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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년만에 빛 본 퇴계 이황의 부안 읊은 시

조선시대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퇴계 이황(1051~1570) 선생이 전북 부안 실상사와 직연폭포(현 직소폭포), 마천대를 제목으로 지은 시가 공개됐다. 이는 <퇴계선생문집 별집>에 수록된 시로 도산서원 이동구 별유사가 전북향토문화연구회 이치백 회장에게 내용을 전달하면서 공개하게 됐다.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퇴계 이황이 부안에 관해 남긴 귀중한 자료다.이치백 회장은 <부안군지>에도 이규보(1168~1241), 이매창(1573~ 1610), 신석정(1907~1974) 등의 시는 실려있으나 퇴계 이황의 시는 찾아볼 수 없다며 약 450년 만에 빛을 보게 된 소중한 자료라고 설명했다.이 시는 퇴계 선생이 부안 변산을 직접 유람하고 지은 시는 아니다. 이동구 별유사는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광산(光山, 현 광주시 광산구)에 살았던 칠계 김언거(1503~1584) 선생이 변산을 유람하고 시를 지어 퇴계 선생에게 보내니, 그 운자를 사용해 답시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아쉽게도 칠계 선생의 원운시는 찾지 못했다.퇴계 선생과 칠계 선생에 관한 기록은 1544년 7월 22일 칠계 선생이 금산부사로 부임해 송별하는 시가 처음이다. 퇴계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며칠 후 칠계 선생이 풍기에 찾아와 하루를 묵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칠계 선생은 퇴계 선생보다 나이는 3살이 적고, 문과 급제는 3년 먼저 했다.이동구 별유사는 <퇴계선생 문집>에 칠계 선생과 관련된 시가 20제이고, <칠계유집>에 퇴계 선생의 시 22제와 간찰 1편, 칠계 선생이 퇴계 선생에게 드린 시 2제가 실려 있다며 따로 두 분의 관계와 당시 영호남의 교류에 대해 추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경북 안동 출신인 퇴계 이황(1051~1570) 선생은 조선시대 중기 문신이자 학자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 등을 지냈다. 퇴계 선생은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나라에 건의해 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만들기도 했다.實相寺南溪韻(실상사 남계 운)千古名山斷俗埃 천고의 명산이 속세의 티끌을 끊었으니得君街償寄山隈 그대의 칭찬은 산모퉁이에 붙여두네水經寶地全然潔 물은 사찰 있는 곳을 지나니 더없이 깨끗하고雲向叢林別樣堆 구름은 총림을 향해 다른 모양으로 뭉쳤구려瘦竹微吟閒遶石 파리한 대는 낮게 읊조리며 돌을 막아 둘러있고淸尊高興晩登臺 맑은 술에 흥이 돋아 늦게야 대에 오른다從來造物嫌多取 원래 조물주는 많이 갖는 것을 싫어하니莫把風烟騁逸才 세상을 쥐고 뛰어난 재주를 펼치지 마소直淵瀑布韻(직연폭포 운)白練橫飛翠障圍 흰 명주가 가로 날려 푸른 장벽을 둘렀고劈開山骨滅雲肥 산 바위가 쪼개져서 구름이 살찌는 것을 덜었구나漲時河落深春地 넘칠 땐 은하수가 깊은 학으로 떨어진 듯하고急處雷奔下激磯 빠른 곳은 번개같이 물가 돌을 내려치네何許靈源連海窟 어디쯤에서 靈源이 바다 굴로 연했을까?幾多餘沫散林霏 수두룩한 남은 거품 林 로 흩어진다雄觀未遂罏峯勝 웅장한 향로봉의 승경을 아직 구경 못했으나且向玆山欲拂衣 또 이 산을 향해 옷소매를 털고 싶어라摩天臺韻(마천대의 운)但警海闊與山崇 다만 바다 넓고 산 높음에 놀랐으니誰識元初辦結融 누가 원초의 신비로움을 깨달았을까日月低垂氛翳絶 해와 달 낮게 드리워 가 끊어졌고靈仙遊集瑞光叢 신선이 모여노니 瑞光이 결집한 곳胷襟浩氣三杯後 가슴 속의 호기는 三杯 후에 떠오르고羽翼培風六月中 깃날개로 바람타고 유월 중에 오르네矯首西雲無計往 머리 들어 서쪽을 봐도 갈 계책이 없는데因君豪句喜披蒙 그대의 좋은 글귀 때문에 어둠을 깨우쳤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01.09 23:02

[불멸의 백제] (4) 1장 칠봉성주(七峯城主) ④

방령, 대야성의 현재 병력은?청에 둘이 남았을 때 의자왕이 불쑥 물었다.사비도성의 청 안, 의자왕은 신하들의 보고를 받은 후에 윤충만을 따로 남도록 한것이다.윤충이 상반신을 조금 숙이고는 옥좌에 앉은 의자왕을 보았다.김품석이 군사 5백여명을 더 충원 받았습니다. 대야성의 병력은 7천이 조금 넘습니다.김춘추가 대권을 쥐려고 제 사위놈에 병력을 증강시켜 주는 거야.소신의 생각도 그렇습니다.김춘추만 무력화(無力化) 시키면 신라는 무너지게 돼.의자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태자 때부터 아버지 무왕(武王)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기 때문에 칭송을 받았던 의자다.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리우기도 했다.의자는 무왕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오른 후에 신라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시작했다.즉위 2년인 작년에 의자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서 40여개의 성을 공취했지만 아직도 양에 차지 않는다.신라에게 기습적으로 빼앗긴 한성유역의 영토까지 회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때 윤충이 말했다.대왕, 신라왕 선덕이 또 당에 청병(請兵) 요청사를 보냈다고 합니다.외우내환(外憂內患)이군.밖에서는 고구려와 연합한 백제군의 공격을 받고 안에서는 상대등 비담 등이 여왕의 통치에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의자가 말을 이었다.세작이 많으니 장수들을 은밀하게 준비 시키도록.예, 대왕.칠봉성(七峯城)의 계백은 부임했나?예, 대왕.그곳에서 대야성까지는 몇 리나 되나?3백리 가깝게 됩니다, 대왕.계백은 대륙에서 기마군을 이끌고 하루에 5백리를 왕래한 장수야.대륙은 땅이 넓고 평탄하지만 이곳은 산이 많고 지형이 험합니다, 대왕.그래도 계백은 하루 300리 거리는 주파할 것이다.의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윤충을 보았다.그렇다. 담로 연남군 기마대장이었던 계백을 본국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의자와 윤충은 본국은 물론 대륙의 담로에서도 무장(武將)을 선발하여 은밀히 배치시킨 것이다.의자가 말을 이었다.방령, 그대가 계백을 불러 영(令)을 내리게.예, 대왕.허리를 굽혀보인 윤충이 청을 나왔다.내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방좌(方佐) 연신이 윤충을 보더니 다가와 물었다.방령, 신시(오후 4시)가 다 되었으니 방성(方城)으로 가기엔 늦지 않았습니까?밤에라도 닿아야지.병사한테서 말 고삐를 받아쥔 윤충이 말에 오르면서 말했다.나선군의 칠봉성주 계백에게 전령을 보내게.칠봉성주 계백에게 말씀이오?그러네. 기마군 일로 물어볼 것이 있으니 바로 나한테 오라고 하게.연신의 시선을 받은 윤충이 말을 이었다.기마군 장비 때문이라고 하게.계백 가문이 기마군을 오래 했지요.방좌 연신이 전령을 소리쳐 부르더니 지시했다.말을 걸리면서 윤충이 눈앞에 대야성을 떠올렸다. 거성(巨城)이다.신라의 남쪽 국경 부근에 위치한 대야성 성주는 김품석, 김춘추의 사위이며 오른팔이나 같다.대왕 의자는 대야성 공취를 오래전부터 계획해왔던 것이다.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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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08 23:02

74. 삿대질 - 나룻배 노를 젓는 막대기 '상앗대' 준말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으로 시작하는 윤극영의 동요 ‘반달’에는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라는 부분이 나온다. 여기서 나오는 삿대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상앗대의 준말이라고 나와 있다. 상앗대는 ‘물가에서 배를 떼거나, 또는 물이 얕은 곳에서 밀어 갈 때 쓰는 장대’다.1970년대까지만 해도 도시 근교나 시골에서 다리가 놓이지 않은 개울이나 얕은 강물을 건너기 위해서는 나룻배를 이용했다. 그런데 돛을 달아 바람으로 움직이기 어려운 좁고 얕은 강에서는 노를 젓거나 기다란 막대기로 배를 밀며 건너곤 했는데, 이때 배에서 강바닥을 밀기 위해 사용하는 긴 막대기가 바로 상앗대다. ‘질’은 ‘장난질’에서 보이듯이 어떤 행위를 하는 ‘짓’과 같은 의미이지만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접미사이다. 그래서 ‘삿대질’은 배를 강에 띄우기 위해 배 위에서 긴 막대기인 상앗대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것처럼, ‘말다툼을 할 때 주먹, 손가락, 막대기 따위로 상대방의 얼굴을 향해 내지르는 짓’을 말하는 것이다.사람들이 싸울 때 손가락으로 상대방을 향해 내지르는 품이 뱃사공이 삿대를 이리저리 놀리는 품과 비슷하다 하여, 오늘날에는 상대방을 향해 함부로 손가락질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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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05 23:02

담담하게 풀어낸 자연의 소리

어떤 꽃에서 퍼 왔느냐고/ 묻지는 못했다/ 들에서 산에서/ 깊은 산골 이름 없는 꽃에서/ 얼마나 애를 끓이며 퍼 날랐으면/ 맑고 붉고 투명하다 못해 달콤하기까지 하던/ 꿀은 ( ‘벌꿀 2’ 부분)이봉명 시인이 시집 <바람의 뿌리>를 내놨다.시집은 1부 너를 위하여, 2부 뿌리로 깊어진다, 3부 누군가 있다, 4부 열어 두고 싶은 것이다, 5부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등 모두 5부로 구성돼 있다. 시인은 여러 미학적 장치를 제거하고, 언어 자체를 목적으로 내세운다. 그러면서 서정시가 가진 유연성에 충실하다.이병초 시인(웅지세무대 교수)은 발문을 통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솔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새소리에 놀라 튀어나가는 듯 자연스럽다”며 “이미지에 포획된 언어의 날렵한 섬광, 시상 비약의 경쾌한 상상력과 과감한 생략을 통한 시상의 돌연한 울림은 있을지라도 텅 빈 기표에 불과한 언어의 휘발성은 없다”고 밝혔다.이봉명 시인은 무주 출생으로 1991년 ‘시와 의식’으로 등단했다. 무주작가회의, 전북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 잔국장애인문인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꿀벌에 대한 명상>·<아주 오래된 내 마음속의 깨벌레>·<포내리 겨울>·<지상의 빈 의자>, 산문집 <겨울엽서> 등이 있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01.05 23:02

전북 지역 문인 '한해 결실' 동인지 잇따라 발간

지난해 전북지역 문단을 이끌어온 문인들의 창작 결실인 동인지가 잇따라 발간됐다.한국문인협회 전주지부는 <문맥> 제49호를 발간했다. 전주문인협회가 한 해 동안 흘린 땀방울이 고스란히 배어있다.<문맥>은 덕진연못에 핀 시를 주제로 한 시 낭송 축제, 전주문인대회, 전주문학상 소식 등을 엮었다. 제5회 전주문학상 본상작 안평옥 시인의 소나기 외 4편, 문맥상 수상작 이희근 수필가의 깨소금 여인 외 2편도 특집으로 실었다. 시인 47명, 수필가 13명, 동시작가시조시인 3명, 소설가와 동시작가 각각 1명 등 전주문인협회 회원 65명의 작품도 게재했다.이소애 전주문인협회장은 가장 힘이 강한 새는 날개를 젓지 않고 난다는데, 날갯짓 소리를 참아내기 위해서 오늘도 조용히 내가 해야 할 봉사가 무엇인지 찾는 일에 골몰하겠다며 관심과 사랑을 당부했다.한국동인지문학아카데미는 <한-몽 문학> 제4호를 출간했다. 한국과 몽골의 문학 교류를 기념하는 문집이다.특집으로 나혜경 씨가 한국의 근대 시와 역사적 배경, 촐롱체첵 바트뭉흐 씨가 몽골 문학(1990년 이후)을 주제로 글을 실었다. 모든 글을 한글과 몽골어로 번역됐다. 또 몽골을 자연과 시를 주제로 정군순, 김동수, 선산곡, 전근표, 전용직, 송희, 윤현순 시인이 시를 써 게재했다.소재호 시인(문학평론가)은 머리말을 통해 한국과 몽골이 문학 교류로 문화 교류의 큰 강을 이뤄가고 있음은 가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며 양국 문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지리적 충돌도 매우 유익한 정서의 확산과 깊이 있는 사유의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샘문학동인은 <샘> 제3호를 펴냈다. 시인 9명, 수필가 3명이 저마다의 작품으로 동인지를 수놓았다. 특히 고영 시인이 읽은 샘 코너를 통해 샘문학동인의 작품과 함께 고영 시인의 감상 글을 수록했다. 시인의 마음에 들어가 이야기하듯 서사로 어우러진 에세이가 뭉클한 감동을 준다.문학을 통해 교구민과 함께 소통해 온 전주교구 가톨릭문우회는 <빛무리> 제27집을 발간했다. 특집판으로 피정을 이야기하다, 성경 구절을 주제로 교구민들이 쓴 글을 수록했다. 시와 수필 등 전주교구 가톨릭문우회원 작품은 물론 사진 에세이도 함께 담았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01.05 23:02

[불멸의 백제](3) 1장 칠봉성주(七峯城主) ③

백제는 동, 서, 남, 북, 중의 5부(部)로 구분되었으며 부(部)는 곧 방(方)이다. 5방에 37군, 200개 성을 보유했고 본국의 호구는 76만호에 주민 620만의 대국(大國)이다. 당시의 대륙에서 패권을 쥐었던 수(隋)가 대륙 전체를 통일한 전성기 때의 인구가 890만호, 4천6백만 정도였으니 대백제(大百濟)는 본국의 인구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더구나 대륙에 담로(檐魯)라고 부르는 영토를 보유한 상황이다. 5부, 즉 5방(方)에는 각각 방령(方領)을 두었으며 2등급 품위인 달솔(達率)이 맡았다. 각 방에는 10개 정도의 군(郡)이 소속되었는데 군장(郡將)은 4품 위인 덕솔(德率)이다. 또한 방에는 방좌(方佐)가 방령을 보좌했고 군에서는 도사(道使)가 군장을 보좌한다. 백제 관등은 16관등이며 중앙관서는 내관 12부와 외관 12부로 나뉘어져 있다. 계백은 지방의 남방 방령인 달솔 윤충이 지휘하고 있는 42개 성주중 하나인 것이다.주인, 연남군이 이곳보다 나았습니다.아침상을 앞에 놓으면서 덕조가 투덜거렸다. 세다리 소반에는 조밥 한그릇과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말려 놓았다가 더운 물에 불린 산채 한접시가 차려졌다. 잠자코 수저를 드는 계백에게 앞에 앉은 덕조가 말을 이었다.연남군에서는 7품 장덕이었지만 1천5백 기마군을 이끌었고 숙소에는 하녀가 셋에 하인 다섯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식사는 산해진미는 아니더라도시끄럽다.씹던 것을 삼킨 계백이 덕조를 노려보았다.이놈, 하녀는 네가 다 건드렸지 않으냐? 내가 모르고 있었는 줄 아느냐?아니, 그것은덕조의 검은 얼굴이 더 검어졌다. 덕조는 35세, 조부 때부터 계백 가문을 모신 씨종이다. 계백 가문은 대륙 우측에 위치한 백제령 담로 연남군에 뿌리를 내린 호족이다. 계백의 부친은 연남군의 태수 보좌역인 방좌를 지냈으며 조부는 3급품인 은솔(恩率)로 좌장군이었다. 덕조는 계백을 어릴적부터 보살핀 큰형같은 존재인 것이다. 정색한 덕조가 몸을 세우더니 계백을 보았다.주인, 군사들 말을 들었더니 마을에 혼자 있는 여자가 많답니다. 하녀 셋 쯤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는데요.안된다.지난 성주는 식구가 다섯에다 데려온 종이 여덟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거기에다 가끔 마을에서 여자들을 불러 일을 시켰다는데요.그러다가 사공부(司空部) 감찰에 적발되어서 나솔에서 시덕(施德)으로 2등급이나 강등되어서 도성으로 돌아갔지 않으냐?주인께서 하녀 구하시는건 해당이 안됩니다. 오히려 먹고 살길이 막막한 여자들을 도와주는 것이 됩니다.안된다.주인께서도 여자가 필요하시오.마침내 덕조가 본색을 드러내었다.본국에 오신지 넉달이나 되셨는데 한번도 여자를 안지 않으셨소.안지 않으면 병이 나느냐?수저를 내려놓은 계백이 덕조를 보았다. 시선을 받은 덕조가 숨을 들이켰다. 계백의 눈동자가 흐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먼곳을 보는 것 같다. 어깨를 웅크린 덕조가 두손으로 방바닥을 짚었다.주인, 말을 함부로 내놓았습니다. 때려주십시오.아니다.계백이 똑바로 덕조를 보았다.나는 항상 너한테서 배운다. 그래, 마을에서 하녀를 구해오너라. 의식주를 이곳에서 해결시키는 것이 성주가 해줄 일이기도 하지.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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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05 23:02

등단 50주년 맞은 윤흥길 소설가 "아직도 써야 할 작품 많아…주변에 관심 가져야"

전주여고를 다니던 막내 누이가 눈길을 헤치고 운동장으로 걸어와 빙긋이 웃으며 노란 종이를 건넸다. 당선을 축하한다는 전보였다. 윤흥길(75) 소설가는 그 광경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로부터 50년이 흘렀지만.윤흥길 소설가는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돼 등단했다. 올해로 꼭 등단 50주년이다.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그의 첫 발령지는 당시 익산 춘포국민학교였다. 그는 1966년 1월 1일 춘포국민학교 숙직실에서 서울신문에 크게 실린 장편소설 당선자 기사를 봤다. 교사를 그만둘 궁리만 하던 그는 기사를 보자마자 소설가가 되면 교사를 그만둘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길로 호남서점에서 문학 관련 이론서 5권을 샀다. 첫 습작이 사상계 신인문학상 결선까지 올랐다. 길이 보였다. 벽지 초등학교를 자원해 내소사 밑 분교로 발령받았다. 그곳에서 네 살 어린 전주사범학교 후배에게 원고지 쓰는 법부터 다시 배우면서 소설 공부를 했다.그는 9살 때 625전쟁을 겪었다. 백지 위에 먹물을 뿌린 듯 선명한 이 기억은 평생을 좌우했다. 성인이 돼서는 전라도에 대한 타지 사람들의 왜곡된 시각을 군대 생활부터 시작해 서울 생활 곳곳에서 체감했다. 분노와 환멸을 느꼈다. 그럴수록 고향이 소중해졌다. 차별은 그의 고향 사랑을 부채질했고, 고향 이야기에 더 집착하게 했다.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은 고향에 대한 기억, 625전쟁에서 시작된 사회적 갈등으로 점철된다.독재, 전쟁 위협, 빈부 갈등 등 한민족이 겪는 불행과 비극은 모두 625전쟁과 직결돼 있어요. 독재 정권은 625전쟁으로 인한 분단을 권력 유지 핑계로 사용했어요. 자유는 유보됐죠. 더 이상 분단을 빌미로 국민을 억압하는 일은 없어야 해요.요즘 그는 고(故) 박경리(1926~2008) 선생이 내준 오래된 숙제를 하고 있다.박경리 선생은 젊을 때부터 나를 보면 작가는 땅을 밟고 흙냄새를 맡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선생이 나에게 내준 숙제는 시골에서 단독주택을 짓고 살아라, 대작을 써라, 대학교수를 그만둬라는 것이었죠. 제일 먼저 한 숙제는 정년이 되면서 대학교수를 그만둔 거죠. (웃음) 그다음 완주로 내려오면서 시골에서 단독주택 짓고 살라는 숙제를 했어요.이제 남은 숙제는 하나. 그는 예전에는 대작이 대하소설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작은 길이나 분량 얘기가 아니었어요. 인간이나 세상을 얼마나 진지하게 보고, 그 이면에 숨은 진실을 포착해 치열하게 다뤘는지를 뜻하는 거였죠.일제강점기 말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아우르는 장편 3부작을 계획했다. 3부작 중 3부에 해당하는 <낫>이 제일 먼저 나왔다. 1부에 해당하는 작품은 5권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한민족이 가진 고유의 귀소 본능 다룬 <문신>이 바로 그것.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문신>은 사연 많은 책이다. 사실 <낫>보다도 먼저 집필하기 시작한 작품이다. 출판사가 자진 폐간하면서 수년간 출판권 분쟁을 겪었고, 출판권 시효까지 집필을 중단했다. 이어 다른 출판사도 자진 폐간하면서 같은 문제를 되풀이해야만 했다. 결국, 계약금을 배상하고 출판권을 되찾았다. 고향에 내려와 개작하면서 스토리를 변화하고 모티브도 추가했다. 지난해 9월부터는 건강상의 이유로 집필을 잠시 중단했다. 현재 5권 중 4권을 집필한 상태다.<문신>을 이루는 큰 뼈대는 부병자자(赴兵刺字) 풍습과 북해도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이 부른 아리랑이다. 부병자자 풍습은 병정으로 뽑혀 나갈 때 몸에 바늘로 새기는 글씨 즉, 문신을 말한다. 외침이나 내란으로 전쟁이 발생해 객사할 경우 가족들이 시신을 알아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죽어서라도 고향 선산에 묻히길 바라는 귀소, 귀향 본능이다. 또 북해도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은 수모와 치욕을 견디는 방법의 하나로 아리랑을 불렀다. 이를 형편과 처지에 맞게 개사해 부른 밟아도 아리랑도 귀소 본능과 관련된다.그는 집필하면서 문신이란 소재에 대한 문학적 보편성, 토속어 사용에 대한 대중적 반응 등을 걱정했다. 그러나 괘념치 않을 생각이다. 향수, 귀소 본능 등은 인간의 본성으로 형식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50년간 습득한 순우리말과 토속어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다.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것도 작가의 의무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는 윤흥길적인 작품으로 단편은 <황혼의 집> <기억 속의 들꽃>, 중편은 <꿈꾸는 자의 나성> <쌀>, 장편은 <에미> <묵시의 바다>를 꼽았다. 반백 년 동안 그는 대중들이 대표작으로 언급하는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장마> <완장>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이어왔다. 50년간 글을 썼지만 아직도 쓰고 싶은, 써야 할 작품이 많다. 그래서 초조하다. 자꾸 살아생전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젊을 적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집필했다고 자부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 허점과 구멍이 많이 보여요. 쓰고 싶고, 써야 할 작품이 줄 서 있어요. 나이 들어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싶어요. 완주를 소재로 한 작품, 전주 한지에 대한 작품, 손주를 위한 동화도 쓰고 싶고요.지빠귀 울음소리가 세시 이십 분 전으로 들린다는 작가. 그의 집 주변은 딱새, 지빠귀, 고라니 등 동화 소재로 가득 차 있다.그는 창작 근원에 대해 관심이 커지면 애정이 되고, 애정이 커지면 작품 쓸 의욕이 생긴다며 자신의 눈에 비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 두고, 자신이 처한 세계를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01.05 23:02

[불멸의 백제] (2) 1장 칠봉성주(七峯城主) ②

강이 산줄기를 따라 흐르고 있어서 방어에 아주 적당합니다.장덕 진광이 성을 안내하면서 말했다.10명으로 능히 1백여명의 적을 막을 수가 있지요.석성(石城)은 높이 15자(4.5m) 정도인데다 틈이 많아서 넘기에 어렵지가 않다. 그러나 산 아래쪽 강이 막힌데다 숲이 짙어서 칠봉성(七峯城)은 지금까지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다고 했다. 계백이 성루에서 좌우를 둘러보았다. 왼쪽은 넓은 평야였고 바다에 닿는다. 그리고 오른쪽은 산맥이 펼쳐져 있다. 마치 칠봉성을 뒤에서 막아주는 것 같다. 평야쪽으로 군데군데 마을이 보였는데 이곳저곳에서 밥짓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다.성주께선 연남군에서 기마대장을 지내셨다고 들었습니다.문득 진광이 말해서 계백이 시선을 주었다. 진광은 30대 초반쯤으로 계백보다 10년쯤 연상같다. 진광이 웃음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열흘쯤 전에 군(郡)의 도사(道使)가 다녀갔거든요. 공을 많이 세우셨다고 하더군요.싸울 기회가 많았으니 죽기 아니면 살아서 승진하는 것 외에 다른 수가 있겠나? 덕솔이 그곳에 있었다면 지금은 군장(郡將)쯤 되어 있을 거네.과분한 말씀.젊은 상관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 가셔진 진광의 어깨가 늘어졌다. 성주로 부임한 계백은 장신의 호남이다. 눈매가 날카롭고 입은 꾹 닫쳐져서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웃을 때 보면 얼굴이 환해진다. 진광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계백은 지금까지 바다건너 대륙의 백제령인 담로(檐魯) 연남군에서 기마대장을 지냈다. 가족은 없고 시종 하나만 데리고 다닌다고 했다. 그때 발을 뗀 계백이 말했다.대륙에서는 당과 싸우고 귀국해서는 신라와 싸우게 되는구려.전시(戰時)지요.옆을 따르면서 진광이 말을 이었다.이곳 칠봉성은 내지여서 가끔 신라군의 기습군에게 피해를 입을 뿐입니다.성루를 내려간 계백이 이제는 전력 점검을 했다. 칠봉성의 보유 병력은 기마군 125인, 보군 236인이며, 말은 220필, 보유 양곡은 110일분이다. 성(城) 지휘부는 나솔 관등의 성주 계백과 보좌역인 장덕 진광, 그리고 소장급 10품 계덕 2명과 11품 대덕 3명, 조장 보좌역격인 12품 문독 3명, 13품 무독 4명이 있다. 전력 점검을 마친 계백이 성안의 마룻방에 진광과 계덕, 대덕급의 조장들을 불러 둘러앉았다. 진광이 먼저 보고했다.칠봉성에서는 근처 50리 안의 9개 마을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가구수 5백호 정도에 3천명쯤 되는데 각 마을에 연락병과 정탐병을 배치시켰습니다.작년에 신라군이 기습해왔나?계백이 오면서 들었던 말을 물었더니 진광이 대답했다.예. 원산(元山) 마을이 기습을 당했지요. 밤에 갑자기 기습을 해서 성에서 출동했을 때는 사라진 후였습니다.신라 별동군인가?아닙니다.나선 사내는 계덕(季德) 왕수, 30대 후반쯤으로 수염이 잡초처럼 무성한 사내다. 어깨를 핀 왕수가 말을 이었다.국경 근처의 고선성에서 나온 기마군입니다. 그때 잡아간 마을 사람들이 지금 그곳에서 종이 되어 있습니다. 일부는 팔려갔구요.그러자 진광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왕수는 세작을 관리합니다. 성을 지키려면 세작도 관리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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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04 23:02

[불멸의 백제] (1) 1장 칠봉성주(七峯城主) ①

백제 의자왕 3년(643년) 8월, 백제 남방(南方) 소속의 산성을 향해 2명의 기마인이 다가가고 있다. 오후 미시(2시) 무렵, 초가을의 햇살이 강하게 쪼이는 맑은 날씨, 기마인의 옷은 땀과 먼지로 얼룩졌고 말은 피로한듯 자꾸 머리를 떨군다.주인, 산성이 보이지 않소.마신(馬身)쯤 앞서가던 사내가 앞을 향한채 말했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는 건장한 체격으로 손에 창을 쥐었다. 그 창으로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후려쳐 길을 내거나 풀숲을 휘젓는다. 그때 뒤를 따르던 사내가 머리를 들고 앞쪽을 바라보았다.군사 셋이 내려온다.놀란 듯 앞장 선 사내가 말을 세웠을때 과연 잔나무를 헤치면서 군사 셋이 내려왔다. 둘을 발견한 군사들이 주춤거리더니 앞장 선 군사가 물었다.뉘시오?칠봉산에서 오는 길이냐?뒷쪽 기마인이 되묻자 군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예, 그렇습니다만내가 신임 성주 계백이다.놀란 군사들이 제각기 허리를 꺾어 절을 했지만 앞장 선 군사가 또 물었다.그러시다면 군성(郡城)에 들렸다 오시는 길이십니까?그렇다. 군장(郡將)께서 안내역을 붙이신다고 했지만 내가 지리도 익힐겸 찾아오는 길이다.그럼 저희들이 성주를 모시지요.앞장 선 군사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저희들이 7봉 좌측 순시를 나가는 길이었으니 성주를 모셔도 됩니다.이제 기마인 둘은 군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길도 없는 산을 오른다. 산은 높지는 않지만 굵은 나무가 빽빽했다.그때 기마인이 앞장선 군사에게 물었다.7봉성이라고 했으니 봉우리가 7개란 말이냐?예. 그러나 주봉(主峯)의 남쪽과 서쪽으로 각각 봉우리가 6개씩 있어서 7봉이 2개인 셈이지요.숲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말대답하는 군사는 셋중 선임인 모양이다. 군사가 말을 이었다.산성은 주봉에 있습니다.오면서 보았더니 아랫쪽 고을이 제법 풍족했다. 아이들이 잘 먹어서 몸에 살이 붙었고 어른들은 깨끗했다. 근래에 우환이 없었느냐?그때 군사가 머리를 돌려 기마인을 보았다.제가 듣기로 성주께서는 바다건너 내륙의 담로(檐魯)에서 오셨다지요.그렇다. 연남군(郡)에서 왔다.그래서 잘 모르시는군요. 작년에 신라군이 기습해와서 아녀자 20여명을 잡아갔습니다.여기까지 기습을 해왔단 말인가?예. 기마군 1백기 정도였지만 산성에서 나갔을 때는 이미 도망친 후였습니다.산성에 기마군이 2백여기가 있는 건 맞느냐?지금은 1백여기에 보군 2백 정도입니다. 나리.그때 앞쪽 시야가 트이더니 돌로 만든 낮은 석성(石城)이 드러났다. 앞장선 군사가 먼저 성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곧 갑옷차림의 무장이 달려나왔다.성주가 오십니까?사내가 두손을 모으고 다가와 묻는다.제가 성주대리를 맡고 있던 장덕(將德) 진광입니다.나솔(奈率) 계백이요.신임 성주 계급은 6급품(品)이었고 진광은 7급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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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03 23:02

[2018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뒷이야기] "사람 냄새 나고 위안이 되는 글 쓰고 싶어요"

겨울이면 눈처럼 신춘문예 열병이 찾아온다. 이 열병은 흠씬 앓지 않고는 낫지 않는다. 스스로를 치열하게 갈고 닦는 습작 기간, 수없이 도전하고 좌절하는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새봄을 맞이한다.비 오는 크리스마스이브, 당선 소식을 알리는 전화 한 통으로 남들보다 일찍 새봄을 맞은 이들이 있다. 전북일보 2018 신춘문예에 당선된 김헌수(51시), 최아현(23소설), 이경옥(57동화), 김영주(53수필) 씨가 그동안의 준비 과정과 앞으로의 활동 계획 등을 들려줬다.김헌수 씨에게 시는 숨구멍과도 같다. 시는 삶의 동기를 부여하고, 성취감을 느끼게 했다. 사는 맛이 났다.그러다 2010년 전북여성백일장 차하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전북여성백일장 모임인 문학동인 글벗에서 활동하다 2015년 우석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했다. 10여 년 간 신춘문예 문을 두드렸고, 결국 문이 열었다.그는 짓밟아도 얼어붙어도 봄이 되면 멀리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치는 약자의 시선, 낮은 곳의 시선을 담아내고 싶다며 각박한 세상 속에서 따뜻한 시, 사람 냄새나는 시를 쓰고 싶다고 밝혔다.최아현 씨는 생애 첫 신춘문예 응모에 덜컥(?) 당선됐다.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학생으로 소설은 이제 막 배우는 단계다. 홀로 습작하고 이를 몇몇 지인에게만 보여줬기 때문에 부모님은 물론이고 지인 대부분이 소설 습작 자체를 몰랐다고 한다.그는 여성 간의 연대에 큰 관심을 보였다.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제가 자라면서 그런 글을 많이 접하지 못했거든요. 조금 더 다양한 여성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더 많은 걸 꿈꾸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좋겠어요.15년간 독서 지도를 한 이경옥 씨는 3년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15년간 매달 읽던 동화였다. 자신을 위한 치료 또는 치유 목적이었다. 그는 동화를 쓰면서 스스로 정화되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 글을 읽은 아이들의 상처도 치유되길 바랐다.그는 동화에 대해 누구나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글이라고 정의했다. 아이들 시점에 맞춰 단어를 선택하기 때문에 엄격하고 정제된 글이라는 것. 그 자신도 누구나 읽고 공감하는, 마음의 위안을 얻는 동화를 쓰고 싶다고 했다. 동화 안에 담긴 철학적 사유도 강조했다.김영주 씨는 2014년 학부형에서 학생이 됐다. 그는 우석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14학번, 그의 아들은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12학번이다. 그의 나이 쉰,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멀리 떨어져 사는 딸을 늘 마음 아파하셨던 아버지는 등록금으로 딸의 도전을 지지했다. 그는 메모지를 들고 다니면서 글을 썼다. 종이가 없을 때는 영수증 뒷면도 메모지로 활용했다.그는 사물의 이면을 바라보는 예민한 감성을 지녔다. 꽃을 꽃이라고 보는 사람, 꽃을 장미꽃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꽃대의 상처를 보는 사람이다. 신춘문예 당선은 이 예민함을 피곤한 성격이 아닌, 축복받은 창작 도구로 받아들이게끔 했다.그는 위안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 속에 장애를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남들이 별 것 아니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큰 장애죠. 누군가 내 글을 읽고 힘을 얻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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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민주
  • 2018.01.03 23:02

3일부터 전북일보에 '불멸의 백제' 연재하는 이원호 작가 "전라도 1000년 맞아 백제 자긍심 드높이는 소설 쓸 것"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 펜을 들었다. 2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102종 237권의 책을 썼다. 요즘도 하루 평균 50~60장의 원고를 쓴다.새해 아침부터 불멸의 백제를 전북일보에 연재하며 고향 독자들과 만나는 이원호 작가(70).그는 샐러리맨이었다. 전주고와 전북대 섬유공학과를 나와 BYC에 입사했다. 수출부에서 10여년 일하다 퇴사한 뒤 중소기업을 차렸다. 창업 후 탄탄대로를 밟는 듯 했다. 사우디와 쿠웨이트에 지사를 둘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습니다. 80~90%를 수출하던 중동시장이 막혀버린 거죠.수출길이 막혔지만 버텨보려 했다. 녹록지 않았다. 3개월 만에 부도가 났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평범했던 일상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삶의 희망을 놓으려했다.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서전이라도 쓰고 마무리하자는 생각에 글을 썼다. 수배자 신분으로 1991년 할증여행이란 책을 냈다. 이 책을 접한 출판업계에서 제안이 왔다. 소설을 써보자는 것이었다. 밤의 대통령을 출간했다. 하루 만권씩 팔려나가며 밀리언셀러가 됐다. 샐러리맨이었던 그의 삶을 180도 바꿔놓았다.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출판하는 책마다 좋은 성과를 냈다.그러나 그는 자만하지 않았다.책 좀 팔렸다고 자만하고 독자를 무시했다면 지금의 이원호는 없었을 겁니다.이 작가는 지금도 원고를 쓰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의 대부분을 자료수집 등 앞으로 쓸 소설의 재료를 찾는데 할애한다. 계층별 독자들의 취향을 맞추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인터넷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취향에 맞는 소설을 쓰기 위해 노력합니다. 시대에 뒤처지지 않게 끊임없이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이 작가는 이원호 닷컴을 운영한다. 스마트폰도 곧잘 사용한다. 그러나 원고는 꼭 200자 원고지에 직접 손으로 쓴다. 집안에 원고지만 10만여 장이 쌓여있다. 컴퓨터를 사용하면 편하지만 원고지를 쓰는 이유는 글에 정성을 담기 위해서다.전북일보 연재를 앞둔 이 작가는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다. 고향 분들이 내 소설을 매일 아침 읽는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다면서 더 유익하고, 더 재미있고, 기억에 남을 만한 소설을 써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그러면서 올해가 전라도 1000년이다. 제 소설을 통해 백제에 대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도록 열심히 작업하겠다. 이 소설로 많은 사랑을 보내준 고향 분들께 보답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불멸의 백제-개요- "계백이 승자였다면 긴 기록 남았을 것 1300년전 백제 영혼 끌어모아 보겠다"서기 660년 7월 10일, 황산벌에서 백제 장군 계백이 5천 군사와 함께 패사(敗死)하면서 백제는 멸망했다. 의자왕 20년, 신라 태종무열왕 7년, 고구려 보장왕 18년 때였다.우리는 기록으로 역사를 배운다. 의자왕이 3천 궁녀를 거느리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충신을 배척하고 간신들과 함께 국사를 그르쳤다고도 배웠다.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다.패자는 변명할 여지도 없다. 그래서 부여 낙화암에서 3천 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기록이 아직도 남아있다. 너무 알려졌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기록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계백이 이끈 황산벌 싸움 같은 경우다. 계백이 5천 군사로 김유신의 5만 군사를 네번 싸워 네번 이기고 다섯번째에 패사했다는 기록. 계백이 전장에 나서기 전(前), 처자를 죽이고 나섰다는 기록.계백이 싸움에 임하기 전 군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던가?옛날 월왕 구천은 5천 군사로 오나라 70만 대군을 물리쳤다! 너희들이 죽기로 싸우면 신라군을 몰사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뿐이다.계백이 승자였다면, 백제가 승전국이었다면 긴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나는 1300여년 전 사라진 백제국의 땅에 계백과 기록에도 없는 영혼들을 다시 끌어 모아 보겠다.몇 점 되지 않는 기록을 뼈로 삼아서 살과 핏줄, 그리고 혼까지 불어넣어 볼 작정이다. 그래서 먼저 계백을 완산칠봉의 칠봉성주(七峯城主)로 부임시켜 소설을 시작한다. 백제인, 그 뿌리가 무엇이건 1300여년후, 같은 땅을 밟고 선 우리 모두가 조상의 혼에 자긍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이 소설의 목표다. 작가 이원호● 소설 줄거리현재 '완산칠봉'이 소설 첫 무대 서기 643년~백제 멸망 17년간 다뤄의자왕 3년(643년) 8월에 계백(階白)이 백제 남방(南方) 소속의 칠봉성(七峯城) 성주(城主)로 부임하는 것으로부터 소설이 시작된다. 칠봉성(七峯城)은 봉우리가 7개였기 때문에 1300여년 전에도 그렇게 불렸다고 가정한 것이다. 바로 지금의 전주 완산칠봉이다.계백은 24세, 바다 건너 대륙의 백제령인 연무군에서 기마대장으로 복무하다가 본국으로 온 것이다. 신라와의 전운(戰雲)이 가득 덮인 시기다. 백제는 고구려와 협력하여 신라를 압박했고 전년(前年)인 의자왕 2년에는 신라의 40여개 성을 공취했다.계백은 칠봉성에서부터 의자왕과 함께 백제의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 물론 지금은 다 소실되어 사라진 역사와, 기록에 한두줄씩 남아있는 윤충, 성충, 의직이 계백과 함께 한다. 또한 고구려의 연개소문, 신라의 김유신과 김춘추가 당시대의 인물인 것이다.나는 서기 660년 7월 18일, 백제가 멸망할때까지 17년 간의 격변기를 소설로 꾸며볼 계획이다. 1300여년 전 우리의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가를 다양하게 그려내면서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소득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재미가 있어야 읽히고, 읽는 독자가 있어야 소설의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재미속에서 의미를 찾게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이원호 작가는- 전주출신에 무역업 경력 밤의 대통령강안남자 등 여러 장르 마니아층 형성전북 전주 출신으로 10여 년간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주)경세무역을 설립해 경영했다.1991년부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1992년 <밤의 대통령>, <황제의 꿈>으로 연속 밀리언셀러를 기록, 단숨에 대중소설 최고의 작가로 부상한 후 현재까지 끊임없이 각종 소설을 발표했다.기업가 출신이어서 기업소설은 물론이고, 협객, 역사, 무협, 연예, 정치 등 모든 장르를 아우르며 마니아층을 형성했으며, 문화일보에 <강안남자>를 연재, 한때 외설소설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적도 있다.월간조선에서 <대통령>을 시작으로 정치소설을 연이어 출간한 적도 있으며 신동아에 <2014>를 연재, 남북한 가상 전쟁소설을 써 연평도 사건을 부각시켰다.<계백>, <난중무사>, <바람의 칼> 등은 역사소설이며, <천년한 대마도>는 대마도의 한국령을 주장한 소설이다.현재에도 매년 7, 8권의 소설을 발표, 독자들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으며, 현역 소설가로서 유일하게 닷컴(http://leewonho.com)을 활성화시켜 운영 중이다. 서울=박영민 기자△주요작품<밤의 대통령> <황제의 꿈> <할증여행> <할증인간> <영웅의 도시> <계백> <대한국인> <레임덕> <도시의 남자> <유라시아의 꿈> <초인의 전설> <불야성> <대영웅> <반역> <약속> <질풍시대> <2014> <무법자> <냉혈자> <강안남자> <려명> <난중무사> 등

  • 문학·출판
  • 박영민
  • 2018.01.02 23: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심사평] "풋풋한 감성 유지·찬찬한 글쓰기 강점"

우리에게 전달된 단편소설 작품은 모두 6편이었다. 언제나처럼 심혈을 기울인 이 작품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에는 긴장감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도 이런 과정을 통해 소설가라는 ‘자격증’을 얻었고 거기 기대어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소설이란 단순한 장르가 아니라 인간학이며 인류학임을 알았고, 삶의 망(網)에 정점을 이루는 매듭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의 근거에 ‘소설은 문장이다’라는 선언적 명제가 자리잡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아침 대화’, ‘휴가’, ‘삼중주’로 좁혀 살피게 되었는데, ‘삼중주’는 상당히 연마한 솜씨에 ‘복어’라는 사물이 신선하여 눈길을 끌었다. 다만 나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사물들이 너무 많아 집중도가 약해지는 흠을 안고 있었다. 이런 결점은 ‘휴가’에서도 반복된다. 인물과 장소가 여럿 나와서 작품을 흐트러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여럿 등장하면 합쳐놓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작품의 의미와 이미지가 모아져 뚜렷해진다. ‘아침 대화’는 제목이 평범하여 처음에는 눈에 띄기 어려웠다. 그러나 편의점의 ‘CCTV’를 매개체로 끝까지 이끌어가는 힘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풋풋한 감성이 유지되고 있어서 다시 눈길을 사로잡았다. 찬찬한 글쓰기 또한 강점으로, 숙고 끝에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험난한 앞길에 영광이 있길 빈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8.01.02 23: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소감] 최아현 "'글 쓰는 사람'되는 꿈에 훨씬 더 가까워져"

산타할아버지가 실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올해 지난해보다 훨씬 많은 작품이 응모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하게 잘해서 당선되었다기보다 앞으로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부족한 작품을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올해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 덕에 저는 그 꿈에 훨씬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꿈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계획적으로 변해가겠지요. 그저 글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던 마음에 포근한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시는 것으로 알고 꾸준히 열심히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올해 겨울 어떤 글을 쓰고 싶냐는 물음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가장 보통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 가까이서 보통의 상상을 하게 해주신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모든 가족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제 곁에는 몇 분의 선생님이 계십니다. 항상 응원해 주시는 선생님들께 진심의 인사를 전합니다. 지금은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조금씩 채워나가며 더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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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8.01.02 23: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아침 대화 - 최아현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신호등의 빨간불도 무시하고 달렸다. 딸아이가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아이가 그런 일을 했다고 말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당장 오늘 아침에도 알람을 잊는 실수를 하지 않았던가. 들이받듯 편의점 문을 열어젖혔다.사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아르바이트생인 다이가 인사를 건네는 소리를 들었지만 대꾸할 정신도 아니었다.별일 아냐.사실은 별일이었고, 아주 큰일이었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고, 하늘은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다.곧 편의점 뒤로 가서 지난주 CCTV를 확인했다. 까득까득 손톱이 이에 갈리는 소리가 났다. 어릴 때, 엄마에게 혼쭐이 나며 고친 습관이었는데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튀어나왔다. 내가 편의점을 나서는 것이 화면에 잡힐 때쯤 다이가 들어왔다.다이를 보며 딸의 일은 다이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말도 잘 듣고 모난 곳 없이 자라던 딸애가 비행 따위 저지를 리 없어. 아주 잠깐이지만, 평화가 찾아왔다. 일의 시작은 건빵 때문이었다. 아니, 그냥 건빵이라고 생각하고 싶다.자명종 소리가 집에 가득했다. 매일 듣는 익숙한 소리지만 가끔 싫을 때가 있다. 팔꿈치를 반쯤 펴서 핸드폰을 찾아 알람을 껐다. 그래도 이 소리에 깼으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다시 일주일이 시작되었다. 이번 한 주도 바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찌뿌듯했다. 비가 오는 모양이었다. 눈을 비비며 커튼을 열었다. 하늘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비가 내린 흔적도 없었다. 한기 가득한 바람이 방을 휘돌았다. 이불을 개며 어제 몸 쓰는 일을 했었나, 생각했다. 딱히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는 결론을 얻은 뒤 곧 방에서 나갔다. 더 있다가는 딸애의 아침을 챙기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뜬금없이 어제와 다른 몸 상태에 서러웠다. 늙긴 늙었나.딸애가 중학교에 다닐 때, 남편과 헤어졌다. 세상은 이혼 같은 건 흉이 아니라고 했지만,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승진되지 않는 회사를 그만두고, 골목 어귀에 편의점을 차렸다. 사계절을 지내고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나는 젊음의 매 순간을 자리를 잡는 데 써 왔는지도 모른다. 졸업과 취업, 아내와 엄마, 딸과 며느리잡다한 추억 더듬기에 빠져 있는 나를 질책하듯 칼을 쥔 손이 미끄러졌다. 이런 날이 거의 없는데 결국 왼손 검지를 베고 말았다. 툭, 몽우리 진 피 한 방울이 도마로 떨어졌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검붉은 피는 금세 속을 메스껍게 했다. 딸애의 아침을 차려줄 만큼은 썰어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식탁에 앉은 딸애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드레싱은 뭐로 줄까?그냥 엄마 먹던 거 먹을게요.냉장고 문을 열고 서성이다 참깨 드레싱을 꺼냈다. 접시 위로 흐르는 드레싱을 물끄러미 보던 딸애가 엄마 다쳤어요?라고 물었다. 드레싱을 달라던 목소리와 감정 변화 하나 없었다.양배추 썰다가.조심해요.딸애의 말을 진심 어린 걱정으로 듣는다. 상투적인 톤으로 으레 예의처럼 건네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의 끈끈한 사랑 같은 건 상투적인 톤이어도 좋다. 오가는 말이 있다는 건 여전히 가족애가 오가는 것이다. 오히려 딸애와 대화가 없어지는 것이 두려웠다. 모든 관계의 끝은 대체로 대화가 없을 때 끝이 난다. 라디오에서는 오늘 날씨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다.아침 식탁에서 딸애와 나는 꼭 매일 해야 하는 숙제가 있는 사람들처럼 대화를 이어 갔다.학원 빼먹지 말고.알아요.딴짓하지 말고, 학원 차 놓치지 않게 미리 가서 기다리고, 이상한 아이들하고 놀지 말고. 엄마 말, 무슨 말인지 알지?네. 근데 엄마, 이 이야기 한 달째 하는 거 아시죠?괜히 복잡한 일에 휘말리지 말고. 요즘에 세상이 워낙 흉흉하니까 잘못이 없어도 운이 나쁘면 잘못한 게 되기도 하니까.알겠어요. 학교 다녀올게요.손을 두어 번 흔들어 주는 것으로 딸애와의 아침이 끝났다. 입맛이 없었는지 샐러드를 반이나 남긴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느리게 걸을 거면 한 번쯤 돌아볼 법도 했는데, 고등학교에 간 뒤로는 그런 날이 거의 없다. 가끔 딸애가 놓고 가는 것이 있는 날에나 돌아서 다시 챙겨 가곤 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어 보이는데 그게 무엇인지 물어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우리 모녀가 이렇게 삭막한 사이는 아니었다. 딸애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우리는 전주 팔달로에서 촛불을 들곤 했다. 세상은 한참 먹는 문제로 시끌벅적했다. 촛불을 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보며 딸애가 물었다.엄마, 왜 촛불을 들고 있어?나는 아이에게 불의는 참는 것이 아니라, 맞서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 말을 후회한 건 딸애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딸애는 나의 가르침을 발판 삼아 촛불을 들고 걸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기라는 것이 있다. 딸애에게 불의에 맞서야 한다는 말은 참았어야 했다. 어른이 돼서 행동해도 늦지 않는다고 말했어야 했다. 내 말을 잘 듣고 자라던 딸애는 거리로 나갔다. 가만히 있으라는 피켓을 들고서 기어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그해에 사람들이 많이 아프고 다쳤다. 내 딸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나는 아이가 더는 다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엄마의 일이었고, 책임이었다. 보호자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자괴감마저 들었다. 아이가 다치면 그 책임은 오롯이 나의 것이 된다. 여전히 우리 엄마를 떠올리며 반지를 쓰다듬는 나는 결국 딸애의 엄마가 되어 버렸다. 반지를 쓰다듬으며 나는 늘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우리 엄마 딸인데. 그러다 문득 식탁을 보며 다시 곱씹는다. 나는 우리 딸애의 엄마인데. 아무도 나에게 엄마가 되는 법에 대해서 가르쳐준 적 없었다. 동시에 누구나 나에게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나는 보호자로서 딸애를 더 다치게 놔둘 수 없었다. 나는 아이를 바쁘게 만들기로 했다. 딸의 학원을 두 배로 늘렸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길은 항상 동행했다. 그쯤부터 아침 식사에서 소란스럽던 아이의 재잘거림이 들리지 않았다. 딸아이가 남긴 샐러드를 씹으며 식탁을 정리했다. 혼자 남은 집에는 내가 움직이는 곳에서만 소리가 났다. 꾸역꾸역 샐러드가 씹혔고, 걸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그락달그락, 그릇들이 부딪쳤다. 매스꺼운 배를 쓰다듬으며 변기에 앉았다. 시선이 내 속옷에 닿았고, 나는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가족이라곤 둘밖에 없는 집에 혼자 남으면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세상에 덜렁 혼자 떨어진 기분. 혼자는 늘 낯설었다. 욕실에서 넘어졌을 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쩌지. 위험한 순간에 세상의 누구도 도와주지 못하는 곳은 혼자 남은 내 집뿐이었다. 내 딸에게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나는 오래도록 건강해야 한다. 내가 건강히 오래 살아야 할 이유는 그것이면 됐다.엄마는 내가 스무 살 때 돌아가셨다. 새내기 대학생이던 나는 동아리며 학생운동 따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늘 늦는 외동딸 탓에 엄마는 혼자였다. 엄마는 내가 늦는 것을 못마땅해 했고, 흙먼지를 달고 들어오는 내 손을 잡으며 내일은 학교가 끝나는 대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엄마는 항상 내 어깨에 묻은 흙먼지만 털었다. 대신 내 몸에서 나는 술과 담배 냄새는 모른 척했다. 계속해서 늦지 말라는 당부만 반복할 뿐, 엄마는 꼭 후각을 잃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마지막 한마디는 늘 같았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할 일이니 그만두라고. 그러나 무엇이 무서웠는지 말하지 않았다.엄마는 끝난 줄 알았던 달거리를 다시 시작한다며 진통제를 사서 일찍 들어오라고 일렀다. 엄마를 평생토록 괴롭힌 것은 생리통이었다. 으레 달거리를 시작하면 배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날도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김없이 흙먼지를 뱉으며 들어왔을 때, 집은 꼭 나 하나 남은 것처럼 조용했다. 엄마가 달려 나와 손을 감싸 쥐든, 진통제를 찾든, 혹은 이제는 좀 그만하라며 윽박을 질렀어야 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불안함에 집을 뒤졌다.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 엄마는 피를 잔뜩 쏟고 쓰러져 있었다. 달거리가 멈췄다며 지긋지긋한 배앓이를 안 해서 좋다던 엄마는 이제 공장을 닫는다고 했다. 여자구실은 이제 끝이라고 했다. 쓰러진 엄마를 봤을 때 나는 여자구실을 끝내고, 공장을 닫는다는 건 삶도 끝나 버리는 것이라고 배워 버렸다. 엄마가 쏟아 내던 말들이 머릿속에 반복됐다.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곧이어 들어온 아빠가 엄마를 짊어지고 병원으로 내달렸고, 머지않아 엄마는 나와, 생리통과 이별했다.그리고 나는 오늘 월경을 다시 시작했다.여전히 몸은 피곤했고 오늘따라 하루가 조금씩 뒤틀린 기분이었다. 월요일이면 가는 마트에서 묵직한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는 길. 손가락에서 다시 피가 났다. 상처가 아문 줄 알았는데 손가락에 힘을 주면서 다시 찢어진 모양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구급상자를 뒤적여 밴드를 붙였다. 해가 간당간당 빌딩 사이에 걸릴 때가 되어서야 집안일을 마쳤다. 손가락의 피도 멎었다. 나이를 먹어 가는 내내 혼자인 것조차 익숙해지지 못하고 다시 모든 게 느려지는 것 같았다.이것저것 감상에 젖어 있다가 시간이 조금 늦어 버렸다. 평소 같았으면 분주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젠 괜찮았다. 이 주 전부터 아르바이트생을 한 명 더 구했기 때문이다. 배가 알싸하게 아파 왔다. 허리도 지끈거렸고 횡단보도에 선 나를 받치고 있는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래도 소화 기능까지 느려진 모양이었다. 아침 식사 이후에 먹은 것이라곤 달걀 한 알이었는데. 속이 더부룩했다. 횡단보도와 도로에는 차 한 대, 사람 한 명 지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근엄히 붉은빛을 내며 멈추라 말하는 신호등 때문에 나는 그 건너편에 서 있었다. 젊은 남자 하나가 좌우를 살피고 빨간불로 가득한 횡단보도를 건넜다. 남자가 막 횡단보도에 발을 들이자 거짓말처럼 우회전을 한 차 한 대가 나타났다.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차가 지나길 기다렸다. 그제야 파란불이 켜졌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칙대로 하면 될 것을.아르바이트생은 대학생을 구할 생각이었다. 다이가 찾아와 사정을 말하니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단호히 거절하겠지만, 편의점에 와서 종종 폐지를 담아 가는 할머니의 손녀딸이라니 마음이 약해졌다. 어린 나이에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오는 다이가 안쓰럽고, 기특하고, 또 비슷한 또래의 딸애가 생각났다.편의점 문을 열자 진득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네에서 노는 한량 중 하나였다. 한량은 자신의 딸보다 어릴 것 같은 다이 앞에 술 두 병을 놓고, 계산대를 두들기고 있었다.내가 여기 사장이랑 잘 안다고!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사장님께 연락을 드려 볼게요.다이가 두려움에 손을 떠는 것 같았다. 나는 술 냄새를 찾아갔다.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저게, 달랑 백 원 모자란다고 지랄이네.알겠어요. 다음에 가져다주세요.한량이 나가고 진동하는 술 냄새 때문에 한참 동안 편의점을 환기해야 했다. 조금 진정이 됐는지 다이는 원망하는 말투로 나를 나무랐다.저런 손님, 앞으로 어떻게 해요?내가 원칙대로 하라고 했다고 말해.방금 저 아저씬 꼭 때릴 것처럼 굴었어요. 무서웠단 말이에요.계속 소란 피우면 경찰을 불러.다이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재차 비슷한 질문을 반복했다. 나는 으레 사회에는 이런 일이 많다고, 다들 그렇게 산다며 다이를 다독이며 덧붙였다.네가 물렁하게 굴어서 그래.나는 다이 탓을 하고 있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저런 사람들은 제 눈에 만만한 사람들만 골라 진상을 부린다.하지만 방금은 돈 안 받고 보냈잖아요.괜찮아. 나는 그렇게 해도 돼.그날 다이는 실수를 여러 번 했다. 재고를 채워 넣다가 잘못 둬서 정리를 다시 했고, 교대 시간에 현금을 잘못 세는 바람에 세 번이나 내가 함께 세야 했다. 퇴근하는 다이에게 따뜻한 두유 한 병을 건넸다. 여전히 두려움으로 가득한 다이에게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까 괜히 다이 탓을 했다고 생각했다. 별말을 덧붙이지 않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질 않았다.괜찮아. 앞으론 이런 일 없을 거야.차라리 다이의 눈을 가리면 위로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더군다나 고등학생이라면 모르게 하는 편이 낫다. 이런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만난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어른이 되어서 알아도 늦지 않을 테다. 나는 다이를 볼 때마다 딸애가 생각이 났다. 딸애가 아르바이트하겠다고 하면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무래도 나이를 속물로 먹었나 보다. 다이에게는 잘못이 없지만, 세상에 그런 모든 문제를 내가 해결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따뜻한 두유 한 병을 퇴근길에 건네는 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교대를 하고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엄마가 달거리가 멈췄다며 기뻐하던 나이가 지금 내 나이쯤이었다. 이제는 배가 아프면 속옷을 버릴 걱정에 서둘러 화장실에 앉거나 날짜를 세어 가며 생리대를 챙겨 다닐 일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6개월 만에 하는 월경이 두렵고, 반가웠고, 반갑지 않았다. 엄마처럼 될까 봐 두려웠다. 그동안 나는 생리가 멈췄다는 이야기를 엄마 말고는 아무에게도 듣지 못했다. 생리가 멈췄을 다이의 할머니도 폐지를 가져가면서 그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다들 살아 있으니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빠도 없는 딸애가 혼자 남을 것이 무서웠다. 하지만 100세 시대에 벌써 죽을까 싶었고, 늙지 않았다는 신호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냥 월경이 반가울 리도 없다. 손톱을 입에 가져가려다 멈췄다. 다시 엄마가 생각났다. 이번에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생리대를 꺼내려 연 선반에는 수건만 가득했다. 여자 둘이 사는 집에 생리대 한 장 없는 현실이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있을 줄 알고 편의점에서 챙겨 오지 않은 것도 원망됐다. 내 월경이 멈추고 나니 채워 넣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탓이었다. 온 신경을 딸애에게 쏟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참 무신경한 엄마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참을 변기에 앉아 있었다.마침 딸애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장실 문을 조금 열고서 딸애를 불렀다.생리대 없어?평소라면 잠들어 있을 시간에 화장실에서 내 목소리가 들리자 아이는 놀란 것 같았다.없어요.아이는 제 방으로 향하며 흐르듯 말했다. 생리대가 없어진 지 한참인데 이제야 행방을 묻는 엄마가 귀찮은 모양이었다.어떻게 집에 생리대가 없어. 너는 어떡하고.엄마, 뉴스 안 봐요?무슨 뉴스.생리대에서 안 좋은 성분 나왔다잖아요. 나 이제 생리대 안 써요.괜찮아. 가서 하나 사 와. 다녀오는 길에 내일 먹을 과자도 조금 사 오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위험하니까.딸애는 가끔 어떤 이야기들에 오랫동안 몰두하곤 했다. 이미 뉴스에서 안전하다고 말한 생리대도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도대체 생리대를 쓰지 않으면 뭘 어떻게 한다는 거지? TV에서 몇 가지 다른 용품을 소개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모양도 이상했고 익숙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제 무언가 익숙해지기에는 전에 이용하던 것들이 너무 몸에 익어 버린 탓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월경도 하다 말다 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남은 시간 동안 얼마나 더 할 줄 알고 무엇으로 바꾼단 말인가. 딸애라면 몰라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들 그렇게 사는 대로 살고 싶다. 딸애는 생리대를 화장실 앞에 두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매달 반복되던 일이었지만, 고작 6개월 만이라고 제법 불편했다. 끝나 버린 줄 알았던 것이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시작하는지 몰랐던 초경처럼 그 끝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정확히는 모른다는 말이 맞는다. 나는 긴 세월 나와 함께한 달거리가 어떻게 끝나는지 모르고 있다.화장실 문틈으로 아이의 방문이 보였다. 방문 앞에 걸어둔 팻말에는 여전히 노란 리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아이는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다녀오지 못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수학여행을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는 수학여행지에 대한 설문조사가 가정통신문에 첨부되어 온 일이 있었다.너는 어디 가고 싶니?당연히 제주도죠. 비행기 안 타봤잖아요.위험할까 봐 그러지.내 말에 아이는 그 뒤로 무어라 몇 마디 덧붙였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이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낮에 나간 마트에서 아이의 과자를 사 올 생각이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그날 아이는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에 관해 한참을 떠들었다. 심지어 입고 갈 옷과 가지고 갈 과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무얼 이야기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토피가 있는 딸애가 초콜릿은 피해야 했기에 고를 수 없었고, 너무 자극적인 맛의 과자는 사 주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과자가 진열된 매대를 한참이나 돌다가 건빵을 한 봉지 사서 들어와야 했다. 아이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 건 내가 나에게 하는 위로였다. 월경이 다시 찾아온 어느 날, 별안간 궁금한 것이 많아졌다. 아이에게 궁금한 걸 묻는 일은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눈이 거의 감기기 직전이었다.알람 소리를 듣고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일어났다. 날은 어제와 똑같았고 핸드폰 위치도 그대로였다. 허리와 엉덩이 사이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기운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불 한쪽과 바지가 피로 얼룩져 버렸다. 이런 일은 학교에 다닐 때 빼곤 거의 없던 일이라 당황했다. 수건을 깔고 잠들지 않은 탓이었다. 예정에 없이 이불 빨래를 해야 할 생각에 아침부터 아득해졌다. 이마를 몇 번 훔쳐 내고 나서야 집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시간이면 아이가 씻는 소리가 들려야 했다. 하지만 집 안에서 들리는 건 이마를 매만지는 내 손의 까끌까끌한 소리였다.다급하게 일어나 아이의 방으로 달려갔다. 바지는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아이가 수학여행을 가는 날이었다.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다녀오지 못한 아이가 얼마나 이날을 기다려 왔는지 알고 있었다. 당장 아이를 깨워 학교에 데려가야 했다. 방문을 열고 아이 이름을 불렀다.내가 움직이는 소리만 가득한 집에 아이는 없었다. 무엇에 이렇게 놀라고 긴장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문고리를 쥔 손에는 힘이 바짝 들어갔고 다리는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아이 방의 시계를 보니 이미 8시였다. 어제부터 상상해본 적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샤워하는 내내 열이 올라 찬물로 씻었다. 원래 몸에 열이 많기도 했지만 그래도 샤워만큼은 따뜻한 물로 했다. 그저 올겨울이 조금 따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과 일 년 전보다 수도꼭지의 방향이 찬물 쪽으로 한 마디나 돌아가 있었다. 문득 물이 너무 차갑다고 느꼈다. 하지만 온수로 다시 바꾸지는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탓이었다. 온종일 몽롱했고 기분이 이상했다. 라디오에 나오는 사연마다 기분이 요동치는 것 같았다.겨우 이불 빨래를 하고서 다이에게 연락을 했다. 오늘부터는 혼자 하면 될 것 같다고. 다이는 답장이 없었다. 허무하게 앉아서 수건을 몇 장 개켰다. 이상한 하루의 시작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꼭 이제 시작이라는 것처럼 핸드폰이 유난스럽게 울렸다. 딸애의 담임 선생님이었다.아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들떠 있었다. 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 큰 사고가 나면서 전국의 학교들은 수학여행 일정을 취소했다. 딸애의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쯤이면 한참 제주도에 도착해서 여행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반쯤 접은 수건을 옆으로 치워 두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담임 선생님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내 딸이 한 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어제부터 온통 상상할 수 없는 일들만 닥쳐오는 것 같았다. 이게 꿈이라고도 생각했다. 멈췄던 월경을 다시 하고, 늦잠을 자고, 이불을 버리고. 꿈에서 너무 깨고 싶어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다. 그저 변하는 건 늘어났다가 제자리로 힘없이 돌아가는 내 허벅지 살뿐이었다.아이가 술을 가져와 친구들과 마셨다고 했다. 일정을 소화하던 와중에 자유 시간을 줬는데 그때 한쪽에서 아이들이 유난히 모여 있더란다. 이상하게 생각한 선생님이 가서 확인하니 아이들에게서 술 냄새가 진득하게 났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이들이 한 아이를 둘러싸고 앉아 억지로 술을 마시게 했는데 그 아이가 내 딸애였다고.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아이들 모두 마신 술과 가방에서 나온 담배를 딸애가 가져왔다고 말했다. 엄마가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가져왔고 자신들은 그저 놀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천장이 도는 것 같았다. 불과 며칠 전에 이상한 일에 엮이지 말라고 했을 때, 딸애는 알겠다고 했다. 나는 담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딸애는 내 말이면 일단 알겠다고 하는 아이였다. 세상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학원을 보냈고, 매년 소풍에 건빵만 가방에 넣어줘도 불만이 없는 아이였다. 며칠 내가 다친 것을 걱정하며 묻던 아이였다. 내가 보지 않은 것은 믿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본 적 없는 딸애의 모습을 전하는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잠시 윙윙거렸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내 눈에 딸애는 그런 짓을 할 아이가 아니었다.우리 애는 그럴 애가 아니에요.학교로 돌아가면 징계가 있을 겁니다. 미리 연락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확실히 확인했나요? 증거가 있는 거예요?어머니. 가정에서 지도 부탁드리겠습니다.담임은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개키던 수건을 던지고 일어섰다. 당장 편의점에 달려가 CCTV를 보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일그러진 일상은 순식간에 비틀어졌다. 모든 것이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조금씩 엇나간 믿음들이 동시에 무너졌다. 딸애의 비행을 전해 듣고 덜컥 확인해야겠다는 내 다짐이 무너짐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평소와 다르게 알람을 듣지 못했고, 피가 이불에 새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니,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벌떡 일어나 갑자기 움직이는 내 다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나는 내가 쌓아 둔 수건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집 한가운데서 벌러덩 넘어진 내가 너무 불쌍해서 그 자리에 엎드려 엉엉 울어 버렸다. 혼자서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모난 곳 없이 잘 키웠다고 생각했다. 조금 냉랭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사춘기라고 생각했다. 말썽 한번 피운 적 없던 아이가 그랬을 리 없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내 눈에서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아이는 결국 징계를 받았다. 벌점을 한가득 받았고 매일 학교가 끝이 나면 사회봉사 활동을 했다. 덕분에 학원은 잠시 쉬어야 했다. 나는 CCTV를 확인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딸애가 술을 훔쳐간 날은 다이가 겁에 질려 나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던 날이었다. 여러 번 재고와 현금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분명 실수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다이도, 나도 가끔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동안 아이는 결국 학교의 징계를 받게 됐다. 고작 그만큼을 인정하는 데 나는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꼭 편의점 CCTV 영상이 없더라도 현장을 들켜 버린 아이들이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나는 더 크게 번지길 원하지 않았고, 그날의 기록을 전부 지웠다. 지울 수만 있다면 내 삶에서도 지워 버리고 싶었던 일주일이었다.수학여행에서 돌아온 딸애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도 아무런 말이 없었고 우리는 꼭 그런 일이 없었던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당분간 학원에 다니지 않아 일찍 돌아온 딸애가 인사도 없이 나를 지나쳤다. 울컥 나는 화가 났다. 왜 딸애가 저렇게 당당한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참아 내고 있는데 딸애는 늘 무엇이 저렇게 불만이고 당당한 걸까. 발끝에서 울화가 치밀었다.예의 없이 굴지 말랬지.다녀왔습니다.엄마가 지금 인사받으려고 불러 세운 줄 알아?그럼 뭔데요?뭐?엄마가 원하는 게 뭔데요?아이의 물음에 목구멍이 턱 막혔다.지금까지 내가 원하는 건 물어본 적 있어요?지금 말대꾸하는 거니?이렇게 하지 마라, 이건 하면 안 된다. 엄마는 내가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원해요?나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도 없었다. 엄마가 무엇을 원해야 하나. 엄마는 원하는 게 있어야 했나. 나는 평온한 가정과 아이의 건강한 성장만을 바란다고 말하기도 헷갈렸다. 내가 원하던 것이 이것뿐이었나 싶다가, 이마저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까지 흘렀다. 아이가 현관에 들어서기 전까지 나는 아이가 징계받은 일조차 잊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나는 네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구나.엄마가 하지 말라고 한 것들을 죄다 한 번에 했는데, 엄마는 왜 묻질 않아요? 그 전에 한 번이라도 내 말을 들어준 적 있어요?아침에 항상 대화하잖니.건빵 싫다고 말한 건 기억하세요? 매년 이야기하는데 엄마는 매년 건빵만 사 오잖아요. 다른 것들도 그래요. 저는 영어학원보다 수학학원이 더 필요하다는 말은 기억하세요? 바둑을 배워 보고 싶다는 이야기는요? 그 이야기에 딴짓할 생각 말라던 것도요. 엄마는 늘 물어봤다는 사실만 기억해요. 하고 싶은 일은 하고, 불의는 참지 말라면서요. 지금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려면 엄마가 시킨 말을 다시 어겨야 해요.다들 그렇게 살아.아이는 내 말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이는 쉬지 않고 말을 뱉어냈다. 근래 나눈 대화의 몇 배는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이는 그동안 아침마다 내게 했던 질문을 되짚었다. 자신은 무엇을 좋아하는데 엄마는 무엇을 좋아하느냐는 식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수많은 식사를 함께 하면서 서로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 나와 아이는 그 질문에 서로 완벽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로 넘기기에는 아이와 나 모두 사람이었다. 방문을 소리 나게 닫고 들어가 버리는 딸애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내가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결국,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딸애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기억을 되짚느라 한참을 뒤척였다. 대답에 닿을 것 같다가도 그 대답에 닿기에는 세상이 그걸 가만둘 리 없었다. 나는 그저 딸애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걸 원했다. 모두의 행복이 다를 것이 분명해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 행복에 닿는 길이 모두가 가는 방식이 아니라면 더 꺼려졌다. 그런 건 위험한 것들 투성일 터였다. 나는 결국 그날도 늦잠을 자고 말았다. 다음 날 딸애는 아침을 먹지 않았다. 대신 식탁에 짧은 메모를 남겨 두었다.저 아침 먹으면 속이 더부룩해요.마침내 어제 저녁부터 이미 내렸던 답을 확정 짓기로 했다.얼굴이 붉어지며 열이 오르는 건 생각보다 꽤 신경을 긁는 일이었다. 나부터 변하기로 마음먹었다. 노트를 펼쳐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한쪽에 내 이름 한정희를 적었다. 나머지 한 공간에는 딸애의 이름 강다영을 적었다. 양쪽 모두에 건강과 행복을 적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채워 나갔다. 내가 해야 할 일도 채워 넣었다. 우선 딸의 사춘기와 나의 갱년기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당장 산부인과에 들러 검진을 받고, 갱년기임이 틀림없는 이 증상들을 외면하지 않아야겠다. 가서 이 두려움에 맞서야겠다. 적어도 나는 딸애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고작 노트의 반쪽을 채우는 데 한참이나 걸렸지만, 이제는 물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딸애가 돌아오면 이 노트를 건넬 생각이었다. 빳빳한 노란색 노트를 덮고 일어났다. 지금 산부인과를 다녀올 생각이었다.나는 여전히 사람도 차도 없는 신호등을 지키고 서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이런 것들을 지키고 규칙에 맞춰 사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릴없이 신호등을 바라보는 일 말고 주변에 차가 오고 있는지 둘러봤다. 오늘도 우회전 차량이 도로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고 뒤쪽에서 바쁜 뜀박질 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정신없이 길을 건너려던 여자를 불렀다.저기요! 차 와요!내 목소리에 여자는 발걸음을 멈췄다. 여자의 앞으로 차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신호는 다시 파란불로 바뀌었다. 여자는 그저 내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서 다시 뜀박질을 시작했다.병원을 다녀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아무 과자나 건빵이 아니라면 좋았다. 잔뜩 늘어놓고 딸애가 좋아하는 걸 골라가게 할 셈이었다. 오늘도 조용히 들어선 편의점에는 그 한량이 와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저번에 사장이 하는 말 들었잖아!저는 사장님이 아니잖아요.두 마디만 들어도 상황을 파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이는 여전히 겁을 잔뜩 집어먹은 것 같았고 핸드폰을 꼭 쥔 손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계속 소란 피우시면 경찰 부를 거예요.사장 불러!한량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사실 저런 말이 위협이 될 것이라고, 다이의 두려움을 해소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상황을 모면하고 비껴가기에 그럴듯해 보여서 한 말이었다. 나는 여전히 다이를 보며 다영이를 떠올렸고 이제는 전과 같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손님.마침 사장님 오셨네. 저번처럼.나가세요.뭐요?나가시라고요. 경찰 부르기 전에 나가세요.그 전에 밀린 돈은 받지 않을 테니 다시는 오지 말라는 말에 그는 씩씩대며 나가 버렸다. 다이는 되레 나에게 위로를 건넸다.사장님, 그래도 동네 사람인데.저런 사람들은 고객으로 대하면 사람을 만만하게 봐.나는 정말로 다이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다음엔 그냥 저 사람이 오거든 CCTV 위치를 가리키며 경찰 부르라고 덧붙였다. 나는 여전히 한량과 같은 사람이 또 편의점에 찾아올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다이는 전보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같은 말이지만 분위기는 분명히 다르다. 내 말 한마디가 따뜻한 두유 따위보다 나을 거라고 감히 생각했다. 나는 다이에게 좋아하는 과자를 물었다.저는 나초 좋아해요.다영이가 좋아할 과자가 짐작이 안 가서 물어봤어.다영이가 따님이세요?다이의 말에 나는 또 얼굴이 붉어졌다. 갱년기 탓만은 아니었다. 문득 다영이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였다. 아이 혹은 딸애로 부르면서 정작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류별로 과자를 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건빵도 잊지 않고 챙겼다. 나초 한 봉지는 다이에게 건네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딸애의 이름을 불러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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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8.01.02 23: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마키코 언니 - 김영주

마른 잎 하나가 김이 피어오르는 허공에서 팔랑거리다 노천탕 수면에 내려앉는다.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둘러쓴 마키코 언니가 물살을 밀어내며 엄마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간다. 영락없는 모녀 사이다. 언니의 낯빛이 어린아이처럼 해맑다.옛날에 저하고 목욕탕에 갔던 거 혹시 기억하세요? 언니가 엄마의 어깨에 물을 한웅큼 정겹게 끼얹는다. 그런 일이 다 있었어? 엄마의 희미한 기억이 잔잔한 미소로 번진다.마키코 언니가 초청한 4박 5일 삿포로 여행이었다. 언니는 친정아버지까지 꼭 모시고 와야 한다고 내게 몇 번이나 당부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외국여행을 감당하기에는 아버지의 건강이 따라주지 않았다. 언니는 그걸 못내 아쉬워했다.마키코 언니는 가는 곳마다 엄마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친모녀 같아서 가끔 샘이 날 정도였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아버지도 함께했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싶었다. 언니는 또 그 불편한 걸음으로 엄마와 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기 바빴다. 옛정을 잊지 않고 정성을 다하는 언니의 올곧은 심성이 그대로 전해졌다.사촌올케 마키코 언니가 우리 집에 처음 온 것은 그녀의 나이 스물일곱 때였다. 하얗고 투명한 피부에 작고 깡마른 소녀, 내 눈에 비친 언니의 첫 모습이었다. 일본인 특유의 겸손한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는데, 눈망울이 유난히 똘망똘망했던 걸로 기억한다.언니는 심한 소아마비 장애가 있었다. 큰댁 어른들은 중증 장애인인 데다 아이도 가질 수 없는 며느리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사람이었다. 그 옛날, 할아버지가 일본여자를 보는 바람에 가족을 돌보지 않았다면서 큰아버지는 일본인을 극도로 싫어했던 것이다.당시 큰아버지는 미국에 건너가 살고 있었다. 사촌오빠는 어릴 적부터 공부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서 어른들의 기대가 컸다. 그래서 일본 유학까지 보냈던 건데, 그 아들이 한마디 상의도 않고 덜컥 결혼식까지 올린 뒤 며느리라고 데려왔으니 오죽했을까. 큰댁 어른들은 온갖 트집을 잡아가며 며느리를 냉대하기 일쑤였단다.아버지는 조카며느리를 큰딸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한사코 마다해도 볕이 제일 잘 드는 방을 언니에게 내주었다. 식사 때 언니의 젓가락이 자주 가는 반찬은 따로 기억해 두었다가 엄마에게 특별 주문을 할 정도로 살뜰히 챙겼다.언니의 한국어학당 입학수속을 거들어준 건 바로 나였다. 당시 대학 1학년인 나는 공강 시간에 언니하고 캠퍼스에서 단둘이 자주 만났다. 도서관에서 언니의 한국어 공부도 거들어주었다. 우리는 마치 친자매 같았다.언니의 한국어 습득 속도는 신기할 정도였다. 하루라도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 시댁 어른들하고 소통하고 싶은 바람이 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6개월 동안 어학연수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날이었다.내가 몇 달 겪어보니 우리 조카며느리는 참 좋은 사람이야.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석별을 아쉬워하는 정이 그득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언니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마키코, 시댁 어른들이 뭐라고 하든 흔들리지 말아. 내 말, 알겠지? 언니의 볼에 굵은 눈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언니가 떠나자 우리는 가족 하나를 잃은 듯 꽤 오랫동안 허전해했다. 간간 전해오는 큰댁 식구들 소식에 섞인 것 말고는 언니가 어떻게 지내는지 나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지났는데, 지난달에 사촌오빠 내외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삿포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날이었다. 마키코 언니는 엄마와 내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하룻밤이라도 꼭 함께 지내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고단하셨는지 일찍 잠들었다. 우리 둘은 맥주 한 캔씩을 탁자에 두고 마주앉았다.내 평생 가장 행복했던 건 한국의 작은아버지 집에서 지냈을 때야. 언니는 엄마하고 재래시장 좌판에서 맛있게 먹었던 잔치국수, 나와 함께 자주 갔던 학교 앞 떡볶이 집, 동네 생선가게 곰보 아줌마의 친절, 추석 때 엄마가 선물해준 분홍색 운동화, 우리 집 마당의 평상에서 함께 수박을 먹었던 일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진짜 한 가족이었잖아. 마키코 언니는 꿈을 꾸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시집살이는 별로였나 보네? 나는 짐짓 시치미를 떼면서 빙긋 웃어보였다. 며느리를 그토록 홀대했던 큰아버지는 오랫동안 치매를 앓았다. 언니는 싫은 내색 한 번 비치지 않고 그 수발을 다 들었다고 한다. 큰아버지는 몇 년 전에 저세상으로 가셨다.시아버지가 원망스럽다는 생각은 없었어? 내가 물었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러셨을 테니까 나는 그냥 받아들였어. 이제 다 지난 일이야.시댁 어른들이 못살게 굴 때마다 작은댁 식구들의 정성을 떠올렸단다. 한국을 떠나던 날 작은아버지가 들려주셨던 말씀을 새기며 시댁 어른들하고의 거리를 좁혀나갔단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어쩌면 언니는 시댁 가족에게서 얻은 마음의 상처를 꿰매고 싶어서 우리를 삿포로에 초대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삿포로를 떠나던 날이었다. 욘주! 특유의 발음을 내며 마키코 언니가 내 팔을 잡았다. 욘주는 좋은 사람이야. 작은아버님도 어머님도. 엄마와 내 손을 꼭 쥔 언니의 눈동자는 가을 호수처럼 맑고 깊었다. 이제는 왠지 나와 엄마가 언니의 위로를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마키코 언니가 이메일을 보내왔다.영주, 삿포로에는 눈이 많이 내렸어. 오늘 아침에 우리가 함께 걸었던 공원에도 가보았어. 참, 작은아버지 건강은 좀 어때? 그분 건강이 회복되면 언제든 삿포로에 다시 와줄 거지? 영주의 가족은 모두 내게 하얀 눈처럼 축복이야.오래 전에 보았던 일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눈 덮인 먼 산을 향해 손나팔을 만들어 그리운 이의 안부를 애타게 묻던 여주인공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했다. 나는 마키코 언니의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며 답장을 썼다.엄마는 여행 다녀와서 한 이틀 몸살을 앓았어요. 물론 아버지는 편안하게 잘 지내고 계시지요. 언니가 보내준 삿포로 공원 풍경은 숨이 막힐 것처럼 아름답네요. 마키코 언니. 보고 싶어요, 아주 많이요. 이담에는 우리, 한국에서 다시 만나기로 해요.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8.01.02 23: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심사평] "인간적 화해의 정, 수묵화처럼 담백하게 빚어"

수필은 대상을 관조하고 성찰해서 삶의 무게와 깊이를 다져가는 데 유용한 양식이다. 일상의 다양하고 독특한 체험이야말로 수필의 마르지 않는 글감이다. 그걸 퍼 올려 씨줄과 날줄로 짜 맞춘 뼈대에 살을 덧대서 한 편의 수필을 완성한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해묵은 정의와는 반대로, 수필을 ‘청자연적’에 은유했던 피천득 선생의 말을 금과옥조로 삼아야 하는 까닭이다.예심을 거친 작품들 중에서 1차적으로 고른 작품은 ‘소리샘’, ‘슬픈 바람개비’, ‘그해 봄’, ‘복숭아화채’, ‘혼서지’, ‘한선, 가을 매미’, ‘바람의 언덕’, ‘그 골목의 필경사들’, ‘왜 의자는 파란색이었을까’, ‘아버지의 가면’, ‘마키코 언니’ 등 11편이었다.이 중에서 눈길을 끈 건 ‘바람의 언덕’, ‘그 골목의 필경사들’, ‘아버지의 가면’, ‘마키코 언니’ 네 편이었다. ‘바람의 언덕’에는 남편의 사업실패로 겪게 된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사람들의 온기와 웃음꽃’을 발견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가는 화자의 따뜻한 시선이 잘 녹아 있었다. ‘그 골목의 필경사들’은 오래된 골목 풍경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정겨운 일상을 차분하게 그려냈다. 두 작품 모두 이웃을 대하는 성찰력의 폭과 깊이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지만, 이야기 구성이 다소 산만해서 수필다운 완결성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떨쳐내지 못했다.나머지 두 작품은 우선 글 읽는 재미가 있었다. ‘아버지의 가면’에서는 젊어서 주물 일을 하셨다가 노년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이야기를 다루었다. 아버지를 향한 딸의 복잡하고 애틋한 심경을 속도감 있는 문체로 그린 수작이었다. ‘마키코 언니’는 일본인 사촌올케와 ‘나’(를 포함한 가족)의 오랜 인연을 수묵화처럼 담백하게 빚어낸 작품이다. 국경을 뛰어넘는 인간적 화해의 정이 듬뿍 담겨 있어서 수필적 감동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었다.이 둘을 놓고 오래 고심했다. ‘아버지의 가면’은 장면 묘사가 생동감이 넘쳤지만 문체가 다소 거칠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키코 언니’는 서사수필다운 박진감은 다소 부족했지만 안정된 문체로 잘 다듬어져서 수필적 완성도가 높았다. 결국 거듭된 퇴고로 작은 흠결까지 걸러내어 정성스럽게 구워낸 ‘청자연적’ 쪽으로 손이 갔다. 당선작으로 함께 올릴 수 없는 여건 탓에 마지막 손길을 아쉽게 접어야 했던 ‘아버지의 가면’의 필자에게는 각별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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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8.01.02 23: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소감] "나이 쉰에 시작한 문학, 꿈 이뤘어요"

새 학기가 되면 전공이 문예창작과인 아들에게 시집, 소설집, 희곡집, 작법서 등을 구입해주었다. 자연스레 한 권씩 한 권씩 곁에서 읽다 꿈이 생겨났다. 결국 아들과 같은 과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누군가 글은 공부하는 게 아니라 했던가! 나는 학부 때도 안했던 공부를 열심히 했다. 밤새 글을 쓰다 날이 훤히 밝은 날도 많았고, 고요해야 들을 수 있는 세상의 작은 소리를 듣기도 했다. 나는 쑥을 뜯을 때면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그만큼 진득하지 못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글을 쓰고 있자면 몇 시간씩 앉아있다는 것을 잊을 때가 많다. 이는 참 묘한 쾌감을 줬다.나이 쉰이 되어 다시 공부하겠다는 딸의 등록금을 내준 친정아버지께 당선 소식을 알리니 오히려 당신이 고맙단다. 좋은 성소로 끌어주신 하느님과 최고의 스승이신 우석대 문창과 모든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나를 가르칠 때 전라도 말로 무척이나 폭폭 했으리라. 함께 공부한 문창과 교우들과 동시랑 회원들이나 매번 흔쾌히 내 글의 독자가 되어 준 동생 영아가 고맙다. 문학을 두 아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어 행복하다. 비 오는 성탄 이브에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알려준 전북일보에 감사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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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8.01.02 23: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고요한 은유, 따뜻한 위로같아"

예전에 결선 작품들을 보고 나와서 나눈 말이 생각났다. 시들이 너무 어려웠다는 의견이다. 해독이 불가한 암호와도 같은 난독증을 일으키는 시들은 화성악을 내치며 유리창에 스티로폼을 긁어대는 것처럼 불편한 불협의 음을 차용해 시종 들이대는 난해한 음악을 읽는 것 같았다.결선에 오른 10인의 작품들은 우수한 시들이 많았다. ‘소년병’과 ‘회전의 시간’과 ‘삼례터미널’에 주목했다. ‘소년병’은 시를 밀고 가는 힘도 단단하고 신선했다. 전혀 다른 시선이기는 하지만 문득 군대이야기를 쓴 이문열의 등단작이었던 ‘새하곡’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소년병’을 받쳐줘야 할 다른 시편들이 다소 무게감이 떨어졌다. 언어 선택이 젊다는 것은 장점이기도 하겠으나 정제되지 않은 수식어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회전의 시간’은 그의 다른 작품인 ‘오늘의 나이’와 ‘장항선’에서 보여주는 재치와 또 다른 시적 감각을 보여주는 수준에 오른 성취를 가늠케 했다. 그러나 “달맞이꽃을 깨운 샛노란 얘기들이”라든지 “물레의 올을 타래로 짓는 실패의 날들”과 같은 표현은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던 전체적인 시의 분위기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을 해서 오히려 풍요로운 시적 멋과 맛을 돋보이는 역할을 해야 하는 은유로서의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잔잔한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쓴 ‘삼례터미널’은 다른 작품인 ‘7번 출구에서’· ‘개개비의 여름’과 함께 대상의 이면과 그림자까지 관찰하며 사려 깊은 내면을 밀도 있게 그려놓았다. 모름지기 시인의 눈이라면 대상의 아득한 너머와 순간의 찰나까지, 쓰러지고 일어나 건너온 시간까지를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걸어 잠근 뒷문 곁에 그림자 없는 하루가 눕는다” “빗방울이 욕심을 내던 처마 밑이 환하다”라니, 이 같은 고요한 은유에서 볼 때 시를 짓는 새로운 시인의 눈이 따뜻하고 그렁그렁한 눈매로 대상을 위로하며 시를 풀어놓았을 것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당선작을 결정해야 한다. 실험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상상력이 꿈틀거리는 젊고 싱싱한 야생의 시에 손을 내밀어야 할까. “나의 음악은 울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가수 밥말리의 말처럼 상처받은 생명의 동굴 속 내면으로부터 울려나오는 부드럽고 깊은 응시의 위로와 산들을 껴안고 가는 먼 산빛과 같은 시를 불러내야 할까 망설였다.결국 ‘삼례터미널’을 당선작으로 선택하였다. 축하한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첫 시’이다. 당선작이 대표작이 아니라 삶의 길 위에서 시의 종착역행 나침반을 잃지 않고 오래오래 치열한 시마에 사로잡혀 먼 길을 가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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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8.01.0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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