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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팔도명물) ‘바삭바삭’ 소리까지 맛있는 남원부각, 남원 명물 납시오!

채소나 해초를 손질해 찹쌀 풀이나 밀가루를 묻혀서 말린 다음 필요할 때 기름에 튀겨내는 부각. 고소한 맛과 식감으로 사랑받는 부각은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우리나라 전통음식이다. 특히 남원부각은 밀가루나 달걀을 입히지 않고 마른 재료에 찹쌀 풀을 발라서 그대로 튀겨내는 남원 대표음식이다. 남원산 찹쌀만을 사용해 생산되는 특성 때문에 남원부각은 부각 본연의 고소한 풍미가 진하고 씹는 맛이 우수한데다, 영양면에서도 빠지지 않아 반찬으로도 좋고, 술안주, 아이들 간식으로도 최고의 식품으로 꼽히고 있어 전국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보유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남원시는 남원부각을 ‘고향사랑기부제 답례품’으로도 선정하기도 했다. 부각 대표생산지 전북 남원 실제로 남원은 부각의 대표 생산지로 연간 1263여톤의 부각을 생산, 국내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수요를 입증하듯, 남원부각 생산업체들은 지난 2015년에는 14개 업체에서 41억 원의 매출액을 기록했다가 2021년 기준 42개소로 대폭 확대, 120억 원의 매출액을 달성하는 등 꾸준한 성장률과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남원이 부각의 대표 생산지가 된 것은 소금을 싣고 섬진강을 따라 남원시내를 관통하는 요천의 나루터를 왕래하던 뱃길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소금배에 실려 온 김을 남원 권번에서 김부각이라는 고급요리로 만들었고, 전국으로 퍼지면서 유명해진 것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원에서 생산되는 부각이 특별한 이유는 질 좋은 찹쌀 때문이다. 여기에 부각의 재료에 바를 찹쌀 풀을 인공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멸치, 파, 다시마, 새우, 무, 소금 등 천연재료를 사용, 만들고 있어 많은 이들이 남원 부각을 찾고 있다. 그러한 맛 때문인지, 남원 부각은 몇 해 전 남원과 인연이 닿아있는 인기 걸그룹 ‘마마무’의 멤버 화사가 예능방송에서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며 유명세를 톡톡히 치른 바 있다. 그 인기는 국내를 넘어서 국외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20년 11월 26일에 방영된 MBC뉴스터치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서 검은 종이라고 불리는 김을 활용한 김부각은 코로나19 이후 건강한 먹거리로 급부상하면서 짭짤한 한국산 김부각, 김스낵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최고의 간식이 됐다고 보도됐다. 그러면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지난 2020년 10월 국내산 김의 미국 수출액은 1억 14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4%나 늘었다고 보도됐다. 또 보도에 따르면 미국인들 특히 김부각과 같은 스낵 형태 제품을 많이 찾고 있는데,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저장성이 높은 스낵 매출이 증가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며 여기에 김이 최근 미국과 유럽 등에서 코로나19 이후 건강한 먹거리로 급부상한 원인도 있다고 보도된 바 있다. 남원부각 전략적 육성 남원시는 이렇게 부각의 수요와 인지도가 상승하자, ‘남원부각’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며, 대한민국 부각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지난 2015년도부터 지역농산물을 활용한 건강하고 안전한 식품, 농업과 식품의 동반 성장을 추구하고자 농식품산업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전통식품인 부각산업을 지역전략식품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그 가운데 지난 2018년에는 남원시부각협동조합이 주최하고 남원시와 전라북도농업기술원, 농촌진흥청이 주관, ‘제1회 부각페스티벌’을 개최해 남원부각의 우수성 등을 알렸고, 지난 2020년부터는 남원부각의 역사와 전통성, 생산방법 등 남원부각만이 가진 제조 방법을 차별화하고, 인식시키기 위해 지리적 표시 증명표장 등록 완료했고, 남원 부각 지리적표시제를 운영하기 위해 조례 및 규정 등을 준비하고 있다. 지리적표시 증명표장 제도란 상표법에 따라 상품의 생산방법, 품질, 명성 등의 특성이 특정 지역에서 생산‧제조‧가공된 상품임을 나타내는 표시로 타 지역에서 생산된 제품이나 유사 제품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제도다. 또, 시는 남원부각의 명성과 우수성을 지리적 표시로 보호하고 소비자에게 신뢰와 이미지 제고를 위해 상표등록도 추진하고 있다. 지난 2019년에는 국내 부각산업의 현황 분석을 통한 남원부각의 차별화 전략 수립을 위한 남원부각 활성화 심포지엄을 개최한데 이어, 지역산업 맞춤형 일자리 창출 지원으로 남원전통식품산업 일환의 창업을 육성하는 등 부각산업을 적극 육성시키고 있다. 특히 시는 전통 식문화의 계승 발전과 소비저변을 확대하고자 2019년 전통식품 체험시설 공모에도 선정, 이를 구축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남원부각 산업을 대한민국 전통식품산업 일번지로 구축하고 있다. 남원시 관계자는 “남원의 대표 전통식품인 부각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우리 시에서는 남원부각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남원의 맛 전통을 살린 전통식품명인 육성으로 지역의 브랜드 경쟁력을 제고하고, 6차산업과 수출 성공 모델 및 부각산업을 우리 농업농촌의 지속가능한 성장엔진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남원시는 이밖에도 향후 국내시장에서도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는 남원부각을 더욱 활성화시킬 전략으로 미국, 싱가포르, 베트남, 인도네시아, 국내 면세점 등에 공급, 남원부각의 전통적인 맛을 세계 수출시장에 더욱 확대 진출시킬 방침이다. 부각의 변신은 무죄, 명절 선물로도 인기 이러한 남원부각은 현재 다양한 모양과 맛으로 변신하는 중이다. 실제로 남원 부각업체들은 감자부각, 고추부각, 가죽부각, 들깨부각, 파프리카부각, 김부각 등 다양한 우리 농산물로 제품을 다양화시키고 있으며, 밥반찬용, 스넥류, 간식용, 안주용 등 다양한 용도로 생산, 소비자들의 욕구와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특히 식물성 지방을 가장 많이 섭취할 수 있는 음식 가운데 하나여서 명절 선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10년째 남원에서 부각을 만들고 있는 부각업체 예미담의 경우 10가지 국내산 원료에 국산 김만을 사용, 화학조미료와 첨가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유전자 변형이 없는 현미유(NON-GMO)를 사용해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예미담 김경남 대표는 “직접 만들어 먹을 수밖에 없었던 옛날 방식이 달리 요즘 부각은 간편하게 제조된 여러 상품들이 시중에 많이 출시돼 다양한 맛을 찾는 젊은 사람들부터 어른들까지 다양한 세대들이 부각을 구매하고 있다”면서 “가격대도 부담 없고, 선물하기 좋아 명절선물로 부각을 찾는 사람이 해마다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예미담은 해마다 명절상품을 기획하고 있다. 올해도 추석맞이 행사로 마련한 미니 모둠선물세트(전통김부각 3봉, 반찬용 1봉, 다시마 1봉)를 1만 4000원에, 고급 모둠선물세트(전통 4봉, 반찬 2봉, 다시마 2봉)를 2만 3000원에 판매한다. 프리미엄 모둠선물세트(전통 6봉, 반찬 3봉, 다시마 3봉)는 3만 2000원에, 최고급 선물세트(전통 2봉, 반찬1봉, 다시마 1봉 150g)는 4만 5000원에 특별 판매한다. 4만 원 이상 구입 시 배송료는 없고, 대량으로 주문할 경우에는 가격조정도 가능하다. 한편 다른 남원부각을 구입하려면 사이버 남원시 농특산물 쇼핑몰인 남원사이버장터(www.lovenamwon.co.kr)와 전북도에서 운영하는 거시기장터(www.jbplaza.com)에서 우체국에서 운영하는 쇼핑몰(mall.epost.go.kr) 및 쿠팡, 네이버 등 다양한 인터넷 채널 및 자체 홈페이지를 통하여 구입할 수 있다.

  • 기획
  • 신기철
  • 2023.08.17 17:33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 자활사업의 또 다른 벽. '비뚤어진 시선'

‘자활(自活)’ 사업은 근로 능력 있는 생활보장수급자, 차상위 계층 등 저소득층이 스스로 자활할 수 있도록 자활 능력 배양, 기능습득 지원 및 근로 기회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특히 고용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자활센터는 경제 사업을 펼쳐가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사회복지시설과는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저소득층의 삶의 질을 변화시키는 데는 교육·상담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노동의 조건을 개선하는 일이 변행돼야 한다. 삶의 주체로써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조건 중에 노동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군산지역자활센터 사회서비스형 다올환경/백영규 △사회적 책임을 온전히 받아내는 자활센터 현재 자활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정확하다 할 수 없다. 자활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물음과 답을 찾기에 앞서 눈에 보이는 자활 현장만을 보고 판단하고 있다. 자활사업 현장은 매우 열악하다.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선의 노력은 다양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지만 한계의 벽은 높기만 하다. 자활사업 참여자들은 경제적 불안감 속에서 몸과 마음에 켜켜이 쌓인 상처와 아픔으로 세상에 발을 내딛기가 쉽지 않다. 일반적인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자활사업에 몸 담고 있지만 외부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희망을 찾기 힘들어지고 자존감마저도 떨어진다. 자본주의라는 무한 경쟁 시대라지만 그들에게는 가혹하기만 하다. 고립과 외로움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힘이 부족하다. 때문에 자활사업의 기능과 역할은 단순히 사회복지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사회복지의 틀을 뛰어넘어 사회통합과 사회 안전망으로 견고하게 다지기 위해 그에 맞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자활사업의 고충 저소득층에게 온전한 삶을 되돌려주기 위한 다양한 자활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생산체계가 열악하다. 그나마 가지고 있는 노동력조차 제대로 발휘하기 쉽지 않다. 악순환의 고리가 지속되고 있다. 열악한 생산체계를 개선하는 일은 절실한 직면 과제이다. 생산체계는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생산성과 관계를 만들고, 심리·정서, 사회, 경제적 자활이 함께 연동되어 작동돼야 한다. 이 때문에 자활현장은 생산체계 구축에 몰두하고 있다. 시설과 장비, 자산 등록이 요구되는 생산체계 구축이 절실함에도 자활센터 운영주체는 법인도, 일반인도 아닌 만큼 한계가 있다. 법인자산과 자활센터 자산은 분리되어 관리·운영돼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통상적으로 자활센터장 개인의 명의로 등록·운영될 수밖에 없다. 혹시 모를 문제 발생을 대비해 자활센터장은 보증보험에 가입해야 하고, 모(母) 법인의 지급보증각서까지 제출해야 운영이 가능하다. 이로 인한 부작용도 발생되고 있다. 실례로, 최근 치유농업 프로그램 운영을 위해 컨테이너를 센터장 명의로 등재하고 진행해 온 것과 관련,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언론보도가 있었다. 자활센터 차량과 사업자 등록 등이 센터장 명의로 되어 있다보니, 센터장 소득이 9분위나 10분위에 해당됨에 따라 자활센터는 ‘센터장 명의 등재’로 인한 고충을 겪고 있다. 이에 대해 임탁균 익산지역자활센터장은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한다면 그 또한 주어진 임무를 방기하는 것이니 핑계 삼을 수도 없다”고 안타까워하며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를 비롯한 중앙 부처에서도 고민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해법을 짧은 시간에 찾기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자활에 부정적인 시선은 사업 자체를 위협하기도 한다. 정부의 보조금으로 사업을 운영하면서 영세업자들의 생계를 위협한다는 민원이 많다. 하지만 자활사업은 다른 사회복지 영역과는 달리 수익 창출이 필요하다. 수익을 창출하지 못한다면 자활사업은 종료될 수밖에 없고, 결국은 또 다른 사업을 만들어 운영해야 한다. 이로 인한 예산 낭비는 당연하며, 자활사업 참여자들의 삶의 의욕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자활사업은 크게 사회서비스형과 시장진입형으로 나뉘어 운영된다. 사회서비스형은 자활사업에 투입되는 사업비의 10% 이상을 매출로 달성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자원재활용 사업 등 3D 직업이 대부분이다. 시장진입형의 경우. 투입 예산의 30% 이상을 매출로 달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일반시장의 진출을 준비하거나 자활기업 창업을 위한 사업이다. 대표적으로는 음식점이나 카페 등 일반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 사업들이다. 다시 말해 자활사업에 투입되는 사업비에 따라 매출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매출액은 한국자활복지개발원에서 운영하는 중앙자산키움펀드로 일부 적립된다. 이 펀드는 자활사업을 운영할 수 있는 지원금으로 다시 사용된다. 소상공인들에게는 중소기업에서 지원하는 다양한 공모사업이나 지원사업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자활사업은 이 중앙자산키움펀에드에서 공모사업이나 지원사업을 통해서 자활사업을 운영하게 된다. 이렇듯 자활사업은 자신들의 매출액을 모아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사회적 인프라 구축에 지자체와 지역사회가 함께해야 자활사업의 성패는 자활의 필요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참여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지자체를 비롯한 지역사회가 함께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한다면 더할 나위 없다. 대표적으로 진안지역자활센터에서는 지난 6월부터 연말까지 지역 내 사회복지시설·단체 이용자 및 종사자를 대상으로 사회공헌 사업을 운영한다. 자활사업 운영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저소득층의 자존감 향상과 지역 내 사회복지시설 및 단체와의 연대와 협력 구축을 위한 것이다. 유정 진안지역자활센터장은 “사회공헌을 통해 자활사업이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지역주민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업이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진안지역자활센터의 사회공헌 사업 운영은 자활사업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사업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목적사업 수행에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면 지역사회가 올바르게 이해하고 빈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라는 강력한 메시지도 담고 있다. 행복하게 살고 싶고, 열심히 살아온 저소득층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으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지정한 지역사회공동체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백영규 전북광역자활센터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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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16 12:51

신뢰와 소통 중심 발로 뛰는 남원시의회

지난해 지방자치법 전부 개정 법률 시행에 따라 처음으로 인사권 독립과 정책지원관 운영 등 제도적인 기능이 강화되어 출범한 제9대 남원시의회는 시민들에게 신뢰받는 의회, 시민들과 소통하는 의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적극적인 의정활동에 매진했다. 여러 지방의회의 양당구조 속 원구성 갈등과는 다르게 제9대 남원시의회 의원 16명은 모두 같은 정치를 지향하며 원만히 원구성을 마무리했다. 이어 전평기 의원이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갈등과 반목이 아닌 협치를 바탕으로 ‘시민과 소통하며 신뢰받는 의회’라는 구호를 만들고 본격적인 의정활동에 돌입했다. 초선의원의 열정과 재선의원의 경험을 토대로 남원시의 발전과 시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적극적인 의정활동을 전개하며 역대 의회보다 한층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줬다. 남원시의회는 지난 1년간 3번의 정례회와 6번의 임시회, 총 9회의 회기일정을 운영하며 시정에 민의를 대변하기 위해 의정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특히 꼼꼼한 행정사무감사와 시민을 생각한 조례 제·개정, 지역에 꼭 필요한 예산을 배정하기 위한 예산결산안 심사 등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의정에 반영해 지역의 발전과 시민의 복리증진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문성·역량 강화 통한 의정활동 출범 초기 초선의원이 많은 제9대 남원시의회에 요구되었던 것은 정책을 개발하고 시정의 개선점을 찾아낼 수 있는 의원의 전문성 및 역량 강화였다. 이에 남원시의회는 전문가를 초청한 의원 연수를 통해 행정사무감사 기법이나 조례개정 방법, 시정의 개선점 발굴 방법 등 지방의회의원으로써 필요한 관련 기법들을 배우게 하고 정책지원관을 채용해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보조하여 의원들의 역량을 크게 높였다. 주요 의정활동을 살펴보면 행정사무감사를 통해 594건에 이르는 문제점을 파악하고 시정·처리 요구하여 시정의 투명성을 강조하였고 남원관광지 민간개발사업 추진상황, 2022년 하반기 인사의 문제점, 남원 드래곤 관광단지 조성사업 문제점, 시장의 인사 관련 제반문제 등 4건의 시정질문을 통해 남원시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민의를 대변하여 남원시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지역의 발전과 시민의 복리증진을 목표로 9번의 회기를 통해서 조례 제·개정안 105건, 예산·결산안 11건, 동의안 25건, 기타 55건 등 총 196건의 안건을 처리했다. 특히 47건의 의원발의 조례 제·개정과 54건의 5분 자유발언, 15건의 건의·결의안 채택하여 시민 생활에 꼭 필요한 분야의 개선과 시민이 필요한 정책을 펼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소통 중심 발로 뛰는 현장 의회 남원시의회는 의정구호인 ‘시민과 소통하고 신뢰받는 의회’를 만들기 위해 직접 현장을 둘러보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각종 민원 현장을 방문하여 문제 해결을 위해 힘썼고 운봉 화수교, 춘향 스테이션, 남원 아트센터, 육아종합지원센터 등 관련 사업 현장을 직접 시찰하며 개선해야 될 사항은 없는지, 공사를 진행하면서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사항은 없는지 등 제반 사항을 꼼꼼히 확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외에도 남원시의회는 현장 소통 행정을 구현하기 위해 남원시민의 염원인 공공보건의료대학 설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공공의료대학 법안의 연내 통과를 위해 국립의학전문대학원 유치지원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전방위적 지원을 하고 5분 자유발언, 건의안, 피켓시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의 만남 등을 통해 공공의대를 유치하기 위한 활동에 온 힘을 다했다. 이어 이상기온으로 인한 봄철 냉해 피해를 입은 농가를 살펴보며 관련 지원대책 및 예방대책을 검토하고 위험 농로 구간을 확인하여 여름철 농가 사고를 방지하는 대책을 내놓는 등 각종 재난을 대비하기 위한 현장 점검을 나섰다. 또한 산불이나 폭설 등 재난으로 인해 고생했을 직원들에게 그동안의 노고를 격려하며 애로사항을 청취하는 등 내부 직원에 대한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공부하는 의회’·‘열린 의회’ 구현 노력 남원시의회 의원들은 의정 역량 강화 구현을 목표로 연구단체를 만들어 공부하고 발전하는 의회상 구현에 힘썼다. △탄소중립 그린도시 만들기 연구회 △구룡계곡 역사 생태 보존연구회 △요천 경관 연구회 △조례분석연구회 △남원형 치유농업연구회 △전통시장 활성화 연구회 등 시민생활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연구단체들을 만들었다. 해당 연구단체들은 대표의원을 중심으로 간담회, 전문가 초청 강연, 시민 아카데미, 각종 캠페인 및 세미나 등을 통해 전문지식을 습득하고 시민과 소통하며 관련 문제들에 대해 해결책을 찾고 시정에 의견을 반영하는데 초점을 맞춰 활동했다. 또한 우수 사례 현장 방문(벤치마킹)을 통해 타 지자체의 성공사례를 분석하며 그 성과를 의정활동에 접목할 방안을 마련하였다. 그 밖에도 남원시의회는 열린 의회를 만들기 위해 청소년 의회교실 및 견학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지방자치제도의 이해와 학생들의 진로 탐색을 도왔다. 현재 2023년도 청소년 의회교실은 총 16회에 걸쳐 관내 청소년 269여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며 견학프로그램의 경우 4회에 걸쳐 78여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해당 프로그램들은 지방의회의 역할을 이해하고 민주적 의사결정 체험 기회를 제공하여 열린 의회상을 구현했고 청소년들에게 미래 세대의 성숙한 민주시민 의식을 키워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평기 의장 “버팀목 되는 든든한 의회, 시민과 소통하고 신뢰받는 의회 만들 터” 새로운 지방분권 2.0시대를 맞이하여 제9대 남원시의회는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의정활동을 펼치고 의회의 역할에 대한 시민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투명하고 공정한 의정활동으로 의회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고 의회의 본질인 행정의 파수꾼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여 믿을 수 있는 의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전평기 남원시의회 의장은 “새로운 지방자치 시대를 맞이한 오늘날 우리 제9대 남원시의회는 오로지 남원시민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하며 언제나 시민들의 곁에서 버팀목이 되는 든든한 의회, 시민과 소통하고 신뢰받는 의회를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신기철
  • 2023.08.13 15:16

[한국전쟁 정전 70년] 피란수도 부산, 1023일의 기록 (하)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은 명실상부한 정치, 외교,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전국에서 모여든 예술인들은 광복동 일대 다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전쟁의 포화 속에도 문화예술의 꽃을 피웠다. △격동기 정치 중심에… 한국전쟁기 부산이 처음 임시수도가 된 시기는 1950년 8월 18일부터 10월 26일까지다. 서울 수복 후엔 부산에 있던 정부 기관도 환도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1년 1월 3일 정부는 모든 정부 기관을 부산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한다. 부산 서구 부민동에 있는 경남도청사(현재 동아대 석당박물관)가 임시 중앙청이 된다. 경남도지사 관사(현재 임시수도기념관)는 대통령 관저로 활용된다. 국회는 중구 부산극장에 있다가 이후 경남도청 체육관인 상무관을 사용한다. 1940년대에 지어진 남포동 소화장아파트는 국회의원 관사가 됐다. 미국대사관은 부산 미문화원에 자리를 잡는 등 각국 외교 기관도 부산으로 옮겨온다. 체신부는 부산우체국을 사용하고, 부산시청사는 사회부와 문교부 등이 사용한다. 특이한 점은 대체로 중구에 자리를 잡은 다른 정부 부처와 달리 교통부는 부산진구 범천동에 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부산시민들이 범곡교차로 일대를 ‘교통부’라 부르는 이유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장기 집권을 위한 첫 번째 개헌이 이뤄진 곳도 부산이었다. 부산일보사가 1980년대에 발간한 책 <비화 임시수도 천일>에 따르면, 1952년 5월 26일 0시를 기해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을 발동한다. 바로 ‘부산정치파동’의 시작이다. 이날 오전 동래구 온천장을 출발한 국회 통근버스는 중구 광복동 동아극장 앞에서 국회의원 30명을 더 태워 모두 47명을 싣고 임시 의사당이 있는 경남도청 정문을 들어서려다 총 든 헌병의 검문을 받는다. 이에 맞서 1시간을 버티던 국회 버스는 결국 군용 크레인에 의해 사람이 탄 채로 헌병대로 끌려갔다. 몇몇은 국제공산당 음모 사건 피의자로 구속 당했고, 야당 의원 30명은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아 여름 내내 숨어 지내야 했다. 이로부터 39일 만인 7월 4일 야당 의원이 제의한 내각책임제 개헌안과 정부 제안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교묘히 절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온갖 위협과 탄압 속에 통과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고, 1960년 4·19로 하야할 때까지 12년 장기 집권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 이에 앞서 부정부패의 시발점으로 꼽히는 중석불(弗) 사건도 있었다. 중석불이란 중석(텅스텐)을 수출해서 번 달러라는 의미다. 우리나라의 거의 유일한 수출 품목인 중석을 수출해서 벌어 들인 달러로는 원래 양곡과 비료를 수입할 수 없게 돼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긴급을 요한다는 구실로, 15개 상사에 총 25건 483만 5300달러에 달하는 중석불을 불하한다. 업자들은 이 돈으로 소맥분 같은 양곡, 비료를 도입해 무려 500억 원의 폭리를 봤다. 이 돈이 격동기 정치자금으로 쓰이면서 건국 후 첫 정경유착 사건으로 남게 된다. △부산항과 국제시장 부산항은 전 세계의 원조 물자가 들어오는 창구였다. 동아대 사학과 전성현 교수는 “한국전쟁 시기 구호물자의 3분의 2 이상이 부산항을 통해서 들어왔다”며 “부산항을 중심으로 물자가 유통되면서 이때부터 서비스업 중심의 부산 경제 구조가 형성됐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전국이 전쟁터가 되면서 생필품 공장조차 제대로 가동되지 못한다. 부산항을 통해 들어와 국제시장에서 유통되는 각종 물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유엔 원조물자나 미군용품이 부정 유출된 경우도 많았다. 남의 물건을 조금씩 슬쩍슬쩍 훔쳐 내는 짓을 속되게 이르는 ‘얌생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2021년 부산시가 펴낸 구술 채록·자료집 <피란, 그때 그 사람들>에도 ‘얌생이꾼’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운송물자 중에 값이 나갈 만한 것을 무조건 트럭 밖으로 집어 던지는 거야. 던지면 운반책이 주웠어. 그때 서면 일대가 판잣집으로 되어 있는데,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들어가면 나오지를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미군이 추격해도 찾지를 못해. 그래서 그걸 ‘얌생이 몬다’라고 했어.”(1934년생 박형숙 씨 구술) 대기업들은 부산에서 그룹의 뿌리가 된 기업을 일궜다. 삼성그룹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제일제당은 현재 부산진구 부전동에 터를 잡았다. LG그룹(옛 럭키그룹)의 모체가 된 락희화학공업사도 이 시기 설립된다. 부산일보사가 발간한 <비화 임시수도 천일>에 따르면, LG그룹의 창업주인 구인회·정회 형제는 서구 서대신동 판잣집 비슷한 가내 공장에서 소위 ‘동동구리무’라고 불리던 여성용 크림을 만들었다. 제대로 된 화장품 용기가 없어 고물상에서 외제 통을 수집해 썼는데, 뚜껑이 없어 말썽이었다. 고심 끝에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플라스틱 뚜껑을 만들기로 하고, 원료와 전열기·금형기계를 들여온다. 플라스틱 뚜껑 제조는 대성공을 거둬 300만 원으로 시작한 자산이 3억 원으로 늘어났다. 자신감을 얻은 구 씨 형제는 부산진구 부전동에 약 165㎡(50평) 규모 공장을 새로 짓고, 미국에서 플라스틱 제조 기계를 도입했다. 처음 생산한 상품은 ‘오리엔탈’이라는 상표의 빗이었다. 이 빗이 우리나라 최초의 플라스틱 제품이다. △문화공간이 된 다방 전쟁기 부산에서 문화도 꽃을 피운다. 화가 이중섭과 김환기, 작가 김동리, 황순원을 비롯한 문인과 음악가, 영화인도 피란을 왔다. 갈 곳 잃은 예술가들을 품은 것은 다방이었다. 다방은 전화 연락이 가능한 곳으로, 타지와의 교신을 위해 주소를 제공하거나 일자리를 알선해주는 역할까지 했다. 더마루아트 박진희 대표(미술평론가)는 “폭격에서 안전한 부산으로 예술가가 몰리면서 다방도 우후죽순 생겨났다”며 “중구 광복동의 다방은 미술가에게는 전시장으로, 문인에게는 작품 발표 장소 등으로 문화센터이자 살롱의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다방으로는 △밀다원 △금강 △뉴서울 △루네쌍스 △금강 △휘가로 △늘봄 △파도 △망향 △비원 △스타 다방 등이 있었다. 특히 광복동 일대는 국제시장이 인접해 있어 소비와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생계를 위해 작품을 팔아야 했던 화가들에게는 전시를 열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가 됐다. 피란 생활 중 이중섭이 오랜 시간 머무르며 담뱃갑 속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던 곳도 다방이다. 그의 예술혼을 상징하는 '은지화'의 요람은 금강다방으로 알려져 있다. 밀다원다방은 김동리의 단편소설 ‘밀다원 시대’에도 등장한다. 경남 통영 출신의 화가 전혁림이 피란 중 1952년 첫 개인전을 열었던 곳도 밀다원다방이었다. 전혁림미술관 전영근 관장은 “당시 시인 유치환이 써준 전시회 초대 글(발문)이 현재 통영 전혁림미술관에 남아 있다”고 밝혔다. 부산일보=이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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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13 14:27

[도시의 시간, 성장동력을 만들다]⑦ 쇠락한 원도심, 청년과 주민들이 살려내다

도시재생의 성과와 과제 공주 원도심 재생과 사회적기업 '퍼즐랩' 우리나라 도시들은 198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신도시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오래된 도시다. 기능으로는 ’발전과 쇠퇴를 반복해오면서 특정한 지역 산업을 갖게 된 도시’이거나 그 도시만의 ‘두드러진 향토색을 가진 도시’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오래된 도시들은 발전과 쇠퇴를 반복해오면서 성장 동력을 잃었다. 한 시대, 우리나라의 도시발전 정책은 ’확장성‘의 가치를 앞세웠다. 도시마다 신시가지 개발이 유행처럼 번졌다. 도시의 확장에 환호했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신도시 건설에 집중하는 사이 원도심 쇠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도시는 확장했으나 오래된 도시들의 고민은 다시 시작됐다. 쇠락한 원도심 살리기에 정부가 나선 것은 꽤 오래전이다. 정책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도시재생 정책이 만들어졌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도시재생 사업은 2018년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도시재생 뉴딜 정책’으로 선정되어 추진된 것들이다. 5년 동안 해마다 10조 원씩 50조 원을 투자하는 도시재생 뉴딜정책의 목표는 전국 500개 지역을 재생시키는 것이었다. 전면 개발 대신 지역이 주도하는 도시재생으로 도시 공간을 혁신하고 일자리를 창출해 지역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도시정책 목표이기도 했다. 전국의 수백 개 도시가 도시재생의 가치를 내세워 쇠퇴한 도심 살리기에 나선 배경이다. 역사문화자원에 재생을 더해 얻은 가치 충남 공주시는 도시재생 우수지역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부여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도읍이었던 공주는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충청도 전체를 관할하는 충청감영과 관찰사가 주재했던 명실상부 충청도의 중심도시였다. 1932년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위상은 변했지만 공주여자사범학교(현 공주교육대학교), 공주사범대학(현 공주대학교) 등이 개교하고 중고등학교들이 들어서면서 공주는 교육의 도시가 됐다. 오래된 도시들이 그렇듯이 공주도 1980년대, 도시 확장에 도시의 미래를 걸었다. 금강 너머 북쪽에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인구 이동이 이어졌다. 상권이 옮겨지자 원도심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면서 도시의 영역은 더 위축되어 한때 22만 명이나 됐던 인구는 반 토막으로 떨어졌다. 그러던 공주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제민천 일대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쇠락하던 원도심도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미미한 숫자지만 57년 만에 인구가 증가했다는 반가운 소식도 있다. 공주의 도시재생은 꽤 오래전부터다. 고도 보존 및 육성사업(고도보존육성 기본계획)이 그 바탕이다. 2014년부터는 본격적인 도시 재생 사업 로드맵을 세우고 선도사업을 추진했다. 하숙마을, 문화예술촌을 비롯해 고성에 오르는 골목길, 박찬호 골목길, 근대문화골목길 등 골목길 사업이 이 시기에 이뤄졌다. 2019년에는 ‘도시재생 뉴딜 사업’에 선정되면서 보다 본격적인 재생사업이 시작됐다. 올해 말까지 5개년 사업으로 추진된 공주의 뉴딜은 역사·문화 자산을 활용해 쇠퇴한 도심을 살리는 것이 중심이다. 관 주도가 아닌 주민 주도의 사업을 확충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 그동안 도시재생 선도사업 지정을 시작으로 옥룡동 도시재생 뉴딜사업, 중학동 도시재생 뉴딜사업 등 다양한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하면서도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주민참여형 도시재생 사업을 앞세웠었다. 공주시는 올해까지 '문화와 세계문화유산을 품은 공산성 마을'을 목표로 주거지지원형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내년까지 '제민천과 함께하는 역사문화 골목 공동체'를 목표로 중심시가지형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추진한다. 공주 도시재생 사업의 중심에는 주민과 청년이 있다. 시는 지원사업 공모뿐만 아니라 주민역량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사업을 주체적으로 이끄는 주민들의 역량 강화를 위해 시민대학을 운영하고, 마을 가꾸기 분과를 만들어 주민이 도시재생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자 주민들의 참여는 눈에 띄게 늘었다. 도시재생 사업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위해 마을관리사회적협동조합 설립도 계획하고 있다. 송두범 공주시 도시재생지원센터장은 "공주는 여전히 인구 감소 현상이 이어지고 있지만, 청년들이 소소한 행복을 위해 찾아오고 일정한 기간이나마 살고 싶어 하고, 여기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지역의 혁신과 발전을 위해서는 주민들의 참여와 청년들이 필요한데 공주는 그런 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시기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제민천과 원도심 활력을 이끄는 주식회사 퍼즐랩 제민천은 공주의 원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물길이다. 공주는 금학동에서 시작해 금성동까지 4.2km를 흘러 금강에 이르는 제민천을 중심으로 도시를 형성했다. 그러나 신시가지가 개발되며 주요 상권이 이동하자 제민천 주변은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원도심으로 쇠락하고 말았다. 제민천은 오염되어 악취가 나고 비가 오지 않으면 물도 흐르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 공주시는 제민천 살리기에 나섰다. ‘제민천 생태하천 조성사업’과 ‘제민천 활력거점 조성사업’으로 주변 하수도를 정비하고 반죽동 일원에 하숙마을과 문화예술향유 공간을 만들었다. 맑고 깨끗한 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자 서서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여행객들이 늘어나면서 외지의 청년들이 하나둘 공주를 찾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청년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일을 도모하며 지역의 미래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사회적기업 ‘퍼즐랩’(대표 권오상)이 있다. 퍼즐랩은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일종의 지역 관리회사다. 공주가 가진 고유한 자원을 주목한 권오상 대표가 게스트하우스 ‘봉황재’를 운영하다 2019년 커뮤니티 기반의 사업을 고민하며 창업했다. 퍼즐랩은 마을 안에서 개개인에게 맞는 다채로운 커뮤니티와 프로젝트를 통해 사람과 사람을 느슨하게 연결하는 일을 한다. 퍼즐랩의 사업은 창업 4년 만에 큰 폭으로 확장됐다. 한옥 게스트하우스 ‘봉황재’와 ‘버드나무빌’, 커뮤니티호텔 ‘슬로크루즈’ 등의 숙소와 공유오피스인 ‘업스테어스’, 교육장인 ‘금강관’, 노인회관을 이용한 팝업 공간, 마을 자원을 활용해 소비와 유통을 이끄는 ‘크림오브엑스’와 마을 안내소 등이 모두 퍼즐랩이 운영하는 공간이다. 공주 원도심의 ‘마을 스테이’와 청년마을 ‘자유도’는 퍼즐랩이 설립한 브랜드 프로젝트다. 마을 스테이는 퍼즐랩이 운영하는 숙소와 원도심의 식당, 카페, 책방, 공방, 갤러리 등 다양한 운영자들이 네트워크를 구축해 일관성 있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이다. 이 네트워크에는 마을 주민들도 마을해설사로 참여하고 있다. 청년마을 ‘자유도’도 '마을 연결' 브랜드다. 공주 원도심을 찾아온 청년들이 이 마을 안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각자의 자유 의지에 따라 삶과 일을 펼칠 수 있는 다양한 요소가 갖춰져 있다. 원도심에 자리 잡은 다양한 공간을 중심으로 행사를 열고 참여한 사람들이 다시 공통적인 관심과 가치로 연대하는 틀을 확장해가는 퍼즐랩의 커뮤니티 프로젝트에는 청년들 뿐 아니라 원주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늘고 있다. 퍼즐랩이 이즈음 새롭게 추구하는 것이 있다. 관계 인구(생활인구) 만들기다. 도시 대부분이 정주 인구 확보를 위해 청년들을 유입하는데 매달리고 있지만, 이제는 정주 인구가 아닌 관계 인구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퍼즐랩의 판단이다. 장원희 프로젝트 매니저는 ”거주하지 않지만 일을 위해 도시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도시를 성장시키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이라며 “관계 인구가 공주시에 와서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그들 또한 이곳에서 일거리를 찾아 정착하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 퍼즐랩 직원 중 과반수는 다른 도시에서 온 청년들이다. 일을 찾아왔다가 아예 공주로 거주지를 옮긴, 관계 인구로 시작해 정주 인구가 된 경우다. 퍼즐랩은 지난 2021년 행정안전부의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에 선정됐다. 서울과 수도권 밖에 청년이 머물고 싶어 하는 마을을 만드는 이 사업에 2021년 한 해 동안 140명이 넘는 청년들이 참여했다. 이들 중에는 공주에 남았거나 다시 찾아와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는 청년들도 여럿이다. 느슨하지만 강력한 결속력으로 만들어 내는 지역 커뮤니티의 힘으로 공주의 원도심을 바꾸어 가는 퍼즐랩은 건강한 커뮤니티의 활동이 지역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직은 경제적 자립과 인력 확보가 자유롭지 않지만 퍼즐랩의 활동에 더 큰 기대를 갖게 되는 이유다. / 김은정 선임기자, 박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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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10 16:18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유휴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진안에 새로운 무대를 만들다

산업사회의 호황은 우리에게 삶의 풍요로움과 편리함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도시의 산업화는 농촌을 쇠퇴시키면서 지역사회의 불균형을 야기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도시의 인구밀집은 농촌의 인구감소로 작용되었고, 많은 청년들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농촌은 고령화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이러한 사회변화는 지역이 소멸할 수 있다는 심각성을 인지하게 만들었고, 정부와 지자체는 대응기금을 마련하여 지역사회를 위한 다각도의 정책적 지원을 시행하고 있다. 전라북도의 14개 시·군 중 10개 지역은 지역소멸위기를 맞고 있다. 지자체는 인구정책을 펼쳐 지역마다 인구수를 늘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만 좀처럼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지역사회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고민에 답을 던져주는 민간의 활동은 지역사회에 단비 같은 역할을 한다. 문화단체의 자유로운 활동은 그만큼 지역사회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을 살리겠다는 거창한 이론적 담론이 아닌 지역과 함께 새로운 지역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분명 지역을 살리는 일일 것이다. 지역인구 감소와 산업구조의 변화는 지역사회에 많은 유휴공간을 만들어냈다. 동네마다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는 많은 공간들은 더 이상 쓰임을 찾지 못하고 내버려두고 있다. 어쩌면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자본이 투입되어야하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방치된 유휴공간에 생기를 불어 넣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진안군을 무대로 활동하는 ‘써니Plant(대표 김문구, 예술감독 김선이)’는 지역민과 함께 공연문화예술이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모두가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문화예술기획을 주도하고 있다. 단체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써니(sunny)와 Plant를 합성한 이름은 다양한 예술장르의 사람들과 지역민이 모여 눈부신 햇살처럼 예술활동을 펼치고, Plant의 심고 담아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지역에 다양한 문화예술을 고스란히 담아내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써니Plant의 활동이 빛을 발산하는 계기는 ‘진안공간사랑프로젝트’를 통해 진안군의 유휴공간에서 펼친 활동이 지역사회에 새로운 경험으로 파장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이 단체의 김문구・김선이 부부는 2013년 연고가 없는 진안군으로 내려와 용담호를 끼고 있는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현대무용을 하는 부부의 이력에 맞게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무용영상을 촬영하며 새로운 공연예술의 무대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안군은 진안문화의집이 유일하게 극장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공연예술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좋은 편은 아니다. 이때 새로운 공연무대로서 눈을 돌린 곳이 유휴공간이다. 진안군 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도 같은 사정이겠지만 휴게소, 창고, 문화공간, 주택 등 다양한 공간들이 방치된 채 숫자가 늘고 있다. 이러한 유휴공간은 써니Plant에게는 좋은 무대로 다가왔다. 2016년 상전면 폐휴게소에서 열린 제1회 진안공간사랑프로젝트는 지역민에게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었지만 이를 준비하는 이들은 전기, 수도, 화장실 등 기반시설이 전혀 없는 사막과 같은 곳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첫 예술제는 신연마을 어르신과 지역특성화문화예술교육사업을 결과물로 활용한 행사였다. 전국단위 행사로서 손님을 맞아야하기 때문에 준비는 지역민을 비롯해 민․관이 함께 협력하는 사업이 되었다. 김선이 예술감독은 “면사무소에서 의자와 책상을 옮겨오고, 가족들이 모두 동원되어 수육을 삶고 김밥을 싸고 막걸리를 준비하고 동네 펜션을 예약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유휴공간이 무대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수고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진안군의 유휴공간에서 펼친 문화예술공연은 2017년 마이산의 마이봉을 배경으로 한 반월제에서 ‘반월제의 반영’과 2018년 진안읍내에 위치한 농협창고에를 활용한 공연이 눈에 띤다. 이 공연은 ‘진안공간사랑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미디어와 공연예술, 청소년과의 공동작품, 그리고 지역민과 함께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 크다. 이들이 유휴공간에서 예술제를 펼치는 이유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공연예술의 미학적 표현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통해 예기치 못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예술을 매개로 멈춰있는 공간을 재조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써니Plant는 예술제를 통해 지역민과 함께 협업하는 과정에서 지역사회의 문화적 감성이 지역의 생기로 전환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기획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써니Plant가 기획하는 유휴공간을 활용한 예술제는 2021년 국비를 지원받으면서 ‘진안댄스미디어공연예술제’로 명칭을 변경하여 올해 제8회를 준비하고 있다. 올해 10월로 예정된 예술제는 용담호를 배경으로 자리 잡은 유휴공간인 용담호미술관(수천전시실)에서 진행된다. 이 공간은 세 번째 예술제가 열리는 장소로서, 용담호가 가진 자연환경 속에서 지금은 유휴공간이지만 지역재생의 거점 공간으로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만들기 위함이다. 올해 예술제 주제는 ‘오래된 것에 대한 기억’으로 삼고 복합장르의 실험무대가 될 예정이다. 참여 작가는 무용가, 배우, 음악가, 미디어아티스트 등 춤과 영상미디어로 연결하는 장르가 다양하다. 특히, ‘2023 숏폼 콘테스트’수상자와 춤을 사랑하는 진안군민으로 구성된 ‘춤단 서포터즈’와 지역의 신진청년예술가들이 함께 참여할 예정이어서 지역민이 함께 만드는 예술제라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앞으로 써니Plant는 “진안에서의 10년은 타인을 위한, 지역주민을 위한 시간이었다면, 이를 기반으로 진안에서의 삶을 작품화하여 무대에 올리는 것에 집중하게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유휴공간이 문화공간으로 재탄생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일은 쉽지 않다. 예술을 매개로 멈춰있는 공간을 재조명하여 공간과 사람의 기억을 되살리고자 노력하는 이들의 힘은 지역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핵심이 된다. 이러한 문화적 힘은 지역사회에 사람을 모이게 하고 활기를 불어넣어줌으로써 지역소멸위기에서 벗어나는 첫 발이 될 것이다. 구혜경 (전북문화관광재단 기획정책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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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09 16:46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16)고고학으로 후백제 왕도를 복원하다

견훤은 전주를 후백제의 도읍으로 건설하는데 풍수지리와 미륵신앙이 그 바탕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부사』의 고성벽지(古城壁址)는 도심화로 인해 성벽의 흔적이 뚜렷이 확인되지 않는 구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후백제 도성벽으로 보는 것은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를 토대로 후백제의 도성을 복원해 보변 반월형에 가까운 평면 형태에 기린봉을 주산으로 하여 뻗어내린 산줄기 등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이 자연지형을 이용하였기에 부분적으로 삭토와 판축의 토성 축조법이 보이고 있다. △전주, 후백제 왕도(王都)였다 1980년 9월에 진행된 동고산성에 대한 개괄조사는 후백제 흔적 찾기의 시작이었다. 당시 조사를 담당한 고(故) 전영래 교수님은 조사를 통해 확인된 성의 둘레와 형태, 내부 시설 등 조사내용을 보고하는 한편 동고산성은 견훤이 쌓은 후백제 산성임을 주장하였다. 동고산성 조사 이후 전주지역에서는 20여개소의 크고 작은 후백제 유적이 발굴조사 되었다. 또한 2017년과 2022년에는 전주지역 일원을 대상으로 한 정밀지표조사에 의해 성곽유적, 궁궐유적, 건축유적, 생산유적, 분묘유적 등 다양한 후백제 유적이 확인되었다. 후백제 도성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는 1942년 전주부윤 구로키요스케〔黒木儀壽圭〕가 편찬한『전주부사(全州府史)』를 들 수 있다. 이 책의「전주부경역연혁도(全州府境域沿革圖)」에는 견훤왕궁지(甄萱王宮址)와 함께 고성벽지(古城壁址)가 표기되어 있다. 이 고성벽이 어느 시대에 축조된 성벽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전주 일대에 광범위하게 성벽이 축조될 시기는 후백제의 도읍기 이외에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왕궁은 왕이 거주하면서 정사(政事)를 살폈던 권위와 권력의 중심지로서 기능적으로는 정사공간·생활공간·정원공간 등으로 구분되는데 왕궁의 위치는 당시 왕도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견훤은 AD 900년 전주를 후백제의 도읍으로 정하면서 왕궁을 어디에 두었을까? 문헌자료의 부족과 인식의 결여, 도심화로 인한 지형의 변화, 그리고 110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후백제 왕궁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견훤 왕궁의 위치 비정은 몇몇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 대표적으로는 물왕멀, 동고산성, 전라감영, 인봉리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후백제 도성벽 내에 자리하고 있는 인봉리 일대가 궁성벽의 흔적과 주공(柱孔) 및 해자(垓字)의 확인 등 고고학 자료를 통해 볼 때 후백제 왕궁 터였을 것이라는 주장은 적잖은 근거를 갖게 되었다. △견훤왕, 왕궁을 어디에 두었을까 후백제 왕궁의 위치 비정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은『전주부사』이다. 1938년 6월 조선총독부 도서관장 오기와라 히데오가 사각형의 커다란 석재와 천석 1만 여개를 목격하였고 연화문 막새가 수습되며 임금이 성을 둘만 한 사신상응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물왕멀 일대를 견훤왕궁지(甄萱王宮址)로 비정하였다.『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33 전주부 고적 고토성조에는‘전주부성 북쪽 5리에 견훤이 쌓은 고토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렇듯 물왕멀이 견훤의 왕궁터라는 주장은 견훤이 축조한 고토성이 왕성 역할을 했다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물왕멀 일대는『전주부사』전주부경역연혁도의 고성벽을 후백제의 도성벽으로 보면 도성 밖에 자리하고 있으며, 서해그랑블아파트 건립 때 물왕멀 부근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왕궁과 관련된 어떠한 고고학 자료도 확인되지 않았다. 1990년과 1992년에 진행된 동고산성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정면 22칸 측면 4칸의 대형 건물지 확인과 함께 건물지에서 전주성(全州城)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막새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동고산성이 견훤의 왕궁터로 주장되었다. 이후 2020년까지 8차례의 크고 작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3개의 문지와 13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건물지에서는 관(官)·천(天)·왕(王)자 명문와와 선문·무문·격자문 등의 후백제 평기와가 출토되어 후백제 때 매우 중요한 산성이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하지만 동고산성은 승암산의 정상부에 입지하고 있으며 조사된 건물지에서 겨울 난방을 위한 구들시설이 확인되지 않았고 일상생활이 유지되었음을 입증할 만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따라서 동고산성은 후백제 산성임은 부인할 수 없으나 산성의 축조 목적은 피난성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전라감영설은 2005년 전라북도청이 효자동의 신청사로 이전되면서 2007년과 2017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담장, 부석시설과 보도시설, 배수로, 우물 등이 확인되었으며, 쌍사자무늬 전(磚)을 비롯하여 동고산성 출토품과 유사한 관(官)자와 전○(全○)자명의 기와가 출토된 것 등을 근거로 주장되었다. 하지만 전라감영터의 맨 아래층에서 확인된 건물지의 규모와 축조 양상, 출토유물 등을 통해 볼 때 통일신라시대 완산주(完山州)의 치소(治所)였을 가능성은 추론이 가능하지만 후백제 왕궁으로 확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중노송동 인봉리 일대가 후백제 왕궁터로 비정된 것은『전주부사』전주부경역연혁도의 후백제 도성벽으로 추정되는 고성벽 내에 자리하고 있고 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인보성체수도회-전주삼마교회-우성해오름아파트-기린봉아파트입구-전주제일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사다리꼴 형태의 추정 궁성벽이 확인되며, 동쪽에 위치하여 서쪽을 향하는 좌동향서(坐東向西)의 위치와 방향은 미륵신앙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인봉리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는 2015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추진하였으며 이후 2017년 12월부터 2023년 5월까지 5차례 이루어졌다. 후백제 추정 궁성지의 북동벽에 해당되는 삼마교회 인근 부분에서는 토성의 축조에서 보이는 풍화암반토의 삭토와 함께 판축으로 쌓아올린 흔적이 확인되는 한편 크고 작은 주공(柱孔)이 열을 이루고 있는 상태로 드러나서 목책이나 망루와 같은 성벽시설의 존재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의 남쪽주차장 부지는 추정 궁성지의 남벽과 서벽이 교차하는 지점에 해당하는데 이 지역에 대한 조사에서는 풍화암반토를 다듬고 점토로 성토한 인위적인 흔적과 함께 궁성의 서벽 추정지 외곽에서 남북방향으로 흐르는 해자가 조사되었다. 해자의 바닥에는 모래와 점토, 잔자갈을 섞어 다진 점토 다짐층이 확인되며 회청색경질토기편, 후백제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왕궁의 후원으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정원석이 어렵지 않게 목격되고 뻘흙과 함께 가공 석렬이 노출되고 있으며, 다량의 후백제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유철 전주문화유산연구원장 후백제 고도(古都) 복원 프로젝트 남고산성 내의 남고진터로 알려져 있는 계곡 주위에는 평탄대지와 석축과 우물 등이 남아있다. 평탄대지에서는 초석과 기단석 등의 석재와 궁(宮), 관(官)자가 새겨진 후백제 기와가 수습되고 있어 후백제 행궁지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추정 행궁지의 남쪽에는 반월형의 갈대숲이 자리하는데 행궁과 관련된 연못의 가능성이 높다. 동고산성은 동문지·서문지·북문지와 함께 성 내부에서 13동 이상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조사된 유구와 출토된 다양한 후백제 기와 등을 통해 볼 때 가장 확실한 후백제 산성으로 여겨진다. 기린봉의 동쪽인 아중 저수지 주변에서는 왕릉급의 무덤과 돌을 사용한 무덤들이 확인된다. 무릉마을 내 아중산장 뒷산의 정상부에 자리한 무릉고분은 외관상 산의 형태인데 마을 주민에 의하면 고분의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민묘를 이장하기 위해 땅을 팠을 때 다량의 숯이 깔려있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이 숯은 고분의 축조와 관련된 것으로도 추정되며, 봉분의 규모로 본다면 왕릉급에 해당한다. 견훤은 국찰(國刹)을 어디에 조성하였을까? 도성에서 멀지않은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린봉의 동쪽 기슭인 무릉마을 남쪽의 암석골 안쪽에는 비교적 넓고 평탄한 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예로부터 이 곳에 절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최근까지는 민가가 있었다. 주변에서 소량의 와편들이 수습되는데 바로 이 사찰 터가 후백제의 원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대 도성의 필수 요소로는 산성, 왕궁, 외곽성, 왕릉, 불교사찰 등을 든다. 익산은 왕궁〔왕궁리유적〕, 사찰〔미륵사지〕, 분묘〔무왕릉〕유적 등이 조사되어 백제 고도(古都)에 포함되었다. 이제 전주도 도성, 왕궁, 무덤, 사찰 등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조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이를 통해‘고도 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한 고도(古都)에 포함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유철 전주문화유산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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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09 09:16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⑪조선의 첫 공식 ‘카메라 촬영자’, 퍼시벌 로웰

△조선에 들어온 카메라(Camera)의 전신, ‘칠실파려안’ 포크가 1884년 전주에서 사용한 사진기 즉, 카메라(Camera)는 1870년대 유행한 건식 유리원판 카메라였다. ‘카메라’는 로마인들이 썼던 라틴어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를 줄인 말로 ‘어두운(obscura)’+ ‘방(camera)’이라는 단어를 결합한 용어이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어두운 방이나 상자의 작은 구멍을 통해 빛을 통과시키면, 반대쪽 벽면에 바깥 풍경이나 물체가 거꾸로 나타나는 광학적 현상을 기계장치로 만든 것이다. 이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기법이 17세기 유럽에서 사용되었고 이 기술이 18세기 후반 조선에 도입되어 이명기(李命基)가 1787년에 그린 사실주의적 작품인 ‘유언호 초상화’(보물 제1504호) 제작에 활용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시문집(산문) 10권)에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순 우리식 한자표현인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 ‘칠실(漆옻 칠 室집 실)’은 ‘칠흑같이 어두운 방’, ‘파려’(玻유리 파瓈유리 려)’는 ‘유리’, ‘안(眼)’은 ‘눈, 보다’로 ‘캄캄한 방에서 유리 눈을 통해서 본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기계를 통해 외부 물체를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설명한 '칠실관화설‘(漆室觀畵說:어두운 방에서 그림을 보는 것에 대한 설명)을 통해 그 원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칠실(漆室)은 산과 물의 아름다움이 반대편에 둘러 비친다.……맑고 좋은 날씨를 골라 방을 닫는다. 창문이나 바깥의 빛을 받아들일 만한 것은 모두 틀어막는다. 방안을 칠흑같이 깜깜하게 해 놓고 구멍 하나만 남겨둔다. 돋보기(안경알) 하나를 가져다가 구멍에 맞춰놓고 눈처럼 흰 종이판을 가져다가 돋보기에서 몇 자 거리를 두어 비치는 빛을 받는다. ...산과 물의 아름다움과 나무와 꽃과 누각 등의 모습이 모두 종이판 위로 내리비친다.……천하의 기이한 경관이다.……사물의 형상이 거꾸로 비쳐 감상하기 황홀하다. 이제 어떤 사람이 초상화를 그리되 터럭 하나라도 차이가 없기를 구한다면 이 방법을 버리고서는 달리 좋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여유당전서> 문집 10 설편(說篇) 정약용의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이기양(李基讓)이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丁若銓)의 집에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이라고 불린 카메라 옵스큐라를 설치하고 화가로 하여금 자신의 초상화 초본을 그리게 한 사실을 기록한 「복암이기양묘지명(伏菴李基讓墓誌銘)」에서도 확인된다. 이후 이동형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기록으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영법변증설(影法辯證說)'이 있다. 그는 “그림자란 사물의 그늘이다. ... 밝음의 반대이다. 물상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고, 또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생기지 않는다.”로 빛에 의한 물체 모습을 ‘그림자’로 총괄해 우리의 전통적 인식체계로 설명하였다. 즉, 햇빛에 비춰 생긴 검은 그림자, 거울에 나타난 그림자, 물위 거울처럼 비춰진 그림자 등의 실체와 칠실파려안에 의한 그림자 등의 실체를 빛과 연결지어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과학적 논리로 더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조선 방문 공식 첫 사진촬영자, 퍼시벌 로웰 (Percival Lowell) 1830년대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외부의 물체 모습을 볼 수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 장비와 햇빛에 반응하는 은화합물 계통 물질을 결합시켜 8시간 노출을 통해 최초의 사진이 발명되었다.(니엡스) 그리고 이후 은판에 사진이 나타나는 방식(다게레오 타입, 1분 노출)을 거쳐 1850년대 유리판에 얇은 막을 생성하는 의료용 콜로디온액과 은화합물 반응에 의한 ‘습식 콜로디온 방식(유리습판)’을 거쳐 1870년대에는 젤라틴을 활용한 ‘건식’ 유리원판 사진술(유리건판)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1883년 미국에 갔던 조선 보빙사를 돕는 외교 고문으로 포크와 함께 활동했던 미국 천문학자 ‘로웰’이 포크보다 6개월 앞서 조선에 공식적으로 카메라를 들고 와 조선국왕 고종의 최초 사진을 찍었다. 로웰은 조선에서의 활동으로 노월(魯越)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 앞서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보빙사를 위한 외교고문으로 활동하였고 그 보답으로 1883년12월 20일 조선에 공식 초청되어 1884년 3월18일까지 약 3개월간 체류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한양에 머무르면서 고종을 알현하고 이때 접한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을 백과사전 형식으로 자세히 정리해 2년 뒤 1885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ö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 로웰은 뛰어난 사진 촬영기술을 발휘하여 조선 수도 서울 일원의 다양한 모습을 촬영하였고 고종과, 왕세자 시절 순종의 최초 사진을 포함하여 80여장의 사진을 촬영하여 현재 그가 세운 박물관에 관련 자료가 남아있다. 우리나라 사진관 기록은 1883년으로 〈한성순보(漢城旬報)〉 제14호 1884. 2.14에 “김용원(金鏞元)이라는 사람이 작년 여름에 사진관을 개설 하였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이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런데 당시 조선 사회에서 접한 사진기는 대부분 서양인들이 들고 왔다. 카메라는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놀랍도록 정교한 사진의 결과물로 인해 사진을 찍는 카메라는 ‘사람 혼을 빼는 기계’로 인식되었다. 즉, 1880년대 후반 조선의 저잣거리에서는 “어린아이의 눈을 빼내 사진 박는 기계의 눈을 해 박는다.”, “사진 기계가 집이나 담에 비추면 집이나 담장이 무너진다.”등 흉흉한 소문이 돌던 시기였다. 특히, 1888년 선교사가 사진을 찍은 어린아이가 죽은 사건으로 사진관련 괴담이 도성에 팽배해져 선교사 보호를 위해 제물포에 정박했던 미군이 출동하는 사태도 있었다. 이 같은 서울 일원에서의 사진관련 소문과는 달리 전주에서는 오히려 전라감사가 사진찍기를 자청하고 사람들도 거부감없이 촬영에 응하고 있어 전주지역이 상대적으로 신문물 수용에 적극적이거나 거부감이 적었음을 보여준다. /조법종(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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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07 17:37

[뉴스와 인물] 이남호 전북연구원장 "'대한민국 No.1 지방정책연구원'으로 성장시킬 것"

'더 특별한 전북 시대'의 미래를 향한 긴 여정의 출발점에 선 전북연구원. 지난 6월 25일 전북연구원에는 제9대 원장으로 이남호 원장(64)이 취임했다. 전 전북대 총장 출신이 전북연구원장 자리에 오면서 지역사회에서는 의문과 우려가 공존했다. 이남호 원장은 ‘대학의 총장’을 마에스트로에 비유했다. 시나리오의 선정부터 배우 캐스팅, 촬영, 조명과 음향, 투자자 모집 등 총괄적으로 지휘하는 만큼 한 편의 연구과제물이 탄생되는 과정 또한 이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지방정책연구원으로 성장하기 위한 새로운 첫 발을 내딛고 있는 이남호 원장을 만나 연구원 운영방향과 전북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취임 한 달간의 어떻게 지내셨나요. 짧은 소회 부탁드립니다. "청문회 준비부터 취임까지 두 달이라는 시간동안 연구원 내부 업무보고 청취에 중점을 뒀습니다. 업무 파악 이후에는 효율적 경영과 성과 창출을 위해 부족한 부분, 개선해야할 부분 등 문제점을 냉철하게 진단했습니다. 문제점을 토대로 혁신 방안을 마련하는데도 집중했습니다. 밖으로는 정상적인 연구원의 기능 작동을 위해 협업이 필요한 대학이나 전북도, 전북도의회, 언론 등을 방문해 협력 관계의 네트워크 구축하고 연구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부탁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3년이라는 임기동안 어떠한 청사진을 가지고 계신가요. "저의 최종적인 임무는 전북연구원을 '대한민국 No.1 지방정책연구원'으로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연구원들이 신나게 일하고 스스로 창의력이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구원의 자긍심을 제고시킬 수 있도록 조직의 역동성을 제고시켜 나가겠습니다. 또 전북의 중장기적 미래 비전을 설계하고 미래 핵심 아젠다를 발굴하는 연구기능을 강화시킬 예정입니다. 도정 현안 지원 중심의 기능을 넘어 도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의제를 선도하고 시군 발전을 위한 정책지원을 확대해 나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연구사업의 품질을 제고시키고 전 구성원이 함께 혁신하고 성과를 창출하는 연구활동과 창의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공간 확충 등 연구환경을 혁신해 나가겠습니다." 전 전북대 총장님이 전북연구원장이 되자 많은 분들이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전북연구원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저의 명예퇴직과 공석이었던 전북연구원장 자리 등 여러 가지 상황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과정이지, 의도적인 선택은 아니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대학 총장과 연구원장은 둘 다 국가나 지역에 필요한 지식을 창출해 사회에 공급하는 책무가 주어져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합니다. 또 모두 박사급 연구인력들을 모시고 성과를 도출하는 경영자라는 점에서도 비슷합니다. 이 차원에서 전북연구원이 전북 발전의 먹거리를 만들어 도민들에게 공급해준다는 것은 제가 평생을 해왔던 일과 연장선이고 나름대로 의미있다고 생각됩니다." 역대 원장 중 일부는 정치적 논란에 서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전북연구원장은 어떤 자리인가요. "전북연구원장이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것은 조직이나 지역뿐만 아니라 개인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정치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전북연구원장은 다른 도 출연기관과 다르게 이사회를 거쳐 이사장이 임명장을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는 정치적으로 자유성과 독립성을 가지고 이끌어가야한다는 취지입니다. 물론 주어진 책무 달성을 위해 자치단체(장)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만 결코 조직이 사유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확고합니다. 늘 겸허한 자세로 성공한 전북연구원장이 되는 데 매진하겠습니다." 도 출연기관이라는 점에 연구원의 한계, 역할론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도 높습니다. "전북연구원은 지방자치단체의 발전에 필요한 정책개발을 전담하는 종합연구원으로 특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북도는 전북연구원이 도와 14개 시군의 싱크탱크로서의 역할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출연금을 지원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더불어 출연금을 지원한 기관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통해 지역의 니즈를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동안 자치단체를 선도하지 못하고 현안 대응에 급급했거나 중장기 성장 전략에 대한 정책연구가 미흡했던 것은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미래전략연구센터를 설치하고 전라북도를 선도하는 과제 비중을 현행 10% 수준에서 30%까지 늘릴 계획입니다." 전북이 이차전지 특화단지에 지정됐습니다. 앞으로 연구원의 역할과 과제는? "기회발전특구 등 기업유치에 유리한 다양한 제도들을 결합시켜 이차전지관련 기업들이 모여들어 특화단지에 집적될 수 있도록 정책분석 등을 지원하겠습니다. 또한 특화단지에 집적된 기업들이 공동으로 R&D를 기획하거나 기업들의 생산활동과 관련된 혁신생태계가 조성되고 성공 신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이차전지 허브 조성 등을 위한 후속 연구를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특화단지에 입주한 기업들이 전북에 오래 머물고 연관 기업들이 추가로 이전할 수 있도록 정주환경, 교육환경 등의 지원 방안을 모색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새만금 이차전지 특화단지와 도내 이차전지 기업들이 위치한 정읍, 익산, 완주 등 도내 시군들과 연계해 전라북도 광역으로 산업생태계를 확산시키는 데 노력하겠습니다." 제3금융중심지, 공공의대 등 전북이 해결해야할 과제들이 많습니다. 전북 발전을 위해 나아갈 전북연구원의 추진 방향은? "전북의 주요 현안에 대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만들고, 시나리오별 장단점과 추진전략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결과물을 도출하고 관련 기관에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제3금융중심지 또는 공공의대 유치 등에 관해서 다양한 플랜에 대한 검토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동안 몇 가지 현안 문제를 살펴보면 도 아니면 모 식으로 한가지 플랜에만 고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A플랜이 최선이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녹록지 않을 경우에는 차선책으로 B플랜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필요하다면 C플랜의 대한 정책연구까지 수행해 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북특별자치도와 관련해 특례 150여건을 발굴했습니다. 이중 쟁점 사항과 앞으로의 계획은? "올 하반기에는 특별법 전부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전라북도, 정치권 등과 협력해 특례 반영을 위한 부처 설득과 국회 대응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특별법 개정에 대한 부처의 보다 많은 공감과 전북이 발굴한 특례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의 긍정적 의견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특례로 반영해달라는 주요 내용은 전주권 제3금융도시, 고령친화·사회서비스산업복합단지 조성 및 관리, 동부권 산악관광특구, 대도시권 광역교통 관리에 관한 특별법(대광법) 개정 등이 있습니다. 향후에도 특별법에 포함된 주요 특례의 범위, 내용, 운영 등에 대한 구체화 작업과 특례를 활용한 전북발전의 그랜드 디자인을 구상하는 후속 작업을 준비하고 특별법 2단계 개정을 위한 특례 발굴에도 주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도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내년 전북특별자치도 출범을 앞둔 굉장히 중요한 시기에 전북연구원장 자리를 맡아 어깨가 무거운 것도 사실입니다. 자리만 차지하는 원장이 아닌,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을 찾아 수행하는 원장이 되고자 합니다. 전북연구원의 경영목표를 임기 내에 달성하고, 지역의 수많은 현안들을 해결해 가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저 스스로 30년 넘게 걸어온 연구자의 경험과 전북대 산학협력단장, 총장 등의 이력과 그리고 도민의 관심과 애정이 뒷받침된다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때로는 따끔한 충고를, 때로는 따뜻한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도민과 함께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남호 원장은 남원 출신으로 전주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 전북대 교수로 임용된 후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전북대 제17대 총장을 지냈다. 이외에도 전북대 산학협력단장, 전북과학기술위원회 위원, 전북창조경제혁신센터 이사장 등의 경험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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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선찬
  • 2023.08.06 17:39

[2023 참여&공감, 시민기자가 뛴다] 아, 독도여!... 독도 명예주민이 되다

오는 8월 15일은 83주년 광복절이다. 수많은 피의 대가로 찾은 우리의 주권이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전북 RCY 나라사랑 실천캠프'의 2박 3일 울릉도·독도 탐방이 진행됐다. 이른 아침 시간이라 초·중·고 RCY(청소년적십자) 단원 모두 잠이 덜 깬 표정이지만 얼굴 가득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다. 새벽 5시, 대한적십자사 전북지사에 모여 버스로 출발했다. 다행히 날씨가 맑았다. 두 번을 휴게소에 쉬어가며 포항에 도착했다. 여객선 터미널에서 엘도라도 익스프레스호에 승선해 2시간 50분 만에 울릉도에 도착했다. 배가 크고 깨끗해 멀미하는 학생이 없어 안심됐다. 울릉도·독도는 국가지질공원이다. 수려한 모습의 해안 둘레길을 걷고 봉래폭포에 올랐다. 장마 덕분에 폭포수가 우렁찬 소리와 함께 위엄을 자랑하고 있었다. 땀 흘리며 걸었는데도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가득했다. 폭포에서 내려오는 길에 '천연 에어컨'이라고 적혀있는 동굴 안에 들어가니 금방 땀이 식었다. 다음 탐방지인 내수전 일출 전망대로 가는 길은 동백나무와 소나무가 터널을 이룬 길로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넓게 뻗은 수평선과 파란 바다 위에 죽도, 관음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특히 죽도는 인간극장에서 여러 번 봐서 더욱 정감있게 다가왔다. "울릉와 울릉~ 얼른와 얼른~ 스마트 폰으로 QR코드를 스캔하시면 여행지와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스마트 관광 안내 서비스가 인상 깊었다. 스마트 폰으로 QR코드를 찍어보니 자세한 정보로 즉시 연결돼 무척 편리했다. 관광지에서도 IT 강국으로서의 위상이 느껴졌다. 촛대바위에 도착했다. 이름과 관련해서는 슬픈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저동 마을에 한 노인이 아내와 일찍 사별하고 딸과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조업을 나간 노인의 배가 심한 풍랑을 맞아 돌아오지 않았다. 딸은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로 며칠을 보낸 뒤에 아버지가 돌아오는 느낌이 들어 바닷가에 가보니 돛단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딸은 배가 있는 쪽으로 파도를 헤치고 다가갔다. 그런데 거친 파도에 지쳐서 그 자리에서 바위가 되고 말았다. 그 뒤에 이 바위를 촛대바위 또는 효녀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촛대바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모자가 날아갔다. 순간 효심이 부족한 걸 들킨 것처럼 마음속으로 뜨끔했다. 이튿날 촛대바위에서 장엄한 일출을 맞이하고 드디어 독도를 향한 여객선에 올랐다. 높은 파도로 배가 심하게 출렁거리자 멀미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미리 키미테를 붙였지만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독도 경비대원들에게 선물할 사람은 1층 매점에서 간식을 구입하라는 안내 자막이 나왔다. 2층에서 내려와 겨우 1층 매점에 도착했는데 독도 접안이 확실할 때 오라며 간식을 판매하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오는 계단에서 비닐봉지에 계속 토하며 심한 멀미로 고통스러워하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평소에 멀미가 심해서 그 고통을 알기에, 한참 동안 그 아주머니 등을 두드리고 손을 마사지해드렸다. 처음 보는 아주머니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모기 만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파도가 너무 심하니 빨리 자리에 착석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주머니 옆에서 안절 부절하는 남편분한테, 손 마사지를 알려드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창밖으로 독도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기대와 흥분으로 술렁거렸다. 그러나 파도가 심해서 배가 독도에 접안하지 못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순간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탄식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날씨가 좋아서 독도 입도를 확신했는데 파도가 말썽이었다. 배는 40분 정박했다. 모두 갑판으로 나갔다. 태극기 머리띠를 한 사람, 태극기 스카프를 목에 두른 사람, 손에 태극기를 든 사람들로 갑판은 만원이 되었다. 우리 RCY단원과 지도교사 모두 태극기를 흔들며 독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독도를 눈과 가슴에 담기 바빴다. 일본은 갈수록 독도 영유권의 수위를 높여가며 세계 각국에 홍보전을 펼치고 있다. 정영미 독도연구소장은 “조선시대 관찬 사료에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돼 있다. 그러나 일본의 관찬 사료에는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얘기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국가 공식 기록인 양국의 관찬 사료에는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기술만 확인되고 있으며 과거 일본 정부 기록인 1877년 ‘태정관지령’에는 울릉도·독도를 ‘일본 땅이 아니다’라고 부인한 문서가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독도에 1948년 8월 정부 수립 직후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1번지’ 주소를 부여하고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현재 독도에는 우리 국민과 경찰, 공무원이 상주하고 울릉도를 통해 해마다 10만 명 넘는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독도명예주민증’ 신청 완료 후 집으로 오길 기다리고 있다. 2010년 11월 10일부터 독도에 입도하거나 선회관람 후 울릉군 독도명예주민이 되고자 신청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독도관리사무소에서 ‘독도명예주민증’을 발급하고 있다. 우리나라 땅인 독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애타게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지만 독도명예주민이 되어 기쁘다. 명예 주민으로서 앞으로 독도 수호에 더욱더 앞장서야겠다는 결심이 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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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02 19:11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⑮ 후백제 장수(長水)의 높은 위상

자유에 대한 강한 열망의 리더십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사람은 건물을 만들고 건물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역사를 돌아보면 한 시대를 호령했던 나라에는 그 당시 사람들이 남긴 건물과 유물들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전북 동부지역은 후백제의 국력이 화수분처럼 솟아났던 거점이었다고 학계는 내다보고 있다. 동부지역에서도 장수군은 침령산성, 합미산성과 같은 후삼국시대의 맹주였던 후백제 랜드마크가 잘 남아있는 지역으로 여겨진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폭염 속에서 우리 일행은 전상학 전주문화유산연구원 부장과 함께 전주에서 전북 동부의 중심지에 위치한 장수군으로 길을 나섰다. 전북에서 가장 작은 자치단체인 장수군은 무진장(무주군, 진안군, 장수군)으로 불리는 곳 중 하나다. 인구소멸 위험지역에 속해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이 지역에는 1500여년이 넘는 세월을 간직한 보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백두대간 육십령휴게소(장수군 장계면 육십령로 1012)에 위치한 팔각정으로 올라가니 험준한 산세가 한눈에 들어왔다. 시야가 흐리지 않은 탓에 침령산성(장수군 계남면 침곡리 산 73-2)과 합미산성(장수군 장수읍 용계리 산 26-1)이 자리한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후백제 산성들은 대개 규모를 확장하거나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는 리모델링에 초점을 뒀다고 알려졌다. 백두대간 산줄기를 따라 후백제 산성들이 집중 배치된 모습을 직접 확인하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백두대간에 자리한 후백제 산성들은 아직도 그 위용을 간직한 채 동부지역 방어체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핵심 철산지인 대적골 제철유적(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342)을 보호하고자 했던 의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장수군은 고대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알려져 있는 철을 생산했던 제철유적의 보고이다. 최근 장수군 일원에서 대략 50여개소의 제철유적이 조사됐는데 그 밀집도와 분포범위가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후백제는 이처럼 중요한 장수군 일원을 효과적으로 관할하기 위해 대규모의 산성 개축을 단행하고 병력을 주둔시켰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최근 발굴조사가 이뤄진 합미산성과 침령산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장수 합미산성은 후백제 산성의 최고봉으로 통한다. 팔공산(해발 1147m)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 능선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전 부장은 “산성의 남쪽에는 후백제의 교통로에서 임실군 오수면, 성수면에 이르는데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북쪽으로 나아가면 전주도성에 곧장 닿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방문에서 합미산성은 적에 대한 감시, 방어를 위해 축조된 것으로 팔공산에서 정상부와 남쪽의 계곡을 감싸는 형태의 석축산성임을 알 수 있었다. 후백제의 국력을 담은 장수 침령산성은 후백제 도성이었던 전주에서 영남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장수군의 동쪽을 에워 쌓고 있는 백두대간 못지않게 산세가 험준하고 전주도성의 동쪽을 든든하게 지켜줬다. 침령산성은 둘레 500m 내외로 전북 동부지역에 분포돼 있는 고대 산성 중 최대 규모다. 전 부장은 “성벽의 일부 구간이 붕괴됐지만 성벽의 잔존상태가 양호하며 높이 7m 내외의 성벽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성벽의 축조기법을 잘 살펴볼 수가 있다”고 밝혔다. 우리 일행은 다음 장소인 삼봉리 가야고분군과 동촌리 고분군, 삼고리 고분군으로 이동했다. 가야사가 후백제사로 이어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가야와 후백제의 역학관계를 알 수 있으리라. 삼봉리 가야고분군은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 백화산(해발 850m) 자락에 자리한 가야 수장층의 묘역으로 직경 20∼30m 내외의 대형고분 20여기가 분포돼 있다. 두 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무덤내부에서 다양한 가야토기를 비롯해 철제마구, 꺾쇠, 교구 등 피장자의 위상이 매우 높았었음을 짐작케 하는 최상급 가야유물이 출토됐다. 전 부장은 “삼봉리 가야고분군은 전북 동부지역에 기반을 두고 성장했던 가야계 소국의 존재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 세력이 타 지역의 가야 소국에 비해 결코 뒤쳐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고고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그는 “일제 때 유물을 도굴한 바람에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특히 이번에 방문한 삼봉리 가야고분군은 이번 여름 집중 호우로 고분 일부가 훼손된 모습을 볼 수 있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동촌리 고분군은 장수군 장수읍 마봉산(해발 723m)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를 따라 분포하는 83개의 무덤으로 이 고분군은 5세기 초~6세기 초 무렵 가야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수장층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재갈을 비롯 마구류와 토기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돼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은 동촌리 고분군은 전북지역 가야고분군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동촌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편자, 재갈, 둥근 고리 자루칼, 은제 귀걸이, 휴대용 화살통 등 가야계 수장층의 고분에서 확인되는 종류와 유사한 양상에 따라 장수지역 가야계 수장층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장수군 천천면에 위치한 삼고리 고분군은 능선을 따라 20여기의 가야 중대형 고총과 주변 기슭에 가야계 석곽묘가 분포하고 있다. 고분 내부에서는 가야 토기와 백제, 신라, 마한 등 토기가 함께 출토됐다. 2018년 장수군과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긴급 발굴로 토기류 외에 금제 귀걸이와 채색 유리구슬, 마구류 등 피장자의 높은 위상을 보여주는 위세품이 출토된 곳임을 확인했다. 일행은 다음으로 장수군 장계면 탑동마을에서 후백제와 관련해 개안사지 사찰 터와 유물을 살펴봤다. 2020년 조선문화유산연구원은 탑동마을 내 개안사지의 위치, 범위, 성격 등을 파악하기 위한 발굴조사에서 사찰 터, 석등지, 탑지 등을 확인했다. ​전 부장은 “탑동마을 사찰 터는 건물지 형태나 출토유물에 미뤄 후백제와 관련이 크다”고 말했다. 사찰 터에서는 귀면 문양을 입체감이 적고 평면으로 단순화한 귀면 기와가 출토됐다. 이는 남원 실상사에서 나온 귀면 기와와 비슷해 후백제와 관련성이 제기된다. 이번 방문을 통해 후백제 시대 장수의 높은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사찰 규모임을 알 수가 있었다. 전 부장은 “개안사지를 통해 가야 이후 후백제 양식의 사찰이 있었고 지금은 3층 석탑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며 “탑 재료를 복원한다고 추정해보면 후백제 양식이 맞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장수지역을 돌아본 일행은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자웅을 겨뤘던 중심 세력인 가야를 확인해보고 후백제의 위용을 살펴볼 수 있었다. 남아 있는 유적과 유물은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해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문화재청에서는 문화재를 국가유산이란 용어로 바꿔나가는 등 역사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다. 전 부장은 전주로 돌아오는 길에 “이제부터라도 전북에서 후백제의 역사적 위상을 재정립하고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한 문화권 정비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발걸음을 빠르게 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 기획
  • 김영호
  • 2023.08.02 00:17

[한국전쟁 정전 70년] 피란수도 부산, 1023일의 기록 (상)

1023일. 부산이 한국전쟁 중 피란수도로서 역할을 한 기간이다. 첫 번째는 1950년 8월 18일~10월 27일, 두 번째는 1951년 1월 3일~1953년 8월 15일이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던 부산은 피란민 수십만 명을 품는 포용력을 보여줬다.   △80만 피란민 품은 부산 부산일보사가 1980년대에 발간한 책 <비화 임시수도 천일>에 따르면, 한국전쟁 직전 부산 인구는 47만여 명이었다. 1945년 8·15 광복 직후만 해도 28만 명 수준이던 부산 인구는 일본과 중국 만주 등지에서 돌아온 동포 19만 명까지 더해 급증한다. 이어 전쟁이 발발하자 전국 각지에서 피란민이 몰려들어 100만 명을 넘는 사람이 치열한 생존 경쟁에 맞닥뜨리게 된다. 1·4후퇴 이후 부산의 최대 인구는 120만~130만 명 수준으로 추산된다. 당장 살 곳을 마련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일부 시민이 남는 방을 빌려주며 도움을 베풀었지만, 피란민 수십만 명을 수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정부가 마련한 천막이나 수용소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창고와 교회 예배당, 공장, 극장 등 빈 공간이 있는 곳은 모두 피란민에게 개방됐다. ‘동아일보’ 1950년 12월 28일 자 기사에 따르면, ‘부산시 당국에서는 시내에 들어온 피란민 6만여 명을 각 가정에 분산 수용키로 결정했다. 요정, 여관 등을 일체 개방해 피란민을 수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부산연구원 오재환 부원장은 “부산은 한국전쟁 시기에 직접적인 전투가 없었던 평화 도시, 밀려오는 피란민을 품은 포용의 도시였다”며 “유엔 등으로부터 국제적 지원을 받던 곳에서 이제는 이를 되돌려주는 도시로 성장해 월드엑스포 유치에까지 나서게 됐다”고 설명했다. 2020년 3월 25일 <부산일보>에는 특별한 광고가 실렸다. 제목은 ‘부산 시민들께 드리는 감사의 말씀’. “저의 함경도 출신 선친과 서울 출신 어머니가 몇 번이나 하셨던 말씀은 ‘그때 부산 사람들 아니었으면 피란민들 다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자신들도 어려운 형편에서 대한민국 어디 사람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이었습니다.”(어느 6·25 부산 피란민과 그분들의 자식 올림) △소 막사·묘지도 집터로 전쟁 시기 부산에는 불어난 인구를 감당할 주택이 부족했다. 피란민이 지은 판잣집이 줄줄이 산자락은 물론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며 늘어났다. 마구간이나 소 막사 같은 축사까지 피란민의 거처가 된다. 대표적인 곳이 남구 우암동 소막마을이다. 소막마을은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수탈한 소를 일본으로 보낼 배에 싣기 전 검역하던 곳이다. 검역 전 소를 대기시키던 막사까지 전쟁 때 피란민 수용시설로 활용된다. 당시 이곳은 ‘적기(赤崎) 피란민수용소’라고 불렸다. 우암동이 바다에서 보면 붉은 언덕처럼 보인다고 해서 일본인이 ‘아카사키’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2021년 부산시가 펴낸 구술 채록·자료집 '피란, 그때 그 사람들'에서 우암동 출신 장두익 씨는 피란민 친구의 집과 의사소통 문제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방인지 부엌인지. 뭐 그릇 몇 개 놔두고 부엌이고. 원시생활하고 똑같지. 우암2동은 거의 다 소 막사였고. 그리고 어릴 때 들어보면 이북 말투가 좀 다르잖아요. 무슨 말인지는 잘 못 알아듣고.’ 소 막사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꺼리는 공동묘지까지 피란민 주거지가 된다.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은 죽은 자의 공간이었던 묘지까지 삶의 공간으로 바뀐 곳이다. 피란민의 강인한 생존 의지를 확인시켜 주는 사례다. 피란민은 평지에 살 곳이 부족해지자 산복도로 곳곳에 판자촌을 형성한다.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어 사람들이 살기 꺼리던 아미동도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건축 자재가 부족하던 전쟁기에 단단한 묘비와 상석은 집을 지을 요긴한 재료가 돼줬다. 지금도 비석마을에 가면 담장 아래에 남은 묘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화재·식수·오물과의 전쟁 1953년 정전 직후를 기준으로 부산 시내 전체의 판잣집은 4만여 채에 달했다. 대청동과 보수동, 용두산 산비탈 등 중구 일대에만 최소 1만 5000여 채의 판잣집이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깡통을 펴서 만든 양철판과 상자 등으로 대충 지은 판잣집은 화재에 취약했다. 불이 어찌나 자주 났던지 하루 평균 3~4건이 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섰다 하면 교회요, 났다 하면 불이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1953년 1월에는 국제시장 대화재로 상가 4200여 채가 불탔고, 이재민 3만여 명이 발생했다. 위생 문제도 심각했다.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공동 수도와 공동 변소를 줄 서서 사용했다. 이마저도 없는 곳에서는 다들 오물을 밟고 다니기 일쑤였다. ‘터질 듯한 부산은 주택난·식수난·식량난의 소동 속에 먼지와 쓰레기에 싸여있다.’ 1951년 2월 1일 자 <부산일보> 사회면 기사의 일부다. 일제강점기에 부산의 기반시설은 인구 30만 명에 맞춰져 있었다. 시내 4개 정수장에서 생산되는 수돗물은 하루 3만 3000t에 불과했다. 식수 부족으로 인한 ‘물 전쟁’이 특히 피란민을 힘들게 했다. 인심 좋은 부산 사람도 물을 나눠주는 데에는 인색했다. 오죽하면 ‘밥 한 그릇은 줘도 물 한 사발은 줄 수 없다’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우물과 수도에 자물쇠를 채우는가 하면 드럼통에 물을 넣고 다니며 파는 물장사도 등장했다. 1951년과 1952년에는 흉년이 들어 전국 각지 유랑민까지 부산으로 몰려왔다. 당시 부산YWCA 부녀회원들은 굶기를 밥 먹듯 하는 피란민을 그냥 볼 수 없어 중앙동에서 ‘우유죽’ 배급을 시작한다. 우유죽은 분유에다 푹 삶은 보리쌀을 섞어 만든 죽이다. 전쟁 시기에 생겨난 또 다른 음식은 꿀꿀이죽, 일명 ‘유엔탕’이다. 미군 부대에서 버린 음식 찌꺼기를 수거해 끓인 음식이다. 피란민들은 꿀꿀이죽 장사, 미제 깡통을 펴서 판잣집 지붕 따위를 만드는 ‘깡깡이업’ 등 각종 밥벌이 수단을 찾아 생계를 이어갔다.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차철욱 소장은 “당시 부산은 절체절명의 생존 경쟁에 내몰린 피란민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로 가득했다”며 “이북에서 내려온 부유층, 고학력자도 체면을 떨쳐내고 낯선 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이런 유연한 대처 역시 피란 시기 부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부산일보=이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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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31 15:32

[동행, 2023 전북지플] (5) "축사 악취 95% 저감" 버려지던 커피박의 변신

"소도 사람과 똑같아. 시원한 새 이불 깔아주니 쟤들도 신나서 뛰노는 거지." 지난 26일 임실군 관촌면의 한 축산농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전주시 덕진지역자활센터에서 공수한 커피박(찌꺼기) 1t이 도착하자 축사엔 소똥냄새 대신 은은한 커피 향이 풍겨온다. 도심 커피전문점에서 맡을 수 있는 향긋한 모카번 냄새는 아니었지만, 축사 특유의 악취는 분명 아니었다. 이곳 '파랑새' 축산농가에서는 지난해부터 전북지역문제해결플랫폼(집행위원장 한동숭, 이하 전북지플) '커피박 재활용 축산농가 냄새저감'의제가 운영되고 있다. 해당 의제는 매년 버려지는 커피박으로 톱밥을 대체해 축사의 악취를 줄이는 프로젝트다. 이날 축사에 도착한 커피박은 전주 덕진지역자활센터가 지역 65개 커피전문점에서 수거해 마련했다. 지난해부터 파랑새축산농장의 50여 마리 소는 커피 위에서 먹고, 자고, 볼 일을 보고 있다. 이날도 작업이 끝나자, 중장비 소리에 겁먹고 구석에 움츠려 있던 소들이 관심을 보이며 커피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축사에 깔린 커피박은 속에 담겨 있는 미생물이 수분을 증발시켜 습도를 알맞게 유지해준다고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분뇨로 인해 질퍽해지는 기존 톱밥보다 조금더 쾌적한 환경을 소들에게 제공하는 셈이다. 커피박의 효능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수분조절제로서 역할을 다한 커피박은 농장 한쪽에서 숙성과정을 거친다. 거창한 작업없이 가만히 놔두기만 해도 한 달 정도 지나면 뜨거운 열감이 느껴질 정도로 저절로 발효가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커피박 비료는 땅에 흡수가 잘 돼 작물 수확에도 큰 도움을 주는 등 사용하기에 따라 금쪽 같은 자원이 된다. 파랑새 축산농 김영부 씨는 "매년 무더위에 대비하는게 골머리였는데, 커피박이 악취 절감뿐만 아니라 습도 조절 효과도 있어 한시름 덜었다"며 "특히 커피박은 톱밥보다 저렴해 축사 운영비도 절감할 수 있어 만족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참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27일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에서 발생한 커피박은 35만t에 이른다. 이들 커피박은 대부분 소각 혹은 매립되기에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만만치 않다. 커피박 1만t당 처리 비용은 약 10억 원이며, 매년 약 350억 가량의 처리 비용이 발생된다. 소각할 때 나오는 탄소와 온실가스 등 환경 측면에서도 부담이 크다. 커피박의 활용에 민간을 비롯한 지자체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실제로 이번 의제의 실행 주체인 덕진지역자활센터는 지난해 축사의 냄새 저감에만 집중했던 단계에서 더 나아가 커피박을 활용해 비료나 열쇠고리, 화분을 만드는 등 재자원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번 의제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른다. 매년 5000만 원 규모의 예산을 받아 운영하는 경북도에 비해 아직 전북도의 이렇다 할 추가지원이 없기 때문이다. 박준홍 덕진지역자활센터장은 "갈수록 인건비나 차량비가 늘어 의제 실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여전히 지자체의 지원이 전무한 상황"이라며 "예산 확보를 위해 꾸준히 지방 의회를 설득하고 있다. 앞으로 커피박의 재자원화에 지자체 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의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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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준서
  • 2023.07.30 16:41

[뉴스와 인물] 박숙영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전북지회장 "기업 활동하기 좋은 지회 만들 것"

도내 여성기업은 지난 2020년 전체 기업의 40%를 넘어섰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도내 여성기업(사업체) 수는 2016년 5만 7676곳, 2017년 5만 8837곳, 2018년 6만 316곳, 2019년 6만 1408곳, 2020년 6만 2948곳으로 매년 늘고 있다.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전북지회의 역할이 더 중요한 시기가 온 셈이다. 매년 여성기업의 경영 애로사항 등을 해소하기 위해 리더십스쿨, 여성 CEO 경영연수, 최고 경영자 육성 등 도내 여성 기업인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제9대 지회장으로 선출된 박숙영(61) ㈜키텍코리아 대표이사 역시 여성 경제인 육성, 지회 회원 간 화합 등을 중시하고 여러 사업을 추진 중이다. 올해는 전주, 군산, 익산, 남원 등 전 지역을 지회에서 총괄했지만, 앞으로는 전주지회를 독립시킬 예정이다. 박 회장을 만나 앞으로의 계획, 여성기업의 어려움 등에 관해 이야기를 들어 봤다. 취임한 지 벌써 1년 7개월 차에 접어들었는데, 소회가 어떠신지요. "1년 7개월 차라니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르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전북지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경제 상황이 힘들어지면서 도내 여성 경제인 역시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저희와 분과별 네트워크 재정비와 각종 행사, 여성 경제인들의 단합 등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까지 지회를 잘 이끌어 올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성과는 어땠는지, 자체 평가해 본다면요. "임기 동안 여성기업의 발전과 애로사항 해소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노력했습니다. 도내 여성기업을 방문하고 '호남경영연수'을 개최했습니다. 또 해외 한국기업 방문 등 다양한 업무를 추진했습니다. 임기를 시작한 2022년 초에는 200명 회원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245명의 회원이 있습니다. 45명의 회원이 추가 입회한 셈입니다. 그동안 여성 경제인들을 위해 노력해 온 성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도내 여성 경제인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프로그램 등을 진행했는지요. "지회에는 전주, 군산, 익산, 남원 등 여러 지역의 회원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한 자리에 모이는 게 쉽지 않다 보니 각자 지역 모임을 개최하고 또 월 1회 리더십스쿨·월례 회의 시간을 가지고 모이도록 하고 있습니다. 특히 모든 기업이 다 같은 고민도 있을 수 있지만, 서로 구성원 수·기업 형태가 다르다 보니 각자 니즈도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유통, 제조, 건설, 서비스로 나눠서 분과별로 맞춤 상담·회의 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최근 제2회 여성기업주간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는데요. 앞으로 더 보완해 나가야 할 점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지난해 이어 개최된 제2회 여성기업주간 행사는 지난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3일간 롯데백화점 1층 동문에서 여성기업 우수 상품 초대전을 개최하고 법률·세무·노무 무료 상담 부스도 운영됐습니다. 지난달 21일에는 창립 24주년 기념식까지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아쉬운 점은 '홍보'였습니다.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행사를 개최하고 도내 여성기업을 알릴 수 있도록 보완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내 여성기업 40% 시대가 열렸다고요. 질적으로보다는 양적으로 성장했다는 지적이 나오는데요. 여성기업만의 애로사항이 질적 성장을 막지는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기존에 남성들이 성장시켜 온 시장에 여성들이 진입해 활성화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바깥에서는 한 기업의 대표로 사회적 활동을 해야 하고 가정에서는 좋은 아내로, 한 아이의 엄마로, 딸로 살아가고 있는 만큼 일과 가정의 양립이 여성 경제인들이 가진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여성기업이 미래 경제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는 만큼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해 나가면 분명 좋은 결과가 생길 것입니다."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전북지회장의 시선으로 바라본 여성기업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요. "지원제도 개선·활성화가 필요합니다. 정부·지자체 등에서 여성기업에 대한 지원 정책은 마련돼 있지만 실질적으로 여성 경제인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실제 현장에서 여성기업이 가진 애로사항 해소를 위한 정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회 역시 현장에서 느끼는 애로·건의사항 해소를 위해 지자체, 유관기관과의 간담회 등 지속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여성기업의 경우 '수의계약' 건에서 가장 큰 어려움이 있다고요. "여성기업의 경우 수의계약이 1억 원까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혜택을 받는 여성기업은 많지 않습니다. 기관·단체장과 간담회를 통해 수의계약은 법적 한도 내에서 할 수 있게 배려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대부분 수용하겠다고 하지만 실무자 입장에서는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이밖에도 여성기업 입찰 시 가점도 어려움에 해당하는데요. 가점이 있기는 합니다만 비중이 크지 않습니다. 여성기업이라고 해서 받는 가점이지만, 사실 크게 와닿지 않습니다." 고등학생, 여대 학생들이 안정적으로 기업을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올해 하반기에 미래여성경제인육성사업을 진행한다면서요? "네, 올해 하반기에는 미래여성경제인육성사업(미래여성CEO육성사업)에 주력하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올해 한국여성경제인협회에서 정부 지원 예산을 100억 원 이상 확보했습니다. 우리 지회에서도 학교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는 등 미래 여성 경제인을 육성하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특성화고, 여대 졸업 예정자인 학생을 대상으로 사업을 추진할 예정입니다." '미래여성경제인육성사업'에 주력하는 이유가 있는지요. "사실 한 학생이 사회에 나와서 기업을 운영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성 경제인 선배들 역시 그 길을 걸어왔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마련한 사업입니다. 학생들이 사회에 나와서 막 걸음마 시작할 때 밑바탕이 돼 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무궁무진한 생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입니다. 현재 학산고가 참여하고 있으며, 내년에는 사업을 더 확장할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올해 하반기에 또 예정 중인 사업이 있나요? "미래여성경제인육성사업뿐만 아니라 미래 여성 경제인 육성과 여성기업 인식 개선을 위해 △리더스 특강 △여성 CEO와 함께하는 1박 2일 워크숍 △여성 CEO와 학생 간 개별 매칭을 통한 실천 창업 멘토링 △여성기업 현장 탐방 △미래 여성 경제인 육성 글로벌 체험 △호남경영연수 △전국경영연수 등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곧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전북지회에서 전주지회가 독립한다고요. "지회에 여러 지역 회원들이 있습니다. 회원사 총 250여 개 중에서 130개가 전주 회원에 해당합니다. 지금까지 지회에서 총괄적으로 지역을 관리했으나 전주 회원 수가 많아 따로 지회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기업 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어 주고, 기업체가 기업을 운영하는 데 도움이 돼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전주시와 협업해 여성 경제인들의 지원 방안을 마련하고 애로사항을 해소할 목표입니다." 앞으로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전북지회가 어떤 지회로 기억됐으면 하나요? "기업 활동하기 좋은 지회, 가입하면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지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회원(기업체)이나 지회 모두 서로가 필요성을 느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회가 먼저 회원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서 해결해 주는 게 지회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도민, 회원 등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실 각오는 했지만 정말 1년 반 넘는 시간 동안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지회를 이끌면서 제 개인적인 업무는 자연스럽게 뒤로 밀렸습니다. 아무래도 지회를 통해 일정이 바뀌다 보니 직업 자체가 이제는 기업 대표보다는 지회장으로 바뀌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 한 바퀴 다 돌았고 약간 여유를 가지고 지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저 역시도 여성 기업인이다 보니 회사도 중요하지만, 제가 맡은 역할이 지회장이다 보니 지회를 위해 더 열심히 활동하려고 합니다. 3년이라는 시간이 모두 지나고 나서 저 스스로가, 회원들이, 도민들이 '아, 쟤 열심히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렇게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박숙영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전북지회장은 오랜 시간 유아 교육계에 전념하다 지난 2014년 ㈜키텍코리아의 대표로 취임해 추진력과 결단력으로 도내 환경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전 전라북도 빙상연맹 총무·전무이사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 기획
  • 박현우
  • 2023.07.30 15:43

[지난 주 '핫클릭' : 7. 23~28] PSG 옷 입은 이강인, 전북현대 친선경기 뛰나

△7월 23일~ 7월 28일 변덕 심한 날씨에 지치기 십상이었던 7월 넷째 주, 전북일보 홈페이지 방문자들은 강정원 기자의 '전북 현대, 8월 3일 PSG와 친선경기'를 가장 많이 클릭했다. 8월 3일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펼쳐지는 전북현대와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PSG)의 친선경기에 팬들의 이목이 쏠린 것. PSG는 프랑스 리그에서 11번 우승한 '명문'으로, 지난 9일 대한민국 국가대표 이강인을 영입했다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 'PSG 역사상 첫 한국인'인 이강인이 이번 친선경기에 선발 출전할지도 관심거리. 두 번째로 즐겨찾은 기사는 박현우 기자의 '450대 1 경쟁률 킹산직 현대차 합격한 전주 청년 김경태 씨'다. 이 기사는 현대차가 10년 만에 생산직을 대규모 공개 채용하면서 구직자 18만 명이 몰렸고, 합격자 400명 중 만 20세의 어린 나이에 '대기업 입사'의 꿈을 이룬 김경태 씨의 사연을 담았다. 김 씨는 "매번 불합격된 게 큰 힘이 됐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더 열심히 해서 더 좋은 기업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줬기 때문"이라는 소감을 밝혔다고. 세 번째는 육경근 기자의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린다”…전북교사들, 학부모 갑질에 멍든다'로 끝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교권과 이를 막기 위한 서거석 전북교육감의 의지를 전했다. 서거석 교육감은 지난 24일 전략회의를 열고 "악성 민원에 당당하게 대처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밖에 송은현 기자의 '정체 모를 국제소포, 불안 높아지는 전북', 문민주·엄승현 기자의 '대회 D-7 새만금 잼버리는 공사 중' 등이 관심을 얻었다.

  • 기획
  • 이용수
  • 2023.07.29 13:44

[2023 참여&공감, 시민기자가 뛴다]복날과 반려견

풍부한 영양소로 예부터 우리에게 인기를 누렸던 보신탕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과거와 비교해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이 늘어나고 인식이 바뀌면서 보신탕을 찾는 사람들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보신탕 대신 삼계탕 염소탕 장어탕 등으로 업종을 전환하는 음식점이 많아지면서 보신탕이 퇴출 위기에 처했다. 여름철을 맞이하여 매스컴에서는 보신탕집들이 문을 닫는다고 연일 보도 한다. 이유는 거래처로부터 고기를 공급받기도 어렵고 손님들도 반응도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보신탕에 대한 인식 변화와 보신탕 판매에 단속이 강화되어 업체들의 개 도살 중단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또한 개고기 공급 업주들은 시대가 바뀌어 업체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요즘에 반려견과 생활하는 인구 증가와 식문화 변화도 한몫하고, 개고기에 대한 인식도 안 좋아 업체를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전주를 비롯한 각 시군에는 수십 년간 보신탕을 판매하는 음식점이 많다. 특히 임실 오수나 익산 춘포 등에 산재한 보신탕집은 전국적으로 유명해 여름이면 문전성시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보도에 의하면“초복(11일)을 하루 앞둔 지난 10일 오후 전주에서 보신탕을 판매하는 A 보신탕집 주인 P씨는 "개고깃값은 오르고 손님은 없는데 시청과 시민단체가 개고기를 판다고 하루가 멀다고 가게를 찾아와 단속한다"며 한두 해만 더 해 보고 장사를 접을 생각이라고 했다. P씨는 실제로 각종 민원에 시달렸다. 한 동물보호단체가 식품위생법 위반, 불법 입간판 등으로 시청에 신고해 단속반이 한 달에 3차례나 찾아와 단속했다는 것이다. 송천동에서 보신탕을 파는 Y씨는“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가게 앞에서 줄을 설 정도로 인기를 누렸지만, 요즘은 보신탕을 찾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었다. 특히 재료 수급이 제대로 안 돼 보신탕 판매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사회 전반에 깔린 분위기 탓에 보신탕 영업을 접고 염소탕으로 업종을 바꿔 장사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삼례 보신탕집 주인 C씨는 전업을 하고 싶지만, 막상 폐업하자니 그동안 쌓은 노하우가 아깝고 마땅한 직업을 구하기도 요원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개를 반려견(伴侶犬)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려견과 애완견(愛玩犬)을 혼동하고 있다. 애완견은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르는 개다. 일각에서는 애완견이라는 말은 개를 생명체가 아닌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뉘앙스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반해 반려견이라는 말은 노벨상을 받은 오스트리아 동물학자 로렌츠Konrad Zacharias Lorenz (1903~1989) 탄생 8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에서 평생을 함께하는 동물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반려견은 가족처럼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개로, 주인과 정서적 교류를 하며 함께 생활한다. 또한 주인과의 관계에서 상호 간 이해를 바탕으로 사회성 교육을 받아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산책이나 놀이터 등에서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학습한다. 심리학에서도 반려견을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한다. 이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반려견이라는 말에 반대하기도 한다. 인간과 개는 동급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과 교감을 하고 의식을 공유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려라는 개념을 개에 대입하기에는 언어도단이라는 견해다. 개를 키우는 동기나 원인은 다양하다고 하지만 인간의 만족을 위해 선택되어 사육되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반려견이라는 말에 반대 의견도 존재한다. 그런데도 개를 사육하는 사람 중에는 자신의 개와 정신적 교감은 물론 의지하는 사례도 존재해 많은 사람이 반려견이라고 부르는 추세다. 반려견은 주로 외국산 개다. 생김새도 가지가지 이름도 희한하다. 말티즈, 푸들, 포메라니안, 비숑, 시츄 등이 있다. 덕진동 소재 펫숍 의하면 장모 치와와 새끼견은 35만 원, 미니 비숑 프리제는 65만 원이라고 한다. 관리비도 만만치 않다. 사료, 배변패드 등에 들어가는 운영비가 한 달에 10만 원 이상이 든다는 안내인의 설명이다. 그 외에도 예방주사도 수시로 맞혀야 하고 중성화 수술 외 질병에 걸리면 치료비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려견의 위상은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이다. 이제 개는 개가 아니라 반려견으로 신분 상승이 되어 사람과 동격으로 대접받는다. 주인과 산책을 하고 주인과 식당에 납시어 함께 밥을 먹는다. 옷을 해 입고 개껌을 씹기도 한다. 휴가철이면 개 호텔 에어컨 아래서 오수를 즐긴다. 겨울이면 온열 매트를 깔고 누워 꿈도 야무지게 꾼다. 심지어 이름도 사람처럼 불리며 주인의 품에 안겨 내 새끼라며 귀염을 받고 잠도 주인과 한 이불을 덮고 잔다. 죽으면 영정사진이 내걸리고 봉안당에 안치되어 주인이 눈물을 받아먹는다. 요즘 반려견들은 든든한 빽까지 가지고 있다. 다름 아닌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다. 얼마 전 김건희 여사가 "개 식용은 종식돼야 한다"고 언급하자 매스컴들은 동조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국회에서도 '개 식용 금지법' 관련 법안을 추진하면서 지자체를 중심으로 개 도살과 보신탕 판매를 집중 단속하고 있다. 이쯤 대우를 받으면 어지간한 인간보다 낫다. 말 그대로 개 팔자가 상팔자다. 정성수 시인, 향촌문학회장 정성수 시인, 향촌문학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기고
  • 2023.07.26 15:53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⑭전북 동부, 후백제 거점이었다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이 전북을 동쪽의 산악지대와 서쪽의 평야지대로 갈라놓아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을 이룬다. 전북 동부는 무진장, 임순남 등 낙후지역으로 회자되고 있지만 금광·은광·동광·철광이 공존하는 무궁무진한 지하자원의 보고이다. 오늘날 포항제철과 그 의미가 똑같은 300여 개소의 제철유적과 국내 유일의 제동유적도 전북 동부에 자리한다. 장수 명덕리 대적골 제철유적에서 후백제와의 연관성이 검증되어, 전북 동부는 후삼국의 맹주 후백⑭제 국력의 화수분이자 거점이었다. △전북 동부 후백제 철산지였다 인간의 지혜와 자연의 철광석이 하나로 합쳐져 다시 탄생된 것이 제철유적이다. 최고의 생산유적으로 평가받는 제철유적은 원료인 철광석과 연료인 숯, 첨단기술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 전북 동부는 철분의 함유량이 월등히 높은 화강 편마암이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으며, 기원전 2세기 말 장수 남양리에서 첨단기술의 전래도 입증되었다. 가야사 국정과제가 시작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전북 동부에서 한 개소의 제철유적도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다. 그런데 전북 동부에서만 그 존재를 드러낸 반파가야 봉화의 완전성을 위해 제철유적을 찾는 지표조사가 기획되었다. 지금도 전북 동부 제철유적 및 봉화를 찾는 추가 지표조사가 꾸준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수가 증가할 것으로 확신한다. 전북 동부 문화요소의 유전자는 철(鐵)이다. 우리나라 단일 지역 내 제철유적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운봉고원은 기원전 84년 지리산 달궁계곡을 피난지로 삼은 마한 왕이 첨단과학의 전달자이다. 기문가야가 동북아를 아우르는 위세품을 거의 다 모은 국제성도 철의 힘이다. 남원 아막성 집수시설에서 나온 용광로 벽체와 슬래그도 신라의 철산개발을 실증한다.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 금강 최상류에 기반을 둔 반파가야는 봉화 왕국이다. 1500년 전 전북 동부에 봉화망을 구축하려면 국력이 입증되어야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국력의 원천은 철이다. 반파가야 고총에서 단야구와 최고의 철제품인 말발굽이 나와 철의 생산과 유통을 유물로 입증하였다. 게다가 반파가야 영역에서 발견된 250여 개소의 제철유적도 그 개연성을 더 높였다. 장수 삼고리 고분군은 반파가야의 요람이다. 반파가야 백성들이 잠든 사후 안식처로 한강 이남의 최상급 마한계와 백제, 가야, 신라토기를 한 자리에서 실견할 수 있는 곳이다. 반파가야 물물교환의 증거물로 철산지만의 정형성이자 자랑거리이다. 우리나라에서 도굴의 피해가 가장 심한 반파가야 고총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제철유적의 발굴조사가 기획되었다.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제철유적은 철의 제련부터 가공, 정련까지 이루어진 종합제철소이다. 이곳에서는 철광석을 캐던 반달모양의 채석장, 철광석을 녹이던 제련단지, 철제품을 만들던 가공단지, 숯을 굽던 숯가마 등이 조사되었다. 후백제 문화층에서 붉게 그을린 기와편과 청동제 소형 동종이 출토되어, 전북 동부 제철유적이 후백제에 의해 운영되었음을 실증해 주었다. △후백제, 전북 동부에 국력을 쏟았다 후백제 축성술의 비밀이 드러났다. 고구려 백암성을 쏙 빼닮았는데, 그 전수자는 고구려 유민들이 금마저에 세운 보덕국이다. 후백제 축성술은 줄을 띄운 줄 쌓기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들여쌓기, 한자 품(品)자형 쌓기로 상징된다. 성돌은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잘 다듬고 그 길이가 상당히 길어 마치 옥수수 낱알모양을 닮아 견치석으로도 불린다. 백두대간과 금남정맥, 금남호남정맥 산줄기를 따라 후백제 산성들이 집중 배치되어 있다. 전주로 향하는 옛길이 통과하는 길목을 지킨 산성들로 후백제는 산성의 규모를 확장하거나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았다. 후백제의 동쪽 방어체계 구축과 함께 장수 명덕리 대적골 제철유적 등 전북 동부 철산지를 방비하려는 후백제의 국가 전략이 투영되어 있다. 백두대간 육십령을 넘어 전주까지 이어진 옛길이 통과하던 방아다리재 남쪽에 장수 침령산성이 있다. 반파가야가 처음 터를 닦고 쌓은 테뫼식 산성을 신라가 4배 이상의 포곡식 산성으로 확장하였다. 후백제는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거나 남쪽에 치를 두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 집수시설에서 수백 점 이상의 후백제 유물이 쏟아져 후백제 박물관을 연출하였다. 금남호남정맥을 넘어 전주로 향하는 옛길이 통과하던 자고개 북쪽에 장수 합미산성이 있다. 후백제 축성술의 랜드마크로 반파가야와 백제, 후백제를 함께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반파가야가 산성의 터를 닦고 후백제가 확장한 테뫼식 산성으로 90% 이상의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장수군이 후백제의 동쪽 거점으로 대규모 철산지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와 후백제 중국 청자의 본향이 절강성 항주에 도읍을 둔 오월이다. 후백제 견훤왕은 오월을 세운 전류와 왕 대 왕으로 양국의 국제외교를 거의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후백제가 오월에 말을 보내자 오월은 반상서를 대표로 사절단을 후백제에 파견하였다. 양국의 국제외교 결실로 오월의 도공과 중국식 벽돌가마를 만드는 전축공이 후백제에 파견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후백제 도읍 전주에서 가까운 진안 도통리에서 중국식 벽돌가마가 조사되었는데, 벽돌가마는 오월 월주요 상림호처럼 아주 정교하게 벽석을 쌓았다. 그러나 시흥 방산동 벽돌가마는 아주 거칠고 조잡하게 쌓아 오월, 후백제와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진안 도통리 중국식 벽돌가마에서 검출된 숯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도 일관되게 후백제를 가리켰다. 936년 후백제 멸망으로 진안 도통리 중국식 벽돌가마가 처참하게 파괴된 뒤 전혀 검증되지 않은 길이 43m의 진흙가마를 다시 앉혀 우리나라에서 그 길이가 가장 길다. 진안 도통리에서 중국식 벽돌가마는 그 운영주체가 후백제로 판단된다. 전주 동고산성과 인봉리, 장수 침령산성 등 후백제 산성에서 진안 도통리 출토품과 똑같은 초기청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진안 도통리는 후백제 최첨단국가산업단지로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북 동부에서 화려하게 꽃피운 철기문화 못지않게 도자문화도 후백제가 후삼국 맹주로 발돋움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진안 도통리, 고창 반암리 중국식 벽돌가마에서 구운 초기청자는 차(茶) 문화를 중시하던 선종(禪宗)의 후백제 지지를 이끌어낸 촉매제였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 후백제, 전북 동철서염 완성하다 인류의 역사 발전에서 소금과 철의 공헌도가 탁월하다. 초기철기시대부터 전북가야를 거쳐 후백제까지 전북은 소금과 대규모 철산지였다. 새만금 등 전북 서해안에서 200여 개소의 패총과 전북 동부에서 300여 개소의 제철유적이 이를 실증한다. 이제까지 전북에서 축적된 고고학 자료에 근거를 두고 전북의 역사를 ‘동철서염(東鐵西鹽)’으로 표방하려고 한다. 기원전 202년 제나라 전횡의 망명과 고조선 마지막 왕 준왕의 남래 때 철기문화가 바닷길로 곧장 만경강유역에 전래된 것 같다. 만경강유역은 마한의 요람으로 한강 이남에서 청동문화가 가장 융성하고 철기문화가 처음 시작된 곳이다. 마한의 핵심세력은 해양세력으로 전북 서해안에서 토판천일염으로 소금이 생산 유통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북혁신도시를 테크노밸리로 일군 선진세력이 철광석을 찾아 전북 동부로 대거 이동한다. 장수군 천천면 남양리와 지리산 달궁계곡에서 마한세력의 이동이 포착되었다. 전북 동부에 정착한 마한세력은 가야문화를 받아들여 가야 소국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기문가야와 반파가야로 상징되는 전북가야는 120여 개소의 가야 봉화를 전북 동부에 남겼다. 일본열도를 포함하여 전북 동부에서만 그 존재를 드러낸 가야 봉화는 전북가야의 본바탕이자 아이콘이다. 전북가야는 동북아를 아우르는 최고급 위세품과 최상급 토기류를 거의 다 모아 대규모 철산지였음을 알렸다. 통일신라 때 남원경 설치의 역사적 배경도 전북 동부 철산개발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 철불의 효시로 평가받는 운봉고원 내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도 전북 동부 철기문화의 정수이자 최고의 걸작품이다. 후백제는 전주로 도읍을 옮기고 전북 동부의 철기문화와 서부의 해양문화를 하나로 응축시켜 전북의 ‘동철서염’을 국가 시스템으로 완성하였다. 요즘 전북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후백제 문화유산은 그야말로 풍성하고 월등하기 때문에 후백제에 대한 인식 전환이 요청된다. 후백제사가 복원될 때까지 후삼국의 맹주 후백제를 꼭 기억하였으면 한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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