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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흥미로운 연구논문이 게재됐다. 미국 미시건대와 유타대, 스위스 취리히대 공동연구팀이 세계 시민들의 정직성 실험을 한 결과가 실렸다. 공동연구팀은 세계 40개 국가 355개 도시에서 잃어버린 지갑 찾아주기 실험을 했다. 실험 대상자는 우체국 호텔 병원 문화관련 기관 등 공공기관과 민영회사 사람들이었다. 돈이 들어 있지 않은 지갑과 13.45달러(1만6000원 상당)가 들어 있는 지갑, 그리고 94.15달러(11만원 상당)가 든 지갑 등 3종류, 1만7303개의 지갑을 사용해 정직성 테스트를 진행했다. 지갑에는 돈뿐만이 아니라 열쇠와 명함 등도 함께 넣었고 직접 실험 대상자들에게 분실 지갑이라면서 건네주는 방식으로 실시했다. 실험 결과는 다소 의외였다. 연구팀은 지갑에 돈이 많을수록 사람들이 챙기려는 의도가 강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거의 모든 국가에서 지갑에 돈이 많을수록 돌려주는 비율이 높았다. 돈이 없는 지갑의 회수율은 평균 40%에 그쳤지만 13.45달러가 든 지갑은 51%, 94.15달러가 든 지갑은 72%로 회수율이 높아졌다. 지갑 회수율이 가장 높은 국가는 스위스였고 노르웨이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이 뒤를 이었다. 회수율이 낮은 국가는 중국 모로코 페루 카자흐스탄 케냐 순으로 나타났다. 이번 실험은 사익이 행위를 이끈다는 고전적 경제 논리를 반박했다. 오히려 분실 지갑에 돈이 많을수록 사람들이 정직해졌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둑으로 비치지 않으려는 심리가 큰 것 같다고 분석했다. 사람들이 사익보다는 다른 사람들한테 어떻게 보일지, 즉 자신의 이미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번 실험 대상국에서 한국은 빠졌다. 우리도 정직성 실험대상에 포함됐으면 아마 상위권에 랭크되지 않았을까. 체면과 도리, 양심을 중시하는 우리 국민성을 보면 돈 지갑 회수율은 매우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정직성 실험을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자못 궁금하다. 방금 한 말도 부정하고 약속은 파기하기 일쑤고 금방 들통날 거짓말도 거리낌 없이 해대고 내년 21대 총선에서는 선량들의 선택기준으로 정직성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전주의 대표적 이미지 중 하나가 조선왕조의 발상지다. 조선왕조와 관련된 유적으로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李安社)가 살았다는 이목대와, 이성계가 남원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다는 오목대가 있다. 조경단에 전주이씨 시조묘가 봉안돼 있고, 경기전에 태조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런 유적들을 옆에 두고도 오늘을 사는 전주시민들에게 왕조의 발상지라는 점이 그리 큰 자부심이나 실감나는 역사로 연결되는 것 같지는 않다. 조선왕조가 그저 성씨의 본향 정도 수준 정도로 전주를 데면데면 여겼다면 이제와서 굳이 왕조의 발상지입네 요란 떨 일도 아니다. 그러나 조선의 왕들이 전주를 왕조의 발상지로 각별히 생각했던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잘 드러난다. 특히 경기전에 보관했던 태조영정을 챙긴 것은 유별났다. 세종 때 지은 경기전에 태조 영정을 봉안하면서 공조 판서를 보냈다. 영정을 봉안할 때 문무관을 뽑는 과거를 시행하기도 하고, 경기전 5리 길 안에 향을 피우기까지 했다. 종 9품의 참봉이 경기전을 지켰으며, 영정을 잘 간수한 관리에게 특별 승진도 시켰다. 전주(全州)의 영정이 형세상 장차 여름을 지나게 되었는바, 습기가 스며들 걱정이 있을 듯하니 자주 봉심하고, 혹 본부 관사의 온돌방에다 보관하되, 불조심을 하는 등의 일을 십분 늘 신칙하라. 광해군이 전라감사에 이런 세부적인 내용까지 지시한 걸 보면 조선 왕들이 태조영정을 얼마만큼 소중히 다뤘는지 알 수 있다. 역사적 평가를 접어두고 선조 때 일어난 정여립 사건 처리에서도 조선왕조가 전주를 어떻게 여겼는지 보여준다. 전주가 조종(祖宗)의 어향(御鄕) 이니 전주에 있는 정여립의 조부 이상의 분묘를 낱낱이 파내어 이장하도록 하고, 또 그의 멀고 가까운 족류(族類)들도 모두 전주에서 내쫓아 딴 고을에 살도록 하라고 선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중죄인을 치죄하면서 보통 해당 고을의 격을 강등시켰으나 전주를 예외로 한 적도 있다. 조선왕조가 조경묘와 경기전의 체면을 막중하게 여겨서다. 전주시가 한옥마을에서 국립무형유산원으로 연결되는 오목교에 조선시대왕의 깃발을 걸었다. 전문가 자문을 거쳐 만든 왕의 행차에 사용되던 의장기 28기다. 왕조 발상지로서 시민들의 자부심과 함께 전주의 위상을 곧추 세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정읍 태인에 가면 피향정이라는 유명한 정자가 있다. 연못의 연꽃 향기를 입은 정자라는 의미다. 전국적으로 최치원 마케팅을 하는 시군이 수십곳에 달하는데 피향정은 태인군수를 지냈던 최치원 마케팅의 한 사례다. 피향정 옆에 있는 빗돌을 보면 임꺽정을 지은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태인군수) 선정비, 실학 4대가 이서구(관찰사) 불망비, 탐학으로 동학농민운동을 유발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친 조규순(태인현감) 불망비도 눈에 띈다. 그런데 피향정 바로 옆 도로명은 흥미롭게도 수학정석길이다. 역시 예상한 그대로다. 수학의 정석으로 유명한 홍성대 전주 상산학원 이사장의 생가가 바로 옆에 있다. 학교명상산(象山)이란 명칭은 태인 근처 상두산(象頭山)에서 가운데 글자를 빼고 따왔다. 홍 이사장이 불과 30세의 나이에 수학의 정석을 발간한 이래 지금까지 53년간 대략 500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 바둑용어인 정석(定石)을 널리 알리는 역할도 했다. 작업의 정석 연애의 정석 등 수학의 정석을 변용한 수많은 예술작품의 제목으로 쓰이기도 했다. 돈 방석에 올라선 홍 이사장은 남들처럼 국회의원 배지 한번 달고, 해외 골프여행 다니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으나 후학 양성에 올인했다. 1981년 상산고 설립 당시, 5억원만 있으면 그럴듯한 학교하나 세워서 사돈네 팔촌까지 이사장교장행정실장을 해먹고 교사 채용은 뒷돈을 받는 곳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그는 거의 전 재산을 투자하고도 단 한사람의 친척도 쓰지 않았다. 다른 자사고는 모두 대재벌이 후원하고 있으나 상산학원만은 홍 이사장이 지금까지 설립 이후 사재 500억원 이상을 출연했다고 한다. 그런데 평생을 바쳐온 그의 건학이념이 붕괴위험에 직면했다. 정부의 자사고 폐지 정책에 편승해 김승환 교육감이 전북의 커트라인을 타 시도(70점)와 달리 80점으로 높인 때문이다. 모두가 아니라고 하는데 일부 진보진영을 등에업은 전북교육감은 이제 마지노선도 넘어섰다. 급기야 24일 기자간담회에서는 정치권에도 경고를 날렸다. 정치권이 조언한다면 모르지만 선을 넘어 개입하는 것은 단호히 처리하겠다며 교육부에서 부동의가 이뤄진다면 권한쟁의 심판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이쯤되면 누가봐도 막가자는 거다. 1964년 김용환 초대 교육감 이래 설인수, 유재영, 유재신, 홍태표, 임승래, 염규윤, 문용주, 최규호에 이어 김승환 교육감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역대 교육감 중 혹자는 오명을 남기고 혹자는 지금도 칭송을 받는다. 3년후 임기 종료뒤 김승환 교육감은 과연 후세의 사가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게될까.
지난 1991년 지방자치제 부활로 전주시의회가 구성됐지만 그간 시민들로부터 집행부에 대한 견제와 감시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는 비판을 꾸준히 받아왔다. 대다수 의원들이 전문성이 떨어지고 사명감마저 잊은채 자기 앞에 무작정 큰 감만 올려 놓을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일부는 명예를 숭상하기 보다는 시 의원 되는 것을 먹고 사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것. 특정 정당이 의회를 독점해 의회직을 장악하고 그들만의 리그가 형성되면서 다수당의 횡포가 극에 달해 올곧은 소수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시의회의 도덕성이 실추되면서 이권에 개입한 일부 의원들이 형사처벌을 받는 등 염불 보다는 오히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았다. 부끄럽게도 청렴도가 계속 하위권에 맴돈 것이 이를 증명했다. 지난해 11대 시의회에 진입한 34명 의원중 1명이 보궐상태로 총33명이다. 이 가운데 민주당이 27명,민평당 3명,정의당 2명,무소속 1명이다. 대부분의 시의원이 시장과 같은 민주당이어서 처음부터 견제와 감시라는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할 것인가에 많은 의문을 가졌다. 바로 역시나였다. 우려했던 사항이 하나씩 불거지면서 또다시 시의회가 제 역할을 못한다는 비난이 나온다. 이경신 복지환경위원장만 빼고는 의장단과 상임위원장 대부분이 김승수 시장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 집행부 입맛에 맞는 거수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특히 의회 안팎에서는 초선들이나 뜻 있는 다선의원들이 시행정의 문제를 샅샅이 지적하고 싶어도 위원장이 의사진행을 방해해 어려움을 겪고 심지어 반대발언을 일삼는 의원은 예결특위추천에서 배제시켜 버린다는 것. 김완주 전시장 때부터 민주당 완산갑 김윤덕 위원장이 김승수 현 시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와 그곳에서 당선된 시의원들이 시장장학생 역할을 도맡아 방패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것. 시의회는 집행부와 교묘하게 악어와 악어새 마냥 공생관계를 구축해 밥값도 못한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시의회가 도덕성과 자질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 시의원이 된 탓이 크다. 그간 핫 이슈로 부각된 전주종합경기장 개발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롯데한테 통째로 금싸라기 땅을 바치는 특혜성 개발계획인데도 시의회는 장학생들 때문에 시민의 반대의견을 대변하지 못했다. 일부 초선이나 다선들이 롯데한테 엄청난 특혜를 안겨준 사업이라고 반대하지만 다수 횡포에 눌려 모기소리로 그쳤다. 시가 의회의 의견을 구한 것을 갖고 행안부한테 야구장 신설을 위해 대체시설 승인을 한 상태여서 앞으로 승인이 나면 개발계획 용역작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그간 도는 시한테 넘겨준 종합경기장 개발안이 양여조건과 다르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지금은 무슨 이유로 찬성으로 돌아섰는지 의아해 한다. 시중에는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이 파다하다. 전주시 개발행정이 잘못 추진돼 이를 바로 잡아야 하는데도 시의회가 짝짜꿍 해서 그걸 못하고 있다.
한국서원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눈앞에 와있다. 지난달 유네스코 자문 심사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이코모스)가 한국의 서원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것을 권고한데 이어 오는 30일 유네스코의 최종 확정을 거치는 절차가 남아 있긴 하지만 이변이 없는 한 등재는 확실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5년 한차례 등재를 추진했으나 원점으로 돌아간 뒤 다시 추진해 얻게 되는 결실이다. 세계유산은 보존해야 할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보편적 가치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언제나 존중되어야 할 가치, 이를테면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 등과 같은 불변하는 가치다. 한국의 서원 역시 이코모스로부터 조선시대 사회 전반에 보편화되었던 성리학의 탁월한 증거이자 성리학의 지역적 전파에 이바지하는 등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보유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한국의 서원이 등재된다는 소식에 중국의 일각에서 문제를 삼는 모양새다. 서원이 당초 중국 고대의 독특한 문화교육기구였었다는 점을 들어 중국으로부터 들여간 한국의 서원이 독립적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마치 자신들의 문화재를 빼앗아간 것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변할 일은 없겠지만 유쾌한 일은 아니어서 우리의 서원이 지닌 보편적 가치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서원의 역사를 들여다보자면 중국과 한국의 상황이 다르다. 서원이 시작된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에 이르러 꽃을 피웠지만 그 이후에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했다. 반면 한국의 서원은 조선시대 역사의 변곡점에서 시대를 이끌었다. 한국 서원의 시작은 1543년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다. 퇴계 이황에 의해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꾼 백운동서원은 조정의 사액을 받는 첫 서원이자 공인된 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이후 한국의 서원은 각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소수서원(영주)과 함께 옥산서원(경주),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안동), 도동서원(달성), 남계서원(함양), 무성서원(정읍), 필암서원(장성), 돈암서원(논산) 등 이번에 등재되는 9개 서원들이다. 한국의 서원이 인정받은 보편적 가치는 성리학의 전파에 기여하면서도 정형성을 보여주는 조선 건축의 정수라는데 있다. 주목되는 것이 있다. 서로 닮았지만 또한 서로 다른 9개 서원의 건축적 가치다. 공간을 늘리고 화려한 하드웨어 치장에 마음을 두기보다 서원마다의 진정한 가치를 창조적 문화유산으로 이끌어가는 지혜가 더 절실해졌다.
요즘 전라북도가 처한 현실을 보면 동네북 신세란 말이 딱 맞다. 정원이 1500명에 불과한 초미니 대학 하나 놓고 이리저리 패대기를 당하고 있는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울화통이 치밀어 오른다. 총선을 앞두고 전북 때리기로 표 결집을 노리는 외부 정치세력에도 화가 나지만 지역 현안을 놓고 번번이 네 탓 공방만 벌이는 전북 정치권의 한심한 작태에 더 분노하게 된다. 지난 2015년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한 국립한국농수산대학은 3년제로 학년당 정원이 550명에 불과한 특수대학이다. LH를 경남 진주로 뺏기고 농진청을 비롯해 농업관련 기관을 받으면서 전북을 농생명융합 중심도시로 조성하려는 취지에서 한국농수산대학도 옮겨왔다. 한국농수산대학이 이제 막 전라북도에 안착하려는 상황에서 느닷없이 지난해 한농대 멀티캠퍼스 추진을 위한 연구용역이 발주됐다. 명분은 중장기 발전방안으로 청년농 육성과 한농대 기능 및 역할 확대를 내세웠지만 지역별 입학생 불균형 문제도 담고 있기에 영남캠퍼스 설립 목적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일었다. 우려는 현실로 드러났다. 올 1월 경남 합천군과 경북 의성군이 한농대 분교 유치를 내걸고 지역 정치권과 연계해 한농대 분할 시도에 나섰다. 현 한농대 총장이 경남 출신이기에 대학 분리는 빈말이 아닐 것이란 추측도 나돌았다. 급기야 지난 12일 경북 영주문경예천이 지역구인 자유한국당 최교일 의원이 영남 분교를 설치하기 위한 한국농수산대학설치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면서 현실화됐다. 전라북도를 얼마나 만만하게 보았기에 이제 갓 이전한 대학까지 나눠 가지려는 발상을 가졌을까. 만약 한농대가 영남에 있었다면 전북에서도 이러한 시도를 할 수 있었을까. 처음 한농대 분할 움직임에 전라북도와 정치권이 강력히 대처하지 못하면서 자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한농대는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기관이다. 농식품부를 관장하는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 전북출신 국회의원이 3명이나 있다. 그럼에도 한농대를 계속 흔들어 대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년 21대 총선이 9개월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전북흔들기는 갈수록 도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부산정치권의 반발과 대응 미흡으로 제3금융중심지 지정이 보류된 전철을 또다시 밟아선 안 된다. 주어진 밥그릇도 못 지킨다면 선출직들은 자리를 꿰찰 이유가 없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은 일본에서도자기 전쟁으로 불린다. 자기 기술이 보잘 것 없었던 일본이 오늘날 도자기 선진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게 전쟁 중 조선 도공을 데려갔기 때문이다. 그 중 일본 3대 도자기로 꼽히는사쓰마 도자기의 원조가 정유재란(1597년) 때 남원에서 끌려간 도공 심당길이었다. 그의 자손은 현재 15대 심수관에 이르기까지 사쓰마 도기를 주도해왔다. 심수관이 국내에 널리 알려진 것은 반세기 안팎이다. 일본의 유명 소설가인 시바 료타로가 1964년에 쓴고향을 잊을 수가 없소이다의 주인공으로 소개된 후 80년대 중반 KBS가 이를 극화하면서심수관가의 400년 비밀이 세상에 드러났다. 사쓰마 도자기가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2대 심수관이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를 통해서다. 당시 출품했던 높이 1m 55㎝의 대화병은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 1902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도 최고상을 받았다. 심수관가의 비밀을 풀며 모국 속으로 깊이 들어온 이는 14대 심수관(본명 심혜길, 심수관은 본명 대신 전대의 이름을 따르는 이 가문의 관습)이다. 그는 특히 전북에 각별한 정을 나타냈다. 1989년 전북도와 자신이 살고 있는 가고시마현간 우호협력이 체결되는 자리에 참석했던 그는 선대로부터 4백년 동안 품어왔던 꿈이 실현된 것 같다는 감회를 밝혔다. 그는 남원도자기 일본 전래 400주년을 맞은 1998년 남원에서 불씨를 가져갔으며, 그 불씨로 구운 첫 도자기를 남원시에 기탁했다. 남원시는 아픈 역사와 함께 이국에서 예술혼을 꽃 피운 심수관가를 기리며 그간 여러 이벤트와 기념사업들을 진행했다. 남원시는 2008년 그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했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15대 심수관에게도 2011년 명예시민증을 줬다. 심수관 도예전시관을 만들고, 여기서 매년 국제도예캠프를 열고 있다.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 고향 남원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부르며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는오나리노래탑이 역사적 아픔의 현장인 만인의총에 세워지기도 했다. 우리가 찾지 않았으나 조선 도예가의 후손임을 당당하게 내세우며 우리 곁으로 왔던 14대 심수관이 지난 16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도예의 종가 남원을 도예도시로 재조명하게 만들었다. 이 땅을 지킨 우리도 제대로 못한 일이다. 남원의 예술혼을 역사 속에서 끌어낸 고인을 잊지 말고 오래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물건의 개수를 나타내는 단위 중에 12개 묶음을 다스라고 한다. 이는 본래 영어 더즌(dozen)의 일본식 발음인데 어떤 연유에서 인지 일상생활 속에서 다스란 단어는 참 익숙하다. 중장년 이상의 연령층은 한 묶음이란 의미로 오랫동안연필 한 다스라고 해왔다. 연필이 샤프펜슬로 대체되고, 요즘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이 주로 쓰이면서 일상에서 다스란 단어가 잊혀져갈 즈음 갑작스럽게 다시 다스(DAS)가 등장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다스의 실소유주가 누구냐는 논란이 제기된 것이다. 다스란 회사가 MB 소유다, 아니다 말들이 무성하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수 의혹이 사실로 확인됐고 요즘 이 사건 재판이 한창 진행중이다.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이 실소유한 자동차 부품업체 다스의 BBK 투자금 반환 소송비 585만 달러(약 67억7000만원)를 삼성이 대신 납부하게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고, 1심 재판부는 61억여 원을 뇌물로 인정하고 징역 15년과 벌금 130억원을 선고했다. 중장년들에게 다스 하면 어린 시절 많은 추억을 안겨준 연필이 우선 떠오르는데 10여 년 전부터는 이게 MB소유 기업이 연상되고, 또 뇌물이란 인식이 강하다. 성공한 기업인이었으나 MB는 대통령 한번 지낸뒤 탐욕의 대명사가 됐다. 어릴때는 옷을 더럽히지 말고, 어른이 돼서는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는 충고를 잊었나 보다. 한동안 잊혀진 듯 했던 다스가 최근 우리 앞에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엊그제 영면한 이희호 여사의 젊은 시절 별명이 바로 다스(das)였기 때문이다. 서울대 사범대 재학시절 이희호에게 따라붙은 별명은 독일어 중성관사 다스였다. 독일어는 남성, 여성, 중성에 따라 어미 변환이 많은데 das는 중성을 가르킬때 쓰는 단어다. 대학생 이희호는 행동만 봐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걸음걸이도 빠르고 행동이 남성적이었다고 한다. 남성 위주의 관습이 사회전반에 강하게 찌든 상황속에서 이희호는 거대한 벽에 맞선 1세대 여성운동가다. 지금부터 꼭 56년전 마포구 동교동엔 김대중과 이희호 문패가 나란히 걸렸다. 부부 문패가 가정집에 나란히 걸린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대 충격이었다. 미국에서 선진 교육을 받은 아내와 깨어있는 남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희호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3김시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이희호 여사가 떠나면서 이젠 3김의 흔적마저도 서서히 지워지고 있다. 동일한 단어다스가 사람에 따라 이렇게 까지 다른 의미로 각인된다는게 놀랍기만 하다.
70년대만해도 전국 7대도시안에 들었던 전주시의 위상이 갈수록 추락해 인구 65만으로 18위에 머물러 있다. 수도권 위성도시들의 급성장으로 이 또한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전주가 산업화에 뒤쳐져 도시발전이 거북이걸음을 했지만 그 이면에는 무능한 정치권과 시장 능력부재가 원인으로 작용했다. 청원과 청주가 통합해서 예산이 전주보다 8305억 많은 2조4892억인데 전주는 인구 30만이 무너진 익산보다 5674억 많은 1조6587억 밖에 안된다. 면적과 인구를 기준해서 국가예산이 지원되기 때문에 전주는 이 두가지를 시정의 최우선목표로 놓고 추진해야 한다. 3차례에 걸쳐 완주군과의 통합이 좌절되면서 전주시는 아직까지 성장동력을 못찾고 있다. 전주를 파리 로마처럼 아시아문화심장터로 발전시키겠다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너무 현실성이 떨어진 전시행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전국 어느 관광지에서나 쉽게 맞볼 수 있는 길거리음식이 한옥마을에 난무해 한옥마을이 정체성 위기에 봉착, 관광객이 발길을 돌린다. 여기에 상가들의 임대료가 비싸지면서 자연히 음식값이 올라가는 악순환이 거듭해 예전처럼 장사가 잘 안되면서 임대상가만 늘었다. 전주한옥마을은 이씨조선의 본향이라서 다른 지역의 한옥마을과 괘가 다르다. 실제 주민들이 한옥마을에 거주하므로 이를 잘 살려 체험형관광지로 더 발전시켰어야 했다. 하지만 시가 특별한 노력없이 관광객이 늘어난 것에 너무 안주한 게 패착이었다. 남부시장을 관광자원화 했지만 대부분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으로 그쳤다. 재선한 김승수 시장은 김완주 송하진시장 때 만든 한옥마을을 보완하고 일부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한 것 말고는 업적이 별로다. 뉴욕의 허드슨강 베슬처럼 한옥마을 말고 덕진공원 소리문화전당 일대를 하나의 벨트로 묶어서 개발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 김 시장은 김완주 전지사가 16년간 시장 지사로 재직할때 대부분을 보좌업무에 매달린 관계로 전문성 부족으로 자기칼라가 부족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고시 출신인 김지사는 도시계획과 개발업무에 전문성이 있었지만 김 시장은 옆에서 보고 배웠기 때문에 경험과 전문성 그리고 식견이 부족해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것. 특히 리더십이 떨어져 직원들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는 지적과 함께 참모들의 전문성 결여가 심각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종합경기장 개발 방향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종합경기장 개발은 시민 대다수가 바라는 사항이어서 시의회를 포함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 개발계획을 만들었어야 옳았다. 무엇이 급해 그렇게 쫓기듯이 개발계획을 만들었는지 의심이 가고 결국 고양이를 그리는 우를 범했다는 것. 특정정치인과 밀착돼서 시정을 운영한 것도 뒷말이 많다. 특정업체와의 수의계약을 높게 체결해 시민혈세를 낭비했다는 지적과 함께 특례시 지정이 마치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양 너무 일방적으로 밀어부치는 배경에 의아한 시민도 있다. 집권 6년차인 김시장은 무작정 도지사가 되려고 인기영합주의에 매몰되지 말고 시민만을 위해야 한다.
손으로 보는 졸업 앨범을 마주한 것은 2015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개관 1주년을 맞아 기획한 함께 36.5 디자인 전에서였다. 전시의 주제는 공존, 공생, 공진. 디자인의 신체적 사회문화적 환경적 공존과 공생 공진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나누고 나와 다른 사람의 상황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전시회는 흥미로웠다. 디자인에 대한 가치와 역할을 돌아보게 했던 다양한 전시 공간 중에서도 특별히 관객들을 오래 머물게 하는 공간이 있었다. 손으로 보는 3D 졸업앨범 프로젝트였다. 전시대 위에 나란히 놓였던 9개의 흉상. 그 옆에 붙은 안내문을 읽고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9개 흉상의 주인공은 서울의 한 맹아학교 졸업생들이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과정 6년 동안 형제자매처럼 지냈지만 앞을 볼 수 없으니 목소리에 의지할 뿐 내 친구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처음에 누군가 3D 프린팅으로 이 아이들의 얼굴을 재현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을 것이다. 제작팀은 아이들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제작하기 위해 여러 장의 사진을 촬영해 3D 프린팅으로 입체형 흉상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안겨질 앨범이 어떤 것일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컸다. 드디어 3D 프린터로 제작된 플라스틱 흉상을 처음 만졌을 때, 눈 코 입. 손가락으로 친구의 얼굴을 더듬어가던 아이들은 탄성을 터뜨리며 놀라움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누구는 코가 예쁘고 누구는 눈이 컸고 또 누구는 이마가 넓고. 함께 가슴 뜨거워졌었다는 전시 관계자가 전해준 이야기다. 3D 프린팅은 프린터로 물체, 다시 말하자면 입체도형을 뽑아내는 기술이다. 이미 의료, 생활용품, 자동차 부품을 비롯해 우리의 일상에서도 활용되는 수많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3D 프린팅의 쓰임새는 아직 진행 중이다. 특히 첨단과학 분야에서의 쓰임이 더욱 빛을 발해 그 확장성이 어디까지 이를지 미지수라는데, 그만큼 각 영역에서 활용되는 쓰임새의 확장성이 놀랍다. 전북 맹아학교 졸업생들도 올해 손으로 보는 3D 졸업 앨범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오랜 교류를 바탕으로 미국 머서대학교 기술팀과 인연이 닿은 덕분이란다. 문득 처음 이 3D 프린팅으로 시각 장애 학생들의 졸업앨범을 제작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해진다. 그 누군가로 인하여 사람 사는 세상이 조금 더 따뜻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지난 11일 군산 새만금컨벤션센터에서 열릴 예정인 서해 EEZ(배타적경제수역) 골재 채취단지 지정 공청회가 어민들의 강력 반발로 무산됐다. 전국 40개 골재 채취업체로 구성된 해양기초자원협동조합이 마련한 이 날 공청회는 군산 어청도 서남방 26㎞ 인근 EEZ 구역을 골재 채취단지로 지정해 5년간 3580만㎥의 바닷모래를 채취하기 위해 어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려는 자리였다. 군산 어청도 인근 EEZ 구역은 지난 2008년 정부에서 국내 모래공급을 위해 골재 채취단지로 지정한 이후 3차례 기간 연장을 거쳐 지난해 12월 채취 기간이 만료됐다. 해양기초자원협동조합은 이에 새로 서해 EEZ 골재 채취단지 재지정을 위한 공청회를 추진했다. 하지만 군산부안고창지역 어민들은 어업인들의 논밭을 파헤치려는 것이라며 결사반대 입장이다. 지난 10년간 어청도 골재 채취단지에서 서울 남산의 1.5배에 달하는 6200만㎥의 바닷모래를 마구잡이로 채취해가면서 수산자원의 서식장과 산란장이 심각하게 훼손된 마당에 또다시 바닷모래를 파가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골재업계에선 태안과 옹진 골재 채취단지에 이어 남해와 서해 EEZ에서 바닷모래 채취가 중단되면서 국내 골재대란과 함께 업계 종사자 1만여 명이 생존위기에 처했다며 정부여당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서해 EEZ에 대한 과학적인 시추 조사를 통해 어민과의 갈등을 최소화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처럼 서해 EEZ의 바닷모래 채취를 놓고 골재업계와 어업계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면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바닷모래 채취 갈등은 지난 2004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부산 신항만 건설 등 국책사업에 필요한 골재공급을 위해 남해와 서해 EEZ에서 바닷모래 채취허가를 내줬다. 그러나 지난 2016년 연근해 어획량이 40년 만에 100만t 이하로 떨어지면서 국내 수산물 감소가 바닷모래 채취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에 정부에선 제한적으로 바닷모래를 채취하도록 했고 이후 모래 채취가 중단된 채 양 측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골재업계와 어업계 모두의 생존권이 걸려 있는 데다 국내 골재 수급과 해양 생태계 보호라는 대의명분도 엇갈려 정부에서도 쉽사리 결론을 못내고 있는 실정이다. 건설경기 부양을 위한 안정적인 골재 수급과 해양 수산자원 보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할 듯싶다.
전고, 그대의 영원한 자랑이듯 그대 또한 전고의 자랑이어라 전주고 교정에 들어서면 눈에 들어오는 이 글귀가 전주고와 동문들의 모교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100년 역사에 4만여 졸업생을 배출한 전주고는 자타가 알아주는 호남 제일의 명문 고교다. 1978년 전주지역 평준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전주고에는 전국의 인재들이 몰렸다. 대통령만 제외하고 고관대작의 자리를 꿰차지 못한 곳이 없을 만큼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많은 인사들을 배출했다. 우리는 동창생이라는 컷을 달고 전북지역 각 고교를 소개한 적이 있다. 다른 고교와 같은 기준을 적용할 경우 1개 면으로 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다른 고교와 마찬가지로 1개 지면을 할애하다 보니 어떤 기준으로 아무개만 소개됐느냐는 항의가 뒤따랐다. 다른 고교에 없는 불만이었다. 그만큼 전주고가 배출한 인물은 넘쳤다. 전북에서 활동하는 주요 인사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근래 많이 평준화되기는 했으나 전북 도단위 기관장은 물론, 전문직군에서 활동하는 인사들의 출신 고교를 따지면 여전히 전주고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각종 선출직에서 동문 대결이 그리 이상스럽지 않은 것도 전주고가 배출한 풍부한 인적자산 때문이리라. 전주고가 배출한 동량들은 분명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학연이 갖는 폐해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좁은 지역사회에서의 학연은 후배 챙겨주기와 편가르기 등의 부작용이 없지 않았다. 전주고에 대한 선망과 질시는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전주고 100년은 이 학교만이 아닌, 전북의 자랑이다. 전주고 총동창회가 올 개교 100주년을 맞아 전북도민들과 함께 하는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펼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모교 재학생뿐 아니라 전북지역 학생들까지 범위를 넓혀 장학금을 지급하고, 전북의 미래를 진단하는 학술대회까지 열었다. 학연의 벽에 갇히지 않고 지역사회 발전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겠다는 전주고 동문들의 각오로 읽힌다. 전북의 자랑인 전주고가 지역사회와 더불어 더욱 발전하길 바란다.
최근 도내 호텔을 대표해왔던 르윈호텔이 리모델링 공사에 착수하면서 가동이 중단됐다. 기한을 알 수 없으나 최소 1년 넘게 걸릴 것으로 보인다. 도내 상공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창승 회장이 맡아왔던 르윈호텔은 당초 매수 계약자가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340억원대에 한 업자에게 최종 매각됐다고 한다. 완주 구이 출신인 이창승 회장은 건설과 금융 등으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1991년 제4대 도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황색돌풍에 밀려 실패했고, 1995년 초대 민선 전주시장에 당선됐으나 법률위반 등으로 이듬해 낙마했다. 시장직을 잃고 절치부심한 그는 2008년 제18대 총선에 출마하는 등 정치적 재기를 모색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기업인으로서 끝까지 지키려했던게 바로 호텔이었다. 하지만 호텔업도 이제 그의 손을 떠나게 된 모양이다. 한때 성공한 기업인이었던 그가 정치적으로 가장 우뚝 섰던것은 바로 1995년 첫 동시 지방선거였다. 바로 전주시장이었다. 호텔업자였던 그가 전주시장에 당선됐을때 코아호텔은 시장을 만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했다. 역대 전주시장의 면면을 보면 사실 그 자리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민선의 경우 초대 이창승 시장부터 시작해 양상렬, 김완주, 송하진, 김승수 현 시장으로 이어졌다. 이창승양상렬씨는 짧게 재임했으나 김완주송하진 전 시장은 나란히 재선가도를 달린후 민선도백에 당선됐다. 송하진 현 지사의 3선 도전 여부가 호사가들의 입줄에 오르는 가운데 벌써부터 김승수 현 시장도 특례시지정을 발판삼아 차기 도백에 출사표를 던질 것이란 전망이 나돈다. 실행 여부를 떠나 전주시장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정치적경제적 흡인력을 감안하면 전주시는 전북의 절반이 훨씬 넘는다. 사실 관선때도 전주시장의 위상은 대단했다. 전주시장을 지내면 최소한 부지사 정도까지는 진출했고, 잘하면 그 이상이었다.육종진이상칠송하철씨 등은 전주시장을 지낸뒤 부지사까지 역임했고, 최용복강상원씨 등은 관선 지사까지 지냈다. 전병우씨는 전주시장,부지사에 이어 국회 내무위원장까지 역임했다. 전주시장의 위상이 이처럼 높았다는 것은 전주시의 상징성이 컸다는 건데 솔직히 요즘 전주의 영향력은 예전만 못하다. 인구나 정치경제적 파이를 키우지 못한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10년, 20년 뒤 전주시장의 위상은 과연 어떻게 될까.
재선의 김승수 전주시장이 가장 잘못하는 것은 전주종합경기장 개발사업이다. 자신이 천명했던 공약과도 동떨어진 개발계획을 내 놓고서 시민들의 여론은 무시한채 마이동풍식으로 무작정 절차이행을 강행하기 때문이다. 김 시장이 발표한 개발계획은 전주시민을 위한 개발계획이 아니라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롯데라는 특정재벌한테 금싸리기 땅을 헌납한 것이나 다를바 없어 철회되어야 한다. 시민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김 시장의 어처구니 없는 행태가 이어지고 있는데도 시장을 감시해야 할 시의회는 견제는 커녕 자기의 목소리를 내지 않아 초록은 동색이라는 비난을 함께 받고 있다. 일부 뜻있는 의원들이 시장의 개발계획이 잘못 되었다고 문제제기를 하지만 상임위원장급 시장 장학생들이 나서서 방해공작을 펴 초선들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있다. 시의회 안팎에서는 김시장이 의회를 무시하고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종합경기장 개발 계획을 밀어 부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장학생들이 감싸줘서 가능했다는 말들이 무성하다. 전주가 현재 용머리 고갯길로 호남선을 내지 못한 전철을 밟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고 답답하다. 전주 유림들의 반대로 호남선이 용머리고갯길로 나지 않아 전주 발전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분명한 것은 전주종합경기장을 어떤 형태로든 개발해야 한다. 개발의 원칙은 이미 정해져 있다. 땅 주인인 도가 전주시한테 전주종합경기장을 넘겨주면서 조건을 달았기 때문에 그 조건에 맞게끔 개발하면 문제될 게 없다. 김 시장이 내놓은 개발계획은 전문성도 없고 생각머리 없이 그냥 내놓은 것이어서 폐기처분해야 한다. 땅 안팔고 50년 백년 임대로 해준다는 것은 눈가리고 아옹하는 것이나 똑같다. 전주 중심부의 금싸라기 땅 종합경기장은 미래지향적으로 개발돼야 한다. 이미 시민 70% 가까이가 여론상 개발해야 한다고 찬성해 그 시기를 무작정 늦춰선 안된다. 그간 도청이전을 잘못해 전주발전을 가로 막은 것처럼 다시금 그같은 누를 범치 않아야 하기 때문에 공론화 과정을 거쳐서 종합경기장 개발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지난 83년 전주역 외곽이전으로 그 자리에 세웠던 현 시청이 건축 당시부터 너무 비좁게 지어져 많은 문제가 생겼다. 인접 건물을 임대해서 사무실로 사용해 시민의 혈세가 낭비되고 심지어 주차장이 적어 민원인들이 차댈곳이 없어 불법주정차로 과태료를 물어왔다. 앞으로 지을 시청사는 전주 완주통합을 겨냥한 통합청사이어야 하기 때문에 종합경기장이 위치로도 적지다. 그래야 공익을 충분하게 반영할 수 있다. 지금부터는 침묵하는 양심세력들이 전주종합경기장 개발계획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면서 다시 세우라고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틀린 것을 바르게 지적하고 나설 때 전주가 발전할 수 있다. 김 시장도 시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사용하는 만큼 무작정 소신이라고해서 조자룡 헌칼쓰듯 하면 안된다. 시의회도 이번 기회에 시민의 편에 서서 감시와 견제역할을 다해 환골탈태하길 바란다.
척독(尺牘)은 편지의 한 종류지만 그중에서도 짧은 편지를 일컫는다. 고대 중국에서 시작된 척독은 30cm 정도의 크지 않은 나무 토막위에 쓴 편지를 일컬었으나 후에는 종이 편지도 척독으로 분류됐다. 편지 형식의 짧은 글에 진심을 담은 척독은 형식도 자유로워 가까운 사이에 주고받았던 사적인 편지가 대부분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척독이 꽃을 피운 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다. 적지 않은 문집을 통해 당대의 척독이 전하지만 손으로 쓰는 편지 대신 휴대전화 문자나 이메일이 자리 잡은 지금 척독은 아무래도 낯설다. 전주국립박물관이 기획한 선비문화 특별전에서 척독을 만났다. 수백 년을 건너 전시실에 놓인 짧은 편지의 주인들은 척독문화의 유행을 이끌었던 조선 후기 선비들이다. 박물관의 자료를 보니 척독을 이끈 이 역시 조선 시대 문인인 허균이다. 그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게 <고척독>을 받고 자신의 문집에 처음으로 척독을 실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척독은 격식을 중시한 옛 문장의 틀을 벗고 개인적인 내면을 섬세하게 담아내는 형식으로 발전했다. 선비들이 그만큼 척독을 일상에서 즐겼다는 증거다. 전주박물관 전시에서는 특히 조선후기의 대표적 문인 이덕무와 박지원의 척독이 눈길을 끈다. 일상을 소재로 자신이 느낀 감정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몇몇 척독을 들여다보니 거기 함축된 메시지의 울림이 크다. 지인들에게 건네는 편지는 대체로 정깊은 안부 인사를 담고 있지만 선비로서 지켜야할 삶의 가치와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간결하고 짧은 문체로 발전해간 척독은 사적인 편지글이지만 누군가와의 소통하려는 바람이 담겨 있는 통로였다. 그렇고 보니 척독은 오늘날의 SNS 와도 같은 것 아니었을까 싶다. 길지 않은 문장에 담아낸 사적인 생각. 주고받으며 교류하는 형식이 오늘날의 SNS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다시 들여다보니 기능이나 역할만 비슷할 뿐 그 차이가 크다. 척독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품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의지의 출구여서인지 문장 하나까지도 헐겁게 쓰지 않았다. 상대방을 향한 애정과 존경이 넘쳐나니 이런 글이 바로 진정한 교류의 방식이다 싶다. 오늘날의 SNS도 개인의 품격을 드러내는 말의 성찬이 이어진다. 눈여겨 다시 읽게 되는 좋은 글들도 있으나 화를 불러일으키는 온갖 글들이 쏟아지는 요즈음, 말과 글이 가져오는 폐해가 심상치 않다. 척독의 품격을 다시 불러낼 방법은 없을까. /김은정 선임기자
지난 3일 오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머르기트 다리에서 울려 퍼진 헝거리인들의 아리랑 선율이 허블레아니호 침몰사고 유족과 우리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날 헝가리 아마추어 합창단 치크세르더(Csikszereda) 소속 합창단원과 헝가리 시민 400여 명이 허블레아니호 참사를 추모하며 합창한 경기아리랑은 우리 국민들에게는 슬픔과 애틋함을 더했다. 전통 민요인 아리랑은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비공식 국가(國歌)나 다름없다. 아리랑만큼 한민족의 한(恨)과 정서가 잘 표현된 곡이 없기 때문이다. 강원도의 정선아리랑, 호남의 진도아리랑, 경상도의 밀양아리랑 등 이른바 3대 아리랑이 있지만 이날 헝가리인들이 부른 경기아리랑은 우리 정서에 가장 잘 맞는 세마치장단이어서 국민의 노래로 자리 잡았다. 조선 말기나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경기아리랑은 1926년 춘사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불리면서 전국으로 퍼졌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경기아리랑의 노랫말은 일제 침탈에 따른 민족적 슬픔과 울분을 잘 대변했다. 또한 사랑과 이별, 여인들의 애환 등 민초들의 희로애락이 가사에 녹아 있다. 따라서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전승되는 우리 민요 60여 종, 3600여 곡 가운데 경기아리랑이 대표곡으로 불리고 있다. 이날 다뉴브강의 다리 위에서 나직하게 울려 퍼진 헝가리인들의 아리랑 플래시몹은 그래서 우리에게 더 특별하게 전해졌다. 행사를 기획한 치크세르더의 음악감독 아르파드 토트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그는 8년 전부터 대구 계명대에서 초빙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그의 아버지도 헝가리에 있는 한인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행사는 페이스북 헝가리안-코리안 그룹 페이지를 통해 부다페스트 시민들에게 알려지면서 추모행사 장소인 머르기트 다리를 가득 메웠다. 인도뿐만 아니라 차도까지 차지한 참석자들은 유튜브를 통해 미리 노래를 연습하거나 아니면 즉석에서 인쇄된 악보를 보고 아리랑을 합창하면서 애도의 뜻을 표했다. 허블레아니호 참사에 대한 책임감으로 아리랑 플래시몹 추모행사를 연 헝가리 시민들을 통해 한국과 헝가리, 양국의 공조체제가 강화되어서 실종자 찾기와 사고 수습이 조속히 이루어졌으면 한다. /권순택 논설위원
새만금은 전북에 계륵 같은 존재였다. 선거 때마다 새만금 개발을 놓고 온갖 감언이 쏟아졌으나 역대 어떤 정부도 전북의 허기를 채운 적이 없다. 새만금 때문에 다른 대형 프로젝트들이 외면받기 일쑤였다. 오죽하면 새만금을 그만 우려먹자는 자조적인 한탄이 나왔을까. 그럼에도 선거 때면 다시 새만금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새만금을 놓을 수 있었겠는가. 긴 세월 새만금 타령에도 새만금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농업용지, 산업용지, 관광용지 등으로 개발하는 것이 그저 뜬구름이었다. 그나마 미래 청사진을 떠올리도록 한 것이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 때 공약으로 내건동북아의 두바이였다. 새만금 방조제가 완성되기 전 벤치마킹 대상은 기존 세계 최장 방조제자의 네덜란드 주다찌였으나 새만금과 여건이 달라 개발 모델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새만금의 모델로 거론된 두바이에 대해서는 보수와 진보 진영 상관없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두바이에서 열린 경제인 간담회에서 한강의 기적보다도 더 놀라운 기적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걸음 나아가 인수위 국가경쟁력강화특위 공동위원장에 두바이국제금융센터 회장을 임명하기도 했다. 세계 최고층 건물(높이 828m, 162층)의 부르즈 칼리파 등 이색적인 고층건물이 즐비하고, 축구장 5개보다 큰 세계 최대의두바이몰쇼핑센터, 100개가 넘는 5성급 이상 호텔 등을 보면서다. 엊그제 새만금 수변도시 조성사업이 예타를 통과했다. 야미도신시도 일원 국제협력용지 내 6.6㎢(200만 평) 부지에 거주인구 2만명 규모의 주거와 업무, 관광레저가 가능한자족형 스마트 수변도시를 조성하는 사업이다. 주거시설과 함께 공공 클러스터 및 국제업무지구복합리조트 등도 들어선다. 수변도시는 새만금의 미래를 보여줄 핵심 사업이다. 수변도시 조성에 국가 투자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먼 미래의 꿈으로 여겨졌던 새만금 도시가 성큼 눈앞에 다가선 것이다. 그러나 새만금 도시가 어떻게 그려질 지는 아직도 백지 상태다. 흔히 두바이 신화를 창조적 비전과 과감한 투자, 강력한 추진력에서 찾는다. 새만금에 두바이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어도 그 기백은 본받을 필요가 있다. /김원용 선임기자
며칠전 참 낯선 풍경 하나가 전국적인 뉴스가 됐다. 송철호 울산시장이 지난달 29일 한국조선해양 울산 존치 시민 총궐기 대회에서 삭발식을 한 것이다. 울산시는 한국조선해양 울산 존치를 강력히 촉구한다며 현대중공업 법인분할(물적분할)에 따라 생기는 중간지주회사 한국조선해양 울산 존치를 촉구했다. 울산 현대중공업 종업원 수는 호황기 때 협력업체 포함 6만7000여 명을 자랑했으나 현재는 구조조정으로 3만2000여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 여파로 2015년 120만 명에 가깝던 울산 인구는 현재 115만2000여 명으로 줄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마디로 현대중공업이 곧 울산이라며 배수진을 친 것이다. 송철호 울산시장이 과연 누구던가. 1980년대 부산울산 지역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인권노동 변호사 3인방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집권여당 소속 자치단체장이 얼마든지 청와대나 관련 부처와 협의할 수 있었음에도 상당한 부담을 떠안으면서 이렇게까지 강수를 둔 것은 정치적 제스처 이기는 하지만 어쨋든 지역민의 고충을 덜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한달여 전에 송철호 시장은 전국 종합 건설사 260곳에 매우 이례적인 편지를 보낸 바 있다. 울산에서 공사를 하고 있거나 예정된 공사에 지역 근로자와 지역에서 만든 자재장비를 쓰고 하도급 공사에도 지역 기업을 많이 참여시켜 달라는 호소문이었다. 보여주기식 삭발 쇼 한번 하고 건설업체들에게 호소문 좀 보낸게 무슨 대수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울산은 소득수준이 전북의 두배가 넘는 곳이다. 2017년 기준 전북 도민의 연간 GNI(지역내 총소득)이 2455만원이나 울산은 5033만원이나 된다. 원래 가난한 집은 더 어려워져도 큰 불편이 없는데 잘사는 집은 어려워졌을때 더 고통스럽다는 얘기다. 문득 IMF때 서점가를 강타했던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란 책이 떠오른다. 전세계적으로 4000만 부 가까이 팔린 밀리언셀러다. 교육은 많이 받았지만 가난했던 친아버지와 정규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부자가 된 친구 아버지의 대조적인 사고방식을 자세하게 풀어낸 도서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우리사회에서는 경제에 대해 묘한 잣대가 있다. 속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지만, 겉으로는 돈을 경멸하는 이중적 태도 말이다. 지역 정치인이나 행정 책임자들이 가난한 아빠를 지향한다면 우리에겐 영원히 반 지하방에서 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영화 기생충의 송강호네 처럼 말이다. 이젠 부자 전북이 될지, 가난한 전북이 될지 결단하고 행동해야 할 시점이다. /위병기 문화사업국장겸 논설위원
지난 13대 대통령 선거 이후 치러진 각종 선거가 지역주의로 점철됐다. 인물이나 정책 공약대결은 오간데 없고 오직 누구 편이고 어느쪽으로 줄 섰느냐에 따라 당락이 갈렸다. 1991년 지방자치가 부활되면서도 어김없이 황색깃발만 달면 당선은 떼논 당상이었다. 1995년 실시된 자치단체장 선거도 판박이였다. 경쟁의 정치는 실종됐고 지역에 기반을 둔 특정정당 공천이 당선으로 이어지는 선거구도라서 공천받는데만 혈안이었다. 사실상 선거는 요식행위였다. 공천권자 한테 환심사기에 급급했다. 선거때마다 유권자들은 현역을 바꾸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지역정서에 함몰된 탓에 설령 이같은 의지가 있더라도 실제로는 불가능했다. 지난 19대 총선 때 민주통합당은 매너리즘에 빠진 지역정치권에 새피를 대거 수혈한다는 공천 방침에 따라 도내에서 도의원 2명을 포함 9명을 당선시켰다. 하지만 정치가 의욕만 갖고 되는가. 그 당시 정치경험이 일천한 초자들이 민주통합당 공천을 받아 쉽게 당선 되었지만 경험부족과 인맥구축이 제대로 안돼 의정활동을 제대로 못했다. 특히 전주 출신 초선 3명이 패기차게 의정활동을 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아니다로 끝났다. 도민들은 존재감 없이 KTX나 타고 전주에서 여의도나 오가는 이들을 낙선시켜야 한다고 여론을 키워 나갔다. 19대 11명의 의원 중 민주통합당으로 배지를 달고 나간 9명의 의원들이 낙제점 이하의 의정활동을 해 지역분위기가 급속도로 물갈이로 바뀌었다. 그 당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안철수를 중심으로 한 국민의당이 적극적으로 정치개혁을 표방하고 나서면서 녹색돌풍을 일으켜 20대 총선 때 전북에서 10석 중 7석을 싹쓸이했다. 진보적인 색채가 강하고 정치개혁을 자임하고 나섰기 때문에 도민들은 민주통합당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국민의당한테 몰표를 안겼다. 그 당시 여권 대통령 후보를 지냈던 정동영후보가 냉온탕을 오가며 낙선해 기진맥진해 있던 때에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며 재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국민의당에서 민주평화당으로 당명을 바꿔 당대표를 맡고 있는 정의원의 지금 정치적 위상과 역할은 어떠한가. 당지지도가 너무 낮아 존재감이 없다. 바른미래당 다음으로 제4당에 있지만 민주당과 자유한국당과의 긴장관계에 있는 현 대치정국에서 캐스팅보트 역할도 못하고 있다. 도내서는 안방을 차지해 송하진 도정을 거침없이 비판하지만 민평당이 여당인지 야당인지 그 정체성을 의심할 정도로 선명성이 떨어졌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민평당은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와 GM군산공장 폐쇄로 전북경제가 절단났는데도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강력하게 투쟁하지 않아 실질적인 지원책을 얻어내지 못했다. 제3금융중심지 지정 보류가 잘못됐다고 밀어부쳐도 정부 여당은 꿈쩍도 안한다. 민평당은 전주 상산고 재지정 문제나 지역 핫이슈인 대한방직 부지 활용문제에 가타부타 말이 없다. 출마때 당선만 시켜주면 하늘에 있는 별이라도 따다 줄 것처럼 자신만만했던 그들, 지금 뭘하는가. /백성일 부사장 주필
전주국제영화제가 오랫동안 지켜온 프로그램이 있다.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전주영화제 간판 프로그램으로 불리는 디지털 삼인삼색이다. 돌이켜보면 20년 전, 디지털이 21세기 영화의 혁명을 주도해나갈 것이라고 예견되었던 시절이라 하더라도 첫 걸음을 내딛는 영화제가 디지털을 중심에 세운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디지털 삼인삼색은 기대 이상으로 영화제의 성장을 도왔다. 독립과 대안은 디지털을 만나 가치와 의미를 더했으며 영화제의 정체성은 더 견고해졌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디지털 삼인삼색은 갓 태어난 전주영화제의 존재를 해외에 알린 보석 과도 같았다. 해마다 디지털 삼신삼색에 초청된 국내외 감독들은 실험적 작업의 새로운 영화로 관객들을 만났다. 그들 사이에 봉준호 감독도 있었다. 2004년 전주영화제는 홍콩의 유릭와이, 일본의 이시이 소고와 함께 그를 초대했다. 자신만의 방법과 색깔로 디지털의 미학을 보여줄 감독들이었다. 작품성과 예술성을 돋보인 그해 삼인삼색 작품은 화면에서부터 밀려오는 감독들의 독립적 개성으로 호평을 받았다. 제23회 벤쿠버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되었으며 일본 제작사이자 배급사인 업링크는 작품 판권을 사들였다. 규모는 작았지만 판권수출은 영화제의 국제적 브랜드 이미지를 높일 뿐만 아니라 작품성으로 차별화된 전주영화제의 가능성을 여는 시작이었다. 사실 전주영화제와 봉감독은 인연이 깊다. 그의 첫 장편영화 <플란다스의 개>(2000)가 상영됐고 디지털 삼인삼색(2004년)과, 국제경쟁 부문 심사위원(2008)으로 전주영화제를 찾았다. 2005년의 폐막작은 그가 각색을 맡았던 <남극일기>였다. 봉준호 감독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 소식을 접하며 그때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잘 만들겠다는 욕망보다는 못 찍으면 어떻게 하나란 불안감을 배터리 삼아 영화를 만든다. 상업성이나 작품성은 감독이 의도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지극히 결과론적인 것이다. 창작자로서 무엇을 계산하기 보다는 직관적이며 즉흥적으로, 사소하더라도 꼭 찍고 싶은 장면이 있으면 그것을 향해 돌진하는 편이다. 그를 스타 감독으로 이끈 <살인의 추억>부터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그리고 칸의 황금종려상을 끌어낸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영화가 지닌 미덕은 빛난다. 계산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실현해내려는 순정한 정신이 가져온 결실일터다. 그의 수상이 더 반갑다.
규제 풀어야 현대차 새만금투자 성공한다
오래된 다정함, 남문사잇길
‘뭉쳐야 산다’ 5극 3특 시대, 통합을 움직이는 힘은 결단과 책임이다.
‘공직자 줄서기’ 악습, 이번엔 뿌리 뽑아야
아리랑에 담긴 한민족의 고유정서
'전주스러움'에 대해 - 정명희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와 골목경제
새 주인 맞는 군산조선소, 신조선박 보고 싶다
고래가 싸우는 세계, 한국의 길
인생은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