와 문화다양성의 증진을 막는 것은 아닐까. 인류애나 문화다양성 증진을 자기 지역과 자기 일터와 자기 가정에서 실천하려면 성인이 되는 과정의 성장의 역사 속에서 이미 굳어져 버린 자기 습관과 다른 새로운 문화와 보편적 가치와 요청에 직면할 때 느껴지는 어색하고 쑥스러운 순간들을 이겨내야 한다. 물론 때로는 자기애마저도 자기를 제대로 돌보는 정서인가 점검해보아야 한다. 즉 자기 스스로 타인이나 타문화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자기 정서를 끊임없이 상처내면서 그 문화 속에 갇혀 지내는 것을 편안하게 느끼는 왜곡된 자기애는 없는지, 자기애의 내용과 방식을 복기해보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 타인에 대한 분노와 원망으로 자기가 느끼고 표현하고 싶은, 표현해야 할 자기의 정서를 오히려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반면 타문화를 동경한 나머지 우리 문화를 상대적으로 경시 하거나, 또는 반대로 타문화를 무조건 사대주의적 문화 혹은 저질문화로 비판하는 것에 익숙한 것은 아닌지도 살펴야 한다. 우리의 현대사 초기 문화생활에는 미국 하이틴 소설 번역본이나 미국의 대중음악이 일정부분 역할을 했고, 현대사 이전의 문화생활은 일제 강점기의 강요된 일본어와 일본문화에 영향을 입었으며, 조부모 세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문을 기반으로 한 중국문화와 질서에 기초하여 문화생활을 영위했다. 우리는 이렇듯 시대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타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문화혼성적 문화퇴적층을 형성해왔다. 어느 나라도, 어느 지역도 예외가 없다. 문화는 그렇게 타문화와 접촉하고 영향을 입고 입히며, 형성되고 사라진다. 그래서 타문화의 부정적 영향은 제거하고 긍정적 영향만을 소화해 내려는 노력도 끝없이 요청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애와 문화다양성의 출발은 건강한 자기애에 기초한다. 자기에 대한 정확한 인식, 즉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 것을 좋아하고, 무엇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정서가 충분히 표현되고 있는지도 관찰하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를 분명히 찾아 바로잡을 때, 타인과 타문화에 대한 열린 접촉이 가능해지고, 비로소 가식적인 인류애가 아닌 진정한 인류애의 동참을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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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2 20:07

스포츠 유토피아

▲ 김승희 국립전주박물관장 2018년 제23회 평창 동계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93개국에서 출전한 젊은 선수들은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펼쳤고,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어 자기 국가의 대표팀을 응원하였다. 이번 올림픽은 정전 상태에 있는 분단국에서 개최되는 만큼 평화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각인시킨 행사로도 기억될 것이다. 평화를 희망하는 많은 세계인들은 우여곡절 끝에 출전이 결정된 북한팀 선수단과 여자 하키 남북단일팀 결성을 기다려주고 대회 참가를 기꺼이 지지해주었다. 원래 올림픽은 신을 모시는 제전의식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그 발단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간의 지루한 전투를 멈추기 위한 명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남북한이 함께 한 이번 동계올림픽은 고대올림픽 정신을 잘 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근대 올림픽은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되었는데, 프랑스의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쿠베르탱은 산업혁명으로 부를 축적한 영국의 스포츠 교육에 감동을 받아 올림픽의 개최를 꿈꾸었다고 한다. 영국의 스포츠 교육은 부를 축적한 영국 사회의 퇴폐적인 문화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발전된 것이었다. 또한 근대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스포츠는 충성스러운 국민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것이고, 그 연장선에 올림픽이 존재한다는 다소 냉소적인 견해도 있다. 특히 신체적 활동과는 무관한 사격이 올림픽 경기에 채택된 것은 20세기 초엽의 군국주의가 반영된 것이라는 일부 견해도 있다. 어쨌든 고대에 태동하여 근대에 꽃피운 올림픽은 전쟁과 퇴폐문화라는 역사의 부정적인 면을 극복하면서 발전하여 오늘날 세계인의 축제로 승화한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훈련을 통하여 극복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또 다른 자기의 실현이고 스포츠의 진정한 매력이다. 오늘날 대중화되고 있는 스포츠는 그러한 신체적 활동을 강화해 나가는 것뿐 아니라 레크리에이션의 기능, 시민으로서의 민주적인 절차와 의식을 체화하는 데에도 적잖은 역할을 하고 있다. 스포츠 경기는 대부분 상대 선수와의 관계만으로 설정되어 있는 듯하지만, 수많은 관람자와 관련 단체, 자원봉사자들의 참여 속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특히 제3자의 시선으로만 존재했던 관람자의 역할은 더욱 강화되는 경향을 읽을 수 있다. 가령 팀추월 경기에서 뒤쳐진 선수를 배려하지 않고 질주한 두 선수에 대한 관람자의 비난은 규칙에는 어긋나지는 않았지만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경쟁과 승리만을 추구하는 것이 스포츠 정신이 아님을 관람자가 선수에게 일깨워 준 것이다. 또한 이번 평창 올림픽에서 보여준 경기규칙에 대한 엄정한 판정은 작은 반칙도 용납하지 않는 여러 사례에서도 잘 보여주었다. 진정한 스포츠는 공정함과 배려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스포츠 정신은 타문화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문화 상대주의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스포츠에 내재된 공정함과 배려가 경기가 진행될 때에만 작동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경기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상과 유리된 채 존재하는 이상적인 스포츠는 사회적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다가갈 수 없는 유토피아로서 존재하는 스포츠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도 그 이상이 실현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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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05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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