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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정전 70년] 전쟁 후 남은 사람들의 비극, ‘빨치산’

이념으로 갈라선 시대의 아픔…민족의 비극은 계속되었다. ‘빨치산’은 한국전쟁의 부산물이자 분단된 남북 민족분열의 비극을 표출하는 상징이다. 빨치산은 프랑스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했으며 노동자나 농민 등 비정규 군인들로 무장된 유격대를 뜻한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계열과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전국의 산지에서 조직된 유격대를 일컫는다. 특히 호남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으로 되돌아 가지 못한 인민군들이 지리산의 험준한 사악지형을 이용해 끝까지 저항했고 한국군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1년 1월부터 4월까지 전남에서 한국군의 게릴라 대규모 토벌작전(3기)에 사살된 빨치산은 6921명에 달하고 603명이 생포됐다. 지리산에서 빨치산을 진압하다가 목숨을 잃은 군인, 경찰, 민간인은 7287명에 달한다. ◇ 한국전쟁은 끝났지만 귀순하지 못한 빨치산=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호남 지역에 남아있던 북한군은 퇴각하지 못한 채 지리산 인근에 입산해 빨치산이 됐다. 북한군이 후퇴하자 호남·영남·충청 지역에 있던 인민군 및 당 요원들은 퇴로가 차단된 채 남한에 남겨진 이들이었다. 빨치산은 남한의 공산주의자와 북한군 패잔병, 유격대원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후방에서 교란작전을 펼쳤다. 패잔병들은 중앙당으로부터 ‘인민군이 다시 남하할 때를 대비해 후방에서 유격활동을 벌이라’는 지시를 받고 군·경의 눈을 피해 지리산 등 산악지대에서 끝까지 저항을 한 것이다. 특히 관공서를 습격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1950년 10월 이후 군경합동작전이 전개됐고 백야전 전투사령부가 창설돼 빨치산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병력 이외에도 경찰병력도 많이 동원됐다. 1950년 12월 16일에는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했다. 이들은 빨치산 진압작전을 위해 지리산 중심의 주요 고지를 포위·수색하고 근거지를 공격했다. 군경의 주요 시설을 경계·방어하면서 첩보활동을 펼쳤다. 군경은 빨치산 진압과 더불어 귀순 유도를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군인과 경찰은 지리산 인근에 ‘삐라’(전단지)를 대량으로 배포해 빨치산의 귀순 유도를 했지만 빨치산들은 귀순보다는 저항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빨치산은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와 그 산하 6개 지구대를 창설해 끝까지 저항했다. 6개 지구는 무등산 광주지구, 담양 추월산 가마골 노령지구, 구례·광양 백운지구, 화순 모후산 지구, 장흥 유치지구, 영광·함평 불갑산 지구 등이었다. ◇ 빨치산의 근거지, 화순 백아산 전투=빨치산 세가 가장 강했던 곳은 전남도당 본부가 있던 화순 일대로, 이곳에서는 1950년 10월부터 1952년 4월까지 1년 6개월동안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은 인민군 점령기에 광주에 설치됐던 당 본부를 화순군 백아산 기슭에 있는 북면 용곡리 용촌마을로 옮겼다.  백아산은 해발 810m로 산비탈이 가파른데다 고지가 여러 곳이라 한 곳을 점령당해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쉽고, 화순 모후산, 곡성 통명산 등으로 이동하기에도 용이했다.  또한 화순은 화순 탄광 노동자들로 조직된 좌익 세력이 강했으며, 1946년 화순 탄광 노동자 봉기 이후 미 군정의 검거를 피해 많은 좌익 인사들이 산으로 숨어들어 빨치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빨치산은 지리산 곳곳에 거점을 두고 군·경 보급로 차단, 식량 약탈, 경찰서·지서 습격, 통신망 절단, 무기약탈 등을 일삼았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50년 10월부터 국군 11사단을 내려보내 이른바 ‘백아산 소탕전’을 벌였다.  이 때 국군은 ‘성벽을 굳게 하고, 들에 있는 것을 말끔히 치운다’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폈다. 백아산 주변의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소개(疏開·폭격 등에 대비해 대피시키는 것)하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로 인해 화순군 이서면 21개 마을, 북면 24개 마을, 담양군 남면 대덕면 5개 마을 등 모두 50개 마을이 소각됐다.  4월이 되자 11사단을 대신해 8사단이 호남으로 내려왔고, 예하 부대와 전투 경찰대, 청년 방위대 병력을 지휘하여 백아산 지구, 장흥군 유치면 구사봉 지구에서 준동하는 잔류 세력 소탕 작전에 나섰다.  전투가 길어지자 1951년 11월에서 1952년 2월 사이에는 미군 폭격기를 동원해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네이팜탄(소이탄)을 투하해 백아산 일대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빨치산은 폭격기 1대를 추락시킬 정도로 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많은 병력을 잃고 약화됐다.  백아산 일대에는 1953년 7월에 휴전이 성립된 이후에도 잔존 빨치산의 활동이 이어졌으나, 1954년 2~3월 백야전 사령부의 토벌 작전으로 부대장·위원장 등 남은 지휘관마저 대거 잃은 끝에 1955년 3월 섬멸된다. ◇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빨치산과 교전이 치열했던 화순에서는 민간인 피해도 많았다.  낮에는 국군이 마을을 불태우거나 주민들을 ‘빨치산에게 부역했다’며 살해하고, 밤에는 빨치산에게 우익 인사의 가족이라거나 ‘협조하지 않는다’는 등 이유로 살해당했다. 당시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 정도였다.  이와 관련한 진실 규명은 지난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출범한 뒤에야 윤곽이 드러났다.  제1기 진화위 조사에 따르면 1950년 8월부터 1952년 4월까지 화순군 9개 읍·면에서 빨치산에 의해 111명이 희생된 사실이 확인됐다. 진화위는 화순에서 추가로 31명의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자행됐다. 제1기 진화위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3월까지 화순·담양·장성·영광·함평 등지에서 291명의 주민이 국군 제11사단 20연대 1·2·3대대, 9연대 2대대에 의해 ‘빨치산’ 혹은 ‘부역자’라는 혐의로 사살되거나 연행된 후 행방불명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희생자 수는 화순이 사살 56명, 행방불명 5명으로 가장 많았다.  특히 진화위는 ‘견벽청야’ 작전을 수행하던 중 빨치산에게 협력했다고 의심되는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해 작전 상의 위험을 제거하고 빨치산 토벌의 전과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구사해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됐다고 분석했다.  최근 화순 백아산에서는 6·25 전사자 유해 발굴도 이어지고 있다.  육군 제31보병사단은 지난 3~4월 화순군 백아산 일대 2000㎡에서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실시했다.  앞서 31사단은 지난해 4월 화순군 백아산 일대 총 3600㎡에서 유해 발굴 작전을 벌인 끝에 6·25 전사자 유해 한 구와 탄피 등 군용품을 발굴했다.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소장 인터뷰 “이념 관계없이 빨치산 학술적 연구 필요…국가차원 피해자 진상규명 이뤄져야”  “늦게 오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하지요. 아직까지 한국전쟁 당시 피해자들의 5%밖에 밝혀지지 않았어요. 국군, 빨치산을 막론하고 국가 차원에서 피해자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합니다.”  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소장은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과 군·경의 충돌이 격했던 당시 피해에 대한 조사를 서둘러야 한다고 밝혔다. 박 소장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지리산 빨치산 등을 연구해 온 역사연구가다.  박 소장은 빨치산은 결국 남·북의 정치적인 이득에 따라 파생된 단체라고 설명했다. 1948년 이승만과 한민당 등이 남한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노선을 추진하자 이에 반발해 제주4·3사건이 발생했고, 이것이 10·19 여순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빨치산 활동까지 연결된다는 것이다.  박 소장은 특히 호남 지역에서 국군과 빨치산의 전투로 인한 피해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지정학적으로 호남은 평야 지대라 농경지가 많고, 그만큼 소작농이 많아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공산당의 주장에 동조할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국군으로부터 가족이 살해당한 피해자, 빨치산의 요구에 못 이겨 입산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피해자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빨치산의 구체적인 전투과정과 피해 상황 등을 밝힐 연구는 유독 미진했다고 설명했다. 사회에 만연한 ‘레드 트라우마’ 때문에 공산당과 관련된 역사적 연구를 하려는 사람도 없고, 그와 관련된 논문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증언을 해 줄 피해자들은 마을 이웃들이 이유 없이 죽어가는 장면을 목도해 트라우마가 심하다는 점, 가족이 모조리 죽임을 당한 탓에 당시 상황을 설명할 이가 남아있지 않은 점 등을 꼽았다.  그 날의 진상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 못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특히 ‘견벽청야’ 작전에 휘말려 하루아침에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고립된 삶을 산 탓에 피해 사실을 알릴 방법을 알 방도가 더욱 없다고 밝혔다.  박 소장에 따르면 당시 민간인 학살의 주축은 아이러니하게도 ‘국군’이었다. 대략 국군이 20명을 살해하면 빨치산에 의해서는 1명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국군이 수적으로 압도적일뿐 아니라 작전지역 일대 마을을 모조리 불태우는 작전을 썼고, 좌익 부역자 색출 등을 명분으로 적법한 절차 없이 비무장·무저항 상태의 민간인을 집단살해했다는 진술이 잇따르고 있기도 하다.  박 소장은 “빨치산과의 전투는 그 자체로 이념으로 갈라선 시대의 아픔을 오롯이 보여주는 아픔이다”며 “대한민국에서 빨치산을 연구한다고 하면 좋지 않은 시선을 받게 마련이지만, 이념에 관계없이 까칠한 역사를 정리하려는 학술적 시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광주일보=유연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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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11 15:35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 스마트폰이 이 교육을 망친 주범?

이제 스마트폰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요즘은 인공지능 기업인 오픈에이아이(OpenAI)에서 개발한 대화형 언어 모델 쳇Gpt 까지 추가되어 획기적이다. 최근에는 구글 바드, 뤼튼 등이 나와 검색은 물론 대화로 각종 정보를 얻고, 문서를 스캔하여 편집하고, 논문 작성까지 가능하다. 이처럼 스마트폰은 일상생활에 많은 편의를 제공하지만, 역기능도 존재한다. 전문가들은 문제점으로 사생활 침해와 보안 문제를 꼽는다. 위치기반서비스(LBS)는 주위에 있는 건물과 개인의 위치까지 파악할 수 있어 법적 문제까지 대두된다. 또한 스마트폰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노안이 빨리 올 수 있다고 안과 전문의들은 경고한다. ‘스마트폰 사용 중독 현상도 전 세대에 걸쳐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걱정하기도 한다. 이런 스마트폰이 ‘교육과 교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데, 교육현장의 목소리는 어떨까. 전북지역 한 초등학교 A교장은 “스마트폰은 청소년들의 정보 접근성, 창의적 문제 해결, 사회적 연결 등을 촉진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임은 틀림없지만, 부적절하거나 과도한 사용은 학습 저하, 사회적 스킬 약화, 유해 콘텐츠 노출 등의 교육적 정서적으로 나쁜 영향을 끼친다. 또한 여러 문제를 스마트폰으로 쉽게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어,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장학관 B씨는 “스마트폰 사용 정도는 학업성취도와 연관이 깊어, 많이 사용할수록 성적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집중적인 스마트폰 사용은 부정적인 행동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교육계 원로 C씨는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 운동부족이 될 수도 있고, 성인용 동영상을 보는 것은 정서적으로도 좋지 않다”고 한다. 안과 전문의들은 “스마트폰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노안이 빨리 올 수 있다.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경고와 함께 조언을 했다. 스마트폰 중독은 일상생활, 학업, 사회적 관계 등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과도한 사용은 생활의 질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명절이나 행사에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대화는 없고 각자 자신의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어떤 연인들은 커피숍에 마주 앉아서도 타인과 문자를 주고받거나 동영상을 보며 혼자서 키득대기도 한다. 이쯤 되면 가족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다. 또한 버스나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나 도서관처럼 정숙해야 하는 장소에서도 벨 소리가 울려 옆 사람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고 큰소리로 통화를 하는 사람도 있다. 운전 중에 전화를 주고받다가 교통사고를 내는 경우도 있다. 지난 7월 18일 서울 서이초등학교 여교사가 교내 교·보재 준비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은 충격적이다.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가 학부모의 괴롭힘이었다는 것이다. 보도에 의하면 “고인의 학급 학생이 연필로 뒷자리에 앉은 학생의 이마를 긋는 사건이 있었다. 그 일로 학부모가 고인의 휴대전화로 수십 통의 전화를 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결국 스마트폰이 여교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은 수업 중에도 동영상을 보거나, 선생님의 발언이나 행동을 촬영해 SNS에 올리고, 여교사 치마 속을 찍어 친구들과 공유하는 등의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성희롱이 되어 선생님과 학생 간의 신뢰와 존중감을 상실시킨다. 전주시 덕진동의 한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인 D교사는 “스마트폰이 교육과 교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는 학부모들의 의식 개선과 학생들의 스마트폰 관리가 필요하다. 학부모들은 담임교사나 학교 측에 항의성 전화나 불만 요소를 말할 때는 심사숙고해야 한다. 비대면이라고 해서 마구잡이식 전화는 삼가하는 것이 기본 예의다. 다른 초등학교 교사 E씨는 “학부모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문자나 카톡을 보낸다. 악성 민원을 견딜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업무용 휴대폰을 따로 사용한다”고 했다. 덧붙여 “교사가 학생들의 스마트폰 관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방법은 등교하면 학생들의 스마트폰을 일정한 장소에 보관했다가 하교 시에 돌려주는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이렇게 하면 등교 중에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므로, 교육 활동에 집중할 수 있고,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F교사는 “요즘 교육부에서 교사들에게 휴대폰 압수권을 주겠다고 하는데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압수권까지는 아니더라도 휴대폰 보관권만이라도 줘야 한다”고 한마디 거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육부가 지난 8월 17일 2학기부터 학교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에 대해 교사가 휴대전화를 압수하거나 교실 밖으로 내보내는 등의 조처를 할 수 있게 하고 교사는 퇴근 후나 직무 범위를 벗어난 내용의 학부모 상담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고시안을 발표했다. 스마트폰은 문명의 기기임이 틀림없지만, 결국 스마트폰이 교육을 망치고 교권을 추락시킨 주범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스마트폰의 순기능을 인정하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그때 아이들의 장래는 밝고,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망친 교육은 회복이 되고 추락한 교권을 제자리에 설 수 있다. 정성수 시인, 향촌문학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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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06 15:21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⑬ 포크 사진을 통해 전라감영 선화당 기물을 복원하다.

△포크 사진에 나타난 전라감영 선화당 내부 기물들 포크가 찍은 현존 2장의 전라감영 선화당 내부 사진을 통해 관련 기물 복원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행되였다. 첫 번째 전라감사가 찍힌 사진을 통해서는 지난 기고(2023.8.22.)에서 설명한 전라감영 선화당 용호병풍과 감사가 앉은 의자복원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전주 기생의 북춤’ 사진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정보가 나타났다. 사진에 나타난 내용들은 왼쪽 위에서부터 보면 ①선화당 주련문 ② 창틀 ③실내 목재 칸막이 ④중간 기둥 현판 ⑤ 삼지창형태 기물[둑纛]과 기치대 ⑥왼쪽 기둥 하단 종이싸개(주근도지) ⑦바닥 돗자리(지의) ⑧ 중앙의 큰 북 ⑨ 바닥 오른쪽 안식 등이 확인되었다. 한편 포크의 조사기록에는 전라감영 선화당 내부에 대해 사진찍듯이 묘사한 설명이 있는 데 사진 내용과 거의 비슷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선화당]은 찬란한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길이가 50피트[15m]나 되는 중심 구간은 전면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고, 깔끔하게 돗자리[지의]가 깔려 있으며, 천장 나무들은 밝은 색상의 미세한 패턴으로 화려하게 장식[단청]되어 있다. 중앙에는 뒷벽에 기대어 두 개의 커다란 병풍이 나란히 서 있었고, 오른쪽은 훌륭한 용, 왼쪽은 사납게 날뛰는 큰 호랑이를, 둘 다 아주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그렸다. 그 앞에는 붉은색으로 칠해진 중국양식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앞에는 더 두꺼운 방석과 감사가 몸을 기대는 자세로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좌대 받침[안식]이 놓여 있었다. 천장에는 가로 세로 4피트 크기의 커다란 네모난 종이 등이 걸려 있었다. 한 쪽 구석에는 삼지창같은 무기와 장대[둑纛]들이 있는 기치대가 있었다.”포크 기록에는 선화당 건물 외양이 기본적으로 기둥에는 붉은 칠이 칠해져 있고 처마 아래 창방과 평방 및 공포에는 화려한 단청이 그려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향후 선화당 등 건물단청의 기본 정보로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사진의 바닥 돗자리[지의]와 좌대와 안식, 삼지창[둑기]과 기치대 등이 언급되었고 사진에 보이지 않는 ‘천장의 가로 세로 4피트(120cm) 크기의 커다란 네모난 종이등’이 언급되었다. △조선 국왕이 전라감사에게 군사권을 위임한 상징, 둑기(纛旗) 복원 필자는 전라감영복원재창조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앞서 병풍복원과 함께 기물 고증을 진행하여 조선왕실 기물 전문가인 장경희교수(한서대)에게 연구를 부탁해 관련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진행된 가장 주목되는 복원품이 사진 ⑤인 ‘둑기’였다. ‘둑’은 감사를 상징하는 기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소꼬리나 꿩의 깃털로 장식한 큰 깃발인 ‘독(纛둑 독)’을 ‘둑’이라고 읽는다. 이는 고대 중국에서 장례에 사용되던 깃발[纛]에서 기원하여 한 대(漢代)에는 군사용 기로 사용되었다. 특히, 왕이 지방 군사령관인 관찰사에게 군대 통솔권을 위임해준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긴 장대에 장식을 달아 깃발을 만든 것이다. ‘둑’은 고려시대이래 군통수권자를 상징하여 군영에 둑을 설치하고 둑 주변에서 군령을 집행하거나, 군대의 출병에 앞서 둑제사를 거행하여 군대를 통솔하는 상징으로서 활용했다. 이 전통이 조선에도 계승되었는 데 이와 관련하여 서울의 ‘뚝섬’ 명칭이 바로 이곳이 태조이래 왕이 직접 군대를 사열하거나 출병할 때 이곳에 둑기(纛旗)를 세우고 둑제(纛祭)를 지냈기 때문에 둑섬에서 뚝섬이 된 유래에서 잘 알 수 있다. 이같은 둑기가 전라감영 선화당 사진에서 확인되어 각 지방 군통수권자인 관찰사에게 이같은 둑기가 하사되었고 이를 집무실인 선화당에 비치하였음을 알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즉, 둑제(纛祭)를 지낼 때 사용하는 병기로서의 둑이고, 또 하나는 종묘나 문묘에서 무무(武舞)를 출 때 악기로서 사용하는 둑이다. 그리고 조선 전기에 병기에 해당되는 둑은 나무로 창처럼 생긴 자루를 만들고, 창 아래쪽에 말꼬리털로 만든 상모를 둥글게 꽂은 형태이다. 조선후기 의궤를 비롯한 문헌에 그려진 둑은 자루 끝의 창의 형태가 단창에서 삼지창의 형태로 변화되는 것이 특징이었다. 따라서 전라감영 선화당에서 발견된 둑은 이 같은 조선 전 후기 양식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전기, 후기 기물이 함께 비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 둑을 복원하는 데 있어 다행히 삼지창 형태의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둑 유물을 참고하고 단창은 <악학궤범> 그림을 참고하여 복원하였다. 그리고 창날 밑에 술이 내려져 있는 데 붉은색 홍둑과 검은색 흑둑 2종류로 나뉘어져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악학궤범> 등 자료에 나타난 색이 모두 홍둑으로 되어 있어 일단 홍독(紅纛)으로 재현하였다. 그런데 최근 AI기술로 흑백사진의 음영값 등을 고려해 원래 컬러 색을 복원해주는 프로그램을 통해 ‘전주 기생들의 북춤사진’을 복원해 보았다. 그런데 이를 통해 2020년 필자가 진행한 색 복원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복원된 사진에서 오른 쪽 둑기 색이 삼지창 ‘홍독(紅纛)’과 단창 ‘흑독(黑纛)’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향후 붉은 색 ‘단창 홍둑’을 검은 색 ‘흑둑’으로 수정해야 한다. 또 포크가 언급한 전라감사 및 기생들의 옷 색도 상당히 유사하게 나타나 향후 AI컬러 복원을 통해 사진속 인물들의 복장 재현에 참고할 수 있게 되었다. △선화당 주련문의 복원 한편, ‘북춤사진’에서는 기둥마다 ‘주련문’ 들이 보이고 있다. 주련(柱聯)은 시구나 문장을 종이·판자에 새겨 기둥에 걸어 두는 것으로 건물의 격을 높이는 장식물이다. 경계와 교훈, 건물 자체의 정체성 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전라감영 선화당의 주련문은 전라도 최고 통치공간 선화당의 위격을 높여주는 가장 중요한 문화자원이다. 그런데 그동안 선화당 주련문의 실체는 알 수 없었고 단지 ‘북춤사진’에 나타난 일부 흔적으로 그 내용을 추정할 뿐이었다. 그런데 2020년 10월 전주역사박물관(당시 관장 이동희)에서 조선말 채경묵이 엮은 <풍패집록>에서 ‘선화당 주련’이 소개되었고 최근 국역 출간(이동희 등,<국역 풍패집록>2023)되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즉, 사진 속 정중앙의 글귀가 “염경장주춘의(艶景長住春意): 아름다운 경치는 봄기운 오래 머물게 하네”라고 하여 전주 천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것으로 보이는 글귀가 이번에 찾은 <풍패집록> 주련문과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향후 전라감영 선화당 내부의 주근도지, 지의, 사각 한지 등, 안식 등의 기물과 주련문 등을 복원하는 추가 작업이 요청된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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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05 19:45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20)백제 계승의 상징, 후백제의 불상과 석탑

892년 무진주에서 자립한 견훤은 900년 전주로 천도한다. 그에 앞서 견훤은 ‘백제가 나라를 금마산에서 창건하여 600여 년이 되었는데,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되었으니 내가 도읍을 전주에 정해 의자왕의 오랜 울분을 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일갈한다. 견훤이 전주로 천도를 단행한 배경은 완산주 민중들의 호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견훤이 의자왕의 울분을 풀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망국(亡國) 백제에 대한 귀소의식(歸巢意識)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무진주에서 자립하였으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였던 견훤은 비로소 완산주의 주민들에 의해 각성했다고 할 수 있겠다. 백제 계승을 공언한 것이다. 국호도 ‘백제’로 정한다. 그런 만큼, 백제를 연상시키는 상징물을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완주 봉림사지(鳳林寺址) 삼존불과 익산 왕궁리(王宮里) 오층석탑이다. 완주 봉림사지 보살상. △후백제 교통로에 만든 백제 계승 상징물, 완주 봉림사지 삼존불 완주 봉림사지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있었던 발굴조사로 다수의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나말여초 즉 후백제 때부터 조선에 이르는 기와·청자·분청사기·토기 조각이 수습되었다. 이곳에는 삼존불, 오층석탑, 석등 등이 있었는데, 봉림사지 석탑과 석등은 일제강점기에 군산의 시마타니[島谷] 농장으로 옮겨졌고, 석조삼존불은 1960년대에 전북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 가운데,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은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추고 있는 본존불과 좌·우협시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본존불은 전체적으로 아담하지만, 균형이 잘 잡혀있어 통일신라 후기 석불의 영향이 강하다. 안동지역 특정 불상의 형식도 보인다. 그것보다 주목되는 것은 광배(光背)다. 광배는 9세기 통일신라 불상 광배와 같은 형태와 구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백제 불상인 익산 연동리(蓮洞里) 석불좌상 광배의 화불(化佛)과 유사한 고식(古式)의 화불을 조각하였다. 본존불 좌우에 있는 보살상도 9세기 후반 불상의 특징을 보이면서도 백제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출토 금동보살입상과 같은 6세기 후반 보살상의 천의와 같은 X자 천의를 걸치고 있다. 이로써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에 백제 불상을 연상시키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완주 봉림사지는 전주의 북동쪽인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에서 대둔산 쪽으로 2.4km 정도에 떨어진 완주 지역경제순환센터(구 삼기초등학교) 뒤편 인봉산 남쪽 줄기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이곳 앞으로는 전주에서 대둔산을 거쳐 금산으로 가는 국도가 있다. 이 길은 후백제 때에도 중요한 교통로였다. 특히, 이 길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에서 백제를 침공할 때 활용되었던 추풍령로(秋風嶺路)와 연결되어, 견훤의 출생지인 문경(聞慶)까지 연결된다. 즉 왕도 전주에서 후백제의 주요 전장인 경북 북부지역으로 가는 북방로(北方路)의 중요 거점에 조성된 사찰이 바로 봉림사였다. 그곳에 백제 불상의 특정 요소를 연상시키는 삼존불은 900년 전주로 천도할 때 견훤이 밝힌 백제 계승의 상징물이었을 것이다. △백제 계승 완수의 기념물,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900년 전주로 수도를 옮긴 견훤은 첫 번째 군사 행동으로 901년 대야성을 공격한다. 대야성은 7세기 전반 백제와 신라 사이에 여러 차례 공방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군은 드디어 642년에 대야성을 함락한다. 그런데, 당시의 대야성 성주는 후에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金春秋)의 사위 김품석(金品釋)이었다. 그때 김춘추의 사위와 딸은 자결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김춘추는 당나라와 동맹을 추진한다. 즉,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략은 642년 사건에 대한 보복 전쟁 성격이 짙다. 백제사에서 642년의 대야성은 백제 멸망의 시발점이었다. 이를 알고 있던 견훤은 의자왕의 원한을 풀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대야성을 지목하고, 천도 직후 최초의 군사 행동으로 그곳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901년 공략은 물론 916년의 제2차 공격도 실패한다.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920년 견훤은 대야성을 함락한다. 비로소 이때 의자왕은 원한을 풀 수 있게 된 것이다. 「갈양사(葛陽寺) 혜거국사비(惠居國師碑)」에 따르면, 920년 후백제가 대야성을 차지한 직후 922년 후백제는 ‘미륵사 개탑’을 거행한다. ‘미륵사 개탑’과 같은 국가적 의식을 견훤이 백제의 개국지로 지목한 금마산에서 국가적 의식을 거행했던 것은 후백제가 백제의 계승을 완수했음을 공식화하는 자리였다. 920년 대야성 함락과 뒤이은 922년의 미륵사 개탑으로 의자왕의 원한을 풀겠다는 900년의 약속을 지킨 견훤은 익산을 중심으로 백제의 부활을 알리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펼친다. 후백제 정권은 미륵사와 제석사 등 백제 때 만들어진 절들을 보수하는 한편, 백제의 왕궁터에 백제 석탑을 연상시키는 탑, 즉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을 세웠다. 왕궁리 석탑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지만, 백제 때 만들어졌다고 할 정도로 백제 석탑과 외형이 비슷하다. 그도 그럴 것이 얇고 넓으며 처마가 만나는 곳이 살짝 들려 있는 지붕돌은 영락없이 대표적인 백제 석탑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단부의 구성과 결구 수법이 9세기 후반 문경과 상주 일대 단층 기단 석탑과 같아 백제 때의 석탑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 9세기 말~10세기 초에 제작된 금동불이 기단에 봉안되었다는 점은 이 석탑이 후백제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후백제는 백제 때의 석탑 기술을 복원하지는 못하였지만, 백제의 옛 왕궁터에 백제 석탑을 연상시키는 특징들이 최대한 드러난 왕궁리 오층석탑을 세움으로써, 자신이 백제의 진정한 계승자이자 이제 백제가 부활했음을 대내외에 공표하고자 했을 것이다. /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고려 석탑과 불상에 영향을 끼친 후백제 불교미술 936년 백제 계승자로서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하였던 후백제의 꿈은 일장춘몽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흔히 ‘백제계’로 일컬어지는 백제 복고양식(復古樣式) 석탑은 물론 석불이 조성되었다. 백제 석불의 영향이 강한 고려 석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태안 마애불, 정읍 보화리 석불입상 등 백제 때 불상을 연상시키는 남원 지당리 석불입상이다. 백제 석탑과 외형이 비슷한 것들을 꼽자면, 익산과 가까운 군산 죽산리의 삼층석탑과 김제 귀신사 삼층석탑,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 공주 계룡산 청량사지(靑凉寺址) 오층석탑 등이 있다. 이러한 석탑은 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에 비해 부재(部材)의 수가 많고 탑신에 비해 낮은 단층 기단이라는 공통점을 보인다. 이뿐만 아니라 귀기둥[隅柱]과 탱주(撑柱)에 목조건축물의 전형적인 형식인 ‘민흘림 수법’과 ‘안 쏠림 현상’이 적용된 점이나 옥개석은 넓고 얇으며 4장 혹은 8장으로 구성된 점 또한 같다. 앞서 열거한 대표적인 백제 복고양식 석탑이 세워진 곳은 백제의 불교문화가 꽃 피웠던 수도, 지방 거점도시, 지방사원이 있던 곳이다. 부여, 공주, 익산은 백제의 왕도였다. 은선리 삼층석탑은 백제의 중방(中方)이었던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과 인접한 곳에 있다. 성북리 오층석탑 인근에서는 백제의 기와 가마터와 절터[개복사지(開福寺址)]가 확인된 바 있다.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끝낸 고려는 불교로 사회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그런 만큼 많은 불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불사는 호장(戶長)을 중심으로 한 지역민들이 그 불사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들의 성향이나 역사적 경험과 인식이 석탑과 불상 등 불교미술품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었다. 고려시대 옛 백제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왜 백제 석탑을 연상시키는 석탑을 만들고 만들었을까. 백제 멸망 이후 신라에 예속된 백제의 옛터에 살던 사람들은 스스로 백제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백제 멸망 후 신라에 대한 반감으로 비칠 우려가 있는 백제를 연상시키는 불상이나 석탑을 조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차츰 백제에 대한 연고 의식이 사그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백제 계승을 내세우며 등장한 후백제는 그들에게 백제에 대한 귀소의식을 다시금 샘솟게 했을 것이다. 그들은 고려가 들어선 이후에도 후백제가 그러했듯 백제 석탑을 모델로 지극정성 탑을 쌓고 또 쌓았을 것이다. /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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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05 15:26

[뉴스와 인물] 개원 10주년 맞은 안형순 국립무형유산원장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은 무형유산의 전당인 국립무형유산원이 올해 개원 10주년을 맞았다. 무형유산은 세대를 이어가며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전주시에 위치한 국립무형유산원은 인류의 무형유산을 체계적으로 보호하고 후손들에게 온전히 전승하기 위해 설립된 세계 최초의 무형유산 복합행정기관이다. 어느덧 무더운 여름이 가고 절기상 처서가 지났다. 이제 국립무형유산원의 정원을 거닐면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듯이 해마다 계절의 옷을 갈아입은 국립무형유산원의 안형순(59) 원장을 만나 그동안의 성과와 향후 계획 등을 들어봤다. -국립무형유산원의 건물이 굉장히 웅장해 보입니다. 기념비를 보니 10년 전에 완공됐네요. “국립무형유산원은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을 계기로 2013년에 설립됐습니다. 무형유산의 체험 및 교육, 이수자 심사, 무형유산 아카이브 등 많은 사업과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 주민들을 위해 개방한 책마루 도서관과 전시관, 공연장 등이 조성돼 있으며 인문학 강좌들도 해마다 개최하고 있습니다. 무형유산 디지털체험관은 어린이뿐 아니라 일반 성인도 만족도가 높습니다. 2026년 9월에는 국립무형유산원 밀양 분원을 개원하고 2028년에는 전주에 어린이무형유산전당을 설립할 것입니다.” -국립무형유산원이 10년 동안 이뤄낸 성과를 듣고 싶습니다. “무형유산의 전승체계를 확립할 수 있도록 조사, 연구, 기록 등을 해왔으며 국민 누구나 쉽게 무형유산을 향유할 수 있도록 고품질의 공연, 전시, 교육, 행사 등을 운영해 국민의 일상이 되는 무형유산이 되도록 해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 무형유산의 가치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 문화강국의 자긍심을 높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형유산의 외연 확대뿐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무형유산의 전형을 지켜나가는 것도 중요한 만큼 우리 무형유산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다른 나라들과의 갈등 사이에서 이를 조정하기 위한 세계무형문화유산포럼, 국외 무형유산 기관 및 재외동포 교류협력 사업, 해외에서 진행되는 K-무형유산 페스티벌 등 우리 무형유산의 다양한 홍보 및 교류를 해왔습니다.” -개원 10주년을 맞아 국립무형유산원에서 다양한 행사를 마련했습니다. “1일부터 기존 무형유산대전과 국제무형유산영상축제를 통합한 ‘2023 무형유산축전’을 새롭게 선보이고 있습니다. 개막식은 국립무형유산원이 있기까지 많은 공헌을 해주신 유공자분들께 문화재청장 표창을 수여하고 무형유산 전승에 공헌한 240여 명의 보유자·단체에게 대통령 명의의 증서를 직접 전달하고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아울러 초청공연과 미디어 파사드, 영화를 상영하고 개막공연으로 지역민과 즐길 수 있도록 야외무대에서 전통연희 판놀음도 진행했습니다. ‘한국전통줄다리기 한마당 축제’와 유네스코 보호협약 20주년을 기념하는 ‘세계무형문화유산포럼’도 개최했습니다.” -요즘 대세인 K-컬처와 더불어 K-무형유산을 알리기 위해 국립무형유산원이 준비하는 것이 있나요. “한국문화는 K-POP, K-드라마를 비롯해 한국어, 한복, 한식 등 세계인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국립무형유산원에서는 한국의 전통성 및 전통문화의 가치를 공연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리고 무형문화재 전승자에게 한류 확산에 동참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K-무형유산 페스티벌’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독일의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26일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공연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무형유산을 지속적으로 전승 발전시킬 수 있도록 향후 풀어야할 과제는 무엇입니까. “무형유산은 외부 환경의 변화와 대중의 관심에 큰 영향을 받다 보니 현재와 미래세대에 온전하게 전승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어렵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생활여건의 변화로 대중성과 사회적 수요 부족에 따라 전승에 어려움을 겪는 종목은 전승 취약 종목으로 선정해 온전한 전승활동이 이뤄지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 무형유산 중 바디장, 배첩장, 전통장, 줄타기 등과 같이 몇몇 종목들은 전승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보호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20세기 무형유산은 보존가치가 큰 무형유산을 지정하고 보존하는 것이었다면 21세기는 우리의 무형유산이 현대인의 생활 속에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생명력을 갖고 다음 세대에 전승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문화재청에서 대변인 등으로 근무하셨는데 원장으로 임기를 수행하시면서 전주 생활에 대한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코로나19가 끝나는 시점에 임기를 시작해 무척 걱정이 많았습니다. 비대면 활동이 많아지면서 현장을 바탕으로 하는 조사, 전시, 교육, 공연 등이 위축돼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올해 코로나19 위기 단계가 조정됨에 따라 개원 10주년 행사를 지역민과 보내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립무형유산원은 올해 내부적으로 많은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해입니다. 원장으로서 어깨가 무겁고 고민이 많습니다. 지역에서 많은 분들이 응원도 아끼지 않는 것을 보니 혼자가 아니라 느끼고 직원들과 무형유산 발전에 더욱 이바지하겠습니다.” -국립무형유산원이 전주에 터전을 잡고 있지만 지역에서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은데요. “아쉬운 점이 그것입니다. 국립무형유산원이 전주에 있는지 모르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좀 더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민과 함께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올해 버스 승강장 광고도 하고 지역 거점 관광안내소에 리플릿도 비치했습니다. 주민들이 방문할 수 있도록 다양한 홍보 방법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지역민이 제일 많이 찾아주실 때에는 공연이나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서입니다. 4월부터 민속놀이를 체험할 수 있는 무형유산 민속 놀이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10월에는 시설 관람 투어도 계획 중입니다.” -끝으로 전북도민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무형유산은 우리의 의식주임과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제일 많이 지켜지고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전북도민들이 무형유산을 사랑하고 국립무형유산원에 많은 애정을 가져주시고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 부탁드립니다. 앞으로도 10년 동안의 성과를 발판 삼아 살아있는 문화재인 무형유산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국민 여러분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안형순 원장은 전남 장흥 출신으로 광주 진흥고와 전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안 원장은 1993년 문화재청 7급 공채로 시작해 2022년 국립무형유산원 원장으로 일반직 고위공무원에 올랐다. 주요 경력으로는 문화재청 대변인과 근대문화재과장, 정책총괄과장, 운영지원과장, 문화재보존국장 등을 차례로 역임한 문화유산 행정전문가다. 문화재청 기획조정관을 지내다 원장에 취임한 이후 평소 겸손하고 소탈한 인품으로 직원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으며 지방자치단체 및 유관기관과의 상생과 협력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 기획
  • 김영호
  • 2023.09.03 17:29

[지난 주 '핫클릭' : 8. 27~9. 1] 전주감나무골 재개발 착공 '눈앞'

△8월 27일~ 9월 1일 8월 마지막 주, 전북일보 홈페이지 방문자들은 이종호 기자의 '전주감나무골 시공비 인상 갈등 매듭...본격착공위한 마지막 관문 통과'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 기사는 전주 서신동 감나무골 주택 재개발 관련 조합과 시공사가 공사비를 3.3㎡ 당 579만 5000원으로 합의하면서, 본격적인 착공을 위한 관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공사비 협상이 마무리됨에 따라 오는 11월 착공에 이어 내년 1월 조합원 세대를 제외한 1300여 세대를 일반분양할 예정이다. 두 번째는 이준서 기자의 '탕후루에 거리 내어준 전주 한옥마을'이다. 이 기사는 최근 전주 한옥마을 내에 '탕후루' 등 외국음식을 판매하는 점포가 우후죽순 늘어나면서 '가장 한국적인 도시' 이미지에 타격을 주고있다는 점을 짚었다. 세 번째로 관심을 끈 기사는 백세종 기자의 '[KCC, 연고지 부산 이전] 전주시 "깊은 유감⋯시민과 팬들께 사과"'다. 프로농구 KCC가 연고지를 전주에서 부산으로 변경 신청하고, KBL이 지난 30일 이를 승인하자 전주시가 곧바로 입장문을 발표했다. 요지는 "어처구니없는 처사". 이밖에 송승욱 기자의 ''익산 디스코팡팡 신규 오픈?’ 학부모 우려 증폭', 이환규 기자의 '전북 유일 하늘길 군산~제주 노선 빠르면 내달 9일 재개', '폐우체통 손질하고 그림 그렸더니⋯전국 명소 됐다', 김태경 기자의 '전주 대한방직 옛 부지 개발 시작되나' 등이 주목을 받았다.

  • 기획
  • 이용수
  • 2023.09.02 13:44

독자권익위원회 85차 정기회의 제안, 이렇게 반영했습니다

지난 6월 28일 열린 제11기 전북일보 독자권익위원회 제85차 정기회의에서 독자위원님들은 새만금 SOC 등 지역경제 관련 이슈에 대한 보도를 주문했습니다. 전북일보는 독자권익위원회의 다양한 제언을 반영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역경제 관련 이슈 보도 전북일보는 새만금의 이차전지 특화단지 지정을 계기로 새만금의 기반시설 부족에 대해 점검했습니다. 이차전지 특화단지 지정으로 새만금에 총 9조원에 달하는 이차전지 기업 투자가 전망되지만 기업 유치 뒷면에 숨은 기반시설 부족이 언제나 새만금 활성화에 발목을 잡는 요소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전북일보는 ‘새만금 이차전지 특화단지, 기반시설 구축 과제’를 통해 3회에 걸쳐 새만금에서 이차전지 산업을 미래 신성장산업으로 이끌고 가기 위한 전력문제, 임대용지 부족, 신항만 기반시설 재정사업 전환 등의 문제점에 대해 짚었습니다.(7월 24일 1면, 25일∙26일 각 2면) 최근 몇 년새 쌀값 하락으로 곡창지대 ‘농도’ 전북의 지역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도내 농가에서는 정부가 쌀 수급 안정대안으로 내세운 ‘가루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루쌀’이 쌀 수급과 가격 안정의 돌파구가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이에 전북일보는 ‘가루쌀, 쌀값 추락 돌파구 될까’라는 주제로 도내 일반쌀 재배현황과 가루쌀 시대의 기대와 과제 등을 3회에 걸쳐 모색했습니다.(7월 3일∙4일자 각 2면, 5일자 6면) △시의성 이슈 심층보도 전북일보는 시의성 있는 핫 이슈를 선정해 심층보도하고 있습니다. 8월 첫주와 둘째주에 새만금과 전국에서 분산되어 열린 잼버리는 숱한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여야는 ‘잼버리 책임론'을 두고 시시비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번 잼버리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을 살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야 했습니다. 전북일보는 잼버리 기간동안 객관적 시각으로 새만금 잼버리를 바라보며 문제점을 보도했으며, ‘잼버리 결산’을 통해 잼버리 유치 전후 과정부터 대회 진행 과정, 향후 후폭풍 순으로 3회에 걸쳐 핵심 쟁점을 살펴보고 대회 파행의 원인과 진위를 파악해 보도했습니다.(8월 14일자 1면, 16일∙17일자 각 2면) 특히 잼버리 대회 파행으로 그 불똥이 새만금 국제공항 사업으로 번졌습니다. 이는 새만금 국제공항 사업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관점입니다. 이에 전북일보는 ‘새만금 국제공항 착공 가로막는 논리의 허구성’을 주제로 2회에 걸쳐 새만금 국제공항 사업을 재조명했습니다.(8월 21일자 1면, 22일자 2면) 코로나19 이후 서민의 교통수단인 시외버스가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갈수록 인건비와 유류비는 오르는데, 승객은 줄어드는 상황입니다. 업체의 경영난은 고질병이 됐고 운송수입만으로는 운행에 필요한 기본적인 비용조차 충당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도민의 발' 인 대중교통과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업계 경영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이 절실한 실정입니다. 이에 전북일보는 ‘도민의 발, 위기의 시외버스’라는 주제로 도내 시외버스 구간 중 승객이 적은 노선을 직접 타보며 기사와 승객들의 목소리, 시외버스업계의 경영 현황, 제언 등을 3회 보도했습니다.(7월 21일∙24일∙25일자 각 4면) 전북일보는 도내 시․군지역의 핫 이슈에도 관심을 갖고 심층보도하고 있습니다. 무주읍내는 정리되지 못한 도로환경과 주차난 해소를 위한 개선책 마련을 촉구하는 주민 목소리가 큽니다. 무주군 등의 적극적인 관심과 조치가 절실한 실정입니다. 또한 일부 주민의 배려심 없는 운전 습관을 비롯한 미성숙한 운전자 의식구조를 깨뜨려 도로교통 질서를 확립하자는 주민 자성의 의견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에 전북일보는 ‘무주읍 도로교통 환경 이대로 괜찮나’를 2회에 걸쳐 무주읍내 교통체계 등의 문제점과 대안 등에 대해 짚어봤습니다.(7월 10일∙11일자 각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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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23.08.30 18:29

완주 관광이 시작되는 곳, 삼례

완주군 삼례읍은 철도와 도로가 나기 전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해남과 통영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이 만나는 곳이 바로 삼례였다. 호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국가 통신기관인 역참이 자리했고, 만경강 상류에 자리해 곡식도 풍부했다. '호남은 삼례로 통한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풍요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표적이 됐다. 일제는 삼례에 역을 짓고, 양곡창고를 세웠다. 양곡창고는 농민들에게 빼앗은 쌀들로 빼곡했다. 일제의 수탈과 전라선 복선화로 삼례역도 옮겨가면서 삼례읍은 점차 옛 명성을 잃어갔다. 그러나 최근 삼례가 꿈틀거리고 있다. 문화와 예술로 조금씩 세상에 얼굴을 내밀던 삼례읍은 최근 ITX 정차와 테마형 관광열차 유치까지 더해지며 완주 관광의 시작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완주의 관광은 삼례로 통한다 9월 1일부터 삼례역에 ITX-새마을호가 1일 2회(상행 1, 하행 1) 정차된다. 여수~익산을 운행하는 ITX-새마을호는 왕복 2회 운영 중으로 그동안 삼례역에는 정차하지 않았다. ITX 정차는 KTX 정차를 이끌기 위한 첫걸음이다. 유희태 군수는 취임직후부터 삼례읍이 교통거점 역할을 수행해 완주 관광이 시작점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 왔다. 유 군수가 삼례읍이 교통거점지역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우석대 후문을 중심으로 주차장을 조성해 추진한 것이 ITX 삼례역 정차를 이끈 원동력이 됐다. 현재 완주군은 1000대의 주차가 가능한 공간을 확보했다. 코레일에서도 KTX 정차를 위해서는 주차장 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차장은 철도 이용객의 편의 제공을 위한 필수요건이기도 하지만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동안 군은 삼례역 KTX 정차를 위해 KTX가 정차하는 김제시를 방문하고, 한국철도공사 전북본부에 KTX 정차를 재차 건의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또한, 유 군수는 전북을 방문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에게 삼례역 KTX, SRT 정차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군은 에코레일, 국악와인열차, 농뚜레일, 임시관광열차 등 테마형 관광열차를 유치해 삼례역 정차를 지속적으로 건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전거로 만경강길을 즐기는 에코레일의 삼례역 정차를 확정짓기도 했다. 특히, 운곡지구와 삼봉지구의 대규모 주거단지의 입주 시작과 함께 인구가 늘고 지역경제도 활기를 뜨면서 교통수요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여기에 완주의 첫 국가산단인 수소특화국가산단까지 조성되면 교통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삼례읍에 KTX 정차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KTX 정차가 확정되면 삼례읍은 교통거점지역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 깃든 명소에 즐길 거리 가득, 끝없는 삼례의 매력 유 군수 취임 이후 삼례읍은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삼례 관광 활성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그 첫 번째가 삼례문화예술촌 활성화다. 십 수년째 방치됐던 삼례문화예술촌 앞마당의 수십 톤의 폐기물은 말끔히 정리됐고, 대형 트럭의 불법 주차 논란도 해소됐다. 새만금 신시도광장을 지키던 김종원 작가의 작품 12점이 삼례문화예술촌에 새로 자리 잡기도 했다. 지난 7월부터 시작해 9월까지 이어지는 야간 플리마켓 ‘삼례夜놀자’는 큰 구경거리다. 매주 금, 토요일 삼례문화예술촌 마당에서 진행되는 플리마켓은 푸드트럭, 시원한 맥주존, 버스킹 공연과 야간 돗자리 영화를 상영하며 삼례의 밤을 보석처럼 밝히고 있다. 올해 봄에는 전국 보부상 마켓이 열려 1만 명이 넘는 전국의 관광객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인기에 힘입어 삼례문화예술촌은 9월 9일과 10일 2일간 전국 보부상 마켓을 다시 한 번 연다. 90개의 전국 유명 보부상 셀러들이 직접 참여해 품질 좋은 제철 먹거리와 식품, 의류, 생활소품, 잡화 등 각 지역의 먹거리와 수제품들을 판매한다. 우석대학교에 추진되고 있는 문화역사전망대는 완주군의 랜드마크로 떠오를 전망이다. 완주 문화역사전망대는 만경강과 호남평야 등 국내 최고의 비경을 한눈에 조망가능하다. 우석대 본관 23층과 옥상을 활용하는 것으로 만경강과 호남평야, 전북권역 조망이 가능한 야외 루프탑 가든 형식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내부에는 호남평야와 전북권역 조망이 가능한 스카이라운지에서 문화역사 전시와 각종 행사,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휴게시설을 만드는 ‘완주 문화역사 복합전시관’을 조성하게 된다. 무대와 계단형·평면형 좌석, 카페 등이 들어서며 8개의 조망창을 통해 만경강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100년 역사를 품고 있는 삼례역에는 새로운 문화공간 ‘쉬어가삼[례:]’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삼례역과 완주 의병의 역사 콘텐츠 전시와 독서, 여행정보 안내, 공유인터넷 등을 사용할 수 있는 여행자 쉼터다. 쉬어가삼[례:]는 의병, 역참, 여행자쉼터 3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바닥에 있는 화살표를 따라 가다 보면 나라를 지킨 완주의 의병과 역참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나와 있다. 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이 마련된 여행자 쉼터는 누구나 편안하게 쉼을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이다. 누워서 책을 볼 수 있는 컬러풀한 빈백과 이색적인 테이블 등 공간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유희태 완주군수 “삼례읍은 관광허브가 될 것” 유희태 완주군수는 삼례읍을 활성화해 옛 명성인 “호남은 삼례로 통한다”는 말을 다시금 되찾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주말이나 새벽시간 짬이 날 때면 삼례읍을 수시로 찾아 기존 정책을 점검하고 향후 방향을 구상할 정도로 애정이 깊다. "삼례역 KTX 정차를 이끌어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삼례읍을 관광으로 활성화 하는 것입니다. KTX 정차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주차장도 있지만, 이용객이 많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 유 군수가 현재 적극적으로 테마형 관광열차 유치를 추진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유 군수는 “뛰어난 자연경관을 가진 비비정을 포함해 삼례문화예술촌 활성, 쉬어가삼[례:], 우석대에 조성될 완주 문화역사 복합전시관까지 완성되면 삼례 관광의 삼각벨트가 이뤄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며 “관광의 혁신을 일으켜 삼례에 첫 발을 내딛은 관광객들이 완주의 전역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 기획
  • 김원용
  • 2023.08.30 18:25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 동물원 속 방치되는 동물…그들의 미래는?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히 마른 사자 '바람이'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동물복지 논란을 일으켰던 경남 김해시 부경동물원이 지난 12일, 드디어 운영을 중단했다. 당시 부경동물원에 갇혀 있던 바람이는 사람나이로는 100살이 넘는 나이로 삐쩍 마른 채 낡고 열악한 시설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이를 본 많은 시민의 비판이 부경동물원과 김해시청에 쇄도했고 바람이는 충북 청주시가 운영하는 청주동물원으로 이원 됐다. 그러나 여전히 부경동물원에 남아 있는 동물들은 몇 달 전의 바람이처럼 좁은 면적, 콘크리트 바닥, 감옥형 전시시설에서 굶주리고 있다. 사자와 코끼리, 고래 등 야생 동물은 좁은 시설 안에 가둬지는 것만으로도 극도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지난 2016년에 발표된 '수의학행동' 국제학술지에 의하면, 동물원에 사는 사자는 야생 사자와 달리 번식, 사회적 관계 등 생활이 비정상적이며 늘 안절부절 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연구진은 이 같은 원인으로 야생 사자는 대개 하루에 약 20~21시간을 휴식하지만, 동물원 사자는 평균 10~15시간에 못 미치게 수면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 서식지 평균 넓이가 80~100k㎡로 매우 좁은 것도 그 원인에 한몫한다고 서술했다. 동물들의 더 나은 환경을 위해서는 기본적인 먹이, 사료 섭취 외에도 대형 야생 동물 보호 시설과 동물의 습성을 고려한 사육 환경 마련이 필요하다. 이에 미국동물원 수족관협회에서는 동물복지를 바탕으로 멸종위기종의 보전을 위해 동물원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는 동물원에 미국 동물원 협회(AZA) 인증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AZA 인증을 획득한 국내 동물원은 용인 에버랜드와 서울동물원 단 두 곳이 전부였다. 지난 2020년 환경부 집계 기준, 국내 동물원이 총 114곳, 동물 5513종 4만8911마리가 서식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는 매우 낮은 수치다. △동물원 내 동물보호 문제 발생 시 벌칙 조항 미비 그렇다면, 국가에서는 동물들이 죽어갈 때까지 이 문제를 왜 해결할 수 없었을까? 현행법상에 따르면 동물원은 허가제가 아닌 등록제로 운영된다. 즉, 시설의 소재지와 전문인력, 보유 개체수 등의 일정한 기준치의 조건을 갖추면 지자체장이 동물원을 운영할 수 있는 등록증을 발급한다. 그러나 서식 환경에 대한 기준이나, 벌칙 조항은 존재하지 않아 우리에 갇힌 동물이 아사 직전까지 내몰려도 과태료나 개선 명령을 내릴 수가 없다. 정상적인 절차와 허가를 받은 시설이기에 시설 소유자나 관리자의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오는 12월부터 동물원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난해 12월 '동물원 및 수족관의 관리에 관한 법률'(동물원 수족관 법)과 '야생 동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야생생물법) 등이 개정됐다. 이 개정안은 오는 12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기존 동물원 등록제를 허가제로 전환하고 종별 사육기준을 별도로 마련해 동물원의 환경을 더욱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종별 사육기준이나 방사장 규모는 추후 구체화 될 예정이며 사자와 호랑이 등 맹수는 야외 방사장이 있는 동물원에서만 사육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동물원 운영자가 동물보호법을 위반해 금고 이상 실형을 선고받았다면 동물원 허가를 내주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기존 사업자에게는 방사장 부지확보 등을 위해 약 5년간의 유예기간이 주어져 해당 문제가 당장 개선되기란 어렵다. 다만 해당 유예기간에는 기존 사업자에게 전문 검사관 제도를 시행해 사육 환경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검사관 제도란 기존 시설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 될 시 동물원에 직접 방문해 동물의 건강 상태와 사육을 점검할 수 있는 것이다. △방치된 동물, 사유재산으로 구조할 방법 적어 일각에서는 개정된 법이 시행될 시 운영난을 겪는 동물원이 동물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은 채 그대로 동물들을 방치할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현행법상 동물은 '사유재산'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앞서 언급된 '바람이'와 같은 동물이 나오더라도 소유주가 동물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구조할 방법이 없다. 현재 부경동물원 역시 여러 동물보호단체가 남겨진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동물을 직접적으로 구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 산하 공공기관이 적극적으로 동물 구조에 나서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민간 단체가 동물 구조 및 보호를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정부 기관, 환경 단체가 협력해 방치 동물을 구조한다. '미국 어류 및 야생 동물 관리국' 미국 내무부 산하 기관은 멸종위기종의 관리와 보존, 미국 국립 야생동물 보호소와 시스템의 구축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현재 이들은 미국동물원수족관협회와 협약을 체결해 해달과 바다거북 등의 멸종위기 동물을 구조하고, 야생으로 안전히 돌려보낼 수 있을 때까지 보호하고 있다. 또, 캐나다에서도 지난 2019년 캐나다 퀘벡의 한 동물원이 동물 학대 위반 혐의로 기소되자 사자, 곰, 호랑이, 캥거루, 늑대 등을 포함한 200여 마리의 동물을 몰수했다. 이후 해당 동물들은 북미 지역의 동물보호단체들이 운영하는 야생 동물 보호소로 이동됐다. /안유진 전 전북대신문 편집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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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30 18:08

[전북일보 제11기 독자권익위 제86차 정기회의] “새만금, 잼버리 문제 냉정하게 본질적 접근 필요”

전북일보 제11기 독자권익위원회 제86차 정기회의가 30일 오전 11시 전북일보 3층 편집국장실에서 열렸다. 이날 회의에는 임성진 위원장(전주대 행정학과 교수)을 비롯한 윤석(전북건설협회 운영위원)·이재규(우석대 교양대학 교수) 위원 등 제11기 독자권익위원과 전북일보 강인석 편집국장이 참석했다. 독자권익위원들은 이날 정기회의에서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이후 처한 전북의 현실에 대해 냉철하고 본질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언하면서 다가오는 총선에 있어 지역 민심을 대변할 수 있는 기사의 필요성 등을 주문했다. 이날 제시된 독자권익위원들의 다양한 의견과 제안을 정리한다. △임성진 위원장=항상 저희 독자위원들의 의견을 충실히 반영해 준 전북일보에 감사드린다. 특히 기획보도 등 기자들이 직접 현장에서 발로 뛰는 기사가 많았던 것 같아 그에 대한 격려 말씀도 드리고 싶다. 잼버리 문제 등을 논의하는 데 있어 문제의 본질은 전북도와 윤석열 정부와의 싸움이 아닌데 전북에서 잼버리를 개최했다는 이유로 전면에 떠밀려 온 상황이다. 언론에서도 냉정하게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접근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예산도 그렇고 지금 전북도민들에게 굉장히 심각한 문제로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전북에서 다수 지지를 받는 더불어민주당이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 같고 전북도만 진화에 나서고 있는 것 같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지방자치를 폐지 또는 축소하자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부당하게 전북에 책임을 씌우고 예산을 삭감하는 것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비판해야 하겠지만 문제의 본질과 지방자치 측면에서 냉정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후쿠시마 방류 문제에 대해서는 전북일보가 심층적으로 다뤄 좋았다. 다만 지난 7월 4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일본 정부의 오염수 해양 방류 계획에 대해 국제 안전기준에 부합한다고 평가했을 때부터 선제적으로 집중 보도가 됐으면 어떨까 한다. 사건이 불거졌을 때 보도하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문제를 예견하는 보도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각 언론에서 기후변화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이러한 세션을 전북일보에서도 다뤘으면 좋겠다. 올해 폭염으로 취약계층이 힘들었는데 사회적으로 이슈가 덜 됐던 면이 있다. 사회적 취약계층이 지구 온난화에 더욱 힘들 수 있는 만큼 그 문제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아울러 내년 총선이 7개월 남은 상황에서도 선거구 획정 관련 지적 보도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다만 최근 위성 정당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많이 제기된 만큼 이를 막는 방안을 고민할 수 있는 보도가 필요해 보인다. △윤석 위원=잼버리 후폭풍 관련 보도의 일환으로 잼버리 행사와 새만금 SOC 상관성에 대한 분석 보도가 있었는데 이해하기 쉽게 작성돼 매우 좋게 봤다. 당시 보도에서 국토부 용역 보고서 인용을 했는데 이를 이미지화했으면 독자에게 더욱 와닿는 기사가 되었을 것 같다. 또한 용역 관계자 또는 용역을 담당했던 부처와의 인터뷰나 멘트가 기사에 있었으면 더욱 생동감 있는 기사가 됐을 것 같다. 새만금 사태에 대해 전북 정치권이 나몰라라 하는 것을 지적하는 기사가 있었다. 국회의원이 제대로 활동하고 있지 않다는 지적은 항상 나오는 이야기인 만큼 이에 대한 접근 방법을 다르게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새만금과 관련한 국회의원들의 반응, 발언 등을 표로 계량화해 비교하면 어떨까 한다. 그렇게 되면 국회의원 입장에서도 경각심을 가질 수 있고 독자도 어떤 국회의원이 적극적으로 입장을 밝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새만금은 전북 사람들 말고는 대부분 지역 사람들이 관심이 없거나 부정적이다. 지지부진한 사업에 돈을 들이는지 의문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렇다 보니 아무리 전북인 목소리를 담아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현실적으로 현 정부가 강조했던 새만금 내 이차전지 기업 유치 등이 있었던 만큼 이들 기업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어떨까 한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SOC(사회간접자본)가 없으면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번 국가예산을 살펴보면 SOC 예산이 대폭 삭감되거나 반영되지 않았다. 새만금에 투자할 이차전지 관련 기업들이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인터뷰를 해보면 어떨까 한다. 기업 입장에서 투자 철회 등의 목소리가 나오면 현 정부에도 강한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 한다. △이재규 위원=일반인의 경우 기사를 길게 읽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가독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픽토그램이나 인포그램 등을 활용해 지역별 SOC가 어떻게 분배되고 지역별 편차가 어떻게 되는지를 독자가 한 눈게 보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또 기사뿐만 아니라 카드 뉴스 등으로 이를 제작해 외부에 인용될 수 있게 하는 작업이 있었으면 한다. 공항과 관련해서는 지금 광역권 중 유일한 공항 부재 지역이고 또 여타 연계되는 공항이 아니더라도 광역권 교통수단이 지극히 미흡한 부분을 좀 촘촘하게 대비시켜서 보여주는 작업이 있었으면 한다. 두 번째는 잼버리 문제가 현재는 전국 보도에서 밀리면서 전북이 고립되는 모양새가 된 것 같다. 민주당은 뒤에 있고 전북도만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고립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계속해서 던지면서 특히 민주당의 경우 이 이슈에 대해 온도 차이가 매우 큰 데 민주당 중앙당과 전북도당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적하는 보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잼버리 이슈로 새만금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나오고 있다. 방조제를 허물어야 한다는 새만금 초기화론부터 해수 유통을 해야 한다는 중도적 입장 등이 있는데 이러한 의견들을 공론화 장을 만들어 합의점을 높여보는 시도가 있었으면 한다.

  • 기획
  • 엄승현
  • 2023.08.30 17:42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19)후백제 견훤의 불교 사상-미륵신앙과 선종

견훤이 미륵신앙과 언제, 어떻게 관련을 맺었는지에 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서남해 지역에서 신라에 대항하여 자립을 선언한 것이 바로 농민 반란이 일어난 889년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과 한 달만에 5천 여 명이라는 대규모의 집단을 형성하였는데 대부분이 농민이었음에 눈길이 간다. 견훤이 농민의 호응을 받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상적으로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견훤이 자립을 선언할 무렵 그곳에는 진표의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진표의 미륵신앙은 반신라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옛 백제 지역의 농민들은 진표의 미륵신앙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고 백제 부흥운동을 외치며 일어난 견훤에게 크게 호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짐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견훤은 진표의 미륵신앙을 이용해 반신라적인 성향을 가진 농민들을 불러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표의 미륵신앙의 특징은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곧바로 도솔천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이 아니라 윤회전생하여 다시 인간세계에 태어나서라도, 이 지상에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진표의 반신라적인 이상국가의 건설이라는 소망을 견훤이 나름대로 실현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견훤은 미륵불이 하생하는 용화세계의 구현을 내세움으로써 반신라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던 서남부 지역의 농민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을 모은 견훤은 서남해 지역에서 광주로 옮겼고, 광주 호족세력과 결합을 통해 그 세력을 더욱 확대하였다. 그 결과 견훤은 호족세력과 연결된 농민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얻었고 진표의 미륵신앙의 근거지였던 금산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견훤이 금산사를 중창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던 것은 후백제를 건국한 초기에 미륵신앙을 주된 사상적인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후백제 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고 생각된다. 견훤이 광주에서 전주로 천도한 것은 900년의 일이었다. 전주로 천도한 이후에도 미륵신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렇지만 김제의 금산사보다는 익산의 미륵사에 더 관심을 두었다. 그가 익산에 더 관심을 두었다고 하는 것은 미륵신앙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익산 지역의 미륵신앙은 무왕의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염두에 두면 그곳을 중심으로 하여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을 추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좀 더 설명하면 진표의 미륵신앙은 농민층이 주된 계층이었으나, 익산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은 군주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견훤이 전주로 천도한 이후 그가 스스로 왕을 내세운 것이 바로 이 시기이기 때문에 서로 연관성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진표의 미륵신앙이 불만층의 농민을 대변하는 것이었다면 익산 미륵사에서 개탑 의식은 군주로서의 정치적 권위를 높이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견훤의 미륵신앙에 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김제의 금산사를 중심으로 하였던 미륵신앙을 익산의 미륵사를 통하여 새롭게 흡수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견훤은 국가를 세우고 왕위에 오른 이후 미륵신앙만으로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당시 불교계에서 유행하는 선종에 대해서도 관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렇다고 그가 하루 아침에 선종에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이미 일찍부터 선종에 관하여 일정한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상주는 교통의 요지이면서 선종 불교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다. 견훤이 태어나기 전에 그곳에는 선종 승려인 혜소선사와 무염선사(800∼888)가 연이어 활동하였고 그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두 선승은 모두 당에 유학하였으며 신라 왕실로부터 상주에 머물면서 그곳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주문받았다. 이와 같이 견훤이 태어난 상주는 일찍부터 선종 불교와 밀접한 인연이 있던 곳이었다. 또한 도헌선사(824∼882)가 개창한 희양산문도 견훤이 태어난 곳이었다. 그가 상주를 떠나 중앙군으로 편입되기 이전까지 교종보다는 선종 불교와의 친연성이 더 하였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견훤이 광주 서남해 지역에서 활동하였을 때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유명하던 선종산문은 체징에 의해 개창된 가지산문의 보림사, 혜철 선사에 의해 개창되었던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이다. 비록 산문의 개산조는 이미 열반에 들고 없었지만 그들의 제자들이 왕실과 연결되어 산문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견훤은 옥룡사의 도선국사(827∼898)와 연결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도선은 풍수지리에 밝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견훤은 그를 지원하면서 반대급부로 풍수지리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세우는데 사상적 이념으로 삼았다고 보아진다. 무진주에 도읍을 정한 견훤은 실상산문과도 연결하였다. 선승들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그곳의 사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도움도 얻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오월과의 수교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견훤은 실상사의 편운화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특히 실상사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였는데, 그것은 견훤이 실상산문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910년 이전 편운화상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견훤이 의도하였던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워 즉위하자 태안사를 주도하던 윤다선사가 왕건에게 갔다. 그러자 견훤은 당에서 귀국한 경보선사를 국사로 삼아 선종을 중심으로 한 불교계의 재편을 서둘렀다. 견훤이 경보를 우대한 것은 성주산문과 굴산문을 포섭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는 경보가 두 곳의 선종 산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그의 세력권 아래에 들어온 가지산문과 동리산문 그리고 실상산문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그는 상주 출신의 긍양선사가 귀국하는 것을 도왔는데, 이는 상주의 희양산문과 연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견훤은 신라 말 고려 초 변혁기에 선종 불교와 친연성이 매우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조범환 서강대 교수 남원 실상사(사적 309호-홈페이지) 견훤과 경보 선사 통진대사 경보는 견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선승이다. 그는 속성이 김씨이고, 구림(현재 영암) 출신이다. 10세 무렵에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뜻에 맞지 않아 출가를 결심하고, 부모의 허락을 얻어 부인사(夫仁寺)로 출가했다. 그곳에서 화엄을 공부하다가 선종으로 눈을 돌려 백계산 옥룡사의 도선국사를 찾아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구족계를 받을 때까지 그곳에서 공부하였다. 18세 무렵에 월유산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도선국사의 허락을 받아 여러 곳으로 선지식을 찾아다녔다. 성주산의 무염대사와 굴산문의 범일선사를 찾아 깨우침을 더하였다. 두 선지식을 방문한 것은 선종불교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만남을 통해 중국 유학을 결심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24세 무렵에 중국 유학을 떠나 무주(撫州)의 소산광인화상으로부터 조동종을 전수받았다. 광인화상은 그에게 법을 전하면서 “불법이 동쪽으로 전해질 것이라는 말이 있었으나 불법을 구하는 자로서 더불어 도를 말할 수 있는 자가 드물었다. 동쪽에서 온 사람중에서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자는 오직 그대 뿐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 실력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광인화상을 떠나 강서의 노선화상을 배알하고 또 마음의 법을 전해받았다. 그리고서는 중국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깨우친 바를 실행하다가 53세의 나이로 귀국하였다. 중국에 유학가서 머문 기간이 무려 30년 가까이 되었다. 당시 신라 출신의 선승들이 당에 머문 기간과 비교해 보면 많은 시간을 중국에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921년 전주 임피현으로 귀국하자 견훤은 그에게 귀의하였다. 그리고 견훤이 마련한 남복선원을 물리치고 스승인 도선국사가 지냈던 광양의 옥룡사에서 머물렀다. 그는 견훤의 뜻을 이해하고 국사가 되었으며 가지산문과 동리산문 그리고 실상산문을 서로 연결하여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자 하였다. 그런 가운데 후백제가 고려에 의해 역사속으로 사라지던 936년에 왕건의 초청으로 개경으로 향했다. 그러므로 견훤과의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보아야 하며, 그 기간은 대략 15년 정도였다. 개경으로 간 대사는 왕건 및 그의 아들인 혜종과 정종의 귀의를 받았다. 그리고 정종 2년(947)에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조범환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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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9 16:07

제27회 무주반딧불축제 삼③삼③하네!

올해로 스물일곱 살이 된 무주반딧불축제가 여전히 특별한 건 ‘반딧불이’ 덕분이다. 살아있는 환경지표곤충 반딧불이를 앞세워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기 위한 온힘을 쏟고 있기 때문. 덧붙여 올해는 개념축제를 지향한다. ‘지킬 건 지키고, 즐길 건 즐긴다’는 마인드로 준비한 삼③삼③한 축제. 제27회 무주반딧불축제의 매력 속에 빠져볼까? △'지킬 건 지킨다' 3無 축제 대한민국 대표 환경축제답게 제27회 무주반딧불축제는 친절, 위생, 서비스, 그리고 고객편의를 기반으로 바가지요금 없는 축제, 일회용품 없는 축제, 안전사고 없는 축제 등 '3무(無) 축제'로 거듭난다. 1. 바가지요금 없는 축제! '바가지요금 없는 축제'를 만들어 산골영화제의 착한가격 이슈가 반짝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줄 방침이다. 이를 위해 무주군은 푸드 코트 입점 업체와 사전에 음식종류를 비롯한 양에 맞는 적정 가격을 협의한 상태로 모든 음식은 착한가격을 고수한다는 방침이다. 그렇다고 “양이 적겠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 이번 무주반딧불축제에 오시면 언제든 맛있는 음식을 저렴하고 푸짐하게 드실 수 있다. 2. 일회용품 없는 축제! 기후와 생태환경의 변화가 인류생존을 위협할 만큼 심각하다.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고 실천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무주반딧불축제 역시 ‘일회용품 없는 축제’로 걸음을 맞출 계획. 환경축제에 걸맞은 실천을 해보이겠다는 것. 일회용품 없는 축제‘는 친환경 다회용기 사용으로 완성시킨다. 행사장 내 ‘푸드 코트’와 ‘천원국수 코너’에서는 무조건 다회용기! 여기에 텀블러를 준비해오는 관람객들의 센스가 만나면 ‘금상첨화(錦上添花)’겠다. 3. 안전사고 없는 축제! 무주반딧불축제의 모든 시작과 끝은 ‘안전’이다. 아무리 유익하고 재미가 있어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단 것. 무주반딧불축제 역시 ‘안전사고 없는 축제’에 사활을 걸었다. 분야별 안전관리 계획을 수립해 사전 점검과 리허설까지 모두 마쳤으며 이를 기반으로 주요 행사·명소의 동선 별 안전을 확보했다. 덧붙여 관람객과 시설물, 먹거리, 그리고 코로나19 방역에 대한 안전관리 기준을 강화해 만일의 상황에 철저를 기할 방침이다. △'즐길 건 즐긴다' 3有 축제 대한민국 대표 환경축제의 정체성은 충분히 지키고 온종일 흥미진진 재미있는 축제라는 명성을 쌓기 위해 낮에도 밤에도 친환경 '3유(有) 축제'를 선보인다. 1. 낮에 즐기는 축제! 제27회 무주반딧불축제는 젊고 역동적인 축제를 지향한다. 어린이와 청소년, MZ세대들이 참여하는 ‘전국 청소년 치어리딩 페스티벌’과 ‘전국 청소년 「끼」 페스티벌’을 신설하고 9월 5일은 ‘키즈데이’로 정해 집중한다. 또 ‘NEW 물벼락 페스티벌’ 등 기존에 흥행했던 인기 프로그램들을 부활시켜 관람객들의 만족도를 높일 계획. 여기에 다채로운 버스킹 공연과 각 읍·면 전통놀이가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해줄 전망이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묘향산사고본을 적상산사고까지 이안하던 행렬을 재연한 행사는 9월 9일 단 한 번, 볼 수 있다. 2. 친환경 실천하는 축제! ‘반딧불이 신비탐사’와 ‘가족과 함께하는 1박2일 생태탐험’, ‘반디별 소풍’, 그리고 ‘국제 반딧불이 심포지엄’은 환경축제로서 무주반딧불축제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다. 천연기념물이자 환경지표곤충인 반딧불이를 소재로 풀어내는 ‘반디이야기’인 셈. 자연을 배경으로 지구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반딧불이의 속삭임에 다같이 귀 기울여보자. 축제장에 마련된 ‘반딧불이 주제관’에서는 날씨와 밤낮에 관계없이 살아있는 반딧불이와 만날 수 있다. 3. 밤이 아름다운 축제! 무주반딧불축제를 즐기기엔 역시나 밤이 제격. 캄캄한 밤을 빛나게 할 ‘무주 안성낙화놀이(전라북도 무형문화재)’와 ‘반디 드론라이팅 쇼’, ‘디지털 불꽃놀이’, ‘별빛다리(미디어 파사드)’가 관람객들을 손짓한다. 게다가 전에 없던 ‘열기구 체험’까지 있으니 가슴 설렐 일. 열기구를 타고 하늘을 오르는 환희와 무주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밀려오는 감동을 한 번에 만끽할 수 있다. 꼭 타지 않더라도 온화한 불을 품고 두둥실 떠올라 밤하늘을 수놓은 열기구를 바라보는 재미도 그만이다. 황인홍 무주군수 "‘무주다움’ 토대 자연과 인간 공존하는 축제" 황인홍 군수는 "'자연특별시 무주로의 힐링 여행'을 주제로 가을의 초입에 9일간 개최되는 제27회 무주반딧불축제는 ‘무주다움’을 토대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축제라는 차별화된 전략과 만족도 높은 프로그램, 그리고 대내·외를 아우르는 전 방위적 홍보까지 심혈을 기울였다"고 강조했다. 이어 "무엇보다 바가지요금 없는 축제, 일회용품 없는 축제, 안전사고 없는 축제 등 ‘3무(無) 축제’로 만들기로 한 만큼 동참하시는 즐거움, 누리는 기쁨이 있을 것"이라면서 "꼭 오셔서 전라북도 대표축제, 대한민국 대표 환경축제의 면모를 확인해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유송열 무주반딧불축제제전위원회 위원장 "세대별 맞춤형 볼거리, 즐길거리 강화" 유송열 위원장은 "올해 축제는 코로나19 위기 단계 하향으로 마스크를 벗고 개최가 되는 만큼 지난해 방문객 19만여 명 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오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방문객 여러분이 안전하게 무주반딧불축제를 즐기실 수 있도록 준비했다"며 "9월 4일은 ‘태권도 데이’, 5일은 ‘키즈 데이’, 6일은 ‘청소년 데이’, 8일은 ‘트롯 데이’로 정해 주말에 비해 상대적으로 방문객이 뜸한 평일 프로그램을 강화했다"고 밝혔다. 그는 "세대별 맞춤형 볼거리, 즐길거리를 강화한 만큼 골라 보는 재미도 느껴보시길 바란다"고 했다.

  • 기획
  • 김효종
  • 2023.08.29 15:18

[한국전쟁 정전 70년] 제주 포로수용소

2만 중공군 포로는 제주도에 왜 왔을까? 3년1개월(1129일) 동안 벌어진 6·25전쟁에서 중공군 포로는 약 2만1700명으로, 미군 4439명보다 5배나 많았다. 전쟁이 한창일 당시 포로수용소는 육지와 떨어진 섬인 제주도가 후보지였다. 1950년 말 중공군의 공세로 서울을 다시 빼앗기자, 제주도의 포로수용소 설치는 유력해졌다. 다만,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은 제주도가 피난민으로 초만원이 된 점, 이 섬은 임시정부가 들어설 최후의 보루로 여기면서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육지와 비교적 거리가 가깝고 물 공급이 가능한 거제도가 포로수용소로 낙점됐다. 휴전 협상이 진행되고 전쟁이 끝날 조짐이 보이자 생포되거나 항복한 포로 송환은 쟁점이 됐다. 포로수용소는 냉전과 이념 대결의 축소판으로 또 다른 전쟁터였다. 2만명에 달했던 중공군 포로들은 반공(反共)과 친공(親共)으로 대립했고, 서로를 죽이고 학대하는 유혈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폭동과 유혈 사태가 끊이지 않자, 유엔군사령부는 1952년 2월 ‘분리 작전’에 돌입했다. 그해 7월까지 약 2만 명에 이르는 중공군 포로를 거제도에서 제주도로 보냈다. 당시 중화민국(대만)으로 가길 원했던 반공포로 1만4000여 명은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지역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으로 송환을 원했던 친공포로 5900여 명은 제주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부지에 수용됐다. 친공포로들은 1952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3주년을 맞아 시위를 벌였다. 미군 2개 소대가 진입하는 과정에서 포로 45명이 사망하고, 120명은 부상을 당했다. 유엔군사령부는 “폭동(시위)은 집단 탈주를 위해 시작됐으며, 포로들은 탈옥 후 한라산 빨치산과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 이후 경비를 맡은 미군과 친공포로의 갈등은 심화됐으며, 포로수용소 주변에 살았던 주민들은 불안감에 떨어야했다. 반공포로가 수용된 모슬포지역에서는 유혈 사태가 일어났다는 기록은 없지만, 주민들은 ‘사제 수류탄 폭발 ’, ‘포로끼리 패싸움 후 시체 유기 사건’ 등을 언급, 추가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당시 모슬포에는 육군 제1훈련소(1951~1956년)가 설치됐고, 한국군도 포로수용소 경비 업무를 맡았다. 지붕으로 얹은 양철판 밑에 기름을 먹인 종이(루핑)를 바른 수용소 환경은 열악했다. “포로수용소 건물은 나지막하고 검은 루핑 지붕이어서 여름철에는 실내 열기가 대단했다. 나무판자로 물방아와 비슷한 선풍기를 만들어 포로들이 줄을 교대로 당기며 바람을 만들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미군부대를 출입했던 이발사 서병수씨가 당시 수용소의 열악한 사정을 증언한 내용이다. 중공군 포로들은 채소밭을 일궜고, 미군의 감시 아래 수용소 인근 송악산에 오르거나 바닷가에서 미역을 채취하기도 했다. 설리반(sullivan) 군종신부는 이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포로들은 늪지를 매립하고 돌을 나르며 모슬포성당 건립 공사에 투입됐다. 성당이 완공되자 ‘통회의 집’으로 불렸다. 포로들이 한국에 많은 피해를 입힌 죄를 뉘우치며 지은 집이라는 뜻을 담았다. 나중에는 사랑으로 포로들을 용서하자는 의미로 ‘사랑의 집’으로 변경됐다. 1953년 6월 8일 전쟁포로 송환 협의가 이뤄졌고,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됐다.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 간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정전 협정 체결 전인 1953년 초부터 반공포로와 교섭하며 이들의 대만 송환을 준비했다. 1953년 7월 29일 대만 정부는 제주에 있는 반공포로들에게 출판물과 영상물 제공과 함께 위문단 파견을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중공군 포로의 대만 행은 국민당 정부가 내전에는 졌지만, 이데올로기에서는 승리했다고 선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한 달 후인 8월 28일 대만 정부가 파견한 위문단이 제주도에 도착했다. 대만 공군은 수송기 8대를 동원, 37t의 위문품을 전달했다. 당시 대만 언론에 소개된 위문품은 1인 당 설탕 1홉, 소고기·채소 통조림 1개, 파인애플, 바나나 2개, 러닝셔츠 1벌이었다. 1년 남짓 제주도에 수용된 1만4000여 명의 반공포로들은 대륙 행을 거부하며 팔뚝에 ‘반공(反共)’이나 ‘살주발모(殺朱拔毛)’ 같은 문신을 새겼다. 홍군 총사령관 주더(朱德)를 죽여 버리고 마오쩌둥(毛澤東)을 없애겠다는 뜻이다. 반공포로 1만4000여 명은 제주도를 떠나 1954년 1월 20일 인천항에서 미군 수송선에 올랐다. 1월 23일 대만 지룽항에 도착한 이들은 반공의사(反共義士)로 대접받았다. 제주비행장에 수용됐던 친공포로 5000여 명도 선박과 육로를 통해 1953년 8월부터 9월까지 본국으로 돌아갔다. 제주일보=좌동철 기자 ■ 김웅철 향토사학자 인터뷰 “70년 전 중공군 포로 2만명이 1년 넘게 제주도에 수용된 것은 전쟁사나 외교사에 중대한 사건이다. 제주 섬에서 벌어진 반공포로와 친공포로의 갈등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이자, 이념 갈등이었다.” 역사사진 자료집 ‘강병대(육군 제1훈련소) 그리고 모슬포’를 발간한 김웅철 향토사학자(73)는 반공포로들이 도열, 이국땅에서 숨진 동료의 시신에 청천백일기를 덮고 장례를 치르는 장면이 담긴 귀중한 사진을 갖고 있다. 김씨는 “중공군들은 모슬포~사계리 도로 개설과 모슬포성당 기초 공사에 동원됐고, 일부는 아일랜드 출신 설리반 군종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며 “채소를 즐겨먹으면서 농장대를 조직, 수용소 인근 밭에서 채소를 직접 재배했다”며 당시 생활상을 소개했다. 이어 “포로들은 또 ‘자치대’를 조직,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군대식 열병을 했고, 양철 조각으로 만든 피리를 불며 애환을 달랬다”며 밝혔다. 김씨는 “반공포로는 모슬포지역 3곳에, 친공포로는 현 제주공항 화물청사 인근 1곳에 설치됐는데 수용소 건립으로 민가가 철거되고 토지가 강제 징발되면서 마을주민들이 적잖은 피해를 봤다”고 했다. 대정읍 상모리에는 중공군 포로수용소 건물 외벽이 남아 있다. 길이 20m, 높이 2m의 석축 벽에는 창틀 모양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김씨는 “냉전시대, 제주에 수용된 중공군 포로 70%가 대만 행을 선택한 것은 국제사회에 큰 이슈였지만, 지금은 수용소 터와 건물이 마늘밭(사유지)에 남아있고, 70년 넘게 방치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며 “수용소 터를 매입하고 복원해 전쟁의 참상과 역사의 교훈을 후대에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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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8 15:43

[뉴스와 인물]김명수 국립원예특작과학원장

우리나라 농업 총생산액의 36%를 차지하는 게 원예특용작물(2021년 기준)이다. 이는 원예특용 분야가 국가경제, 식량안보, 농업 경쟁력, 농업인 소득 등 여러 측면에서 우리 농업을 대표하는 분야가 됐음을 의미한다. 화훼는 물론 채소, 과수, 인삼, 약초, 버섯류 등 단백질을 제외한 우리 밥상에 오르는 식재료 대부분이 이 분야에 해당하니 국민 일상생활에도 빼놓을 수 없다. 원예특작산업을 연구·개발하고 지원하는 곳이 바로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다. 지난달 23일 국립원예특작과학원장에 올라 취임 한 달 차를 맞는 김명수(55) 원장으로부터 재임기간 주요 정책과 목표 등을 들어봤다. -우선 취임 축하드립니다. 취임 후 한 달간의 소회가 어떠신지요. “세계는 빅데이터·네트워크·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디지털시대로의 전환과 탄소중립 등이 핵심 의제인데, 막상 농촌 현장에서는 이상기상, 고령화, 노동력 감소 등으로 농업의 지속가능성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의 시대에 원장을 맡게 돼 개인적으로는 영광스러우면서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원장 취임 전부터 늘 농업의 새로운 기회와 혁신, 경쟁력 향상을 강조하셨습니다. 재임 기간 강조하시는 정책이 궁금합니다. “급변하는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디지털, 자동화 기반의 스마트 농업기술 개발을 꼽고 싶습니다. 원예특작 분야 재배와 유통 시스템을 혁신하고 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디지털 및 자동화 기술은 농업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 개발과 더불어 품종 개발, 기후변화 대응 등 우리 과학원의 R&D 효율성을 높이는 데에도 적극 도입할 계획입니다.” -올해 이상기후로 많은 농민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스마트 농업기술 개발이 이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기후변화와 상시적 기상재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업도 지식정보산업으로 탈바꿈해야만 합니다. 고령화, 노동력 부족 해결에도 마찬가지이죠. 특히, 농경지 면적이 적은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하면 시설재배와 더불어 기계화, 정밀센서, 드론 등을 이용한 스마트팜 도입·확산이 필요합니다. 또 빠르게 발전하는 초분광, RGB 등 영상기술과 기상·생육 빅데이터를 이용한 작황 정밀진단 기술을 고도화해 배추, 마늘, 양파 등 주요 채소 수급 안정에도 기여하고자 합니다.” -이상기후가 반복돼 일상화되고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이상 기상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죠.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후변화 시나리오에 기반한 예측이 필요합니다.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한반도의 중장기적 기후를 예측하고 이에 따라 작물 재배적지를 변경하거나 작목을 전환하는 노력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에 따른 2070년, 2100년의 한반도 과일지도 등이 대표적인 예측기술 적용사례입니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에서 개발한 것이죠."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서는 품종 개발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네, 기후변화와 더불어 매년 반복되는 이상기상에 적응할 수 있는 내재해 품종을 중점 개발하고 있습니다. 여름배추 안정 공급체계 구축 등 정책적으로 중요한 품목은 자원을 중점 투입해 조기에 성과가 도출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특히 연구개발 계획 단계부터 현장 보급,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체계를 갖춰 효율성을 높이고자 합니다.” -실제 기후변화에 적응하도록 개발중인 품종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요. "사과의 경우 고온에도 착색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노란색 과피(껍질)의 품종, 더위·추위에 잘 견디는 고추, 파프리카, 대목용 토마토, 고온 적응형 인삼과 약용작물, 버섯 품종을 개발 중입니다. 또 과수류의 봄철 저온·서리피해 방지를 위한 미세살수 장치, 통로형 온풍법 등을 개발해 현장보급하고 있고, 채소류는 고온기 안정생산을 위해 생리활성 물질을 탐색·선발하고 있으며, 고온에 쉽게 장해가 오는 약용작물도 멀칭 신소재를 개발해 보급중이죠." -품종·기술개발 외에 농식품 산업 확장을 위한 부가가치 향상기술 개발도 강조하셨지요. ”앞으로의 농식품 산업 생태계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푸드테크(Food+Technology) 등 고부가가치 미래 성장동력 연구가 주도권을 가져올 겁니다. 식품산업에 인공지능(AI), 정보통신기술(ICT), 바이오기술(BT) 등을 융합한 새로운 접근 방법이죠. 인삼, 약초 같은 특용작물을 활용해 건강 기능성 소재를 개발하고, 버섯 가죽·플라스틱 소재, 감귤박 등 농업 부산물에 업사이클링 기술을 적용해 부가가치를 높여 나가고자 합니다.“ -국내 농식품의 수출도 중요하겠군요. 농가 소득을 높이기 위한 또다른 핵심전략이니까요. ”그렇습니다. 올해 우리나라는 농식품 수출 100억 달러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요. 이에 맞춰 동남아시아 프리미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포도, 딸기 신품종을 발굴하고, 참외, 감귤 등 수출 유망품목은 신선도 유지기술을 개발해 경쟁력을 높일 계획입니다. 장기간 신선도 유지가 가능한 CA 저장을 물류용 컨테이너에 적용해 장거리 선박 수출 기술을 실용화함으로써 물류비를 절감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습니다. 대기환경을 조절하는 CA 컨테이너를 활용한 장거리 선박 수출 기술이 현장에 조기 보급되도록 할 계획입니다.“ -재임기간 이루고 싶은 업무적 목표도 중요하지만, 수많은 조직원들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조직 운영을 어떻게 하실지도 궁금합니다. "우리 과학원이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조직으로 거듭나도록 체질을 개선하고 강화하는 데 역점을 두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야 하고 현장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진단할 수 있어야 하는데요. 그렇게 되도록 조직과 개인의 역량을 개발하고, 구성원들이 정책과 현장에 필요한 정답을 찾도록 최선을 다하는 분위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조직은 수평적인 문화를 기반으로 공정하고 투명하게 운영해 우리 직원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근무 환경을 만들겠습니다. △김명수 원장은 전주 출신으로 영생고, 전북대 원예학과와 동대학교 석·박사 과정을 졸업한 김 원장은 지난 1993년 농촌진흥청에 들어와 배연구소장과 사과연구소장, 과수과장, 인삼특작부장, 원예작물부장 등을 거친 원예분야 전문가다. 지난 2월부터는 검역본부 식물검역부장을 지내다 지난달 원장에 취임했다. 보직을 두루 맡는 동안 '혁신가'·'도전가'라는 별명이 붙었다. 배연구소장 근무 시절 과실을 싸는 봉지 없이 배 재배하는 기술을 적립했고, 사과연구소장 시절엔 당시 도입이 시작된 스마트과원 시스템을 정착시켰다. 김 원장은 "대학 졸업 후 20년간 고향을 떠났다가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 지난 2015년 전북으로 이전하면서 함께 왔다"며, "우리 기관이 전북 혁신도시에서 무사히 연착륙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북도민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우리 과학원이 전북에서 튼튼히 뿌리 내리기 위해 항상 열린 자세로 열과 성을 다해 지역사회와 소통하고,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노력하겠다"며, 농업 발전을 위한 전북도민들의 성원과 관심을 당부했다.

  • 기획
  • 김보현
  • 2023.08.27 16:06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에너지 활동은 계속된다

에너지의 날에너지의 날은 2003년 8월 22일 그해 최대 전력소비(4738만 kW)를 기록한 날을 계기로 기후변화와 에너지 절약에 대한 범국민적 인식 확산을 위해 에너지시민연대가 2004년 8월 22일을 에너지의 날로 지정했다. 이날엔 밤 9시부터 5분간 전국 동시 소등과 전력소비 피크시간대에 에어컨 설정온도 2도 올리기라는 상징적인 실천 행동으로 전 국민 참여의 절전 행동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총 1048만9000kWh에 달하는 실질적인 전력 절감과 이를 통해 485만 2204kg의 탄소를 감축했다. △참여의 에너지 활동 8월 22일 늦은 오후 전주 덕진공원 만남의 광장 잔디밭에는 이번에 스무 번째를 맞이한 에너지의 날 기념 시민 별빛 시민문화제 준비로 분주했다. ‘불을 끄고, 별을 켜다’라고 적힌 나무 현판과 함께 무대가 세워졌다. 이날 저녁 7시30분부터 시작된 이번 에너지의 날 기념식에는 150여 명의 시민들이 가족, 지인과 함께 참여했다. 무대에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음악, 악기 공연을 비롯하여 환경과 에너지를 주제로 한 인형극, 지역 기후·에너지 활동 소개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덕진공원을 찾은 시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또한 에너지의 날 대표적인 캠페인으로 밤 9시부터는 전국 5분 소등에 참여도 함께 진행됐다. 전주에서는 덕진공원 연화정 도서관, 풍남문, 전동성당, 전북대 신정문, 전주시청 본청에서 함께 소등을 진행했다. 이번 에너지의 날 낮 2시 냉방 2℃ 올리기와 전국 5분 소등으로 감축한 전력량은 총 51만kWh로 석탄화력발전소 1기의 1시간 발전량과 비슷하며, 1가구 4인 기준으로 할 때 4500가구가 하루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에너지의 날에 전주 덕진공원에서 공연을 지켜보는 시민들/장진호 에너지의 날을 비롯하여 실천을 통하여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곳이 있다. 천주교전주교구는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탄소중립 실천 성당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탄소중립은 이제 전 인류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의 문제로써 종교기관이 가진 조직력과 신앙심을 바탕으로 탄소중립을 위한 다양한 실천 활동을 진행하며 타 기관으로의 확대 계기를 마련을 목표로 한다고 덧붙였다. 실천 활동으로는 재활용폐기물 수거와 줍깅 캠페인 등 자원순환 실천 활동, 탄소중립교육, 건물 및 가정 에너지 진단 컨설팅, 생태교통 미사 챌린지 등 다양한 실천을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성당 건물을 이용한 태양광발전과 RE100 시민클럽 참여와 같이 생태에너지전환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재생에너지 확대 주차장 태양광 전북환경운동연합은 에너지의날을 하루 앞둔 지난 8월 21일 ‘전라북도 주차장 태양광 잠재량’을 조사·발표했다. 같은 날 전라북도의회 세미나실에서 앞선 내용으로 소규모 간담회를 진행했다. 전북환경운동연합, (사)환경운동연합, 전라북도의원, 한국에너지공단 전북지사, 전북햇빛발전협동조합네트워크가 참여하여 의견을 나눴다. 지난해 서울·경기 지역의 주차장 태양광 잠재량을 조사·발표한 (사)환경운동연합의 권우현 활동가의 발표로 간담회를 시작했다. 권우현 활동가는 주차장 태양광 잠재량 보고서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며 국회에서 지난 7월 19일 허영 의원 등 10인에 의해 발의된 주차장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해 발표했다. 법안의 내용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의하여 설치되거나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이나 기금의 지원을 받아 설치되는 주차장, 주차대수 80대를 초과하는 규모의 주차장을 설치하려는 자는 일정 규모 이상의 태양광·풍력 발전 시설 등 신재생에너지 발전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제6조의 4항에 신설함으로써 신재생에너지 확대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권우현 활동가는 “시민사회에서 이번에 조사한 주차장 태양광 잠재량은 이론적 잠재량으로 주차 면적을 가지고 산출한 것이며, 음영이나 경제성을 고려하여 태양광 시설 설치가 실제 가능한 지점만을 계산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하며 “주차장 태양광의 이론적 잠재량을 산출하고, 그 안에서 실제 재생에너지 발전시설을 설치할 수 있는 공간을 찾고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국회 입법 법안에 대해서는 “내년으로 총선이 다가오면서 국회 안에서의 법안에 대한 적극성이 떨어지고 있다”며 “법안이 이번에 통과되는 상황과 통과되지 않더라도 총선 이후 다음 국회에서 다시 상정되었을 때의 두 방향으로 준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다음으로는 전북환경운동연합의 장진호 활동가의 전라북도 주차장 태양광 잠재량 발표가 이어졌다. 장진호 활동가는 “전국 주차장 정보 표준데이터와 국토부 자료를 기반으로 전라북도의 주차장 태양광 잠재량 조사 결과 이론적 잠재량은 62.6MW 규모로 파악되지만, 대부분의 공공기관 부설주차장이 자료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며 “ 전라북도 14개 지자체에서 직접 관리하는 정확한 주차장 정보가 필요하다”고 발표했다. 자유토론에서 권태흔 한국에너지공단 전북지부 팀장은 “이론적 잠재량에서 실제 태양광 시설 설치 가능 여부는 더욱 조사해 보아야 하지만, 주차장에 태양광 시설을 설치하는 것은 시공도 어렵지 않고 가중치도 높아 시도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발언했다. 서난이 전라북도의원은 “국회에 발의된 법안에서 담고 있는 내용이 엄격한 부분들이 많아 보이며, 지방자치조례 차원에서도 지원방안과 실행을 위한 내용을 사전에 준비할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유남희 전북햇빛발전협동조합네트워크 대표는 “주차장 태양광의 이론적 잠재량을 실제 설치할 수 있는 규모로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면밀한 조사와 분석이 필요하다”며 “에너지전환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해 주차장 태양광이 의무화 된다고 하면 예산 마련과 같이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주민참여형 방안 등을 마련하여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라고 의견을 덧붙였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에너지를 얻기 위해 화석연료를 사용하며 많은 탄소를 배출하고 있다. 이로 인한 기후변화는 여름철 폭우와 폭염, 겨울철 폭설과 한파 예측할 수 없는 극단적인 날씨들이 반복되는 일상으로 우리가 체감하고 있다. 우리는 기후위기 시대에 살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은 협상과 논의의 대상이 아닌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필수이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겠지만 우리들의 참여와 실천으로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장진호 전북환경운동연합 활동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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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3 16:22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18) 한국 청자문화 발상지, 진안 도통리 유적

한반도에 언제 청자로 대표되는 도자기가 생산되었는가는 현재까지도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초기청자의 등장은 가마의 등장 배경, 운영 주체, 제작 시기 등과 관련하여 다양한 견해가 분출하고 있으나, 현재에는 고려가 중국의 오월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10세기 중반경에 처음으로 청자를 제작하였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러한 견해는 1980년대 이후 용인 서리, 시흥 방산동 청자가마들의 고고학적 조사 성과와 더불어 북한지역 황해남도의 배천 원산리 청자 가마등의 조사 성과를 인용하여 고려의 청자가마들이 중국 오월과의 교류, 오월의 멸망으로 인한 월주요 장인들의 고려 이주를 통해 중국의 벽돌가마를 모방하여 벽돌가마를 조성하여 최초의 한국 초기청자 가마는 벽돌가마이며, 그 시기는 대략 950년경으로 설정하였으며, 지역적으로는 초기 청자가마인 벽돌가마가 경기도와 북한의 황해남도 지역에 분포하여 한반도의 중서부지역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에 의문을 제시하며 호남의 전라북도 지역을 중심지역으로 하는 후백제가 우리나라 초기청자 가마의 운영 주체세력이었다는 새로운 견해가 최근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최근 조사가 진행된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초기청자 가마의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해석하여 기존 학설의 문제점을 분석하여 나온 결론이다. 후백제는 후삼국기 고려 보다도 훨씬 먼저 중국의 청자 주요 생산지인 월주요를 포함한 오월(吳越)과 서로 사신을 파견하는 등 교류를 밀접하게 진행하였는데, 이것은 국가 수립에 대한 국제적인 승인 및 장보고의 청해진 해체 이후 사라진 청자 수입과 공급이 주목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00년 완산주로 도읍을 옮겨 후백제 건국을 선포한 후 다시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오월왕으로부터 후백제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러한 오월과의 계속되는 교류는 백제-장보고로 연결된 국제 해양교류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오대십국 중 하나인 오월은 월주요(越州窯)의 성장을 통해서 번영하였고, 중국 청자의 본향인 월주요 도자 특징은 중국식 해무리굽과 벽돌가마로 대변된다. 중국에서 청자기술이 도입된 후 초창기에 제작된 청자를 소위 ‘초기 청자’로 일컫는다. 초기 청자를 생산하는 가마는 축요재(築窯材)에 따라 벽돌이 사용된 벽돌 가마와 진흙, 석재, 갑발 등으로 축조된 진흙가마로 나뉘는데, 중국의 전통을 이어받아 벽돌 가마가 진흙가마보다 이른 시기에 운영되었다. 전라북도의 내륙 중에서도 가장 내륙이라 할 수 있는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초기 청자가마는 2013∼2022년에 걸쳐 총 6차례 조사 되었다.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청자가마터에서는 이른 시기의 선해무리굽 및 중국식해무리굽 청자완들과 함께 한국식해무리굽 청자완이 수습되었으며, 진흙가마 2기와 벽돌 가마가 1기가 완벽한 상태로 확인되었다. 2022년의 시굴조사에서도 민가 앞마당에서 벽돌가마의 일부가 확인되어 정밀조사를 기다리고 있다. 2017년에 완벽하게 전모를 드러낸 벽돌 가마는 길이가 43m로 확인되어 호남지역에서는 최대 규모의 가마로 확인되었다. 2016∼2017년에 걸쳐 확인된 벽돌 가마는 초기의 벽돌 가마에서 점진적으로 진흙가마로 변화되는 과정을 한 곳에서 보여주는 최초의 가마로, 한국 초기 청자의 변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1, 2호 가마의 운영시기는 10세기 초 · 중반에 처음 축조되었다가 퇴화형해무리굽이 생산되는 11세기 중반에 폐요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5년 확인된 제3호 가마인 진흙가마는 확인된 길이가 13.4m로 이 가마에서는 한국식 및 퇴화형해무리굽의 청자들이 수습되어 가마의 운영시기는 대체로 11세기 중엽으로 판단된다. 지금까지의 조사결과로 보면 진안 도통리 청자가마의 운영시기는 10세기 초·중반인 930∼50년경에서 약 11세기 중반 경까지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의 초기청자 가마인 벽돌가마는 현재까지 가마유구가 확인된 곳이 8개소에 이르는데, 진안 도통리 및 고창 반암리 청자가마터를 제외하면 경기도에 시흥 방산동와 용인 서리 등 3곳과 북한지역인 황해남도의 배천 원산리 청자가마터 3곳 등 총 6곳이다. 기존에 조사된 6곳의 가마터는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백자가마가 존재하거나 백자가마터가 확인되지 않았어도 가마의 퇴적층에서는 청자와 백자편들이 동시에 수습되고 있다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들 벽돌가마 인근에는 도자기 가마와 구분되는 도기 가마가 별도로 운영된 흔적들이 확인되고 있으며, 6곳 중 배천 원산리, 시흥 방산동, 용인 서리 가마터에서는 초기 청자의 시대구분에 중요한 단서로 일부 도자사학자들이 인정하는 요도구인 점권들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청자가마에서는 한반도 중서부지역의 청자가마에서 확인되는 백자가마터 및 백자편의 존재, 도기가마터와 점권이 확인된 사례가 아직까지는 없는 점을 고려하면 한반도 중서부지방에서 확인된 벽돌가마군과 전북의 초기 청자가마터는 성격이 전혀 다른 집단에서 운영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아직 제작 연대를 가름할 정확하고 명확한 자료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청자가마는 지금까지의 조사결과로 보면 도자사적 측면에서는 고려시대 초기에 운영되었던 한반도 중 · 서부지역의 가마들과 여러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고려와 다른 집단이 운영했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정치 및 군사적 · 경제적 상황 등으로 판단하면 후백제 견훤시대에 제작된 한반도의 초기 청자가마 중에서 가장 이른 가마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가마가 후백제에 의해 운영되었다면 이들 가마는 중국 오월과의 교류관계 속에서 탄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상기(문화체육관광부 학예연구관) 후백제와 고창 반암리 청자 가마 고창 반암리 청자가마에서는 청자요지군은 일부분만 조사되었지만, 2021년 조사된 구역에서는 벽돌가마 1기, 진흙가마 4기, 건물지 2기가 확인되었으며, 2022년 조사에서는 벽돌가마 1기, 진흙가마 5기, 건물지 2기가 확인되었다. 청자가마는 구릉의 사면부에, 건물지는 주로 평탄면에 입지하고 있다. 고창 반암리 청자요지는 일부분만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현재까지의 조사성과로도 한국 도자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들이 확인되었다. 고창 반암리 유적에서는 벽돌 가마에서 진흙가마, 다시 진흙가마에서도 중층을 이루어 청자 생산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초기 청자가마의 밀집과 중첩양상은 다른 유적에서 아직 확인되지 않았는데, 이는 반암리 청자요지에서 집중적으로 청자생산이 이루어졌다는 방증일 것이다. 따라서 반암리 청자요지는 초기 청자 생산의 중심지로서, 우리나라 청자의 도입과 전개과정을 밝히는데 주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고창 반암리 청자요지는 지금까지의 조사 성과와 후백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청자가마들 보다는 늦은 시기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여기서 제작된 청자류들은 서해안과 금강수로등을 이용해서 충정도 등 내륙으로 운반되어 후백제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현재까지의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고창 반암리 청자가마들의 조성시기와 성격을 규명하여 보면, 벽돌 가마를 구성하는 중요 요소인 벽돌편들의 상태를 보았을 때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청자가마의 벽돌 가마와 형태가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며, 가마 축조 형식도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청가가마의 형태인 기반층을 사선으로 굴광한 다음 벽돌을 쌓아올려 축조한 형식이다.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청자가마가 기존의 벽돌 가마의 내부 폭을 줄이는 방식으로 후대의 진흙가마를 운영한 반면 고창 반암리 청자가마는 기존의 벽돌 가마 위에 진흙가마를 조성하여 운영하는 방식으로 추정되어 약간의 차이점을 보인다. 고창 반암리 청자가마는 진안 도통리 청자가마 보다는 늦은 시기에 운영되다가 고려에서 어느시기까지는 계속적으로 가마가 운영된 것으로 파악된다. 후백제와 중국 오월의 교류관계, 그리고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과 고창 반암리 청자 가마 유적의 성격을 볼 때 고창과 진안 지역의 벽돌가마는 한반도 중·서부 지방의 벽돌가마의 영향을 받은 집단이 시차를 두고 운영한 것이라기 보다는 직접적으로 중국 오월과 교류하여 청자 가마를 독자적으로 운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상기(문화체육관광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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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3 09:23

김경안 새만금개발청장 "새만금 개발, 잼버리와 관계없이 추진될 것"

김경안(67) 새만금개발청장이 지난달 7일 취임했다. 새만금개발청은 2013년 개청 이래 이병국, 이철우, 김현숙, 양충모, 김규현 청장에 이어 여섯 번째 청장을 맞이하게 됐다. 총리실, 교수, 기재부, 국토부 출신이었던 전임 총장들과 달리 김경안 청장은 정치인 출신으로 발탁과 동시에 화제가 됐다. 정치인 출신 청장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려는 듯 그는 새만금과의 인연을 강조하며 "여권에서는 '강만금(萬金)'이라 불린 강현욱 전 전북도지사 이후 새만금 최고 전문가라고 자부한다"고 했다. 김경안 청장을 만나 최근 논란인 여권의 새만금 흠집 내기에 대한 입장부터 새만금 현안 해결 방안, 새만금 개발 구상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취임 축하드립니다. 중요한 시기에 중책을 맡으셨습니다. "취임 직후부터 대통령 행사와 대규모 투자협약, 잼버리 지원 등 굵직한 현안을 해결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보냈지만 새만금 발전을 위해 힘을 보탤 수 있어 큰 보람과 긍지를 느끼고 있습니다. 새만금은 제가 걸어온 40년 정치 인생 중 30여 년을 함께 한 사업으로, 지금의 새만금이 있기까지 사업의 전 과정을 가까이에서 참여하고 연구해 온 만큼 그간의 공력을 발휘해 새만금을 한층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새만금 잼버리가 논란 속에 마무리됐습니다. 여권에서는 이를 새만금 개발과 연관 짓고 있습니다. 새만금개발청장으로서 정치권의 움직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이신지. "새만금 개발은 잼버리 논란과 관계 없이 계속 추진될 겁니다. 잼버리로 인해 새만금 SOC 개발이 지연되는 등 새만금 사업에 차질이 발생하진 않으리라 봅니다. 현 정부에서도 새만금 개발을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한다는 기조인 만큼 크게 문제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새만금개발청은 새만금 기본계획에 따라 2050년까지 새만금을 글로벌 신산업의 중심지로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일관되게 새만금 사업을 추진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와 관련 이차전지 소재 전진기지로 주목받던 새만금의 이미지에도 부정적인 영향이 있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새만금 사업은 현 정부의 국정과제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국민의 관심 속에 성장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전북의 미래, 서해안의 미래가 새만금에 달려 있다며 새만금을 글로벌 기업이 모이는 도시로 조성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만금개발청은 이 같은 새만금 사업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할 것입니다. 공항, 항만, 철도 등 새만금 인프라가 적기에 조성되도록 관계기관과 협력하는 한편 새만금 이미지 개선과 투자 활성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새만금 잼버리 부지에 대한 사후 활용 방안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이에 대한 구상을 말씀해 주신다면. "새만금 기본계획에 따르면 잼버리 부지는 2030년까지 기업주도형 관광·신산업 복합단지 조성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관광·산업 개발이 결합한 복합 개발로 추진하되, 최근 변화된 투자 여건과 기반시설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사후 활용 방안을 구체화해 나갈 계획입니다."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청장님 스스로를 '새만금 전문가'라고 말씀하시죠. 도민들에게 그 이력을 설명해 주신다면. "윤석열 대통령도 제가 새만금에 대한 전문성을 가졌다는 점을 감안해 새만금개발청장으로 임명해 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 대통령직인수위 새만금TF 전문위원으로 참여해 새만금 토지이용구상안을 농업용지 72%, 비농업용지 28%에서 농업용지 30%, 비농업용지(산업·관광) 70%로 변경했습니다. 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정치인으로는 유일하게 새만금 분과 전문위원으로 여러 차례 참여했고, 현 정부 선대본부 새만금특별위원장 및 인수위원회 새만금발전기획단장을 역임하면서 국제투자진흥지구 지정 등을 국정과제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청장님께서는 취임 이후 '새만금 푸드허브'에 관심을 보이셨는데 푸드허브의 로드맵을 설명해 주신다면. "2021년 기준 세계 식품시장 규모는 약 7.6조 달러(약 9800조)로 2025년까지 연평균 5% 이상의 성장이 예상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식품 관련 무역적자가 367억 달러(약 48조)로 380억 달러(약 49조) 흑자인 네덜란드에 비해 수출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새만금은 공항·항만·철도 등 기업의 물류비를 절감할 수 있는 물류 인프라가 구축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광활한 농생명용지, 인근 국가식품클러스터 등과 연계한 식품연구-원료생산-가공-유통 등의 밸류체인 여건도 우수합니다. 현재 농식품부, 전북도에서도 새만금 푸드허브 관련 용역을 추진하는 등 정부의 관심과 지원 아래 새만금이 글로벌 푸드허브로 조성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발맞춰 새만금개발청도 식품허브지원TF를 주축으로 관계기관과 협력해 푸드허브 실행 방안을 추진해 나갈 계획입니다. 또 새만금 기본계획 변경을 통해 새만금 신항을 농식품 전용항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새만금 수상태양광 송변전 설비 설치 등 과제도 산적해 있습니다. 지지부진한 현안, 어떻게 풀어나갈 생각이십니까. "새만금 수상태양광 사업은 다수(9개)의 사업자가 선정돼, 사업자들이 계통 연계 비용을 공동으로 분담해야 추진이 가능한 전례 없이 어려운 사업입니다. 송변전 선로 공사(계통 연계)를 담당하는 한수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업자가 모두 선정된다고 해도 한수원이 계통연계 공사비를 선투입해야 사업이 추진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사업자 간 협의체를 통해 PF 조달 방안 등에 대해 협의하고 있습니다. 사업이 정상 추진 되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새만금에 대해 우려 또는 기대하고 계신 도민들께 한 말씀. "현 정부 들어 눈에 띄게 성장하고 발전하는 새만금의 모습에 도민들의 기대와 관심이 더욱 커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전북의 미래 먹거리, 미래 산업을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일념으로 새만금 사업의 속도를 최대한 끌어 올리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취임 직후 킬러규제개혁TF와 식품허브지원TF를 출범하고 기업의 의견을 수렴해 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도민들이 새만금의 확실한 변화를 체감하고, 그로 인한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경안 새만금개발청장은 익산 출신으로 남성고와 원광대 행정학과·행정대학원을 졸업한 김경안 청장은 오랫동안 지역발전을 위해 노력해 온 정치인 출신이다. 민자당 제14대 대통령선거 전북상황실장, 한나라당 전북도지부 기획조정실장과 전북도당 위원장을 역임한 김 청장은 1997년 비례대표로 전북도의회에 진출한 뒤 내리 3선을 했다. 이밖에 2007년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 국가경쟁력강화특위 새만금TF 전문위원, 2009년 한국농어촌공사 상임감사, 2014년 제6대 서남대 총장, 2020년 국민의힘 익산갑 당협위원장, 2021년 제20대 대선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중앙선대위 새만금특별위원장과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 지역균형발전위TF 새만금발전기획단장 등의 경력을 갖고 있다. 대담=이강모 정치부장, 정리=문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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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민주
  • 2023.08.22 18:02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⑫ 포크의 기록과 사진, 전라감영을 복원하다

△포크, 각 지역 최초 사진들을 남기다. 포크가 조선에 재임하였던 1884년 6월 ∼1887년 4월까지 4년간 촬영한 사진은 현재 43장(밀워키대학 도서관 소장본)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1884년 11월 1일∼12월 14일까지 진행한 삼남지역 조사 기간 중 포크는 약 33장 이상의 사진을 찍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중 충청 전라지역에서 29장을 찍었다. 즉, 공주 공산성 남문옆 건물에서 군사책임자인 중군 및 아들들 사진 4장(1장 현존), 은진미륵이 있는 관촉사에서 은진미륵과 사찰 경내모습을 찍은 사진 6장(1장 현존), 충남 강경 전경 사진(1장 현존) 등을 찍었다. 그리고 전라감영에서 전라감사와 군중들, 기생 사진 등 모두 6장의 사진을 찍었다.(2장 현존) 정읍 노령 갈재정상에서 북쪽을 향해 찍었고 장성으로 넘어가 장성 초입 현재 노령터널 바로 옆에 있는 원덕리 미륵불상을 찍었다. 그리고 나주에 들어가 읍성 사진, 목사와 군중, 남문 등 4장, 그리고 남원 만복사지에서 4장(1장 현존)의 사진을 찍었다. 따라서 이 기간중 촬영한 사진 중 충청권 3장 전라권 3장 그리고 부산 1장등 총 7장이 남아있다. 이들 사진 중 주목되는 것은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사진이다. 논산을 지날 때 지역주민들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아 마주한 거대한 불상에 감탄하며 자신이 함께 촬영 대상자가 되어 일행 중 한명(정수일?)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하여 유일하게 포크 자신이 찍힌 사진을 남겨놓고 있다. 그 동안 이 사진에서 포크 모습은 검은색으로 매우 작게 나타나 주목되지 못했다. 필자가 개별 사진을 확대해 포크의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진에서 흥미로운 것은 포크의 조사 당시 복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점이다. 즉, 1880년대 짙은 파란색 해군 장교 복장과 장교모자 및 가죽 장화를 신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습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주인공 유진 초이(이병헌)의 복장과 거의 같은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포크 일기에서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해군 장교 제복’과 ‘독수리 모습이 있는 모자’를 강조하였는 데 포크 사진에 나타난 모습과 복원된 1890년대 해군중위 복장에서 모자 중앙에 희미하게 나타난 독수리 상징모습이 드라마 주인공 유진초이 모자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당시 사진현상과 인화는 유리판에 은화합물을 발라 밀폐된 나무판 필름홀더에 유리판 필름을 넣고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안에서 열리게 하고 다시 밀봉해 보관하다 암실에서 현상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유리원판 필름을 사진으로 만드는 인화방식은 소금과 질산은 화합물을 발라 인화하는 방식과 계란 흰자를 이용한 알부민 인화지나, 젤라틴 인화지를 사용해 검은 상자에 보관하다 암실에서 유리필름에 밀착시킨 후 햇빛으로 인화하였다. 포크사진은 당시 유행한 젤라틴인화지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 현존하는 43장의 사진은 유기 화합물이란 점에서 시간이 갈수록 퇴락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한국 근대사의 실상을 담고 있고 일부 사진은 전라도 최초의 사진들이며 또 전라감영 역사의 증거라는 점에서 전라북도 차원의 사진자료 확보와 연구가 요청된다. △포크의 2장 사진 전라감영 선화당을 복원시키다. 필자가 포크 자료를 접하게 된 계기는 전라감영 복원 자료 확보과정이었다. 그리고 포크가 제공한 선화당 관련 정보는 1)포크의 일기 기록, 2)포크의 스케치 그림, 3)포크의 사진 3종류였다. 특히 중요한 선화당 내부와 관련하여 포크는 11월 11일자 기록에서 사진찍듯이 묘사한 전라감영에 대한 묘사를 통해 가장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선화당) ...가운데에는 뒷벽에 기대어 두 개의 커다란 병풍이 나란히 세워졌다. 오른쪽은 거대하고 화려한 용, 왼쪽은 맹렬한 큰 호랑이가 모두 화려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졌다.” 고 적었고 순간적으로 스케치한 그림에서는 호랑이와 용을 크로키처럼 묘사하였다. 그리고 사진 2장은 전라감영에 결정적 정보를 제공하였다 전주에서 찍은 사진 중 현존하는 2장의 사진은 전라감영 복원에 가장 중요한 선화당 내부의 모습을 제공하고 있다. 먼저 전라감사와 육방권속, 나인들이 찍힌 사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사진 배경인 병풍이었다. 이 병풍에 대한 자문(한국민화학회 회장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을 통해 중요한 복원 자료들이 확보 되었다. 즉, “전라감사 김성근과 6방 권속 및 나인을 찍은 사진에는 뒤로 약 2m이상의 병풍형 가리개가 나타나 있는데 사진 왼쪽은 범으로 오른쪽은 용으로 파악된다. 특히, 용호병풍도의 형식을 보이는 이 그림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민화풍의 병풍형 가리개로 파악”되었다. 또한 전라감영 선화당 병풍은 “중앙에서 파견된 매우 수준 높은 도화서 화원 화가의 작품으로 까치가 등장하고 호랑이 무늬를 표범무늬로 표현한 것 등에서 민화 까치호랑이의 도상을 참고하여 제작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용 그림 오른쪽 중단 즈음에 용의 머리가 사람들 사이에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자세히 보면, 용의 수염과 뿔의 일부가 확인된다. 용의 머리를 중심으로 보면, 머리 위로 몸체가 곡선을 그리며 굽이를 이루고 있다. 이런 요소가 스미소니언박물관 <용호도>의 '용'과 유사하다. 따라서 병풍 복원을 위한 현존 참고 병풍은 포크와 함께 근무했던 미국 해군무관 버나도(J. B Bernadou, 1858~1908)가 1884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 종로나 광통교(廣通橋) 인근에서 구입하여 미국으로 가져가 스미소니언박물관에 기증한 스미소니언박물관 소장 <용호도> 2점을 제시”하였다. 이를 근거로 완성된 것이 현재 전라감영 선화당에 전시된 병풍이다. (병풍제작은 한국민화학회의 추천을 통해 남정예 작가가 수고해주셨다.) 본 병풍은 현존 감영 중 유일하게 선화당 내부에 복원된 것으로 전라감영의 위용과 기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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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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