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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민기] "우리 같이 장볼래요?"⋯실속 소비 '소분 모임' 등장

유행은 돌고 돈다. 빨라도 너무 빨리 돈다. 괜히 아는 척한다고 "요즘 유행인데 몰랐어?" 이야기했다가 유행이 끝나 창피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트렌드에 민감한 기자들, 트민기가 떴으니 이제 걱정 없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에도 SNS,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유행이 올라오고 트렌드가 진화한다. 트민기는 빠르게 흐름을 포착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게 목표다. “알뜰살뜰 장보기 모임, 함께 할 사람을 찾습니다!” 전국적으로 대용량 제품을 공동 구매해 나눠 갖는 일명 소분 모임이 확산하고 있다. 물가가 치솟는 데다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합리적인 소비 방식으로 꼽힌 영향이다. 23일 기준 지역 기반 중고 거래·생활 커뮤니티 플랫폼 당근에 개설된 소분 모임만 수백 개에 이른다. 규모가 상당하다. 세종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코스트코 소분 모임’은 회원 수가 1200여 명에 이른다. 게시판에는 장보기 일정과 식료품 나눔 글이 빼곡하다. 활동 방식도 다양하다. 함께 장을 보러 가는 사람을 모집하거나, 개인이 산 제품을 나눌 참여자를 찾는 식이다. 특정 제품만 급히 나누려는 글도 올라온다. 한 참가자는 “내일 오전 코스트코 방문 예정입니다. 생연어 절반,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통 소분하실 분 계신가요?”라는 모집 글을 올려 댓글로 거래가 성사되기도 했다. 소분할 때는 개인 장비가 필수다. 음료수처럼 개별 포장된 제품은 쉽게 나눌 수 있지만 해산물, 육류, 쌀 등 대용량 식료품은 현장에서 직접 나눠야 한다. 그 때문에 참가자들은 음식을 담아갈 비닐봉지, 밀폐용기 등을 챙긴다. 소분 모임에 자주 참여한다는 박수빈(25) 씨는 “몇 년 전부터 가입했지만 올해는 특히 자주 나갔다”며 “달걀 값도 그렇고 물가가 너무 올라서 혼자 장을 보면 사치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소분 모임이 떠오른 데에는 급격히 상승한 물가가 한몫한 것으로 풀이된다. 23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지난달 식료품 및 비주류 음료 물가지수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3.5% 증가했다.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2.1%)보다 높은 수치다. 품목별로는 어류 및 수산물이 7.2% 올라 두 달 연속 7%대를 유지했다. 빵과 곡물(6.6%), 커피·차·코코아(13.5%)도 큰 폭으로 올랐다. 생수·청량음료·과일주스·채소주스(3.4%)도 상승세를 보였다. 고물가가 이어지는 한 소분 모임은 점차 규모를 키워갈 것으로 보인다. 전북에도 소분 모임이 생겨나는 추세다. 코스트코 같은 창고형 마트가 없는 지역이지만 지난 17일 전주를 기점으로 한 소분 모임이 중고거래 플랫폼인 당근마켓에 개설됐다. 모임 소개에는 “대용량이라 구매를 망설였던 분들이 모여 즐거운 쇼핑 라이프를 만들자”는 문구가 적혀 있다. 온라인 쇼핑 제품도 함께 나누자는 의견이 나오는 등 소분 범위도 키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 기획
  • 문채연
  • 2025.08.23 11:21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8) 이병휘공초(李秉輝供招)·이준용공초(李埈鎔供招)

△『이병휘공초(李秉輝供招)』 1894년 10월 5일부터 10월 8일까지 3차에 걸친 이병휘(李秉輝)의 신문기록이다. 이병휘와 혐의자 허엽 및 주사 민규정 등과의 대질신문, 허엽 단독 신문도 첨부되어 있다. 서울 출신으로 북한산성 방어와 관리를 담당하던 정3품 무관직인 관성장(管城將)을 하고 있던 이병휘는 흥선대원군의 밀서를 동학농민군에게 전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대원군은 그의 손자 이준용과 손을 잡고 여러 명의 밀사를 각처의 농민군들에게 파견하였다. 이 『이병휘공초』는 흥선대원군과 동학농민군과의 관계뿐 아니라 당시 중앙 정계의 동향과 농민군의 지향 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병휘공초』에 따르면 호서에 있던 대원군의 부하 정인덕이 박동진ㆍ박세강 등에게 제안한 작전 구상 개요는 다음과 같다. 북접 계열 인사인 박동진은 공주에서 임기준ㆍ서장옥과, 남접 계열 박세강은 전봉준ㆍ송희옥과 함께 농민군 동원을 기획하였다. 당시 박동진은 이준용의 지휘를 받았고 박세강은 대원군의 분부를 따르고 있었다. 일본공사관에 의하면 박세강과 박동진은 원래 동학당의 수괴로서 경성감옥에 투옥되었는데 8월 하순 대원군은 두 사람의 죄를 사면하고 박세강을 내무아문 주사, 박동진을 의정부 주사로 임명하여 선유사 정경원과 함께 충청도에 보냈다고 한다. 이들은 충청도 농민군을 규합하여 갑오개화파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 탈취를 기도하였다. 일본 측에서도 특히 10월 7일 이병휘의 두 번째 신문을 주목하였는데, 그 내용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동학당 사건에 대한 회심(會審) 전말 상세 보고 : 이병휘가 제출한 시말서」라는 제목으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서울에 들여보낸 동학당은 종로에 모여 ‘만인소청(萬人疏廳)’을 설치하고 서찰을 정부에 보내 각국 공관에 조회한다. 그리고 통위영ㆍ용호영ㆍ총어영ㆍ호분위 등을 파견하여 궁궐을 파수케 하고 대중을 지휘하여 궁궐에 들어가 주상을 상왕으로 받들고 중전과 왕세자를 폐하며 이준용을 맞이하여 보위에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개화당을 모두 살해하고 ‘자주지정(自主之政)’을 세우고 비밀리에 특사를 파견하여 청국에 알려 후일의 시비를 방지토록 한다. 그러나 일본군이 먼저 출동한다면 청국군을 기다려 협공으로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 자료를 통해 일부 호서농민군 세력은 이준용ㆍ대원군과 연결하여 왕권을 뒤엎으려는 기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대원군ㆍ동학농민군ㆍ조선 정부 모두 평양 전투의 승패 여하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박세강의 체포로 대원군 측은 남접 주력인 전봉준과 접촉할 기회를 잃게 되었고 이후 주로 북접 호서농민군과 제휴하여 왕권을 뒤엎으려고 기도하였다. 또한 민영준과는 달리 사전에 청병 파병을 요구하지는 않았고 청병 스스로 출병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때 대원군 측은 허엽이 추천한 청주의 이용구를 만인소의 우두머리로 내세웠다.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의 저자이자 정치인인 정교(鄭喬)도 대원군 지시로 호서수재(湖西守宰)와 농민군은 합력 북상하여 청국군과 더불어 남북으로 협공하여 일본군을 타파코자 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준용공초(李埈鎔供招)』 1895년 3월 25일부터 4월 14일까지 걸쳐 진행된 법부협판 김학우 피살 사건과 이준용 등의 ‘모반사건’ 관련 피의자들의 신문기록이다. 이준용(李埈鎔)은 국왕 고종의 형 이재면의 큰아들로 흥선대원군의 직계 종손자이다. 그는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일본의 힘을 빌려 잠시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된 대원군의 후견으로 밀사를 지방으로 파견하여 동학농민군의 힘을 빌려 평양에 주둔한 청국군과 함께 일본군을 몰아내고 친일 정권 전복을 꾀하였다. 당시 일본공사관에서는 대원군은 일본군이 반드시 패배하리라고 믿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동학당을 선동하여 청군이 남하하기를 기다렸다가 일본군을 협공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준용은 이후 군국기무처 의원인 김학우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고, 또 박영효ㆍ서광범 등 개화파 세력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특별재판소에서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이후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가 특별 석방되었다. 이 공초는 이준용 외에 관련 및 혐의자 서병선ㆍ임진수ㆍ정조원ㆍ윤진구ㆍ장덕현ㆍ전동석ㆍ김내오ㆍ손이용ㆍ박준양ㆍ이태용ㆍ고종주 등 12명을 총 26차례에 걸쳐 취조하고 그들이 진술한 내용이다. 먼저 법무아문에서는 김학우 피살 사건의 배후 인물로 흥선대원군을 지적하고 있다. 협판 이재정, 참의 장박 등의 심문에서 이준용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억울하다고 진술하였다. 이준용처럼 4차례에 걸친 경우, 박준양과 이태용처럼 3차례, 임진수ㆍ전동석ㆍ고종주처럼 2차례도 있었고, 서병선 등 나머지 사람들은 1차례씩 심문을 받았다. 『이준용공초』의 또 하나의 중요 포인트는 이준용과 동학농민군 관련 문제이다. 이 사건은 대원군 세력이 동학농민군의 재봉기를 추동하고 그들의 힘을 빌려 갑오 개화파 정부의 전복을 꾀했다는 혐의를 추궁하고자 한 재판으로 이 공초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2차 봉기와 관련하여 대원군과의 관련성 등을 일부 파악할 수 있다. 임진수는 동학농민군 지도자에게 각국 공관과 각국 공사에게 급히 해야 할 일을 함께 토론하게 하고 서양 나라의 통용되는 관례에 의하여 별도로 상하의원(上下議院)의 설치를 구상하고 이를 글로 작성하여 동학농민군에게 갔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정인덕도 일본과 더불어 상하의원을 만들어 공동의 정치를 이룬다면, 동양의 형세도 구미와 균형을 다툴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또 다른 공모자 고종주는 1차 진술에서 ‘유신설(維新說)’을 주장하면서 이는 갑오년 6월 21일로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은밀히 국왕의 형인 이재면에게 통지하였다. 여기서 6월 21일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당일로 일본과 적극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대원군을 정점으로 하는 운현궁 세력은 경복궁 점령 후 일본군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통한 정권 탈취를 기도하는 방안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2차 진술에서 고종주는 국권을 모두 운현궁으로 돌리려고 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결국 흥선대원군을 정점으로 한 이준용ㆍ이재면 등 대원군 세력의 쿠데타를 통한 정권 탈취 기도로 이해된다. 이준용은 전라ㆍ충청ㆍ경상도 등 삼남의 농민군을 모두 동원하고 이들과 합세해서 쿠데타를 진행할 구체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고종주는 ‘동비(東匪; 동학농민군)’와 의논한 일이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반면 3차 진술에서 고종주는 동학농민군 진압을 말하고 청국군과 연합전선을 통한 일본군 격퇴를 주장하는 등 그간의 입장과는 다소 상반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이 자료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 기획
  • 기고
  • 2025.08.22 16:49

[한신협 공동기획-팔도 핫플레이스] 무더위 피해 떠나는 전주 야간 산책, 예술·역사·풍경이 어우러진 4코스

입추가 지났지만 한낮의 태양은 여전히 뜨겁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한풀 꺾인 열기와 함께 도시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전주는 낮의 분주함과 달리, 저녁 무렵부터는 골목과 산책로, 오래된 건물들이 차분한 매력을 드러내며 걷기 좋은 도시로 변한다. 문화와 역사, 그리고 밤의 정취가 함께하는 전주의 야간 산책 명소 네 곳을 소개한다. △예술과 휴식이 공존하는 서학동 예술마을 전주 한옥마을과 나란히 자리잡은 서학동은 ‘예술의 골목’이라 불린다. 화가, 도예가, 공예가들이 정착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예술마을이다. 낮에는 관광객들로 붐비지만, 해가 기울 무렵부터는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진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골목마다 자리한 작은 갤러리와 공방은 저녁 시간에도 불을 밝히고, 카페들은 시원한 아이스 음료를 준비하며, 산책하는 이들을 반긴다. 텀블러에 직접 담은 음료를 챙겨들고 천천히 골목을 거닐다 보면, 벽화와 조형물이 어우러진 풍경이 한 편의 야외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특히 여름밤의 서학동은 낮보다 한결 차분해 예술가의 작업실 불빛이 더 돋보인다. ‘광커피’, ‘적요 숨쉬다’, ‘어노렌지’, ‘복선’, '하나떡집'등 전주의 ‘핫플’로 자리 잡은 카페와 디저트 가게도 즐비해 문화적 감수성과 미각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다. 전통과 현대, 예술과 일상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공간에서 여유롭게 걷다 보면 어느새 여름 저녁 더위도 잊게 된다. △달빛을 품은 누각, 남천교 청연루 서학동에서 조금만 발길을 옮기면, 전주의 야경 명소로 꼽히는 청연루에 닿는다. 청연루는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 누각으로, 한옥의 곡선미와 함께 저녁 무렵의 운치를 한껏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낮에 보던 웅장함과 달리 밤의 청연루는 달빛과 은은한 조명이 어우러져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나무 기둥과 기와지붕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여름 저녁 산책자들에게 천연의 선풍기 역할을 한다. 누각에 올라서면 전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가 저물 무렵 붉게 물든 하늘이 검푸른 색으로 바뀌는 순간, 청연루는 최고의 야경 명소로 변신한다.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과 탁 트인 전망을 동시에 즐길 수 있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나 가족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청연루의 매력은 단순한 풍경에 그치지 않는다. 누각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고목과 꽃나무들이 어우러져 있어 밤 산책의 정취를 더한다.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공간에서 느끼는 여름밤의 바람은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준다. △역사의 흔적과 드라마의 배경, 한벽터널(한벽굴) 전주의 한밤 풍경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명소가 바로 한벽터널(한벽굴)이다. 이 터널은 일제강점기 시절 전라선 철길을 놓으면서 만들어졌다. 당시 일본은 전주팔경 중 하나였던 ‘한벽당’의 정기를 끊기 위해 이곳에 터널을 뚫었다고 전해진다. 일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이지만, 오늘날에는 시민과 여행객 모두에게 사랑받는 산책 코스로 자리 잡았다. 터널을 지나면 바로 옆으로 전주천이 펼쳐진다. 1급수 수질을 자랑하는 전주천은 도심 속에서 드물게 만날 수 있는 깨끗한 물줄기다. 저녁 바람이 불어오는 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거나,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산책하기 좋은 곳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여름밤에는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식히기에 제격이다. 최근에는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더욱 주목받았다. 극 중 두 주인공이 한벽굴을 배경으로 담긴 장면이 방영된 뒤, 방문객들 역시 그 장면을 따라 하며 추억을 남긴다. 이 때문에 한때는 한참 동안 줄을 서야 촬영 차례가 돌아올 정도로 ‘인증샷 명소’가 됐다.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터널이 이제는 전주의 대표적인 야간 산책 코스이자 문화적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전주천의 시원한 풍경과 함께 걷다 보면, 낮과는 또 다른 전주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고요한 성지에서 마주하는 바람, 치명자산 성지 전주한옥마을 동남쪽, 어둠이 내린 산등성이에 환하게 빛나는 십자가가 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이 불빛은 순례자와 산책객 모두를 이끄는 등불 같은 존재다. 바로 치명자산 성지다. ‘치명자(致命者)’란 목숨을 바친 사람, 곧 순교자를 뜻한다. 신유박해 당시 유항검 가족 7명이 순교해 합장돼 있고, 정상 암벽에는 1994년에 세워진 기념 성당이 자리한다. 낮에는 숭고한 역사와 신앙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오지만, 여름밤에 이곳을 찾으면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해발 300여 미터 정상까지 이어지는 숲길은 밤이 되면 한낮의 열기를 식혀주는 바람길로 변한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성당 불빛과 함께 고요한 자연의 어둠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든다. 특히 성당 아래쪽의 ‘골고타 십자가의 길’은 촘촘히 들어선 가로등 불빛 사이로 이어져 있어, 천천히 걸으며 묵상하기에도, 가벼운 산책을 즐기기에도 제격이다. 안쪽에 자리한 ‘요안루갈다 광장’은 야간 산책객들에게 잠시 숨을 고르는 쉼터다. 저녁 무렵이면 가족 단위 방문객, 연인, 반려견과 함께하는 이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어두운 밤이라 걱정스러울 수 있지만, 광장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져 오히려 활기와 안전을 느낄 수 있다. 신앙의 성지이자 산책로, 그리고 야경 명소로서 치명자산 성지는 전주의 여름밤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공간이다. 십자가 불빛을 따라 오르는 길에서, 누구나 저마다의 평화와 위로를 만날 수 있다. △전주의 여름밤, 걷기 좋은 길에서 찾는 여유 전주는 낮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는 다소 숨이 막히지만, 저녁이 되면 오히려 산책하기 더없이 좋은 도시로 변한다. 예술적 감수성을 채울 수 있는 서학동 예술마을, 전통 누각의 운치를 즐길 수 있는 청연루, 시민과 여행객 모두에게 사랑받는 산책 코스 한벽터널, 고요한 성찰의 공간 치명자산 성지까지. 네 곳의 산책 코스는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니면서도 공통적으로 여름밤의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입추가 지난 지금, 더위는 조금씩 물러나고 있다. 하지만 여름밤의 낭만은 이제부터가 진짜다. 시원한 음료 한 잔을 챙겨 들고 전주의 골목과 누각, 터널과 산길을 걸어보자. 낮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전주의 또 다른 얼굴이, 밤의 풍경 속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다.

  • 기획
  • 전현아
  • 2025.08.21 19:20

[뉴스와 인물] 김의겸 새만금개발청장 "새만금은 전북과 우리나라 성장동력, 대전환 이루겠다"

여의도 면적의 140배 달하는 새만금은 경제와 사업‧관광을 아우르면서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건설하는 국책사업으로, 지난 1991년 11월 많은 기대 속에 힘찬 출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도 공사가 진행 중으로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곳에는 전북의 미래와 도민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져 있지만 그 동안 ‘장밋빛 청사진’만 난무했을 뿐 여전히 개발은 더디게 흘러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이재명 정부가 새롭게 출발하면서 답보상태에 있던 새만금에 다시 시선이 쏠리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지난 7월 취임한 김의겸 새만금개발청장이 있다. 김 청장 역시 새 정부의 시작과 함께 새만금의 중요성과 책임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취임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현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취임식 자리에서 "가슴 벅차면서도 어깨가 무겁다"며 "새만금에 필요한 것들에 대해선 국회‧대통령실‧정부 관계기관 등과 유기적으로 협력해 사업이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김 청장을 만나 새만금에 대한 비전 및 계획 등을 들어봤다. -새 정부 첫 새만금개발청장으로 취임한 소감 부탁드립니다. “새만금청장에 취임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단군이래 최대 간척사업이자 국책사업인 새만금 사업을 선봉에서 이끌어가는 기관의 책임자로서 사명감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난 한 달, 안에서 직접 접해본 새만금은 밖에서 바라봤던 새만금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본계획 재수립, 사업예산 확보, 이해관계 갈등 등이 복잡하게 얽히고 개별 사업마다 예타를 받느라 사업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새만금은 이제 에너지 대전환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에 맞춰 새로운 미래 비전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과거의 관행을 넘어선 참신한 시각으로 국가 균형 발전을 위한 복합적인 난제들을 해결하고, 새만금의 대전환을 이뤄내겠습니다.” -취임 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는지요. “우선, 새만금을 재생에너지 메카로 도약시키기 위해 관계자들과 토론 하는 등 업무 구상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주민‧ 환경단체‧기업인‧지자체장들과 다양하게 소통하고 있으며, 현장의 현안문제를 파악하고 안전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산업단지‧기반시설 건설현장 등 사업현장도 방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새만금 예산확보와 제도개선을 위해 국회뿐만 아니라 기재부·국토부 등 정부부처와도 긴밀하게 소통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청장님이 생각하는 새만금의 방향성과 목표가 있다면. “새만금을 에너지 대전환의 선도공간이며, 최초의 RE100산단 성공모델로 구현해 ‘재생에너지의 메카’로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특히 재생에너지의 발전부터 공급·활용까지 이어지는 유기적인 가치사슬(밸류체인)을 구축해 나가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첫번째로 태양광·풍력·조력 등 새만금에 풍부한 재생에너지를 바탕으로 새만금을 국내 최대 재생에너지 생산기지로 도약시킬 계획입니다. 두번째로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고압직류송전망, HVDC) 신속 건설을 통해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이끌어 나가는데 기여하겠습니다. 세번째로 기업들의 RE100 전환을 지원할 수 있는 충분하고 안정적인 재생에너지 전력을 공급할 예정입니다. 이에 더해 해수유통, 친환경 모빌리티, 녹색건축물 등을 통하여 탄소중립 기반의 미래도시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현재 기본계획 재수립을 진행하고 있는데, 진행 현황과 향후 계획을 설명해 주세요. “새만금 기본계획 재수립을 위해 지난해 4월부터 전문 연구용역에 착수했으며, 현재는 주요과제 도출과 실행전략 구체화를 위한 세부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이번 기본계획에는 새만금을 재생에너지 거점으로 조성하고 RE100 산업단지를 본격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개발방안뿐만 아니라 해수유통 확대와 조력발전 추진방안 등도 중점적으로 포함할 계획입니다. 해수유통을 확대해수질을 개선하는 방안 등 오랜 난제에 대한 실행 계획도 포함 될 예정입니다. 또한 지역사회와 관계기관, 각 분야 전문가 등 다양한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 정책의 실현 가능성과 공감대를 높일 수 있는 최적의 계획안을 마련하겠습니다. 이를 토대로 새정부의 국정철학과 과제들이 새만금의 핵심 선도사업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차질 없이 준비해 나가겠습니다. 늦어도 연말 이전에는 구체적인 내용들을 국민들께 발표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새만금 해수유통 및 생태계 복원 등에 힘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요. “정부부처 등과 협력해 현재 2개에 불과한 배수갑문을 추가로 증설하고 해수유통을 적극적으로 확대 해 나가겠습니다. 또한 조력발전을 연계 추진해 산단에 RE100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여름철 상습 발생되는 성층화현상 등을 해소하고 수질개선 효과와 함께 최근 극한호우 등 새만금지역 재난에 대응한 홍수예방 기능도 강화하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새만금개발청에서는 2025년 신규사업으로 호 내 부유쓰레기, 어업폐기물 처리 등 공유수면 관리사업을 추진 중입니다. 향후 새만금호 내 수질악화요인을 감소시켜 깨끗한 친수환경을 조성해 나가고 해양생태계가 복원 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새만금 경쟁력 강화를 위해 RE100 산단 유치가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데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요. “2030년까지 수상태양광‧조력 등 6GW의 신재생에너지를 구축해 새만금을 재생에너지의 글로벌 허브로 조성할 계획입니다. 6GW 중 수상태양광 1·2단계 등 2.7GW는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 가동과 연계해 2030년까지 준공하고 조력 등 3.3GW는 2030년까지 착공을 목표로 추진될 예정이다. 특히 새만금에서 생산한 재생에너지 전력을 직접 공급·활용해 RE100 산단의 조성과 인센티브 발굴·지원 등을 통한 RE100 기업을 집중 유치할 계획입니다. 이러한 계획을 차질 없이 이행하고 RE100 기업에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재생에너지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공공 주도의 사업 추진과 제1산단(2030년 완공), 제2산단(2027년 착공) 등을 속도감 있게 개발해 RE100 기업을 적극 유치하겠습니다. 이와함께 산단 내부 유휴지(지붕‧주차장 등) 등을 개발해 RE100 기업에 공급 가능한 재생에너지 자원도 계속 확대할 계획입니다. 또한 RE100 산단 배후도시로 수변도시에 모빌리티·그린에너지 특화 스마트도시를 조성하고, 쾌적한 주거환경과 국제학교 등 정주 여건을 마련하는 등 RE100 산단이 새만금에 지정되도록 노력할 예정입니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스마트그린 산단 소개와 기대 효과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새만금개발청은 새만금 국가산단 5,6공구 3.7㎢ 지역을 대상으로 국내 최초로 RE100을 실현하는 스마트그린 산단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은 RE100으로 자립하고 스마트 기술이 적용되는 친환경·스마트 산업단지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에너지 공급 다변화와 절감체계 구축, 첨단 스마트그린 기술을 활용한 친환경 산단 구현, 지능형 시스템을 통한 산단 인프라 구축 및 입주기업 혁신성장을 도모하는 세가지 방향으로 추됩니다. 올해까지 통합관제센터 건축물과 전력시설 설계를 완료하고 하반기 공사 착수해 2026년까지 구축 완료 예정입니다. 여기에 재생에너지를 2027년까지 30㎿ 공급하고, 2029년까지 총 180㎿를 공급하여 RE100 산단의 기틀을 마련하겠습니다. 스마트그린 산단을 통해 에너지전환 선도하고 첨단기술을 활용한 온실가스 감축, 미래지향 친환경 산단 조성으로 에너지 대전환과 친환경 산업단지의 모범사례를 구축하겠습니다.” -새만금 이차전지 특화단지에서 발생하는 폐수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는지요. “이차전지 산업폐수는 환경부가 마련한 법적기준에 맞도록 기업이 개별처리한 후 공동관로를 통해 방류토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새만금개발청은 처리수가 방류되는 경로에 2중으로 원격수질관리시스템(TMS)를 설치하는 등 폐수가 배출기준에 적합하게 처리되는지를 실시간 확인할 수 있는 감시체계를 구축할 계획입니다. 아울러 지역어민‧관련전문가 등과 함께 상생협의회를 운영하고 이차전지 처리수에 대한 체계적이고 정기적인 감시활동 등 지역민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갈 계획입니다.” -끝으로 도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새만금은 전북의 미래이자 대한민국의 미래입니다. 새만금을 단순한 대규모 개발사업이 아니라 ‘대한민국 RE100 산단 중심지’와 ‘재생에너지 메카’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기반의 에너지 대전환을 추진하고 재생에너지 기반의 RE100 산단을 조성하겠습니다. 두번째로 새만금사업의 조속한 완료를 위해 주요 기반시설 구축과 공공주도의 우선 매립을 추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속적인 기업 유치를 위해 세제 혜택을 강화하고 기업 활동에 필요한 기반시설을 조기에 구축하겠습니다. 또한 안전한 환경 속에서 기업이 원활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현장에서 답을 찾아 지원하는 한편 한발 더 나아가 기업들로 북적이는 새만금이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이 되어 새만금과 전북의 인구와 경제까지 동반 성장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김의겸 청장은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기자 출신으로, 경북 칠곡 출생이나 전북 군산으로 이사한 뒤 초·중·고교를 모두 이곳에서 마쳤다. 그는 군산제일고와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해 사회부장과 논설위원 등을 지냈으며 제21대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대변인 등을 역임했다. 김 청장은 지역 협력과 홍보 소통, 정책 경험 등을 기반으로,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을 실천할 적임자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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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환규
  • 2025.08.17 16:22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7) 홍우전물침첩, 이정돈물침첩, 삼향면물침첩, 최운용표, 한학모표, 오세용임명장

이번에 소개할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낱장의 문서들이다. 그중에서 1894년에 작성된 물침첩, 표, 그리고 임명장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 홍우전 물침첩(洪祐銓勿侵帖)은 1894년 11월 나주목사가 능주(綾州) 부춘면(富春面) 상우봉(上牛峰)에 사는 홍우전(洪祐銓)에게 발급해 준 물침첩이다. 수령들과 수성소와 유회군에서는 농민군으로 관에 협조를 했거나 뇌물을 썼거나 또 농민군을 배반하고 정보를 제공한 경우, 이를 보호하는 물침첩(勿侵帖)를 주었다. 이 물침첩을 지니고 있으면 벼슬아치들이 재산을 약탈하지 않고 토벌군들이 보호해 주어 일종의 특혜를 입었다. 물침첩도 하나의 이권으로 팔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물침첩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발급자가 나주목사인데 발급대상은 나주관할이 아니라 이를 넘어선 능주 부춘면에 사는 홍우전이라는 점이다. 어떻게 관할을 넘어서는 문서가 발행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는 당시 전라도 남부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을 책임지는 초토영이 바로 나주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책임자가 바로 나주목사 민종렬이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나주목사 이름으로 능주에까지 물침표를 작성해 준 것이다. 발급한 시점은 1894년 11월로 우금치 패전 이후 본격적으로 농민군 토벌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물침첩이 발급된 것으로 보인다. 이정돈물침첩(李廷燉勿侵帖)은 1894년 12월 29일 남평현감이 남평(南平) 어천면(魚川面) 야산(夜山)에 거주하는 이정돈(李廷燉)에게 발급해 준 물침첩이다. 이정돈은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몰고 다녔는데, 특히 이 소를 침탈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정돈물침첩은 1894년 12월 29일에 전라도 남평현에서 발급된 것으로 역시 시기적으로 우금치 패전 이후 전라도 남부지역에서 대대적인 토벌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정돈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대단히 변화가 극심한 시기에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소를 지키기 위해 소를 직접 몰고 피신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소를 지켜려고 했던 것은 아마도 당시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소가 가장 소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이정돈이라는 사람은 대단히 치밀한 면도 있어 보인다. 그는 소를 지키기 위해 남평현감에게 물침첩 발급을 요청하고 이를 발급받아 피신하는 과정에서 직접 소지하고 있다가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를 제시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삼향면(三鄕面) 물침첩(勿侵帖)은 1894년 12월 무안현에서 발급한 17장의 물침첩 묶음이다. 이 물침첩에는 전라도 무안현 삼향면 극배(克培)·죽림(竹林)·와동(蛙洞)·이동(鯉洞)·송산(松山)에 사는 이이겸(李二兼), 노기화(魯奇化), 손명언(孫明彦), 이태련(李泰連), 박이만(朴二萬 ), 김행순(金行順), 손가마구(孫可馬九), 김단중(金段中) 등 17명에 대해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침탈하지 말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각각 기록되어 있다. 시기적으로 1894년 12월 무안지역에서 대대적인 토벌 활동이 있었다. 『순무사정보첩』에 따르면 양호도순무영의 선봉장 이규태가 1894년 12월 11일 유시(17시∼19시)에 무안에 도착하여 수성군을 조직하여 각 면의 민간 장정들과 협동하여 접주 70여명을 잡아 가두었다. 또 민원에 따라 30명을 처단하고 40여명을 가두었으며, 무안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 배규찬을 체포하여 목을 베고 9명을 총살하였다. 또 『일본사관함등(日本士官函謄』에 따르면 12월 24일 무안 동학농민군 지도자 배상옥이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지 않는 무안현민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물침첩 발급을 요청하였고 이를 무안현에서 발급해준 것으로 보인다. 17장의 물침첩의 발급대상 지역인 무안현 삼향면 극배(克培)·죽림(竹林)·송산(松山)·와동(蛙洞)·이동(鯉洞)은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무안군 삼향읍 맥포리(극배, 죽림, 송산)와 용포리(와동, 이동)에 속하여 인접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물침첩에서 몇 가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발급시기가 대체로 1894년 11월과 12월이라는 점이다. 동학농민군이 우금치에서 패한 이후 남하하게 되고 조선정부와 일본군의 토벌이 가혹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일반 백성들까지도 체포되거나 재산을 약탈당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를 해소해달라는 민원이 빈번하게 되자, 관에서 이를 해결하고자 이러한 물침첩을 발급해준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전반적으로 발급된 물침첩이 전라도 남부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 시기에 동학농민군 주력이 남부로 몰리면서 농민군 토벌이 이 전라도 남부지역에서 특히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이를 모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물침첩 발급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최운용 표(崔雲龍 表)는 1894년 9월 능성 상서면(上西面) 하황리(下黃里)에 거주하는 유학 최운용(崔雲龍)에게 발급된 표(標)이다. 발급자는 확인되지 않지만 능주목사로 추정된다. 최운용이 미도인(未道人) 즉 동학농민군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 표를 소지하고 있으면 동학농민군으로 체포되지 않으며 재산을 침탈당하지 않는다. 당시 최운용은 나이가 15세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한학모 표(表)는 1894년 12월 7일 전라 관찰사겸위무사(觀察使兼慰撫使)가 남원 오지(梧支) 일리(一里) 가동(佳洞)에 사는 한학모(韓學模)에게 발급한 문서이다. 곧 물침표(勿侵標)와 같은 것으로 이 표를 제시하면 동학농민군이라는 이유로 체포하거나 재산을 강탈하지 못하였다. 오세용부참모장 임명장(吳世鎔副參謀長任命狀)은 1894년 12월 유학(幼學) 오세용(吳世鎔)을 수성부참모장(守城副參謀長)으로 임명하는 임명장이다. 작성자와 임명 주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시기적으로 1894년 12월이라는 점과 수성군이라는 점에서 볼 때,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민간 조직이 구성된 상황에서 유학 오세용을 부참모장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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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13 19:37

[전북의 기후천사] 기후 위기와 생태 이슈에 다가서는 예술적 실험들

자르고 남은 종이들로 전시된 공간을 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에게는 정돈되지 않은 풍경처럼 보이겠지만 예술가의 눈에는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사용하고 소모하는지를 되묻기에 더할 나위 없는 아이디어로 다가왔다. 작업 후 남겨진 조각들을 마주하며 ‘쓸모없어짐’이라는 감각을 상기시키고,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방식을 떠올린 것. 김규리(38) 작가는 자르고 남은 종이 위에 독백 형식의 글을 기록했다. 말 그대로 종이를 수집하고 글을 작성해 메일로 발송하는 실험을 진행하는 것이다. 2025년 그린르네상스 프로젝트에 참여한 김규리 작가는 “그린르네상스 프로젝트는 환경과 기후 위기 같은 주제를 무겁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재밌게 질문할 수 있는 실험의 장”이라며 “환경처럼 일상에서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문제들을 예술에 접목해 대중들이 친숙해질 수 있도록 한다”라고 설명했다. 지난 2021년부터 전주문화재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그린르네상스 프로젝트’는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예술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환경 변화에 대처하는 예술의 역할과 방식을 고민하고 예술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대한 실천적 방안 모색을 목적으로 한다. 올해는 ‘예술가의 질문’을 주제로 생태 이슈와 창작활동을 연계한 예술실험 프로젝트가 하반기까지 운영된다. 예술가의 창의적인 사고방식을 결합해‘환경’과 ‘기후’에 대한 관점을 다각화할 수 있도록 실험 과정을 아카이빙하고 시민과 공유하는 것이다. 기존 환경담론의 인식전환을 위해 예술실험을 운영해 온 전주문화재단은 올해 총 5개 팀을 선발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하는 문화예술적 접근방식을 다각화하기 위해 나이와 전공, 예술 분야도 구분하지 않았다. 그렇게 선발된 예술가들이 바라보는 환경 이슈는 무엇일까. 2025년 그린르네상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조민지·김규리 작가를 지난 9일 팔복예술공장에서 만나 ‘기후 위기’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그린르네상스 프로젝트에 세 번째 참여한다는 조민지(34) 작가는 환경에 관한 담론 형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기후 위기’에 대한 이슈에 예술가들의 관심이 집중됐고, 이제는 ‘경각심’ 차원의 메시지 전달을 넘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주제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에서 조민지 작가는 환경과 생태를 둘러싼 감정과 언어 태도의 균열에 주목했다. 조 작가는 전북지역 시각예술가들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 ‘무해한 예술실험’을 결성했고 올해는 그룹으로 그린르네상스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무해한 예술실험은 ‘감각 회복’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무뎌진 감수성을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춰 활동한다. 조민지, 김의진, 노진아, 박은필, 한준 등 5명의 예술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환경 문제를 바라보고, 환경 문제에 대한 여러 감각과 인식의 차이를 대화할 수 있도록 실험의 장을 만든다. 조 작가는 “사람들이 환경 주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도입부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각종 매스컴에서는 기후위기, 생태 이슈를 말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과연 실제로 체감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직접 몸으로 느껴야만 관련 이슈에 대한 인식이나 생각들이 피어오르지 않을까? 그 사실을 알게 하려면 감각을 회복시키는 것이 먼저 필요했다”라고 덧붙였다. 그렇기에 무해한 예술실험에서는 기후 위기나 생태 이슈를 말하기에 앞서 시각과 청각, 후각과 미각, 촉각 등의 원초적 감각들을 동원해 자료를 채집한다. 5명의 예술가가 직접 채집해 온 감각들을 토대로 자극을 마주하고, 발생한 자극으로 기후 위기와 생태 이슈를 체감하게 한다는 의도이다. 기후 위기나 환경에 관한 이야기가 정보에 의해 선동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조 작가는 “나의 관념이나 생각이 여러 정보로 인해 희석되거나 휩쓸리지 않았으면 한다”라고 했다. 주체성을 가지고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 위한 객관화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는 “기후 위기가 자연의 위기는 아니고 인간의 위기라고 보인다. 어쩌면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자연과 생태계를 들여다보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며 “예술이라고 감성적으로만 관련 사안을 바라보지 않는다. 보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탐구해서 생태적 감각을 되찾으려고 한다”고 밝혔다. 개인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한 김규리 작가는 ‘버려짐과 남겨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콜라주 기법을 활용해 시각화한다. 작가가 선택한 이미지와 버려진 이미지 사이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깨달은 이야기를 참여형 전시와 구독 메일로 풀어낼 예정이다. 김 작가는“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다룬 프로젝트들은 많다. 그렇다면 실제 환경에 필요한 프로젝트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며 “환경을 이야기하기 위해 더 많은 쓰레기가 배출되기도 한다. 지금은 환경이나 기후위기를 돈이나 사업으로 보기도 한다”라고 짚어냈다. 따라서 그린르네상스 프로젝트를 통해 거창한 담론을 형성하기보다는 대중들에게 예술가의 질문을 흥미롭게 생각해서 곱씹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환경단체에서 말하는 전문적인 논리나 이야기에서 벗어나 예술가의 시선을 이미지로 각인시켜 기억하게 만드는 방식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인터뷰 말미에 조민지·김규리 작가는 프로젝트가 “재미있다”고 말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생각하고 문화예술적으로 접근하는 시도 자체가 흥미롭다는 것이다. 현상을 전달하고, 예술가의 시각과 해석을 덧대 새롭게 탄생한 창작물이 제3자의 인식을 전환할 수 있다는 점도 즐거움의 요소라고 했다. 그러니 앞으로도 예술가들이 바라보는 기후 위기와 사회문화적 환경을 고민해 볼 수 있는 실험의 장이 생겨나길, 그래서 최소한 환경과 공존하고 지킬 수 있는 예술 방식의 아이디어를 전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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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은
  • 2025.08.11 17:50

[트민기] ”나는 햄스터, 직업은 회사원”⋯유튜브 뒤집은 AI 동물

유행은 돌고 돈다. 빨라도 너무 빨리 돈다. 괜히 아는 척한다고 "요즘 유행인데 몰랐어?" 이야기했다가 유행이 끝나 창피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트렌드에 민감한 기자들, 트민기가 떴으니 이제 걱정 없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에도 SNS,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유행이 올라오고 트렌드가 진화한다. 트민기는 빠르게 흐름을 포착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게 목표다. "회의 끝나니까 6시? 그렇다면 퇴근." 최근 유튜브에서 헤드셋을 끼고 출퇴근하는 생성형 인공지능(AI) 햄스터를 주인공으로 한 '정서불안 김햄찌'가 인기를 끌고 있다. 부드러운 털, 귀여운 콧잔등, 순진한 얼굴을 한 이 햄스터는 그냥 햄스터가 아니라 회사원 햄스터다. 해당 채널은 개설 3개월 만에 구독자 50만 명을 모았다. 평균 조회수만 100만 회이며 댓글에는 "진짜 직장인 같아서 볼 때마다 슬픔”, “퇴근 후에 이 영상만 되돌려 보면서 힐링하고 있다. 너무 고맙다” 등 공감 섞인 반응이 나온다. 그동안 AI 캐릭터는 진짜를 어설프게 닮은 가짜를 보며 불쾌감을 느끼는 '불쾌한 골짜기' 현상 때문에 대중 호응을 얻기 어려웠으나 김햄찌는 다르다. AI지만 자연스러운 표정과 움직임이 돋보인다. 기존 AI 콘텐츠에서 흔히 보이는 어색함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김햄찌의 인기에 힘입어 ‘AI로 동물 영상 만드는 법’도 활발히 검색되고 있다. 지난 7일 기준 구글에 '김햄찌'를 검색해 보면 연관 검색어에 김햄찌 만드는 법이 뜰 정도다. 인기를 끄는 주된 요인은 공감이다. 김햄찌는 여느 회사원처럼 퇴근 후 야식을 먹고, 로또 당첨을 기대하며 사직서를 품고 다닌다. 직장에서 실수한 날이면 집에 와서 울음까지 터뜨린다. 영상을 본 누리꾼들은 "퇴근길에 실수한 거 계속 생각하다가 제일 편한 집에 와서 와르르 무너져서 우는 거 격공”, “햄찌야, 나 아닌 줄 알았는데 회사생활 은근히 힘들었나 봐.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울컥했는데 간신히 참았어. 위로가 된다”, “햄찌가 내 속마음 대변해 준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김햄찌를 운영하는 채널 주인은 "슬프게도 실생활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다. 내가 위로를 받고 싶어서 영상을 만들게 됐다. 많이 봐 주고 공감해 줘서 항상 고맙다"고 밝혔다. 유튜브가 정책 예고를 하면서 김햄찌 채널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유튜브가 지난달 15일 수익 창출 기준을 개정하며 AI 콘텐츠는 수익을 창출할 수 없게 된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 이번 개정안에는 AI 콘텐츠를 겨냥하는 내용은 없다. 다만, 동일한 템플릿을 사용한 대량 생산, 다른 곳에서 수정 없이 복사한 내용 재사용 등 AI 영상 제작자 다수가 이용하는 영상 제작 방식의 수익 창출을 막았다. 일각에서는 유튜브를 비롯한 영상 플랫폼 제작자들이 AI 영상에 대한 규제를 시작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 기획
  • 문채연
  • 2025.08.09 17:48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6)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과 선봉진전령각진(先鋒陣傳令各陣)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은 1894년 10월 11일부터 12월 20일까지 양호도순영(兩湖都巡撫營) 휘하 선봉장(先鋒將) 이규태(李圭泰)가 동학농민군을 진압 토벌하는 과정에서 순무사(巡撫使) 신정희(申正熙)에게 보낸 첩보(牒報)를 수록한 것으로, 모두 104종의 첩보가 포함되어 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2×30cm이다. 『선봉진전령각진(先鋒陣傳令各陣)』은 1894년 10월 14일부터 12월 26일까지 또한 양호도순무영 휘하 선봉장 이규태가 직접 지휘하였던 통위영(統衛營), 그리고 그의 지휘하에 두었었던 장위영(壯衛營)·경리청(經理廳) 등의 각 부대와 휘하 각 영관·대관·별무사 등, 그리고 각지의 수령과 의병소, 수성군 등에게 내린 전령(傳令)을 모은 책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1×31cm이다. 위 두 자료는 모두 양호도순무영 휘하 선봉장 이규태가 상급 부대인 양호도순무영 순무사 신정희에게 올려보낸 첩보(牒報), 그리고 양호도순무영 휘하 각 부대 및 각지 수령 등에게 내려보낸 전령(傳令)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봉장 이규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상급 부대로의 보고 문건이 『순무사정보첩(巡撫使呈報牒)』이고 예하 및 기타 부대로의 명령 문건이 『선봉진전령각진(先鋒陣傳令各陣)』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자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호도순무영 휘하 선봉진 이규태의 지위 및 상급 부대가 되는 양호도순무영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이규태(1841~1895)는 1862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훈련원 주부, 초관, 첨정을 맡고 도총부 도사, 경력 등을 역임한 무관이었다. 청주 영장과 내금위장 등을 지낸 다음 경리청과 장위영에서 참영관, 정영관을 지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기 전 친군영 체제 하에서 정영관으로 자리 잡은 고급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까지 뚜렷한 일본과의 관계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다음으로 양호도순무영은 1894년 9월 22일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 호위부장(扈衛副將) 신정희(申正熙, 1833~1895)를 순무사로 임명하여 편성된 부대다. 여기서 순무영은 조선시대 전쟁이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에 대응하거나 진압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된 군영을 뜻한다. 순무영이 설치되면 해당 전쟁이나 반란을 대응하는 모든 부대 및 각지 수령은 순무사의 절제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19세기 들어서도 순무영이 세 번 설치되었는데 첫째, 1811년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설치된 순무영이 있었고, 둘째, 1866년 프랑스의 침략, 즉 병인양요에 대응하기 위하여 설치된 순무영이 있었고, 신정희의 양호도수문영이 바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설치된 세 번째 순무영이었다. 원칙대로라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모든 관군은 순무사 신정희의 양호도순무영의 절제를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서울에서 남하한 진압군 대부분은 사실상 일본군 지휘관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이래 기존 친군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중앙군은 해체당한 뒤 일본군에 의하여 재편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호도순무영은 명칭상으로는 양호(兩湖), 즉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을 모두 포괄하는 절대적인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휘하 부대들이 대부분 일본군에 의하여 조직된 부대들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제대로 된 지휘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양호도순무영 순무사 신정희는 1894년 9월 24일 통위영(統衛營) 영관 이규태를 선봉장(先鋒將)으로 임명하여 선발부대를 이끌고 출진하도록 하였다. 이때 이규태는 교도병(敎導兵) 200명과 통위병(統衛兵) 200명을 이끌고 출진하기로 하였는데, 장위영(壯衛營)과 경리청(經理廳) 등 다른 부대도 선봉장의 지휘를 받도록 전령이 떨어졌다. 여기서 통위영은 기존 친군영 체제 하에 있던 친군 통위영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후 재조직된 부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명칭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이전의 체제를 어느 정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장위영과 경리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교도병은 곧 교도중대(敎導中隊)의 병력을 일컫는데, 이는 일본군이 새롭게 조직한 부대였다. 교도중대장(敎導中隊長) 이진호(李軫鎬)는 일본군의 신임을 받는 자였다. 따라서 교도병 200명은 사실상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병력들이었다. 더욱이 10월 12일 양호도순무영 순무사 신정희가 선봉장 이규태에게 일본군과 의논하여 노정을 정하도록 하는 전령을 내리면서 이규태는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대한 숙소 및 음식 공급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동학농민군 진압에 대한 주도권은 일본군이 쥐게 되었다. 실제로 선봉장 이규태는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소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병력과 함께 공주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11월 벌어진 공주 전투때도 서로분진대를 지휘한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 대위와 함께 남하하였는데 전투의 주도권은 그에게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하여 이규태는 불만을 품고 순무사 신정희에게 사신(私信)을 보내어 일본군과 관련한 문제들을 토로하였다. 일본군 또한 이규태에게 불만을 품었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 소좌는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의 지휘를 받지 않은 선봉장 이규태를 두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공사를 향하여 “열렬히 동학당에 가담한 사람이며 모든 처사가 애매모호하고 지휘관의 명령을 왜곡, 이제까지 한 번도 전투 일선에 나선 적이 없다고 합니다”라고 하면서 강력하게 규탄하였다. 이에 따라 이노우에 공사는 외무대신 김윤식에게 이규태의 소환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반면 일본군은 장위영(壯衛營) 병력을 이끌고 남하한 죽산부사(竹山府使) 이두황(李斗璜)을 선호하였다. 그는 청군과의 평양 전투에도 일본군을 따라가 복무한 경험이 있는 친일 군인이었다. 일본군과 함께 남하한 다음에는 일본군의 요구에 따라 보은 장내리와 목천 세성산의 동학농민군 근거지를 초토화시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11월 26일 이두황이 우선봉(右先鋒)으로 임명됨으로써 기존의 선봉장 이규태는 좌선봉(左先鋒)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장위영 병력은 이두황과 원세록이 지휘하고 경리청 병력은 홍운섭과 성하영이 지휘함으로써 이들 병력에 대한 이규태의 지휘권도 불분명해졌다. 교도중대는 이미 이진호가 지휘하고 있었다. 결국 양호도순무영은 12월 23일 순무사 신정희가 강화유수로 임명되면서 혁파되었다. 좌선봉 이규태의 활동도 여기에서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규태 또한 동학농민군 진압을 충실히 벌인 것으로 보인다. 『순무사정보첩』에 따르면 그는 효포, 판치, 유구, 우금치 등지에서 공주 전투를 수행하였고, 노성, 논산, 강경 등지까지 가서 동학농민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우금치 전투 당시에는 각급 부대 지휘관들에게 “일본 병사와 합세하고 진격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순무사정보첩』에는 전라도 지역까지도 내려가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특히 이규태는 전라도 무안 등지로 내려가 무안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배상옥을 토벌하기까지도 하였다. 이를테면 12월 14일 “동학(東學)의 거괴(巨魁)인 배규인(裴奎仁)이 도망하여 해남(海南) 등에 있다고 하니, 너희들은 기필코 쫓아가 붙잡아 바치면 마땅히 상을 후하게 줄 것이다.”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규태가 일본군의 고을 수령에 대한 감금 및 심문, 그리고 동학농민군 지도자에 대한 탈취에 대한 불만을 품은 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일본군이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을 빼앗아가자 “우리의 신민(臣民)이 국법에 의해 처결되지 못하는” 상황에 불만을 품기도 하였다. 직속상관인 순무사 신정희도 「순무사 방시문」을 통하여 귀순한 동학농민군을 생업에 안정시킬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규태의 직책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편성된 부대의 선봉장이었고 역할 또한 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일본군 및 우선봉 이두황이 동학농민군에 저지른 잔혹성을 보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역시 동학농민군 진압을 맡은 지휘관임은 분명하였다. 다만 이규태는 이두황과 달리 친일 군인의 길을 걷지 않았고 동학농민군 진압 직후인 1895년 6월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유바다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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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06 19:03

[작지만 강한 우리 마을] ⑥천왕봉 품은 정겨움과 치유의 마을 '솔바람'

전북 남원시 덕과면 솔바람권역. 천왕봉 자락에 기대어 율천천이 흐르는 이 마을은 마치 동양화 한 폭 같다. 비촌·양선·작소·도촌·만동 등 5개 마을로 구성된 이곳은 정감 어린 공동체와 정겨운 풍경으로, 한번 찾은 이는 다시 오고 싶어 하는 마을이다. 고즈넉한 자연과 따스한 사람 냄새가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그 이름처럼 바람결에 솔향이 실려오는 곳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마을인 솔바람권역 마을 뒤로는 산이, 앞으로는 율천천이 흐른다. 국도 17호선과 14호선이 교차해 접근성도 뛰어나다. 위치상 남원시의 북쪽 관문에 해당하며, 임실 오수와도 가까워 교류도 활발하다. 이런 입지 덕분에 사람 살기 좋은 마을로 꼽힌다. △ '치매 없는 마을'을 향한 따뜻한 연대 5개 마을이 힘을 합쳐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마을로 거듭난 덕에 귀농귀촌해 오는 외부인이 늘어 지난 2020년 130명이었던 인구가 현재 200명으로 증가했다. 마을 주민들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 그리고 공동체 정신이 더해진 결과다. 솔바람마을의 비전은 분명하다. ‘치매 없는 마을’, ‘귀농귀촌하기 좋은 마을’, ‘아이들이 태어나는 마을’이 되는 것. 이를 위해 주민들은 1년에 두 차례 견학을 다니며 끊임없이 배우고, 서로 돕고, 협력해왔다. “서로의 협력으로 솔바람마을이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소영호 마을위원장의 말처럼, 작은 일도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며 마을을 가꿔간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노노돌봄센터'다. ‘노인이 노인을 돌본다’는 철학 아래 조성된 이 공간은 단순한 복지시설을 넘어, 삶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거점이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곳에서 교육과 건강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몸과 마음의 활력을 되찾는다. 복지의 틀 안에만 갇힌 돌봄이 아니라, 마을의 품 안에서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돌봄이다. 맑은 공기만큼이나 따뜻한 정이 흐르는 이 마을은 도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고령화 시대를 살아간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이기에 가능한 삶. 솔바람권역은 공동체 기반의 돌봄을 통해, 지방소멸 시대 농촌이 나아갈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 주민이 주인공이 되는 축제, '솔바람축제' 매년 11월 솔바람권역에는 동절기 찬바람을 이겨내는 웃음소리와 노랫가락이 가득한 날이 찾아온다. ‘솔바람축제’는 농림축산식품부의 공모사업으로 시작된 마을축제로, 기획부터 준비, 운영까지 모든 과정을 주민들이 주도한다. 외부 공연단을 불러 모으는 축제가 아닌,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민요를 부르고, 주민들이 만든 전통놀이와 아이들의 보물찾기, 어르신들이 참여한 시화전 등 우리 손으로 만든 프로그램들로 채워진다. 올해로 5년째를 맞는 솔바람축제는 이제 단순한 마을잔치를 넘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행사로 성장하고 있다. 소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이 축제는 귀농귀촌을 고민하는 도시민들에게 마을을 소개하는 살아있는 브로슈어이자, 농촌에서도 즐거운 삶이 가능하다는 증거가 된다. ‘농촌은 지루하다’는 편견은 이곳에서 무너진다. 축제는 이제 이 마을의 철학과 정체성을 가장 따뜻하고 진솔하게 보여주는 무대다. 주민이 주인이 되는 축제, 그 자체가 솔바람권역의 공동체 정신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일상, 자연이 품은 예술 솔바람권역은 문화유산도 풍부하다. 호암서원은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울분을 품고 은둔했던 매헌 소삼복을 기리기 위한 정자로, 300년 넘은 소나무가 서 있어 역사성과 경관이 모두 살아있다. 문류정은 조선시대 유림들의 제향 공간으로, 마을의 유서 깊은 뿌리를 상징한다. 이외에도 시비공원, 오종문, 솔바람공원 등 마을의 곳곳에 문화적 자취가 살아 숨 쉰다. 또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체험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허브제품 만들기, 꽃차와 꽃 음식, 김부각과 떡메치기, 도자기 체험 등은 이 마을의 특색 있는 교육 콘텐츠이자 관광자원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에 주민들의 재능기부와 협력이 있다. 마을은 이제 누가 지원해주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문화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주체로 변화하고 있다. △ 마을은 결국 사람, 주민이 곧 정책 최근 솔바람권역이 주목하는 비전은 ‘경관을 통한 관광 자립’이다. 천왕봉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율천천이 사계절 맑게 흐르는 이곳은 그 자체로 한 폭의 풍경이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숙박, 체험, 역사·문화 콘텐츠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지역 기반 관광의 새로운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마을을 마을답게, 그러나 시대에 맞게 가꿔온 전략이 이제 ‘경관 중심 관광’이라는 해답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마을회관부터 쉼터 정자 하나까지, 공동체 규약을 바탕으로 주민들이 함께 만들고 함께 관리해왔다. 갈등이 생기면 마을 안에서 논의해 해결하고, 주민 교육을 반복하며 스스로 역량을 키워가는 문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뿌리내렸다. 실패한 마을도 찾아가 배우고, 성공한 마을과는 노하우를 나누며 교류해온 이들은 ‘행정이 아닌 주민이 주체’라는 철학을 실천해왔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정책보다 사람이 먼저이고, 방향보다 삶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 최근에는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도시민들이 솔바람권역의 삶을 체험하기 위해 이 마을을 찾는 경우도 늘고 있다. 직접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이 마을의 공동체 정신과 자연환경에 감동받아 실제 정착을 결심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솔바람마을은 이제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도시인의 삶에 전환점을 제시하는 ‘삶의 제안서’가 되고 있다. 소영호 위원장은 “소나무 사이로 햇살 담은 바람이 부는 마을, 포근한 햇살과 맑은 물, 그리고 이웃 간 정이 흐르는 마을이 바로 솔바람권역입니다”라며 “언제든지 따뜻한 미소로 여러분을 반갑게 맞이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 기획
  • 이준서
  • 2025.08.03 15:03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5)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급장령성명병록성책(全羅道各邑所獲東徒數爻及將領姓名並錄成冊)

1895년 1월 나주초토사 민종렬(閔種烈, 1831~1899)이 작성한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 급장령성명병록성책(全羅道各邑所獲東徒數爻 及將領姓名並錄成冊)」은 전라도 각 군현에서 체포한 동학농민군의 수와 공을 세운 장령의 성명을 적어 정부에 보고한 문서이다. 1894년 12월에는 「전라도 각읍에서 잡은 동도 수효와 빼앗은 물건을 기록한 「전라도각읍소착동도수효 급소획즙물병록성책(全羅道各邑所捉東徒數爻 及所獲汁物幷錄成冊)」을 작성했는데, 두 문서 모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급장령성명병록성책 1 광양 무장 부안.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제공 민종렬은 1870년대에서 189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삼남의 주요 고을을 다스린 뛰어난 지방관이었다. 의금부 도사와 형조정랑을 거친 그는 중앙 정계의 배경도 든든하였다. 형조판서와 병조판서, 그리고 한성판윤을 역임한 민종묵(閔種默, 1835~1916)이 동생이었다. 그는 충청도 노성과 현풍현감, 경상도 양산군수와 밀양부사를 거쳐 상주목사를 지낸 다음 전라도 남원부사에 이어서 나주목사를 지낼 때 동학농민혁명을 맞는다. 전봉준 장군이 1차봉기시 전주성에서 물러나 나주목사 민종렬을 찾아가서 담판했지만 결국 나주에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한 일화가 널리 알려졌다.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이 동학농민군의 압력을 받아 민종렬을 나주목사에서 이직시키려고 했으나 나주의 여론이 강력히 반발해서 실패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재봉기하자 나주성을 지켜낸 민종렬은 9월 29일에 호남소모사를 겸임했고, 10월 28일에는 전라도 서부 고을에서 동학농민군 진압을 책임지는 호남초토사를 겸임했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가 남하해서 나주성에 본부를 두고 있을 때 전라도 일대에서 대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호남초토사 민종렬은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1942~1921) 소좌의 지시를 받았다. 경군 파견부대와 지방군의 지휘권을 장악한 미나미 소좌는 “장흥 강진 부근 전투 이후로는 많은 비도를 죽이는 방침을 취하였다. 필경 이는 소관(小官) 한 사람만의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훗날에 재기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다소 살벌하다는 느낌을 살지라도, 그렇게 하라는 (이노우에 가오루)공사와 사령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해남 250명, 강진 320명, 장흥 300명, 나주 230명이 살육되었다. 그리고 함평 무안 영암 광주 능주 담양 순창 운봉 장성 영광 무장에서는 각각 30명에서 50명을 처형했다고 한다. 희생자 수를 대략만 기록할 만큼 마구 학살한 것이다. △전라도 각 군현의 잔여 학살과 체포 기록 「전라도각읍소착동도수효 급소획즙물병록성책」과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 급장령성명병록성책」은 일본군이 서울로 돌아간 뒤에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여러 군현과 역(驛) 및 진(鎭)에서 동학농민군 가담자를 체포해서 처분한 내용을 각각 1894년 12월과 1895년 1월에 보고받은 기록이다. 보고한 군현과 역진은 광양 무장 부안 금구 장성 능주 남평 만경 동복 함평 보성 무주 법성진 벽사역 경양역 임자진이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경군에 밀려서 흩어진 후에 사방의 피신지를 찾아 숨었다. 이 기록을 보면 일본군이 붙잡은 동학농민군을 압송해 가거나 경군 좌선봉 이규태와 우선봉 이두황이 넘겨받아서 처형한 사실이 나온다. 또 활동 근거지로 압송한 사례가 나온다. 부안에서 잡은 곽덕언은 고부로 보냈고, 무주에서 잡은 송석준 등 3명은 금산으로 보냈다. 거점이었던 군현으로 압송한 것이다. 기세가 꺾인 각 고을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해당 군현의 관아와 민보군이 체포하고 있다. 이른바 거괴나 비괴를 지목해서 붙잡아 들인 것이다. 호남토포사 민종렬은 이들을 엄중히 조사해서 실상을 파악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1894년 12월 기록은 처참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광주 담양 동복 창평 화순 함평 무안 능주 영광 옥과 무장 남평 고창 나주 등에서 보고한 체포와 처형 보고는 전율할 내용이 나온다. 동복에서만 220명을 체포해서 157명이 포살했다는 것이다. 각 고을의 보고에는 죽은 원인이 장살(杖殺) 포살 효수 옥중자살 압송중사망 등이라고 했다. 때려 죽이고, 쏘아 죽이고, 목 잘라 죽이고, 감옥에서 참지 못해 스스로 죽고, 압송하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 각 고을에서 옥에 가둔 사람이 여러 명에서 수십 명이라고 하는데 이 중 많은 수가 처형되었으나 기록조차 없다. 일본군이 나주에서 떠난 이후의 보고 문서이기 때문에 미나미 소좌나 경군이 보고한 학살자 수에 이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남긴 문서들 전라도 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을 최대로 추적한 인물이 김학진 이후 내려온 신임감사 이도재였다. 그러나 이도재가 남긴 문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정부에 보고하거나 감영에 보관된 문서는 인멸되었다.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생산한 문서도 대부분 없어졌으나 서목 9건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94년 11월 29일 나주 수성군 몇천 명에 대한 보고 △1895년 1월 13일 동학농민군 진압에 공을 세운 장령 보고 △1895년 1월 24일 호남 각읍에서 동학도 체포의 공로자들에 대한 포상 △1895년 1월 24일 전순무영 별군관 김윤창의 공로 보고 △1895년 2월 14일 나주 우영장이 10개월 동안 수성군을 지휘해서 공로에 대한 포상 △1895년 2월 14일 장흥 최신동 문공진 이득춘 이인환, 광주 백정 치성, 함평 장공삼 김달매, 능주 한달문 등 처형 보고 △1895년 2월 14일 각읍에서 동학농민군 체포에 공을 세운 명단 보고 △1895년 2월 15일 부안 진사 이병로가 군수미 200석을 원납한 성의 보고 △1895년 4월 15일 전현감 손웅설과 양반 현덕종에 대한 공로 포상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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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30 19:29

유희태 완주군수 "완주·전주 통합 주민투표 앞서 여론조사로 군민 뜻 정확히 확인해야"

완주-전주 행정통합 문제가 완주 지역사회의 블랙홀이 되고 있다. 유희태 완주군수는 통합이라는 하나의 이슈에 갇혀 군민의 삶을 바꾸는 본질적 논의들이 뒷전으로 밀리는 점이 안타깝다고 했다. 행정통합 관련, 유 군수는 주민투표에 앞서 객관적 여론조사를 먼저 한 후 반대가 많으면 통합 절차를 중단해야 한다는 게 기본 입장이다. 유 군수의 입장이 통합의 찬반이 아닌, 절차적 문제를 제기하는 까닭에 찬반 양측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기도 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완주-전주 통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민선 8기 들어 통합 문제가 가장 큰 갈등 요인으로 떠오르면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완주는 지금 수소경제, 정주여건 개선, 인구 10만 달성 등 중요한 전환점에 있습니다. 행정 통합이라는 블랙홀에 모든 에너지가 빨려들어가 버린다면, 군민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통합을 ‘밀어붙일 때’가 아니라 ‘바로 볼 때’입니다. 감정이나 정치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군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차원에서 철저히 군민 입장의 이해득실을 따지고, 군민의 뜻을 정확히 확인해야 할 시점입니다." -전북도와 전주시, 전주 정치권 등에서 통합 필요성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통합 문제에 대응하는데 어떤 점이 가장 어려운지. "가장 어려운 점은 ‘통합이 곧 정답’이라는 인식이 일방적으로 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행정통합은 단순한 조직개편이 아니라, 주민의 삶과 지역 정체성, 자치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그런데도 통합의 필요성만을 주장하며 전북도와 전주시, 정치권에서 여론을 몰아가고 있는 상황은 매우 불공정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대광법, 2036 올림픽 유치, 피지컬AI 사업 등 통합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현안들까지 통합 논리로 엮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오히려 군민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공론화의 진정성을 의심케 합니다. 자칫하면 지역사회 전체가 진영논리로 갈라지는 부작용만 키울 수 있습니다. 저는 일관되게 ‘군민의 뜻이 먼저’라는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논의 구도는 ‘통합을 반드시 해야한다’는 구조로만 흘러가고 있어, 균형 있는 시각을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상호 존중이 전제되지 않는 통합 논의는 결국 지역 갈등만 키우고, 전북의 발전에도 장애가 될 것입니다." -김관영 도지사가 완주 주민이 돼 찬성 활동을 하고 있으며, 완주군의회 의원들이 반대 활동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어떻게 바라보는지. "전북도지사로서의 입장과 개인적 신념을 바탕으로 통합의 필요성을 주장하시는 김관영 지사님의 말씀은 이해하지만, 동시에, 완주군의회 의원들께서 군민 다수의 우려를 대변하며 반대 활동에 나선 것도 지방의회 본연의 역할과 책임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사안에 대해 김관영 지사님께 ‘모든 결정의 주체는 결국 군민이며, 군민의 뜻이 최우선’이라는 완주군의 일관된 입장을 전달드린 바 있습니다. 아울러 통합에 앞장서는 모습이 자칫 일방적 추진으로 비칠 수 있는 점을 우려하며, 도민과 완주군민 모두로부터 사랑받는 광역단체장의 이미지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씀도 함께 전했습니다. 지금 이 문제는 다양한 이해와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 있는 사안인 만큼, 특정한 목소리가 일방적으로 부각되는 것보다는 서로의 관점을 존중하며 공론화의 균형을 맞추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군정의 책임자로서 주민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존중받는 구조와 절차를 마련하는데 집중하고자 합니다." -완주-전주 통합에 대해 찬성 반대 어느 쪽인지 분명한 입장 표명이 없어 찬반 양측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찬반 견해를 밝히지 않는 이유는. "완주-전주 통합은 단순히 지자체 간의 경계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군민의 삶의 터전과 정체성, 자치권의 미래가 걸린 중대한 사안입니다. 그러므로 행정의 책임자로서 이 사안을 찬반으로 재단하기보다, 군민의 뜻이 충분히 수렴되고 반영되는 공정한 절차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행정이 성급하게 찬반 입장을 먼저 정해버리면, 공론화의 과정 자체가 편향되고 갈등이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저는 다양한 의견이 충돌하더라도 서로의 입장을 경청하고 조정하며, 군민 스스로 최종 선택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군수로서의 책무라고 봅니다. 찬반 양측의 목소리를 모두 경청하되, 감정적 대립을 부추기기보다는 절차적 정당성과 주민 주권을 지켜내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주민 의견수렴이 우선이라고 하지만, 찬반이 갈리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주민 모두의 충분한 공감대를 얻기 어렵지 않을까요. "지역사회에서 의견이 첨예하게 갈릴수록 모든 주민의 공감대를 완전히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절차적 정당성과 공론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갈등을 투명하고 성숙한 방식으로 조정해 나가기 위해 ‘주민 의견수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충분한 정보 제공과 다양한 방식의 의견 청취, 그리고 무엇보다 군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야만 비로소 공동체적 합의에 다가설 수 있다고 봅니다. 일방적인 추진이나 정치적 프레임이 아닌, 군민의 삶과 미래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방향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며, 그 판단의 주체 역시 주민이어야 한다는 것이 확고한 입장입니다." -전주시와 공동으로 행정안전부에 여론조사 실시를 건의하자고 요청하기도 했는데 가능하다고 보는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주민투표까지 가는 것은 지역사회를 더욱 깊은 갈등으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주민 여론조사를 통해 완주군민 반수 이상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다면, 그 자체로 통합 추진은 중단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민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는 원칙은 단순한 명분이 아니라, 정책의 정당성을 결정짓는 기준입니다. 여론조사는 그 민의를 가장 빠르고 객관적으로 확인할 방법입니다. 실제로 2009년에도 행정안전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반대 64.2%, 찬성 35.8%라는 결과가 나오며 통합이 무산된 사례가 있습니다. 2013년도에도 여론조사를 통해 찬성이 52.2%로 나오면서 주민투표를 진행했지만, 결과적으로 반대 55.3%, 찬성 44.7%로 나오면서 통합은 무산되었고, 완주군의 갈등과 균열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주민 간의 대립과 상처는 지금까지도 공동체 화합에 큰 걸림돌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론조사는 통합 여부를 결정하기에 앞서 주민의 민의를 확인하고,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과 갈등을 줄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절차입니다." -전북도는 통합을 이루면 전주올림픽 유치, 대광법 통과에 따른 간선도로 확충, 새 정부 출범으로 특례시 지정 등으로 전북이 도약할 발판이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완주군 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것 아닌지. "통합이 전주올림픽 유치, 대광법, 피지컬AI 사업, 특례시 지정 등 대형 프로젝트의 전제조건인 것처럼 주장하고, 대형 사업들의 성공을 위해 마치 통합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이분법적 접근은 매우 위험합니다. ‘통합만이 해답’이라는 전제 아래 정책을 설계하고 여론을 주도하는 것은, 군민의 합리적인 판단을 가로막고 오히려 지역 내 불신과 갈등을 확대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언론에서 완주가 통합에 협조하지 않으면 전북 전체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체가 되는 것처럼 왜곡하고 있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국책사업의 중대한 과제가 흥정의 대상이 되고, 군민 여론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왜곡되는 상황은 지방자치의 근본 취지에도 어긋납니다. 대형 사업의 유치 여부는 그 자체의 타당성과 전략, 정부의 정책적 우선순위에 따라 결정돼야 할 사안이지, 특정 지역의 행정통합 여부에 따라 좌우될 사안이 아닙니다." -찬성 측이 제시한 105개 상생발전 방안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105개 상생발전 방안은 권한없는 특정 민간단체에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문서일 뿐, 사전에 완주군과 충분한 논의나 협의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 아닙니다. 군민의 입장에서는 그 내용을 처음부터 검토할 기회조차 없었고, 당연히 신뢰할 수 있는 실현 가능성에 대한 검토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일방적으로 발표되었고, 군민들은 그 내용을 사후에 언론 등을 통해 접하게 됐습니다. 내용과 절차 모두에서 군민을 배제한 채 추진된 계획은 신뢰를 얻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해당 방안 전 항목 자체가 실질적인 실행계획이나 재원 마련 방안이 전무합니다. 예를 들어, 통합 시 가장 민감한 쟁점 중 하나인 ‘통합청사’ 문제에 대해서도 선언만 있지 아무런 계획도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통합청사를 완주에 건립하겠다는 방안이 정작 전주시민들 사이에서도 충분한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현 전주시청이 위치한 서노송동 일대 주민들은 청사 이전에 따른 지역 공동화에 대한 우려가 매우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까지 통합지역에 청사를 건립한 사례는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과거 이리시-익산군 통합 당시에는 익산군의 함열에 통합청사를 짓겠다는 약속이 있었지만 이행되지 않았고, 청주-청원 통합 사례에서도 청주에 통합청사를 별도로 건립하지 않았습니다. 여수-여천시-여천군 통합에서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주민들은 소외감과 불신을 겪어야 했습니다." -전북도는 특별법을 만들어 상생발전안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군수님은 비현실적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전북도와 전주시는 특별법 제정을 통해 상생발전 방안을 보장하겠다고 하지만, 법률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곧바로 재정이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전주시는 전북 지역에서 지방채 규모가 가장 큰 자치단체입니다. 2024년 기준 전주시의 지방채는 4,653억, 올해는 6,000억 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완주군보다 무려 14배나 큰 규모입니다. 전주시는 과도한 채무가 누적돼 있고, 이로 인해 자체 재정 여력이 심각하게 제약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완주와의 통합 이후 수천억 원 규모의 통합청사 건립, 광역교통망 확충, 문화·체육 인프라 투자 등을 이행하겠다는 상생발전안이 과연 현실적인지 되묻게 됩니다. 지방채가 이미 과중한 상황에서, 새로운 대형 사업을 감당할 여력은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전주시는 ‘지방세 수입으로 충분히 감당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이는 단순한 수치상의 기대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민생예산을 대폭 줄이거나 현재 추진 중인 대규모 사업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상환이 어려울 것입니다. 법률로 보장한다고 해도 예산이 수반되지 않으면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정치적 선언과 법률 제정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구체적인 재정계획과 실행 가능한 구조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막대한 부채 부담을 안고 있는 전주시와의 통합은 완주군 재정에도 심각한 위험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비슷했던 청주-청원이 통합으로 획기적 지역발전을 이뤘다는 평가가 나오는데. "청주-청원 통합은 성공 사례로 자주 언급되지만, 실제 지역발전의 핵심 동력은 통합 그 자체가 아닙니다. 청주 발전의 결정적 계기는 오송바이오밸리 조성과 오송역(KTX·SRT) 개통 등 통합 이전부터 체계적으로 추진된 국가 산업 전략과 대규모 인프라 투자였습니다. 정부의 장기적인 바이오산업 육성 정책, 산·학·연·병·관 클러스터 구축, 보건의료 6대 국책기관 입주, 충북도의 지속적인 정책 지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오송을 중심으로 한 개발이 가속화됐습니다. 즉, 오늘날 청주의 성장은 행정통합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가 전략적으로 집중 투자한 결과이며, 이는 통합 없이도 충분히 가능했던 발전입니다. 더군다나 구 청원군 지역은 인구가 감소하고, 쓰레기 매립장·소각장 등 기피시설이 집중되는 등 여전히 소외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통합의 본래 취지였던 균형 발전은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통합 반대가 주민 뜻과 별개로 완주군 기득권 세력의 기득권 상실을 우려한 때문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완주군과 전주시는 1997년, 2009년, 2013년 세 차례에 걸쳐 통합 논의를 추진했지만 모두 무산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공통된 결과는, 군민 다수가 통합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혀왔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이나 기득권 때문이 아니라, 주민들이 실제로 느끼는 삶의 변화와 손익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판단이었습니다. 주민들이 수동적으로 따라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 온 과정이었습니다. 이번 4번째 통합 논의가 주민들로부터 시작됐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2022년 지방선거에서 김관영 도지사와 우범기 전주시장이 통합을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 본격적인 시작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정치권 중심의 논의가 형성됐고, 지역사회 내부 갈등도 함께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기득권이라는 프레임으로 주민 뜻을 왜곡하기보다는, 군민이 왜 통합을 원치 않는지 그 진짜 이유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합 찬반측이 통합의 장단점을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공론의 장이 미진한 데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통합을 둘러싼 찬반 논의가 일부 단체나 정치권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고, 그 과정에서 객관적인 정보 제공이나 균형 잡힌 토론보다는 일방적인 주장과 감정적 대립이 앞서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에 완주군은 현재 통합 논의와 관련해 주민들께 보다 정확하고 균형 잡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자 합니다. 현재 ‘완주-전주 통합 찬·반 바로 알리기’ 간담회 등을 통해 통합의 실질적인 내용과 향후 영향을 군민들께 상세히 알리고,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채널을 활용해 통합 관련 주요 쟁점, 재정 문제, 생활권 변화 가능성 등에 대한 객관적이고 검증된 정보를 지속적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찬성과 반대, 양측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정치적 논리보다 지역의 미래와 군민의 삶에 기반한 경제적 논리로 대화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적극적으로 만들어가겠습니다." -행정안전부가 통합 절차를 진행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결국 주민투표로 갈 전망인데, 주민투표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주민갈등과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방안과 대책을 세우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지. "통합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닙니다. 주민 삶의 터전과 정체성이 바뀌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완주군은 1997년, 2009년, 2013년 세 차례에 걸쳐 통합 논의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극심한 지역 갈등과 후유증을 겪어야 했습니다. 당시에 발생한 주민 간 대립과 공동체 분열은 지금도 일부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주민투표는 형식상 공정해 보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반목, 감정의 골은 결국 완주군민들이 또다시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지역 공동체의 분열은 단순히 투표 이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아픔과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에 완주군은 주민갈등과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일정한 공론화 기간을 두고 통합의 찬반을 놓고 다양한 분야에서 깊이 있는 토론과 숙의가 이뤄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 문화, 예술, 스포츠 등 생활과 밀접한 영역에서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는 열린 토론회를 통해 군민들이 충분히 정보를 접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공론화 과정을 거친 후, 행정안전부가 주관하는 신뢰할 수 있는 방식의 여론조사를 통해 군민의 뜻을 정확히 확인해야 하며, 만약 반수 이상이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면 주민투표는 중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주시와 통합하지 않고 완주군 자체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한다면. "완주군은 올해 5월 주민등록인구 10만 명을 넘어서며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숫자의 회복이 아니라, 완주군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테크노밸리 제2일반산업단지는 12년간의 긴 여정을 거쳐 올해 3월 최종 준공되었고, 분양률은 97.6%에 달합니다. 현대차 전주공장을 중심으로 수소상용차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수소버스, 충전소, 생산기지 등 수소 전주기 인프라를 선도적으로 확보했습니다. 여기에 그린수소 클러스터, 수소특화 국가산단 유치, 탄소중립 R&D센터 등 국가사업과도 적극 연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기반 위에서 완주군은 GRDP 전국 군 단위 1위, 행복지수 1위 도시라는 중장기 목표를 세우고 ‘행복경제도시 완주’라는 비전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 기획
  • 김원용
  • 2025.07.29 18:42

우범기 전주시장 “완전통합, 한쪽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양쪽이 빠른 속도로 발전할 기회”

일제강점기 행정 개편으로 갈라진 뼈아픈 역사를 가진 전주시와 완주군. 그것을 잇기 위한 노력이 다시 시작됐다. 지난 1998년 완주군의회의 반대로 통합이 무산된 이후 4번째 시도이자, 횟수로 27년 만에 찬·반 의견을 묻는 것이다. 특히 민선 8기 첫 공약으로 완주·전주 통합을 제시한 우범기 전주시장은 상생 협력사업 등을 내세우며 추진을 위한 행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유희태 완주군수를 비롯한 다수의 완주군민들은 통합 반대를 외치며 반발하고 있다. 이에 본보는 우 시장과 유 군수를 차례로 만나 각각의 입장을 들어봤다. 민선 8기 첫 번째 공약으로 완주·전주 통합을 제시하셨습니다. 양 지역의 통합은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완주와 전주는 하나의 생활권이라고 생각합니다. 행정구역은 사람의 활동반경이 되는 생활권을 중심으로 그려져야 맞습니다. 양 지역 주민은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오랜 세월 동안 같은 행정구역 아래 이웃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야만 도시의 성장동력이 지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북의 대표도시인 전주는 외연 확장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청년 유출과 인구감소, 자영업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경제구조 등 곳곳이 지뢰밭과 같습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그 파장은 완주로 파고들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말하는 통합의 효과는 현세대를 위한 일이라기보다 우리 미래세대가 이 땅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사항이라고 생각해 추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전주의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완주와의 통합을 추진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습니다. “통합하면 어느 한쪽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양쪽 다 지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발전할 기회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행정통합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왔습니다. 대전시와 대덕군이 통합해서 옛 대덕군의 행정구역이 중심지가 됐고, 광주시도 광산군과 통합해 과거 광산군 지역에 첨단 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광주의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완주와 전주가 통합하면, 20년, 30년 후 아마도 현재 삼례와 봉동을 비롯해 만경강 주변이 완주·전주의 중심으로 변모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완전통합 결정권은 사실상 완주군민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러나 군민들 다수는 “전주시의 말만 믿을 수 있겠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요. “민선 8기 출범 직후부터 완주군민의 신뢰를 얹기 위해 지속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완주군민과 전주시민이 수혜를 받는 ‘완주·전주 상생 협력사업’을 민선 8기 취임 직후부터 찾아왔습니다. 지난 2022년 11월 첫 상생 협력사업을 발표한 뒤 13차례에 걸쳐 협약을 맺었고 28개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미 사업이 완료돼 상당수 완주군민이 혜택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통합을 희망하는 완주 민간단체들이 제안한 105개 상생 방안에 대해 수용의 뜻을 공개적으로 시사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시는 105개 상생 방안에 그치지 않고 완주군민에 직접적인 요구사항을 듣고 있습니다.” 완주군민협의체가 제안하고 전주시가 수용 의사를 밟힌 105개 상생 방안에는 어떤 내용 등이 담겨 있나요. “우리 시는 민간단체의 의견을 존중해 제안을 받는 즉시 실현 방법을 찾았고, 공개적인 실현 계획을 제시해 왔습니다. 당장 지난 3월 완주군 지역에 ‘행정복합타운 조성’을 공개적으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전주시청과 전주시의회뿐 아니라 전주시 시설관리공단과 완주군 시설관리공단을 통합·이전하고 전주문화재단을 비롯한 6개 출연 기관을 완주로 옮기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만약 전북도의 출연 기관 일부까지 같은 지역으로 이전하게 되면 그 자체가 완주군 어느 지역의 생활권을 완전히 혁신적으로 뒤바꿔 놓은 큰 변화가 될 것입니다. 또 교통체계를 하나를 묶고, 동서남북으로 진출하는 광역교통망 조성과 농업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도시·농촌형 농업상생모델을 제시하는 등 완주군민의 통합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우고 발전을 예측할 수 있는 계획을 지속해서 발표해 왔습니다. 105개 상생 방안이 정상적으로 추진되면 완주군 지역에만 1조 5000억 원가량이 투입됩니다. 이 예산은 통합이 한쪽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양쪽이 함께 성장하면서, 지속 가능한 성장동력을 만들게 되는 밑거름으로 쓰일 것입니다.” 통합을 전체로 한 사업들의 규모가 큽니다. 완주군민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선 예산 확보가 관건인데요. “청주시와 창원군의 통합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받은 인센티브가 6000억 원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 외 청주 시청사를 신축할 때 500억 원 정도를 국가로부터 지원받은 것으로 압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정부의 지원 규모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우리 시와 전북도, 정치권도 더 많은 예산 확보에 힘을 모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정동영 의원과 이성윤 의원, 김관영 도지사 등과 함께 105개 상생방안 실현의 국가예산 확보 근거가 될 ‘통합시 설치법’ 추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한 해 만에 모든 사업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전 사업을 실현할 수도 없습니다. 사업의 성격과 규모 등에 따라 다소 시간이 필요한 사업들도 존재합니다. 일부 우려가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규모이고, 실현 가능한 사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통합은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고, 양 지역의 성장을 위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완주군민은 통합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를 꼽을 수는 없습니다. 불안한 마음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서로 대화의 자리, 소통의 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주군민이 반대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통합했을 때 기대 효과 및 찬성하는 논리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대화의 기회가 많았으면 합니다. 서로 대화하지 않으면서 자칫 통합을 논의하는 과정이 갈등과 분열의 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충분히 노력하고, 대화한 후 결정하게 될 완주군민의 신중한 결정을 우리는 존중할 것입니다. 그것은 완주군도 전주시도, 전북도 등도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앞서 말했듯 완주전주 통합 문제는 현세대를 위한 일이라기보다 우리 미래세대를 위한 일입니다, 특히 최근 대광법이 개정되면서 광역교통망 조성계획이 구상되고 있고, 전주가 국내 올림픽 후보 도시로 선정되는 등 우리에게 통합 후 그려질, 도전할 청사진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면서 균형발전정책은 통합에 대한 든든한 뒷받침이 될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돼서 하나 된 힘으로 나아간다면 미래 10년 후 또는 20년 후 어느 지점에는 100만 광역도시로 우뚝 성장해 있을 것으로 굳게 믿습니다. 우리는 3차례에 걸쳐 통합을 시도했고, 아픔을 겪었습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완주와 전주의 미래를 생각하고, 전북의 희망찬 미래를 그릴 수 있게 완주군민들의 현명한 판단을 해주길 기대합니다.” 우범기 전주시장 “꾸준히 완주군민 만나 통합 필요성·당위성 설명하겠다” “완주·전주 통합은 더 큰 미래, 더 강한 경제를 위한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완주군민들을 찾아가 꾸준히 통합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알리며 흔들림 없이 통합의 길을 열어나가겠습니다.” 완주·전주 통합 논의가 본격화된 가운데 연일 완주군민과의 접점을 넓히기 위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우범기 전주시장의 일성이다. 우 시장은 완주·전주 통합 공감대 형성을 위한 출근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는 지난 21일 옛 송천역 사거리를 시작으로 행정안전부의 통합 권고 전까지 완주로 향하는 주요 길목에서에서 출근길 캠페인은 물론, 민간단체 간담회 등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우 시장은 “이미 하나의 생활권인 완주와 전주는 상생과 발전을 위한 동행을 바탕으로 더 크고 강한 광역거점도시로 거듭나야 한다”면서 “통합에 대해 우려하고 반대하는 완주군민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끝까지 설득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강정원
  • 2025.07.28 16:05

[팔팔 청춘] "신체 나이는 60대"⋯80대 건강 비결은 '탁구'?

'팔팔 청춘의 인생 이야기' 여섯 번째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찾은 전주 인후동 윤대선탁구클럽. 이른 아침 시간이지만 탁구공이 통통 튀는 소리가 가득했다. 분명 80대 어르신과 인터뷰 약속을 잡았지만 코트에는 기마자세로 빠르게 공을 받아 치는 건강한 중장년뿐이었다. 이들은 '성탁클럽'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사람들이다. 성탁클럽은 2015년 5월 전주시 생활체육협의회가 주관하는 생활 체육 탁구프로그램에서 조직된 클럽이다. 당시 회원 6명이 시작해서 지금은 28명까지 늘었다. 클럽의 뜻은 이룰 '성', 탁월하다의 '탁'을 합쳐 성탁이 됐다. 회원 연령대도 5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하다. 이중 초고령자인 이승주, 정석규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탁구와 사랑에 빠진 80대 "안녕하세요. 제가 여든네 살 이승주입니다." 사전에 듣고 온 84세 어르신을 찾느라 바쁜 취재진에 먼저 인사를 건넨 이승주(84) 씨다. 인터뷰하자마자 그의 건강 비결은 운동, 그중에서도 탁구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2015년 성탁클럽 1대 회장이었던 이 씨는 벌써 탁구를 한 지도 10년이 지났다.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건강검진 결과를 받아보고 탁구가 건강에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씨는 "최근에 건강검진을 받았다. 지금 내 나이가 84세인데, 신체 나이가 62세로 나왔다. 젊었을 때 테니스, 배드민턴 등 다양한 운동을 해 왔다. 나이가 드니 탁구가 우리의 몸을 잡아 줄 수 있는 중심 운동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기 시작했다. 건강검진하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매일 오전 9시에 나와서 탁구를 치고, 오후에는 건지산을 산책하며 부지런히 운동한 시간은 건강이라는 선물로 돌아왔다. 정년퇴직 후 80대에 접어들면 쉬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겠지만 마지막 죽는 날까지 운동하는 게 이 씨의 바람이다. 그는 "나에게 탁구는 은인이고 생명줄이다. 옛날 같았으면 지금 내 나이도 죽었을 나이다. 계속 운동하고 사람을 만나서 그런지 생각이 젊어서 아주 좋다. 나는 탁구가 나를 살렸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 뒤를 잇는 80대 함께 만난 2대 회장 정석규(80) 씨는 탁구를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정 씨는 "내 생활의 반은 탁구다. 오전은 탁구하고 오후는 개인 업무를 보는 게 나의 일과다. (탁구는) 나에게 아주 소중한 운동이고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탁구를 하게되서 참 다행이다"며 "몸이 피로하거나 쉬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다. 운동을 해서 그런지 삶에 생기가 돈다"고 말했다. 그 역시도 탁구 친 지 벌써 10년째, 이제 탁구가 삶이 됐다. 직장 다닐 때 테니스 15년, 퇴직 후 배드민턴, 당구까지 다 해 본 정 씨는 건강상의 문제로 배드민턴은 포기하고 탁구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탁구에 욕심을 보이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정 씨는 "탁구라는 운동이 쉬워 보이지만 기술적으로 계층이 많다. 선수도 있고, 1부, 2부, 3부, 4부, 심지어 8부까지 구분돼 있다. 이게 실력 격차가 있다는 의미다. 실력을 키우는 재미가 있는 운동 같다. 10년 했으면 5, 6부는 돼야 하는데 아직 멀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80이라는 나이에 접어드니까 계속 운동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걱정이다. 아직은 건강에 문제없이 잘하고 있다. 매일 운동을 해서 그런가 몸이 피로하다거나 쉬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든다. 체력이 버텨 주는 한 계속 운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젊었을 적 모습은? 놀랍게도 이 씨와 정 씨는 농협에서 정년 퇴직을 했다. 성탁클럽 회장을 하려면 농협에서 정년 퇴직해야 한다는 농담까지 생겼다. 이 씨는 삼례에서 근무하면서 매일 테니스를, 정 씨는 정읍에서 조기 축구를 뛰었다. 그 많고 많은 운동을 다 해 봤지만 퇴직 이후 탁구와 사랑에 빠지게 된 둘이다. '팔팔 청춘의 인생 이야기'의 필수 질문 중 하나인 꿈이 궁금해졌다. 남들이 보기에는 좋은 직장, 번듯한 직장에서 퇴직한 듯하지만 이야기하다 보니 둘에게도 꿈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축구를 좋아한 이 씨는 축구선수가 꿈이었다. 그는 "그냥 꿈은 공 차는 것이었다. 축구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축구선수를 꿈꿨지만 실현하기는 어려웠다. 지금도 텔레비전을 틀면 축구만 볼 정도다"며 웃어 보였다. 반면 정 씨는 꿈이 없었다고 한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먼저였던 터라 정 씨의 형편에는 꿈도 사치였다. 그는 "학교 다니는 것도 그렇고, 꿈도 그렇고 어떻게 하면 졸업하고 취직할지 고민이 컸다. 상고에 다니면서 금융기관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들어가서 참 다행이다"며 "그때 당시에는 어떻게 가난을 벗어날까, 그게 고민이고 걱정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먹고사는 직장을 가는 게 목표였던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청년들아, 너희들만큼은⋯." 이 씨와 정 씨는 지금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당부의 말도 남겼다. 이 씨는 "우리는 그냥 일하면 먹고사는 때였는데, 지금은 먹고사는 것보다도 어떻게 머리를 잘 써서 현세대에 부응하면서 출세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때다"면서 "끈기 있는 생활을 하며 국가 발전을 위해 일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건강이 언제나 최우선이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 씨는 "직장 생활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어느 자리, 뭘 맡더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일하면 다 좋아지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다른 것보다도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성공하는 게 세상의 이치 같다"고 강조했다.

  • 기획
  • 박현우
  • 2025.07.28 16:02

[뉴스와 인물]신동식 회장 “K-조선 미래, 지금이 결정적 시기...지도자의 과감한 결단 필요"

“대한민국 조선업은 국가 발전의 도구였습니다. 풀 한 포기 없던 황무지에서 시작해 이제는 미국 대통령마저 손을 내미는 세계 최강의 산업이 되었죠.” 최근 ‘K-조선’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한국에 조선 분야 협력을 요청하면서 그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이 같은 성장의 배경에는 한국 조선업의 씨앗을 뿌리고 터전을 개척한 신동식(93) 한국해사기술(KOMAC) 회장의 헌신이 자리하고 있다. 대한민국 조선 산업 발전의 산증인이자 '대부'로 불리는 신 회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K-조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해 본다. 더불어 한때 지역 경제의 심장이었던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의 향후 운영방안에 대해서도 들어봤다. 인터뷰는 이달 24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신 회장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 최근 ‘K-조선’에 대한 미국의 러브콜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조선업에 협력을 요청했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일감 증가 차원을 넘어 미국과의 전략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할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되는 의미입니다. 만약, 우리가 미국 군함을 건조하게 된다면 현재 주한 미군(2만 3000여명) 보다 10배인 23만명 이상의 안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감히 미국의 군함을 짓는 한국을 공격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기술 교류와 경제적 파급 효과 또한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돈을 받고 배를 만들어주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미국이 아쉬워하는 것을 우리가 해주는 동등한 파트너십이 가능한 때가 온 것입니다.” - 미국이 우리의 조선업에 손을 내민 배경은 무엇입니까. “트럼프 대통령은 세 가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데, 그 해답을 한국이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해군력 증강입니다. 중국에 비해 부족한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함 건조가 시급하지만, 미국은 자체 조선소가 부족합니다. 한국에서 미국 군함을 건조하게 된다면 안보 효과는 물론, 기술 교류 및 경제적 파급 효과가 엄청날 것입니다. 둘째는 미국의 에너지 자원 개발입니다. 미국 내 석유 및 가스 채굴을 늘리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은 결국 에너지 운반선의 수요 증가로 이어질 것이며, LNG선 건조 기술은 한국이 독보적입니다. 셋째는 AI 기술 패권을 위한 데이터 센터 구축입니다. 데이터 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며, 원자력 발전이 해답인데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 기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 미국에 이어 인도에서도 한국 조선 산업에 전략적 협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모디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협의를 통해 대규모 가스 수입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막대한 양의 가스를 운반하려면 1000척 이상의 가스 운반선이 필요한데, 한국만이 이를 건조할 수 있습니다. 모디 총리는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한국의 조선 기술을 벤치마킹하여 인도에 초대형 조선소를 건설하고자 합니다. 이는 한국 조선 기자재 업체들에게 엄청난 기회입니다. 약 700개에 달하는 국내 기업들이 인도에 부품을 수출하고 설계 노하우를 제공하며 시장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인도는 인구도 많고, 기술 인재도 풍부하며, 자본력까지 갖춘 잠재력이 큰 시장입니다. 한국 정부가 인도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여 이러한 국제적인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 현재 K-조선의 강점은 무엇이며, 앞으로 어떤 분야에 집중해야 할까요. "한국 조선업의 가장 큰 강점은 바로 초격차 기술에 있습니다. 중국은 건조량으로는 압도적이지만, 그들이 짓는 배는 주로 저부가가치 선박입니다. 반면 한국은 LNG선, 초대형 컨테이너선, 쇄빙 LNG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 시장을 100% 점유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생산성과 정도 관리(정밀도 관리) 시스템에서 독보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만들어진 부품들이 오차 없이 조립되는 정도 관리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미래에는 친환경 선박, 자율 운항 선박, AI 기반 선박, 그리고 로봇과 AI가 주도하는 스마트 조선소가 대세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분야에서 지속적인 R&D 투자를 통해 기술 격차를 더욱 벌려나가야 합니다. 현재 한국의 고급 인력들이 해외로 유출되는 문제가 심각한데, 파격적인 처우 개선을 통해 이들을 지켜야 합니다.” - K-조선업이 세계 최고로 도약하게 된 터닝 포인트는 언제였습니까? “우리가 다른 나라와 비슷하게 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2000년대에 증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우리 기술자들이 끊임없이 개량하고, 남보다 더 잘 만들고, 빨리 만들고, 싸게 만들면서 초격차를 만들어낸 것은 2000년대 초반입니다. 예를 들어, 30만 톤짜리 초대형 선박을 만들 때 중국 조선소는 24~30개월이 걸리고, 일본은 14~20개월이 걸리지만, 한국 조선소는 7개월이면 만듭니다.” - 모처럼만에 기회가 왔는데,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먼저 대통령 중심의 전략 수립이 필요합니다. 국가 이익과 발전에 집중하여 미래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미국과의 협력 문제를 단순히 방위비나 일감 수주의 관점이 아니라, 안보 및 경제적 동맹 강화의 기회로 인식해야 합니다. '한미공동기술협력위원회' 설립을 통해 일시적인 교섭이 아니라, 상시적인 협력 체계를 구축하여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양국의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기술 교류와 협력 방안을 논의해야 합니다. 여기에 △과학 기술 △해양력 △기후 변화 이 세 가지를 국가 미래 전략으로 지정하고, '대통령 직속 미래산업발전기획위원회'를 설립하여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수립해야 합니다.” - 1961년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회장님을 한국으로 부르신 과정이 궁금합니다. “저는 1961년 5·16 혁명 후 4~5개월 만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어떻게 저 같은 사람의 존재를 알았는지 아직도 의문입니다. 아마도 일본 육사 시절, 해양 대국 일본의 모습을 보고 바다의 중요성을 깨달으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영국 대사관을 통해 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조국을 위해 돌아와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가난했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국 대사의 설득과 박정희 의장의 진심 어린 애국심과 열정을 느끼고 귀국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헌병들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의장실로 향했고, 그곳에서 박정희 의장을 처음 만났습니다.” - 한국에 돌아와 처음 맡으신 임무가 대한조선공사를 재가동시키는 것이었다는데. “제가 1961년 9월 한국에 돌아와 처음 만난 대한조선공사는 조선소가 아니라 그저 풀밭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 놓은 조선소는 해방 후 15년 동안 전혀 가동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직원들은 지난 6개월간 월급도 받지 못하고, 기계 고철을 팔아 쌀을 사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1961년 대한민국 조선업의 현주소였습니다. 저는 외국의 명문대학에서 공부하고, 최고의 기술을 가진 조선소와 국제기구에서 일하며 학문적으로나 실습적으로 조선업을 익혔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처음 한 일이 작업복을 입고 낫을 들고 공장 마당의 풀을 깎는 일이었죠. 당시에는 양철 조각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수천 가지 부품이 들어가는 배를 만든다는 것은 꿈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제가 그린 청사진, 정주영 회장 같은 기업인들의 실행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 조선 산업이 국가 발전에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저에게 조선 산업은 국가 발전의 도구였습니다. 제가 한국에 왔을 때 당시 우리의 수출액은 4000만 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수출 품목이라곤 가발과 김, 면직물, 텅스텐 등이 전부였죠. 이런 상황에서 나라를 잘 살게 만들려면 제조업을 육성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역발상으로 조선 산업을 선택했습니다. 조선업은 모든 관련 산업이 함께 발전해야 하는 종합 조립 기계 산업입니다. 당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조선 산업을 통해 철강·기계·전자 등 수백 개의 관련 산업을 자생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700개가 넘는 세계 초일류 조선 기자재 기업들이 생겨났고, 이는 우리 조선 산업의 든든한 근육이 되었습니다. 조선 산업은 막대한 수출 금액, 기술 진작 효과, 고용 효과 등 파급 효과가 엄청납니다. 공장 하나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수백 개의 공장이 함께 성장할 수 있죠." -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 카이스트 설립에 회장님의 도움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최초의 경제수석비서관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엔지니어인 제가 경제수석을 맡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며 고사했지만, 대통령의 의지는 강력했습니다. 당시 대통령께서는 경제 전문가와 기업가, 은행가들을 모두 불러 물어보셨지만, 당장 필요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사람이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외국을 다니며 돈과 기술을 빌려오고 공장 설립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1년에 200일 이상 해외를 다니며 ‘고급 거지’처럼 돈과 기술을 빌려왔습니다. 대한민국의 웬만한 공장은 거의 제가 다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후 우리가 원천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연구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바로 카이스트(KAIST)의 전신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전 세계를 다니며 한국 과학자들을 설득하여 조국으로 돌아오도록 했습니다. 이분들이 KIST의 창립 멤버가 되었고, 대덕 연구단지에 500개가 넘는 연구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 더불어 한때 지역 경제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던 군산조선소의 완전 재가동에 대해 전망해 주신다면. “죄송하게도 제가 직접 군산 현지 상황을 상세히 진단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신뢰하는 두 전문가 팀에게 군산 조선소의 재가동 가능성에 대해 문의했고, 그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군산 조선소는 일부 블록 공장으로 가동되고 있지만, 물류비 지원이 중단될 경우 다시 조업 중단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또 조수간만의 차가 커 입지적으로 단점이 있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2017년 조업 중단 이후 조선소 주변의 협력사와 숙련된 인력 풀이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입지적 단점과 인프라 붕괴를 보완하여 과거처럼 신조선 건조 기지로 재가동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단순히 호황기 물량을 소화하는 역할로는 군산 조선소가 성장하기 어렵다는 분석입니다.” - 그렇다면 군산조선소의 미래를 위한 현실적인 대안은 무엇입니까. “두 전문가 팀의 의견에서 공통적으로 제시된 대안은 바로 MRO(유지보수, 수리, 정비) 전문 조선소로의 전환입니다. 한국의 대형 조선소들은 대부분 신조선 건조에 집중하고 있어 선박 수리 전문 시설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특히 LNG 선박의 MRO 특화 단지로 조성하거나, 해상풍력 기자재 특화 단지로 조성한다면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블록 생산을 확대하고 소형 관용선 수요에 대응하는 방안도 제시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단순한 신조선 건조 기지를 넘어 유지보수, 개조, 해양 플랜트 등 특화된 분야에 집중하여 경쟁력을 확보해야 합니다.” - 공직을 떠난 후에도 민간에서 2000여 종의 선박을 설계했는데, 93세이신 지금도 조선 기술과 국가 전략을 설계하고 계십니다. 회장님께 조선업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저에게 조선업은 단순히 배를 만들고 돈을 버는 사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 발전의 도구이자, 우리의 자존심이며, 산업의 기반입니다. 저는 일제강점기에 이름과 말을 빼앗기고, 해방 후에는 6.25 전쟁을 겪으며 나라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조국이 없으면 개인의 삶조차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외국에서 유학하고 일할 때도 저는 항상 한국을 생각했습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저는 돈이나 명예를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국가 발전을 위한 봉사라는 신념으로 일했습니다. 황무지에서 시작한 한국 조선산업이 이제는 미국의 대통령조차도 도움을 요청할 만큼 성장한 것을 보면 정말 꿈만 같습니다. 오늘날 한국 조선업은 세계 최첨단 기술과 고부가가치 선박 건조 능력으로 세계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산업적 성과를 넘어,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고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위상을 강화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조선업은 저의 삶이자, 대한민국의 역사이며, 미래를 향한 희망입니다." - 마지막으로, K-조선의 미래에 대한 바람을 듣고 싶습니다. “지금은 희망보다 절망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미국 또한 새로운 요구를 하는 이 시점에 불필요한 이념 논쟁을 중단하고, 국가 이익과 발전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한국 조선업의 '운명을 바꿀 결정적 요인'은 바로 지도자의 강력한 '미래 비전'과 이를 실현할 '과감한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과 실천 계획을 세우고, 이를 행동으로 옮긴다면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고, 세계에서도 대한민국을 위대한 나라로 인정할 것입니다. 저는 이재명 대통령을 만나 미래 산업에 대한 꿈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신동식 회장은 '한국 조선업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대부' 1932년생.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졸업한 신 회장은 스웨덴 코쿰 조선소에서 선박 설계를 익히고, 영국 로이드 선급협회와 미국 선급협회 국제 검사관으로 활동하며 국제적 전문성을 쌓았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1급 정무비서관으로 영입했고, 1968년에는 신설된 경제수석직의 초대 경제2수석으로 파격 임명했다. 그 때 신 회장의 나이는 36세. 당시 양철 한 조각 제대로 만들지 못하던 시기, 그는 초대형 조선업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추진하며 한국 제조업 중장기 발전 계획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세계 최대 규모의 옥포 조선소 건설은 그의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주위의 많은 우려 속에서도 강력하게 추진, 오늘의 대한민국 조선 산업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됐다. 1998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부동산 사업가가 김우중 대우 회장의 초청으로 옥포조선소를 방문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보았던 초대형 크레인의 강렬한 인상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트럼프 대통령의 기억 속에 남아 한국 조선 산업과의 협력을 모색하게 된 계기가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공직 생활 후 경영난에 처했던 한국해사기술(KOMAC)을 인수해 2000여 종의 선박을 직접 설계하며 한국 조선 기술 저변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93세의 고령에도 챗GPT를 활용하는 등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며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 기획
  • 김준호
  • 2025.07.27 17:53

[트민기] 인형 하나에 32만원? Z세대 심리 파고든 ‘라부부’ 열풍

유행은 돌고 돈다. 빨라도 너무 빨리 돈다. 괜히 아는 척한다고 "요즘 유행인데 몰랐어?" 이야기했다가 유행이 끝나 창피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트렌드에 민감한 기자들, 트민기가 떴으니 이제 걱정 없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에도 SNS,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유행이 올라오고 트렌드가 진화한다. 트민기는 빠르게 흐름을 포착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게 목표다. 뾰족한 이빨에 토끼 귀, 심통 난 얼굴을 한 인형 '라부부'가 글로벌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블랙핑크 리사·로제, 리한나 등이 명품 가방에 라부부 키링을 달고 찍은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며 품절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라부부는 홍콩 출신 아트토이 작가 카싱룽이 10여 년 전 만든 캐릭터다. 최근 중국 완구 회사 팝마트가 ‘더 몬스터즈 하이라이트 시리즈’라는 이름의 인형 키링으로 출시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일부 제품은 웃돈 붙어 거래되고 있다. 정가는 2만 1000원이지만, 중고거래 플랫폼 크림(24일 기준)에서는 5만 원 대에 판매 중이다. 시크릿 제품으로 분류되는 검정 라부부는 32만 3000원까지 치솟았다. 팝마트의 마케팅 전략이 성공한 것으로 풀이된다. 팝마트는 내용물을 확인할 수 없는 블라인드 방식으로 제품을 판매하면서 소비자의 수집 욕구를 자극했다. 동시에 생산 수량을 제한하는 등 희소성과 소장 가치를 끌어올렸다. 간혹 인기 제품은 출시하면 바로 품절될 정도다. 유행은 라부부에서 그치지 않고 비슷한 콘셉트인 아트 토이로 확산되고 있다. 원숭이와 인간을 결합한 캐릭터 몬치치도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복슬복슬한 털과 사람과 비슷한 얼굴을 가졌다는 점이 라부부와 비슷하다. 태국 디자이너 몰리가 만든 크라이베이비도 같은 유형이다. 현재 SNS에서는 크라이베이비의 눈물에 큐빅을 붙이거나 매니큐어를 바르는 '눈물 꾸미기 챌린지' 영상이 유행하고 있다. 제2의 라부부라는 수식어까지 얻었다. 전문가들은 아트 토이 열풍이 단순히 유행을 넘어 Z세대의 심리적 불안정과 연결된다고 분석했다. 임상심리학자 트레이시 킹은 “팬데믹, 경기 침체, 기후 변화 등으로 전통적인 안정 지표에 닿기 힘든 시대에 Z세대는 미래를 위한 저축보다는 지금을 위한 투자를 하는 경향을 보인다”며 “작은 물건을 수집하는 행위는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통제감과 위안을 얻으려는 심리적 반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작은 물건을 모으는 행위는 편안함과 통제감을 안겨 준다”며 “(아트 토이 유행은) 단순한 장난감 유행이 아니라 현대인이 과열된 사회에서 심리적 안정을 찾는 방식임을 보여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기로 인해 부작용도 큰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가품이 유통되며 소비자 피해가 잇따르는 상황이다. 가수 이영지가 SNS 영상에서 공개한 라부부는 가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대만 방송에도 보도됐다. 이영지는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 "내 라부부는 가짜였다. 짭부부다"면서 "고리가 없고 카드도 없다. 다들 속지 말고 정품 사라"고 당부했다. 안전 문제도 발생했다. 한국·일본·미국 등 팝마트 주요 매장 앞은 오픈런을 위한 밤샘 줄이 늘어섰다. 일부 매장에서는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팝마트 한국지사는 안전을 이유로 오프라인 판매 중단을 공지한 상황이다.

  • 기획
  • 문채연
  • 2025.07.26 10:16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4)법부청의서, 한성부재판소이수록, 개성재판소형명부, 한성재판소형명부

1894년 갑오개혁은 조선왕조의 낡은 재판제도와 법률을 개정하려고 하였다. 6월 28일 법무행정을 담당하는 부서로 법무아문을 설치하였다. 갑오개혁은 7월 8일에는 “모든 죄인은 사법관이 재판 명정(明定)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죄벌을 줄 수 없게 하여”라는 원칙을 내세워 사법권의 독립 원칙을 천명하였다. 근대적 사법제도와 그에 걸맞는 판사·검사 등 법률 소양을 갖춘 사법관이 부족했으므로 사법 개혁은 곧바로 실시되기 어려웠다. 이어 1895년 4월 개칭된 법부는 사법사무를 전담하고 각급 재판소의 민사·형사 재판에 일정한 지령을 내리면서 근대적인 재판소 제도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당시 법부가 시행한 사법제도 개혁에 관한 제법령의 청의서를 모아놓은 자료가 《법부청의서(法部請議書 )》다. 1895년(고종 32) 4월부터 1896(건양 1) 9월까지 법부에서 내각회의에 제출한 청의서로 주로 법률개혁에 관한 안건에 대한 결재, 집행한 일에 대한 보고서철로 되어 있다. 문건 편철은 건별로 일련번호가 붙어있는데, 제1책은 1895년도분 56호(11월 15일까지), 이어 1896년에 제기된 47호(1월~4월)까지 수록되어 있고, 제2책에는 114호(1896년 4월 4일~9월 23일)가 실려 있다. 법부는 재판 운영에 관한 법률들이 제정하고 민사 및 형사에 관한 소송법이나 각종 처벌에 대한 규례 등을 논의하여 국왕에게 청의하는 문서들을 만들었다. 1895년 4월부터는 법률 1호 「재판소구성법(裁判所構成法)」을 정식으로 공포하여 사법권 독립을 제도화하였다. 이중 동학농민군과 관련된 재판에 관련된 안건으로는 법률 7호 <징역처단례>를 통해 유형을 그대로 두고, 도형을 징역으로 바뀌었다. 또 지방재판소에서 불복한 건을 고등재판소에서 수리하게 하면서 1895년 윤 5월 개항장과 22부 단위의 지방재판소를 설치하는 것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중에서 1896년 법률 2호로 공포된 <적도처단례>는 제8조 범죄에 따라 교형, 태형 후 역형(役刑), 역형, 태형 등으로 세분화하는 규정을 담고 있다. 제7조 ‘인가(人家)의 남녀를 약취(略取)하여 자취(自取)하거나 전매(轉賣)하여 고용(雇傭)을 작(作)하는 자(者)’등을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그동안 인신의 약취를 통하여 노비, 혹은 고공으로 삼는 관행을 일거에 근절시키는 처벌이 가능하도록 하여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법적 조치였다. 다음은 《한성부재판소이수록(漢城裁判所移囚錄)》이다. 1895년 5월 초부터 하순까지 한성재판소에서 각 기관이나 각군에서 죄수들을 이관해온 상황을 기록한 자료이다. 1895년 4월 15일자로 한성재판소가 설치됨에 따라, 이전까지 각도 감영(監營)이나 군부·경무청 등 기관에 수감 중인 죄수들을 한성재판소로 이관하게 되었다. 속표지에는 “개국 504년 5월 1일 시(始) 고등재판소 한성재판소 각영장계이송기(各營狀啓移送記) 이수록(移囚錄)”으로 되어 있어 당초에는 고등재판소로 이관한 죄수에 관한 사항도 포함하여 기재하려 했던 것 같다. 첫머리에는 서흥군의 첩보로 이송된 갈희천(葛希千)·고윤수(高允秀)가 1895년 4월 28일에 군부에서 이송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두 사람은 동도(東徒) 혐의로 붙잡힌 죄수였다. 이어 다음날 법부는 좌감옥서에 갇혀 있는 이들을 한성재판소로 이송하여 자세히 심판하도록 하였다(《기안(起案)》 1책). 동도 이중칠(李仲七)은 4월 28일 군부에서 이송하여 5월 1일자로 이송되었으며, 이사원, 정기철, 김학룡 등의 진술을 열거한 공초 등과 함께 옥에 갇혀 있는 이사원, 정기철, 김학룡, 원용성, 민성구, 이문복, 이흥옥, 윤완, 김충신 등을 한성재판소에 이송하도록 하였다[공이(公移) 28호 기안]. 이 자료는 군부, 경무청, 전국 각군에서 죄수를 이송한 기록을 담고 있으며, 죄수의 공초 유무와 이관된 일자를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다만 1895년 5월 한 달 동안 상황만 기록되어 있는 간단한 자료에 그쳤다. 다음은 개성부 재판소에서 기록한 《개성재판소형명부(開城裁判所刑名簿)》이다. 표지가 없어 편자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개성재판소 형명부’라고 인쇄된 용지에 내용을 기록하고, 첫 장 오른편 하단에 ‘대조선국 법부 문서과방’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어 개성재판소에서 법부에 재판 선고 사항을 보고한 문서로 보인다. 내용으로는 각 수인(囚人)별로 주소·신분·성명·나이를 기록하고 범죄 종류·형명 및 형기·선고년 월일·형기 만한·초범(初犯) 혹 재범(再犯)·집행경과 년월일·사고(事故) 등의 항목을 두어 정리하였다. 수인들의 죄목을 보면 구타치사(毆打致死)‚ 간범매합(姦犯媒合)‚ 무고관장(誣告官長)‚ 타인묘굴이(他人墓掘移)‚ 난민수종(亂民隨從)‚ 누설옥정(漏泄獄情) 등 다양하였다. 장단군 평민 신주경(申周景, 34세)에게 구타하여 죽인 죄로 ‘종신 징역’을 선고한 것(<선고 1호>)을 비롯하여 9호(7월 13일)까지 9건의 선고문이 편철되어 있다. 신계군 율탄방 반식리 삼미동에 사는 황문신(黃文信, 33세)은 ‘난민수종죄(亂民首從罪)로 수감되었다. 그는 대명률에 의하여 5품이상 장관을 상하게 한 자는 장 100, 유 2천리로 처하는 규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었지만, 법률 7호 <징역처단례>(1895.4.29. 반포)에 의해 감 1등, 태 100대, 징역 3년으로 선고받았다(1896년 6월 28일 선고). 이는 동학농민전쟁 이후에도 계속된 전국 각지 민란 가담자에 대한 처벌이 지속하고 있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음으로 《한성재판소형명부(漢城裁判所刑名簿)》는 한성부 재판소가 1896년 7월부터 1907년 12월까지 무려 11년 동안 각종 판결과 선고가 이루어진 죄수들의 형명부이다. 1895년 3월 25일 제정 공포된 <재판소구성법>에 의하여 근대적 재판기관으로 특별법원‚ 고등재판소‚ 순회재판소‚ 지방재판소‚ 한성재판소 및 개항장재판소 등이 출범하였다. 이어 법부령 제1호 <한성재판소 설치에 관한 건>(1895.4.15.)에 의하여 한성재판소가 설립되었으며, 초기에는 한성재판소의 독립적 사법 기구로 운영되었으나 이후 칙령 제5호 <한성부재판소 관제·규정>(1898.2.9.)로 개편되었다. 1897년 9월 12일자로 경기재판소가 설치되기까지 경기도 지역의 민사·형사 사건을 모두 한성재판소가 관할하여 판결 내용을 해당 군에 훈령으로 하달하였다. 이후에는 주로 한성 오서(五署) 내의 민사·형사 사건을 담당하였다. 형명부에는 판결선고 일자나 번호순으로 편철되어 있기도 하고, 선고된 형이 집행된 일자순으로 편철되기도 하였다. 또한 <한성재판소 민형사 기결·미결 성책>(1898.1.31.) 등도 첨부되어 있다. 1898년 제1호 선고문에는 한성부 어의동 평민 정기호(鄭基好, 53세)로 죄목은 비도(匪徒)의 수괴자로 운량관을 칭하여 쌀과 전을 약탈한 혐의로 대전회통 추단조(태 1백대, 징역 종신형)으로 처벌되었다는 사실이 실려있다(《형명부》규 20168, 1898년 2월 21일 선고). 또한 경기도 여주군 평민 김흥산(金興山, 25세)은 1896년 봄 여주군 비도 창궐시에 참여했다는‘작변관문수종’의 죄목으로 같은 처벌을 받았다(《형명부》규 21112, 1897년 4월 6일 선고). 또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에 추가로 잡혀온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들도 수형자로서 형명부에 수록되었다. 1900년 9월 형명부에는 충북 청주군에 거주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서장옥(徐章玉, 49세)이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술(術)로 우두머리가 된 자’라는 죄명으로 교형(絞刑)에 선고되었고, 이틀 후 이를 집행했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고 있다. 1895년 이후 한성재판소의 재판 수형 기록은 모두 83책으로 다년간에 걸쳐 많은 분량으로 남아 있어, 당시 민중들의 사회적 처지와 다양한 범죄 행위와 관련하여 범죄의 유형과 그에 대한 판결과 집행 결과를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형명부에 기록된 제반 사건과 인물에 대해서는 《사법품보(司法稟報)》와 《관보》에 실린 상세한 기록과 비교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갑오개혁 이후 대한제국기에 만들어진 각종 법률 관계 기록물 속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와 참여자에 대한 사법 재판과 처벌의 역사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왕현종 연세대 교수 왕현종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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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23 19:43

[전북 이슈+] "문 열긴 했는데"⋯5년도 못 버틴 전북 사장님들 폐업 속출

지난해 전국 폐업자 수가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선 가운데 같은 기간 전북 폐업자 수도 최근 5년(2020∼2024년) 중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국세청 국세통계포털(TASIS)에 따르면 지난해 전북 폐업자 수(법인·일반·간이·면세사업자)는 전년보다 100여 명 증가한 3만 1136명이다. 개인 사업자 중 매출 규모가 작은 간이 사업자는 1만 309명에 달했다. 이외 일반 사업자는 1만 4806명, 면세 사업자는 3592명, 법인 사업자는 2429명이다. 이중 소매업(8128명)이 가장 많고 서비스업(6302명), 음식업(5355명) 등 내수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업종에서 직격탄을 맞았다. 고금리·고물가에 따른 소비 위축에 사업 부진이 두드러지면서 영세 소상공인이 많은 업종부터 문을 닫은 것이다. 실제로 폐업자 절반(1만 4633명·47%)이 사업 부진으로 문을 닫았다고 답할 정도다. 사업존속연수를 따지지 않고 많은 사업자가 폐업을 결정했다. 문 연 지 6개월(4282명) 만에 폐업하는 경우도 많았다. 6개월 이상은 3148명, 1년 이상은 5193명, 2년 이상은 3647명, 3년 이상은 5003명, 5년 이상은 5657명, 10년 이상은 2854명, 20년 이상은 1352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강락현 전북소상공인연합회장은 "전북은 자금난, 매출 부진, 고금리 등 복합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금융 지원, 소상공인 온라인화 지원, 폐업 정리 지원 등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근본적인 소비 회복과 경기 활성화가 미비한 상태다 보니 즉각적인 회복에는 어려움이 있는 게 현실이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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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우
  • 2025.07.19 11:37

"돈 벌려고 시작했지만"⋯사장님의 같은 마음 다른 시간

"오늘은 손님이 많이 와야 할 텐데." 장사하는 사장님의 바람은 모두 똑같다. 돈 벌려고 뛰어든 자영업 세계는 생각한 것보다 더 어렵고, 더 막막하고, 더 힘든 일이었다. 같은 마음으로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두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20년 차 한상현 사장님 간판부터 정이 느껴지는 전주 노포 '행복한 식탁' 사장님 한상현(72) 씨는 20년 동안 한 자리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이전에 양복집 사장님이었던 한 씨는 기성복이 많아지면서 장사를 접고 음식점을 열었다.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현실은 쉽지 않았다. 한 씨는 "전에는 종업원도 두고 운영했었다. 지금은 경기가 힘드니까 인건비마저 만만치 않아서 아내와 나, 70대 노부부가 몸 힘들어도 영업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초보 사장님들에게 조언해 달라는 질문에 그는 "계속 장사를 해라, 하지 마라 할 수 없다"면서 "지금은 가게 문을 많이 닫는 시대다. 힘들어도 계속하라고 못 하겠다. 본인이 알아서 잘 판단해야 한다. 어려운 사람의 심정은 어려운 사람이 잘 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말할 수 없다"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1개월 차 임기만 사장님 매일 직접 두들겨 만든 수제가스, 완산동까스. 10년 차 배관공 임기만(54) 씨는 최근 전주시 덕진구 금암동에 작은 음식점을 열었다. 가게 문 연 지 한 달밖에 안 된 초보 사장이다. 임 씨가 직전에 했던 일은 배관공이었다. 문제는 몸을 쓰는 일이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와 병만 남기 시작했다. '현실을 직시하고 성실하게 살자!'는 결심으로 시작한 일마저 접고 앞치마를 매기로 한 이유다. 그는 "정년 없이 오래 일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돈가스 가게를 차렸다. 장사는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 할 수밖에 없어서 하고 있다. 직장을 잃고 취업이 어려운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자영업뿐이다"고 이야기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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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우외(1)
  • 2025.07.19 11:36

전북자치도 소상공인 지원 '확대'⋯진짜 필요한 지원책은?

△전북, 소상공인 지원 '총력' 전북특별자치도는 지난 2월 경기 침체와 금리 인상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상공인을 위해 창업 지원부터 특례보증, 온라인 판로 확대, 폐업 정리 지원까지 총 17개 사업에 1789억 원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지난 5월 말 기준으로는 18개 사업 2161억 원을 지원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크게 △자금 지원(4개 사업·455억 원) △경쟁력 강화(6개 사업·19억 원) △경영여건개선(5개 사업·1681억 원) △보육성장지원(3개 사업·6억 2000만 원) 등 4개 분야다. 2월과 비교해 소상공인 회생 보듬자금 금융지원 특례 보증(224억 원→308억 원), 광역 소공인 특화지원센터 운영(6억 원→7억 원), 소상공인공제(노란우산) 가입 지원(8억 원→12억 원), 지역사랑상품권 발행 지원(1303억 6200만 원→1587억 원) 등 일부 지원사업의 규모가 확대됐다. 이중 결혼 7년 이내 임신·난임 치료 중인 소상공인을 위한 소상공인 육아안정 금융지원 특례보증, 도내 1인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한 사회보험 고용·산재 보험료를 지원하는 1인 자영업자 사회 보험료 지원 등이 신규 사업으로 추진됐다. 김인태 도 기업유치지원실장은 "소상공인은 지역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이다. 이들의 경영 안정을 돕는 것이 곧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진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금융 지원과 창업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진짜 '소상공인'이 원하는 지원은? 정부와 전국 지방자치단체는 매년 소상공인 경영 안정을 위한 지원사업을 추진하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 실정이다. 지원사업 규모를 키워봐도 소상공인 폐업률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현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상공인이 원하는 지원사업이 무엇일지 들어봤다.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재정 지원'이다. 한상현 행복한식탁 대표는 "사실 나도 그렇지만 모든 소상공인 힘들고 나라도 어렵다. 지원이 쉽지 않을 테지만 (하나를 꼽자면)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나이가 있다 보니 돈이 필요해도 대출 받기가 겁난다. 갚기도 쉽지 않은 데다 갚을 생각하니 걱정만 늘고 무서워서 아예 생각을 안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상공인의 입장은 어떨까. 임기만 완산동까스 대표는 "대부분 서민은 자금 여유가 없다. 경기가 어려워져서 손님이 끊기게 되는 등 (경영이 어려워지면) 그 시기를 버틸 수 있는 자금이 있어야 한다. 대출 규제 완화 등은 꼭 필요하다. 서민 장사꾼이 버틸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북에서 가장 많은 소상공인의 목소리를 듣는 강락현 전북소상공인연합회장도 목소리를 냈다. 강 회장은 "현재 정부와 지자체에서 시행하는 소상공인 정책 등이 적기에 실시돼야 한다. 특히 지원 사각지대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적으로는 세제 및 임대료 지원 등이 추가 또는 한시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면서 "7월 전 국민 민생회복 소비쿠폰 사용에 있어서도 자금 본연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전국민의 협조를 호소드린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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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우
  • 2025.07.19 11:36

[우리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 추사 금석문

1815년 가을, 전주 한벽당에서 시회가 열렸다.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과 전주의 선비들, 그리고 초의선사가 이 시회에 참여했다. 초의는 승려신분이었지만 강진에 유배 와있던 다산 정약용에게 유학과 시문을 배워 시에 능했다. 이 시회에 참석한 전주의 선비 중에 김기종(金箕鍾, 1783〜1850)이 있었다. 김기종과 초의선사는 이 시회에서 처음 만났다. 그렇지만 이 만남이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져 오늘날 우리 고장이 추사 금석문의 보고로 자리매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효에는 유자와 불자가 따로 없다 김기종의 가문은 효자집안으로 유명했다. 부친 김복규는 효심이 지극하여 순조 23년(1823)에 효자정려가 내려졌다. 김기종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효자였다. 이렇게 효심이 강한 김기종이 한 인물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했다. 그 인물은 진묵(震默, 1562~1633)이라는 승려였다. 진묵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의 승려로 민초들의 아픈 삶을 보듬어 생불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출가한 승려신분이었지만 자신이 거처하던 아랫마을에 어머니를 모셔두고 정성을 다해 봉양했다. 외아들로 출가해서 대를 이을 후손이 없어 자신의 제사를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천년 동안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모친이 타계하자 손수 제문을 지어 애끊는 정을 표현하고, 유양산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에 장사지냈다. 이곳에서 향을 밝히면 풍년이 들고 가정이 평온해진다는 소문이 돌면서 참배객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도 진묵의 어머니 묘 앞에는 향불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진묵대사의 효성에 감동한 김기종은 그의 일대기를 책으로 펴내기로 결심했다. 당시 민초들 사이에서는 진묵의 수많은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이러한 설화들을 수집해 한벽당 시회에서 만났던 초의에게 집필을 부탁했다. 초의는 진묵의 행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대사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한사코 거절하다 결국 불가에서 출가한 후 부모자식 간에 인연을 끊는 세태의 잘못을 알려주기 위해 진묵의 소전을 쓰기로 했다. 초의는 초고의 집필을 마치고 제주도에 유배 가있는 절친인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에게 보내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다. 추사는 원고를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왔다. 진묵대사의 행록은 바로 남아있는 옛사람의 은혜와 향기로운 흔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마디마디가 다 향이어서 오직 이것만으로 진묵대사의 행록을 다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겨자씨가 수미산을 받아들인다고 했으니 진묵대사도 기껍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전후의 기서(記敍)는 매우 좋아서 다시 정정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이렇게 김기종과 초의선사, 김정희로 이어지는 인연의 고리가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초의가 쓴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는 김기종 생전에 발간되지 못했다. 사후 7년이 흐른 1857년(철종 8)이 되어서야 완주의 봉서사에서 간행되었다. 봉서사는 진묵이 일곱 살 때 출가했던 절이자 만년을 보낸 곳으로 이곳에는 진묵의 영당과 부도가 남아있다. △김복규 김기종 정려각 1850년 김기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853년(철종 4)에 효자정려가 내려졌다. 부자지간에 효자정려를 하사받은 가문의 경사를 맞아 1855년 김기종의 장남 영곤이 추사를 방문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추사에게 비문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유배와 2년간의 북청 유배를 끝내고 부친의 묘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고 있었다. 영곤은 정려비를 세울 커다란 빗돌을 마련해 두고 여기에 맞추어 가지고 온 한지를 추사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추사는 정려비는 크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며 한지를 작게 잘라 비문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때 추사는 비각에 걸 수 있도록 현판의 글씨도 함께 써주었다. 효행의 덕으로 경사스러움이 넘치는 집이라는 ‘효덕연경지각(孝德衍慶之閣)’과 2세에 걸친 효자각이라는 ‘양세정효각(兩世旌孝閣)’이다, 이외에도 추사는 편액 글씨 한 점과 비문 한 점을 더 써주었다. 편액은 ‘귀로재(歸老齋)’라는 힘이 넘치면서도 조형미가 뛰어난 현판 글씨이다. 귀로재는 임실 관촌에 있는 김기종의 재실이다. 그리고 김기종의 부인 전주 유씨의 묘비 또한 이때 글씨를 미리 받아 놓았다가 사후에 세웠다. 귀로재 현판 탁본. 전라금석문연구회 제공 △추사가 써준 묘비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에 정부인 광산 김씨의 묘비가 있다. 전면의 비문은 추사가 예서체로, 후면은 창암이 해서로 썼다. 1833년에 건립된 이 비는 전면과 후면을 당대 최고의 명필들이 나누어 썼다는 점에서 아주 보기 드문 비석이다. 이 가문은 김기종가와 마찬가지로 효자 집안이었다. 광산 김씨의 장남 최성철과 차남 성전, 그리고 손자인 한중까지 효자정려를 받았다. 추사와 창암이 전면과 후면을 나눠 쓴 또 다른 묘비가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에 있다. 동지중추부사 김양성과 정부인 수원 백씨의 묘비이다. 그리고 2019년 임실군 신덕면 수천리에서 추사가 쓴 또 한 기의 묘비가 발견되었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최성간과 정부인 김해 김씨의 묘비이다. 최성간은 정부인 광산 김씨의 셋째 아들이다. 이 세 기의 비석 주인공들은 모두 김기종가와 인척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비문들은 김기종의 알선으로 추사가 썼을 가능성이 높다. △추사체의 백미 백파선사비 고창 선운사 입구 부도전에 백파선사비가 서있다. 우리 고장에 남아있는 또 다른 추사의 금석문이다. 1858년(철종 9)에 세운 이 비의 비문은 김정희가 타계하기 1년 전에 짓고 썼다. 백파(白坡, 1767∼1852)는 법명이 긍선(亘璇)으로 18세 때 선운사로 출가해 순창 구암사에 주석했던 대강백이자 선승이었다. 그는 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저술했다. 이 책은 초의선사와 선에 대한 논쟁을 촉발했다. 이때 김정희는 초의의 편을 들어 백파의 저서에 반박하는 서신을 수없이 보내며 선논쟁에 가세했다. 그러다가 추사보다 열아홉 살 연상인 백파가 1852년에 입적했다. 백파의 제자들이 3년 후 추사를 방문해서 스승의 비문을 청하자 추사는 기꺼운 마음으로 비문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 비문의 전면에는 해서체의 힘찬 필치로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라 쓰고, 뒷면은 백파의 삶을 기리는 글을 행서로 썼다. 이 행서는 ‘울림이 강하고 변화가 많은 추사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추사 말년의 최고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적었다. 추사체의 백미로 평가받는 백파선사비까지 전북특별자치도에는 7점의 추사 금석문이 자리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추사 금석문은 전국적으로 20여 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우리 전북이 가히 추사 금석문의 보고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 고장에서 발견된 추사 금석문의 대부분은 전라금석문연구회에서 발로 뛴 노력의 결실이다. 연구회의 노고에 격려와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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