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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극작가 - 최명표 연구서 ‘전북작가열전’

<전북작가열전>(신아출판사2018)은 절절한 연구서다. 많은 연구 서적이 어렵고 딱딱한 단어로 독자의 눈을 침침하게 만들고, 무분별하게 사료만 나열하거나 서술어를 반복해 독자를 게으르게 하지만, 이 책은 연구를 시작한 사연과 책에 담긴 이들의 곡절이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다. <전북작가열전>은 나라의 기력이 쇠진해질 때, 배운 자가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를 일러준다. 문학사에 명확하게 남은 기록마저 왜곡하고 위상을 낮게 평가하며 기존의 연구 성과만 반복하는 나태한 학자들을 질타하고, 전북의 땅심을 받고 자란 시인과 작가들이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님을 새겨준다. 책에는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하고 취지문을 쓴 김제 출신 이기(18481909)부터 민중가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작자인 박영근(19582006)까지 전북과 연관된 작고 문학인 54명의 삶과 작품이 담겨 있다. 이 문학인들을 앞세워 이들과 멀리 가까이에서 전북 문단을 튼실하게 다진 문학인들을 꺼내 놓았다. 자료의 한계와 척박한 자료 밭을 일구는 연구자의 고됨으로 작가마다 지면은 울퉁불퉁하지만, 한두 줄로 툭 치고 들어간 이름마저 귀하다. 책에 담긴 문학인은 이병기신석정김환태백양촌박동화박봉우와 같이 문학관과 문학비로 남은 문인도 있지만, 대부분 문단 활동과 전북과의 관계가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존재마저 잊힌 시인과 작가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행적은 역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23년 한국 최초 필화사건의 주인공인 부안 출신 신일용(18941950)과 해방 후 첫 필화사건의 당사자인 완주 출신 유진오(19221950 추정), 신춘문예 역사에서 시 부문 첫 수상자(동아일보1925)인 전주 출신 김창술(19031950 추정),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인 최초로 에스페란토 시집 <자유시인>(1938)을 낸 익산 출신 정사섭(19101944), 한국 최초의 여성 문학평론가로 여성해방문학을 앞서 주장한 전주 출신 임순득(19272003), 호남평야에 담긴 역사의 비극을 시로 읊은 김제 출신 장영창(19201995) 등이다. 이 책은 한 사람이 살아온 궤적이 결코 개인만의 것이 아님도 일러준다. 삶을 수놓은 갖가지 풍경에는 그가 속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사회가 담겨 있다. 남원 출신 윤규섭(북한 이름 윤세평1909?)이 고전문학 주해(注解)로 북한 문학연구의 초석을 다진 것은 해방 전부터 전주의 고서점에서 완판본을 대거 입수한 후 월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목포가 고향인 곽복산(19111971)을 한국 신문학(新聞學)의 선구자로 이끈 배경은 5세부터 외가인 김제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는 16세에 동아일보 김제지국 총무로 일하며 언론사와 인연이 시작됐고, 동시와 동화를 발표한 소년문사였다. 그의 동화 새파란 안경(1928)은 물욕에 눈먼 부자가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아름다운 것을 깨닫는 내용으로, 모든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다. 전주 출신 김완동(19051963)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동화 구원의 나팔소리(1930)에는 민의를 수용하지 않는 임금은 축출해도 무방하다는 혁명관이 내재돼 있다. 1926년 공립전주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 사건을 겪으며 자연스레 쌓인 신념일 것이다. 전주 출신 정우상(19111950 추정)은 13세에 매일신보 신춘현상공모 동화로 입선하고, 15세에 <조선문단>에 시로 당선된 천재작가였다. 그의 동화에도 임금이 갖춰야 할 으뜸은 백성의 소리를 고루 들어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이라는 이상이 있다. 1929년 전국에서 발생한 소작쟁의 389건 중 전북에서 일어난 것이 314건이라는 기록은 이 작품들의 가치를 더 확고하게 한다. 사람은 가고, 작품은 잊혀도, 사람과 작품이 선사한 감동은 정신으로 남는다. 반듯하고 당당한 이들의 삶은 후세대의 든든한 버팀목이며, 결결이 새겨 놓은 위로이자 가슴 찬 자랑이다. 저자인 문학평론가 최명표 씨는 오랜 세월 전북 문학사의 변두리와 빈 곳, 잘못된 곳을 찾아 메우고 수정하는 고된 여정을 자처하며 새로운 문단사를 쓰고 있다. 문학은 작품으로 판가름 난다고 우기는 축이 있으나, 작가의 신념이나 몸부림은 작품을 낳은 모태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라는 저자의 강단 있는 주장은 독자를 더 흥분시킨다. *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한 작가 최기우는 연극창극뮤지컬창작판소리 등 무대극에 집중하고 있다. 희곡집 <상봉>과 창극집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인문서 <꽃심 전주>와 <전주, 느리게 걷기>, <전북의 재발견> 등을 냈다. 최명희문학관 학예연구실장으로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9.05.22 17:48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② 서동요(薯童謠) 다시 알기

2019년 4월 30일, 해체되었던 미륵사석탑이 20년 만에 복원되었다. 석탑이 해체될 때 나온 사리봉안구에 의하면 미륵사 창건 인물은 백제 무왕의 왕비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며, 사찰 건립 시기가 639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삼국유사의 무왕조 서동설화에 나오는 무왕의 왕비 선화공주와 사택적덕의 딸은 물론 같은 인물이 아니다. 설화 속의 서동과 역사 속의 무왕이 같은 인물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설화 속에 역사적 인물이 등장한다고 해서 설화 전체를 역사적 일치 여부에 초점을 두고 해석하려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설화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변형되기 때문이다. 선화공주님은 남 그윽히 얼어두고 맛둥방을 밤에 몰래 안고가다. 이 내용은 대체로 알려진 양주동의 해석을 제시한 것이다. 서동요는 삼국유사에 전해오는 14수의 향가 중 가장 앞선 시대의 작품이며, 주지하다시피 익산 금마의 미륵사를 배경으로 한다. 향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형시인바 4구체, 8구체, 10구체 향가 중에서도 서동요는 4구체의 짧은 노래이다.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다른 향가와 마찬가지로 서동요 역시 그 해석이 분분하다. 이는 한글이 없던 시대의 우리말을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하여 표기한 향찰로 전해오기 때문이다. 당대와 현재의 언어 사이에 변화도 많았을 것이고, 먼 선대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지만, 후대 연구자들의 상상은 그래서 더욱 열려 있다 할 것이다. 엘리아데의 역사적 인물의 신화화라는 이론에 의하면, 탁월한 능력을 지닌 영웅은 여러 시대와 장소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신화적 인물로 전승되며, 실재의 역사적 인물이라 해도 실제 사건들과 무관하게 다른 시대와 상황 속에서 달리 활약하면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재탄생된다. 서동요는 비록 짧은 내용의 노래이지만, 역사적 인물의 신화화라는 관점에서 해석될 때 그 가치성이 재평가되고, 아울러 설화에 내재하는 진실이 현 시대의 역사적, 문학적 울림으로 전해올 수 있을 것이다. 일연 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의 14수 향가는 모두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포교적 성격과도 연결된다 할 것이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이 법흥왕 15년(528)이었고, 서동요는 600년경에 지어졌다고 전하니, 서동요는 불교가 한창 성할 무렵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는 다른 향가와 달리 민요이자, 동요이며, 시대적 상황, 정치적 징후 등을 암시한 참요(讖謠)이기도 한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의 미모를 흠모한 서동이 계략을 내어 아이들에게 마를 주어 이 노래를 부르게 하고, 마침내 쫓겨나는 선화공주를 만나게 되는 이 혼인담은 그 자체가 극적이며, 이를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서 포괄적으로 해석하면 이는 훨씬 풍요로운 의미망을 지닌 참요로 이해된다.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쫒겨나 신분이 천한 서동을 만나 살게 된다는 내용은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 평강공주 이야기와 동일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 두 설화는 내 복에 산다 설화 계열과 불교 예화로 전해오는 선광공주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내 복에 산다 설화는 누구 복으로 먹고 사느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아버지 복으로 먹고 산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셋째 딸은 내 복으로 산다.고 대답하여 쫓겨나게 되고 미천한 사람과 살게 되었으나, 결국 남편을 통해 우연히 금을 얻어 잘 살게 되고 거지가 된 아버지에게 효도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바사닉왕의 딸 선광공주 이야기는 대강 다음과 같다. 위의 셋째 딸처럼 선광공주 역시 아버지에게 저에게 업의 힘이 있기 때문이요, 아버지의 힘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여, 부왕은 거지에게 시집보내 딸의 말을 확인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거지 남편의 옛집 터에서 보물이 나와 부왕과 같은 정도로 부자가 되고, 결국 부왕은 자기가 업을 짓고 스스로 그 갚음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하게 된다. 내 복에 산다 계열의 설화는 불경에 전해오는 선광공주 이야기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교는 석가모니불을 중시하고 사찰의 불상을 중시하며 전래되어 왔으나, 사실 불교의 본래 정신은 우주 만유의 주체성과 평등성을 기본으로 한다. 남녀귀천이 있을 수 없고, 삼라만상이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장엄한 꽃으로 이해된다. 위의 내 복에 산다 설화와 선광공주 이야기는 각 사람의 주체성과 평등성을 강조한 내용이란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앞서 말한바,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문학의 어떤 작품이든 시대성을 담고 있지 않을 수 없다. 서동요도 여기서 예외일 수가 없다. 삼국유사의 무왕조에 담겨 있는 서동요 설화는 탄생 신화, 혼인 민담, 미륵사 창건 전설로 구분된다. 탄생 신화는 서동 즉 무왕의 어머니가 과부였으며,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서동을 낳았다는 것이다. 혼인 민담은 서동이 신라 서울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서동요를 유포시켜 선화공주가 쫓겨나게 하고, 이후 결혼에 성공한 뒤 서동과 선화공주가 신라의 진평왕에게 구릉처럼 쌓인 금을 제공한다는 내용이다. 이후 진평왕이 서동을 존경하며 편지를 보내게 되고, 이로부터 서동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미륵사 창건 전설은 부인의 소원을 듣고 무왕이 미륵사를 짓게 되었다는 것이며, 진평왕이 백 명의 기술자를 보냈다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의 서동요 설화에는 진평왕과 무왕 등 역사적 인물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런 역사적 인물이 설화 속에 등장하기까지에는 분명 이에 합당한 시대적 배경이 있을 터이다. 이장웅은 「신라 진평왕 시기 백제 관계와 서동설화」(2018)라는 논문을 통하여 서동설화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는 백제 서동(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의 혼인은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중국의 후한서에 의하면 마한은 진한, 변한을 거느린 이 땅의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이장웅에 의하면 현재 전해오는 서동설화는 마한 무강왕 신화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막강했던 무강왕과 선화공주 이야기가 시대를 초월하여 무왕의 설화로 변형되었고, 그렇게 해서 금마 땅에 전해오던 백제의 서동설화가 정치적 안정을 꾀하는 통일신라 시기에 다시 변형되어 삼국유사에 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동설화의 혼인담에 의하면, 무왕은 진평왕의 인정을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되고, 무왕이 미륵사를 건립할 때 많은 기술자를 파견한다. 그러나 실제의 역사 속에서는 진평왕과 무왕은 긴 세월 동안 사활을 건 치열한 전쟁을 벌였던 관계다. 서동설화가 실제의 역사와 정반대로 화해의 이야기로 엮어진 까닭은 무엇인가. 고조선의 멸망 이후 남하한 우리 한민족의 맹주국 마한의 무강왕은 백제시기에 서동이 되어 신화적 인물로 내려왔고, 그렇게 전해온 백제의 서동설화는 통일신라기에 무왕의 설화로 변형되어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으리라는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앞에서 말한 역사적 인물의 신화화에 의하면, 역사적 충돌은 아이러니하게 설화적 화해로 얼마든지 재탄생된다. 서동설화를 실제 역사에 대입하여 해석할 때 앞뒤 맥락이 맞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런 데 있었던 것이다. 서동설화는 삼국이 통일된 이후 민족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는 과거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 골 깊은 지역감정을 안고 있다. 삼국의 치열했던 전쟁과 마찬가지로 남과 북은 6.25의 비극을 치렀고 극심한 반목과 대립 속에 살아왔다. 이런 점에서 구애의 한 방책으로 불려진 서동요는 우리 민족의 미래를 생각할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동요에 내재된 정신은 화해의 정신이다. 마한의 터, 전북 익산의 노래가 지역감정도 극복하고, 우리 민족의 통일정신으로 승화되기를 기대한다.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 문학·출판
  • 기고
  • 2019.05.22 17:45

김철규 시인 두 번째 시집 ‘내 영혼의 밤섬’ 출간

별이여 / 별 보다 빛나는 7천만 민족의 땅 / 삶의 찬란한 터전이여 / 천년 도읍지의 새 희망 / 새만금 개척의 광활한 천지개벽의 땅이여- 민족의 깃발 새만금 중. 언론인으로 30년, 정치인으로 20년, 문인으로 33년을 살아 온 군산 출신 김철규 시인이 두 번째 시집 <내 영혼의 밤섬>을 출간했다. 시집에는 김 시인의 절절한 고향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북일보 기자로 재직했던 지난 1978년 최초로 새만금사업을 주창한 김 시인이었기에 시집 곳곳에는 그의 새만금 사랑이 깊이 배어 있다. 시집은 심포항에서 19편, 낮달 소묘 18편, 그 사람은 20편, 밤의 고독 22편 등 총 79편의 시로 구성됐다. 김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상념의 잔재까지 끌어모았는데 그래도 마음을 메우지 못했다며 이제는 빈 마음에서 적어보려 한다. 질철거리지 않는 마음으로 정진하려 한다고 했다. 소재호 시인은 시집 해설 생애의 서사를 미적 정서로 진화시킨 서정시을 통해 고향에 대한 상징적 표상이 매우 뛰어나다며 그의 문학적 박진함과 문사로서 진중함이 사뭇 고결하여 밤섬으로 표징되는 그의 행장은 경건하다고 평했다. 군산 출신인 김 시인은 경희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전북일보 논설위원, 전북도의회 의장, 한국문인협회 군산지부장 등을 지냈다. 한국PEN회원, 한국수필가협회, 전북불교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첫 시집 <바람처럼 살다가>와 <아니다, 모두가 그렇지만은 않다> 등 수필집 9권이 있다.

  • 문학·출판
  • 이용수
  • 2019.05.15 20:14

[신간] ‘1세대 인권변호사’ 한승헌이 만난 사람들 ‘그분을 생각한다’

1960년대 후반, 이십대 청년 한승헌은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내가 만난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났다. 고뇌의 석양 노을 속에서 인생론을 즐겨 읽던 그 때, 나도 언젠가는 그런 제목에 어울리는 인물이야기를 써야지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들과 이런저런 접점과 사연을 쌓아가며 어느덧 팔십대 중반의 인생을 쌓아올린 2019년 봄, <그분을 생각한다>(문학동네)가 세상에 나왔다. 세상을 바로 잡겠다며 헌신한 인물들, 어려운 삶 속에서도 바른길을 지키며 살아간 분들, 그들이 보여준 삶의 실체와 교훈을 널리 알리는 데 이 책이 기억과 깨달음의 각성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머리말 중) 이 책은 1세대 인권 변호사 한승헌이 만난, 격동의 세월 속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유명인사들의 평전이나 일대기가 아니라 한승헌 변호사가 직간접으로 교감한 메마르고 야속한 이 세상과 이웃을 위해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의 삶을 소개한다. 남정현의 분지 사건을 비롯해 동백림 간첩단 사건 등 한국현대사 속 굵직한 사건들의 변론을 도맡았던 그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스물일곱 명의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중에는 겨레의 스승 함석헌 선생, 한국 앰네스티 초대 이사장 김재준 목사,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응노 화백과 천상병 시인, 광주의 어머니 시민운동가 조아라 선생, 북한에서 만난 고교 선배 인민예술가 정창모 화백, 김대중문재인 대통령 등 한국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거목들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를 얻기 위해 어둠 속에서도 별처럼 빛난 그들의 희생을 되짚어보게 한다. 불평등한 제도에 신음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법이 국민을 탄압하는 집권자의 도구로 이용될 때 국민의 편에서 고난을 견딘 1세대 인권 변호사 이돈명이병린, 필화 사건에 휘말린 예술가들을 위해 법정에서 당당히 신념을 밝혔던 안수길이어령과의 일화를 통해 이 땅에서 민주주의인권정의평화가 발아한 값진 순간들을 포착하고 그들의 신념과 용기를 되새긴다. 전현직 대통령들과의 일화도 담았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감사원장으로,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던 한승헌 변호사는 역사의 폭풍을 함께 해쳐온 그분들과의 추억을 회상한다.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선포 후 선거법 위반 사건으로 기소된 김대중 대통령을 대변했던 일, 탄핵소추된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단으로 활약했던 일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1975년 봄 서울구치소 옆방 동문으로 시작한 문재인 대통령과의 인연도 눈길을 끈다. 두 사람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와 6월 민주항쟁, 노무현 변호사 구속 사건 변호인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 대리인단,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등 여러 곳에서 같은 길을 걸었다. 한승헌 변호사는 1934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나 전주고와 전북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뒤 검사생활(법무부, 서울지검 등)을 시작했다. 변호사로 전신한 이후엔 독재정권 아래에서 탄압받는 양심수시국사범의 변호와 민주화인권운동을 위해 힘썼다. 어떤 조사 필화 사건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변호사 자격 박탈 8년 만에 복권, 변호사 활동을 재개했고, 필화 사건을 포함한 시국 사건의 변호를 계속해왔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전무이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방송위원회언론중재위원회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 위원,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감사원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 대통령 통일고문,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 문학·출판
  • 김태경
  • 2019.05.15 20:14

[신간] 전북일보 신춘문예 출신 소설가 박이선 신작 출간

현직 소방관인 박이선 소설가가 한 사람의 안타까운 충정을 날카롭게 그려냈다. 극도의 사실적인 상황과 섬세한 심리 묘사는 생생하고도 서늘한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그의 신간소설 <궁정동 사람들 : 박흥주 대령의 1026>(나남출판)은 대통령 암살이라는 현대사의 가장 출경적인 사건인 1026을 배경으로 한다. 그동안 많은 이야기가 박정희 대통령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두 사람을 위주로 그려졌다면 이번 소설은 박흥주 대령을 통해 참군인의 충정과 비극적인 삶에 주목한다. 당시 중앙정보부 비서실장으로서 1026 관련자 중 가장 먼저 처형당하며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박흥주 대령. 그는 미래 육군참모총장으로 꼽힐 만큼 매우 유능한 군인이자 서울 행당동 달동네의 어둡고 좁은 집에서 아내와 두 딸, 젖먹이 아들과 함께 살던 보통사람이었다. 직속상관 김재규는 대통령 암살의 공범으로서 경호원들을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박흥주는 충성과 반역이라는 운명의 기로에 서고, 결국 청렴하고 충성된 군인의 길을 가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죽음을 맞는다. 이처럼 작가는 죽음을 앞에 두고 박흥주가 느낀 고뇌와 내면적 갈등을 오롯이 느끼기 위해 차분하게 자료를 모으고 행적을 더듬었다. 충성스러운 군인이자 한 집의 가장이던 박흥주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자 그의 내면과 그를 둘러싼 역사의 파도를 침착한 문체로 풀어낼 수 있었다. 거대한 역사와 권력 앞에서 한 없이 미약해지는 개인은, 가고자 했던 길과 주어진 길에서 갈등하는 운명을 타고 난 걸까. 박흥주 대령의 삶을 보며 선택의 기로에서 운명에 순응하느냐 마느냐 고민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그려본다. 내가 만약 그런 명령을 받았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소설 <궁정동 사람들>은 박흥주를 삶을 짓누르던 그 무게감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남원 출신인 박이선 작가는 현재 군산소방서에 화재진압 대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지난 201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서 소설 <하구>가 당선되면서 등단했으며, <연실이>로 월간문학세계 신인문학상, <이네기>로 제7회 대한민국디지털작가상을 수상했다. 작년에 정여립과 기축옥사를 다룬 역사소설 <여립아 여립아>는 정부의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 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 문학·출판
  • 김태경
  • 2019.05.15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보윤 소설가 - 곽병창 희곡집 ‘억울한 남자’

몇 년 전, 창작소극장에서 연극 한 편을 보았다. 곽병창 작가가 각색, 연출한 천사는 바이러스였다. 말로만 듣던 전주 노송동 천사의 이야기가 무대에 올려졌다. 해마다 십이월 하순에 돈이 담긴 박스를 말없이 놓고 가는 얼굴 없는 천사는 과연 누구일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과 돈을 노리는 일당과의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시종일관 유쾌하게 펼쳐졌다. 그러나 웃음 끝에 남겨진 메시지는 묵직했다. 기억하세요. 당신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는 것을 말이죠. 그리고 그들과 나누세요. 삭막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대들, 우리들의 따뜻한 마음뿐이랍니다. 곽병창 작가가 세 번째 희곡집을 냈다. <억울한 남자>라는 표제작을 비롯해 다섯 편의 희곡이 담겼다. 억울한 남자는 의료사고 피해자인 복동이 해당 병원의 간호사를 인질로 잡고 수술 집도의인 최교수를 협박하는 이야기다. 분명 억울한 남자는 복동인데, 극의 결말에서 억울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최교수다. 최교수는 무엇이 억울했을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모두의 삶이 조금씩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 마음을 읽어내는 게 작가의 몫이다. 빨간 피터, 키스를 갈망하다는 카프카의 원작소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희곡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추송웅이라는 배우가 일인다역으로 명성을 얻었던 빨간 피터의 고백과 다른 점이 있다면 순이라는 한국인 입양아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인간으로 길러지는 원숭이 피터와 완벽한 독일인이 되고자하는 순이를 통해 작가는 인간의 자유와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바로 여기, 우리의 현실로 가져온다. 대필병사 김막득은 전쟁과 군대에 대한 이야기다. 전쟁은, 전쟁은 말이야. 군인에겐 여전히 최상의 무대야. 꿈의 무대라고. 백대장의 입을 통해 군산복합체론이 슬쩍 드러나고, 아닙니다. 저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기 때문에.라는 배달병의 말에서 합리적인 사고를 마비시키는 군대문화를 돌아보게 한다. 배우들은 오오오, 제발 바꿔, 아무도 못 이긴 싸움, 이루지 못한 사랑. 오오오, 이제라도 돌아가야 해.라고 이 땅의 평화를 노래한다. 귀신보다 무서운에서는 삼례의 나라슈퍼 강도 사건을 다룬다. 경찰의 강압수사로 옥살이 한 이십대 청년들의 억울함을 작가는 조목조목 풀어나간다. 그리고 극중 인물 나라를 통해 속 시원히 외친다. 야 이 나쁜 놈들아. 얼른 나와서 빌어.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어. 그게 사랑이여. 곽병창 작가의 희곡집을 읽다가 책꽂이에서 안톤 체호프의 책을 꺼낸다. 거짓과 모든 형태의 폭력을 증오한다고 했던 체호프의 희곡집 <벚꽃동산>을 나란히 펼쳐둔다. 어딘가 닮았고, 둘 다 훌륭하다. 두 권 모두 가슴에 품는다. * 황보윤 소설가는 2006년 동서커피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고 2009년 대전일보와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됐다. 창작집으로 <로키의 거짓말>과 <모니카, 모니카>가 있다. 현재 남원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9.05.15 20:14

“도전과 간섭은 역사가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

이규하 전북대 명예교수가 <서양 근세 초의 새로운 모습>(신서원)을 펴냈다. 이 책은 복잡다단한 사건이 점철된 16~17세기 근세 초 유럽의 역사를 5부 300쪽에 걸쳐 다뤘으며, 이규하 명예교수가 33년간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강의하고 연구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제1부에서는 서양 중세의 개관, 황제와 교황의 대립충돌을 살피고, 제2부에서는 서양사의 시대구분 이론과 근세 초의 특징을 소개한다. 3부와 4부에서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한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의 연합,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 황제 시대를 통해 근세 초 서양 여러 나라에 새롭게 등장한 왕과 문화를 다룬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어머니 후아나 1세의 슬픈 사랑 이야기, 헨리 8세피의 메리 여왕엘리자베스 1세의 치적 등이 주요 내용. 5부에서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신학적 이유와 교황과의 대립과 충돌을 담았다. 외부로부터의 도전과 간섭은 역사가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 교수는 책 머리말에서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 역사학자 랑케의 말을 인용, 혼란스러운 국내외 문제와 어려운 여건들 때문에 비관하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교수는 정치사회적 분쟁의 내용이 많은 이 책이 일반인들의 교양을 위해서 그리고 특별히 학계와 정치권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여러 신체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하늘이 나에게 준 임무라고 생각되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펜을 들었다고 밝혔다. 전북대 인문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 교수는 하버드대학교 연구교수, 전북사학회장, 전북대 인문학연구소장 등을 지냈다.

  • 문학·출판
  • 이용수
  • 2019.05.15 20:14

[신간] 백승종 역사학자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출간

역사학자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수가 올해 처음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기념일(5월 11일)을 앞두고 동학의 현대적 의미를 새로이 해석한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를 펴냈다. 작가는 동학의 본질을 관계의 질적 전환으로 설명하고, 동학농민운동의 목적을 정의로운 공동체의 건설로 해석하는 등, 역사적 의미를 해석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계보학적 접근도 눈에 띈다. 18세기 정감록(鄭鑑錄)에서 비롯된 사건을 동학의 기원으로 끌어올리고, 그동안 동학과 배치된다고 알려진 성리학이나 불교에서 인물성동이론 미륵하생신앙과 같은 사상적 원류를 발견해냈다. 19세기 조선 사회에 대한 인식 또한 새롭다. 현대정치의 개념으로만 알려진 사회적 합의가 조선의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고, 역사에서 무시돼온 소농(小農)과 평민지식인의 역할을 재평가했다. 특히 오는 5월 11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앞둔 시점에서 나온 책이라 더욱 뜻깊다. 1894년 5월 11일 동학농민군이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날을 기린 이 날. 125년이 지난 오늘날 역사상 가장 험난한 시기에 태동해 변혁의 강물로 줄기차게 이어져 온 동학은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은 동학운동의 현재적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미래의 동학을 모색할 수 있는 단초를 독자들에게 제시할 것이다.

  • 문학·출판
  • 천경석
  • 2019.05.08 20:14

제13회 해운문학상 대상에 홍성남 시인

제13회를 맞아 더욱 새롭게 거듭난 해운문학상 대상에 홍성남 시인(서울)이 선정됐다. 또 해운문학상 본상은 박일천 수필가(전주)가 영예를 안았으며, 바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기울이는 문학인을 찾아 수여하는 바다문학상수상자로는 박종은 시인(고창)이 뽑혔다. 해운문학상은 ㈜국제해운(대표이사 윤석정)이 매년 바다의 날을 기념하고 해양문학이라는 장르를 통해 해양과 해운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제정한 상. 지난 2017년부터 공모의 폭을 전국으로 확대했으며, 올해부터는 전북일보사와 공동주최해 그 의의와 위상을 한껏 높였다. 지난 4월 1일부터 30일까지 진행한 해운문학상 작품 공모에는 시와 수필 부문에서 700여 편이 응모했다. △해운문학상 대상 - 홍성남 시인 해운문학상 대상 선정작은 시 부문 홍성남 시인의 해름. 심사위원들은 해름이란 말은 해거름의 준말로 우선 제목으로 응축의 이미지를 띄웠다. 생명 의식의 고양이며 정서의 건강성이 돋보였다며 갯벌과 임산부, 만월과 만삭, 청정 바다인 여수해변의 여자만과 여자 등으로 생산성에 연계되는 연상수법의 기교는 상호간을 한 상관속으로 엮는 묘한 수사로써 일품이었다고 평했다. 홍성남 시인은 이런 날이 오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제는 집중할 때와 멈출 때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며 나에게는 해운문학상이 명품 같은 상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해운문학상 본상 - 박일천 수필가 해운문학상 본상 선정작은 박일천 수필가의 소금 꽃으로 묘사와 설명을 섞으며 이야기를 끌어가는 문학적 기량이 탁월했다. 입체적 구성이면서도 문맥의 흐름이 막힘없이 도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일천 수필가는 어스름이 창가에 드리울 때 수상 소식을 전해 들었다. 가족이 모인 저녁 시간이라 기쁨을 나누는 소리가 온 집안을 들썩였다며 텅 빈 백지에 나만의 고유한 빛깔로 물들여 쓴 글이 순간이나마 누군가 공감하고 위안이 될 수 있다면, 묵묵히 새로운 나를 찾아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바다문학상 - 박종은 시인 바다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박종은 시인은 평생을 진정한 교육자로서 교육을 위해 정려했으며, 바다에 대한 분야에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 점을 인정받았다. 박종은 시인은 끝이 없는 수평선, 희망처럼 나는 바닷새,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바라만 봐도 가슴 뛰는 바다, 그곳은 온갖 생물체의 요람이요 식량의 보고이다며 우리는 그 바다를 품고 사랑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해운문학상 심사는 시 부문 이향아소재호김영 시인이, 수필부문은 김경희박귀덕 수필가가 맡았으며, 바다문학상 심사는 정군수소재호최정선 시인이 참여했다. 시상식은 6월 4일 오후 4시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국제회의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해운문학상 대상은 해양수산부장관상, 상금 300만 원, 순금 10돈이 주어지며, 해운문학상 본상은 전북일보 회장한국문인협회 이사장 공동시상으로 상금 200만 원을 받게된다. 또 바다문학상 수상자에게는 해양수산부장관상과 순금 10돈이 수여된다.

  • 문학·출판
  • 이용수
  • 2019.05.08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유석 시인 - 안도현 엮음 ‘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

목이 패는 보리밭 두렁에 앉았다. 연두의 눈꺼풀 아래 비 지난 후 볕이 여리고 말갛다. 풀 비린내 같은 게 스미더니 이내 은근해진다. 천지간이 한껏 들이쉬는 숨결처럼 아련한 오월, 들밭에 고추모를 놓다가 한눈파는 촌부의 한갓진 정취인 줄 알겠지만 사실 지금 이 순간이 바쁘다. 빈 대궁을 밀어 올리는 보리목을 물끄러미 바라보아 주는 일, 이랑에 숨어드는 까투리 내외를 못 본 척 눈 흘리기는 것도 따지자면 다 가쁜 봄날의 일. 장판에 손톱으로/ 꾹 눌러놓은 자국 같은 게/ 마음이라면/ 거기 들어가 눕고 싶었다 홀연 이런 글귀가 가슴에 새실거리는 건 또 무슨 실없는 일인가. 두어 달 전쯤 장정이 예쁘장한 시집 한 권이 나를 찾아왔다. 살구꽃 빛깔의 삽화가 몇 장 끼어 있는 그것은 한 사람의 사유가 통조림 된 여느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한 쪽씩 담긴, 생마늘 냄새 같은 게 나는 거였다. 나의 책읽기는 늘 그렇게 조금 게을러서, 마당귀 살구꽃 다 훑어가도록 들바람에 묵혀가면서 읽었다. 한 번 넘겼을 땐 여러 명이 쓴 한 사람의 생 같았고 두 번을 읽은 후엔 한 사람이 쓴 여러 사람의 삶이 넌지시 공명해 오는 오래된 시집 같기도 하였다. 쌉쌀하고 여릿여릿한 생의 순간들이 단색 판화처럼 눌러 찍히는 그것을 뭐랄까, 두서없이 차린 모듬의 살점을 한 점 한 점 집는 느낌? 딱히 그랬다. 그러므로 이 책은 무작정 펼친 쪽을 따라 읽어도 좋다. 감자알처럼 고르게 밑들어 있는 65편의 시들은 틈 날 때 한 편씩 따로 읽어도 그만이다. 나는 식은 귀뚜라미를 주워/ 하현달 눈꺼풀 사이에 묻어주고는/ 그늘로 덧칠해놓은 창을 닫았다(86쪽)를 읽다가 빗소리 곁에/ 애인을 두고 또/ 그 곁에 나를 두었다(50쪽)를 넘겨도 통할 만큼 삶을 대한 시인들의 마음과 사유가 가지런하다. 몇 이랑 건너 제법 먼발치에서 흰 점 하나가 어룽거린다. 맨눈으론 놓칠 수밖에 없는 저만큼의 거리를 끌어오는 것은 나비의 나풀거림보다 보리들의 파란 바탕에 있을 것이다. 한 점 흰 빛을 이끄는 푸름을 촘촘히 따르면 나비의 문양까지를 읽을 수 있고 나비를 쫓다보면 날개 끝에서 보리들의 섬세한 떨림을 볼 수도 있는 것, 시란 아마 그런 것일 게다. 이런 시를 읽어야 하는 그때는 언제인가. 생의 매순간이 필경 그때일지 모를 일, 삶에 대해 누가 서툴게 묻는다면 아무 쪽이든 펼쳐 보이고 싶다. * 김유석 시인은 김제에서 출생해 농사 지으며 살고 있다. 19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고 이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어 활동 해 왔다. 그 동안 <상처에 대하여> <놀이의 방식>, 두 권의 시집을 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9.05.08 20:14

고 오하근 평론가 문학비, 김제 청운사 연지에 세워

한국문학 연구와 지역문학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오하근 문학평론가의 문학비가 드디어 건립됐습니다. 고 오하근(1941~2017) 문학평론가를 기리는 문학비 제막식이 지난 3일 김제 청운사 연지에서 열렸다. 이날 제막식은 호병탁 시인의 사회로 서재균 오하근문학비건립추진위원장의 인사말, 장지홍 오하근문학비건립집행위원장의 경과보고, 안평옥 시인의 추모시 낭송, 제막, 헌화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제막식에는 생전 고인과 함께한 문학계 인사들을 비롯해 윤석정 전북일보 사장, 청운사 주지 도원스님 등 100여 명이 참석해 오하근 평론가의 문학적 업적을 되새겼다. 장지홍 집행위원장은 오늘의 시간이 만들어지기까지 문학 동인회 문예가족, 전북대학교 국문과 제13회 동기생들, 고 오하근 교수가 발의해서 만들어진 금요회 사람들, 맥랑시대가 주축이 되어 마음을 모았다며 여기 청운사 부지에 좋은 자리를 마련해 준 주지 스님께 고마운 인사를 올린다고 말했다. 이날 문학비가 세워지기까지는 건립장소 결정 등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추진위는 김제시와 협의를 통해 김제 중앙체육공원으로 위치를 조율해 오던 중 제막식 한 달을 앞두고 담당자의 전출, 김제시 공원사용 조례라는 문턱에 가로막혀 표류했고, 김남곤 시인과 도원 스님 도움으로 김제 청하면 청운사로 최종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학비 비문은 평론가 전정구 교수가 쓰고, 글씨는 송하선 교수가 맡았다. 고 오하근 문학평론가는 김제 성덕 출생으로 전북대를 졸업했으며, 1981년 <현대문학> 평론 부문으로 등단했다. 저서는 <원본 김소월 전집>, <정본 김소월전집>, <김소월 시어법 연구>, <한국현대시 해석의 오류>, <전북 현대문학>, <가슴엔 듯 눈엔 듯 도 핏줄엔 듯> 등이 있으며, 목정문학상, 김환태 평론문학상을 수상했다.

  • 문학·출판
  • 박은식
  • 2019.05.06 19:05

[신간] 김인태 정읍시 부시장, 첫 시집 ‘숲이 있어 길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흙과 먼지, 하늘, 바람, 산과 바다, 심지어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에 이르기까지 이유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김인태 정읍시 부시장이 첫 시집 <숲이 있어 길도 있다>(도서출판 바람꽃)를 펴냈다. 너, 인생이 뭔지 아니?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 대학 선배가 했던 말. 김 부시장은 선배의 화두가 살아오는 내내 가슴을 지배하여 왔고,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보이는 실오라기 한 점 한 점을 엮다 보니 한 권의 시집이 됐다고 했다. 정해진 길로만 걸었네 / 한눈팔지 않고 걸었네 / 목적지는 없었지만 / 이 길이 갈 길이라 믿고 / 우직하게 걸었네 // 어느 비 오는 날 /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다고 / 누군가 계속 속삭여오네 - 새싹 기르기 중. 시집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 순환 순서에 따라 총 77편의 시로 구성됐다. 제1부 봄 에는 팔십억 개의 세계를 비롯한 15편, 제2부 여름에는 가려진 하늘을 보며 등 22편, 제3부 가을에는 황금빛 꿈 등 23편, 제4부?겨울에는 눈꽃을 비롯한 17편의 시가 실렸다. 이병천 전북문화관광재단 대표는 강이 있어서 다리가 생겨나는 이치인 것처럼 김인태의 시들은 질곡의 현상들을 먼저 읽어낸 다음, 돌연 숲 사이로 감춰져 있던 희미한 길 하나를 찾아내 우리에게 제시해준다고 평했다. 또 김익두 전북대 국문과 교수는 시 해설을 통해 그의 시가 지향하는 것은 언제나 맑게 갠 푸른 하늘이다며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인의 맑은 영혼에 빠져든다고 했다. 김 부시장은 전북대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으며, 군산시청 세무과장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전북도 정책기획관과 문화체육관광국장을 거쳤다.

  • 문학·출판
  • 이용수
  • 2019.05.01 19: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헌수 시인 - 유강희 동시집 ‘손바닥 동시’

딸아이하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집 앞 국숫집에 갔다. 양은그릇에 가득 담긴 국수를 사람들이 소리 내며 먹고 있다. 유강희 시인의 짧은 동시 국수 가족이 떠오른다. 호로로호로록/후룩후루루룩/뾰록뾰로로뾱, 국수 먹는 소리와 모습을 이보다 더 실감나고 재치 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 면발을 맛있게 마시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시집 이외에도 여러 권의 동시집을 낸 유강희 시인이 최근에 <손바닥 동시>란 새로운 형식의 동시집을 펴냈다. 시인이 10여 년 전, 바닷가를 거닐다가 손바닥에 짧은 시를 쓰면서 손바닥 동시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손바닥 동시 형식에 대해 간단히 말하면, 글자 수가 시조의 앞 첫 구만으로 짜인 3행의 시다. 이번 동시집에는 모두 100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번 동시집에선 천둥이 치거나 모기가 물어도 눈만 꿈벅이는 소, 오늘 방학을 한다면 야호, 소리를 지른다는 하느님, 뾰 한 글자로 생명의 설렘을 노래한 봄, 누군가 놀래키면 멈출 것만 같은 뻐꾸기 딸꾹질, 컵라면 뚜껑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사람, 참새도 박새도 와서 먹는 까치밥, 개미가족 소풍에 꽃 양산이 되어주는 살구꽃 등 천진한 동심의 언어를 만날 수 있다. 이번 <손바닥 동시>엔 특히 시인이 강조해 온 생명심으로 우리 주변의 사물과 자연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고 진솔하게 담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래서일까. 그의 동시를 읽다 보면 순수한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고, 진하게 농축시킨 간결한 언어에 마음의 발길이 멈추곤 한다. 그런가 하면 웅덩이가/날개를/편다(차가 지나갔다)에선 무릎을 탁 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스마트폰에만 빠져 사는 딸아이에게 손바닥 동시 몇 편을 읽어주고 제목을 맞혀보라 했다. 딸아이는 깔깔대며 웃기부터 했다. 둘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평범해 보이는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걸 짧은 몇 마디 언어로 표현한 동시가 딸아이는 퍽 신기했던가 보다. 우리는 그날 서로 제목을 묻고 답하며 한바탕 손바닥 동시놀이에 푹 빠져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일 모레가 어린이날이다. 각종 영상 매체와 스마트폰에 길들여진 아이들에게 누구나 쉽게 쓰고 즐길 수 있는 유강희 시인의 <손바닥 동시>를 선물하는 건 어떨까. * 김헌수 시인은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삼례터미널로 등단했다. 우석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전북작가회의 회원, 동시창작 모임 동시랑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9.05.01 19:15

[신간] 전라도 관찰사 서유구의 ‘완영일록’ 완역

조선 시대 관찰사는 각 도에 파견돼 지방 통치의 책임을 맡았던 지방 최고의 장관이다. 왕명을 지방 수령에게 전달하고, 수령의 근무실태를 평가해 1년에 두 번 장계를 올렸으니 그 권한이 막강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러한 관찰사의 행정 일기 <완영일록>이 완역돼 나왔다. 조선 시대 관찰사 제반 공문서 기록으로는 유일한 자료일 뿐 아니라 당시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에서 행해진 지방 통치 및 재정 운영과 다양한 사회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이 책은 2016년부터 2년간 전라북도의 지원을 받아 완역한 것을 바탕으로 2018년 전주시의 지원을 받아 원문 표점 작업을 부가하여 번역의 전문성을 높이고 윤문과 용어 정리 등 가독성을 높이는 작업을 통해 출간하게 됐다. 풍석(楓石) 서유구(1764~1845)는 1833년(순조33) 3월에 임명을 받고 4월 10일에 전라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도순찰사 전주 부윤으로 부임해 이듬해인 1834년 12월 30일까지 21개월 동안 재임 기록인 <완영일록>을 남겼다. <완영일록>은 전라도 관찰사로서 수행한 공무와 위로는 국왕과 중앙 각사, 아래로는 각 지방 수령 및 백성들과 주고받은 문서가 기록돼 있다. 전라도 관찰사로서 발생하는 공문서 기록을 처음부터 기획했고, 공문서가 발생하면 내용만을 간추려 날짜별로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완영일록>은 관에서 펴낸 사료는 아니지만 여러 정황으로 전라도 관찰사의 공식 업무와 공문서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등재된 문서는 전라감영의 공문서라 할 수 있다. 특히 관찰사 재임 전 기간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의 공문서를 모아 기록한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완영일록>은 전라도 53개 고을과 병영각 진(鎭)과 제주도의 행정, 군사, 사법을 관장하였던 감사의 주요 업무를 파악할 수 있음은 물론 망궐례, 진상 시기와 물품, 과거시험, 수령의 고과 방법과 시기, 환곡 수송, 진휼, 효자 정려(旌閭), 조경묘경기전의 봉심 시기와 절차 등 당시 전라 감영 행정 전반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내용과 이를 시행하라는 문서들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전라도 관찰사를 중심으로 한 공문서 행이 과정과 당시 전라도 관찰사의 주요 업무 내용을 가늠할 수 있다. 나아가 지방 통치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관찰사와 예하 수령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당대 사회의 가장 시급한 사안은 무엇이었는지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풍부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완영일록>을 비롯해 전라 감영 관련 기록물들을 중심으로 역사문화 기록물을 활용한다면 전주뿐만 아니라 56개 주 전라도 전역의 사료가 문화 콘텐츠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 문학·출판
  • 천경석
  • 2019.05.01 19:15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① ‘정읍사’(井邑詞) 다시 알기

오래 전부터 전라북도를 예향이라 일컫고 있다. 그런데 다른 지방 사람들이 전북이 왜 예향이며, 한국문학의 메카라 하느냐고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삼국시대 이후 한국문학의 발자취를 살펴 그 답을 찾아보는 의미에서 전라북도문학관(관장 류희옥)의 지상강좌를 마련했다. 전라북도는 대한민국 문학의 메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주장의 큰 기초가 되는 작품이 바로 정읍사(井邑詞)이다. 정읍사는 백제 때의 민간 가요로서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 있고, 한글로 전해오는 유일한 작품이요 노래이기 때문이다. 이 정읍사는 노래로 불리던 것으로 본 내용에 여음구가 붙여지게 되었다. 본 내용만 추리면 3장 6구의 시조 형식을 띠는데, 이를 근거로 정읍사를 시조의 원형으로 삼기도 한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머리곰 비취오시라. / 全져재 녀러신고요. 즌 데를 드데욜셰라. / 어느이다 노코시라. 내 가논 데 졈그를셰라. 석 줄의 짧은 가사에 지나지 않으나, 이 노래가 이토록 오랜 세월 불리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이다. 첫째,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평이하고 소박한 내용이다. 행상 나간 지아비를 걱정하는 지어미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쉽게 헤아릴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다. 둘째, 이 작품에서 달은 작품의 배경이 되면서 이 시의 가장 강력한 상징성을 띤다. 달을 통해 지어미의 간절한 기원은 온 누리로 확장된다. 또한 전져재 녀러신고요(전주시장을 다니시는가요)라는 구체적인 상상은 지역 명칭과 더불어 실감을 주면서 시적 형상화를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한다. 셋째, 즌 데(진 곳)와 졈그를셰라(저물세라)가 가지는 은유는 이 시를 최고의 시로 끌어올린다. 사실 땅이 진 곳 그 자체를 걱정할 여인은 없을 것이다. 이 진 곳은 여염집 여인들이 가장 염려하는 곳, 즉 여자들의 유혹이 진하게 배어 있는 곳을 말할 것이다. 술집이나 유곽쯤으로 생각하면 딱 맞을 그런 은유다. 그러니 이 노래에 담긴 여인의 마음은 사실 보이지 않게 애가 닳는다. 그러한 실정이니 이 지어미에게는 지아비가 벌어올 돈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사랑하는 낭군님이 염려될 뿐이다. 그래서 어느이다 노코시라는 지극히 자연스레 다가온다. 어느 것이든 다 놓고 오십시오. 이 말 한마디는 얼마나 통쾌한 표현인가. 내 가논 데 졈그를셰라 역시 깊은 은유를 담고 있다. 어조의 흐름으로 볼 때 내는 남편을 가리킨다. 날이 저물어 남편이 진 곳을 밟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남편이 해를 입어 어둠 속에 빠지면 지어미 자신의 삶도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결국 내는 지아비와 지어미 자신을 동시에 함축하는 표현이 된다. 이는 부부일심동체라는 우리 민족의 사상 체계와도 맥을 함께한다. 이렇듯 평이하면서도 여염집 여인의 염원이 지극한 사랑으로 형상화된 작품은 찾기가 쉽지 않다. 한글로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노래가 이러할진대, 이 정읍사는 우리 전라북도의 문학적 자긍심을 갖게 하는 출발점이라 하겠고, 우리 도민은 이 정읍사를 더욱 소중히 아낄 수 있어야 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이 정읍사는 여러 가지로 풀어야 할 게 있다. 이 노래는 백제 노래인가 신라 후기 노래인가, 제목이 정읍인가 정읍사인가. 노래 속 가사가 全져재인가 져재인가. 망부석의 위치는 어디인가 등이 그것이다. 원광대 국문과에 재직하였던 이상비 교수는 『새 자료에 의한 한국문학사의 재평가』(1997)라는 저서의 「백제가요 정읍 신고」라는 논문을 통해 정읍사와 관련한 내용을 자세히 밝혀 놓은 바 있다. 그 중심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명이 정촌현(井村縣)에서 정읍현으로 바뀌게 된 것이 경덕왕 16년(757)이니, 정읍사는 백제의 노래가 아니고 신라 후기의 노래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상비는, 일단 지명이 개정되면 그 지명으로 된 모든 명칭은 일제히 고쳐져서 통용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향가 처용가에서 서라벌이 동경으로 고쳐졌듯이 정촌(井村) 역시 정읍으로 고쳐져서 전래되었다는 것이다. 즉 정읍사는 신라 후기 경덕왕 16년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 백제 때부터 불려왔다는 것이다. 이상비는 본래 노래의 명칭이 정읍인데 김태준이 『고려가사』에서 정읍사로 명명하면서 명칭이 정읍사로 굳어진 게 아닌가 보고 있다. 아울러 『삼국유사』의 향가 관련 진술 또는 『고려사』의 속악 관련 진술을 통해 사(詞)는 가(歌)의 개념이 아닌 가사(歌詞) 곧 노랫말의 개념임을 밝히고 있다. 唱海歌詞曰(해가를 불렀는데 노랫말은 가로되)처럼 歌井邑詞(정읍을 불렀는데 그 가사는), 唱動動詞(동동을 창하였는데 그 가사는)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결국 정읍사의 본래 명칭은 예로부터 정읍이지 정읍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악학궤범』에 나오는 後腔全져재녀러신고요의 후강전을 악곡상의 명칭으로 보고 져재 녀러신고요로 여겨 왔으나, 이상비는 후강전이라는 악곡 명칭은 없고 전져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완산지(完山誌)(1958년 간)를 입수하였는데, 원본이 조선 정조 때인 이 책을 통해 전주를 전으로 표기한 사례를 두 곳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전주를 전으로 쓰게 된 연유로 한문의 약칭성향을 들었고, 또한 노래의 가사이기에 전주져재보다는 전져재가 훨씬 노래 호흡에 맞다는 김형규의 주장(『고가요주석』, 1968)을 소개하며 이에 힘을 싣는다. 망부석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정읍현의 望夫石在縣北十里其曲曰井邑(망부석은 관아에서 북으로 십리에 있다. 그 곡의 이름은 정읍이다)라는 표현에서 그 근거를 삼게 된다. 그런데 망부석의 위치로 잡은 현재의 정읍사공원은 백제 당시의 현을 추론하여 정한 것으로 현을 지금의 정해(井海, 샘바다)로 잡은 것이다. 이상비는 현북십리는 당연히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할 당시의 현청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위의 표기에서도 정읍사가 아닌 정읍으로 표기된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상비는 당시의 현청 자리를 자료를 근거로 하여 찾았는데, 호남고등하교와 동초등학교의 중간 지점에서 동초등학교 쪽으로 2분의 1쯤 다가선 지점으로 보았다. 그렇게 찾아낸 현청을 중심으로 내장산, 오봉산, 반등산 등의 거리를 역산하여 망부석의 위치를 제시하였다. 그곳은 정읍시 북면 승부리 너머의 오르막의 면소재지가 보이는 곳이 꼽힐 뿐이다. 따라서 이곳의 오르막의 산석을 골라 망부석을 삼을 것이고, 적당한 돌이 없다면 조형물을 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악학궤범에 나오는 백제 당시의 망부석은 긴 세월 동안 얼마든지 망실될 수도 있고,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망부석을 가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읍이라는 악곡은 엄연히 불렸었고, 그 가사 또한 엄연히 전해오고 있다. 정읍사를 정읍으로 바로잡기도 힘들고, 이미 세워진 정읍사공원을 옮기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가려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힘들어도 해야 할 일이다. 최소한 망부석이라도 제 위치에 세우고 그 진실이라도 알리는 작업을 해나간다면 그 노력 또한 찬사로 돌아올 것으로 믿는다. 전라북도를 한국문학의 메카라고 하며 자부한다면, 전라북도 차원의 협조와 지원 또한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진실을 밝혀 주시라.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 문학·출판
  • 기고
  • 2019.05.01 19:15

한국·전북 문학 큰 족적, 문학비 건립으로 기린다

한국현대시를 정치하게 해석하여 비평의 깊이를 더했으며, 전북문학의 역사를 체계화하여 지역문학의 위상을 적립하였기에 그 업적을 기려 여기 비를 세운다. 고 오하근(1941~2017) 문학평론가의 문학비 제막식이 오는 5월 3일 오전 11시 김제 청운사 연지에서 열린다. 이번 문학비 건립은 생전 한국문학 연구와 지역 문학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오하근 문학평론가를 기리기 위해 고인과 평소 각별한 교분을 나눈 지인 97명의 따뜻한 마음이 모여 추진됐다. 따뜻한 마음이 모였지만, 문학비 건립까지 순탄하게만 흘러온 것은 아니다. 이날 문학비가 세워지기까지 숱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문학비 건립을 추진한 추진위원회는 지난해 5월 뜻을 모아 같은 해 11월 김제 시민문화체육공원에 문학비를 세우기로 결정했지만 추진 과정에서 의견 차이 등으로 건립이 미뤄져 왔다. 하지만 고인을 기억하는 지인들의 마음이 하나로 뭉쳐 문학비 건립에 다시금 뜻이 닿았다. 문학비에 들어갈 비문은 전정구 문학평론가가 맡았고, 글씨는 송하선 시인이 썼다. 가장 결정하기 어려웠던 건립 위치는 김제 청운사 연지로 정했다. 3일 열리는 제막식은 호병탁 문학평론가의 사회로 진행되며, 서재균 오하근 문학비 건립 추진위원장의 인사말과 장지홍 오하근문학비건립집행위원장의 경과보고, 안평옥 시인의 추모시 낭송이 이어진다. 이어 문학비 제막과 가족대표 인사, 헌화와 분향 등의 순서로 예정됐다. 서재균 추진위원장은 뜻하지 않게 어려움이 생겨 당초 예정일은 넘겨 고 오하근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문학비가 건립하게 됐다며 바쁜 일정에도 밝은 웃음으로 이야기하던 선생의 모습을 떠올리며 뜻있는 제막식에 함께해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제 출신인 오하근 문학평론가는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문학석사, 전남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를 받았다. 부안여중고와 전주해성고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군산공업전문대와 원광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를 지냈다. 미국 뉴욕주립대학과 중국 연변대 교환교수로 활동했고, 원광대 명예교수를 역임했다. 1981년 현대문학 불, 그 영원한 종합으로 등단했고, 2002년 목정문학상, 2011년 김환태 평론문학상, 2013년 전북해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채만식문학상 운영위원장, 석정문학관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원본 김소월 전집, 정보 김소월 전집, 김소월 시어법 연구를 발간해 소월시 연구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이후로도 한국현대시 해석의 오류, 전북현대문학등의 저술로 평론가로서의 진면목을 보였다.

  • 문학·출판
  • 천경석
  • 2019.04.25 20:3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 - 황보윤 ‘모니카, 모니카’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작가로서 출발은 반항심에서 연유한다고 정의했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해 갖은 재주를 동원하여 또 다른 삶과 사람을 창조해 낸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실에 대한 거부감이 커서 글을 통해 직성을 푸는 것이라 했다. 황보윤 작가가 단편소설 7편이 담긴 소설집 <모니카, 모니카>를 펴냈다. 이 작품에서 갖은 재주를 동원했다고 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탐구한 노력이 보인다. 쓰기 위해 많이 배우고, 또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려 했던 흔적이 담겨있다. 내가 아는 황보윤 작가는 자신의 재능을 거들먹거리지 않는다. 또한 무책임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너무 군더더기가 없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게 맞을 듯싶다. 7편의 색깔이 모두 다르고, 공감을 끌어냈다. 블랙코미디 같은 요소도 있어 단숨에 읽게 만들었다. 이들 단편 중 완벽한 가족은 KBS라디오 문학관-(2019년 1월 27일)에 방송된 바 있다. 책을 읽었을 때 느꼈던 인물들의 감정을 더 섬세하고 생생하게 만질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중성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두 개의 별이 서로 가까이 있는 이중성 즉 그 별들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끌어낸 구조를 쉼 없이 따라갔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맨 뒤에 있는 게 유감이었다. 언젠가 황 작가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했다. 작년 12월, 전주에 한 서점 책방 놀지에서 황보윤 작가의 북콘서트가 열렸었다. 그런 나의 팬심을 달래주듯 그날 작가와 독자가 함께 이중성 한 편을 완독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 줄 모르게 푹 빠졌었다. 조금씩, 조금씩 고인 약수는 한 바가지 가득 담겨 어떤 이의 갈증을 풀어준다. 넘치지 않게 스미듯 고이지만 그 물은 큰 힘을 발휘한다. 황보윤 작가의 소설 속에서 독자인 내가 그 갈증을 푼 기분이다. 내가 처음 황 작가의 소설을 접한 것은 로키의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에 푹 빠져 침을 꼴깍이며 읽은 기억이 새롭다. 그 안에 함께 실린 산수유 아래서는 꽉 막힌 곳에 있는 한 여자를 무심한 듯 풀어주는 결말에서 묘한 해방감을 함께 느꼈었다. 한 곳에 기울지 않는 다양한 시도는 황보윤 작가의 힘이다. 독자로 로키의 거짓말에 이어 모니카, 모니카의 순례를 함께 했다. 그녀의 내면에 담긴 또 하나의 세상을 접했다. 그 다음에 어떤 길을 열어 함께 걷자고 손짓할지 황보윤 작가의 향후 행보에 사뭇 설렌다. * 김영주 작가는 우석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했으며,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마키코 언니를 출품해 등단했다. 2018년 동양일보 동화부문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전북작가회의 회원, 동시창작 모임 동시랑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9.04.2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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