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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군 민선 8기 3년의 도전과 변화...“장수의 새 역사를 쓴다”

장수(長水)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무엇을 먼저 떠올릴까? ‘오래 산다’는 장수(長壽)의 의미일까, 아니면 고품질 사과와 한우 등 레드푸드로 이름난 농산물의 고장일까. 인구 2만 500명의 작고 조용한 농촌으로만 인식됐던 장수군이 지난 4월, 한국기업평판연구소에서 발표한 국내 기초지자체 브랜드평판에서 전국 80여 개 군 지역 중 4위, 전북특별자치도 14개 시·군 중 전주시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기적 같은 도약’을 이뤄냈다. 민선 8기가 출범한 지 3년. 장수군은 행정 혁신과 끊임없는 도전, 지역 맞춤형 정책 추진을 통해 뚜렷한 변화를 만들어 왔다. ‘새롭게 도약하는 행복 장수’라는 비전 아래, 군민과의 소통을 최우선으로 삼으며 장수군의 새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지난 3년간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명소가 된 장수군의 경제·문화·관광 분야의 혁신적 변화를 하나씩 짚어본다. △장수만의 독특한 매력을 알리며 이제는 한 번쯤 가고 싶은 ‘명소’로 과거 장수군은 관광지로서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장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민선 8기의 시작과 함께 장수는 한 걸음씩 ‘여행의 목적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천국’이라 불리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장수누리파크’를 대표 관광지로 육성하고 청정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과 그 일대의 뜬봉샘 생태공원은 국가생태관광지로 지정됐다. 또 전국 8대 명산 중의 하나인 장안산의 억새 숲은 넓게 조성했다. 여기에 ‘장수트레일레이스’ 성공적 개최는 장수를 관광지로 주목받게 만드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됐다. 장수군에 ‘한국의 샤모니’라는 별칭을 안겨주며 장수를 산악 스포츠의 성지로 부상시켰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인간의 도전 정신이 어우러진 이 레이스는 장수를 ‘보고, 뛰고, 느끼는 곳’으로 새롭게 정의했다. 수치 또한 이러한 흐름을 증명한다. 2021년 24만 명이던 연간 관광객 수가 2024년 84만 명으로 3배 가까이 대폭 증가했다. 특히 트레일레이스는 인근 지역민보다 수도권 참가자 비율이 약 90%를 차지해 전국적인 인지도가 상승했음을 방증한다. 이제 장수는 100만 관광객 시대를 향해, 또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을 넘어 ‘자주 찾고 싶은 곳’으로 성큼 나아가고 있다. △과감한 행정 혁신과 성과로 증명한 변화 장수군의 변화는 관광 인프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변화와 도전을 겁내지 않고 장수군의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현실화하고자 행정 시스템 전반에도 과감한 혁신이 이루어졌다. 성과와 역량 중심의 투명한 인사 시스템 도입은 조직문화에 새바람을 일으켰고, 그 결과 지난해 전국 군단위 적극행정 평가 1위(최우수)를 기록해 국무총리 기관 표창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또한 올해 3년 연속 ‘적극행정 및 혁신 우수 지자체’로 선정되며 체계적이고 일관된 개선 노력을 이어오고 있음을 증명했다. 장수의 대표 레드푸드인 사과‧한우‧오미자‧토마토를 중심으로 조성된 ‘장수 만남의 광장’은 지역의 특성을 살려 행정안전부의 인구감소 대응 우수사례로도 인정받았다. 이처럼 행정의 뿌리부터 차근차근 바꾸려는 노력은 장수군 전반의 변화를 견인하는 든든한 추진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기후위기 시대, 지속가능한 농업 실현 지구온난화는 농업에도 예외 없는 위기를 안겼다. 재난 재해에 특히 취약하고 가격 변동성이 큰 농업의 특성상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받기 어렵다는 점에서 농업은 불확실한 산업으로 여겨지고 있다. 장수군은 이러한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스마트 과원, 저탄소 한우, 스마트팜 등 미래형 농업 기술을 적극 도입해 기후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지속 가능한 농업의 기반을 다져가고 있다. 나아가 농산물 가격안정 기금도 조성해 농가들이 불안정한 시장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오롯이 영농에만 집중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했다. 농업의 미래는 불투명할 수 있지만 장수군의 방향은 명확하다. 장수는 환경과 경제가 공존하는 농생명 도시로서의 비전을 실현하고자 그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는 곳’을 넘어 ‘살고 싶은 곳’으로 사람들이 ‘살고 싶다’고 말하는 지역에는 이유가 있다. 장수군은 최근 그 이유를 만들어 가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전북 최초로 유치한 ‘전북형 반할주택 100호’는 주거비 부담을 대폭 줄여주며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예정이다. 이뿐 아니라 ‘청년농촌보금자리 30호’, ‘농촌체류형복합단지 20호’ 등 사업도 공모에 선정돼 청년들의 귀촌과 정착을 유도하고 있다. ‘장수에 체류시설이 부족하다’는 말이 옛말이 되는 날도 머지않았다. 또 군은 생활 속 복지도 놓치지 않았다. 군민이 새로운 레저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번암, 장계를 시작으로 파크골프장을 조성하고 읍·면 소재지 중심으로 LPG 배관망을 구축해 난방비용을 대폭 줄이고 에너지 복지를 실현하는 등 생활밀착형 SOC를 확충했다. 또한 올해부터는 농촌협약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읍‧면 중심의 정주여건 개선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장수를 ‘산간 오지’라는 과거의 이미지에서 ‘모두가 찾는 건강한 삶의 터전’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길이 닫혔던 땅, 이제는 남부권의 교통 중심지로 장수는 전체 면적의 75%가 산지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산악지역이다. 한때는 그 지형이 장수의 한계로 귀결돼 타지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러나 교통지도가 바뀌면서 지리적 한계가 경쟁력으로 전환되고 있다. 현재 대전-통영 고속도로와 익산-장수 고속도로 2개가 교차하는 이곳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잇는 남부권 교통의 요충지로 탈바꿈하게 됐다. 여기에 천천하이패스IC가 2026년도에 개통을 앞두고 있고, 전주시‧진안군과 연결되는 국도 26호선도 ‘제6차 국도·국지도 건설계획안’에 반영돼 현재 예비타당성 심사에 있다. 그리고 광주-대구를 잇는 달빛철도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급물살을 타고 있어 장수는 교통망 중심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고 있다. ‘장수’는 이제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사람들이 찾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로서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가 열리는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인터뷰] 최훈식 장수군수 “매사 행정 수요자인 군민의 눈높이에서 변화와 혁신을 추진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오로지 군민만을 바라보고 숨 가쁘게 달려온 최훈식 장수군수의 혁신적인 리더십이 장수군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배경이다. 최 군수는 “장수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 저의 특별한 목표입니다. 장수군수 당선 당시 군민들과 처음 가졌던 약속과 다짐을 가슴에 되새기며 ‘군민 모두가 행복한 장수’를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며 “특히 저는 농업이 미래의 ‘블루오션’이고 기후 위기 시대에 ‘장수는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수의 지리적, 기후적 강점을 살려 산악관광과 농업을 통해 지속 가능한 장수를 만들고 싶습니다”고 포부를 밝혔다. 최훈식 군수에게 지난 3년의 성과는 끝이 아닌 시작이다. 지금까지 기반을 다지는 시기였다면 이제는 그 위에 탄탄한 미래를 설계해 농생명‧국제산악관광도시라는 새로운 비전을 향해 쉼 없이 전진할 계획이다. 두발자전거는 쉼 없이 굴려야 넘어지지 않듯이.

  • 기획
  • 이재진
  • 2025.05.13 18:27

[작지만 강한 우리마을] ④부안 석동마을, 배우던 마을에서 가르치는 마을로

사람이 떠나고 마을이 사라지는 시대. 전북 부안의 석동마을은 사라지기보다 '살아남는' 길을 개척했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나서 가꾼 경관과 역사, 그리고 공동체의 힘으로 이곳은 이제 전국에서 벤치마킹을 위해 찾는 모델 마을로 거듭났다. 돈보다 마음, 개발보다 복원, 외부의 손길보다 주민 스스로의 울력으로 완성된 석동마을의 변화는 지방소멸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에 위치한 석동마을은 현재 38가구 70여 명이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다. 부안읍과 석동산 사이에 자리잡아 지리적으로 읍내와 가깝고, 자영업 종사자와 직장인 비율도 높아 농촌 마을 중에서는 비교적 젊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다. 이 같은 특성은 다양한 마을 사업 추진의 원동력이자 기반이 되었다. △석동산의 변신, 주민 손으로 다시 태어난 공간 석동산은 과거 부안 주민들의 소풍지이자 부안읍의 남산이라 불릴 만큼 정서적 중심지였다. 그러나 몇 년 전만 해도 대나무 숲이 무성해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를 풍겼고,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워 불법 폐기물이 무단 투기되던 장소였다. 마을 사람들조차 산책 대신 큰길을 이용할 만큼 외면받던 공간이었다. 변화는 2018년 경로당이 새로 문을 열면서 시작됐다. 마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마을회관에 모이게 되었고, 마을의 방향성을 두고 의견을 모으는 현장 포럼이 이어졌다. 주민들은 “이대로 두어선 안 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고 마을 만들기 사업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2019년 전북도가 추진한 '전북 테마가 있는 자연마을 조성사업'에 선정되며 본격적인 변화의 물꼬가 터질 수 있었다. 5억 원 규모의 예산을 바탕으로 석동산 입구에는 체련공원이 들어섰고, 무성하던 대나무 숲은 걷기 좋은 산책로와 꽃잔디 길로 탈바꿈했다. 공중화장실과 주차장이 설치되면서 외부 방문객의 편의도 고려했다. 주민들이 손수 관리하는 꽃길은 사계절 다른 색으로 물들며 석동마을의 이미지를 바꾸고 있다. △작은 마을의 반전, 이제는 본보기가 되다 특히 마을의 역사성과 문화자원을 되살리는 사업도 함께 진행됐다. 마을에 있는 9곳의 재실에 각각의 유래를 설명하는 간판을 설치했고, 과거 최광지 홍패를 기념하는 시설물도 세웠다. 국내 최초의 서원인 도동서원이 있던 자리는 전라유학진흥원이 2025년 완공을 목표로 건립 중이며 마을은 이에 발맞춰 유학을 테마로 한 장원급제길 포토존을 조성했다. 지난해 11월 수능 시즌에는 이 포토존이 방송에 소개되며 주목받기도 했다. 이 같은 마을 사업의 중심에는 양종천 이장이 있다. 7년 전 마을 이장을 맡은 그는 부안읍에서 화원을 운영하던 경험을 살려 경관 정비와 사업 추진에 앞장섰다. 주민들은 “양 이장이 오고 나서 마을이 천지개벽했다”고 평가한다. 양 이장은 전국 각지의 마을을 찾아다니며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했다. 특히 잡초가 번성하는 여름철에 마을을 방문해 관리 상태를 확인하며 실질적인 정보를 얻어왔다. 그가 추구하는 마을사업의 핵심은 ‘돈보다 울력’이었다. 실제 석동마을의 사업은 주민 스스로 손발을 보태며 진행됐다. 잡초 제거부터 크고 작은 공사까지 힘든 작업이 이어졌지만 이 과정에서 주민들 간 신뢰와 자긍심이 커졌다는 게 주민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6차 산업과 교육 플랫폼, 마을의 미래를 설계하다 현재 석동마을은 단순한 조경을 넘어서 6차 산업화를 목표로 나아가고 있다. 6차 산업은 농업(1차 산업)에 제조·가공(2차 산업)과 유통·관광·체험(3차 산업)을 융합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이다. 단순히 농산물을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가공해 상품화하고 나아가 체험 프로그램이나 관광 콘텐츠로 연결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인구가 줄고 산업 기반이 약한 농촌 지역에서 6차 산업은 지역 자원을 활용해 자립적 경제 구조를 만드는 핵심 전략으로 평가된다. 생산만 하는 마을에서 '콘텐츠를 파는 마을'로 나아가는 변화의 길이기도 하다. 양 이장은 "이제 농촌도 경쟁력 있는 산업군이 되어야 하고, 그 첫걸음은 각 마을의 자원을 활용해 스스로 수익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며 "석동마을이 그 모델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 일환으로 마을 내 재실 한 곳은 도자기 체험장으로 전환할 계획이고 또 다른 재실은 양식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임대를 추진 중이다. 이를 통해 수익모델을 차근차근 실현해 나가 최종적으로 마을이 돈을 벌어 주민에게 연금을 주는 전북 최초 '연금마을'로 발전하는 것이 목표다. 석동마을은 이 같은 미래 비전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충청과 경상권 등 전국의 다양한 지역에서 주민들이 석동마을을 찾고 있으며 올해에도 충청권의 두 마을이 이곳을 방문해 마을활성화 방안을 배우고 돌아갔다. 마을의 정비뿐 아니라, 사업 추진 과정에서의 주민 결속력, 예산 집행의 투명성, 사업 내용의 지속성 등에서 석동마을이 보여주는 성과는 전국의 농촌 마을에 실질적인 배움의 자원이 되고 있다. 양 이장은 앞으로 석동마을이 가진 경험과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전국의 다른 마을들과 공유할 수 있는 '교육·교류 센터' 건립을 구상 중이다. 그는 “우리 마을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전국 모든 마을이 함께 살아날 수 있도록 서로 배우고 나눌 수 있는 공간이 꼭 필요하다”며 “석동마을이 그 중심이 되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마을이 단순한 경관 명소가 아니라, 전통과 철학, 공동체 가치까지 함께 배울 수 있는 교육 플랫폼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기획
  • 이준서
  • 2025.05.11 16:56

[나는] 전북현대 입과 귀, 통역사 김민서·표석환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도, 길 다니며 스쳐 지나간 사람도, 모두 저마다의 삶이 있다. 우리가 매일 보는 기사 속 공직자, 정치인의 일상은 다 알면서 정작 이웃의 삶을 본 적은 많지 않다. 그래서 준비했다. 평소 접하는 사람이 아닌 스포트라이트가 닿지 않는, 소중한 우리의 이웃,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기획을 준비했다. 오늘 만나볼 이웃은 전북현대모터스FC의 통역사 김민서·표석환이다. 이들은 외국인 감독·선수·스태프의 입과 귀 역할을 해내고 있다. 매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감독·선수에서 한발짝 뒤에 서서 그들의 말부터 감정, 심지어 몸짓까지 통역하는 '숨은 보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매일 출근하는 길이 행복해요." 직업 만족도 상(上), 상 중에서도 최상. 2023년 일자리 만족도는 35.15%뿐이지만 2000년생 전북현대 통역사 김민서(24) 씨의 만족도는 100%다. 보통 출근길은 천근만근이지만 김 씨는 항상 행복하다. 지난 8일 전북현대모터스축구단전용클럽하우스에서 만난 김 씨는 한국 축구계에서 통역을 시작할 때 K리그에 대해서 알아보는 과정에서 전북현대를 보고 '아, 저기다!'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언젠가 전북현대 통역을 해 보고 싶었다는 게 김 씨의 설명이다. 꿈을 이룬 셈이다. 전북현대에 따르면 현재 그는 포르투갈어 통역으로 브라질 선수 위주로 전담하고 있다. 영어도 가능하다 보니 코칭 스태프의 내용 전달과 감독의 지시 사항을 선수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이다. 특히 경기 때 데칼코마니처럼 거스 포옛 감독의 몸짓까지 완벽하게 재현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김 씨는 "의식한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감독님의 목소리 톤이나 제스처를 보면서 나오는 것 같다"면서 "나쁜 이야기를 해도 모두 전달한다. 조절하려고도 해 보지만 그때마다 똑같이 감정이 올라와서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 지난해 말 포옛 감독의 취임 기자회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그는 긴장을 많이 하면서 중간에 통역이 추가 투입되는 헤프닝을 겪기도 했다. 앞에 많은 사람이 있는 걸 보니 머릿속이 하얘졌던 김 씨다. 그는 통역하면서 크게 어려운 점은 없지만 이날이 어려웠다고 꼽았다. 김 씨는 "전북현대 팬 분들은 경기장 들어갈 때마다 놀라게 만든다. 응원가를 부를 때 제 목소리도 안 들리지만 팬들 목소리가 들리니까 힘이 난다. 선수·감독님 모두 마찬가지일 것 같다. 올해 우승하면 제일 좋겠지만 (비록) 우승이 아니더라도 좋은 모습 보여 줄 테니 끝까지 응원해 주시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매일 인터뷰 도와 주기만 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인터뷰를 결심한 이유다. 뒤에서 감독·선수의 인터뷰 통역만 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1998년생 전북현대 통역사 표석환(27) 씨는 "인터뷰 도와 주기만 하다가 인터뷰를 하려니 조금 어색하다"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북현대에 따르면 영어 통역을 하는 그는 선수 중 콤파뇨·보아텡, 대외 업무(미디어 대응) 등을 맡고 있다. 감독 인터뷰, 경기 전 미팅, 라커룸 토크 등을 통역하는 역할이다. 김 씨가 감독의 몸짓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면 표 씨는 팬들 사이에서 래퍼 아웃사이더처럼 빠른 속도로 통역한다고 알려져 있다.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요. 사실 인터뷰 하면 꼭 수첩과 펜을 들고 다니는데 그날 펜이 안 나오더라고요. 펜 자국이라도 좋으니 빨리 안 쓰고, 통역하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았어요. 저도 하면서 빠르다 싶긴 했죠." 놀랍게도 표 씨는 충청도 사람이다. 그는 "팬 분들이 말하는 빠른 인터뷰는 2025 하나은행 코리아컵 3라운드 안산 그리너스전인 듯하다. 원래 말을 천천히 한다. 사실 충청도 사람인데 감독님의 말이 빠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빨라지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직접 필드에서 뛰는 건 아니지만 표 씨의 마음은 감독·선수와 같다. 팀의 성적이 좋지 않으면 안 좋고 지금처럼 성적이 좋으면 보람 차고 기쁘다는 게 표 씨의 말이다. 오직 '우승', 그것 하나 목표로 삼고 마음속으로 함께 뛰고 있다. 이어 "홈이든 원정이든 많은 분이 경기장을 와 주셔서 항상 감사하다. 시즌을 하다 보면 분명히 또 어려운 시기가 있을 테지만 감독님도, 선수들도, 코칭·지원 스태프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믿어 주시고, 열심히 응원해 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 기획
  • 박현우
  • 2025.05.10 09:20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4) 경각영공급기, 소지등서책, 민장초개책

△경각영공급기(京各營供給記) 〈경각영공급기(京各營供給記)〉는 1894년 10월~11월 동학농민군 토벌에 참여한 경리영(經理營), 순무영(巡撫營), 장위영(壯衛營), 선봉진(先鋒陣) 등 각 부대에 공급한 물자들을 기록해 놓은 자료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5×26cm이며 전체 15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자료는 〈친군경리청장졸성책(親軍經理廳將卒成冊)〉, 〈선봉진대장진배행장관좌목(先鋒大將陣陪行將官座目)〉, 〈친군장위영장졸실수성책(親軍壯衛營將卒實數成冊)〉, 〈교도소출주장병성책(敎導所出駐將兵成冊)〉, 〈본진별군관차출기(本陣別軍官差出記)〉, 〈창의인명록(倡義人名錄)〉, 〈물금첩기(勿禁帖記)〉, 〈죄인록(罪人錄)〉 등과 함께 〈각진장졸성책(各陣將卒成冊)〉으로 합본되어 1996년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에 실렸다. 이 중 〈경각영공급기(京各營供給記)〉는 경리영, 순무영, 장위영, 선봉진 등 동학농민군 토벌에 직접 가담한 각 부대의 비용명세서를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경각영공급기(京各營供給記)〉에 따르면 갑오년, 즉 1894년 10월 16일 전(錢) 100냥을 일본영사관 종사관 김주사(金主事)에게 지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일 기록에는 일본군 출진 시 들어간 비용과 호궤(犒饋), 일본 사관 접대비, 이인 전투 출병 중앙군과 일본군에게 50냥을 지급하고, 능치 전투 당시 30냥을 지급한 사실 등 동학농민군 진압 부대의 비용 지출 내역 등이 들어 있다. 이날 지불한 총 비용은 1,267냥 6전 4푼이었다. 10월 21일부터 11월 7일까지는 경리영(經理營) 799명에게 3,487냥 6전 5푼을, 10월 25일부터 11월 7일까지 순무영(巡撫營)에 325냥 5전을, 통위영에 776냥 3전 8푼을 지급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10월 28일 하루 장위영(壯衛營)에 1,766냥 3전을, 10월 20일부터 27일까지 선봉진(先鋒陣)에 59냥 2전 5푼, 도합 7,682냥 7전 2푼을 지급하였다. 전반적으로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선 조선의 중앙군, 즉 경리영(經理營), 순무영(巡撫營), 장위영(壯衛營), 선봉진(先鋒陣)에서 사용한 비용을 알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 소지등서책(所志謄書冊) 〈소지등서책(所志謄書冊)〉은 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 과정에서 1894년 11월부터 1895년 1월에 이르기까지 민인(民人)의 소지(所志) 등을 모아 등서한 자료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0×32cm이며 전체 64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자료는〈언문선유방문(諺文宣諭榜文)〉, 〈고시경군여영병이교시민(告示京軍與營兵以敎示民)〉, 〈공주창의소의병장이유상상서(公州倡義所義兵將李裕尙上書)〉, 〈충청도공주정안면봉엄화촌대소민등정(忠淸道公州正安面鳳嚴花村大小民等呈)〉, 〈전봉준상서(全琫準上書)〉,〈동학당공초(東學黨 供招)〉 등과 함께 〈선유방문병동도상서소지등서(宣諭榜文並東徒上書所志謄書)〉로 합본되어 1996년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에 실렸다. 이 중 〈고시 경군여영병이교시민(告示 京軍與營兵以敎示民)〉은 전봉준이 동도창의소 명의로 공주전투에서 노성으로 후퇴한 뒤 관군과 이교(吏校), 그리고 시민(市民), 즉 시장의 상인들에게 척왜척양(斥倭斥洋) 전선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한 글이다. 〈소지등서책(所志謄書冊)〉이 작성된 시기는 1894년 11월부터 1895년 1월까지이며 그 대상지역은 충청도 및 전라도 지역이다. 월일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1894년 11월 16일 충청도 공주 산하면 두민(頭民)이 수상한 자 10명을 기찰 체포하여 선봉진에 압송한 내용부터 시작한다. 제2차 봉기 이후 패퇴한 동학농민군들을 전국 각지에서 토벌하는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12월 3일에는 동학농민군으로 추정되는 도인(道人) 수백 명이 전라도 장성군 북이면 금량리 마을에 난입하여 음식과 돈을 탈취하였다. 장성에서는 4월 황룡촌 전투에서 전사한 대관(隊官) 이학승(李學承)과 병정들의 시신을 김중길(金仲吉)이 묻어주었다가 동학농민군에게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장성의 아전 박전성(朴銓誠)도 500냥의 돈을 출연하여 황룡촌 전투에서 전사한 병정들의 초상을 치르는 데 보태기도 하였다. 한편 장성 북이면 백암구리에서는 접주(接主)라고 일컫는 유동근(劉東根)을 두고 그곳의 유생들이 오로지 동도의 폐단을 막고자 노력하였으나 선처해 달라는 소지(所志)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소지등서책(所志謄書冊)〉에는 동학농민군을 소탕할 때 옥석(玉石)을 분간해 달라는 소지(所志)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물론 장성 북하면의 동학 대접주인 손덕수(孫德秀)와 만화동의 접주 신재일(申在一)을 체포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소지(所志)도 있다. 그밖에 민인(民人)이 동학농민군의 강요로 양곡을 주고 담배 등 물자를 공급해 주고 강제로 인원이 동원된 사연을 적고 처벌을 완화해달라는 호소가 실려 있다. 또 마을 사람들이 동도를 잡아 바치면서 그 포상을 요구하는 내용도 있다. 한 건마다 끝에는 조치를 내린 제사(題辭)가 기록되어 있다. 이 〈소지등서책(所志謄書冊)〉은 단편적이기는 하나 당시 향촌의 여러 사정과 동학농민군 토벌상, 그리고 관군의 조치를 잘 알려준다. 따라서 이와 관련 기록이 희귀한 처지에서 아주 소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 민장초개책(民狀草槩冊) 〈민장초개책(民狀草槩冊)〉은 1894년 8월 전라도 보성군에서 작성한 것으로 각 면별로 백성들이 올린 소장(訴狀)과 그 처리 결과를 정리한 자료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0×33cm이며 전체 60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자료에는 보성군 용문면, 옥암면, 백야면, 노동면, 미력면, 겸어면, 봉덕면, 복내면, 문전면, 율어면, 송곡면, 조내면, 대곡면, 도촌면 주민의 민원 관련 소장들이 수록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내용은 잘 보이지 않지만 그 당시 향촌 사회에서 주민들이 접한 피폐한 생활상과 그 과정에서 발생되는 다양한 민원과 지방관의 처리 방안 모색에 대하여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향교 집강(執綱)의 결전 납부 독촉, 영저리(營邸吏)의 진상가 배정, 가옥매매, 전세(田稅), 진결(陳結) 징세, 벌전(罰錢), 위토 투매, 결세전의 초과 징수, 소작 관련 처분, 산송(山訟) 관련, 답권(畓券) 위조, 가족 간 재산분배, 고공전(雇工錢) 등 주민 토지 매매와 금전 수수와 채권 채무 관계 분쟁 등에 관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외에 호포(戶布)와 동포전(洞布錢) 및 잡역 경감 청원, 세금 미납자와 음주 행패를 비롯한 고을 내의 부랑패류의 처리, 무고, 투장(偸葬), 과부 탈거, 노인 모욕, 잡역(雜役)에 대한 불만 등 보성군 관내 각 면과 리 별로 다양한 사항을 이해할 수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겪으면서 보성군이 겪은 사회적 변화를 알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유바다 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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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7 11:28

초보 아빠들의 행복한 육아⋯100인의 아빠단 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궁금한 게 생기기 마련이다. 다른 육아 부모의 의견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조언을 얻고 싶어도 대표적인 온라인 육아 커뮤니티인 '맘카페'는 가입 자격이 여성으로 제한돼 있어 남성인 아빠는 가입이 어렵다. 하지만 이제 아빠도 걱정 없다. 맘카페 아빠 버전(?)인 '100인의 아빠단(아빠단)'이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인구보건복지협회 지난 2011년부터 시작된 아빠단은 아빠 육아에 대한 긍정적 경험을 확산하고 함께하는 육아 실천 분위기 조성을 위해 시작된 대한민국 대표 아빠 육아 모임이다. 전북에도 아빠단이 있다. 보건복지부·전북특별자치도·인구보건복지협회 전북지회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저출생 대응 인식 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전북에서 거주하는 3세∼9세 자녀를 양육 중인 아빠라면 누구나 신청이 가능하다. 아빠단은 매주 놀이·일상·건강·교육·관계 등 분야별 주간육아과제(미션)을 수행하면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네이버 카페를 통해 아빠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소통하고 있다. 맘카페처럼 활성화되진 않았지만 계속해서 육아 꿀팁 등을 공유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일명 맘카페가 아닌 대드카페다. 문득 전북에서 활동하는 아빠단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아빠단의 활동이 어떤지, 아빠들 간의 네트워크는 어떤지, 아빠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빠단 소속 아빠 2명을 만나봤다. "저도 아빠는 처음이라⋯." 장정현(45) 씨는 7살 아들, 3살 딸 쌍둥이를 키우는 삼남매 아빠다. 장 씨는 모임도 잘 나가지 않는 집-회사만 아는 사람이었다. 비교적 커뮤니티에 관심이 많았던 장 씨는 맘카페처럼 아빠들을 위한 공간이 없어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 2022년 와이프가 100인의 아빠단을 신청해 놓은 덕에 아빠단을 알게 됐다. "활동한 첫해는 몰랐어요. 2023년은 신청 시기를 놓쳐 못했고 지난해에 또 했는데 알겠더라고요. 진짜 대단한 아빠들이 많다는 걸요. 저도 가정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평범한 아빠였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많이 반성하고 배웠어요." 장 씨는 아빠단을 통해 좋은 자극을 받았다. 첫째 이어 둘째 때도 육아휴직을 쓰고 아이들과 잘 놀아 주는 등 가정적인 아빠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아빠들을 보니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본인이 느낀 만큼 주변 사람에게도 아빠단의 활동을 강력 추천하는 장 씨다. 이제는 아빠들만 모여 있는 단체 채팅방까지 들어가서 다른 아빠들과 네트워크를 이어가고 있다. 장 씨는 "처음에는 아빠들이 무엇을 한다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해 보면 생각보다 별 거 없고 어렵지도 않다. 아이가 세 명이라 힘도 많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들이 주는 행복은 그에 비해 수십 배가 넘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실 첫째 때 사정이 있어서 혼자 육아휴직을 쓰고 아들을 케어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밥 먹이고, 재우고, 청소하고, 밥 하고, 밥 먹이고, 재우고. 몸은 안 힘들어도 마음이 힘들고 외로웠다. 텔레비전 속 엄마들이 왜 우울증 걸리는지 알 것 같았다"면서 "만약 아내가 가정주부라고 할지라도 아빠들이 퇴근하고 나서도 같이 육아에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 해 보니까 알겠더라"고 조언했다. "제 삶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최명호(43) 씨는 7살 딸과 함께 세상을 즐기며 성장하고 있다. 최 씨는 아빠단으로 활동 중이던 아내의 직장 동료를 통해 아빠단을 알게 됐다. 당시 매일같이 어떻게 하면 아이와 함께 재미있게 놀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던 터라 망설임없이 참여했다. "아빠단 중에서 다둥이 아버님, 아프리카로 출장을 가면서까지 미션을 올리시는 아빠들이 계세요. 이렇게 각자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이들과 소통하는 아빠들을 보면서 많은 귀감이 됐어요. 가정 내 좋은 아빠들의 모습을 본받게 되는 것 같아요." 장 씨와 비슷하게 아이와 열심히 소통하는 아빠들에게서 좋은 자극을 받은 최 씨다. 특히 아빠단 미션 중 아이와 노는 미션, 아내와 함께 육아하는 미션 등을 통해 육아에 대한 힘듦과 보람 등을 공감하고 아내와 격려를 주고 받을 수 있게 됐다. 자연스럽게 가정 내 좋은 아빠들의 모습을 본받게 된 것이다. 최 씨는 "아이를 처음 품에 안은 순간부터 저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저에게 '아빠'라는 단순한 호칭이 아닌 삶의 방향을 바꾼 가장 큰 축복이자 정말 천국이 펼쳐졌다. 그래도 저도 왕초보에서 이제 막 초보가 된 아빠다"고 했다. 이어 "아빠들에게 당부드리고 싶은 건 아이와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을 두려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함께 하려고 노력하셨으면 좋겠다. 주변 육아하는 아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많이들 엄마 없이 1박 하는 게 두렵다고 한다. 힘들지만 분명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두려워 하지 말고 도전했으면 좋겠다"고 격려했다.

  • 기획
  • 박현우
  • 2025.05.05 08:51

음식 팔아 기부하는 ‘천사’ 남원 초등학생들 사연은

남원에 있는 소규모 초등학교에 다니는 초등학생 4명이 2년째 직접 음식을 만들어 팔아 기부한 사연이 전해졌다. 뛰어놀고 공부하기도 바쁜 때지만 기부 첫 해는 음료를, 이듬해는 음식을 판매하면서까지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눈길을 끈다. 지난 2일 오전 9시께 찾은 남원 이백초등학교 6학년 1반 교실. 작은 교실에 덩그러니 책상 4개가 놓여 있다. 기부의 주인공 김민우·김예준·정의빈·진찬민(가나다 순) 학생의 책상이다. 인터뷰를 한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아, 저는 못 해요", "무슨 말을 해야 해요?", "할 말 없는데"라며 부끄럼을 탔지만 그것도 잠시 수다쟁이마냥 답변하기 시작했다. "2023년에 첫 기부를 했어요?" 진찬민 군은 "2년이 지나서 가물가물하다. 4학년 때 '사제 동행' 프로그램 하면서 담임 선생님이 음료를 팔아서 기부해 보자고 이야기했다. 그때는 선생님이 요청해서 아무 생각 없이 물품을 구입하고 호불호 없는 자몽·청포도 에이드를 만들어서 팔았다"고 설명했다. 정의빈 군은 "그때 '양심 기부통'을 만들었다. 음료 가격을 정하지 않고 학교 선배, 후배들이 저희가 만든 음료를 먹고 자유롭게 돈을 낼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10만 원 정도 모아서 물품을 마련해 독거노인·취약계층에 전달했다"고 덧붙였다. 사실 이 4명은 2학년 때부터 5년째 같은 반이다. 단짝 친구처럼 잘 지내다 보니 기부를 하자고 했을 때도 의견 충돌 없이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모두 요리하는 것을 좋아해 직접 만든 음료·음식을 팔아 기부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학생들의 기부는 5학년이 돼서도 이어졌다. 4학년 때는 자의 반 타의 반, 선생님의 제안으로 기부를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김예준 군은 "5학년 때는 매달 분식·잔치 등 콘셉트를 정해서 음식을 팔았다. 학교에서 음식을 판 돈으로 쌀, 휴지, 라면, 물티슈를 사서 기부했다. 5학년 올라오면서 공부를 많이 하다 보니 바로 기부를 못 했다. 그래서 조금 늦게, 지난 2월에 기부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번에는 선생님의 도움 없이 학생들끼리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기부해야 할지 몰라 이백면장을 찾아가 면담을 신청한 학생들이다. 당시 면장에게 물품으로 기부하고 싶은데 기부가 가능한지, 독거노인·취약계층에 전달하고 싶은데 추천해 줄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기부하면서 느낀 감정은 대부분 '뿌듯함'이었다. 진찬민 군은 "친구들이랑 같이 기부를 하니까 더 친해질 수 있고 마음도 따뜻해졌다", 정의빈 군은 "직접 음료·음식을 만들어서 팔다 보니 힘들었지만 기부하니까 뿌듯했다", 김예준 군은 "요리하는 걸 좋아서 재미도 있고 기부 하니까 기분도 좋았다", 김민우 군은 "너무 뿌듯하고 친구들이랑 음료·음식을 만들어서 행복했다"고 했다. 앞으로도 시간만 허락해 준다면 기부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중학교 입학을 앞두게 된 만큼 공부를 놓을 수 없어 고민이 크다고 한다. 진찬민 군은 "또 기부 계획은 있지만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5학년 때 보니까 달마다 요리를 만들어야 하다 보니 수업 진도가 느리다. 그래서 더 힘들지만 기분이 좋고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전했다.

  • 기획
  • 박현우
  • 2025.05.05 08:51

[전북 이슈+] 행복은 나누면 배가 된다⋯"가족 같은 이웃 외면할 수 없죠"

서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기회가 쏟아지는 5월, 가정의 달이 돌아왔다. 이달은 유독 따뜻한 소식이 많이 들리는 달이기도 하다. 본보도 가정의 달을 맞이해 <행복은 나누면 배가 된다> 3편의 기획을 마련했다. 소외된 이웃을 외면할 수 없어 동네 이웃끼리 봉사단을 만들어 반찬과 함께 따뜻한 정을 나누는 '사랑의 울타리' 봉사단, 서툴지만 행복한 육아 꿀팁을 나누고 틈틈이 아이와 시간 보내며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100인의 아빠단, 공부하고 뛰어 놀기도 바쁜 때지만 음식과 음료 팔아 주변 이웃에 물품을 기부하는 남원 이백초 6학년을 만나봤다. 해마다 어려운 이웃에게 반찬과 함께 따뜻한 정을 전하는 단체가 있다. 외환위기가 닥쳐온 1998년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못해 만들어진 봉사 단체, ‘사랑의 울타리’가 그 주인공이다. 사랑의 울타리는 전주시 덕진구에 거주는 지역민들로 구성됐다. 구성원들은 각각 식료품점 상인, 요리사, 회사원 등 다양한 직업과 환경을 가졌지만 소외된 이웃들을 외면할 수 없다는 공통된 마음 하나로 뭉쳤다. 그렇게 생활이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가 밑반찬을 전달하고 말동무를 하기 시작한 지 27년이 흘렀다. 어느덧 봉사단 규모는 643명까지 늘어났다. 유찬 사랑의 울타리 회장 또한 10년 넘게 봉사단에 몸담았다. 유 회장은 “봉사 하는 사람도 봉사 받는 사람도 덕진구 사람”이라며 “그저 봉사단이 오가며 마주치는 이웃들에게 최소한의 안전망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됐다”고 봉사단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지난 27년간 사랑의 울타리는 매년 다 함께 만든 김치, 나물 등 밑반찬을 주기적으로 소외 계층에 나눠주고 명절에는 음식을 만들어 제공했다. 주로 홀로 어르신, 한부모 가족 등 소외되기 쉬운 계층이 우선이었지만 올해부터는 어려운 환경에 놓인 아이들에게도 닿으려고 하고 있다. 최근 사랑의 울타리 봉사단원들은 어린 아이들을 위해 제과제빵을 배우고 있다. 10회차 수업을 등록해 30일 기준 6회차 수업에 접어들었다. 유 회장은 “우리 동네엔 아이들도 많은데, 그중에는 부모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하는 아이도 있다”며 “그런 아이들이 눈에 띄면 밥 한 끼 먹이고, 비 오는 날에는 우산도 쥐여주는 편이다. 그래도 더 맛있는 간식을 먹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사랑의 울타리는 매년 봉사하는 범위를 차츰 늘리려 하고 있지만 적극적인 봉사 확대는 힘든 상황이다. 시간이 갈수록 신입 회원 가입 신청은 줄어들고 기존 회원 또한 경제적 이유로 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지원금 또한 끊겨 봉사 단원들이 음식 재룟값을 마련하기 위해 지역 축제에 참가해 모금하고 있는 상황이다. 유 회장은 “봉사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금과 사람이 필요하지만 지금은 둘 다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금이야 우리가 벌면 되지만, 사람이 부족하면 봉사단 명맥이 끊길 수밖에 없다”며 “사랑의 울타리가 아니더라도 동네마다 봉사단이 있으니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 기획
  • 문채연
  • 2025.05.04 12:17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3) 오면재 통유문, 구본협 상서, 박근순 소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전체 185건이다. 이중에서 낱장으로 된 문서도 존재한다. 이번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오면재 통유문>, <구본협 상서>, <박근순 소지> 등 낱장의 문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문서들은 1894년 8월 또는 12월에 작성된 것으로 주로 동학농민군에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역민에게 보내거나 관에 제출한 문서들이다. 이 문서들을 통해 당시 유교적 소양이 있는 지식인들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인식과 대응방식, 그리고 지역 상황 등을 알 수 있다. 오면재 통유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 오면재(吳勉宰) 통유문(通諭文) 이 문서는 전라도 능주군(현 화순군) 오면재(吳勉宰, 1825~1900)의 통유문(通諭文)이다. 이 문서는 3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면 괘지 3쪽을 이어 붙여 양면에 필사한 것이나 중간에 누락된 부분이 있다. 맨 앞에 기록된 문서는 <갑오동요통유문(甲午東擾通諭文)>이다. 서두에 오면재의 이름이 있으나, 뒤에 기록된 글의 명의는 그의 아들인 향약장 오준상(吳晙庠) 외 42명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뒷면에는 단발령에 반대하는 내용의 문서가 제목 없이 수록되어 있고 말미에는 <호암면향약소회맹문(虎巖面鄕約所會盟文)>이 있다. 문서의 형태로 보아 3건 문서의 필자는 오면재이고 후에 누군가가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통유문은 갑오년(1894년) 8월 작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오면재가 보낸 통유문의 내용은 능주 호암면 백성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으로 농민봉기에 대해 매우 논리적인 반박을 가하면서 전통적인 유림들의 충군애민 정신에 바탕하여 동학농민혁명 가담자를 회유하는 내용이다. 주된 논점은 동학도들의 봉기 원인은 관아의 수탈과 억압, 그리고 굶주림에 분개한 것이며 그들은 농민봉기가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로 대오의 군기 문제와 무기의 빈약, 식량 부족 등 3가지를 들고 있다. 오면재는 다음과 같이 지역민들을 설득하고 있다. “그대들은 모두 이 나라에 태어나서 우리 임금의 백성 아닌 자가 없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처자식에게 자애롭게 해야 하는데 오늘날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천하에 나라가 수없이 많지만 의리 때문에 군신(君臣) 관계를 해치는 일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의로써 분별해 보건대, 오직 저 비류(匪類)들이 교화되지 못하고 창궐한 것은 큰 횡액을 틈타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술책을 맘껏 부리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 결과 위로는 정사에 여념이 없는 임금께 걱정을 끼치고, 아래로는 백성을 침탈하는 해악을 자행하여 관가에서는 명령을 시행하지 못하고 백성은 안도하지 못하니, 무릇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군들 분개하고 탄식하지 않겠는가.” 오면재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구축된 조선왕조 체제와 사회질서가 무너져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한 인식의 기반하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전혀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면재는 현재의 불안정한 상황은 동학농민군이 분수를 알지 못하고 준동하였기 때문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당시 많은 유교지식인의 일반적인 인식의 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제목 없이 낙장된 글은 일자가 기재되지 않았으나 단발령에 반대하는 글이 포함되어 있다. 이 내용은 1895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마지막으로 <호암면향약소회맹문>은 그 내용으로 보아 1904년 한일협약 이후에 봉기한 의병의 해산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면암 최익현이 쓴 오면재의 묘갈명(면암집)에 의하면 오준상은 오면재의 큰아들이다. △구본협(具本協) 상서(上書) 이 문서는 1894년 12월 전라도 능주군 한천면의 구본협, 구익모, 구혁모, 구전모, 구정모, 구달모, 구길모 등이 초토사 민종렬에게 올린 상서이다. 이 상서는 능주군 한천면에 향반으로 거주하는 구씨 문중이 호남 초토사인 민종렬에게 자신들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본분을 꿋꿋하게 지켰음을 말하고 보호를 요청하려 올린 문서이다. 이들은 1893년 봄부터 동학에 대응해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하고 향약(鄕約)을 실천하였으며 자신들이 이단을 배척하는 유학도임을 천명하면서 특별히 보호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들은 상서에서 “그래서 이듬해 흉험한 저 동학 무리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났을 때 비단 본면의 인사들이 삶과 의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지에 대한 판단을 일찌감치 내렸을 뿐만 아니라 저 무리들 또한 우리들을 협박해도 굴복시킬 수 없고 꾀어도 유인되지 않을 것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본읍의 충신의 의에 충실하던 이들을 물들여 인류(人類)를 단숨에 쓸어 없애려 하여 저희들의 거처에까지 화가 미치니 저희는 도망쳐 떠돌며 갈 곳도 없이 지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긴 밤이 찾아들고 단단한 얼음이 언 것과 같았으니 그 누가 이를 위해 큰 자비를 베풀어 거센 파도를 막겠습니까? 다행히도 우리 합하께서 정성을 다해 나라에 보은하고 마음을 다해 백성을 보살피며 바름을 붙들고 이단을 배척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서 보루를 견고히 하고 적도들을 사로잡아 그 옛날 강회(강회)의 보장(堡障)이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하게 두지 않으신 덕에 뭍과 물에 도사리던 짐승들이 안개 걷히듯 사라졌습니다. (중략) …… 삼가 바라건데 합하께서는 중한 말씀을 아끼지 말아서 이 면의 규약이 오래도록 후세에 징험이 되게 해주소서. 천만 축원합니다. 분부를 내리실 일입니다. 초토사 합하는 처분에 주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민종렬 초토사는 “능주는 본래 의관 갖춘 선비의 고장으로 선비들이 모두 제사를 지내고 집집마다 모두 글을 외니 비록 까닭 없이 어지러운 시기를 만났으나 저들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음을 이미 흠모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삼가 여러 군자들에게 크게 감사하는 바이다”라고 답해 주었다. <구본협 상서>는 우선 문중에서 작성했다는 특징이 있다. 문중 차원에서 문중을 보호하고 지역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러한 문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다고 보여진다. 내용에 따르면 그들은 동학에 대해서 동조하지 않고 적대적이었으며 동학농민군을 피해 도망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합하 즉 민종렬 초토사가 이들을 척결한 것에 대해 대단히 감사하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말미에 자신들이 만든 규약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민종렬 초토사는 인정한다는 취지의 답을 해주고 있다. 이 상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894년 당시 조선사회가 동학농민군이 대규모로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상황이었지만 한편으로 기존 질서를 지키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향촌사회 단위 또는 문중 단위에서 관과 유기적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시스템화했다고 보여진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한 1894년 11월 이후 이러한 시스템은 더욱 강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박근순 소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박근순(朴根洵) 소지(所志) 이 문서는 1894년 12월에 수곡리의 박근순, 한기조, 성하주, 강석중, 하룡팔, 양익원, 유의영, 김기순, 성경구, 하현원 등 10명이 진주목사에게 올린 소지이다. 진주목 관할 아래에 있는 수곡리의 주민들이 관군과 일본군이 진주와 하동 일대에서 농민군을 공격할 때 물자를 협조한 일이 있었다. 이곳 농민군들은 1894년 여름 수곡장터에 모여 대대적인 집회를 가지고 진주목을 점령하려 했다. 그때 부산에서 통영으로 상륙한 일본군과 경상감영의 판관인 지석영이 이끌고 온 감영군이 합동으로 농민군 토벌에 나서 하동 고성산성에서 접전을 벌였다. 이때 농민군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 그 경비의 분담금을 두고 수곡리(현재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와 이웃 마을인 북평리(현재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수곡리에서 북평리에 비용 중 절반을 분담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북평리에서 ‘전례없는 규례이다’라고 하면서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수곡리에서는 진주목사에게 이를 해결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진주목사는 “과연 힘을 합쳐 방어하였으니 방어할 때 들어간 비용은 나누어 담당하는 것이 옳지만, 그 외 다른 비용은 절대 침탈하지 말도록 면에서 일괄적으로 기별할 일.”이라고 하여 수곡리의 입장을 들어 일부 주었다. 이 소지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경상도 남서부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였다는 것이다. 이 문서를 통해 보면 경상도 진주, 하동, 함안, 고성 지역까지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있었고 이에 대해 향촌 사회 단위로 동학농민군에 대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토벌하는 비용을 조선정부가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백성들이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소요되는 비용을 지역별로 할당하고 자체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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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2 11:41

[픽! 전주국제영화제] 영화제도 식후경⋯'찐' 전주 맛집 궁금해?

"우리는 늘 선을 넘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전국제)가 야심찬 슬로건을 걸고 오늘(30일)부터 5월 9일까지 열흘간 영화의거리를 비롯한 전주시 일대에서 열린다. 전국제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화제로 자리매김한 만큼 전주 하면 '영화'가 떠오르겠지만 전주에서 유명한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맛이다. '맛의 고장' 전주까지 왔는데 영화만 보고 가면 섭하다. 어딜 가도 맛있다고 할 정도로 보장돼 있다. 유명한 곳도 좋지만 이왕이면 맛·가격·서비스, 3박자가 모두 어우러진 전주 착한가격업소를 들려보는 건 어떨까. 좋은 영화 보고 맛있는 음식까지, 생각만 해도 완벽한 일정이다. 영화의거리 부근에 있는 착한가격업소를 소개한다. 행정안전부가 제공하는 착한가격업소 누리집에 게시된 곳으로 한정했다. 입맛은 개인 차가 있는 만큼 참고만 하길 바란다.(괄호는 CGV전주고사서 출발, 도보·차량 이동 시간) 도보로 30분 걸리는 경우도 있지만 전주 곳곳 거리를 구경하는 재미도 있으니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걸어가 보자. 단, 착한가격업소는 행정안전부가 제공한 누리집에 게시된 곳으로 영업 상태, 영업 시간, 휴무일 등은 직접 확인해 봐야 한다. △동래분식, 풍남문2길 39(도보 18분, 자동차 5분) 전주 남부시장 안에는 현지인 맛집이 있다. 팥칼국수, 손수제비 맛집으로도 불린다. 가격은 6000원부터 1만 원까지 천차만별이긴 하나 1만 원을 벗어나진 않는다. 재료를 아끼지 않고 팍팍 넣어 더 맛있는 동래분식은 어느 하나 부족한 맛 없이 다 맛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메뉴는 팥죽, 팥칼국수, 손수제비, 칼국수, 만둣국 등. △돼지한마리, 현무1길 38-18(도보 9분, 자동차 5분) 착한가격업소에 등록된 메뉴는 돼지한마리(750g). 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대표 메뉴는 짜글이, 김치찌개다. 돼지고기와 두부·콩나물의 만남은 환상궁합이다. 자주 방문하는 사람도 질리지 않고 맛있다고 이야기할 정도면 말 다했다. 메뉴는 김치·된장찌개, 두루치기, 짜글이, 돼지한마리(삼겹살·목살·앞다리살·특수부위) 등. △또와분식, 태평5길 41-2(도보 9분, 자동차 2분) 전주 신중앙시장 내 '전집' 라인에 있는 가게. 빵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크로켓(고로케), 팥빵, 꽈배기, 찹쌀도넛, 만두, 찐빵 등을 직접 만들어 판매한다. 한 개만 먹으려다가도 앉은 자리에서 사 온 것 다 꺼내서 먹게 만든다는 마성의 맛. 장보러 온 할머니, 할아버지도 꼭 들려서 사간다는 빵. 메뉴는 만두, 찐빵, 찹쌀도너츠, 팥도너츠, 꽈배기 등. △만남의집, 서학로 28-1(도보 28분, 자동차 6분) 가게 내부에서부터 맛집의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는 만남의집, 동네 맛집으로 불린다. 닭·오리백숙, 닭볶음탕 등이 전문이긴 하나 착한가격업소에 등록된 메뉴는 김치찌개다. 이외 된장찌개, 청국장까지, 밥 도둑은 모두 팔고 있다. 메뉴는 능이닭오리백숙, 황칠닭오리백숙, 묵은지닭도리, 감자닭도리 등. △맛자랑 팥고향집, 서학로 32-4(도보 29분, 자동차 7분) "가격에 놀라고! 맛에 놀라고!" 네이버 방문자 리뷰에 남긴 찐(?) 후기다. 네이버 리뷰를 보면 대부분 '집에서 어머님이 만들어 주시는 맛', '공산품으로 낼 수 없는 맛', '전주에서 제일 맛있는 칼국숫집' 등 호평이다. 여름 메뉴 열무냉면이 또 별미라는데. 메뉴는 새알팥죽, 팥칼국수, 손칼국수, 김치칼국수, 수제비, (여름 메뉴) 콩국수, 열무냉면, 비빔냉면, 비빔국수 등. △세은이네, 풍남문2길 42-3(도보 17분, 자동차 5분) 골목에 있어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 있지만 항상 사람이 많은 세은이네. 자극적이지 않고 잔잔한(?) 맛이라는 평이 많다. 정겨운 옛날 식당 분위기에 걸맞게 사장님의 인심도 좋아 양이 엄청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메인 메뉴도 맛있지만 반찬으로 나오는 김치가 맛있기로 소문나 있다. 메뉴는 물국수, 닭곰탕 등. △수제왕돈까스, 충경로 84(도보 12분, 자동차 4분) 언제 가도 부담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수제왕돈까스. 전체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편이라 남녀노소 불문하고 사람이 몰린다. 옛날 경양식 집에서 팔듯이 케첩·마요네즈를 뿌린 양배추 샐러드, 마카로니도 함께 나온다. 장국도 그냥 장국이 아니라 소면을 푼 장국이 나온다는데. 메뉴는 덜큰돈가스, 왕돈가스, 칠리돈가스, 마늘돈가스, 고구마치즈돈가스 등. △신뱅이, 경기전길 153-9(도보 26분, 자동차 6분) 전주 하면 생각 나는 콩나물국밥, 비빔밥을 만날 수 있다. 가격이 저렴하다고 해서 맛이 없거나 양이 적은 게 아니다. 착한가격업소뿐 아니라 전주시가 인증한 '전주음식명가'도 받은 이곳은 맛이 보장돼 있다. 한옥마을에 위치해 있어 밥도 먹고 한옥마을 구경까지 가능한 점이 장점이다. 메뉴는 콩나물국밥(김치·백김치 선택), 야채비빔밥, 날치알비빔밥, 소고기비빔밥, 김치전 등. △오늘의행복, 장승배기로 405(도보 34분, 자동차 8분) 짜글이, 삼겹살이 맛있기로 소문이 자자한 오늘의행복. 고기는 질이 좋아 짜글이, 삼겹살 할 것 없이 다 맛있다고 소문났다. 기본 상차림부터 푸짐하게 나온다. 한옥마을 외곽, 전주교대 근처에 있어 동네 맛집으로도 유명하다. 현지인 맛집 추천에 꼭 포함돼 있다는 가게이기도 하다. 메뉴는 삼겹살, 짜글이, 김치찌개 등. △이래면옥, 동문길 103(도보 14분, 자동차 4분) 현지인이 운영하는 어르신 단골집. 이미 이것만으로도 맛이 설명된다. 한옥마을 주변에 있지만 가게 손님의 대다수가 지역 토박이 어르신들일 정도다. 함흥냉면 전문점으로 냉면을 많이 판매하고 있지만 시그니처(대표) 메뉴가 따로 있다. 바로 '갈만탕'. 갈비와 왕만두가 들어 있는 별미 메뉴다. 냉면도 맛있다는데. 메뉴는 비빔냉면, 물냉면, 회냉면, 갈만탕, 갈비탕, 소갈비찜, 돼지불고기 등. △자유식당, 풍남문3길 25(도보 15분, 자동차 5분) 전주의 손맛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1만 원에 청국장·제육까지 나오는 가성비 자유식당. 집밥 스타일이다 보니 화려한 반찬이 나오지는 않지만 사장님의 엄청난 요리 실력과 친절함이 '맛'을 더 깊게 만든다. 집밥, 시골밥상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는데. 메뉴는 청국장, 김치찌개, 된장찌개, 불고기, 제육백반 등. △청라회관, 노송여울2길 10(도보 11분, 자동차 4분) 외관에 'Since 1986'이라고 적혀 있는 오래된 맛집이다. 무려 40년 동안 영업한 이곳은 기본 반찬부터 맛있기로 알려졌다. 조미료 맛이 나지 않고 진해서 더 맛있다고들 한다. 양까지 많다고 하니 맛집으로 소문날 만하다. 메뉴는 김치찌개, 청국장, 동태탕, 육회비빔밥, 야채비빔밥 등.

  • 기획
  • 박현우
  • 2025.04.30 10:33

[전북의 기후천사] 지구의 벗, ‘전북환경운동연합’이 실천한 기후행동은?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에서 실천하자’는 목표를 내걸고 1993년 첫 걸음을 내 딛었던 전북 환경운동연합은 환경을 생각하는 시민모임에서 출발했다. 전북환경운동연합이 속한 환경운동연합은 아시아 최대의 환경단체이자 세계 3대 글로벌 환경조직인 지구의 벗 한국본부이다. 이들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모두가 기후행동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빈방 불끄기, 플로깅, 다회용품 사용과 같은 기후위기 저항에 동참하고 있다. 하지만 한 단계 나아가 기후행동 ‘심화버전’을 실행할 때라고 말한다. 왜일까. 24일 전북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서 만난 장진호 활동가는 “사람도 자연의 한 구성원일 뿐”이라며 “매년 폭염, 폭설, 폭우, 산불 등 자연재해 빈도수가 잦아지고 있다. (기후위기를 막기에) 늦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다행히 아직 물이 엎질러지지 않았다. 생물다양성, 생태계 보존 등과 같은 것들에도 관심을 두고 기후행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탄소 흡수하는 ‘나무’…기후위기 대응 탁월 지구온난화를 가속하는 온실가스인 탄소를 저감하는 방법 중 가장 탁월한 방법으로 나무 심기가 있다. 탄소 흡수 효과가 높고, 한번 흡수한 탄소는 나무에 계속 저장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규모로 숲을 조성하면 기후위기 대응은 물론 도심 온도를 낮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물의 탄소흡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가급적 탄소가 덜 발생하는 방식으로 공원을 관리하는 것이다. 실제로 기상청이 공개한 세계기상기수(WMO) ‘전 지구 기후현황 보고서(State of the Climate 2024)’에 따르면 지난해 지구 평균 온도가 산업화 이전인 1850~1900년 수준보다 1.55도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75년 관측 사상 가장 높은 수준이다. 국제사회가 합의한 1.5도 기후변화 마지노선을 넘어서게 된 셈이다. 또한 지난 10년간 전주시 일원의 식목일 평균 기온은 12.1도로 1940년대 8.3도에 비해 3.8도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전북환경운동연합은 지난 2008년부터 올해까지 17년간 온난화 식목일 나무심기를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전주시가 매입한 도시공원 부지에 회원 모금으로 이팝나무, 산수유, 산딸나무, 때죽나무 등 교목 30그루를 심어 도심공원으로 가꿔나간다. 2023년에는 문학대공원, 2024년에는 완주군 혁신도시 소리공원에 나무를 심었다. 올해는 건지산 도시공원 매입지에서 온난화 식목일 행사를 개최했다. 장진호 활동가는 “온난화 식목일 행사는 도시공원일몰제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도시공원을 전주시가 매입하고 그곳에 시민들이 직접 나무를 심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크다”며 “녹지를 보존하고, 불필요한 개발을 막을 수 있어서 매년 시민들과 함께 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열 받은 전주, 원인 찾기 나선 ‘기후천사’들 올 초 어느 기후학자가 예측한 ‘4월부터 반팔’설이 현실화되고 있다. 최근 상당수 지역의 낮 기온이 30도를 육박했다. 다가올 여름은 ‘살인적 폭염’이 예고된 만큼 내륙 분지형 도시인 전주의 여름은 더욱 아찔할 수밖에 없다. 지형적으로 대기의 순환이 원활하지 못한 무더운 도시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전북환경운동연합은 2016년부터 2022년까지 전주시 기온을 측정하는 프로젝트를 청소년들과 함께 전개했다. 기상청에서 발표한 전주의 여름철 온도와 실제 체감온도 차이가 크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교육활동이다. '열(熱)받은 전주 기(氣)후천사 나선다’는 프로젝트는 매월 첫째 주 일요일 오후 3시가 되면 전주시 곳곳에서 온도계를 손에 든 청소년들이 200여개 지점에서 한달에 한번 기온을 측정한다. 기후천사들은 지역의 열섬현상을 관찰하고, 지점별로 기온이 다르게 나타나는 원인과 전주시 열섬현상 저감 방법을 찾아보는 활동을 전개했다. 총 250여명의 청소년들이 '기후천사'로 활동했고, 이들은 기온측정을 토대로 지점별 온도 차이와 기온 값을 낮출 수 있는 방안을 찾아봤다. 전북환경운동연합은 학생들이 스스로 기후변화를 체감하고, 기후행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제공해 큰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활동들은 '청소년들이 만드는 전주시 열(熱)지도’ 인쇄물로 나왔다. 장 활동가는 “2016년부터 2022년까지 약 7년간 기온측정 데이터를 축적했다. 기후천사들은 매년 측정한 기온을 전주시 지도 위에 표시한 열지도를 제작했다"며 "청소년들에게 도시의 열섬현상이나 기후변화를 인식하게끔 하는 교육활동을 활발히 진행해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코로나 팬데믹 등의 이유로 단체활동이 점차 어려워져서 지금은 기후천사 활동이 잠시 멈춰있는 상태다. 조기대선 이후 기후천사 활동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활동가는 인터뷰 말미에 ‘에너지 분야’에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석탄화력 등의 발전 용량을 낮추고 재생에너지로 전환된다면 2050 탄소중립이 훨씬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기후·환경문제에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며 “위기를 느꼈다면 제도적 틀 안에서 변화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함께 목소리를 높여 달라”고 강조했다.

  • 기획
  • 박은
  • 2025.04.27 17:29

[나는] 가야금과 사랑에 빠진 푸른 눈 외국인 조세린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도, 길 다니면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도, 저마다의 삶이 있다. 우리가 매일 생산되는 주요 기사로 보는 것은 공직자, 정치인의 삶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들이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어떻게 사는지 보지만 정작 이웃의 삶을 들여다본 적은 많지 않다. 평소 기사에 나오는 사람이 아닌 이웃의 이야기를 전하는 새로운 기획을 준비했다. 기획명은 나는이다. 다양한 이웃 인터뷰 기사를 통해 함께 서로의 삶을 나누고자 한다. 이번 주인공은 국내 첫 외국인 무형유산 이수자로 선발된 미국인 조세린 씨다. 한국인도 하기 어려운 가야금을 배워 이수자가 된 조 씨를 만나봤다. 곱게 쪽진 갈색 머리에 푸른 눈, 단아한 한복 자태와 가야금. 미국인 조세린(본명 조슬린 클라크·55) 씨의 첫 인상이다. 여기에 눈 감고 들으면 한국인이라고 착각할 만큼 유창한 한국어 실력까지. 웬만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다. 최근 전북 무형유산 제40호 가야금 산조 이수자로 선정된 조세린 씨는 지난달 10일 국내 첫 외국인 무형유산 이수자로 선발됐다. 그동안 해외 거주 한국인이 판소리 분야 이수자로 선정된 사례는 있지만 실제 외국인이 선정된 것은 처음이다. 조 씨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태어나 알래스카에서 자랐다. 그는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한 취재진에게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한복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아 가야금에 손을 올리자마자 환한 미소가 사라졌다. 얼마나 가야금을 진심으로 대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가야금 열두 개 줄을 하나하나 뜯어 소리를 확인했다. 조 씨가 가야금을 배운 지는 30년이 넘었다. 어렸을 때 서양 악기를 하다가 일본 고토, 중국 칠현금·쟁을 배웠다. 한국에도 비슷한 악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야금에 눈을 뜨게 됐다. 지금처럼 외국인이 한국에서 사는 일이 쉽지 않다 보니 어려움도 많았다. 좋은 기회로 나가게 된 전주 '산조 축제'에서 위로를 받으며 꿈을 키워 나갔다. 조 씨는 "외국인이 가야금과 병창을 공부한다고 하니 전주 산조 축제에 와서 짧은 산조를 하나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내 실력이 좋지 않았는데도 사랑가를 부르니까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만 해도 얼씨구 절씨구부터 얼쑤, 좋다, 그렇지 등 관객들이 호응을 해 주셨다. 내 입장에서는 너무 재미있고 신났다"고 말했다. 꿈을 점점 키워 나가는가 했지만 집안 사정으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이후 다시 한국으로 와 2008년 배재대에서 동아시아 철학사상과 비교 미학을 강의했다. 대학 강의와 왕성한 연주 활동을 병행하던 중 공연 기회가 생기고 조 씨는 다시 한 번 가야금을 더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성금연가락보존회 지성자 대표(전북 무형문화재 제40호 가야금 산조 보유자)와 인연을 맺게 된 이유다. 조 씨는 "혼자 연주할 기회가 생겼는데 혼자서는 못 하겠다"며 지 명인에게 가야금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지 명인은 "6개월 안에 하기는 너무 짧다. 돌아가라"며 거절했지만 조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 명인은 거절한 이후에도 세 번이나 찾아온 조 씨를 내칠 수 없었다. 그렇게 가야금 공부가 다시 시작됐다. 조 씨는 "너무 부족해서 지성자 선생님이 진짜 많이 화냈다. 다시는 오지 말라고도 하셨다. 그래도 많이 알려 주셨다. 그때 저도 할 수 있는 건 다 했던 것 같다"면서 "지금도 매주 전주에 와서 지성자 선생님께 가야금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조 씨에게 가야금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졌다. 그는 "가끔은 친구 같고, 적 같고, 언니 같고, 동생 같고, 부모님 같다"면서 "가야금은 내가 사랑 주는 만큼 돌아오는 악기다. 신경 안 쓰면 소리도 안 나고, 정도 안 붙는다"고 표현했다. 누군가에게 가야금은 단순히 악기일 뿐이지만 조 씨에게는 가장 가까운 존재였던 것이다. 국내 첫 외국인 가야금 산조 이수자 타이틀까지 얻었지만 조 씨의 학구열은 아직도 활활 타오르고 있다. 조 씨는 "가야금 산조로 이수자가 됐기 때문에 당연히 산조는 계속할 생각이다"면서 "나중에는 병창도 잘하고 싶다. 아직 발음 때문에 잘 못 하는데 지금 바르게 발음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5.04.26 09:16

[우리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 완주 안심사의 언해본 목판

△ 만해 한용운의 안심사 방문기 1931년 근대의 고승 만해 한용운이 완주군 운주면에 있는 안심사를 방문했다.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는 한글경판을 친견하고 인출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 산사를 자주 방문했던 사람으로부터 안심사에 상당수의 언해본 경판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남아있던 한글로 된 불교서적은 산질된〈월인천강지곡〉몇 권에 불과하다고 알고 있던 터라 만해의 놀라움을 컸다.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급히 서둘러 경성발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마음이 들떠서 며칠 밤잠을 설친 뒤라 기차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곤히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기차가 추풍령역에 정차해 있었다. 호남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대전역을 한참 지나쳤다. 급하게 하차해서 두 시간을 기다렸다가 상행선을 타고 대전역까지 다시 올라가 호남선으로 바꿔 타고 연산역에 내렸다. 여기서 자동차로 두 시간 반을 더 달려 다음날 정오가 지나서 안심사에 도착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틀 걸러 도착한 안심사의 모습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찾아오는 신도가 없어 주지 혼자 농사를 지으며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퇴락한 2층 건물의 대웅전 안으로 들어서자 불상 뒤쪽 마루에 경판이 쌓여있었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판전이 있었는데 판전이 무너지면서 대웅전 안으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수많은 경판이 뒤섞여 있는 가운데 한글경판이 보였다. 벅찬 감흥에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 만해는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 경판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경판을 종류 별로 분류하고, 다시 판본 순서대로 맞추어갔다. 다음날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판본의 정리를 마쳤는데 결과는 엄청났다. 낙질이 거의 없는 판본이 5종이나 남아있었다. 〈원각경〉〈금강경〉〈은중경〉 등 경전이 3종, 여기에 〈천자문〉과 〈유합〉의 판본까지 있었다. 남아있는 언해본 판본의 수는 무려 655판에 이르렀다. 이를 인출하게 되면 1,365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만해는 이러한 자초지종을 적어 ‘국보 잠긴 안심사’란 제호로 〈삼천리〉 1935년 7월호에 실었다. △ 한 줌 재로 변한 안심사 언해본 목판 만해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향후 판본이 어찌 될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안심사의 형편으로 판본을 제대로 관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본을 지킬 수 있는 방안 세 가지를 제시했다. 안심사에 이를 수호할 만한 보조를 해주거나 이를 수호할 수 있는 다른 사찰로 이안하는 방안, 경성에 판각을 신축한 후에 매입해서 이안하는 방안이다. 만해는 이 중에서 경성에 이안하는 방안을 실행하려한다고 밝혔으나 어떤 사정에서인지 실현되지 못했다. 경성에 판본을 이안하고자 했던 만해의 생각이 실현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3일, 만해가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 벌어졌다. 안심사가 적군의 월북경로에 있다는 이유로 국군이 사찰을 징발해 소각해버린 것이다. 이때 대웅전 안에 보관되어 있던 판본도 함께 재가 되었다. ‘국보 잠긴 안심사’가 국보와 함께 사라졌다. △ 조선 초부터 불경을 간행했던 안심사 그런데 대둔산 깊은 산속 오지 중의 오지인 안심사에 어떻게 해서 이렇게 엄청난 보물인 언해본 목판이 보관되어 있었던 걸까. 안심사는 조선 초부터 불경간행이 활발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조선 초에 발간한 한문본〈묘법연화경〉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개국공신이었던 양촌 권근이 쓴 발문에 발간경위가 적혀있다. 조계종의 대선인 신희 등이 노인들이 보기 편하도록 중간 크기의 글자로 불경을 간행하기를 원했다. 이에 성달생 성개 형제가 상중에 이를 듣고 선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글씨를 썼다. 이를 도승 신문이 전라도 도솔산 안심사로 가지고 가서 1405년(태종 5)에 이 경전을 간행했다. 이 발문을 통해 당시 안심사의 명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불경 간행을 위해 그 먼 길을 마다 않고 신문이라는 승려가 대둔산 안심사까지 성달생 형제가 정성을 다해 쓴 사경을 가지고 갔던 것은 이곳이 당시 가장 뛰어난 불경간행처였기 때문이다. 이는 안심사의 승려 중에 숙련된 각수와 지장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책을 출간할 수 있는 인프라가 튼튼하게 갖춰진 절이 안심사였다. 이러한 사찰이었기에 세조 때 간경도감을 설치하면서 지방분사를 이곳에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는 단초가 영조 35년(1759)에 건립된 안심사사적비에 적혀있다. 이 비는 우의정 김석주가 비명을 짓고, 한성부 판윤 유최기가 기문을 서술했다. 이조판서 홍계희의 글씨에 영의정 유척기가 두전을 썼다. 이처럼 조정의 쟁쟁한 실세들이 참여해 비를 세운 것으로 볼 때 당시까지만 해도 안심사의 사세가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문에 안심사 주지 처능이 김석주에게 했던 말이 적혀있다. 우리 혜장왕조(惠莊王朝:세조)에 이르러 일찍이 친필로 유지(遺旨)를 내리시어 절의 중으로 관에 부역하는 자들에 대해 모두 역을 면해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글이 있습니다. 사적비에 의하면 세조가 승려들의 잡역을 면해주라는 친필 유지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조는 무엇 때문에 이러한 유지를 내렸을까. △ 안심사는 간경도감 전주분사 이는 안심사가 일찍이 명성을 쌓아온 불경간행사업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추정하는 까닭은 불경간행을 위한 전담기구를 설치해 많은 불경을 간행한 왕이 세조였기 때문이다. 세조는 대군 시절부터 불교를 좋아하여 부왕인 세종의 불서편찬을 적극 도왔다. 세종의 명으로 모친인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석보상절〉을 쓰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왕위 찬탈을 속죄하기 위해 더욱 불교에 심취했다. 세조 7년(1461)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했다. 중앙에 간경도감 본사를 두고, 지방에 분사를 두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지방분사로는 개성 안동 상주 진주 전주 남원이 있다. 이 중 전주의 분사 역할을 안심사에서 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역할을 하면서 불경 간행이라는 국책사업을 수행했기에 세조가 안심사의 승려들에게 잡역을 면해 주라는 어필을 내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만해가 와서 보았던 언해본 목판도 세조 때 새긴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간경도감의 역할을 보면 한문 불경은 본사와 지방분사에서 간행했지만 언해 불경은 서울 본사에서 단독으로 간행했다. 안심사에 있었던 언해본 목판은 선조의 지시로 1575년(선조 8)에 판각해서 안심사에 보관했다. 그런데 실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간경도감에서 언해한 불경을 다시 복각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 한글로 번역해서 판각한 것인지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용운이 1932년에 보수하여 인출한 〈원각경언해〉와 〈금강경언해〉는 간경도감의 원간본을 복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출판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안심사 이처럼 안심사의 언해본 목판에 대해서는 풀어야할 숙제가 많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사실만으로도 안심사는 우리 출판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곳이다. 조선 초부터 많은 불경을 간행했고, 세조 8년(1462)에는 한자본 불경 〈대승기신론필삭기〉와 〈대방광불화엄경합론〉을 간행했다. 여기에 선조의 명으로 판각한 언해본 판본까지 소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단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때 안심사가 조선시대 불경간행의 중심 사찰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 기획
  • 전북일보
  • 2025.04.24 23:32

[트민기] 육지 남원서 참치가 잡힌다?⋯'참치왕' 산골 농협 사연은

유행은 돌고 돈다. 빨라도 너무 빨리 돈다. 괜히 아는 척한다고 "요즘 유행인데 몰랐어?" 이야기했다가 유행이 끝나 창피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트렌드에 민감한 기자들, '트민기'가 떴으니 이제 걱정 없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에도 SNS,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유행이 올라오고 트렌드가 진화한다. 트민기는 빠르게 흐름을 포착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게 목표다. 여기서 그치면 재미 없을 것 같아 또 하나 준비했다. 전국적인 유행뿐 아니라 전북에서 핫한 현장이 있다면 바로 출동한다. 이것이 우리의 임무다. 오늘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지리산농협 하나로마트는 참치도 다릅니다. 냉동이 아닌 '생'으로 고유의 신선함을 맛보세요." 이 문장 두 줄이 본사에서 왕복 2시간 30분 걸리는 남원까지 가게 만들었다. 남원에서 생참치가 잡힐 리 없는데 참치를 잡는 산골 농협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고보니 지리산농협은 지난 2022년부터 통영 욕지도에서 잡은 생참치를 해체해 왔다. 쇼핑몰 사업을 확장하려고 했지만 산골 농협에서 판매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산골에서 접하기 어려운 것을 찾다 '생참치'라는 답을 얻게 됐다. 조합원·고객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면서 수익까지 올릴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한 것이다. 발상의 전환, 역발상이 통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현장 이야기를 듣고 안 갈 수가 없었다. 무조건 가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출발했다. 지난 17일 오전 10시쯤 도착한 남원에 있는 지리산농협(조합장 정대환) 하나로마트. 진짜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주유소, 톨게이트뿐.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들어간 마트 입구에는 욕지도에서 잡힌 생참치라는 말과 함께 중뱃살, 대뱃살, 적신이라고 붙혀진 스티로폼 박스와 엄청 긴 빨간 도마가 있었다. 수산 코너에서 직원으로 추정되는 '지리산 농협'이라고 적힌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3명이 박스를 끌고 온다. 박스 크기도 어마어마하다. "참치 꺼내겠습니다!" 한 마디와 함께 큰 박스에서 머리와 꼬리가 그대로 달린 생참치 한 마리가 나왔다. "참치 머리부터 자르겠습니다." 그때부터 생참치 해체쇼가 시작됐다. 곧바로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80kg 상당 생참치를 통으로 본 것도, 해체쇼를 본 것도 처음이기 때문이다. 2시간 가까이 진행됐지만 다들 지루한지 모르고 자리를 지켰다. 여러 차례 칼질을 하자 흔히 횟집에서 보는 참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직원은 고객에게 부위를 설명해 주면서 해체를 이어갔다. 생참치를 능숙하게 해체하는 이 직원들은 놀랍게도 타지역에 가서 수업 듣고 유튜브를 보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정말 선수처럼 잘한다. 현장에서 만난 서천수(57·광주) 씨 가족은 계속해서 환호성을 질렀다. 남원에 관광하러 왔다가 해체쇼를 보러 온 줄 알았지만 반대였다. 해체쇼를 보러 남원을 찾은 것이었다. 서 씨는 "원래 가족이 다 참치를 좋아한다. 냉동만 먹어 봤지, 생참치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우연히 생참치 해체쇼를 한다는 기사를 보고 문의해서 날짜 맞춰 왔다. 관광하러 온 거 아니다. 진짜 생참치 해체쇼 보고 먹고 싶어서 왔다"면서 "직접 눈으로 보고 부위별 설명까지 들으니 너무 좋다. 다음에 또 오고 싶다. 다른 사람도 데리고 오고 싶을 정도다"며 감탄했다. 매번 사 먹는다는 정성령(85·남원) 씨도 "직접 해체하는 것도 보고 신선한 회를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생참치를 지리산 밑에서 먹는 것 자체가 특색이다. 금요일 저녁에 가족들이 다 모인다고 해서 또 사러 왔다"고 말했다. 당초 지리산농협 하나로마트의 계획처럼 조합원·고객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생참치 해체쇼를 기획한 정대환 조합장은 "남원에서 맛보지 못 한 것을 팔자고 생각했다. 조합원 환원 차원에서 시작했지만 하나로마트를 찾는 고객들이 퍼포먼스적인 부분도 볼 수 있게끔 쇼를 기획했다. 직접 쇼를 보면 생동감도 있고 진짜 생참치구나 믿음도 생긴다고 생각한다. 냉동참치를 판매할 수도 있지만 진짜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기획했다"면서 "이제 타지역에서도 전화 문의나 예약 주문이 많이 들어올 정도다"고 설명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5.04.24 14:43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2) <오통절목> <향약장정> <향약안> <제천향약절목>

이 잡듯이 동학농민군을 단속하라 동학농민혁명을 일본군과 연합하여 철저히 무력으로 진압한 정부는 해산한 동학농민군을 철저히 단속하고 사회 기강과 질서를 통제할 목적으로 오가작통법과 향약을 재정비하고 전면적으로 시행하였다. 그 실상을 잘 보여주는 기록물들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번에 다루는 <오통절목>, <향약장정>, <제천향약절목> 등이다. <오통절목>은 1894년 12월 완산(完山) 초안국(招安局)에서 목판 인쇄한 것이다. 작성자는 관찰사 겸 위무사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기록물은 전라관찰사가 전주에서 인쇄, 전라도 각지에 배포한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오통절목>을 통해 동학농민군을 색출하도록 한 전라도관찰사는 바로 이도재이다. 전라도관찰사 이도재가 추진한 오각작통법 시행 목적은 비적, 즉, 동학농민군을 토벌해서 양민들을 편안케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해산한 동학농민군이 귀가하거나 마을로 잠입하였을 경우 일일이 색출하여 처형하기 위해 시행한 것이다. 그를 위해 5가구마다 통수(統首)를 두고 25가구마다 연장(連長)을 두어 서로 검속(檢束)하여 살피도록 하였다. 만약 한 마을의 가구수가 25가구가 안될 경우, 10가구 이하는 합하여 1리로 만들고 10가구 이상은 1연으로 만들도록 하였다. 연장은 해당 마을에서 관아에 보고하여 임명하고, 통수는 연장이 선정하였다. 5가작통은 모든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되, 만약 작통에 들어가지 않으면 비적의 무리로 간주하여 논죄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빈집 역시 통에 넣되, 집주인이 3개월 동안 돌아오지 않는 집은 연장이 관아에 보고하여 가난하여 집이 없는 주민에게 주도록 하였다. 또한 통을 편제할 때,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주민은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기존에 살던 집 주인은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모두 기록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산의 움막 토굴 사찰 등과 같은 곳도 가까운 마을에 소속시키고 똑같이 규찰하도록 하였다. 오가작통을 통해 단속할 대상은 정황과 행적이 의심스러운 자, 비적(동학농민군)의 부적과 주술을 지니거나 외우는 자, 무기나 풍물・깃발 등을 감추거나 버리는 자, 그것을 알고서도 보고하지 않는 자, 수상한 자를 숨겨주는 자, 비적의 우두머리가 숨어 있는 곳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는 자, 관아의 명령없이 사적으로 서로 모이는 자, 사적으로 통문을 돌리는 자, 하룻밤 이상을 출타할 때 통수에게 보고하지 않고 출입하는 자 등 매우 광범위하였다. 오가작통을 통해 해산한 동학농민군을 이 잡듯이 단속함은 물론 다시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촘촘히 마을을 통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통 내에서 한 집이 법을 어기면 나머지 네 집이 똑같이 연대책임을 지도록 하여 상호 감시하도록 하였다. 향약장정(鄕約章程)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향약장정>은 <오가절목>과 마찬가지로 1894년 12월에 완산 초안국에서 목판 인쇄한 것이다. 관찰사 겸 위무사 명의로 간행된 것으로 보아, 이것 역시 오가작통법과 함께 향약 시행을 통해 동학농민군을 단속하고 사회를 통제하기 위할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규장각,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향약장정> 내용은 향약 시행 규칙으로, 향약사목을 제시한 뒤 향약 덕목을 나열해 놓았다. 향약 시행 규칙은 모두 13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1읍에는 연장자로 덕망이 있는 자로 도약정(都約正)을 뽑고, 1면에는 약정과 직월 각 1명을 두고 평민 가운데 한 사람을 면장(面掌)을 삼도록 하였다. 면장 외에는 모두 관에 보고하여 지방관이 임명하도록 하여, 사실상 향약이 자치규약으로서의 본래 성격에서 벗어나 관의 향촌 지배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읍과 면에는 각각 회원명부를 두되, 반상을 구분하도록 하였다. 신분 차별을 둔 것이다. 향약 운영은 매년 춘추로 향교에 모여 강약(講約)하였고, 향약 덕목은 전통 그대로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 네 덕목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덕목 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과실상규 내용을 보면, 최근 동학과 불학(佛學)의 무리들이 기도를 하고 주문을 외우는 등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철저히 규찰하도록 하면서, 만약 어기는 자가 있으면 향약 모임에서 벌을 주도록 하였다. 벌은 엄중한 경우 관에 보고하여 엄히 징계하고, 경미한 경우 5에서 20대의 태형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향약장정>은 전라도관찰사가 전주에서 목판 인쇄하여 전라도 각 지역에 일괄 배포한 것으로 보아, 전라도 전 지역에서 시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전주 북일면에서 시행된 동종의 <향약절목>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좌목(座目)>에 들어 있음). 향약이 철저히 관 주도로 이루어졌고, 동학농민혁명을 수습하고 동학농민군을 단속하기 위한 사회통제책으로 활용되었다. 향약안(鄕約案)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향약안>은 향약안서, 방수안서(防守案序), 단자, 능주 유생등 상서, 서간문 등이 필사되어 있다. 1895년 초에 능주에 사는 어느 유생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향약안서’는 일반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으나, 전라도관찰사가 시행하도록 한 향약이 능주에서도 시행되면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방수안서’ 역시 위정척사를 위해 적당을 방수하겠다는 글이나,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다만, 을미년에 작성된 단자와 능주 유생들의 상서 등은 초토사 앞으로 보낸 것으로, 능주 방수장(防守將) 전 우후 박종규(朴鐘圭)가 수성군을 조직해 장흥 동학농민군 수백명과 광주 동학농민군 50여명을 격퇴하였을 뿐 아니라, 나주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이 능주에 들어오자 접주 등을 체포해 나주에 압송시킨 공이 있다고 하면서, 포상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 다른 단자는 향약 시행과정에서 임원 관련 내용이다. 기타 서간문이 필사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향약안>은 실제 능주에서 1895년초 향약 시행과정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동학농민군이 진압된 이후 향촌사회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는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제천향약절목>은 충북 제천에서 시행하였던 향약절목이다. 작성시기는 1894년 6월이며 제천현감 관인이 찍혀 있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905년 3월 제천향약 임원도 메모되어 있다. 내용은 일반 향약절목처럼 향약서, 향약범례가 나열되어 있으며 제천 8개면을 대상으로 시행되었다. 임원은 도약장, 면약장, 동약장, 통수 등으로 구성하며 관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특이한 점은 향약과 오각작통법이 결합되어 있는 점이다. 오각작통을 통해 향촌사회를 촘촘히 감시하도록 하였다. 만약 향약을 준수하지 않으면 마을이나 면약장이 다스리되, 중한 경우에는 관에 보고하여 처벌하도록 하였다. 수상한 자는 절대로 마을에 들이지 말고 그 성명을 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특히 각 통마다 밀통군(密通軍) 5명씩을 뽑아 윤번으로 마을을 단속하도록 한 점이다. 단속 대상 가운데는 적당(賊黨)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당시 정황을 놓고 볼 때 사실상 동학농민군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학농민군 예방 차원에서 제천향약이 시행된 것으로 보이나, 그 즉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제천지역은 6월경부터 들고일어난 동학농민군이 7-9월 거의 장악한 상태였으나, 일본군이 충주지역으로 진입한 10월부터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제천 민보군도 조직되어 동학농민군의 근거지를 초토화하는 한편, 전봉준과 함께 재판장에서 사형을 받은 성두한의 아버지, 아내, 아들을 차례로 체포하여 제천관아에 수감시키기도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제천향약은 비록 즉시 효과를 보지 못하였을지라도 제천 민보군 활동의 기반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이후 제천 향촌사회를 통제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김양식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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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23 18:59

[나는] 취향을 찾는 동네서점⋯새싹·베테랑 책방지기의 삶은

가장 가까운 가족도, 길 다니면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도, 저마다의 삶이 있다. 우리가 매일 생산되는 주요 기사로 보는 것은 공직자, 정치인의 삶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들이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어떻게 사는지 보지만 정작 이웃의 삶을 들여다본 적은 많지 않다. 평소 기사에 나오는 사람이 아닌 이웃의 이야기를 전하는 새로운 기획을 준비했다. 기획명은 나는이다. 다양한 이웃 인터뷰 기사를 통해 함께 서로의 삶을 나누고자 한다. 이번에는 동네 책방을 지키는 책방지기의 이야기다. 세계 책의 날을 맞아 오픈 1개월 차 새싹 책방지기 서지석 대표와 9년차 베테랑 이지선 대표를 만나봤다. △ 독립서점 '일요일의 침대' 서지석 책방지기 “지난달 23일에 시작했으니까 이제 문 연 지 한 달 됐네요.” 전주 남부시장과 웨딩의 거리를 잇는 작은 골목, ‘고물자거리’라고 불리는 골목 안 작은 책방엔 골목을 지키는 책방지기 서지석(31) 씨가 있다. 그의 서점 ‘일요일의 침대’는 지난달 문을 열어 이제 막 한 달을 채웠다. 평범한 직장이었던 서 씨는 번아웃으로 인해 회사를 그만두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책방을 차렸다. 서점의 이름을 일요일의 침대라고 지은 이유다. 방문객이 책을 통해 잠시나마 쉬어가고 주말 침대 속 여유로움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 “원래 책방은 회사 은퇴하고 노인이 돼서야 할 것으로 생각했어요. 막상 회사를 그만두고 다음 진로를 찾다 보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서 씨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사람들과 감상을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직장에 다닐 때도 독서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곤 했다. 서울에서 독서 모임이 열리기라도 하면 참가하기 위해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게 일상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 책 이야기하는 게 너무 재미있다”고 말했다. 꿈에 그리던 책방을 열기로 마음먹은 후 처음 골목에 왔을 땐 주변의 걱정도 컸다. 대로변도 아닌 골목 안 작은 책방만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지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고물자거리의 이웃들도 걱정의 눈빛을 보냈다. 대부분 생계에 대한 걱정이었다. 서 씨도 “책 자체가 돈이 되는 상품은 아니다”라고 했다. 독립 서점은 대형서점처럼 베스트셀러를 대량으로 판매해 수익을 내기 어렵다. 대신 책방 주인의 취향을 반영한 큐레이션을 제공하고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소통 공간이 되는 것이 차별점이다. 서 씨는 이 점을 살려 특정 주제를 정한 독서 모임, 글쓰기 모임, 북 토크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수익을 낸다. “동네 책방은 단순히 책을 구매한다기보다는 경험을 소비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단순 책만 구매하려면 인터넷이 훨씬 편하죠. 그럼에도 동네 책방을 찾는 건 책방지기가 고른 책을 보며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즐기고 교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서점을 운영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그보다 먼저 골목 안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일이 새내기 책방지기의 가장 큰 고민이다. △ 독립서점 '잘 익은 언어들' 이지선 책방지기 “2017년도부터 시작했으니까 9년 차, 우리 책방이 벌써 그렇게 됐네요.” 통창으로 환한 햇빛이 쏟아지는 아늑한 공간. 전주시 인후동에 위치한 ‘잘 익은 언어들’의 책방지기 이지선(49) 씨는 책방을 운영한 햇수를 헤아리며 환히 웃었다. 지난 2017년 송천동의 12평 남짓한 공간에서 시작한 책방은 늘어난 단골들과 함께 몸집을 키워 인후동의 2층 건물로 이전했다. 본래 카피라이터로 일했던 그는 아이를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 책방을 열기로 했다. 처음엔 책방보다 카피 작업이 중심이었다. “책방은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하다 보니 책방에 오시는 손님들한테 오히려 많은 위로를 받고 있더라고요. 그 기억이 지금까지 책방을 운영하는 원동력이 된 거죠. 이제는 책방지기가 본업이에요.” 지금은 단골들이 꾸준히 찾아오지만, 한때 침체기를 겪었다. 코로나19로 발길이 뚝 끊긴 시기에 “책방이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는 고객의 말 한마디가 그를 5년이나 더 버티게 했다. 그는 책을 집필하며 수익을 확보하고 SNS 홍보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역 학교에 찾아가 책 유통 계약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렇게 버틴 끝에 잘 익은 언어들은 어느새 전주의 대표 독립 서점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어려웠던 시절, 단골들의 말 한마디로 버틸 수 있었던 이 씨는 책방지기에게 고객과의 교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말을 걸라는 뜻은 아니다. 잘 익은 언어들은 활발한 소통이 매력이지만 모두가 그럴 순 없다는 게 이 씨의 생각이다. “모두가 그런 교감을 원하지는 않아요. 어떤 책방은 오히려 책방지기가 고객한테 무관심한 느낌 때문에 부담 없이 갈 수도 있죠.” 그럼에도 이 씨는 소통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조용한 책방을 추구하더라도 작은 담소를 통해 고객과 연결고리를 만들면 또 오고 싶은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9년 차에 접어든 그는 새롭게 책방을 시작하는 책방지기들에게 지역 커뮤니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라고 조언한다. “혼자 운영하는 책방이지만 결국 팀플레이”라며 이웃 상점이나 주민과의 협력을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전북이 전국에서 책방이 가장 많은 지역이 되기를 바란다. 새로운 책방지기들이 꾸준히 생기고 그들을 따라 외부인이 찾아온다면 지역과 책방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다고 믿는다. “서점이라는 게 1년만 운영한다고 뭔가 ‘탁’ 이루어지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앞으로 독립 서점들이 천천히 가더라도 그 시간을 묵혀서 각자 매력 있는 책방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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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23 18:03

[트민기] 언니·오빠가 책 읽어 준다고?⋯시골 학교에 무슨 일이

유행은 돌고 돈다. 빨라도 너무 빨리 돈다. 괜히 아는 척한다고 "요즘 유행인데 몰랐어?" 이야기했다가 유행이 끝나 창피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트렌드에 민감한 기자들, 트민기가 떴으니 이제 걱정 없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에도 SNS,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유행이 올라오고 트렌드가 진화한다. 트민기는 빠르게 흐름을 포착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게 목표다. 여기서 그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 또 하나 새로운 기획을 준비했다. 전국적인 유행뿐만 아니라 전북에서 '핫'한 현장이 있다면 바로 출동한다. 이것이 우리의 임무다. 오늘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얘들아, 오늘 내가 읽어 줄 책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야." 세계 책의 날인 23일 장수계남초 5학년 박찬희(11) 군이 옆구리에 초록색 표지의 책 한 권을 끼고 3학년 교실을 찾았다. 박 군이 교실로 들어오기 전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던 아이들은 온데간데없이 박 군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박 군은 익숙한 듯 동생들 앞에 앉아 한 장 한 장 넘기며 또박또박 책을 읽어 나갔다. "옛날에 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책 페이지 수만 52쪽, 책 읽기는 7분간 이어졌지만 그 누구도 엉덩이 한 번 안 떼고 책에 집중했다. 고학년 선배라도 앞에 나와 책을 읽는 게 부끄러울 만도 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 끝까지 용기 있게 읽은 박 군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사실 장수 계남초는 지난해부터 따뜻한 아침에 책 한 권을 줄여 '따아책'이라는 도서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교내에서 문해력 관련 독서 교육을 강화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새로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매주 수요일 아침 오전 8시 45분부터 딱 15분간 진행한다. 저학년과 고학년을 한 팀으로 묶어 고학년 선배들이 직접 책을 선정해 저학년 후배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방식이다. 박 군이 이날 읽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책도 직접 선정한 것이다. 박 군은 "이 책은 나무가 소년에게 아낌없이 나뭇가지부터 사과, 줄기, 밑동까지 다 주는 게 감동적이라서 골랐다. 그리고 동생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하니(9·초등학교 3학년) 양은 "나무가 소년을 위해서 다 해 주면서도 행복하다고 하는 게 감동적이고 재미있었다. 아침마다 언니, 오빠들이 책을 읽어 주면 졸렸던 기운을 깨게 해 주는 것 같다. 계속 언니, 오빠들이 책을 읽어 주면 좋겠다"고 했다. 후배들에게 어떤 책을 읽어 줄지 고민하는 선배들의 모습과 선배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후배들의 모습에서 사랑스러움이 묻어져 나왔다. 고학년은 책 읽어 주는 게 어색해 부담스럽기도 하고 저학년은 책 내용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고학년, 저학년 할 것 없이 모두가 좋아하는 도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도서 담당 양지연 교사는 "저학년 아이들은 고학년 언니·오빠들이 교실에 와서 그림책 읽어 주는 걸 정말 좋아한다. 책 내용도 재미있고 자신들을 찾아와 준다는 기분이 드는 것 같다"면서 "고학년은 처음부터 즐거워하는 아이도, 부담스러워하는 아이도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읽어 주는 걸 보면서 익숙해지는 듯하다. 매주 실시하다 보니 점차 부담감은 잊고 편하게 읽어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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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23 17:13

[뉴스와인물] 취임 100일 맞은 제12대 정경복 전북대병원 상임감사 “투명하고 건강한 병원 문화 만들 것”

국립대학교병원을 운영하며, 병원장과 함께 가장 중요한 자리가 있다. 병원의 투명하고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상임감사가 그것이다. 제12대 전북대병원 정경복(66) 상임감사는 의정 갈등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병원 운영의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취임 100일을 맞은 정 상임감사를 만나 앞으로 병원 운영에 대한 포부와 방향성을 들어봤다. 상임감사로 취임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중책을 맡게 되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전북대병원이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지역거점공공의료기관으로써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내부 통제와 청렴 문화를 강화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동안 사회생활을 하면서 본의아니게 다양한 분야를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상임감사라는 직책이 두렵지만, 여러 직원분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상임감사는 어떤 역할을 하나요. “상임감사는 병원의 전반적인 업무가 관련 법령과 내부 규정에 따라 적법하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각종 위험 요인을 사전에 예방하는 역할을 합니다. 단순히 사후 감사를 넘어서, 병원이 보다 투명하고 공정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내부 감시와 자문 기능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또 법령과 내규가 규정에 따라서 적법하게 잘 이뤄지고 있는 건지 이러한 부분들을 살펴보는 것이 감사의 기본이고 시작과 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병원은 특성상 예산집행과 의료행위가 밀접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현재 어떤 점을 중점적으로 보고 계신가요. “의료기관은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진료 활동을 수행하는 동시에 막대한 예산을 집행하는 기관입니다. 따라서 예산이 불필요하게 낭비되지 않도록 사업의 타당성과 효과성을 사전에 면밀히 검토하고 있으며, 특히 의료장비 도입이나 외주 용역, 연구비 집행 등과 관련한 투명한 절차 준수에 중점을 두고 투명한 절차를 준수 할 수 있도록 지켜보고 있습니다.” 현재 공공의료기관으로써 투명성과 청렴성 확보를 위해 추진하고 있는 것은. “청렴은 기관 운영의 핵심 가치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임직원의 청렴 인식을 높이는 청렴 교육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청렴 연수원 교육을 다녀왔습니다. 교육과정에서 들었던 청렴은 행복이다. 행복은 가까운 것에서 찾는 것이다라는 말을 토대로 직원들과 함께 청렴 자체를 자연스러운 문화로 정착시키고 싶습니다. 또한, 부패 취약 분야에 대한 내부 통제 제도를 점검하고 강화해 부패를 예방하고 있으며, 병원 운영을 다양한 방식으로 모니터링하여 개선이 필요한 부분은 개선하고, 권고 사항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전 임직원이 함께하는 청렴 실천 결의대회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 자리에서 청렴 결의문을 낭독하고 청렴 실천을 다짐할 예정입니다.” 현재 업무 추진에 있어 애로사항이 있다면. “의료기관 특성상 전문 영역이 많고 다양한 부서가 유기적으로 협업하기 때문에 감사 과정에서도 각 부서의 실무적 이해와 조율이 중요합니다. 감사를 ‘지적’이 아닌 ‘개선’의 기회로 받아들이는 조직문화가 확산되어야 하는데, 구성원 모두가 감사실의 취지를 잘 인지하고 긴밀하게 협조해 주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각 부서의 부서장들과의 소통을 늘려가겠습니다.” 상임감사로서 반드시 추진하거나 개선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사전 예방 중심의 감사 체계를 정착시키고 싶습니다. 문제가 발생한 후에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리스크를 사전에 인지하고 제도적으로 보완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자율점검 시스템과 내부 통제 기능을 더욱 강화하고, 실무자들이 부담 없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소통 창구도 마련할 계획입니다. 다양한 의견을 수용해 추후 외부의 감사가 있더라도 그동안은 방어 형식의 감사 준비를 했다면, 앞으로는 미리미리 대비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고 싶습니다.” 현재 의정 갈등으로 병원 상황이 어렵습니다. “의료 현장의 혼란은 결국 환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특히 공공병원은 지역의료의 중추이자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피해는 더욱 클 수 있습니다. 갈등 상황에서도 병원이 본연의 진료 기능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내부적으로는 더욱 투명하고 책임감 있는 운영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상임감사 자리에 대해 고민을 해보셨나요. “이제 중년에 접어들면서 지난 사회생활을 돌아보니 40~50대는 인생의 마지막 봉사 시기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공공기관의 감사 역할을 통해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북대병원이라는 좋은 기관에서 감사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하며, 이 병원이 더 좋은 병원으로 성장하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습니다.” 청렴 등을 위한 전북대병원만의 특색있는 제도가 있다면. “전북대병원은 청렴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자체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청렴시민감사관제도, 청렴간담회 등 병원 상황에 맞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해 청렴 문화를 확산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부서별로 정기적인 청렴간담회를 실시하고 있으며, 외부 시각을 통해 병원의 청렴 수준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 청렴시민감사관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패 공익신고의 활성화를 위해 신고 방법과 신고자 보호 제도를 홍보하고, 이를 통해 부패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끝으로 전북일보 독자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전북대병원이 도민들께 신뢰받는 공공의료기관으로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감사로서의 책임과 소명을 다하겠습니다. 병원의 모든 구성원이 환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마음으로 임할 수 있도록 더욱 투명하고 건강한 병원 문화를 만들어가겠습니다. 지역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정경복 상임감사는⋯ 정읍 출신인 정경복 상임감사는 (유)신호건설의 대표이사, 대한건설협회 전라북도회 감사,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외이사, 정운천 전 국회의원 보좌관 등을 역임했다. 그는 자신의 임기 동안 현재는 낮은 전북대병원의 청렴도 등급을 1등급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정 상임감사는 “저는 항상 무에서 유를 만들었다”며 “국민들이 정말로 사랑하는 전북대병원을 만들기 위해 청렴도 1등급 평가는 꼭 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도민이 믿을 수 있고 환자들이 만족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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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수
  • 2025.04.20 17:12

고창 웰파크호텔, 체류형 관광 시대를 열다

[Advertorial]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석정리에 고창 관광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프리미엄 호텔이 공식 문을 연다. (주)서울시니어스타워(이사장 이종균)가 운영하는 고창웰파크호텔이 19일 고창 현지에서 개관식을 갖는다. 이 호텔은 단순한 숙박을 넘어, 체류형 관광이라는 고창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석정온천과의 시너지, 고창의 천혜 자연, 풍부한 문화유산과 연계해 ‘머무는 여행지’로서의 고창 이미지를 굳건히 하고 있다. △머무는 여행지로서의 도약 고창은 고인돌 유적을 비롯해 무려 7건(고인돌, 갯벌, 판소리, 농악, 세계지질공원, 생물권보전지역, 세계기록유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역사·문화 자원의 보고다. 여기에 선운산, 동호해수욕장, 람사르 습지 등 빼어난 자연경관까지 갖췄지만, 그동안 관광객들이 ‘하루만 둘러보고 떠나는’ 한계에 직면해 있었다. 이는 숙박 인프라의 부재에서 비롯된 구조적인 문제였다. 고창웰파크호텔은 이러한 지역적 한계를 해결할 새로운 키 플레이어로 등장했다. 지역 관광이 일회성 관람에 그치지 않고, 여유롭게 머물며 깊이 있는 체험으로 이어지는 체류형 관광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석정온천과 함께하는 프리미엄 치유 앤 힐링 스테이 고창웰파크호텔은 단순한 호텔이 아니다. 건강과 휴식을 중시하는 ‘웰니스 라이프’ 트렌드에 발맞춰 석정온천과 연계한 치유와 힐링 중심 숙소로 설계되었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편안함을 극대화한 객실(스위트룸 5실∙스탠다드 86실 등 총 91실)은 물론, 레스토랑, 카페, 웰니스 센터, 노천온천 시설, 스카이라운지(9층)까지 구비해 여행자들에게 ‘머무는 것 자체가 여행이자 치유와 힐링’이 되는 새로운 차원의 체류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석정온천의 게르마늄 온천수는 면역력 증진과 피로 회복에 탁월한 효능을 나타내 투숙객들에게 단순한 휴식을 넘어 건강한 회복의 시간을 선사한다. 이로써 웰파크호텔은 프리미엄 숙소 이상의 의미를 갖는 ‘치유 앤 힐링 복합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고창의 자연과 문화를 담은 공간미학 웰파크호텔의 외관과 실내 디자인에는 고창의 자연과 전통이 녹아 있다. 호텔 곳곳에 고창 특산물과 풍경을 형상화한 인테리어 요소가 적용되어, 투숙객은 단순한 숙박을 넘어서 ‘지역을 체험’하게 된다. 또한 인근에는 고창읍성, 고인돌 유적지, 선운산, 학원농장 청보리밭, 람사르 습지, 동호해수욕장 등 대표 명소들이 30분 이내 거리에 있어 여행 동선의 편의성도 높다. 골프 마니아에게는 석정힐CC, 고창CC, 선운산CC 등 골프 인프라가 가까워 체류형 골프 여행지로도 주목받고 있다. △지역과 함께 만드는 지속 가능한 관광 웰파크호텔은 단순한 민간 숙박시설이 아니다. 지역 경제와의 상생을 전면에 내세운 복합 공간이다. 호텔 레스토랑에서는 고창 황토밭에서 자란 건강한 식재료를 적극 활용하고, 지역 농산물 기반의 브런치와 프리미엄 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실제로 호텔이 선보인 ‘브런치 뷔페’는 맛과 가격 모두에서 높은 만족도를 자랑하며, 중년 여성들을 중심으로 ‘고창 점심 맛집’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역 농가와의 협업을 통해 농특산물 유통에도 기여하며, 관광산업이 곧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지는 지속 가능한 모델을 구축 중이다. 또한 고창군의 축제와 문화행사와도 적극적으로 연계하고 있으며, 앞으로 다양한 체험형 프로그램과 테마 패키지를 운영할 계획이다. △웨딩·컨벤션의 중심지로도 각광 고창웰파크호텔은 프리미엄 웨딩 및 대형 행사의 중심지로서도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고창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야외 결혼식과, 최대 600석 규모의 대형 컨벤션 홀은 기존 지역 숙박시설과 차별화된 경쟁력을 자랑한다. 지난 4월 11일 이곳에서 열린 ‘제5회 장수학 콘서트’는 그 가능성을 실증했다. 약 500여 명이 참석한 이 공연은 오케스트라, 국악, 성악 등 다채로운 무대가 어우러진 품격 높은 공연으로, “이런 공연을 고창에서 볼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관객의 찬사를 받았다. 넓고 화려한 무대, 우수한 음향 시스템은 향후 학술대회, 기업 세미나, 문화행사 등 다양한 행사 유치의 기반이 되고 있다. △‘웰니스 명소’로 주목받는 고창 웰파크시티와의 연계 고창웰파크호텔은 국내 최대 최고의 웰파크시티 내에 위치해 ‘웰니스 관광 복합 단지’의 심장부 역할도 수행한다. 웰파크시티는 2025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의 우수 웰니스 관광지 88선’에 이름을 올리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황토와 피톤치드 숲, 수치료 시설, 노인·어린이 모두를 위한 건강 체험 공간 등 고창만의 건강 리타이어먼트(은퇴) 인프라는 노년층뿐만 아니라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도 높은 만족도를 주고 있다. 웰파크호텔의 등장은 웰파크시티의 체류 인프라를 완성시키며, 고창이 국내 대표 웰니스 관광지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스쳐 지나던 고창에서 ‘머무는 고창’으로 고창웰파크호텔의 개관은 단순히 고급 숙박시설의 등장 그 이상이다. 고창군은 이제, 스쳐 지나던 관광지가 아닌 ‘머물며 누리는 여행지’로 본격적인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석정온천과 웰파크호텔이 있다. 이번 주말에는 고창청보리밭 축제가 학원농장에서 열려 호텔과 골프장, 축제장을 오가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으로 고창은 더욱 활기를 띨 전망이다. 지역과 상생하고,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공간. 고창웰파크호텔은 고창의 새로운 브랜드이자, 대한민국 체류형 관광의 미래가 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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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17 17:45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1) 〈검사직제〉〈보방조례조회통첩식〉〈전주부보고서〉〈각부보고서〉

1895년 이후 동학농민군에 대한 법적 조치와 처벌 보고서류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895년(고종 32) 조선 정부의 공문서식과 재판 관련 자료로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동향과 관련된 전국 각 지역의 각종 보고서이다. ①〈검사직제〉는 1895년 4월 15일 법부령 제2호로 반포된 검사(檢事)의 직제(職制)에 관한 규정을 적은 책이다. 〈검사직제 제정지건〉(1895.4.9.)으로 기안문이 실려 있다. 검사직제는 모두 18조목으로 검사의 범죄 수사권(1조), 형사상 법률의 정당한 적용을 감시해야 하며(2조), 범죄의 고소·고발을 수리해야 하며(6조), 관리의 부당한 행위를 발견하면 증거를 수집하여 관리징계처분을 청구하고 공소(公訴)를 제기해야 하며(7조)‚ 체포나 구류를 마음대로 행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하고‚ 피고인이 오래 구류됨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며(8조), 검사는 재판소에 대하여 독립하여 그 사무를 행할 수 있다(18조) 등으로 되어있다. 원래 기안에서는 17조였으나 달라진 것은 제4조를 추가했기 때문이다. “검사는 사형판결이 이미 확정할 시에는 조속히 소송기록을 법부대신에게 정(呈)하여 그 지휘를 수(受)해야 이를 집행함이 가(可)하니라”라는 조항이다. 검사직제는 갑오개혁 때 중앙권력이나 지방관의 통제로부터 독립하여 오로지 법에 준거하여 민사·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갑오개혁의 법제개혁은 행정과 사법을 분리하여 공정한 법집행을 도모하는 것이었으나 실제 전격 실시하기 어려웠으므로, 이내 1895년 6월 1일 법부훈령 제2호로 당분간 관찰사가 재판소 판사, 참서관이 재판소검사를 겸임하도록 하고 각지방에서도 군수가 관내 재판사무를 겸임하도록 하여 재판소 제도가 크게 후퇴한 바 있었다.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 소송절차와 법부와 검사의 직제를 규정한 법령으로 대한제국기에도 영향을 끼쳤다. ②〈보방조례조회통첩식〉는 1895년 사법제도를 개혁하면서‘보방조례(保放條例)’와 각 정부기관 사이에 왕래하는 문서 양식을 분류하고 설명한 ‘조회통첩식(照會通牒式)’등 제반 법규 규정을 수록한 자료다. <보방조례>는 전문 25개조로 형사 피고인과 그 보증인될 사람은 언제라도 보방(保放-보석)을 신청할 수 있으며‚ 재판관은 피고인이 도주하거나 죄증(罪證)을 은닉할 우려가 없을 때, 그가 중죄(重罪)에 해당하거나 과거에 중죄형으로 처벌받은 적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보방을 허가할 수 있다는 규정을 수록하고 있다. 실제 동학농민군의 처벌과 관련해서는 이 규정이 적용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또한 자료의 뒷부분인〈공문류별급식양〉은 갑오개혁 이후 새로 제정된 공문 양식인 조회·통첩·훈령·지령·고시·보고서·질품서·청원서를 각각 설명하고 작성 지침을 소개하고 있다. 갑오개혁이전의 관문 전령 감결(甘結) 하첩(下帖) 등을 훈령으로 개칭한 것 등이 설명되어 있다. 〈보고서식〉의 경우에는 “보고서 ○호, 본부소관 각군소유정형을 별지에 개록(開錄)하야 보고하오니 사조(査照)하시믈 요홈”이라 쓰고나서 해당 관원의 성명과 관인, 그리고 모부 대신 성명 각하 관인을 찍게 하였다. 새로 바뀐 공문서 문서양식에 따라 작성된 보고서가 각 지역의 보고서자료이다. ③〈전주부보고서(全州府報告書)〉는 1895년 7월 19일 전라도 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법부(法部)의 훈령에 의거하여 올린 동학 농민군의 정배(定配)에 관한 보고서이다. 그해 6월 25일 법부에서는 임피현에 거주한 고장현(高長賢)을 함경도 영흥에 정배했던 경위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는 1894년 7월에 임피군 남일면(南一面) 상갈영리(上曷零里)의 동학 접주로서 40명 동학군을 거느리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체포되어 전주부로 압송되고‚ 1895년 3월에 함경도 영흥에 정배되었다고 보고하였다. 그 후 8월에 이르면,“본부죄인(本部罪人) 83명, 각읍 도인(徒人) 196명 등 279명” 등을 전격 석방하였다(〈관보〉1895년 8월 1일자 기사). 이때 고장현도 포함되었다. 전주부 보고서는 단지 전주부에서 작성한 2쪽짜리 문서이지만, 1895년 당시 동학 농민군 지도자에 대한 사후 처리 등을 알 수 있는 자료다. ④ 〈각부(各府) 보고서〉는 역시 법부에서 편찬한 각종‘보고서철(報告書綴)’이다. 1895년 7월에서 9월까지 전국 23부 지방에서 법부에 올린 보고서 13건과 질품서 5건 등 18건의 문건(文件)을 모아서 묶은 문서철이다. 전체 표지나 제목은 없지만, 편철한 순서대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해주부 관찰부의 사기 범인 압송 사실, 충훈부 둔토 수취 공문서 위조에 관한 안성군 보고, 개성인 김경구(金景九) 삼포사건에 대한 경무사의 보고서 및 질품서 등이 있다. 안동부 산하 예안(禮安) 거주 김제룡(金濟龍)이 참판이나 판서로 칭하면서 와언과 망설로 통문을 돌려 민인을 선동하여 취당을 한다는 내용으로 그에 대한 공초자료(1895.8.16. 초초. 및 8.17 재초)와 함께 주민들의 소장 전문을 게재하였다. 각 지방에서 올린 범죄인을 체포와 살인사건 조사 보고‚ 도주한 죄수 체포 및 책임자 처벌 등 다양한 사유가 포함되어 있다. 갑오개혁 이후 법부의 지시 사항과 각 지방의 질품서를 통해 당시 지방 법무 행정의 실태를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자료는 해주부 강령군수 유관수(柳灌秀)가 1895년 8월에 법부에 보고한 <강령군(康翎郡) 비괴(匪魁)의 성명 성책>이다. 강령군에는 김영하(金永夏), 오가인(吳可人), 오헌근(吳憲根), 오원경(吳元京), 현학진(玄學振), 조사여(趙士汝), 조붕도(趙鵬道) 등 동학의 접주와 해당 지역의 하리층인 조순승(曺舜承), 박선희(朴善凞), 성재식(成載植), 강호걸(强豪傑) 등 동학지도자 17명의 활동 내역을 자세히 적고 있다. 이들은 갑오년 10월 동도를 규합하여 황해도 8개 영읍을 점령하여 문부를 불사르고 군기를 탈취하고 공해를 깨트리고 불살랐다. 실제 강령현의 경우에는 1894년 10월 6일 농민군이 관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관아가 불타고 무기를 빼앗겼으며, 민가 400여 호가 불탔을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후 다음 해 1월에도 임종현, 김영하 등은 신천, 재령, 옹진, 강령 등을 재차 침입하였고, 해주성을 다시 공략하기도 하였다가 2월에 일본병의 개입으로 진압되거나 잠시 흩어졌다. 이후 사태를 진정시키고 나서 작성된 군수의 보고서에는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강령 및 해주 일대에서 행한 각종 행태를 상세히 열거하였다. 오원경, 배동명 등 일부 붙잡은 사람도 거론하였지만, 상당수는 잠적하여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고 보고하고 있다. 또한 보고서의 내용과 관련해서 2차례에 걸친 해주성 공략의 주동 인물인 임종현(林鐘賢, 혹은 林宗鉉)의 활동도 주목된다. 임종현이“스스로 감사의 위치에 오르고 기타의 흉악한 무리를 각 부군현(府郡縣)의 수장으로 삼으려고 이미 부사와 군수로 할 인물을 선정하였다고 한다”고 보고하였듯이, 당시 임종현 자신을 감사의 위치로 올려놓고, 성재식을 강령현감으로 삼는 등 농민군 지도자를 각 지역의 부사와 군수 등으로 임명하는 행태를 보였다. 이는 황해도에서 갑오 정부의 지방행정체계를 배제하고 농민군 지도부 위주로 독자적인 지방권력을 실행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강령 지방의 사회동향은 현재 동학농민혁명 재단에 소장되어 있는〈황해도 강령현민(康翎縣民) 등장(等狀)〉 자료에도 나타난다. 이는 황해도 해주부 강령현에 사는 정성장(鄭聖長) 외 4인이 법부(法部)에 현감 유관수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인데, 강령 현감이 피감(被監)된 사유가 동학농민군의 피해 복구 비용의 징수 과정에서 탐학이 있었다는 이유였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청렴 공정한 현감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인 오가인(吳可人)과 조카 오헌근(吳憲根)이 무고하여 누명을 썼으니 그 억울함을 밝혀 달라.”라고 하였다. 앞서 소개한 강령지방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오가인과 오헌근의 죄상을 고발하는 내용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참여자와 후속조치를 둘러싼 강령지역내 사회세력간의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황해도 일대 동학농민군의 동향은 해주성 점령 당시 감사였던 정현석(鄭顯奭)의〈갑오해영비요전말(甲午海營匪擾顚末)〉과 일본군의〈동학당정토약기(東學黨征討略記)〉에 수록되어 있다. 일본군 진압기록에서도 ‘진정 동학당(眞正 東學黨)’, ‘일시 동학당(一時 東學黨)’, ‘가짜 동학당(僞 東學黨)’ 등으로 구분하고 임종현을 비롯한 4명의 동학지도자를 특정하여 거론하였지만, 이들 자료에서는 상세한 활동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위의 각부보고서에는 강령군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군 지도자의 활동 내역과 포착 상황 여부 등도 상세히 전달하고 있다. 황해도 일대 동학농민군 활동 연구가 아직 미진한 상태이어서 해당 지역 동학농민군과 지도부의 동향을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자료로서 의미가 크다. 이상 동학농민군에 관한 사법처리와 관련된 각종 보고서류 등 4종 자료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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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16 19:59

"행복했습니다"⋯'청년 이장'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석 달간 "오늘은 경로당으로 출근하겠습니다!"라고 외치던 '청년 이장'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사무실로, 취재 현장으로 출근합니다. 잠깐 기자라는 직업은 내려놓고 완주군 고산면 화정마을의 청년 이장으로 지내면서 행복한 일도, 슬픈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무 사고 없이 잘 마무리해서 다행입니다. 다른 것보다 기성 언론이 SNS(사회관계망서비스) 등에서 파생되는 이야기를 주워 담고 있는 요즘 시대에 지역 신문이 할 수 있는 진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이 잘 전달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책을 끌어내고 고발하는 기사·기획 모두 좋지만 월요일 아침마다 신문을 봤을 때 조금은 가볍게, 기분 좋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기획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저희가 매일 말하는 '지역소멸' 하면, 마트가 멀어서, 문화 생활을 즐길 수 없어서, 일자리가 없어서 등 이러한 이유만 전달하는 건 최대한 피하려고 했습니다. 전북을 비롯해 전국 지방자치단체가 노력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을 저희가 석 달 동안 해결하는 건 무리라고 일찍이 알았기 때문이죠. 차라리 우리는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지역이 사라지지 않으려면 그 지역이 살고 싶은 장소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른 것보다 체험 프로그램에 집중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함께했던 석 달을 돌아보면 일주일에 화·수요일 이틀씩 상주하면서 마을 주민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어르신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일부터 사람과 소통하는 일까지 교훈을 얻은 게 많은 듯하네요. 이제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도 얻었습니다. 그동안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주민들과 함께했던 일이 다 스쳐 지나갑니다. 기획에 도움 주신 분들 모두에게 감사하지만 화정마을 주민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사랑으로 맞이해 주고 항상 좋은 말씀만 해 주셨거든요. 너무 감사했습니다. 끝으로 저희의 기획이 일반적인 기사의 틀과 달라 낯설게 느꼈을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처음엔 낯설었거든요.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에 펼쳐질 전북일보의 또 다른 도전들도 너그럽게 봐주길 바랍니다. '청년 이장'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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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12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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