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 김현식의 '역사, 위험한 거울'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녀는 아름답고 총명했다.' 흐릿한 새벽별을 보며 D는 러브스토리의 첫 구절을 떠올렸다. 얼마나 상큼한 축약인가. 아무리 늘여도 결국 부족한 말. 아무리 길게 써도 결국 모자란 글. … 사랑 ? 얼마나 익숙한 말인가. 하지만 무얼 알까. … 이 구절을 떠올릴 때면, 수백의 나열로도 못내 부족한 A의 이미지가 - 그가 사랑하는 자의 모든 것이 - 강 안개처럼 피어올라 그를 적시기 때문이다."퀴즈 하나. 위의 글처럼 시작하는 책의 성격은 ? 아마 대부분 소설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아니다. 이 책은 소설은 아니다. 그러나 소설도 들어있다. 그리고 전문 역사서이다.먼저 저자에 대해. 나는 이미 이 분의 저서를 2006년에 읽은 적이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역사란 무엇인가」(휴머니스트)가 그것이다. 역사 전공자가 아니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 H. 카아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역사이론이었다. 그때 나는 이제 한국에도 이런 정도 수준의 역사학자가 나오는구나 하며 흥분해서 여기저기 소개하는 글을 올렸더랬다. 이번에 소개하는 책이 5년 먼저 나온 셈이다.이 책은 소설의 구성을 취한다. 실제로 1부에는 A와 D의 사랑 이야기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흔히 사랑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절대를 바라는 D와, 그 절대의 부조리를 자각하기 시작한 A 사이의 균열이 도입부이다. 쉽게 예견되듯이(?) A가 여자이고, D가 남자이다. 나이는? 남자가 훨씬 많다. 아, 이 낯 뜨겁고 가벼운 남성성!여기서 저자는 중세 11세기의 두 연인, 엘리오즈와 아벨라르라는 기억을 끄집어낸다. 줄리엣의 나이보다 많기는 하지만 아직 16세에 불과했던 엘리오즈와 이미 명성과 업적을 쌓은 학자였던 아벨라르의 비극적 사랑. 그리고 그 기억을 '텍스트로서의 인간 삶의 무한한 해석 가능성'의 본보기로 삼는다. 즉, 엘리오즈와 아벨라르의 사랑에서, 전혀 상반된 아벨라르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마치 자칫 독자를 우롱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위험한 글쓰기'를 통해, 역사가 얼마나 '위험한 거울'인지 보여준다. 그 사이에 역사가 바로 그 경계를 시험하는 '위험한 학문'이라고 정의한다.단숨에 읽었던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아쉬움이 있다. 우선 마분지에 거무튀튀한 표지와 형편없는 종이. 9년 전의 책이지만, 당시 한국 출판수준이 이렇게 낮지는 않았다. 뭔가 미학적 고려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눈에 띄지 않았다면 지금도 서점 구석에 처박혀있을 지도 모른다.두 번째 아쉬움은, 역사해석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온 뒤, A에 대한 D의 사랑의 결말에 있다. 뭔가가 어설픈 느낌이다. 역시 소설가는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나 역시 소설평론가가 아니니 일단 덮어두자.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이 책이 지금 '절판'이라는 사실. 그럼에도 소개하는 이유 ? 좋은 책은 독자가 출판한다는, 출판하게 한다는 나의 신념 때문이다. 나의 소개글을 읽고 뭔가 느낌이 오는 분들은 출판사인 푸른역사나 한양대학교 사학과 김현식교수 연구실로 전화를 하면 된다. 다시 안 찍을 거냐고. 학생들과 협동하여 내가 이렇게 되살린 책이 여럿 된다./오항녕(한국고전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