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2-08 10:07 (Mon)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기획

농촌마을에 던지는 마지막 질문⋯미래에 어떻게 될까요?

3개월 동안 지역 소멸 위기 극복 프로젝트 <청년 이장이 떴다!> 를 진행하면서 하나의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외부 사람은 지역소멸을 볼 때 언젠간 일어날 일, 당연한 일인데 내부 사람은 어떨까요. 정작 가장 먼저 소멸할 수밖에 없는 농촌마을에서 생각하는 지역소멸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화정마을 연령대를 보면 60대 초중반부터 90대 초중반까지 있죠. 30년 후면 모두 떠나게 된다는 말이죠. 이 농촌마을에서 생각하는 지역소멸은 어떨까요.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머니가 생각하는 화정마을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저기 골목길 끝에서부터 보행 보조기를 밀고 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달달달', 박복순(88) 어머니 소리였네요. 멀리서 보이는 어머니의 실루엣을 보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흐릿하지만 방긋 웃는 얼굴이 기분 좋게 만듭니다. "어머니, 잠깐 아지트에서 쉬다 가셔요!"라는 말에 보행 보조기 주차까지 완료했습니다. 박복순 어머니는 70여 년간 화정마을에서 살았습니다. 시집오고부터 계속 이 마을에 살았던 것이죠. 우리의 궁금증에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시원한 비타민 음료를 건네면서 살포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청년 이장' 취재진이 "어머니, 옛날 화정마을은 어땠어요?"라고 묻자 "마을이 되게 작았는디, 엄청 커졌어. 근디도 사람은 계속 줄더라고?"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자식들이 어릴 적에는 마을이 북적일 정도로 사람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당시 마을 옆에 있었던 초등학교는 한 반에 70∼80명이었다고 하시는 것 보면 말 다했죠. 가장 궁금했던 화정마을의 미래에 대해 물었습니다. 오랫동안 화정마을에 살면서 남편·자식·이웃들과의 추억이 너무나도 많아졌던 터라 질문만 하는데도 아쉬움이 가득해 보이셨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입니다. 박복순 어머니는 "학교 졸업하니까 다 밖으로 나가지, 안 그려? 서울에 사는 자식들도 내려온다고는 혀. 근데 그게 쉬워? 밥벌이가 있어야 살지, 어쩌겄어. 거의 여기서 평생을 살았으니께 없어진다고 하면 안타까울 것 같어. 안 그려?"라고 하셨습니다. 왜 화정마을에 사람들이 안 들어오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습니다. 이어 "화정마을이 살기가 얼마나 좋은디. 집 뒤에 있는 산에서는 맑은 물이 졸졸 내려오고 공기도 좀 좋아? 마을 주민들끼리 단합도 잘 되고 나 나물 캐고 싶으면 나물도 캐고. 얼마나 좋은 마을이여"라며 자랑하셨습니다. 또 다른 어머니들의 이야기도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왜 여기까지 왔어!" 마을 산책하던 중 저기 멀리서 파를 뽑고 계신 신옥리(83) 어머니와 우리의 '영화 언니' 이혜례(62) 씨가 태어난 지 3개월밖에 안 된 강아지 곰순이를 산책시키고 있네요. 마을 초입까지 걸어온 취재진들에게 힘들지 않냐며 호통부터 치십니다. 날이 좋아서 산책한 것뿐인데 이것도 힘들까 걱정되시나 봅니다. 같이 쭈그려 앉아 파를 다듬으면서 은근슬쩍 질문을 던져 봤습니다. "정말 만약에 이 마을이 사라진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다들 더 연세가 드시면 사람이 없어서 마을이 사라지진 않으려나요?" 화정마을에 살다가 잠시 서울에서 지내고 다시 내려온 신옥리 어머니는 "절대 마을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냥 없어지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을 봐, 누가 와서라도 살지 않겄어? 집이 비었다 하면 멀리서 또 오잖아. 안 올 줄 알았어. 근디 사람들이 오더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니까 후딱 사라지지는 않아. 100년 동안은 안 없어져. 여기 추억이 다 있는데 어쪄, 안타깝지"라고 부연 설명하셨습니다. 옆에 있던 이혜례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씨도 "동네는 그냥, 사람이 없다고, 그렇게 쉽게 없어지지 않지. 세상에 남은 자식들이 다른 사람들한테 팔 수도 있잖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어쩌면 이게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신기하게 모두가 똑같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취재진이 본 지역 소멸과 화정마을의 모습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석 달간 시골 마을서 지내보니⋯차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기사를 참고해 주세요.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5.04.12 07:58

석 달간 농촌마을서 지내보니⋯이곳에도 사람이 삽니다

청년 이장으로 화정마을의 주민이 된 지 벌써 석 달이 되었습니다. 농촌 마을 특유의 정 덕분인지, '청년 이장' 취재진의 오랜 치근덕(?)거림 덕분인지 석 달 만에 ‘화정마을 사람’ 소리를 듣습니다. 그 증거로 화정마을 사람만 갈 수 있는 야유회도 초대받았답니다. 처음 화정마을을 만났을 때 주민 대부분은 전기 장판 위에 멍하니 앉아 있거나 마을 회관에서 화투를 치는 일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런 동네 분위기에 조금씩 변화가 생긴 건 취재진의 설득과 노력 끝에 청년 이장 아지트에 모이고 난 이후입니다. 다 함께 모여 그림도 그리고 시도 쓰는 등 문화생활을 즐기게 되었지요. 그동안 그린 그림은 하얀양옥집에 전시되기도 했고요! 그 과정에서 점점 활기가 돌아오는 화정마을 사람들의 변화가 생생합니다. “늙으면 죽은 목숨이지” 그렇게 말하던 어르신의 입에서 “희망을 되찾았지”라는 말이 나왔을 때 취재진은 작은 변화지만 큰 울림을 느꼈습니다. ‘지역 소멸 위기 극복’이라는 거창한 목적을 가지고 들어온 취재진이 농촌 마을 활력에 힘 쓴 이유입니다. 지역이 사라지지 않으려면 그 지역이 살고 싶은 장소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사할 때 보통 한 가지 이유만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가기 좋은 조건’이 골고루 갖춰져 있어야 살고 싶은 동네가 되지요. 통계청의 ‘살고 싶은 우리 동네’ 서비스도 자연, 안전, 문화복지, 교육, 생활편의교통 등의 지표로 각 지역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도심 대부분은 중에서 상 등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화정마을을 포함한 농촌 마을은 그중 단 하나의 지표도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화정마을에는 도심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식료품점도, 영화관도, 옷 가게도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읍내마저도 걸어서 1시간 이상 걸리죠. 하루에 운행되는 버스는 6대뿐. 배차 간격도 짧으면 1시간, 길면 4시간 걸립니다. 주민들 대다수는 버스 시간표를 집에 써 붙여 놓을 정도입니다. “젊으면 걷지, 뭐” 그 말도 화정마을에선 통하지 않습니다. 화정마을을 비롯한 농촌마을 대부분은 도로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소규모 마을이 개발되면서 지역을 잇는 고속도로와 일반 도로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람을 위한 인도는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화정마을로 출근하며 취재진은 매일 도로 갓길을 걷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그중엔 노인도 어린아이도 있었습니다. 차가 없으면 문화 생활은커녕 생존조차 위협받는 셈입니다. 취재진은 농촌 마을에서 생활하며 지역이 살아남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모든 문제를 파악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에 세 달은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히 체감한 점은 있습니다. 도시에선 너무나 당연해서 잊고 지내던 병원, 식료품점, 인도 등 모든 편의시설 하나하나가 지역 끝자락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서로를 챙기며 질 좋은 삶을 살아가려는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살아 있는 마을’을 봤습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화정마을을 비롯한 지역의 시간은 계속 흐릅니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꽃을 가꾸는 화정마을 사람들 사이로 또 다른 ‘청년 이장’들이 화정마을의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채워가기를 바랍니다.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 기획
  • 문채연
  • 2025.04.12 07:57

드라마 같은 풍경과 영화 같은 하루…고창 청보리밭축제 19일 개막

봄의 절정을 알리는 고창청보리밭축제가 드디어 막을 올린다. 지난 벚꽃 시즌을 아쉽게 보낸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반가운 소식이다. 향긋한 봄내음과 연둣빛 청보리의 싱그러움이 어우러지는 제22회 고창청보리밭축제가 오는 4월 19일부터 5월 11일까지 23일간 고창군 공음면 학원농원 일원에서 열린다. △63ha 대지 위 초록빛 힐링…봄 대표축제로 자리매김 이번 축제가 펼쳐지는 학원농원은 무려 20만여 평(63ha)의 광활한 청보리밭과 유채꽃밭이 조성된 공간으로, 봄기운을 가득 품은 초록의 물결이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청량한 힐링을 선사한다. 축제 기간 동안 약 4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될 만큼, 이곳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봄 축제로 자리잡았다. 학원농장은 과거 지명인 ‘한새골’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학(鶴)과 원(原)을 합쳐 ‘학의 들판’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봄에는 청보리와 유채, 여름엔 해바라기와 백일홍, 가을엔 메밀꽃, 겨울엔 설경까지 사계절 내내 자연의 아름다움을 품은 장소다. △K-드라마 속 풍경을 걷다… 특별한 콘텐츠와 체험 부스 운영 올해 축제는 한층 특별해진 콘텐츠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단순한 경관 감상에서 벗어나, K-영화와 드라마를 테마로 꾸며진 청보리밭 속 포토존이 마련되어 방문객에게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듯한 체험을 선사한다. ‘폭싹 속았수다’, ‘도깨비’, ‘백일의 낭군님’ 등 인기 드라마 촬영지에 조성된 포토존과 드라마 의상 체험 부스는 인생 사진을 남기기에 제격이다. 또한 보리밭 내 소규모 야외무대에서는 고창농악, 클래식 공연, 버스킹 등 다채로운 음악 공연이 매일 펼쳐져, 문화적 즐거움까지 더할 예정이다. △공정하고 안전한 축제 운영…지역 경제도 ‘청신호’ 고창군은 안전한 먹거리 제공과 ‘바가지 없는 축제’ 운영을 위해 축제장 내 음식점 위생 점검 강화, 가격 표시제, 물가안정 부스를 운영한다. 이와 함께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고창사랑상품권 할인판매도 함께 진행된다. 관광객들의 소비가 고창 지역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제도가 준비되어 있다. 심덕섭 고창군수는 “고창 청보리밭 축제는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를 모두 갖춘 대한민국 대표 경관농업축제로 자리잡았다”며 “관광객들이 불편 없이 봄의 정취를 만끽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축제 운영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찾아가는 길] 고창군 공음면 학원농장길 158-6 내비게이션 검색어: ‘고창군 공음면 학원농장’

  • 기획
  • 박현표
  • 2025.04.11 09:57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0)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 〈양호순무선봉장 이공(李公) 묘비명〉

순무선봉진등록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 본 자료는 양호(兩湖) 순무(巡撫) 선봉장(先鋒將) 이규태(李圭泰)가 제2차 동학농민혁명 진압 과정에서 1894년 10월 11일부터 1895년 2월 5일까지 각처와 주고받은 공문들을 수록한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정부의 진압 관련 사항을 알 수 있는 핵심 자료로 순무영 보고와 답변, 각 지역 지방관과 주고받은 문서,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과 친군 경리청 부영관 성하영 등이 선봉장에게 보고한 문서와 그에 대한 지령 등 다양한 내용들을 수록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 이후 그 진압을 위한 부대로 조선 정부는 양호 도순무영을 편제하였는데 여기에는 기존 통위영·장위영·경리청과 일본군에게 훈련받은 교도중대가 소속되었다. 양호 도순무영은 신정희를 양호 도순무사, 좌선봉 이규태, 우선봉 이두황 등을 주요 지휘관으로 2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당시 이규태는 친군 장위영 정영관이었는데 정부에서 그를 양호 도순무영 별군관 겸 순무 선봉장으로 임명하여 농민군 진압에 종사케 하였다. 그러나 같은 기간 일본군은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소좌가 지휘하는 후비 보병 제19대대 등으로 동학당 정토군을 편성하여 각 지역의 농민군 진압을 위해 남하하면서 이규태 부대는 일본군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다. 순무 선봉장 이규태는 교도대와 통위영 각 부대를 이끌고 10월 10일 서울을 출발하여 과천을 거쳐 수원에 도착한 뒤 진위로 갔다. 도중 과천에서는 좌수 등에게 해당 경내에 동학농민군들을 혹시라도 숨기고 발설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드러나면 군령으로 처벌받겠다는 다짐을 받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장위영 부영관 겸 죽산진 토포사 이두황 부대가 청주성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두황 부대의 본진은 경리청·진남영 부대와 합세하여 보은 장내리에 있는 농민군을 향해 가면서 접주 백학길을 효수하였다. 장내리로 들어가서는 온 마을을 수사하고 농민군 주도자를 처단한 뒤 임시 막사와 집들을 다 태워버렸다. 10월 15일 순무영에서 선봉장에게 전령을 보내 공주의 비도(匪徒)들이 몹시 방자하게 날뛰어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하니 지원을 늦출 수 없다면서 즉시 전진해 섬멸토록 하고 사정을 보고토록 하였다. 이 무렵 광주에 있던 손화중이 흥덕·고부·무장·정읍·고창 등지에서 농민군을 동원하여 오권선이 이끄는 나주 농민군과 합세하여 나주 동북 방향에 진출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규태 부대는 일본군 부대와 함께 행군하여 진위와 성환을 거쳐 20일 천안에 도착하였다. 진위에서는 현령이 거리에 방문을 붙여 선봉진 부대의 도착 사실을 알리고 농민군들은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거괴를 붙잡아 들일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병사를 나누어 보내 토벌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향약절목(鄕約節目)을 작성하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하여 주민들을 철저히 단속하였다. 이규태는 천안의 거리 곳곳에 국한문 공고문을 게시하여 동학도들을 경계하고 유언비어를 만들고 평민들을 선동한 자들은 민회소와 창의소에서 잡아들여 처단할 것을 강조하였다. 천안의 유생들도 이규태에게 특별히 군대를 머물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었다. 천안에서는 농민군이 공주·유성·대전 등지와 청주의 관군이 패전한 곳에 수천 명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장위영 영관에게 공문을 보내 전진토록 하였다. 이규태는 이두황에게 연기에서 농민군이 출몰함으로 옮겨 주둔하여 이들을 막고 전라도 농민군이 지나가는 후환을 끊으라고 지령을 내렸다. 〈순무선봉진등록〉은 공주공방전과 이후 전라도 지방에서의 동학농민군 진압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전봉준은 논산 일대에 다시 결집한 농민군 2만여 명을 규합하여 노성과 경천으로 가서 일본군 및 관군 연합군과의 전투를 준비하였다. 11월 8일 농민군은 이인을 향해 공격해 왔고 다른 한 부대는 판치와 효포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9일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하루 종일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으나 패배하였다. 11~12일 경에는 능치 등 공주 부근 산봉우리에 남아있던 농민군마저 관군에게 쫓겨 계룡산 등지로 후퇴함으로써 20여 일에 걸친 공주공방전은 동학농민군의 패배로 끝났다. 이후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 주력은 전주를 거쳐 11월 25일 금구 원평으로 후퇴하게 된다. 당시 순무 선봉진에서는 원평으로 간 농민군이 3천여 명, 그곳에 집결해 있는 수가 1만여 명 이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우금치 전투 이후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과의 각종 전투에서 연전연패하였다. 이후 순무 선봉진 산하 각 부대는 일본군 후비 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의 지시를 받아 각처로 피신하여 항쟁을 지속하던 농민군들을 수색 체포하여 일본 군영으로 압송하였다. 전의현감은 기찰포교와 별초군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성묘를 계기로 체포 계책을 세워 그 우두머리 25명을 체포하여 문초한 바 있다. 옥과현에서는 양호 소모관 부대와 150여 명의 일본군이 전재석 등 농민군 참여자들을 때려죽이기도 하였다. 곡성현에서도 중앙군과 일본군이 사로잡은 우두머리를 매질하여 살해하였다. 그 과정에서 김개남은 11월 23일 전주에서 남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가 12월 1일 태인 산내면에서 강화 병정과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광주를 다시 점령한 손화중은 12월 1일 휘하의 농민군을 해산하고 떠났고, 교졸에게 체포된 주윤철 등 동학 접주 다섯 명은 곤장을 맞고 사망하였다. 최경선은 귀화한다는 방문을 내걸고 광주를 떠나 남평을 거쳐 동복으로 갔는데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순창에 수감되어 있다가 7일에 일본군 진영에 인도되어 나주로 압송되었다. 12월 2일 밤에는 순창 피로리에서 전봉준이 민보군 한신현 등에게 체포 수감되어 있다가 7일 최경선과 함께 일본군에게 인도되어 초토영이 설치되어 있던 나주로 압송되었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미나미 고시로가 농민군 우두머리의 인도를 요구하는 이유로 “동학의 비당(匪黨)을 조사하는 일은 귀국의 반역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관계된 것이 적지 않습니다. 무릇 비적 괴수를 붙잡으면 서울로 속히 압송하여 죄상을 국문하여 형법대로 시행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한 전보 내용도 수록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일본의 조선 정책에 큰 장애라고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호남 농민군 주력이 완전히 진압되자 이듬해인 1895년 1월 11일 군무아문은 순무영을 철폐하고 여러 곳에 파견한 참모관·참모사·소모사·소모관·별군관 등을 모두 혁파하고 선봉진도 원대로 복귀하라는 공문을 하달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은 2월 5일 계엄 태세 발령을 해제한다는 군무아문 전령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자료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호순무선봉장 이공(李公) 묘비명〉 양호 도순무영 순무 선봉장 이규태(李圭泰 : 1841~1895)의 묘비명이다. 경주를 본관으로 누대 무과 출신 집안에서 태어난 이규태는 1894년 차례로 훈련도정·총어영 별장·장위영 정령관 등에 임명되었다가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양호 도순무영 선봉장으로서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동학농민군 진압을 지휘하였다. 그는 장위영 영관 이두황을 목천 세성산으로 보내 동학농민군을 토벌케 하였고, 경리청 영관 홍운섭 등에게는 공주 농민군 토벌을 지시하였다. 이후에는 퇴각하는 농민군을 강진과 해남까지 추격하여 섬멸하였다. 그러나 당시 개화당 정부의 동학농민군 진압의 기본방침은 일본군의 무력과 그들의 지휘를 받아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었기 때문에 최종 지휘는 일본군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한계가 있었다. 후비 보병 제19대대 대대장 육군 소좌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는 조선군 일선 최고 수뇌부인 좌우 선봉장 등을 ‘휘하’에 두고 지령을 내리는 사실상 농민군 진압을 위한 조⋅일 연합군 지휘관 중 최고 책임자였던 것이다. 일본군 지휘에 거부감을 가진 이규태는 여러 차례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이규태는 동학농민군이 완전히 진압된 직후인 1895년 6월 54세로 서울에서 사망하여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선유동 선영에 안장되었다. 이 묘비명은 〈일성록(日省錄)〉 편집관 이승욱이 1915년에 쓴 것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 기획
  • 기고
  • 2025.04.09 17:34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9) 경계를 넘는 통치자, 알렉산더의 혁신적 통치 방식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 중 한 명으로, 32세라는 짧은 생애에도 그리스에서 인도 북서부까지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군사적 성취를 넘어 정복지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독특한 통치 철학에 있었다. 그는 이집트에서는 파라오로 즉위하고(그림1), 페르시아에서는 현지 전통 의복을 착용했으며, 인도 불교 문화권에서는 금강역사(그림2)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포용 정책은 단순한 정치적 전략을 넘어, 서로 다른 문명 간의 가교 역할을 자처한 알렉산더의 선구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그는 무력으로 정복한 영토를 문화적 융합을 통해 진정한 제국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 신의 아들이 된 외국인 왕: 알렉산더의 이집트 정복 전략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32년 페르시아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를 정복했다. 당시 이집트는 약 200년간 페르시아의 억압적 통치를 받아왔기에, 이집트인들은 알렉산더를 해방자로 환영했다. 정복 후 알렉산더는 정치적으로 탁월한 조치를 취했는데, 현지 전통에 따라 자신을 '파라오'로 선언하고 이집트 신전에서 제사를 지내며 현지 신들을 공경함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이러한 문화적 포용 정책은 이집트인들의 자발적 지지를 얻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 이집트 파라오로 변신한 알렉산더: 룩소르 신전 부조의 상징성 필자는 지난 2월 룩소르(Luxor) 신전에서 파라오로 묘사된 알렉산더의 부조를 확인했다. 이 부조는 알렉산더가 태양의 신 아몬(Amon)에게 성수(聖水)를 제물로 바치는 장면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까지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그림1) 알렉산더의 왼손에는 권위의 상징인 와스 홀(Was Scepter)이 쥐어져 있는데, 이 홀은 상단부가 동물 머리 형태이며 하단부는 갈라진 포크 모양으로 권력과 지배력을 상징한다. 아몬 신은 긴 깃털 왕관을 쓰고 있으며, 발기된 성기가 특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성적 표현을 자연스럽게 수용했으며, 이를 자기 재생, 부활, 그리고 생명 창조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부조에서 아몬 신은 알렉산더보다 더 크고 위엄 있는 자세로 표현되어 신의 우월적 지위를 시각화했다. 이 파라오가 알렉산더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는 부조 좌우에 상형문자(hieroglyphics)로 동일하게 새겨진 알렉산더의 이름이다.(그림3과 그림1 홍색 작은 원) △ 적의 옷을 입은 정복자: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문화 수용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정복 과정에서 상징적 권력 중심지인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웠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페르시아 문화를 존중하고 융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페르시아 다리우스 3세의 왕관과 화려한 로브 등 페르시아 왕실 의복을 착용했는데, 이는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충격적인 행보로 받아들여졌다.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문화 수용을 직접 보여주는 유물은 제한적이나, 이탈리아 폼페이에서 발견된 모자이크(BC 100년경 제작 추정)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그림4) 이 모자이크는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3세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알렉산더는 그리스식 갑옷을 입고 있지만, 전체적인 배경과 구성은 페르시아 미술의 영향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어, 그의 문화적 융합 정책의 시각적 증거로 해석된다. 그림4. 알렉산더 모자이크(Alexander Mosaic).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 △ 금강역사가 된 정복자: 불교 수호신으로의 변신 알렉산더 대왕의 진정한 문화적 리더십은 그가 불교의 수호신 금강역사로 재탄생한 예술적 표현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아프가니스탄 하다(Hadda) 지역의 불교 사원 타파 쇼토르(Tapa Shotor)에서 발견된 조각상은 알렉산더 대왕의 특징적인 얼굴 윤곽, 곱슬거리는 머리 스타일, 그리스식 복장과 자세를 분명히 보여주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중앙의 주요 위치가 아닌 불교 사원의 주변부에 배치되어 있다.(그림5) 이러한 위치는 그가 붓다를 보호하는 금강역사(Vajrapani)의 역할로 재해석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문화적 변용은 기원전 4세기부터 발전한 간다라 문화권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 이후,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북부 지역에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설립되었고, 이 지역은 그리스 문화와 현지 문화, 특히 불교가 만나는 융합의 장이 되었다. 간다라 미술은 이러한 문화적 혼합의 대표적 산물로, 그리스의 사실주의적 조각 기법과 불교의 정신적 주제가 결합되어 독특한 예술적 표현을 탄생시켰다. 타파 쇼토르의 알렉산더 조각은 이러한 문화 융합의 극적인 예시이다. 전통적인 그리스 영웅의 이미지는 불교적 맥락에서 재해석되어, 세속적 정복자가 정신적 수호자로 변모한 것이다. 그림5. 금강역사가 된 알렉산더. 아프가니스탄 하다(Hadda) 타파 쇼토르(Tapa Shotor) 출토. △ 문화적 포용: 알렉산더의 혁신적 리더십 전략 알렉산더 대왕의 문화적 포용 정책은 고대 세계에서 전례 없는 혁신적 통치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접근법은 당시 일반적이었던 정복자 중심의 문화 이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알렉산더의 다문화 리더십은 현대 글로벌 사회의 리더십 과제와 놀라운 유사성을 보인다.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구성원들의 통합을 촉진하는 것은 현대 다국적 조직과 글로벌 사회의 핵심 과제이다. 알렉산더는 2300년 전에 이미 이러한 다문화적 접근법의 잠재력과 도전을 경험했던 것이다.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 예술경영 교수

  • 기획
  • 기고
  • 2025.04.07 17:23

최한주 장수군의회 의장, 국가철도망 계획 반영 ‘광폭 행보’

대도시 집중화 현상으로 지방경제는 침체되고 사회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지방 도시와 농촌지역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철도 신설이다. 향후 10년간의 철도 교통망, 그 청사진을 담게 될 ‘제5차 국가철도망구축계획’ 확정을 앞두고 도내에서도 여러 가지 논의가 활발하다. 장수역~진안역 지선 철도 신설을 주장하는 장수군의회 최한주 의장이 지역소멸극복을 위한 지방 균형 발전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장수군의회 최한주 의장은 장수역~진안역 지선 철도의 국가계획 반영을 공식 건의하며 지역교통망 확충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최 의장은 “장수~진안 지선은 단지 두 지역을 잇는 철도 이상의 의미가 있다”며 “달빛철도와 영호남내륙철도를 연결하는 중추 축으로 국토 균형발전의 실질적 초석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11월, 강기정 광주광역시장을 만나 달빛철도 발전 방향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고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등 원활한 사업추진을 위해 상호 협력을 다짐했다. 그는 “대구와 광주를 연결하는 달빛철도는 영호남 상생과 국토 균형발전의 상징이다”며 “노선의 중간지점인 장수군 중심지에 장수역이 건설된다면 관광객 유입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견인하는 교류의 장이 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또 올해 3월, 국토교통부에 달빛철도와 영호남내륙철도 두 노선의 중심지를 잇는 장수역~진안역 지선철도 신설을 건의했다. 그는 "장수와 진안이 철도로 연결된다면 낙후되었던 교통망이 철도 인프라를 통해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으며 함양, 거창, 합천, 고령이 새만금과 더 가까워지고 광주, 담양, 순천이 무주리조트와 이어짐으로써 두 노선은 더 큰 시너지를 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호남내륙철도가 장수역~진안역 지선을 통해 달빛철도와 연결되면 전주와 김천을 비롯한 여러 지역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지역 간 교류가 더욱 활발해질 것이며 향후 국제행사 개최에 대비할 뿐만 아니라 당장 전북특별자치도가 도전하고 있는 2036년 하계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영호남내륙철도는 이번 철도망 계획에 꼭 포함되어야 할 노선이라는 것이다. 최한주 의장의 잇따른 ‘철도 행보’가 일각에서는 의회의 월권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우려에 대해선 “오히려 지방의회가 앞서서 나서야 할 때”라고 선을 그었다. “그저 행정부의 계획만 기다리고 검토하는 건 더 이상 의미 없습니다. 의회가 지역 현안을 선제적으로 분석하고, 정책을 제안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지역 대표기관의 본래 역할입니다.” 이런 자신감의 바탕에는 장수군의회가 지난해부터 장수역~진안역 지선 연결을 위한 기초자료를 준비해 온 반로다. 지리적 타당성, 기존 도로 인프라와의 연계성, 관광지 접근성, 인접 도시와의 교류 기대효과 등을 검토해 국토교통부에 정식 건의서를 제출했다. 특히, 이 노선이 통영~대전, 광주~대구 간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장수 중심부를 관통할 경우 장수군이 영호남 간 인적·물적 교류의 거점으로 재조명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장수군의회의 움직임은 장수만의 일이 아니다. 장수~진안 철도 지선은 전주~김천을 잇는 영호남내륙철도, 대구~광주를 잇는 달빛철도의 중간 허리를 잇는 지점이다. 해당 노선이 개설될 경우, 전북 동부권과 경남 서북부 그리고 광주·대구를 아우르는 새로운 내륙 교통축이 형성된다. 최 의장은 “진안·무주·남원 등 인접 자치단체와도 공동 건의 또는 연대 결의안을 추진할 계획”이라며 “철도 하나가 지역 간 연결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는 “장수에서 무주리조트, 담양에서 순천, 함양에서 새만금까지 철도로 연결되면 지역 경제는 물론 교류의 질이 바뀌게 된다”고 내다봤다. 국토교통부는 현재 ‘제5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2026~2035년)’ 수립을 위한 검토에 착수한 상태다. 이번 계획은 기존 수요 중심에서 벗어나 지역 균형, 접경지역 개발, 관광 활성화, 탄소중립 등 복합 요소를 반영한 것이 특징이다. 최 의장은 “장수~진안 구간은 인구나 교통량만 보면 소외될 수 있지만, 국토 균형이라는 평가항목 안에서는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다”며 “경제성 평가를 넘어선, 정책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5차 철도망 구축계획은 공청회·관계부처 협의·국가교통위원회 심의를 거쳐 올해 하반기 확정될 예정이다. 최 의장은 강릉 사례를 대표적 성공 모델로 꼽는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고속철이 들어선 강릉은 이후 연간 철도 이용객 200만 명을 넘기며 관광도시로 급부상했다. 또 최근 동해선이 부산까지 연장되면서 생활인구는 30만 명 수준까지 회복됐다. 그는 “강릉도 처음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장수군이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고 말한다. 통계청과 국토연구원이 발표한 ‘지방소멸위험지수’에 따르면 장수군은 2024년 기준 소멸위험지수 0.18로 ‘소멸 고위험 지역’에 해당된다. 고령화율은 37.8%로 전북 평균(28.4%)보다 약 10%포인트 높으며 지역 내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최 의장은 “지역 소멸을 막으려면 교통이 먼저입니다. 철도가 들어오면 의료·교육·관광 등 기반 서비스도 함께 따라옵니다. 철도는 인프라가 아니라 생명선입니다. 누가 먼저 나서느냐가 아니라, 지금이 바로 행동할 때이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최한주 의장은 “철도 사업은 특정 지역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은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주민의 절박한 요구가 국가정책에 반영되도록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며 “장수만의 일이 아닌 진안, 광주, 전주, 김천, 대구, 군산, 무주 등 달빛철도와 영호남내륙철도 노선 위의 자치단체들이 함께 목소리를 낼 때 꿈은 이뤄 진다”면서 “지역의 미래는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최한주 의장의 장수군의 철도 인프라 구축을 위한 노력과 비전이 결실을 이뤄 지역 발전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 기획
  • 이재진
  • 2025.04.06 14:55

[주말, 여기 어때] 전북 알록달록 '봄꽃 향연'⋯온 김에 주변 관광도?

◇봄바람 휘날리며/흩날리는 벚꽃 잎이/울려 퍼질 이 거리를/둘이 걸어요⋯. 듣기만 해도 설레는, 봄이 되면 귓가에 맴도는, 이맘때쯤 음원 차트를 역주행하는 노래가 있다. 바로 버스커 버스커의 노래 <벚꽃 엔딩>이다. 2012년 3월 발표 이후 봄 캐럴의 대표 주자로 자리 잡았다. 이 노래가 생각난다는 것은 봄이 왔다는 신호라고 여길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다. 가만히 서 있어도 괜히 <벚꽃 엔딩>을 흥얼거리게 되는 걸 보니 봄이 왔나 보다. 신호가 왔다. 날씨가 관건이다. 이번 주 토요일이자 식목일이면서 절기 한식인 5일은 전국에 비가 예고돼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5일 새벽 전라 서부·충남·수도권에서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 오전 중 전국으로 확대되겠다. 비는 이날 밤까지 이어지겠다. 다음 날인 일요일은 완연한 봄날씨가 펼쳐지겠다. 봄나들이객들도 날씨에 맞춰 주말 계획을 짜고 있다. 이번 주부터 전국 곳곳에서 봄내음 가득한 봄꽃 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전북도 봄나들이객 맞이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 4∼6일은 김제 꽃빛드리 축제(김제시민문화체육공원·도작로 220), 고창 벚꽃축제(석정지구 일원·석정리 727번지), 정읍 벚꽃축제(정읍천어린이전용축구장·벚꽃로 401)가, 5∼6일은 임실 옥정호 벚꽃축제(옥정호 출렁다리 앞·입석1길 59)가 열린다. 축제만 보고 가기 아쉽다면, 봄을 만끽하고 싶다면 봄꽃 축제 본 김에 관광지까지 둘러보면 어떨까. 기사 내용은 축제장에서 자동차로 이동했을 때의 거리와 간단한 관광지 정보로 정리했다. 관광지 정보는 전북특별자치도가 운영하는 '투어 전북' 홈페이지를 참고했다. 자세한 내용은 투어 전북 전북문화관광에서 볼 수 있다. 전북권 4대 도시로 웅비하는 김제 △미즈노씨네 트리하우스(자동차로 14분) 김제 평야에 동화 속 세상이 펼쳐진다면 누가 믿을까. 오픈AI 챗GPT가 만들어 주는 일본 유명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지브리 화풍의 이미지 생성 기능도 부럽지 않다. 여기를 가면 모두가 지브리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동심의 세계인 미즈노씨네 트리 하우스에서 미즈노 씨가 내려 준 커피 한 잔에 봄 내음을 느껴보자. △능제저수지(자동차로 15분) 능제저수지는 김제에서 가장 큰 저수지다. 낚시터로도 매우 유명하다. 차가 북적이는 유명 차박 명소와 달리 고요한 것으로 알려져 차박·차크닉(차+피크닉) 명소, 자연과 어우러질 수 있는 피크닉 명소로 꼽힌다. 길을 두고 양쪽에 펼쳐진 푸르른 나무 향연에 일렁이는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심지어 넓은 주차장까지 안 갈 이유가 없는 관광지다. △금산사(자동차로 35분) 금산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돼 1400여 년 이상 역사를 이어 오늘날까지 법등을 밝혀온 유서 깊은 명찰이다. 금산사 일원은 사적 제496호로 지정돼 있으며 호남평야 가운데 우뚝 솟은 모악산 서쪽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다. 금산사 가는 길도 벚꽃 명소로 꼽힌다. 새 소리와 함께 나무 그늘 아래를 걸어보며 자연 안에서 힐링해 보길 바란다. 군민 모두가 행복한 활력 넘치는 고창 △고창읍성(자동차로 7분) 고창읍성은 자연석으로 만든 성곽이다.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산을 둘러 성을 쌓아 파괴되지 않고 잘 보존돼 있는 성 중 하나다. 한 바퀴를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를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를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고창 꽃동산 자락을 따라 만개한 산벚꽃과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읍성 풍경이 하나의 액자 같다는 점 명심하자. △보리나라학원농장(자동차로 29분) 규모만 12만 평에 달하는 대형 농장인 보리나라(넓은들)학원농장은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더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봄은 유채꽃·청보리가, 여름은 해바라기·백일홍이, 가을은 메밀꽃, 겨울은 설원이 펼쳐진다. 평화롭고 한적하면서도 봄볕과 봄바람 느끼며 천천히 걸어보면 좋겠다. △책마을해리(자동차로 30분) 1939년 개교해 2001년 폐교된 나성초가 새 옷을 입었다. 2013년 이대건 촌장과 이영남 관장 가족이 정착해 조금씩 보수하고 가꿔 만든 책마을해리다. '누구나 책, 누구나 도서관'을 표방하고 시작한 만큼 입장료는 책 1권이다. 한쪽에서는 책을 읽으며 마음의 양식을 쌓고 한쪽에서는 뛰어 노는 책마을해리는 특별한 공간이다. 시민 중심, 으뜸 정읍 △국립전북기상과학관(자동차로 4분) '정읍 아이와 가볼 만한 곳' 하면 나오는 곳이다. 어려운 과학이 쉽고, 재미있게 느껴지는 이곳은 체험 교육 중심으로 교육과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유익한 공간이다. 스토리텔링 방식의 기상·천문 체험교육 프로그램이 큰 인기다. 이 때문에 가족 단위 관람객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솔티달빛생태숲·솔티생태관광방문지(자동차로 13분) 2015년부터 생태 자원을 활용해 발전된 생태 관광지인 솔티달빛생태숲은 평지와 산지의 독특한 생태계 특성을 모두 갖춘 보존 가치가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숲길에 야자 매트가 깔려 있어 상쾌한 산책을, 높게 솟은 대나무가 터널을 만들어 시원한 산내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어린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다양한 자연 친화적 놀이시설까지 완벽하다. △김명관 고택(자동차로 28분) 국가민속문화재인 김명관 고택은 조선 정조 8년에 지어진 집이다. 이후에 보수되지 않고 무려 200여 년간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돼 중요민속자료 제26호로도 지정돼 있다. 누구나 신발 벗고 집 내부를 볼 수 있다. 잘 보존된 마루 위에 앉아 새 소리와 바람 소리, 한 폭의 그림 같은 봄꽃까지 어우러져 중후하고 단아한 멋이 장관이다. 천만 관광 임실 시대 △전북119안전체험관(자동차로 34분) 한 달에 두 번을 가도 시간 아깝지 않은 이곳은 아이 있는 집이 차주 찾는다. 교육·체험·놀이를 결합해 재난 발생 시 대처 요령을 배울 수 있는 전국 최대 규모의 종합 안전 체험관이다. 단순히 아이뿐 아니라 성인에 이르기까지 연령대별 수준에 맞는 프로그램이 있어 아이·부모 모두 참여할 수 있다. 한 번 다녀온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꼭 한 번 가 보라고 추천한다고. △오수의견공원(자동차로 39분) 반려동물은 인간을 잘 따르기도 하지만 인간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먼 신라시대에도 그랬다. 주인을 살린 충견의 전설이 살아 있는 이곳에 오수의견공원이 생겼다. 의로운 개 이야기와 보은정신에서 착안해 조성했다. 넓고 푸른 잔디밭에 반려동물을 뛰어놀게 할 수 있으며 반려견 전용 캠핑 시설까지 갖춰져 있다. △성수산자연휴양림(자동차로 41분) 1996년에 개장한 성수산자연휴양림은 해발 876m 성수산 남쪽 계곡 보존이 잘된 원시림에 조성된 민간 휴양림이다. '나무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김한태가 30년간 가꾼 향나무, 낙엽송, 천연 활엽수 등이 빽빽하다. 맑은 계곡 옆에서 숲 기운을 쐬는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5.04.03 17:25

[전북의 기후천사] 지속가능한 에너지전환으로 1.5도씩 상승하는 지구 온도 낮춘다

쓰면 쓸수록 기후위기를 가속하는 필요악이 있다. 우리나라 100가구 가운데 99가구가 사용하고 있다는 가전제품 에어컨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역대 최고 기온, 역대급 폭염 소식이 들려오고,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재난으로 불리는 현실이지만 에어컨은 여름철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 돼버렸다. 하지만 에어컨을 펑펑 쓴다면 5년 뒤 우리가 살고 있을 미래는 ‘기후재앙’이라는 크나큰 부메랑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에너지를 더욱 효율적으로…전주시에너지센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달 30일 전주시 에너지센터에서 만난 이현세 팀장은 “이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건물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긴 만큼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로 초래된 기후위기 시대에 모든 자원이 그렇지만, 건물에서 배출되는 탄소를 줄여나가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 팀장은 머리로는 모두가 알고 있는 에어컨 실내 적정온도 유지하기, 안 쓰는 가전제품 플러그 뽑아두기, 엘리베이터 대신 짧은 거리는 계단 이용하기 등과 같은 일상생활 속 작은 실천이 지구를 살리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건물에서 에너지를 넘치게 사용하면 지구의 온도는 1.5도씩 상승하게 된다. 이 같은 현상이 반복되면 기후위기는 기후재난으로 다시 기후재앙으로 악화하는 일밖에 남지 않는다. 실제 기후위기 임계점이 가까워졌다는 경고음은 세계 곳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지난해 추석까지 이어진 무더위, 벚꽃 시즌을 앞두고 폭설과 우박이 쏟아진 일본, 스페인에 하루 동안 쏟아진 엄청난 양의 비까지 기상이변 현상이 이를 증명한다. 2022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에너지전환을 목표로 문을 연 전주시에너지센터는 통유리창과 태양광 패널로 구성된 에너지 자립 건물이다. 태양광 발전을 통해 에너지의 30~40%를 충당하고 있어, 에너지 절약과 효율개선을 몸소 실천하는 에너지 분야 중간지원조직이다. 건물 에너지의 효율화와 그린 리모델링을 통한 탄소중립 실현에 주력하고 있다. 탄소중립 사회로의 이행을 위해 센터에서는 시민의식 개선과 정보전달 교육, 홍보활동 등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건물의 탄소 배출량 감소를 위해 사업과 정책 등을 수립해 ‘친환경 에너지’ 전환을 발 빠르게 주도해 나갈 방침이다. 실제 건물에너지의 효율성 등을 진단하고 분석하는 사업을 발전시켜 탄소배출 저감에 실질적인 효과를 이끌어내겠다는 구상도 세운 상태다. 이 팀장은 “전주시에서 에너지 자립률을 높이기 위해 여러 형태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며 “에너지센터에서는 지역에서 에너지를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나가기 위한 준비를 하나씩 실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건강한 재생에너지 생태계 구축…전주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 에너지 자립 도시를 꿈꾸는 전주에는 미래 세대에게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를 물려주기 위해 햇빛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주시민햇빛협동조합이다. 2017년 창립한 시민햇빛협동조합은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시민은 직접 생산시설을 갖추고, 그럴 수 없는 가구는 에너지협동조합에 투자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방안으로 에너지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전주시 유휴부지였던 효자 배수지에 건립된 시민햇빛발전소 1호기는 발전 용량 100㎾ 규모의 태양광발전소로 연간 12만 4100㎾의 전력을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34가구(4인 가족 기준)가 1년 동안 쓸 수 있는 양이며, 약 500그루의 나무를 심어야 처리할 수 있는 양의 이산화탄소가 줄어드는 셈이다. 출자한 금액에 따른 배당도 받을 수 있어 가정경제에 소소한 뿌듯함까지 덤으로 따라온다. 현재 시민햇빛발전소는 7호기까지 전주시 유휴부지에 건립된 상태이며 8호기는 오는 4월 완성된다. 지난달 30일 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 사무실에서 만난 박은재 사무국장은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의 경우 2020년 기준으로 80% 이상이 에너지를 생산하고 이용하는 데서 발생한다”며 “에너지 전환이 되지 않고서는 탄소중립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에너지원을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에너지원으로 전환하는 ‘에너지전환’이 시급하다고 했다. 개개인의 생활 습관 변화만으로는 1.5도 지구 온도 상승을 막아내기에 충분하지 않기에 태양광 등의 재생에너지 확대가 구조적‧제도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의 목적은 온실가스 감축만은 아니다. 습관과 인식을 바꾸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재생 할 수 있는 에너지 전환에 관심을 갖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협동조합 창립의 핵심일지 모른다. 박 사무국장은 “조합에서는 햇빛발전소도 짓지만 에너지전환박람회 포럼과 같은 각종 행사와 조합원 교육 등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며 “탄소중립의 필요성과 에너지전환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를 키워야 재생에너지 확대에 가속도가 붙을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인식이 바뀌면 결국 사회 전반에 탄소중립이라는 가치가 녹아들 것이라는 의미이다. 효과는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전주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이 창립됐던 2018년 조합원수는 113명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374명으로 늘어난 상태다. 그는 “지금까지는 에너지산업을 정부와 공기업, 대기업에서 독점했다”며 “이제는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를 우리가 만들어서 가까운 곳에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탄소중립 문화를 형성해 나갈 수 있도록 조합에서도 계속해서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 기획
  • 박은
  • 2025.04.03 16:05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9) 선봉진서목과 상순무사서, 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

양호도순무영은 동학농민군 진압하기 위한 총지휘관으로 선봉장 이규태(李圭泰, 1841~1895)를 임명했다. 홍경래난 때의 양서순무영과 병인양요 당시의 기보순무영은 순무사 다음 직위인 중군(中軍)이 선봉장을 겸하거나 출전 장졸 전체를 이끄는 총지휘관이었다. 그러나 갑오년의 양호도순무영은 중군이 출진하지 않아서 선봉장이 경군 병영과 지방병영 그리고 지방관아의 진압 병력 전체를 통제하는 총지휘관이 되었다. 따라서 선봉장 이규태가 순무영과 군무아문 등에 각종 보고를 올렸고, 휘하 병영의 전투보고서가 선봉진에 전해졌다. 또한 각급 관아와 주고받은 공문 등 선봉 이규태와 관련한 문서가 매우 많이 작성되었다. 순무사에게 보낸 편지와 우금치전투를 전해주는 〈공산초비기(公山剿匪記)〉 등 직접 쓴 기록도 적지 않다. 진중일기인 선봉진일기는 시간순으로 여러 사건을 기록해서 진압군의 대책과 동학농민군의 동향을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문서들은 장신(將臣)인 순무사 신정희(申正熙, 1833~1895)에게 모아졌고, 순무사 신정희의 후손이 고려대학교에 기증해서 현재 그 대부분의 문서를 고려대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선봉진서목(先鋒陣書目) 서목(書目)은 상관에게 올리는 첩정 등의 원본에 핵심 요점만 따로 적어서 첨가하는 문서를 말한다. 선봉 이규태는 상세한 사정을 설명한 수많은 보고문서를 올리면서 그 요점을 간략히 적은 선봉진서목을 첨부하였다. 출전 병영의 행군과 숙영 그리고 군량 조달 등 시시각각 달라지던 출전 병영의 실정이 이 서목으로 확인된다. 선봉진서목의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몇 가지 다른 형태도 있다. 선봉 이규태가 휘하 병영에서 보고한 첩정을 그대로 베껴 순무사에게 올리면서 선봉이 서명한 서목이 있다. 장위영 부영관 겸 죽산부사 이두황의 첩정이나 안성군수 홍운섭의 첩정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휘하 병영의 지휘관이 직접 순무사에게 올린 서목도 있다. 갑오년 11월 1일자 순무영 별군관 최일환의 서목이거나 11월 3일자 출진 장위영 부영관 겸 죽산진토포사 이두황의 서목이 그것이다. 또 충청도 온양군수 서목도 있다. 온양군수의 서목에는 경내에서 활동한 동학농민군의 재산을 빼앗아서 공을 세운 교리(校吏)에게 상으로 준 내용도 나온다. 당시 각종 보고문서는 적지 않았다.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에 포함된 문서를 보면 그 수와 양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서목의 수는 적은 편이다. 현존하는 서목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선봉진상순무사서 부잡기(先鋒陣上巡撫使書(附雜記) 선봉진상순무사서는 1894년 10월 22일에서 1895년 3월 5일까지 선봉 이규태가 순무사 신정희에게 올린 편지이다. 편지는 모두 11편이고, 첨부한 잡기는 31편이다. 이 편지는 출전 장졸의 현지 지휘관으로서 이규태가 순무사에게 전한 갖가지 내밀한 사정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공무를 맡고 있는 무관이 공문서가 아니라 사신으로 실정을 전하는 것은 당시 관례처럼 보인다. 충청감사 박제순도 총리대신 김홍집과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충청도 동학농민군의 진압과 관련한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것을 모은 자료가 금영내찰(錦營來札)이다. 이규태의 편지는 처음부터 절박한 심정을 담거나 어려운 내용을 전하는 것이 많다. 일본군과 관련한 것이 가장 심각한 내용이었다. 출전 초기부터 일본군 장교의 지휘를 받으라는 지시는 선봉장으로서 황당하게 여겼던 것 같다. 더구나 일본군과 동행해야 해서 천안에 도착해서 3일이나 머물렀다고 한다. 충청도 내포 일대의 상황이 심각해서 경군 병력을 보내려고 했으나 독자적으로 보내지 못했다. 순무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는 심각한 상황은 탄환 부족 사태였다. 일본군은 6월 21일 새벽 경복궁을 점령할 때 경군 병영을 기습해서 무기와 탄약을 몰수해서 일본군이 주둔한 용산 막영으로 보냈다. 이 무기의 일부는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경군이 파견될 때 돌려받았지만 문제는 탄환이었다. 일본군이 준 탄환은 부족했고, 성환에서 패배한 청국군에게 몰수한 탄환을 받았지만 보유한 총의 구경과 달라서 쏘아도 명중률이 떨어졌다. 편지모음에 덧붙인 잡기(雜記)는 여러 실상을 전해준다. “탄환은 일본군의 진중에서 1만개를 가져왔는데, 겨우 경리청의 병정이 가진 총에는 쓸 수가 있었으나 사거리가 200보에 지나지 않아 단지 포 소리만 낼 뿐입니다. 또한 20개를 나누어 주는 데에 불과하여 그 사이에 내포에서 쓴 것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통위영의 진중에는 몇 십개가 남아 있었으나 천안에서 가져온 탄환은 애초에 모양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의견을 내어 모양을 바꾼 것이 거의 수 만개나 되었습니다. 이처럼 긴요하게 쓸 것이 이와 같이 구차한데다가 넉넉하지 않아 걱정스럽고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새 탄환을 보내달라고 거듭 요청하고 있다. 12월 1일 순무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전봉준 장군을 추적하는 상황을 전하고 있다. 피신하는 전봉준 장군을 30리 정도로 뒤쫓고 있고, 11월 29일에는 입암산성에서 머물고 아침밥을 먹은 뒤에 바로 떠났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공식 문서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들이다. 선봉장 이규태는 우금치전투를 함께 치룬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의 제2중대장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 대위와 극히 사이가 나빴다. 중대장급 대위가 경군 총지휘관인 선봉장 이규태를 아랫사람처럼 다루는 것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리오 대위는 온갖 트집을 잡고 선봉장 이규태를 견제하였다. 전라도로 남하한 후 만난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 소좌는 모리오 대위의 보고를 듣고 선봉장 이규태를 매도했는데 그 도가 지나쳤다. 순무사에게 올린 편지 귀절은 참담한 것이었다. “ 어제 이 읍에 들어온 뒤에 비로소 일본군 대대장을 만났는데 책망을 당하는 것이 노예보다 심했습니다. 살아서 명(命)을 더럽혔고 죽어서도 이름이 없겠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先鋒陣各邑了發關及甘結) 이 자료는 선봉장 이규태가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예하 각 병영과 각 군현 또는 면리 단위에 보낸 각종 공문을 묶은 것이다. 상급관청의 공문인 관문(關文)과 아래관청에 보낸 감결(甘結), 그리고 선봉장의 전령과 방시문(榜示文) 등을 수록했다. 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당시 경군이 지방에 파견될 때 어떤 방식으로 행군했는지 보여주는 내용이 처음에 나온다 과천과 수원에 보낸 관문에 “본읍의 포군(砲軍)과 토병(土兵) 중에서 50명 한도로 각각 그 지경에서 미리 준비하고 기다렸다가 차례차례 향도”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경기도 광주, 용인, 죽산, 안산, 안성, 남양, 양성, 진위와 충청도와 전라도 각 군현에 보낸 관문에는 거괴를 잡아서 바치고, 스스로 안정시킬 수 없으면 선봉진에 알려서 토벌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행군하는 군현의 동학농민군을 제압하면서 그 사실을 충청도와 전라도 전역에 알리도록 했다. 이 자료에는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알려지지 않은 동학농민군 이름이 나오고 있다. 이를테면 천안 방축동(현 아산 온양)의 김치현(金致鉉), 장인보(張仁甫), 김영석(金永石), 이원장(李元章)이다. 특히 직산과 평택 및 성환역에 보낸 감결을 보면 동학농민군의 재산 몰수가 처음부터 행해진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번에 본 지방에서 붙잡혔거나 붙잡히지 않은 자는 죄가 사면을 받지 못할 죄목에 해당하므로, 당해 마을에 안접할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이 가진 집안 살림살이와 땅을 법전에 의해 적몰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여러 물자의 강제 징수와 인마의 동원, 그리고 뒤로 갈수록 동학농민군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지시 등이 거듭 나오고 있다. 갑오년의 구체적인 실상이 선봉장 이규태와 관련한 자료에 풍부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 기획
  • 기고
  • 2025.04.02 16:24

“흩날리는 꽃바람, 설레는 '봄 소풍'”...고창 석정 벚꽃축제 4일 개막

사계절 아름다운 자연이 돋보이는 고창군에서 봄을 알리는 대표 축제, ‘제3회 고창석정 벚꽃축제’가 열린다. 벚꽃이 절정을 이루는 4일부터 6일까지 사흘간 석정온천지구에서 다채로운 행사와 함께 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야간 벚꽃놀이, 환상의 세계로 초대 올해 축제의 가장 큰 매력은 야간 벚꽃길이다. 1km에 걸쳐 수령 20년 이상의 벚나무들이 터널을 이루며, 야간 조명이 더해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특히 올해는 조명 구간이 확대되고, 하트·천사의 날개 등 포토존 조명이 추가 설치돼 더욱 화려한 야경을 선사한다. 벚꽃길 곳곳에는 별빛처럼 반짝이는 트리 조명과 바닥경관 조명이 설치돼 걷기만 해도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4일 저녁에는 청사초롱을 들고 벚꽃길을 걷는 이색 체험도 마련돼 색다른 감성을 더할 예정이다. △흥미진진한 축제 프로그램, 남녀노소 즐길 거리 풍성 축제 첫날(4월 4일)에는 어린이 서커스, 버블쇼, 솜사탕 아트쇼가 펼쳐지며, 지역 주민들과 방문객들이 이색 복장을 착용하고 벚꽃길을 거니는 퍼레이드가 열린다. 저녁에는 김현, 윤수, 정해준, 김다현 등 인기 가수들이 전야제를 빛낼 예정이다. 둘째 날(4월 5일)에는 어린이를 위한 ‘브래드 이발소’ 싱어송 콘서트와 읍·면 단합 게임대회가 열리며, 저녁에는 케이시와 케이윌이 출연하는 초청 공연이 축제의 열기를 더한다. 마지막 날(4월 6일)에는 지역 농특산물을 활용한 요리 체험 프로그램 ‘고창벚꽃 200인의 요리사! 고창에 꼬치다’가 열려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축제의 대미는 군민들이 참여하는 노래·춤·악기 연주 공연으로 화려하게 장식된다. 이외에도 벚꽃을 배경으로 한 ‘봄봄봄 데이클래스’(한지꽃 만들기, 캘리그라피, 자개핀 만들기)와 사진 콘테스트, 플리마켓, 벚꽃 푸드존 등 다양한 상설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방문객 편의 극대화…셔틀버스 운행 고창군은 원활한 축제 운영을 위해 교통 대책을 마련했다. 터미널과 축제장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30분 간격으로 운행해 방문객의 편의를 도모한다. 또한, 벚꽃길 보호를 위한 ‘쓰레기 없는 축제’ 캠페인을 진행하고, 안전한 야간 축제를 위해 경찰 및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다. 방문객들이 머물다가 갈 수 있는 호텔이 4월부터 석정에 오픈하여 스쳐가는 고창이 아니라 머물고 가는 고창이 완성됐다. △고창의 대표 벚꽃 명소, 어디가 좋을까? 고창에서 벚꽃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고창읍성’과 ‘고창 꽃동산’을 추천한다. 고창읍성은 1453년 단종 원년에 전라도 19개 군현이 모여 쌓은 성곽으로, 봄이면 성벽을 따라 만개한 벚꽃이 절경을 이룬다. 성곽 위를 걸으며 벚꽃비를 맞는 경험은 고창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감성이다. 고창 꽃동산(배수지) 산자락을 따라 만개한 산벚꽃과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읍성 풍경이 장관을 이루며, 사진 명소로도 유명하다. △고창에서 만나는 최고의 봄날 심덕섭 고창군수는 “올해 벚꽃축제는 지난해보다 더욱 풍성하고 품격 있는 행사로 준비했다”며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고창을 찾아 벚꽃비를 맞으며 사랑과 행복을 가득 담아가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번 봄, 설렘과 낭만이 가득한 ‘고창석정 벚꽃축제’에서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보자.

  • 기획
  • 박현표
  • 2025.04.02 15:34

[팔도건축기행- 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진주 국립진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은 대한민국 현대건축의 선구자 김수근 건축가의 건축 철학이 스며든 공간이다. 임진왜란의 역사와 진주의 문화가 겹겹이 담긴 진주성 안.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이 박물관은 조용히 숨어 있는 듯하지만, 한 발씩 다가갈수록 그 독창적인 건축미와 공간의 깊이가 서서히 드러난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남강이 감싸 안은 이곳은 과거와 현재, 건축과 역사가 만나는 특별한 장소다. △스며들 듯 세워진 건축, 과거와 현재를 품은 공간 국립진주박물관은 1984년 개관 당시 국내 일곱 번째 국립박물관으로, 경남도 최초의 국립박물관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이 박물관의 가장 큰 특징은 ‘진주성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건축’이라는 데 있다. 김수근은 설계 초기부터 진주성의 전통성과 지형적 특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 건축의 기능을 담아낼 방법을 고민했다. 진주성 내 70평 규모의 촉석루를 압도하지 않으면서도, 1700평이라는 규모의 박물관 기능을 충분히 담아내는 일이었다. 실제로 박물관은 낮은 구릉 지대에 자연스럽게 파묻히듯 설계돼 있어, 방문객은 건물에 가까이 다가설 때까지 그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지점을 지나면,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고요히 모습을 드러낸다. 건물 외부는 대지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개의 단으로 구성하고, 진입부 전면에는 넓은 광장을 조성해 폐쇄적인 내부 기능을 보조하고 있다. 건물의 외관은 한옥 지붕의 실루엣을 연상시키는 중첩된 지붕선으로 구성돼 있다. 다양한 형태의 지붕이 합쳐져서 장관을 이루는 우리의 전통마을 이미지를 재현하고자 한 것이다. 외벽은 진주산 청회색 돌을 사용해 진주성 내 다른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건물은 단일 구조지만 중심 공간을 두고 전시실, 사무실, 직원 식당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내부로 들어서면 공간 구성의 치밀함이 더욱 돋보인다. 국립진주박물관은 단일 건물로 설계됐기 때문에 커다란 중심 공간이 설정된다. 이것은 2개 층이 개방된 형식으로, 이를 통해 전체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계되도록 했다. 전시 공간에는 경사형 램프가 설치되어 1층에서 2층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관람자는 위로 올라가 유물을 감상하고 다시 다른 램프를 따라 내려오며 전시를 이어갈 수 있다. 이 回자형 동선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관람자에게 공간을 경험하게 만드는 건축이다. 빛의 사용도 눈에 띈다. 박물관은 일반적으로 유물 보존을 위해 인공 조명을 설치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곳은 중정 부분을 자연광으로 처리하고, 지붕과 지붕이 만나는 애매한 경계에 천창을 설치함으로써 자연광을 내부로 끌어들였다. 김수근이 1980년에 그린 내부공간을 위한 단면 스케치들을 살펴보면, 내부계단에 의한 레벨차가 불러 일으키는 공간적인 느낌과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의 관계가 중점적으로 탐구됐음을 알 수 있다. 박물관 한편에 마련돼 있는 휴게실도 공간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마루에 앉아 배롱나무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정원과 청회색의 돌담을 바라보며휴식을 취하는 것도 박물관 공간을 즐기는 또하나의 묘미다. 이처럼 공간 그 자체가 하나의 건축적 메시지를 품고 있는 국립진주박물관은 전시 콘텐츠 또한 그 맥락에 맞게 구성돼 있다. △임진왜란 역사, 도내 문화유산 조명 국립진주박물관은 개관 당시에는 경남을 중심으로 성장·발전했던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대표 박물관으로 출발했다. 그러다 1998년 ‘가야문화 연구’ 기능은 국립김해박물관으로 옮겨지면서 국립진주박물관은 경남 서부지역의 역사 문화와 임진왜란을 전시 중심 주제로 하는 ‘임진왜란 특성화 박물관’으로 거듭났다.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 관련 문화재를 모아 전시하고 각종 연구 사업을 통해 국제 전쟁으로서 임진왜란의 다양한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임진왜란실은 1592년 일본군의 대규모 침입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전쟁의 발발 △일본군의 전략 △조선의 대응(의병과 수군의 활약) △명군의 참전 △정유재란과 종전 등의 주제로 전쟁의 큰 흐름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제1·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졌던 진주성의 역사도 살펴볼 수 있다. 역사문화홀은 경남지역 문화유산의 아름다움과 다채로움을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유산과 역사 도서, 휴식 공간이 어우러진 복합 전시 공간으로, 박물관 본연의 기능을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체감하게 한다. 두암실에서는 두암 김용두 선생이 일본에서 수집해 기증한 문화유산들을 만날 수 있다. 도자기와 서화, 공예품 등 총 190점의 기증품 가운데는 보물로 지정된 ‘소상팔경도’(보물 제1864호), ‘정조어필’(보물 제1632-1호) 등도 포함돼 있다. 야외전시장에는 통일신라 양식의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국보 제105호)이 전시돼 있다. 상층 기단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여덟 신장이, 1층 탑신에는 네 명의 보살이 새겨져 있다. 한 석탑에 신장과 보살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9세기 통일신라 석탑 양식의 특징으로, 불교미술의 높은 수준과 뛰어난 조각 기술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3D 입체영상관, 승자총통 체험실, 어린이 체험 전시실 등 다양한 교육 및 참여형 콘텐츠가 마련돼 있다. 한편 국립진주박물관은 개관 40년 만인 지난해 누적 관람객 1200만명을 돌파했다. 진주성 유료 입장이라는 입지적 제약을 감안하면 의미 있는 수치다. 현재 박물관은 옛 진주역 철도부지로의 이전이 추진 중이며, 새 박물관은 2028년 말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립진주박물관 관계자에 따르면 현 박물관 건물의 향후 활용 방안은 아직 정해진 바 없으며, 현재 타당성 용역이 진행 중이다. 진주는 오래전부터 문화도시로 불려왔다. 그 중심에 선 진주성은 역사의 상흔을 간직하면서도, 지금은 시민들에게 휴식과 사색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이 같은 장소에 들어서면서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를 잇는 건축의 좋은 사례로 남았다. 성벽 안에 담긴 박물관은 이제 단순한 전시관이 아닌, 도시의 풍경이자 문화의 연장선으로 자리하고 있다. 돌담 너머로 스며드는 햇살처럼, 조용하지만 깊게, 그렇게 김수근의 건축은 진주성 안에서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경남신문=한유진 기자

  • 기획
  • 전북일보
  • 2025.03.31 16:52

“내 인생 최고의 날”…화정마을 할매 작가들 전시회 성황

유독 햇살이 따스한 봄날. 화정마을 어르신들이 아침부터 분주합니다. 오늘(26일)은 작가로 데뷔한 화정마을 할머니들의 작품을 보러 가는 날. 집마다 들뜬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 퍼집니다. “양산 가지고 가야할랑가? 뭘 입고 가믄 좋을라나?” 청년 이장 아지트 바로 옆집에 사는 오율례(74) 어르신은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생각보다 따뜻한 날씨에 양산을 쓸지, 모자를 쓸지 고민입니다. ‘내가 그린 그림’이 전시회장에 걸렸다는 사실은 어르신들을 자꾸만 들뜨게 합니다. 전시회장으로 출발하는 시간은 오후 2시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이른 오후 1시 30분, 오늘 나들이를 함께 할 동네 어르신 20여 명이 모두 마을회관에 모였습니다. 화정마을에 온 지 벌써 두 달이 되어가지만, 시간에 딱 맞춰 모인 것은 처음(?)입니다. 귀가 어둡고 자주 깜빡하는 어르신들은 곧잘 약속 시간을 착각하곤 하거든요. 하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모두 제시간보다 일찍 모여 전시회가 열리는 하얀 양옥집으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하얀 양옥집에 도착한 어르신들은 저마다 본인 그림을 찾아 나섭니다. 그릴 땐 여유가 없어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던 다른 사람들 그림도 이제야 천천히 들여다봅니다. 그림을 그릴 때만 해도 “쑥쓰러워서 어쭈고 걸어논디야”라며 부끄러워했지만, 전시 그림을 막상 보고 나니 “모아 놓고 보니 예쁘다”며 활짝 핀 미소를 감추지 못합니다. 전시 소식을 듣고 어르신들의 자녀들도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우리 엄마 그림이네?” 신기한 듯 ‘엄마’가 그린 그림을 한참 바라보더니 옆에 서서 사진도 찍습니다. 하얀 양옥집은 화정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작은 음악회도 준비했습니다. 버스킹그룹 쟈니컴퍼니와 김정일 밴드가 무대에 섰습니다. ‘벛꽃엔딩’,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등 전시 주제인 ‘꽃’과 어울리는 노래가 따뜻한 봄바람을 타고 전시회장을 가득 채웁니다. 음악회를 마치고 다시 마을로 돌아가는 길. 최은주(77) 어르신은 “오늘 너무 좋았다”며 미소를 감추지 않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최장금(78) 어르신과 전시회에 대해 들뜬 목소리로 담소를 나누네요. 사실 화정마을에서 처음 그림을 배울 때 어르신들은 모두 “내가 어떻게 하냐”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하얀 도화지 위에 선 하나 긋는 것이 두려워 도움을 요청했지요. 하지만 그렇게 정성 들여 그린 그림이 전시되는 경험을 겪으며 이제는 도전을 한결 가볍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먹고살기 바빴던 시대를 살아내느라 그림, 시 등 문화생활은 그저 ‘남의 일’이었던 어르신들. 이번 전시회를 통해 화정마을 어르신들은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화정마을 어르신들의 도전을 담은 ‘가지각색, 꽃’ 전시회는 오는 4월 27일까지 하얀 양옥집에서 진행됩니다.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 기획
  • 문채연
  • 2025.03.31 16:41

수십년전 '산불 악몽'이 다시⋯시골마을은 두려움에 떤다

건조한 봄, 전국에 번진 대형 산불 소식에 화정마을 어르신들의 마음도 타들어 갑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따스한 햇살 아래 평화로웠지만 어느새 분위기는 조용히 가라앉았습니다. 혹여나 불이 날까 마당에 나와 마른 가지 줍기에 바쁩니다. "사람들이 그만 다쳐야 하는디, 큰일이네. 옛날에는 '여시불'이라고 혔어. 그 불이 진짜 무섭지, 무서와. 이렇게 큰 불이 나니까 무서와." 오율례(74) 어르신은 봄철 산불을 '여시불'이라고 부른다며 가장 무서운 불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르신이 이야기한 여시불은 옛 어른들이 원인도 모르게 갑자기 번지는 불을 여우에 홀린 것처럼 감쪽같다는 의미를 담아 부르던 말입니다. 논과 밭으로 둘러싸인 화정마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불이 가장 큰 재난입니다. 농사가 일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이 마을에 불이 나면 삶도 무너집니다. 화정마을 주민들은 매년 마을 초입과 끝에 화재막이를 두고 당산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불이 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죠. 그래도 여시불 같은 봄철 산불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수십 년 전 화정마을에도 산불이 났습니다. 전국 곳곳 동시다발적 산불이 더욱더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이칠월(87) 어르신은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저그 뒷산에 불이 났었어. 순식간에 바람이 확 불어 재끼니께 화기가 순식간에 덮쳐서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당게. 그때는 젊으니께 도망이라도 쳤지, 지금이었으면⋯." 불은 산 아래에 있는 집 한 채를 삼키고 나서야 멈췄습니다. 다행히 마을 옆에 있던 수로 덕분에 더 번지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은 너무 무서워 집 담벼락을 부수면서까지 소방도로를 만들었습니다. 화정마을 길은 오솔길 하나뿐이었거든요. 소방도로까지 만들었지만 무서운 것은 여전합니다. 마을에 불이 번졌을 때 대처할 방법이 없는 게 현실입니다. 거동이 불편해 빠르게 대피할 수도, 귀가 멀어 불났다는 소식을 듣는 것도 어려운 거죠. "인쟈 불나믄 어쭈겄어. 어디 가도 못 혀. 걸어갈 수가 없당게. 천천히 걷는 것도 힘든디 어떻게 뛰겄어. 걸어가다가 잘못될 수밖에 없지." 보행기가 없으면 걷기 힘든 이장순(90) 어르신의 말입니다. 어르신들은 "어차피 도망가지 못하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에 비교적 젊은 60∼70대 주민들이 어르신들께 대피 요령을 알려 드리기도 합니다. 재난안전문자와 마을 방송도 때마다 울려 퍼집니다. 문제는 스마트폰을 다루지 못해 문자를 확인하기도, 귀가 어두워 방송 내용도 듣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서 대형 산불 소식이 이어지는 것을 들은 어르신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남 일 같지 않고 언제 어디서 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죠. 마을 분위기는 여전히 소란스럽습니다. 매일 모여 수다를 떨던 어르신들이지만 지금은 불안감이 커지면서 허공만 보거나 산불 이야기뿐입니다.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 기획
  • 문채연
  • 2025.03.30 08:18

[우리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 후백제의 도성과 궁궐터

우리고장의 역사는 우리의 뿌리이자 자존심이다. 이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을 찾는 일은 우리의 뿌리를 찾는 일이다. 전북일보에서는 그 일환으로 〈우리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을 월1회 연재한다. 남북화해 무드가 무르익던 문재인 정부시절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는 궁예의 궁궐터를 남북이 공동조사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남북공동조사는 실현되지 못했다. 비무장지대 안 궁예의 궁궐터는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905년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송악에서 철원의 풍천원으로 도성을 옮기면서 조성했다. 1530년에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풍천원은 궁예의 도읍지로 철원도호부의 북쪽 27리에 있다. 외성의 둘레는 1만 4421척이고, 내성의 둘레는 1905척으로 모두 흙으로 쌓았다. 지금은 절반이 퇴락하였다. 궁전의 옛터가 뚜렷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풍천원의 석등 2기가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당시의 모습을 유리건판 사진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석등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사라졌지만 비무장지대 안에는 아직도 궁예의 궁궐터가 옛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다. △후백제 궁성에 대한 기록 전주는 900년부터 936년까지 후백제의 수도였다. 그렇다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후백제의 궁궐터에 대해서는 어떻게 기록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전주부 고적 조에는 후백제 궁궐에 대한 서술 자체가 없다. 다만 고토성(古土城)에 대해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터가 남아 있는데 견훤이 쌓은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고려 신종 2년(1199년)에 전주목의 사록 겸 장서기로 왔던 이규보의 〈남행월일기〉에도 “전주는 완산이라고도 일컫는데 옛날 백제국이다”는 언급만 있을 뿐 견훤궁성에 대한 기록은 없다. 1822년(순조 22) 호남을 여행하면서 〈남유록〉이라는 기행문을 남긴 담헌 이하곤은 “전주는 견훤이 웅거하던 옛 도읍지이다. 속언에 전해오기를 견훤이 서산 봉우리에 별궁을 짓고 남쪽 높은 봉우리에 철교를 가설하여 옛 궁터를 왕래했다고 한다.”고 하여 견훤에 대한 전설만을 적어놓았다. 이처럼 지리지나 명사들의 전주방문기에서 견훤궁성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 까닭은 견훤궁성에 대한 흔적 자체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백제의 흔적을 지운 안남도호부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전주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했다. 도호부는 본래 당나라 초기에 광대한 속지(屬地)의 지배를 위하여 설치했던 기관이다. 이 기관은 군사행정조직으로 정복지나 속지의 반발을 무력으로 제압해서 체제에 순응하도록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후백제왕 신검이 고려에 항복해 후백제가 멸망했지만 왕건은 후백제 세력이 다시 일어서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전주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해 후백제 부흥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후백제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때 궁성 안의 모든 건물을 불태우고, 흔적마저 철저하게 파괴했다. 이렇게 전주에서 후백제가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온갖 위력을 행사하다가 951년(광종 2)이 되어서야 안남도호부를 고부로 옮겼다. 고부는 백제의 중방성이 있던 곳으로 후백제 시대에도 오월과의 중요한 교역 거점이었다. 그 후 안남도호부를 995년(성종 14)에 영암으로 다시 옮겼다가 1019년에 폐지했다. 이를 통해 후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고려가 후백제의 부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다. △후백제 도성의 흔적 이처럼 왕건은 전주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해서 후백제의 궁성을 철저히 파괴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도성의 흔적까지는 지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1925년 3월 육당 최남선이 전주를 방문할 때 보았던 후백제 옛 성터에 대한 묘사가 〈심춘순례〉에 적혀있다. 반대산 밑에 높다란 판자로 담장을 두르고 지붕에 창을 낸 집채가 줄줄이 보이는 것은 물을 것도 없이 감옥인데, 그 곁에서부터 철로 쪽으로 논두렁처럼 울묵줄묵하게 약간 일자로 남아있는 것이 후백제의 성터라 한다. 대개 마한 이래의 옛터를 그대로 사용해 내려온 듯하여, 거의 없어지고 겨우 남은 몇 줌 흙이 몹시 남의 마음을 잡아당긴다. 논두렁처럼 멀리 숲정이로 이어지는 후백제 토성-1916년 유리건판 사진.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최남선이 1925년에 경편열차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후백제 옛 성의 흔적은 고토성에 있었던 옛 전주형무소에서 숲정이로 이어지는 토성이었다. 이 토성의 흔적을 1916년에 전주 외곽을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에서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최남선이 보았던 바로 그 후백제 토성이다, 숲정이에는 1928년에 가타쿠라(片倉)방적회사 전주제사소(현 진북동 동국아파트 자리)가 들어섰다. 당시 제사소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엽서에 옛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로 앞으로 허물어진 토성이 자리해 있는데 높이가 족히 2미터는 되어 보인다. 후백제가 멸망한 지 천년이 흘렀는데도 이 정도 높이의 토성이 남아있다면 본래는 훨씬 높고 견고했을 것이다. 이 토성은 숲정이에서 전주동초등학교 뒤에 있는 옛 여단(厲壇)을 통과해 산등성이를 따라 기린봉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1941년에 발간된 〈전주부사〉에 수록되어 있는 〈전주부경역연혁도〉를 보면 인봉리를 중심으로 옛 성벽을 2중, 3중으로 만들어 방어망을 구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추정해 보면 후백제의 궁성은 옛 인봉리, 현 문화촌이나 전주제일고등학교 부근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후백제의 궁궐터 〈전주부사〉에서는 전주고등학교 뒤쪽 물왕멀 일대를 후백제의 궁궐터로 추정했다. 왕성의 주초석으로 쓰였을 법한 커다란 들들과 수많은 작은 돌들이 그곳에 산재해 있고, 풍수지리상 사신상응형으로 궁성을 둘만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하지만 물왕멀 마을을 재개발하면서 지층을 파보니 그곳에 왕궁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유구를 찾을 수 없었다. 현재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중노송동 기자촌 재개발구역에서는 발굴조사 결과 유의미한 유구가 발견되었다. 이곳은 인봉리 외곽으로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곳이다. 문화촌으로 연결되는 하부 구역에서 폭 4미터 길이 40미터쯤 되는 도로의 유구가 발굴되었다. 언덕 상층부에서는 후원유적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유구가 발견되었다. 이곳에는 건물이 불타면서 쏟아진 불 먹은 통일신라 후기의 기와들이 층을 이뤄 쌓여 있었다. 종광대 재개발구역의 발굴조사에서도 후백제의 토성유구 130여 미터가 발굴되어 현지보존 결정이 내려졌다. 종광대는 전주동초등학교 뒷산에 있었던 여단 일대를 아우르는 곳으로 〈전주부경역연혁도〉에서 후백제의 도성으로 추정했던 옛 성벽지가 지나는 곳이다. 오는 2030년까지 낙수정 일원에 후백제역사문화센터가 건립된다. 국비 450억 원이 투입되는 국책사업이다. 후백제역사문화센터에서는 후백제의 역사와 흔적을 조사해 그 성과를 시민들과 공유하게 된다. 이 사업과 더불어 전주시에서는 국가유산청으로부터 후백제의 고도로 지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도 지정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후백제의 도성임을 입증할 수 있는 유적이다. 전주시민이라면 혹시 내가 살고 있는 집이 후백제의 유적이나 궁성을 깔고 있지는 않는지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왕건이 아무리 후백제의 역사를 지우려 했어도 그 흔적은 나오기 마련이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손상국 프리랜서 PD는 JTV에서 우리고장의 역사문화 프로그램인 '전북의 발견'을 기획해 5년간 방송했다. 저서로 〈최치윈을 추억하다〉 〈전라감영 이야기〉 〈사진으로 보는 전라감영 복원기록〉이 있고, 현재 〈전북문화살롱〉에 '문화유산의 안과 밖'을 연재하고 있다.

  • 기획
  • 기고
  • 2025.03.27 19:36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8) 관감치부책(關甘置簿冊)·관지책(官旨冊)·진안현각양상납월당전목수효납미납성책(鎭安縣各樣上納月當錢木數爻納未納成冊)

△관감치부책(關甘置簿冊) 관감치부책(關甘置簿冊)은 1894년 1월부터 6월까지 작성한 세금에 관한 장부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30×19cm이며 전체 34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부 산하 각 관청의 비용 징수와 지출 관련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1월 8일 전세(田稅)와 전운영(轉運營)의 세금 납부 관련 내용으로 시작한다. 징수 대상처별로 기술되어 있으며 전운영 징세 관련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다. 전라도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관군의 농민군 체포 및 침학에 대한 단속 내용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관감치부책 1894년 1월. /고려대 도서관 제공 동학농민군에 대한 첫 기사는 1894년 4월 2일 등장한다. 호서(湖西), 호남(湖南), 영남(嶺南) 등지(等地)에서 협잡(挾雜)한 무리들이 작당(作黨)하여 기뇨(起鬧)한 수창(首倡)은 체포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3월 20일 전라도 무장기포 이후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두고 호서, 영남 지역까지 아우르는 전국적인 항쟁으로 이미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같은 날 기사에서 부랑무뢰배(浮浪無賴輩) 천백(千百)이 군집을 이루어 농사를 그만둔 후 지경을 벗어나면 즉시 각 면의 유사(有司), 훈장(訓長)을 초치하여 효유(曉諭)할 것을 당부하는 주문도 있었다. 4월 11일에는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러 간 초토사(招討使)가 동도배(東徒輩), 즉 동학농민군을 체포한 수교(首校), 수형리(首刑吏)의 명단을 보고할 것을 명하였다. 4월 17일에도 각 면에서 민심을 선동하는 자를 체포하여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때 패류배(悖類輩)를 동학당(東學黨)이라 칭하고 체포한 무리들은 결박하여 압송하라는 지시도 떨어졌다. 한편으로는 동도(東徒)가 취당(聚黨)하여 기뇨(起鬧)한 것 외에는 모두 평민(平民)이니 병정(兵丁), 보상(褓商), 관속(官屬)은 물론 이유 없이 체포한 자들도 보고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4월 26일에는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정황이 알려졌다. 이날 초토사 전령(傳令)에 40~50명 혹은 60~70명이 무장(茂長) 굴치(屈峙)로부터 각자 부안(扶安), 흥덕(興德), 고부(古阜), 정읍(井邑) 등지로 나아간 정황이 포착되었다. 5월 6일에 이르러서는 귀화(歸化)한 백성은 구휼을 더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이미 동학농민군 중 귀화, 즉 투항한 이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완산 전투로 인하여 전주성도 큰 피해를 입었던 시점이었는데, 전주성 안에 있던 조경묘(肇慶廟), 경기전(慶基殿)의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을 위봉진(威鳳鎭), 즉 위봉산성에 옮기라는 명이 떨어지기도 하였다. 전주화약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관감치부책(關甘置簿冊)은 1894년 3~5월 간 동학농민군의 제1차 봉기 및 완산 전투의 정황을 알 수 있게 하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관지책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관지책(官旨冊) 관지책(官旨冊)은 전라도 임실현에서 1894년 10월경부터 1895년 1월까지 각종 업무 처리 상황을 순영과 병영 등 상급관청에 보고한 내용을 정리한 자료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서장되어 있다. 크기는 19×30cm이며 전체 26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서의 첫 시작일은 26일로 되어 있어 몇 월인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그 다음이 11월 10일과 을미 정월 초6일 순서로 작성되어 있다. 문서 내용은 세금 관련 내용, 현감 부임건, 도망죄인건, 경내에 아이를 유기한 일이 없다는 보고, 소·술·소나무 3금(禁) 조치 이행건, 혼기 넘겨 결혼 못한 남녀가 없다는 보고, 사학(邪學) 금단 조치건, 동학농민군에게서 무기를 회수한 일 등을 순영에 보고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임실현 향약장정이 수록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군현의 행정업무와 동학농민군 대응책 등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은 을미(乙未) 정월 초6일, 즉 1895년 1월 6일 이전의 기록으로 추정되는데, 임실현 경내에서 동도(東徒), 즉 동학농민군으로부터 몰수한 군기(軍器) 중 조총(鳥銃)이 20자루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1895년 1월 6일 기사에는 죄인(罪人)들, 즉 동학농민군을 체포한 교졸(校卒)의 성명(姓名) 성책(成冊)을 수정하여 올렸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한편으로는 지난달, 즉 1894년 12월 내린 사학금단(邪學禁斷)의 조치가 강조되기도 하였다. 1월 7일 기사에는 비도(匪徒), 즉 동학농민군으로부터 몰수한 군기(軍器)의 성책(成冊)을 만들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마지막으로 임실현 향약(鄕約) 장정(章程)이 수록되어 있는데 도약장(都約長), 부약장(副約長)부터 각 면의 약정(約正)에 이르기까지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임실현이 동학농민군의 활동 직후 지역 사회를 어떻게 종래의 방식으로 재편성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진안현각양상납월당전목수효납미납성책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진안현각양상납월당전목수효납미납성책(鎭安縣各樣上納月當錢木數爻納未納成冊) 1894년과 1895년 전라도 진안현에서 작성한 것으로 상급기관에 납부해야 할 세액을 납부액과 미납액으로 정리한 자료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0×30cm이며 전체 17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갑오년(甲午年), 즉 1894년 정월 예방(禮房)이 선납한 의정부 약채전(藥債錢) 10냥 5전부터 기재되어 있다. 이때 납부 대상은 종친부, 중추원, 기로소, 중진영(中鎭營)이고 그 외에 속오색(束伍色)이 선납한 속오방번전(束伍防番錢) 14냥도 있다. 3월에는 호조, 사포서, 내수사, 균역청, 전주부, 중진영, 병조(兵曹) 등이 대상으로 납부액과 미납액을 각각 기록하였다. 4월에는 선혜청, 호조, 중진영, 순영(巡營), 호조, 5월에는 양향청, 중진영, 충익부, 병영(兵營), 6월에는 중진영, 속오방번, 순무영(巡撫營), 7월에는 기로소, 중추부, 군산진, 병조, 8월에는 순영, 사복시, 좌수영, 병영 등이 대상이었다. 10월에는 병조, 양향청, 어영청, 금위영, 공조, 군기시, 장악원, 선혜청, 수어영청, 균역청, 은언궁, 사포서, 순영, 병조, 11월에는 순영, 육상궁, 12월에는 병조가 대상이었다. 자료 말미에 을미년 2월 제사를 위한 전세미태(田稅米太) 마련기(磨鍊記)가 상세하기 기재되어 있고 이를 주관한 좌수와 호방, 이방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언급된 기관 중 중진영(中鎭營)은 전라도 전주에 설치된 중진영(中鎭營)을 의미한다. 중진영은 지금의 초록바위에 자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김개남을 비롯한 상당 수의 동학농민군이 처형당하였다고 한다. 중진영과 함께 병조, 병영, 순무영(순영) 등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조선왕조의 군사기구였다. 동학농민군이 활동하던 시기에도 진안현의 이들 기관에 대한 상납이 이루어진 만큼 조선왕조 당국의 조세 행정은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바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 기획
  • 기고
  • 2025.03.26 15:52

박중석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전북지사장 "장애인 인식개선 및 고용문화에 주력"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전북지사는 1994년 7월 1일 전주사무소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도민들에게 조금은 생소한 공단은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전북 지역 장애인 고용 확대를 위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2018년에는 전주맞춤훈련센터와 전북발달장애인훈련센터를 개소하며 장애 유형별 맞춤형 직업훈련 체계를 구축했다. 박중석(55) 지사장은 취임 이후 전북 지역 장애인 고용 활성화와 복지 향상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전북일보는 그를 만나 장애인 고용 현안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취임 후 2개월간의 소감과 주요 활동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전북지사장 박중석입니다. 2025년 2월 4일 자로 전북지사장으로 발령받아 약 2개월 정도가 지난 것 같습니다. 전북에서의 근무는 처음이어서 설렘과 각오를 다지고 왔습니다. 지난 2개월여 동안 전북지역 고용 현황을 파악하고, 도내 장애인 유관기관 방문을 통해 지역 현안이 어떠한지,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 마련을 위해 무엇을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는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임기 동안 전북 관련해 중점적으로 추진하실 주요 현안은 무엇인지요.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 중 고용의무 미이행 기관에 대해 타 기관 고용우수사례 벤치마킹 등 공단의 서비스를 집중하여 고용 의무 미이행 기관이 모두 장애인을 고용해 의무이행을 할 수 있도록 추진하려고 합니다. 전북지역은 300명 이상 민간기업 비중이 전국의 1.57%(61개소, 2023년 기준) 공공기관 비중이 전국의 4.16%(33개소, 2023년 기준) 정도에 불과해 구직자들이 선망하는 대기업, 공공기관 등이 상대적으로 적은 상황입니다. 게다가, 장애인 일자리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부족해 장애인 고용의무 이행을 소극적으로 하고 있는 실정인 점을 고려하면 장애인 일자리의 질적인 측면 향상을 위해서도 지자체와 공공기관의 장애인고용의무 이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올해는 전북지역의 장애인 고용을 선도할 공공영역에서의 모범사례를 만들어 고용의무 이행을 모두 이행할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확산하는 것이 주요 목표입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주요 역할과 기능에 대해 도민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제43조에 의거 설립된 고용노동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장애인이 직업생활을 통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사업주의 장애인 고용을 전문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먼저 ‘장애인에 대한 취업지원사업’은 직업상담, 직업능력평가, 고용지원 필요도 결정, 취업지원프로그램(지원고용, 인턴제, 취업성공패키지 등) 지원, 취업알선 및 취업 후 적응지도, 보조공학기기 및 근로지원인 지원 등이 있습니다. ‘장애인직업능력개발사업’은 장애인 직업능력개발훈련 과정 운영, 직업능력개발원, 맞춤훈련센터, 발달장애인훈련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업주의 장애인고용지원사업’은 사업주의 장애인고용환경개선, 장애인 표준사업장 설립지원, 사업주의 장애인 고용의무 이행 및 고용관리 지원, 장애인 고용의무 초과이행 사업주에 대한 고용장려금 지급 등이 있습니다. ‘장애인 고용여건 조성사업’은 장애인 고용·직업재활에 관한 조사연구, 통계 정보의 수집·분석, 장애인 고용촉진을 위한 교육·홍보, 기능경기대회 관련 사업, 장애인 고용의무 미이행 사업주에 대한 고용부담금 징수,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지원 사업 등이 있습니다." -현재 전북의 장애인 고용현황과 특징에 대해 진단해 주신다면. "2023년도 말 기준 전북지역 인구는 176만 명이며, 등록장애인은 13만 명으로 장애인 출현율이 7.4%로 전국 출현율 5.1%보다 높은 수준이며 경제활동 참가율은 64.1%이며, 실업률이 4.0%로 전국 평균 수준보다 다소 높은 상황입니다. 장애인 고용의무 사업체는 817개소(전국 사업체의 2.55%)이며 300인 이상 민간기업은 61개소(전국의 1.57%)에 불과해 타 시·도 대비 기업규모가 작은 편입니다. 구체적으로 공공부문의 경우 2023년도말 지자체 및 교육청의 非공무원 부문은 각각 9.04%, 4.54%로 의무고용률(3.6%)을 달성했으나 공무원 부문과 공공기관은 각각 2.65%, 3.33%로 의무고용률(3.6%)에 미달했습니다. 다만, 민간부문의 경우 2023년도 말 50인 이상 고용의무사업체의 장애인 고용률은 4.07%로 전국 평균 2.99%보다 높은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전북만의 강점과 앞으로 개선되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요. "전북지사는 2018년도 청사 이전을 하면서 발달훈련센터, 디지털(맞춤)훈련센터가 같은 건물 내에 상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경쟁력있는 양질의 장애인을 양성하고, 장애인 개별 맞춤형 서비스를 신속하게 제공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전국 최초로 장애인 공무원 오케스트라 창단을 전북교육청과 함께 준비하고 있는데 3~4월 맞춤훈련을 실시하고, 5~6월에 현장 적응지도 후 7월에 창단을 목표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전주시 성덕동 옛 자림원 부지에 장애인복합타운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전북특별자치도는 물론, 교육청, 전주시가 참여하고 있고 공단도 2027년 완공을 목표로 교육연수원을 건립 추진 중에 있습니다. 장애인 복합타운이 전북지역 장애인 고용복지의 허브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만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공단에서는 공단에 구직을 희망하는 장애인에 대해서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 실제 구직욕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장애인에 대해서는 정보나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전북지역의 장애인이 어떠한 환경에서 어떤 경제활동, 예를 들어 재정지원일자리 사업 등에 참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면 지역 장애인에 맞는 적합한 서비스를 설계해 제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자체에서도 적극 공감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개인정보보호와 관련해 제한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자체 장애인 정책 추진 시 공단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지난해 광역단체 최초로 전북자치도와 한국장애인고용공단, 한국장애인표준사업장협회가 체결한 업무협약의 기대효과는 어떤 게 있을까요. "지난해 8월 26일 도청 회의실에서 전북특별자치도·공단·(사)한국장애인표준사업장협회와 장애인표준사업장 생산품 우선구매제도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습니다. 도내 장애인표준사업장 인증 사업체는 총 37개소로 장애인표준사업장의 장애인복지 및 고용확대, ESG경영 활성화를 통한 더불어 사는 상생 사회 만들기 협약으로 기관별 협력사항과 기관별 역할을 부여해 도내 장애인표준사업장 생산품 판로가 확대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 한국장애인표준사업장협회와의 협력이 궁금합니다. 구체적인 목표와 비전이 있을까요. "(사)한국장애인표준사업장협회와의 협력은 매우 중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우선적인 건 도내 장애인 표준사업장 생산품 우선구매 활성화를 위해 상호 협력할 것이며 장애인 복지와 고용 확대를 위한 공동 행사를 추진하고 장애인 고용에 관한 인식개선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ESG경영을 바탕으로 동반성장을 위한 협력방안도 모색하려고 합니다." -장애인의 고용과 복지에 대해선 강조되고 있지만, 실천으로 이어지기엔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데. "장애인 고용과 복지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업, 정부, 사회가 함께 노력하는 구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단순한 법적 의무를 넘어 장애인도 동등한 기회를 갖고 자립할 수 있는 환경(근로지원인 지원, 보조공학기기 지원, 사내 장애 인식개선교육 등)을 만드는 것이 고용분야의 복지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표준사업장 우선구매 제도가 잘 지켜지지 않은 점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장애인 표준사업장 우선구매제도의 목적은 장애인 표준사업장에서 생산하는 물품과 용역의 우선구매를 촉진해 판로 개척을 통한 경쟁력 강화로 장애인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공공기관 우선구매 목표비율은 총 구매액의 0.8%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2023년 12월 말 기준 전국 장애인 표준사업장 생산품 우선구매 실적은 1.16%로 목표비율보다 높은 상황이지만, 전북의 경우는 목표비율보다 다소 낮은 0.72%입니다. 아울러, 장애인 표준사업장이 생산하고 있는 다양하고 경쟁력 높은 제품과 서비스를 공공기관, 대기업, 일반 소비자들이 편리하게 찾고 구매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공단에서는 판매지원 홍보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장애인 고용 활성화를 위해 도민과 기업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시다면. "공단은 장애인 일자리의 증대, 일하기 좋은 환경 조성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나갈 것입니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직업능력개발훈련을 적극 실시하겠으며, 양질의 일자리가 많이 늘어날 수 있도록 대기업이 운영하는 표준사업장을 확대하고 표준사업장 우선구매 지원 등 장애인을 다수 고용하고 있는 기업지원을 위해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전북의 장애인 인식개선 확산을 위한 지속적 노력을 통해 장애인고용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성원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박중석 지사장은 박중석 지사장은 서울 출신으로 동국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사회복지 석사,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사회복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6년 공단에 입사한 이후 본부 기획예산부, 감사실, 능력개발기획부 등을 거쳤으며, 대전지사 기업지원부장, 본부 능력개발국 건립추진단장, 서울남부발달장애인훈련센터장, 본부 근로지원부장 등의 보직을 역임했다.

  • 기획
  • 김선찬
  • 2025.03.23 17:25

꽃바람 '살랑' 봄바람 '솔솔'⋯화정마을에 봄이 찾아왔다

봄이 왔나 봅니다. 4월 4일 김제 꽃빛드리·고창 벚꽃 축제, 5일 옥정호 벚꽃 축제⋯. 여기저기 봄 축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거든요. '청년 이장' 취재진들이 두 달째 지내고 있는 화정마을에도 봄이 왔습니다. 당장 한 달 전만 해도 아무 냄새도, 소리도 안 들리던 시골 마을이었지만 이제 거름 냄새, 관리기·경운기 돌아가는 소리가 나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따스한 봄 햇살을 맞으며 산책하기로 했습니다. 최고 기온이 18도에 달하는 21일, 미세먼지가 꼈는지 앞이 뿌옇긴 하지만 날이 어찌나 좋은지 그냥 걷기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괜히 이것저것 챙겨 소풍 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화정마을은 이름에도 '꽃'이 들어갑니다. 주위에 꽃이 많이 피어 화정마을의 '화'를 꽃 화(花)에서 따왔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다들 마당에는 꽃을 심어 놨습니다. 모두 연로하신 탓에 관리가 힘들어 넓은 마당에 비해 정원이 소박하지만 잡초 하나 없이 단정한 모습이었죠. 마을회관 앞을 지나던 중 조재신(87) 어머니 집 대문 틈 사이로 나무 한 그루가 보이네요. 그 앞에 어머니가 서 계십니다. '청년 이장'이 가장 궁금했던 나무의 정체를 물어봅시다. "어머니, 이 나무는 뭐여요?" "이거 앵두나무여! 5월 되면 이거 솔찬히 달려. 먹으러 와!" 앵두나무였습니다. 빨갛고 작은 열매, 그 앵두 맞아요. 벌써 심은 지도 10년이 된 나무라고 하네요. 5월이 되면 주렁주렁 열린다는 앵두나무는 열심히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봄이 왔다는 거죠. 다시 산책을 시작해 봅니다. 마을 곳곳 오와 열을 맞춘 파, 마늘이 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리고 호랑나비도 바람 따라 날아다닙니다. 알록달록한 색이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드네요. 카메라를 들자마자 날아가 버린 나비, 이 정도면 사람인 것 같습니다. 찍으려고만 하면 바로 날아가 버리네요.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습니다. △부녀회장님 취미는 '화단 가꾸기'? 화정마을의 평화로움에 반해갈 때쯤 마당에서 화단을 가꾸는 부녀회장님, 이복순(73) 어머니를 마주쳤습니다. 잡초를 뽑고 계시네요. 어머니, 뭐 하셔요? "아유, 뭐 하긴 봄 왔으니까 풀 뽑지!" 사실 어머니의 봄철 취미는 '화단 가꾸기'입니다. 꽃이 피기 전 잡초를 모두 박멸하기로 결심하신 듯합니다. 일단 '청년 이장'도 호미를 들었습니다. 어색하지만 한참 땅을 파헤치다 보니 어머니가 잘 가꿔 놓은 화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며칠 전 내린 눈 때문에 아직 꽃망울이 터지진 않았지만 저마다 뿌리께 뿌려진 촉촉한 비료를 보니 이건 무조건 예쁘게 잘 필 것 같습니다. 팔·다리부터 허리까지, 성한 데가 없어 화단 가꾸는 것도 잠깐입니다. 마을회관에 갈 준비하고 나온 어머니의 옷에도 봄이 왔네요. 바지에는 귀여운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고 조끼에는 빨갛고 노란 꽃이 피었습니다. 안에 휘황찬란한 꽃이 핀 티셔츠까지 완벽합니다. △매년 식구 먹여 살린 '냉이' 저기 멀리 보행 보조기 위에 냉이를 캐기 위해 칼·바구니를 싣고 가는 박복순(88) 어머니와 마주쳤습니다. 걷기는 힘들어도 봄 냉이는 캐야 한다는 어머니입니다. 마을 곳곳에 냉이가 한가득 올라왔기 때문에 집에만 앉아 있을 순 없습니다. 박 어머니는 매년 봄이 되면 냉이를 캐서 가족들의 밥을 해 먹였습니다. 이제는 모두 타지로 떠나면서 아들 한 명과 함께 살지만 지금도 버릇처럼 냉이를 캡니다.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청년 이장이 하나 캘 때 이미 어머니의 손과 바구니에는 냉이가 한가득입니다. 심지어 다 똑같이 생긴 냉이인 듯하지만 어머니는 먹을 수 있는 냉이, 먹을 수 없는 냉이를 척척 구별합니다. 무려 80년 넘게 냉이를 캤기 때문이죠.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났습니다. 어머니와 헤어지고 아지트에 쉬고 있으니 손님이 찾아옵니다. 벌써 '청년 이장'이 냉이를 캤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졌나 봅니다. 손님은 신옥리(82) 어머니와 우리의 '영화 언니' 마을 주민 이혜례 씨입니다. 두 분도 봄이 되면 '냉이'를 꼭 캤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배추가 흔하지 않아서 김장하는 양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죠. 지금은 배추를 '포기'로 셀 수 있지만 그때는 속이 차지 않아 김장이라고 하기도 어려웠거든요. 심지어 식구가 많다 보니 김치를 담가도 금방 똑 떨어집니다. 그래서 된장에 무쳐 먹으려고 봄만 되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냉이를 비롯해 쑥, 머위 등 나물을 캐러 다녔다고 합니다. 냉이 캐는 마을 주민마다 다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냉이를 볼 때마다 옛날 생각이 난다고. 지금은 식재료가 없어 굶는 시절이 아니지만 화정마을 어르신들은 항상 그랬듯 오늘도 옆구리에 바구니 끼고 냉이 캐러 갑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문채연 기자

  • 기획
  • 박현우외(1)
  • 2025.03.22 12:50

[팔도 핫플레이스] 봄이 스며드는 비밀의 숲, 영양 죽파리 자작나무숲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나요?" 누군가는 꽃 피는 거리를 걷고, 누군가는 따스한 햇살을 창문 너머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곳 경북 영양군 죽파리의 자작나무숲에서는 계절이 조금 다르게 흐른다. 겨울의 마지막 눈이 수피(樹皮)에 내려앉아 있고, 봄의 첫 기척이 바람 끝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이 숲은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당신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제 그 고요한 순백의 숲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30년 기다린 숲⋯꽃말 '당신을 기다립니다' 봄은 아직 머뭇거리지만, 숲은 먼저 계절을 품기 시작했다. 영양 자작나무숲에는 겨울의 마지막 숨결과 봄의 첫 기척이 동시에 머물고 있다. 경칩(만물이 잠에서 깨는 시기, 3월 5일)이 지났지만 자작나무숲 곳곳엔 소복한 눈이 아직 녹지 않았다. 그러나 그 위로 내리쬐는 햇살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봄이, 지금 이 숲으로 향하고 있다고. 숲에 발을 들이는 순간 한 편의 동화 속으로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하얀 자작나무들이 쭉쭉 뻗은 채 하늘을 향해 자라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수피에 햇살이 닿을 때마다 은빛이 번쩍이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가지마다 걸린 눈꽃은 아직 겨울의 흔적을 품고 있지만, 그 사이로 올라오는 새순의 파릇함은 분명히 봄이다. 이 숲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30년 넘게 숨어 있던 비밀의 숲이다. 1993년 조성된 이후 깊은 산속에 묻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던 이곳은 오랜 시간 세상과 단절된 채 그 자체로 숲의 시간을 쌓아왔다. 주변을 둘러싼 금강소나무 군락이 장벽처럼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었고, 불편한 접근성은 오히려 이 숲을 고요하게 지켜주는 방패였다. 그러나 이 숲도 때를 기다려왔다. 지난 2019년부터 영양군과 산림청이 자작나무숲을 대중에 공개하고 본격적인 관광자원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오랜 세월 세상에 숨어 있던 이 숲은 마침내 사람들을 맞이하게 됐다. 팬데믹 이후 사람들의 일상이 무너지고 마음마저 지친 시기, 자작나무숲은 고요히 그 존재를 드러내며 새로운 힐링 공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마치 고요히 기다리던 친구가 "이제 와도 괜찮다"고 말하듯, 자작나무는 '당신을 기다립니다'라는 꽃말처럼 사람들을 품기 시작했다. △걷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치유 영양 자작나무숲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체 면적 30.6㏊, 축구장 40개에 해당하는 공간에 자작나무 12만여 그루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처음 심을 당시 고작 30㎝ 남짓하던 묘목은 지금은 키 20m가 넘는 거목이 돼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나무 둘레도 60㎝에 육박한다. 나무 하나하나가 마치 숲속의 귀부인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줄지어 서 있다. 자작나무숲은 두 개의 메인 코스로 구성돼 있다. 1코스는 1.49㎞, 2코스는 1.52㎞다. 노란 리본을 따라가면 1코스, 파란 리본을 쫓으면 2코스지만, 정해진 길이 아니어도 괜찮다.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걸어도 좋은 곳이 바로 이 자작나무숲이다. 길은 평탄하고 아늑하며, 숲 사이로 이어진 오솔길 곳곳엔 포토존이 마련돼 있어 누구나 인생 사진을 남기기에도 제격이다. 연접한 전나무숲길과 임도도 탐방객들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킨다. 고도 800m가 넘는 숲길 끝자락에는 전망데크가 설치돼 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숨이 멎을 만큼 장관이다. 자작나무 우듬지가 한 폭의 은빛 융단처럼 산 사면을 수놓고, 그 위로 흐르는 바람마저 시적인 울림을 준다. 그냥 걷기만 해도, 말없이 바라보기만 해도 이 숲은 사람을 치유한다. 자작나무는 자기 몸을 줄이고자 스스로 잔가지를 버린다. 그 옹이 하나하나가 성장의 흔적이고 숲의 철학이다. 필요 없는 것을 버리고, 더 높이 자라기 위한 결단. 인간의 삶에도 닮은 점이 많다. 그래서일까. 이 숲을 다녀간 사람들 대부분은 '많은 걸 느끼고 돌아간다'고 말한다. △나무가 들려주는 고요한 전설 자작나무는 특유의 백색 수피로 '빛의 나무'라고 불린다. 기름기가 많아 과거 촛불이 없던 시절에는 '화촉'(樺燭)의 재료로 쓰였고, 껍질이 얇고 질겨서 종이 대신 사용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에 연애편지를 쓰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속설도 있다. 그래서인지 숲 곳곳에는 나무껍질에 연인의 이름을 새긴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숲 입구에는 '나무가 아파요'라는 안내 푯말이 붙어 있다. 이 숲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얼마나 소중히 지켜야 할 공간인지를 일깨운다. 자작나무는 그저 아름다운 나무 그 이상이다. 수세기 전부터 인간의 삶과 문화, 전설과 연결됐다. 경주 천마총에서 발견된 말안장의 재료, 북유럽 신화 속 자연의 정령, 영화 속 마법 빗자루의 소재 등 자작나무는 시대를 넘나드는 순수함의 상징으로 통한다. 자작나무 수피는 단순한 나무껍질이 아니다. 얇고 질기며 썩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는 종이로, 불쏘시개로, 촛불의 재료로도 활용됐다. 하얀 수피에 연애편지를 적으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말도 그렇게 전해졌다고 한다. 지금도 이 숲에는 '빛'이 흐른다. 햇살을 반사하는 수피는 숲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자연조명 아래에서 걷는 이 기분, 직접 마주한 이들만이 알 수 있다. △모두를 위한 숲⋯산림관광 명소로 진화 영양군은 이 숲의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산림청·경북도와 함께 '국유림 명품 숲' 지정 이후 ▷힐링센터 ▷숲 체험원 ▷임산물 카페 ▷탐방로 ▷에코로드 전기차 운영 기반 조성을 꾸준히 확대해 왔다. 총 28억원이 투입됐고, 현재는 대부분 완료 단계에 접어들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자작나무숲에는 주말마다 2천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숨겨진 숲'이 아닌, 전국에서 손꼽히는 인기 힐링 여행지로 발돋움한 셈이다. 걷는 여행을 즐기는 트레커들과 가족 단위 관광객, 사진작가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자작나무숲을 찾아오고 있다. 접근성 개선도 한창이다. 이전에는 진입로가 험하고, 숲 입구까지 3.2㎞를 걸어야 했지만 이제는 전기차 셔틀이 일부 구간을 운행하고 있다. 통신기지국도 개통돼 휴대폰이 터지지 않던 불편함도 해소됐다. 앞으로 더 많은 탐방객들이 보다 쉽게 숲을 찾고, 보다 안전하게 자연을 누릴 수 있게 될 전망이다. 경북도는 '영양 자작도(島)'라는 이름으로 이 숲을 산림관광 거점으로 개발하고 있다. ▷산림관광 상품화 ▷체류형 관광지 조성 ▷주민 참여형 프로그램 개발 등을 통해 죽파리 자작나무숲을 국내 대표 웰니스 관광지로 키우겠다는 복안이다. 최근에는 해외 언론사 팸 투어를 유치하며 국제적인 산림관광 자원으로 도약하기 위한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이곳은 단순히 사진을 찍고 가는 숲이 아니다. 걷고, 머물고, 느끼고, 쉼을 얻는 공간이다. 오랜 시간 세상에 숨겨졌던 이 비밀의 숲은 이제 봄바람을 타고 사람을 부르고 있다. 그저 마음만 비우고 찾아오면 된다. 자작나무숲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서, '당신을 기다립니다'라고 속삭인다. 매일신문=김영진 기자

  • 기획
  • 기타
  • 2025.03.20 15:13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7) 〈춘당록(春塘錄)〉, 〈의산유고(義山遺稿)〉

〈춘당록(春塘錄)〉 : 여산 유생이 겪은 동학농민혁명 〈춘당록〉은 전라도 여산의 선비 양평(楊枰)의 남긴 문집이다. 여기에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들이 적지 않다. 저자의 내력은 문집 내용 속에 단편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나 분명하게 기재되지 않았다. 본문의 내용을 통해 그의 아버지 양재우(楊在佑)는 철저하게 이단을 배척한 전통적 유교지식인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양평 자신도 유학자로서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동학과 서학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글은 “갑오년에 읊다[甲午吟]”, “학술에 대한 변[學術辨]”, “성지를 받들며 감격하는 말[奉旨感激辭]”, “소모를 위해 쓴 격문 초고[爲召募草檄辭]”, “호남의 여러 읍에 보낸 통문[湖南列邑通文辭]” 등 다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춘당록〉에 실린 이 글들은 체계적으로 수집되거나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사실과 희귀한 문서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주요 내용을 보면 “갑오년에 읊다[甲午吟]”에서 그는 전주성이 농민군에게 점령당할 무렵, 여산 부사 유제관이 군사를 삼례에 보내 전주 외곽을 방어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농민군이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한 사실과 전주성을 점령한 뒤 홍계훈과 공방전을 벌인 과정을 기록하였다. 또 신임 감사 김학진이 전주로 들어가지 못하고 여산에 머문 사실과 순변사 이원회가 파견된 일, 자신이 전주로 달려가서 장군봉에 올라 직접 전주 성내가 불타는 모습을 보고 그 감상을 적은 시를 남겼다. 그 다음 “학술에 대한 변[學術辨]”에서는 동학을 포함하여 이단을 설파하는 장문의 글을 실었다. 이어 “성지를 받들며 감격하는 말[奉旨感激辭]”에서는 1894년 8월 자신이 소모사 이건영의 종사관으로 임명된 사실을 기술하면서 이건영에게서 전달 받은 임금의 유지(諭旨)를 옮겨 놓았으며,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소모사를 보낸 건 바로 도적의 무리를 보듬어 회유하여 그들로서 몽둥이를 만들어 섬나라 왜적들을 매질해 내쫓기 위함이고 소모사가 온 것 또한 왕실에 충성을 바치고 도적의 무리를 교화하기 위함일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또 여기에는 여산 부사 유제관도 이건영이 포섭했음을 시사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다음에는 그가 소모사의 종사관으로 군사 모집을 위해 쓴 글인 “소모를 위해 쓴 격문 초고[爲召募草檄辭]”를 실었다. 이 글은 소모사 이건영의 부탁을 받고 쓴 초안이다. 무엇보다도 ‘섬나라 오랑캐’들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임진왜란을 겪은 사실,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와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등이 개화파와 음모를 꾸며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1894년에는 경복궁을 강점한 사실을 설명하였다. 또한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파 3적의 행패를 지적하고 개화 정권의 수립을 비판하였다. 철저하게 일본 침략 세력과 이에 동조한 개화파를 매도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1894년 8월에 호남의 여러 고을에 보낸 통문인 “호남의 여러 읍에 보낸 통문[湖南列邑通文辭]”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은 여산향교에서 작성해 호남의 모든 향교에 보낸 것이다. 이 통문에서는 동학농민군 토벌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동학농민군을 끌어들이려는 이건영의 의사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소모사 이건영이 동학농민군과 연합작전을 모색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의산유고(義山遺稿)〉 : 동학농민군 진압 선봉에 섰다가 의병을 창의한 인물의 기록 〈의산유고〉는 문석봉(文錫鳳, 1851~1896)이 남긴 문집으로 동학농민혁명과 을미‧병신의병에 관련된 내용이 많이 담겨있다. 문석봉은 1894년 양호소모사로 임명되어 진잠, 금산, 고산, 회덕 일대의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섰으며, 그 이듬해인 1895년 8월에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가장 먼저 을미의병을 창의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문석봉은 경상도 현풍군의 한미한 집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무과를 준비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40이 넘은 189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곧 경복궁 오위장(五衛將)이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충청도 진잠 현감이 되었다가 모친상을 당해 집으로 돌아왔다. 1894년 11월 양호소모사(兩湖召募使)가 되어 충청도 연산, 고산, 진잠, 회덕 일대의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의산유고〉상순영.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의산유고〉에는 소모사로 임명된 다음 관찰사와 도순무영(都巡撫營)에게 올린 글들이 실려 있다. 특히 문집의 권1에 실린 〈토비략기(討匪略記)〉에는 공주 우금티 전투 이후 퇴각하여 곳곳에 둔취해 있던 연산 고산 완주 금산 일대의 동학농민군들을 진압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동학농민군의 최후 전투로 알려진 대둔산 정상 남서쪽 형제바위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상황이 비교적 상세하게 실려 있다. 대둔산 전투에 대해서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실린 내용이 알려져 있었으나, 〈의산유고〉는 그 내용을 다시 확인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둔산 전투는 동학농민전쟁 최후의 전투로도 알려져 있지만, 사실 어린 아이와 임신한 여성 등 가족까지 데리고 피신한 농민군과 그 가족에 대한 일방적 학살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기록된 이들의 최후는 매우 참혹하기 짝이 없다. 고산 완주 일대의 동학농민군과 그의 가족들은 대둔산 정상 남서쪽의 형제바위(720m)에 초막 3개동을 구축하고 1894년 12월 중순부터 진지가 함락되는 이듬해 1월 24일(음력)까지 이곳에서 피신해 있었다. 일본군 3개 분대와 조선 관군 30명으로 된 특공대(모두 60명)가 이들에 대한 대대적 최후의 공격을 시작한 것은 1895년 1월 24일(음력) 새벽 5시였다. 이들은 세 방면으로 나누어서 사다리 등 장비를 이용해 형제 바위로 진격하며 맹렬히 사격을 퍼부었다. 완연한 화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농민군은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9시간 동안이나 버틸 수 있었지만, 결국 어린 소년 1명만 남고 25명이 전사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피신해 있던 농민군 가족 가운데는 28~29세쯤 되는 임신한 부인이 있었는데, 일본군과 관군이 난사한 총알에 맞아 죽었다. 또 접주 김석순은 한살쯤 되는 핏덩이 어린 딸을 안고 깎아지른 바위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다 암석에 부딪쳐 즉사하였다. 그 참상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이런 참상을 뒤로하고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하고 퇴각하였다. 의산유고에는 거짓으로 귀화한다고 한 김공진을 이용하여 대둔산에 주둔해 있던 농민군 사이를 이간질하여 내분을 일으킨 다음 일본군과 함께 공격하여 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없다. 고산, 진잠, 금산 일대의 농민군 지도자 최공우에 대해서도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고, 전사한 농민군 명단 가운데도 최공우의 이름이 없다. 그러나 〈의산유고〉에는 최공우가 대둔산 농민군을 지휘하고 있었으며, 도중에 피신하여 고산 염정동으로 피신한 후 거기서 다시 농민군을 규합하여 활동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둔산 전투에 대한 사실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의산유고〉 등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현장이 확인되지 않다가 1999년 원광대 사학과에서 현장을 발견하여 일반에 공개되었다. 2001년 10월 10일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완주지부〉에서 최후의 항전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 기획
  • 기고
  • 2025.03.20 00:30

[작지만 강한 우리마을]③임실 방동마을의 역발상…공동체 정신으로 농촌의 미래를 꽃피우다

작은 농촌마을이 위태로운 지방소멸 시대에 강력한 공동체의 힘으로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임실군 관촌면 방동마을 주민들은 농촌다움복원사업을 발판 삼아 마을의 정체성을 되찾고, 모두가 공동체의 주인이 되어 자립형 마을을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임실군 관촌면에 위치한 방동마을은 약 70여 가구가 살고 있는 평범한 농촌이다. 하지만 이 작은 마을이 특별한 이유는 공동체의 가치와 마을 고유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지키고 가꿔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막대한 재정적 지원 없이도 자발적인 주민 참여와 공동체 의식으로 모범적인 농촌 재생의 길을 열고 있다. △공동체 혁명의 출발, 농촌다움복원사업 방동마을이 공동체로 거듭난 핵심은 바로 농촌다움복원사업이다. 이 사업은 단순히 마을의 물리적 경관을 정비하는 차원을 넘어 주민들이 직접 마을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보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주민들이 스스로 마을 역사와 문화를 되새기고 이를 지켜가자는 자발적인 의지가 결합하면서 마을의 공동체 역량이 눈에 띄게 강화됐다. 민병택 방동마을 이장은 “농촌다움복원사업을 통해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소통하는 문화가 확산됐다”며 “외부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주민들 스스로 마을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우리 마을의 가장 큰 자랑”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방동마을 주민들은 스스로 '방수8경'이라는 독특한 마을 문화 보존에 앞장서고 있다. 방수8경은 메타세콰이어길, 장제무림, 구절초길, 송대백조 등 방동마을만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뜻하는 이름이다. 이 이름들 속에는 마을의 역사와 주민들의 삶이 녹아 있다. 주민들은 방수8경을 보존하고 이를 활용한 마을 축제와 문화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지역 문화의 자부심을 키워가고 있다. △주민 스스로 지켜가는 전통문화 '방수8경' 방동마을 주민들은 스스로 '방수8경'이라는 독특한 마을 문화 보존에 앞장서고 있다. 방수8경은 메타세콰이어길, 장제무림, 구절초길, 송대백조 등 방동마을만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뜻하는 이름이다. 이 이름들 속에는 마을의 역사와 주민들의 삶이 녹아 있다. 특히 메타세콰이어길은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서부터 방문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대표적인 경관으로, 마을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장제무림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숲으로, 마을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산책로로 자리매김했다. 울창한 숲속에서 자연을 느끼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이 길은 주민들뿐만 아니라 외부 방문객에게도 인기가 높다. 계절마다 각기 다른 매력을 선보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구절초길과 송대백조 역시 방동마을의 자랑거리로 꼽힌다. 구절초길은 가을이 되면 만발한 구절초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송대백조는 겨울철마다 철새들이 찾아와 주민들에게 따뜻한 정취를 선사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 길을 정기적으로 관리하며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방수8경을 더욱 의미 있게 가꾸기 위해 매년 정기적인 축제와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는데, 축제 기간 동안에는 마을 주민들이 직접 기획한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해 외지인들이 마을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러한 행사들은 단순히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마을 공동체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마을 주민 이정옥 씨(65)는 “방수8경 축제를 열면서 주민 간 소통과 결속력이 강화됐고 마을의 자부심과 애향심도 크게 높아졌다”며 “젊은 세대들도 마을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지켜나가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또 방수8경을 통해 방문객들에게 농촌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리고 마을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겠다는 주민들의 의지도 더욱 강해지고 있다. △마을 주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전통숲 방수8경을 비롯해 방동마을 주민들의 자부심 중 하나는 바로 마을 전통숲이다. 이 전통숲은 주민들의 생활복지와 휴식의 공간으로 활용되며 공동체 문화를 더욱 단단하게 다져가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전통숲을 관리하고 정비하면서 마을의 경관을 아름답게 유지하고 있다. 특히 전통숲은 주민에게 휴식 공간뿐만 아니라 세대 간 소통의 장으로서 밑거름이 되고 있다. 어르신들은 이곳에서 전통 놀이와 이야기를 전수하며, 젊은 세대와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다양한 체험을 통해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세대 간의 이해와 유대를 강화하며,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전통숲은 외부 방문객들에게도 개방돼 있어 마을의 문화를 알리는 창구 역할도 한다. 방문객들은 숲에서 열리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농촌의 삶과 문화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이는 마을의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며, 주민들에게는 자부심을, 방문객들에게는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다. 민 이장은 “전통숲은 마을의 역사가 담긴 공간으로 주민들이 휴식과 소통을 통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마을의 중심”이라며, “이곳에서 주민들이 함께 어울리며 마을의 현안을 공유하고 미래를 계획한다”고 설명했다. △지속 가능한 마을의 핵심, 주민의 자발적 참여 방동마을이 농촌 재생의 성공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바탕이 됐다. 주민들은 마을 경관 정비, 문화 행사, 환경보호 캠페인 등 각종 마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특히 민 이장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마을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지키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스스로 기획하고 추진하고 있다. 방동마을 주민들은 전통문화 체험과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해 외지인들과의 소통 기회를 넓히고 있다. 도시에서 온 방문객들이 방동마을의 전통문화를 경험하며 다시 찾고 싶은 마을로 기억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최근에는 마을의 전통 음식과 놀이를 중심으로 한 체험 프로그램이 도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미래를 향한 주민들의 끊임없는 도전 방동마을은 앞으로도 공동체의 역량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지속하며 고유 가치를 전승할 계획이다. 마을에서 생산하는 농특산물을 활용한 제품 개발과 온라인 판매 등 경제적 자립을 위한 새로운 전략도 준비 중이다. 마을 브랜드 개발을 통해 외부와의 소통도 더욱 활성화할 방침이다. 민 이장은 “우리 마을의 미래는 결국 주민들의 지속적인 참여와 관심에 달려 있다”며 “앞으로도 마을 주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 농촌의 진정한 가치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방동마을이 만들어가는 이러한 변화는 농촌이 위기 속에서도 공동체의 힘으로 미래를 개척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방동마을의 성공적인 모델은 다른 농촌 마을에도 커다란 희망과 자신감을 불어넣고 있다. 작지만 강한 방동마을의 이야기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 기획
  • 이준서
  • 2025.03.16 17:58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