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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영원한 약속 ③

1938년 2월 찬옥은 신문지상에서 현제명 내전 음악회라는 기사를 읽었다.당시 조선 내 최고의 음악가 현제명 선생이 전주에 와서 음악회를 개최한다는 기사였다. 반갑고 흥분되었다. 현제명 선생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말을 많이 들어 잘 알고 있었다.현제명이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한 후 처음 얻은 직장이 바로 전주신흥학교였다.대구 기독교 집안 태생이었던 현제명은 평양에서 기독교계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로 내려와 같은 기독교계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 것이다.영어와 음악, 두 과목을 담당했다. 학교 앞 서문교회에 다니면서 소녀가극단을 지도하기도 했다. 전주유치원 교사 양신선 씨와 결혼하고 미국인 선교사 후원으로 미국유학을 갔다가 귀국, 연희전문 교수로 있었다. 양신선의 막내 여동생이 찬옥과 가까이 지내는 친구였다.그때 전주신흥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교 처분을 받아 문을 닫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첫 직장이었던 학교에 들러 실의에 빠져있는 교사들과 관계자들을 위로하고, 처가 어른들에게도 인사드릴 겸 전주에 와 음악회를 개최하는 것이라고 했다. 전주에 온 김에 다음에는 광주까지 가는 일정도 잡혀 있었다.찬옥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현제명 선생을 금구학교로 모셔 보자는 착상이었다. 정승철, 테라다 교장과 상의했더니 기발한 구상이라며 적극 추진하라고 당부했다. 특히 교장은 자기 자신도 이 은상 작사, 현제명 작곡 그 집 앞을 부를 줄 안다며 현 선생이 오시면 학교의 영광이라고 좋아했다.현 선생의 처제를 통해 교섭한 결과 예상 밖으로 쉽게 승낙을 얻어냈다. 현 선생도 금구학교를 알고 있고 광주 가는 길에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낼 수 있다는 통보가 왔다. 당시 30대 후반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현제명은 우리 음악 보급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고 있던 때였다.찬옥은 기뻤다. 학교에 강당이 없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음악회를 열었다. 교장이 현 선생 소개 말씀을 한 다음 정승철이 풍금을 쳐 반주하고 당대의 최고 테너가 자신이 작곡한 가곡들을 불렀다. 그 집 앞을 부를 때는 교장도 함께 불러 음악회가 절정에 이르렀다.제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었다는 자부심으로 찬옥은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교장은 자기 교장 재임 중 최고 행사였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오노다는 시종일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행사를 지켜보고 있었다.호사다마였다. 며칠 후 도 학무과에서 교장, 정승철. 최찬옥에게 출두하라는 통지가 왔다. 세 사람이 학교 음악회를 주관, 주최했다며 시학관이 경위를 조사했다. 분위기가 아주 위압적이었다. 대일본제국의 교육정책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였다고 몰아세웠다.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교장은 책임은 전적으로 자기에게 있다며 정승철은 자기 지시로 풍금을 연주했을 뿐이라고 변호해 주었다. 찬옥도 이번 행사는 자기가 현제명 선생을 잘 알아 개인적으로 추진한 것으로 교장과 정승철은 책임이 없다고 옹호했다.정승철은 지금 모든 보통학교에서 전 학년에 걸쳐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조선어 가곡 음악회를 한 번 연 것을 부당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며 논리적으로 맞섰다. 그러나 시학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열흘이 지나 징계 및 인사 조치 내용이 통고됐다. 테라다 교장에 대해서는 3개월간 매월 20% 감봉, 정승철에 대해서는 2개월간 매월 10% 감봉, 최찬옥은 권고 사직. 더욱이 테라다 교장은 벽지 신설 학교로 전보됐다.최찬옥은 테라다 교장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자기 때문에조선에 대해 이해가 깊은 교육자가 희생됐다는 죄책감이 들어 교장의 손을 잡고 눈물을 삼켰다. 테라다는 오히려 자기는 괜찮다며 자기 잘못으로 찬옥이 교단을 떠나게 됐다고 미안해했다.정승철은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고 징계조치가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항변했다. 승철은 이번 조치의 핵심은 학무당국이 음악회를 악의적으로 확대해석해 테라다를 축출한 데 있다고 단정했다.음악회 개최를 밀고한 오노다는, 친 조선적인 테라다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학무당국이 배치한 밀정 교사로 알려졌었다.조선인들 사이에 그런대로 신망을 얻고 있는 테라다를 제거하려고 당국은 그 전부터 여러 차례 기회를 노려 왔던 것이다.결과적으로 학교에 초유의 징계 파동을 몰고 온 음악회로, 서로 뜻이 맞았던 테라다, 정승철, 최찬옥은 헤어지게 됐다. 찬옥은 불과 9개월 만에 교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그동안 정들었던 아이들과 이별하고 교정을 떠나자니 눈물이 앞섰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제의 틀 안에서 보람을 느낄 수 없는 교사생활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이 가슴을 시원하게 했다. 〈계속〉장성원

  • 문학·출판
  • 기고
  • 2016.05.25 23:02

[연재소설] 영원한 약속 ②

승철이 기숙사로 들어간 지 어느덧 3년여가 흘렀다. 승철은 5년제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가 됐고 전주여고보를 졸업한 찬옥은 집에서 쉬고 있었다. 찬옥은 교사가 되어 어린이들을 가르치거나 농촌계몽운동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시집가야 한다며 반대했다. 특히 어머니는 완강했다.찬옥은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워 그래도 융통성이 있는 아버지를 졸랐다. 첫째, 딱 1년만 교편을 잡고 그 다음엔 부모님이 정해주는 사람과 결혼한다, 둘째, 직장은 전주시내와 그 인근 지역으로 한정하고, 셋째, 날마다 집에서 출퇴근하고 절대 집밖에서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딸의 간청을 못 이긴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설득한 다음 딸에게보통학교 촉탁교사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발령지는 전주에서 서남쪽으로 40리 떨어진 김제 금구보통학교. 금구는 전주~김제~부안, 전주~정읍으로 가는 국도가 갈라지는 교통의 요지로 전주에서 출퇴근이 가능했다.목탄차 버스지만 하루 왕복 20여 편 버스가 운행됐다. 찬옥도 부안 해수욕장이나 정읍 내장사를 갈 때 여러 차례 지나친 적이 있어 잘 아는 면사무소 소재지였다. 찬옥도, 아버지도 마음에 들어 했다.첫 출근 날 찬옥은 설레는 마음으로 첫 버스를 타고 금구에 도착했다. 50분 정도 걸렸다. 학교 뒤편 은행나무와 홰나무에는 황새와 왜가리들이 하얗게 앉아 있었다. 어떤 것들은 이른 아침부터 창공을 훨훨 날아다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장관을 이루었다. 교정에 들어서자마자 수령이 몇 백 년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가 큰 그늘을 만들어 사람을 시원하고 안온하게 맞이했다. 합방 직후 설립된 학교라 도내에서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보통학교 중 하나였다.찬옥은 먼저 교장실로 갔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10여 분 지나 교장이 출근했다. 50 전후의 콧수염을 기른 일본인이었다. 교장은 웃는 얼굴로, 긴장이 풀리지 않은 찬옥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찬옥은 깜짝 놀랐다. 교장이 조선어로 말하지 않는가! 그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전주 사투리로. 찬옥은 단박에 교장에게 친근감을 느꼈다.교장은 교사들이 모두 출근하자 교장실에서 신임교사 상견례 자리를 만들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정승철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벌써 여러 해 전에 헤어졌다고 하지만 찬옥은 한눈에 정승철을 알아보았다.키는 중키로 건장한 체격에 굵고 반듯한 이목구비와 밝은 낯빛. 동생 가정교사로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워지고 의젓해 보였다. 찬옥은 뜻밖에도 승철을 만난 기쁨이 말할 수 없이 컸지만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천연스럽게 인사를 나누었다.승철도 태연하게 인사말을 했다.어제 교장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전주여고보를 나온 선생님이 오신다고 했지만 최 선생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반갑습니다. 정말로 이 학교에서 찬옥이를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교장이 서로 잘 아는 사이냐?고 물었을 때 찬옥이 친인척 되는 사이라고 얼버무렸다.이 학교에는 교장을 비롯해 교사가 모두 14명이었다. 일본인은, 교장과 2년 전에 왔다는 미혼 교사 오노다(小野田)가 있었고 나머지 12명은 조선인. 6명이 전주사범, 3명이 전주고등보통학교, 2명이 기타 학교 출신이었고 그리고 최찬옥이 이 학교 최초의 여교사로 부임한 것이다. 교장 테라다(寺田)는 14년 전 서른 세 살의 나이에 이 학교 교장으로 취임, 마흔 일곱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학교에서 기록적으로 장기근속하고 있었다. 자기 말대로 전주 사람이 다 돼버렸다.물론 공식적으로는 일본어를 썼지만 사석에서는 조선어를 곧잘 썼다. 일본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좌중을 웃길 때면 전라도 사투리를 구성지게 늘어놓았다. 판소리를 좋아했고 손색없이 한 가락 뽑아내기도 했다. 여류 명창 이화중선의 춘향가중 사랑가를 흉내 내 부를 때는 많은 박수를 받았다.양식이 있고 트인 사람이었다. 어느 자리에선가 자기는 큐슈 출신으로 본래 조선에서 건너간 조상의 후예라고 집안 내력을 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이런 교장의 학교운영 때문인지 학교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러나 오노다 앞에서는 조선어를 써서는 안 되고 반드시 일본말을 해야 한다고 선배조선인 교사들이 주의를 주었다.평소 입을 다물고 지내던 조선인 교사들이 어쩌다 오노다가 학교에 나오지 않을 때는 쾌활하게 조선말로 담소를 나누었다. 찬옥은 이런 때가 어찌나 좋은지, 중압감에서 잠시 벗어나 시원한 바람을 쐬는 듯 기분이 상쾌해졌다.찬옥은 1학년을 담임했다. 1주에 국어 10시간, 조선어 5시간, 산수 5시간, 그리고 수신, 도화, 창가, 체조 각각 1시간씩을 가르쳤다. 국어는 일본어조선어를 가르치는 것은 조선어를 계속 사용하기 위한 시책이 아니라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치는데 보조어로 사용하기 위해서 가르치는 것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의 말과 글을 후세들에게 당당하게 가르치지 못하는 비통함을 찬옥은 교육현장에서 뼈아프게 실감했다.승철은 4학년을 맡았다. 저학년과 비교, 1주에 국어가 12시간으로 늘어난 반면 조선어는 3시간으로 축소됐다. 그리고 국사가 2시간 배정됐다. 국사는 물론 일본역사다.일본역사를 국사로 가르치는 것은 고통이요, 치욕이라고 승철이 찬옥에게 울분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 때 찬옥이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자고 위로하기도 했다. 승철의 국사교육이 성의가 없고 불량하다고 시학으로부터 주의를 받은 적도 있다.한번은 정승철이 맡고 있는 반의 순덕이라는 여자 아이가 10일 넘게 장기 결석을 했다. 순덕이와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남자 아이에게 이유를 물어봐도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만 대꾸했다. 순덕이는 열한 살에 취학, 다른 아이들보다 서너 살이 위였다. 승철은 토요일 오후, 여자 아이니까 찬옥이 함께 가줄 수 없느냐고 요청해 찬옥과 함께 남자 아이를 앞세워 순덕의 집을 찾아 갔다.마을에 이르러 낡은 초가집 앞에 한 남자가 지팡이를 든 채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을 안내하던 남자 아이가 저 사람이 순덕이 아버지라고 했다. 순덕이 아버지는 사람들이 다가서는 인기척에 눈을 껌벅껌벅할 뿐 계속 장승처럼 서 있었다. 알고 보니 청맹과니였다. 남자 아이는 순덕이 아버지에게는 아는 체도 않고 순덕이 집으로 쑥 들어가 큰 소리로 순덕아, 선생님 오셨다! 선생님 오셨어!하고 외쳐댔다.그러나 순덕이는 나타나지 않고 순덕이 어머니가 머리에 무명수건을 동여맨 채 방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아니, 선생님 어쩐 일이시라우! 어서 올라 오시기라우.승철과 찬옥은 마루에 걸터앉아 사정을 들었다. 순덕이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남동생 하나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장님인지라 어머니가 손바닥만한 밭뙈기를 일구어 입에 풀칠을 하는 극빈 가정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병환으로 몸져누워 순덕이가 어머니 대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었던 것이다.딱한 사정에 승철과 찬옥은 용돈을 털어 약값에 보태 쓰라며 순덕이 어머니 손에 쥐어 주고 발길을 돌렸다.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승철과 찬옥은 마음이 아파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을 걷다가 찬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저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딸을 학교에 보낸 순덕이 엄마가 참 장하네요.그러네요. 순덕이도 기특합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고생하는 데도 항상 표정이 밝았거든요. 그런 아이인 줄 몰랐어요.정 선생님, 우리가 학교에서 정신적으로 고생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네요.그렇습니다. 오늘 순덕이 집 방문에서 제가 느끼고 배운 게 큽니다.이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학교 앞까지 10리 길을 되돌아 왔다. 아팠던 마음도 조금 풀렸다. 승철이 오늘 저 때문에 고생하셨으니 저 자취하는 데 들려 물이라도 한 잔 드시고 가십시오.라고 제의했다. 승철은 학교 앞에 방을 얻어 자취하고 있었다.처녀교사가 총각선생 자취하는 데 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찬옥은 선뜻 동의했다. 몇 해 전 자기에게 동인시집을 주려했던 승철이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인지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이 있었다. 사실 찬옥은 내색하진 않았으나 승철에게 애틋한 심정과 여운을 가지고 있었다.승철이 밖에서 미수를 준비하는 사이 찬옥은 방안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옷가지며 모든 것들이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앉은뱅이책상 위 책꽂이에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그 가운데 몇 권의 중고서적이 눈에 띄었다.박은식 저 한국통사와 신 채호 저 조선상고사 등이었다. 찬옥은 처음 보는 책들이었다. 승철이 민족의식이 투철해 자취방에서는 몰래 조선역사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미수를 마신 다음 찬옥은 곧바로 전주로 왔다. 승철이 어떤 사람인가를 좀 더 깊이 있게 알게 된 것 같았다. 〈계속〉장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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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24 23:02

[연재소설] 영원한 약속 ①

김제출신으로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제1516대 국회의원을 지낸 장성원씨가 단편소설 영원한 약속을 발표했다.여행길에서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엮은 작품인데, 전주를 배경으로 그 안에서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특히 일제강점기의 풍경이 생생하다. 작품을 연재한다.3년 전 초가을이었다.전화벨이 울렸다.네에한 의원님 댁인가요?예, 그렇습니다. 제가 한입니다만.안녕하셨어요. 저, 정승철 교장 아들입니다.안녕하셨어요. 아버님 강녕하신가요?아버지께서 오늘 아침 돌아가셨습니다. 전북대학 장례식장에 모셨습니다. 203호실입니다, 2층 3호실입니다.아, 그러셨어요. 우선 조의를 올리고 교장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이따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저를 여러 가지로 친조카같이 지도해주셨는데한대희(韓 大熙)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정 교장은 정말 한대희에게 고맙게 해 준, 잊을 수 없는 분이었다. 한대희가 세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헌신적으로 선거운동을 지원해 주었다.선거구 안에 살고 있는 옛날 제자들의 명단을 꼼꼼하게 작성, 일일이 찾아가서 지지를 부탁했다. 운동을 하시는데 교통비로 쓰시라고 얼마를 손에 쥐어드려도 끝내 사양하고 오히려 매번 후원금을 내놓았던 그런 분이었다.한대희는 서울 K대 법대를 졸업한 다음 해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고 판사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정계에 투신했다. 두 번은 무난히 당선되었으나 세 번째는 호남에 불어 닥친 소위 황색바람에 맥을 못 추고 낙선, 지역사회에서 변호사로 활동해 왔다. 지금도 변호사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70대 초반의 고령이라 일거리는 많지 않고 원로로서 대접 받으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한대희가 먼저 조화를 보내고 조문을 간 것은 저녁 9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저녁 식사 시간 때 밀려 왔던 문상객들이 많이 빠져 나가고 손님들이 드문드문 오는 시간이었다.한대희는 조문을 마친 다음 상주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정하고 차를 마시면서 상주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아버지께서는 오늘 아침 목욕을 하시다가 탕 안에서 그대로 운명하셨습니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그러네요.아, 그러셨어요! 더 오래 수를 하셨어야 하지만, 아흔 여섯까지 건강하게 사시다가 그렇게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큰 복을 타고 나셨습니까. 고종명이 오복 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습니까.90이 넘으신 노모를 모시고 있는 한대희로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잠시 후 상주가 무슨 비밀 얘기를 꺼내는 것처럼 나직한 목소리로 아버지께서 얼마 전에 내가 죽거들랑 한 의원과 한 의원 어머님께 꼭 알려드려라. 유언처럼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머님께서는 건강이 어떠신가요.그런대로 건강하시고 식사도 잘 하시고 계세요. 연세가 아흔 넷이셔서 마음을 못 놓고 있지요.때마침 다른 조문객이 와서 상주도 일어서고 한대희도 따라 일어섰다.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 승용차 안에서 한대희는 아까 상주가 한 말이 되씹혔다.아버지께서 얼마 전에 한 의원과 한 의원 어머님께 꼭 알려라. 유언처럼 말씀하시더라고요.나에게 알리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왜 굳이 어머니에게까지 꼭 알리라고 유언처럼 말했을까. 자식을 앞에 놓고 간곡하게 마지막 부탁을 하였다는 것은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는 분들에게 어떤 곡절이 있다한들 어쩌랴 싶어 곧 생각을 지워버렸다.한대희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침 저녁으로 어머니께 문안을 드리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이부자리도 펴드리고 개 드렸다. 병원을 가실 일이 있으면 어머니 손을 잡고 자신이 모시고 가는 효자였다.그 이튿날 아침 한대희는 어젯밤 조문 다녀온 일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교장 선생님이 욕조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 교사 출신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두어 호상이었고 장지를 선영으로 정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유언 이야기도 해드렸다.착하고 믿음직한 사람이었지. 복을 받아 마지막도 잘 가셨구나. 좋은 데로가셨을 게야 어머니의 반응은 짧고 담담했다. 그러나 아들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고 다른 데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지고눈물이 어려 있는 것이 보였다.교장선생님이 학교 다닐 때 외가에 와 있었다면서요. 어머니하고 한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고한대희는 그 인연으로 교장선생이 자기에게 각별하게 대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그렇지. 내가 언젠가 얘기한대로 네 작은 외삼촌 가정교사로 한 일 년 우리 집에 와 있었지. 같은 학교에서 선생으로 있었고.어머니 최찬옥(崔 璨玉)과 정승철(鄭 承喆) 교장이 처음 만난 것은 바로 최찬옥의 집에서였다. 최찬옥이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 정승철이 전주사범학교 4학년 때였다.찬옥의 집은 풍남동 은행나무골목 안에 있었다. 수령 5백 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고 해서 부쳐진 동네 이름이었다.은행나무 서쪽에는 일본인들의 관사와 사택으로 쓰이는 왜식 주택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났고 은행나무 동쪽에는 양반가의 오래된 한옥들이 버티고 있었다. 동서가 대조를 이루었다.찬옥의 할아버지는 전주에서 이름이 알려진 유학자요, 한학자였다. 찬옥의 아버지도 지조가 있는 선비 같은 인사였다. 이 한옥을 지키고 사는 것이, 이 집터를 지키고 사는 것이 일제의 침투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찬옥의 집은 솟을대문이 있는 큰 집이었다. 승철은 사랑채에서, 보통학교 5학년인 찬옥의 남동생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였다. 식사도 사랑채에서 동생과 겸상으로 했고 주인 내외가 부르기 전에는 안채 출입이 사실상 금지돼 있었다.찬옥은 할머니와 함께 안채 건넌방을 쓰고 있었다. 서울에서 사립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는 찬옥의 오빠는 방학 때만 전주로 내려와 지냈다.남녀유별이 철저한 이 집안에서 승철이 찬옥의 얼굴을 보기는 어려웠다. 어쩌다 보는 찬옥의 얼굴은 희면서도 막 피기 시작하는 연꽃 봉오리처럼 엷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자기와는 여러 모로 거리가 먼 부잣집 공주아가씨였다. 안채 신방돌에 가지런히 놓인 찬옥의 하얀 운동화가 꽃처럼 가슴에 안고 싶도록 예뻤다.정승철은 전주에서 북쪽으로 30리 정도 떨어진 농촌 출신이었다. 아버지도, 형님도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다. 승철은 그곳 보통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관비 혜택을 받으면서 선망의 적이었던 전주사범에 입학한 것이다.1학년 때는 친척 집에서 하숙을 했다. 학교에서는 전주사범 모든 학생의 하숙집 앞에 학교 배지와 학생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달도록 했다. 선생들이 그것을 보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학생들의 동정을 살폈다.학생들의 반일(反日)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척 어른이 그런 감시가 싫다고 여러 차례 말해 어쩔 수 없이 그 집을 나와야 했다.2,3학년 때는 아버지가 어렵게 사 준 자전거로 왕복 60리 길을 통학했다. 날씨가 좋을 때는 그래도 다닐 만 했다. 그러나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다리가 없는 소양천의 물이 불어나 10리 길을 더 빙 돌거나 자전거가 흙탕물 속에 빠져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그때 단련으로 승철은 정신력과 체력이 강인해졌다. 특히 하체가 강철 같아져 학내외 씨름판에서 그를 당해내는 적수가 없었다.4학년이 되면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승철이 4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기숙사에 화재가 발생했고 물리 선생님 소개로 찬옥 집의 가정교사로 들어온 것이다.물리 선생님은 학교에서 딱 두 분이셨던 조선인 선생님 중 한 분으로 동경물리학교를 나온 수재였다. 찬옥의 아저씨 항렬이 되는 친척이라고 했다.승철은 4학년 초 조선말과 조선 문학을 지켜나간다는 뜻을 모아 비밀리에 조직된 동인회에 가입했다. 이름은 일곱 봉우리. 학교 서쪽에 있는 완산 칠봉(完山 七峰)에서 이름을 따왔다.높은 산봉우리 같은 웅지를 품고, 해가 갈수록 날을 세우는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저항하자는 젊은이들의 기개로 모임을 만든 것이다. 일곱 명이 각자 시를 써 등사판으로 일곱 봉우리라는 동인시집을 만들어 회원들끼리만 세 부 씩을 나누어 가졌다.승철의 시 제목은 꽃신. 찬옥의 하얀 운동화를 그리워하면서 시로 지은 것이다.꽃신나의 가슴 속에품고 있는 님의 꽃신님은그 신을 신고들꽃들이 피어 있는 호젓한 길을나와 함께 말없이 걸어갑니다.벌들이 잉잉대는 과수원 길을둘이서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달맞이꽃 곱게 핀 이슥한 밤길을나와 함께 뚜벅 뚜벅 걸어갑니다.별들이 오가는 저 하늘 길을둘이서 멀리 멀리 걸어갑니다.꽃신을 가슴에 안고나는 밤마다 꿈을 꿉니다.승철은 시집 세 부 중 한 부를 찬옥의 동생을 시켜 찬옥에게 전달케 했다. 여기서 뜻하지 않은 불찰이 생기고 말았다.찬옥의 동생이 찬옥과 단둘이 있을 때 전했으면 아무런 탈이 없었을 것을, 찬옥의 어머니, 방학 중이라 집에 내려와 있었던 찬옥의 오빠 그리고 찬옥이가 안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이것 선생님이 누나에게 주래.하면서 시집을 건네주려 했다. 그러자 가정교사가 찬옥에게 줄려는 것이 무엇인가 궁금하게 여겼던 오빠가 그것을 가로채 승철의 시를 읽어 보았다. 의아해 했던 어머니가 물었다.그게 뭐야?승철이가 연애시를 썼네요.뭐, 연애편지를 써!연애시를 썼다는 말을, 승철이가 찬옥에게 연애편지를 썼다는 말로 알아들은 어머니는 적잖이 놀라는 안색이었다.망측스러워라! 한 마디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처럼 어이없어 했다.그 바람에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찬옥은 당황해져 얼굴이 홍당무가 됐고 동생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만 있었다.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오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어머니를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나 처녀가 되어가는 딸을 둔 어머니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며칠 생각 끝에 선생을 내보내기로 작정했다.그런데 때마침 신축 기숙사가 완공돼 승철은 자연스럽게 이 집을 떠나 기숙사로 옮기게 됐다. 그 후 찬옥과 승철은 만나 본 적이 없고 소식도 들어보질 못했다. 〈계속〉장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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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 2016.05.23 23:02

시인이 전하는 인생의 선물

전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복효근 시인과 이병초 시인이 출판사 창비에서 잇따라 시집을 냈다. 복효근 시인은 청소년 한 명 한 명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씌여진 시집 <운동장 편지>를, 이병초 시인은 질박한 시어로 차린 시집 <까치독사>를 펴냈다.● 복효근 〈운동장 편지〉 청소년들 일상 관찰, 온기 어린 위로희망사탕을 건네며 표현하는 수줍은 첫사랑, 밉기도 좋기도 한 선생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달라지는 내 몸, 가끔은 이해되지않는 교칙들, 때로는 좋기도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한 부모님의 사랑 등 꿈은 하늘보다 높고 삶은 바닥보다 낮은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청소년시 시리즈인 창비청소년시선의 다섯 번째 권 〈운동장 편지〉(창비교육)는 10대들의 일상에 다가서기도 하고, 시인의 청소년기를 돌아보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을 바라보는 교사와 부모님의 시선도 얽혀있다.줄곧 시를 써오면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시인은 늘 아이들 곁에 머물러왔다.그는 청소년도 나름의 문화와 세계가 있고 그 시기만의 고민이 있다며 어린이는 아니고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청소년 시기에 맞는 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그런데 오늘은 제안을 하나 하고 싶었다./ 선생님과 우리가/ 자리를 바꾸어 봤으면 좋겠다.// 하루에 여덟 시간 한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는 일/ 얼마나 지겹고 졸립고 힘든 일인지 지옥인지/ 선생님도 겪어 봤으면 좋겠다.( 자리 바꾸기 중)당연하다고 여겼던 청소년들의 일상과 규정을 뒤집었을 때, 시집을 읽는 어른들에게는 가슴 뜨끔함을, 청소년들에게는 속 시원한 청량감을 안긴다. 지금 이 시간에도 꾹꾹 속으로만 할 말을 눌러 담고 있을 그들에게 복 시인의 방식으로 건네는 위로와 희망이다.● 이병초 〈까치독사〉 농밀한 전라도 입말, 서민 애환까지 더해답을 캐려는 붓질 괭이질이 쉽지 않아도 내 시는 우리 말씨에 엉겨 번지는 사람 냄새를 찾는 데 더 공력을 들여야 합니다.꾸밈없는 입말로 세상을 읽는 시 언어는 걸쭉하고 농밀하다. 여기에 권력도 돈도 없는, 유일한 무기는 목숨 하나인 서민의 애환을 더했다.이병초 시인이 시집 〈까치독사〉(창비시선)을 출간했다. 지난 2009년 시집 〈살구꽃 피고〉를 낸 후 7년 만이다.함량 미달의 시는 쓰고 싶지 않았다는 그는 수년 간 시를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시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고 싶은 마음과 우석대 동문들에게 작은 기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원동력이 됐다.오래 갈고 닦은 시편들은 박남준 시인의 말처럼 굽이굽이 깊어지며 막힘없이 분방하고 갓 잡아 올린 은빛 비늘처럼 퍼덕거린다. 삼베옷처럼 질박하고 거친, 그래서 오히려 정겨운 전라도 방언은 여전히 편편마다 살아있다.각박한 삶을 건드리고 싶은 문제의식은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됐다.누군가에게 되알지게 얻어터져/ 창자가 밖으로 쏟아질 것만 같은데/ 꺼낸 무기라는 게 기껏 제 목숨뿐인 저것이/ 네 일만은 아닌 것 같은 저것이/ 저만치 물러난 산그늘처럼 무겁다( 까치독사 중)그는 모든 것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자에 비해 서민은 상처를 입어 싸우고 싶어도 한 개밖에 없는 목숨이 무기다며 까치독사는 고향의 산과 넝쿨사이 추억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들의 오늘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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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보현
  • 2016.05.20 23:02

문체부, 지역서점 정보 한눈에 보는 '서점온' 개설

지역서점의 실시간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온라인 사이트 ‘서점온’(www.booktown.or.kr)가 개설됐다.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원장 이기성), 한국서점조합연합회(대표 박대춘), 출판유통 진흥원(원장 김종수) 등과 함께 구축했다. 인터넷 서점과 대형 서점의 강세 속에 운영난을 겪어온 지역서점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서점온’은 지역서점 정보를 통합해 검색할 수 있는 사이트로 전국 2000여 개 서점의 위치와 규모 등 관련 정보를 수록하고 있다. 간단한 검색만으로 주변 서점의 명단과 위치, 연락처, 홈페이지 안내, 문화활동, 인기도서 등을 알 수 있다. 또한 특정 책 이름을 검색하면 그 책의 재고가 있는 중대형 서점의 명단과 위치, 재고 수량, 연락처, 홈페이지 주소 등이 나타난다. 또한 서점은 사이트를 통해 서점 간 공동구매, 도매상·출판사에 자동 주문을 할 수 있다. 출판사 역시 발간도서를 홍보하거나 서점에 유통되는 도서의 재고와 판매 정보를 조회할 수 있다. 문체부 관계자는 “지역 공공도서관, 학교도서관 등에 사이트를 안내해 지역서점을 이용하도록 장려하고 있다”며 “지역서점 간 문화활동과 독서활동, 지역 사회와의 협업 등도 사이트에 소개해 활성화 시키겠다”고 말했다.

  • 문학·출판
  • 김보현
  • 2016.05.20 23:02

일기 통한 지역 현대사 재구성

전북대학교 ‘SSK 개인기록과 압축근대연구단’(책임연구원 이정덕 교수)이 초등학교 교사가 차곡차곡 남긴 일기를 추려 <금계일기> 1·2권(지식과교양)을 펴냈다. 연구단은 ‘개인기록을 통한 현대사 재구성’을 목표로 현대 일기의 발굴과 복원, 분석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번 <금계일기> 1·2권 발간을 위해 1년여의 작업을 거쳤다.<금계일기>는 충북 청주시 옥산면 금계리에서 태어나 일생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한 곽상영(郭尙榮, 1921∼2000) 선생이 64년 동안 자신의 일상과 학교생활, 지역사회 실정 등을 꼼꼼하게 담아낸 기록이다. 지난해 초 가족으로부터 일기 자료를 건네받은 연구팀은 우선 저자가 16세이던 1937년부터 1970년까지의 기록을 추려 1차 성과를 냈다. 이후 30년간의 일기는 다시 1년 동안의 작업을 거쳐 내년 상반기에 출간할 예정이다. 저자는 1941년 초등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은 후, 1987년 정년퇴임 때까지 46년 동안 줄곧 교단을 지켰다. 일기는 저자의 교단생활과 10여명의 가족을 거느린 가장으로서의 삶이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박봉의 교사였던 그는 자녀 양육뿐 아니라 동생들의 교육·혼사까지 책임져야 했다. 저자는 당시 사회의 변화상과 학교 교육의 실상, 가장으로서의 일상 등을 일기에 세세하게 담아냈다. 이같은 점에서 ‘금계일기’는 한 지식인이 체험한 한국사회의 작은 역사라 할 수 있다. 한편 연구단은 지난 4년 동안 전북 임실의 <창평일기>(전4권, 1969∼1994)와 경북 김천의 <아포일기>(전5권, 1969∼2000)를 출간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수행하면서 근대화 시기의 농민 생활사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연구 5년째를 맞아 개인기록 자료의 범위를 농촌에서 도시로, 농민에서 지식인·노동자·여성 등으로 확대했다. <금계일기>는 이같은 연구범위 확대의 첫 번째 작업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 문학·출판
  • 김종표
  • 2016.05.20 23:02

[다문화 어울림축제 백일장 장원작] 나에겐 서른 분의 어머니가 계신다!

다문화주간을 맞아 전라북도다문화가족지원센터협회(회장 김문강)가 주관한 제9회 다문화 어울림축제-다문화 백일장 장원 수상작품을 소개한다. 다문화백일장은 14개 시군 지역예선을 거쳐 모두 42편이 본선에 출품됐다. 장원 수상자 니시무라 유끼꼬 씨는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1996년 한국에 왔다. 현재 진안군 주천면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하고 있다.초등학교 때 비가 오면 학교에 우산을 가져다주고, 소풍이나 체육대회가 있을 때 맛있는 도시락을 싸오는 친구들을 많이 부러워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아빠 손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시어머니가 있는 집에 시집을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도 부모님이 안 계시고 혼자 사는 사람이었다. 내 팔자에는 어머니가 없는가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의 한국 생활이 시작되었다.한국에 시집을 오자마자 동네 어머님들이 신부를 구경한다고 다들 집으로 오셔서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동네 어머님들은 한목소리로 (시집)와줘서 고마워, 잘 왔다, 잘 왔어하면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처음에는 가족도 아닌데 왜 그럴까? 궁금했는데, 그만큼 내 남편을 아끼고 아들처럼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살다 보니 동네 어머님들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옆집 숟가락이 몇 개 인지 알 정도로 오랜 시간 같은 동네에서 가족과 같이 그렇게 긴 세월을 함께하고 있었다. 아이가 어려서 들에 자주 나가지는 못했지만 가끔 들에 나갈 때면 어머님들은 일이 서툰 나에게 이렇게 하면 된다하면서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본 적도 없는 채소를 손질하는 방법이나 한국 반찬을 만드는 방법도 모두 동네 어머님들이 가르쳐 주었고, 무언가 만들 때마다 먹으러 오라고 하고, 직접 가져다주기도 했다. 지금은 농사를 짓지 않는데도 수확 철이면 동네 어머님들이 주시는 감자와 고구마 등이 한 가득이다.어느 날은 경로당 총무를 보는 사람이 없다면서, 65세 이상이 회원이지만 총무는 특별히 나이 제한이 없으니 맡아달라고 하셨다. 내가 시집오기 전에 은행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시는 말씀인 것 같았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시작한 총무는 2년만 하겠다는 약속을 깨고 지금까지 맡고 있다.일본에서는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도 상대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면서 실천하지만, 나는 이제 우리 동네를 생각하면 무작정 내가 먼저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앞선다. 그 마음이 한국의 정인 것 같았다.동네 어머님들은 낯선 한국에서 살아가는데 큰 위로가 되었다. 한국에 와서 진짜 어머니는 없었지만 같은 동네에 계시는 어머님 한 사람 한 사람을 시어머니처럼 아니, 엄마처럼 느끼게 되었다. 어머님들과 함께 지내다보니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서서히 우리 동네 어머님 서른 분의 며느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내가 사는 곳은 진안의 작은 마을이지만 난 이곳이 좋다. 서른 분의 내 어머니가 여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어머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마을을 위해 봉사하며 살고 싶다. 나의 서른 분의 어머님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6.05.20 23:02

전주박물관장 개방형직위 전환…공개모집

국립전주박물관장이 지난해말 내부 임용에서 개방형 직위로 전환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인사혁신처는 유병하 국립전주박물관장이 지난 2일자로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부임함에 따라 전주박물관장을 공모하고 있다.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정부의 전문성 향상을 위한 개방형 직위제 확대 방침에 따라 국립전주박물관장 직위가 지난해 11월 개방형 직위로 신규 지정됐다.중앙박물관과 지역 국립박물관 13곳(전시관 1곳 포함) 중 관장을 개방형으로 바꾼 곳은 전주박물관을 포함해 청주박물관, 춘천박물관, 진주박물관 등 4곳이다. 이 가운데 관장이 고위공무원단인 곳은 전주박물관이 유일하다.문체부 관계자는 문체부 고위공무원단 및 과장급 직위의 20%(22명)를 개방형 직위로 지정했다면서 일반 행정분야보다는 민간전문가가 많은 문화예술분야의 개방형직위를 확대하고 있는 추세라고 설명했다.유 전 관장의 이동에 따라 공석이 된 전주박물관장은 17일까지 공모한다.일정기간 관련분야 재직 경력과 관련 학위 소지, 관련분야 공무원 재직 경력 등이 있는 민간인 또는 공무원이 지원할 수 있다. 최근 3년 내 국내ㆍ외 박물관, 문화재, 문화예술 관련 분야에 대한 연구나 업무실적도 객관적으로 입증해야 한다.접수는 17일 오후 6시까지 인사혁신처 나라일터 홈페이지(https://www. gojobs.go.kr)나 방문접수우편접수 등도 가능하다. 민간인의 경우 임기는 3년이며 공무원은 2년 임기로 임용하며, 최대 5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공모관련 자세한 내용은 국립전주박물관 홈페이지(http://jeonju.museum.go.kr/)와 나라일터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문학·출판
  • 김보현
  • 2016.05.13 23:02

전북 초·중·고 백일장 김하나·전서린 장원

‘전북 초·중·고 백일장’에서 김하나(전주솔래고 3) 전서린(기전여고 1) 학생이 고등부 운문과 산문부문 장원을 차지했다. 전북작가회의(회장 김병용)와 최명희문학관(관장 장성수)이 전북도교육청 후원을 받아 지난달 29일과 30일 전주한옥마을 일대에서 진행한 ‘전북 초·중·고 백일장’에는 초등학생 55개 학교 359명, 중학생 11개 학교 245명, 고등학생 21개 학교 298명 등 모두 87개 학교에서 902명의 학생들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아버지’ ‘어머니’ ‘한옥’ ‘나무’ ‘집’ 등을 글감으로 운문과 산문을 썼다. 백일장 결과 중등부는 국승민(전주호성중 3) 유한나(전주성심여중 3) 학생이, 초등부는 박소민(전주여울초 1) 조순정(고창남초 6) 학생이 장원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도내 초·중·고등학교 학생 60명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심사는 장현우 하미숙 하미경 서철원 김정경 최기우 등 전북 지역 문학인 30여명이 참가해 7일과 8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박서진 심사위원장은 “올해는 문화자원이 풍부한 전주한옥마을에서 자유롭게 쓴 글이어서인지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면서 “글쓰기에 관심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들 때문에 문학의 고장인 전라북도의 미래가 한층 더 푸르게 성장할 것 같다”고 말했다.

  • 문학·출판
  • 은수정
  • 2016.05.13 23:02

세월에 축적한 삶의 깨달음 녹여내…최공엽 전 언론인 산문집 〈흔적〉 발간

중고등학생 때 책을 좋아해서 무척 열심히 읽었어. 문학 서클도 이끄는 문학 소년이었지. 아니, 문학소년 아닌 사람 있었나. 다들 연애편지라도 한 번 써봤지.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 묻자 호탕하게 웃으며 어릴 적 추억담을 꺼내는 최공엽 전 언론인.전주 북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소설을 잘 쓴다고 손꼽혀 소설가가 될 줄 알았던 그는 신문쟁이가 됐다. 전북일보 기자로 입사해 날카로운 기사를 뽑아냈고 묻혀 있는 향토 저변사를 발굴, 기록하기도 했다. 중견을 넘어서는 서울 분실장, 편집국장, 전무까지 지내며 지역 언론에서 핵심 역할을 해왔다.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써냈다. 일기 논고 산문, 때로는 형식이 자유로운 조각글의 형태로 살면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을 담았다.국회 출입만 17년인 그는 특히 정치 격동기인 197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글을 썼다며 정치인들과 시대적 상황을 겪으며 깨달은 것들을 가죽 서류 가방이 터질 정도로 자료화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글 뭉치가 든 서류 가방을 도둑맞으면서 1970년대 쓴 글들은 많지 않다.그가 세월에 따라 켜켜이 축적한 글들을 모아 산문집 <흔적>(신아출판사)을 펴냈다. 그는 삶의 낭패감으로 고독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물처럼 흘러간 많은 시간들이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웠다며 조그마한 기억이나 철늦은 흔적들이라도 찾아 뭣인가 남기고 싶어졌다고 말했다.인생의 궤적을 따라 가는 글에는 삶에 대한 깨달음, 소회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시대성이 담겨있다. 따라서 동시대인들에게는 공감을 유발하고, 오늘날 청년들에게는 시대의 거울처럼 깨달음을 남긴다.저자는 전북일보 편집국장과 전무를 지냈으며, 전북도 선관위원, 전북도 문고 회장, 대한적십자사 전북회장 등을 지냈다.

  • 문학·출판
  • 김보현
  • 2016.05.13 23:02

시간에 묻힌 성곽 발자취 더듬어…신귀백·김경미 씨 〈전주편애〉 발간

전주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여행객의 성지가 된 한옥마을이 빛을 내고, 먹방 순례에 나서야 할 만큼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조선왕조의 탯자리, 거슬러 후백제 견훤의 왕도를 내세울 만큼 역사도 고고하다. 봄이면 영화인들이 모이고, 가을이면 전통의 소리가 울려퍼진다.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 들을거리가 넘치는 곳이 전주다. 그런데, 이것이 전주의 전부일까.글쟁이 신귀백 씨는 진짜 전주를 알려면 부성 안으로 들어가봐야한다고 말한다. 애초 전주는 성곽도시였다. 객사를 중심으로 감영과 부영을 거느린 조선의 3대 도시였다. 중앙에 조정을 두고, 동서남북 문 앞에는 시장을 둔 정치와 경제가 어우러지는 전통도시였다.이러한 전통도시 전주가 근대를 경험하게 된 것은 철길이 놓이면서부터다. 감영 자리에 도청이, 부영 자리에는 시청사가, 북문 가까운 곳에 전주역사(驛舍)가 들어선다. 시청 옆에는 식산은행이 자리잡고 우체국과 박다옥 등 고전주의적 서양건축물들이 들어선다. 근대화와 함께 전주는 또 다른 이야기를 품게 된다.신 씨와 김경미(전북전통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씨가 펴낸 <전주편애>(채륜서)에는 이러한 전주의 근현대사가 담겨있다. 성이 헐려 신작로가 되고, 다시 팔달로가 놓이고 관통로가 뚫리는 그 시절의 불편한 변모와 변화를 겪은 이야기를 담아냈다. 책은 4대문을 중심으로 부성안을 4개 구역으로 나눠 꼼꼼하게 살폈다.영화의거리에서 객사까지 아우르는 북문구역은 창극 배우 임춘앵과 한때 영화계를 주름 잡았던 김진규박노식이 거쳐간 예술골목이었다. 이곳에서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패서문에서 감영에 이르는 서문지역에서는 전주극장 전신인 제국관 간판을 그렸던 청년 이응노를 만날 수 있으며, 신흥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서문밖교회에 출석했던 현제명, 그리고 국수 이창호의 어린시절도 찾아볼 수 있다.옛 전주우체국을 중심으로 한 부성의 중심에서는 세월을 간직한 선화당 회화나무와 지금은 한옥마을로 이전한 전주판관의 집무실 풍락헌, 현재는 가족회관이 둥지를 튼 미 문화원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준다.남문구역에는 지금은 게스트하우스로 변신한 전당포 질옥의 흔적과 약령시, 필방, 전주유기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한옥마을과 이웃한 동문구역은 문화예술의 거리로의 단장이 한창인데, 이곳에는 한때 서점거리가 형성됐으며, 유신시절 전주에서 처음으로 가두시위가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신 씨는 알려지지 않았던 전주의 옛 이야기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컸다면서 골목마다 간직한 이야기가 소박한 매력 그대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책으로 엮었다고 밝혔다.신 씨는 문학과 영화를 넘나들며 산문과 평론을 쓰면서 우석대에서 시나리오 강의를 하고 있다. 김 씨는 전북전통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전주대 관광경영학과에서도 강의하고 있다.

  • 문학·출판
  • 은수정
  • 2016.05.13 23:02

자운영 연가 - 이승수

눈을 씻고 봐도 불이었다. 둔덕 너머 우리 논이 뻘겋게 타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려갔다. 온 힘을 다해 뛰어도 왜 그렇게 발이 느리던지 꿈결인가 싶었다. 보리 이삭이 노랗게 익어가고 논에 자박자박 물이 잡히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하굣길 신작로에서 벚나무와 엉덩이 씨름을 하는 게 일과 중 하나였다. 콧잔등에 땀이 송송 맺힐 양이면 개울로 달려가 불거지와 한바탕 뜀박질을 하곤 했다. 논에 다다른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서 마지기가 넘는 논이 앙증맞게 핀 붉은색 꽃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것 아닌가. 무슨 일이람? 영문은 알 수 없지만, 떼 지어 핀 꽃을 보니 가슴이 벌렁거렸다. 논두렁에 쪼그리고 앉아 꽃대를 쭉 쓸어보았다. 보란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던 이들은 내 손이 가는 대로 순순히 몸을 눕히는 것이었다. 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논에요, 꽃이요….”나는 숨을 헐떡이며 검정 고무신 한 짝을 내동댕이친 채 마루로 기어올랐다.“자운영이다. 거름으로 쓸 것이여.”아니 그렇게 예쁜 꽃을 거름으로 쓰다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그날 밤, 빨간 양탄자가 우리 논 위를 날았다.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알게 된 바로 그 양탄자였다. 나는 그것을 잡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달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았다. 잡아야 해, 잡아야…. 다급해져 “야!” 하고 고함을 질렀다. 양탄자가 갑자기 좌우로 흔들리더니 뒤집혀 곤두박질을 쳤다. 달려가 보니 양탄자는 오간 데 없고 갈아엎어 시커멓게 변한 논바닥뿐이었다. 허망했다. 두리번거리며 양탄자를 불렀다. “야!” 목청을 높이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다음 날 이웃집 ‘순이’ 누나가 나를 불렀다. 마른침을 삼키던 누나는 네 번 다섯 번 정성껏 접은 쪽지를 내밀었다. “심부름 좀 해줘! 느네 논 지나서 다리공사 하는 데 있지! 거기 ‘차영’이란 형한테 좀 갖다 줘.”한달음에 달려가 쪽지를 전했다. 쪽지를 받아든 형은 내 손에 스피아민트 껌 두 개를 쥐여주었다. “이게 웬 떡 이다냐!” 하나는 내가 먹고 또 하나는 셋으로 나눠 동생들 줘야지. 그날 밤 우리 방 벽에는 껌딱지 네 개가 들쑥날쑥 붙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쪽지 심부름은 계속되었다. 주거니 받거니…. 당연히 껌도 양쪽에서 들어왔다. 어떤 때는 하루에 열 개가 넘기도 했다. 차츰 내 친구들 집 벽에도 껌딱지가 나붙었고, 나는 차츰 껌 대장이 되어가고 있었다.얼마 후 자운영밭에 쟁기가 들어갔다. 꽃밭이 무참히 뒤집혔다.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순이가 꽃밭에서 차영이랑 놀았다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소문은 우리 부모님 대화에도 끼어들었다. 밖에 나가면 여기저기서 왕왕거렸다. 쪽지 심부름이 끊겼다.“자운영 꽃밭이 무슨 잘못이라고…?”쟁기 밑으로 사라진 자운영 꽃이 아른거렸다. 껌도 따라 춤을 추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순이 누나가 보따리를 싸 들고 집을 떠났다. “승수야! 고맙다. 잘 있어라.” 내 손에 껌 두 통이 들어왔다. 별로 반갑지 않았다. 차영이 형이 미워 견딜 수 없었다. 처음으로 내 손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이 자운영 밭으로 달려갔다. 꽃이 무성하던 자리, 그곳에는 물만 흥건히 고여 넘실거리고 있었다.그때인 것 같다. 내 마음에 작은 꽃밭 하나 생긴 것이. 그 후 도회지에 나와 학교 다니는 동안 고향과 멀어졌다. 가끔 집에 갈 때면 자운영 꽃밭을 떠올렸지만, 어디에도 자운영은 없었다. 봉동으로 이사를 했다. 어느 날 보니 길가에 ‘자운영 마을’이란 안내판이 서 있었다. 끌리듯 찾아든 마을 들판은 자운영 꽃 천지였다.“아! 자운영.”나는 논두렁을 미친 듯 돌아다녔다. 물 대기 한창인 옆 논에 고향 하늘이 내려와 앉았다. 순이 누나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내 안의 꽃밭에서 자운영 꽃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요즈음에도 내 안에 가끔 자줏빛 꽃 구름이 인다. 나는 거기 머물러 있으려다 일을 그르치곤 한다. 지금 칠순을 바라볼 순이 누나는 차영이 형과 잘살고 있는지…?△이승수씨는 지난 2009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했다. 영화에세이 〈울면 지는거야〉와 공저 〈영화치료의 기초이론〉을 냈으며, 현재 익산우체국장이다.

  • 문학·출판
  • 은수정
  • 2016.05.13 23:02

이오덕·권정생 등 아동문학가 삶·문학 조명

한국과 일본의 대표 아동문학가들의 삶과 문학을 한 자리에서 조망하는 전시가 있다.전북교육문화회관(관장 최재춘)이 다음달 13일까지 아이처럼 살다 특별전시회를 개최한다.회관 제2전시장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 아동문학의 큰 별인 이오덕과 권정생, 그리고 저서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로 잘 알려진 일본 아동문학가 하이타니 겐지로의 작품 및 유품을 선보인다.이와 함께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사진 150여점과 자필 원고 100여점, 초판본 도서 등도 볼 수 있다. 특히 이오덕 선생이 42년 동안 써 온 일기와 그와 권정생 선생이 주고받은 편지도 전시돼 눈길을 끈다.오전 10시와 11시, 오후 2시와 4시, 매일 4차례씩 전시작품 해설을 진행하고, 사전에 신청하면 단체 관람도 가능하다. 한편, 오는 30일에는 세 작가의 삶과 문학에 대한 강연도 열린다.최재춘 전북교육문화회관장은 어린이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며 아이처럼 살다간 세 작가의 삶과 작품을 통해 현재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이번 전시는 전북교육문화회관이 주관하고 이오덕학교,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하이타니겐지로사무소와 전북글쓰기회, 길벗어린이양철북창비출판사가 후원한다.

  • 문학·출판
  • 김보현
  • 2016.04.25 23:02

"겨레 말·고운 마음 가장 잘 표현한 시인" 〈미당 서정주 전집〉 자서전 출간에 부쳐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시인을 일컬어 신과 인간 사이의 존재자라고 말한 바 있다. 시인은 신의 뜻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그것을 시로 만들어서 백성(인간)에게 전달해주는, 중간적 존재자라는 뜻이다. 신의 대행자(代行者)이거나 혹은 예언자적 반열에 시인을 올려놓은 말이라 할 수 있다.또한 A.워렌과 L.월렉은 시인을 일컬어 인스피레이션을 받은 자 씌어진 者(자) 만들어내는 힘이 있는 狂人(광인)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마술사 등으로 표현한 바도 있다.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말들은, 마치 미당 서정주의 시를 두고 한 말 같이만 생각된다. 미당 서정주의 시는 그야말로 인스피레이션(nspiration, 영감)을 받은 시요, 귀신 씌어진시요, 狂人의 시요, 언어의 마술사로서의 시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사실 원래 시인은 무당이었다. 상처받은 자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가슴 아픈 자의 마음을 쓸어내려 주는,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치유해 주고 구원해 주는,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무당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로 말하는 사람이 바로 시무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과 인간 사이의 영매자(靈媒者), 혹은 시인과 독자의 영혼을 이어주는 존재, 즉, 하이데거의 말처럼 신과 인간 사이의 존재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단군할아버지적부터 우리 하늘에 살던 그 어떤 영묘한 시신(詩神)들이 미당시의 뜨락에만 사뿐사뿐 내려앉은 것 같은 언어의 마술사가 바로 미당이다. 겨레의 말을 가장 잘 구사한 시인이요, 겨레의 고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시인이 미당이다.이 나라의 문학평론가들은 시 쓰는 일에 있어 백년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인물(김재홍, 문학평론가)이라거나, 부족 방언의 요술사이자 시인부족의 족장(유종호, 문학평론가)이라고도 했고, 또 어떤 평론가는, 인류역사상 모차르트 음악과 미당시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이남호 문학평론가)고 말한 바도 있다.그러므로 우리가 선생의 시를 읽는 것은, 겨레의 말과 마음을 아주 깊고 예민한 곳에서 만나는 일이 되며, 겨레의 소중한 문화재를 보존하는 일이 된다(윤재웅, 문학평론가)는 것이다.최근 <미당 서정주 전집>(2016, 은행나무)이 미당기념사업회에 의해 출간되었다. 총 20권 중 우선 그의 자서전(6,7권)이 도톰하게 엮어져 나왔다. 그리고 때맞춰 이 고장 고창군에서는 현재의 미당시문학관(질마재소재) 옆에, 좀더 규모 있는 별도의 기념관을 마련하고 싶다는 전언(傳言)이 있어서, 매우 기쁘고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필자는 어느 문학강연에서, 미당을 단군 이래의 시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인의 성정이 시를 좋아하는 민족이긴 하지만 고려나 신라 백제로 거슬러 올라가면, 속요나 향가 몇편 존재할 뿐이요, 조선시대에도 문인(文人)은 많았지만, 시인으로 분화(分化)된 이름은 없었고, 그냥 문인이요 학자요 선비였을 뿐이다.그러므로 시라는 장르로 분화된 현대문학사의 최고의 시인이야말로 단군 이래의 시인이라는 논리로 문학강연에서 말한 것이다. 물론, 짤막한 논리로 해명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필자는 평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사실이다.아무쪼록 미당을 추념하는 또 하나의 기념관이 잘 건립되어서, 미당(未堂)의 시가 좀더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6.04.22 23:02

혼불학생문학상 '전북 음식' 주제 산문 모집

스토리텔링 공모전인 혼불학생문학상이 올해 전라북도 음식을 주제로 전국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지역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를 모집한다.전주문화방송(사장 원만식)과 최명희문학관(관장 장성수)이 주최주관하고 전라북도교육청이 후원하는 혼불학생문학상은 전북의 자랑스러운 문화자산인 소설 〈혼불〉을 통해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작가 최명희(19471998)의 삶과 문학 열정을 확산시키기 위해 2011년부터 시작됐다.매년 새만금(2011), 전라도 사투리(2012), 전라도 사랑이야기(2013), 동학농민혁명(2014), 전라북도 왕(비)의 흔적(2015) 등 전라북도의 문화콘텐츠를 주제로 선정해 왔다.올해 주제는 꽃게장, 오모가리탕, 전주비빔밥, 전주콩나물국밥, 참붕어찜, 추어탕, 팥칼국수, 풍천장어구이, 한정식, 황등비빔밥 등 전북 대표 음식을 비롯해 집밥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음식 등 이 땅에서 요리되는 모든 음식이 대상이다.작품은 수필소설희곡취재기체험기 등 산문 형식이어야 하고, 전북 음식이야기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창작하거나 어느 이야기의 특정 부분을 떼어내 다시 구성하면 된다. 분량은 A4용지 2장 이상(200자 원고지 15매 이상). 오는 9월 3일까지 이메일(jeonjuhonbul@nate.com) 혹은 방문(최명희문학관) 접수하면 된다.대상과 차상에게는 각각 100만 원, 70만 원의 장학금과 전라북도교육감상이 수여되는 등 36명의 학생에게 총 740만 원의 장학금이 주어진다.

  • 문학·출판
  • 김보현
  • 2016.04.22 23:02

"인생 여행에서 헤매지 않는 나침반 되길"

첫 에세이 <사랑의 길을 꽃에게 묻다>를 통해 삶과 사랑의 여정을 이야기했던 김재철 전북대 명예교수가 신작 에세이 <인생의 내비게이션을 어떻게 구할 수 있나요>(신아 출판사)를 펴냈다.오랫동안 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그가 젊은이들에게 건네는 삶의 지침서다. 인생의 항로를 조언해 주는 지혜와 삶을 바라보는 성찰이 그의 삶만큼 깊고 넓다. 그는 “우리 주위에는 자기계발서가 많이 출판돼 있지만 대부분 지극히 일반적이고 포괄적이어서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찾기 힘들다”며 “우리 삶의 여행길에서 헤매지 않고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방법을 제시했다”고 말했다.책은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자신의 재능·체력·성격·사회 환경변화·인간관계 등 다양한 관점에서 논한다. 심신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생물학적 지식까지 거론하며 인생의 길목마다 맞이할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이 후회가 없을 것인지 토로하고 있다. 특히 그는 ‘사람은 성격대로 산다’는 명언은 진리에 가깝다며 자신의 성격을 아는 것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고 성취해 가는 데 필수조건이라고 강조한다. 심리학자 융의 성격 분류 이론, 동양의 사주 이론 등을 통해 외부로 드러난 성격과 감춰진 성격을 찾아내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한다.그는 “인생은 미래로 향해 가는 시간과 공간 여행이고, 편도 차표 한 장 손에 쥐고 기대 반 두려움 반을 안고 홀로 떠나는 여정이다”며 “이 책이 입시와 취업의 경쟁에서 지친 청년들의 여정에 나침반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전북대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전북대 원예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 문학·출판
  • 김보현
  • 2016.04.22 23:02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