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메아리] 봄날은 간다 - 김정수
대한민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값싸고 질 좋으며 뼈까지 있는 소고기를 미국에까지 아가 수입하기로 결정한 바로 그 날, 봄날답지 않게 불끈 수은주가 치솟았다. 하루아침에 봄이 우리 곁을 떠나간 것이다. 짧다 짧다 해도 그렇지, 봄 향기를 음미하기 위해 감았던 눈을 뜨기도 전에 맞은 별리의 상실감은 생각보다 컸다. 감당키 어려울 무게로 가슴을 짓눌렀다.며칠 동안 맥없이 '연분홍 치마가~'를 흥얼거리다가, 문득 이 노래를 제법 구성지게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노래가 어떤 노랜가? 55년 전 백설희부터, 한영애, 심수봉, 조용필, 장사익까지 불렀던 대한민국 대표가요로서, 이마에 세월의 계급장깨나 얹혀야 비로소 참맛을 낼 수 있다는 바로 그 노래 아니었던가? 그런 노래를 내가? 이쯤 되면 나 역시 인생의 봄날에 살고 있지 않다는 의미구나, 생각했다.지난 주, 미술의 문외한이 광주시립미술관의 '봄날은 간다'전을 찾아간 것도 순전히 그 제목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봄날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 지, 얼마나 서럽게 이별하고 있는 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로 끝나는 안도현 시인의 '봄날은 간다'를 곰씹으며 전시장을 둘러봤다.연극 '봄날은 간다'가 백설희의 노래를 테마로 삼고 있다면, 영화 '봄날은 간다'는 김윤하의 '봄날은 간다'를 배경으로 깔고 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명대사를 남긴 이영애와 유지태가 만든 봄날의 사랑이야기였다. 장르를 뛰어넘어 이처럼 제목을 공유하는 경우도 드문 일이다. 하지만 어떤 장르건 공통점은 전시장에 널려있던 허허로움이다. 막연한 외로움이자 그리움이다.여기 인생의 봄을 떠나보내는 세대가 있다. 전쟁과 가난의 끝물을 맛봤고, 고도성장기에 굶주리며 성장했으며, 민주화의 열망 속에 청춘을 보냈지만, IMF의 충격을 온몸으로 감당해내야 했던 그들, 부모봉양의 의무감은 누구보다 투철한 대신 자식들에게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세대. 부지런히 일하면 좋은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 하나로 살아왔지만, 미안하게도 그들로부터 봄은 자꾸만 멀리 달아나고 있다. 짧던 봄의 아련한 추억, 짧은 첫사랑의 기억처럼,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은 것처럼.대한민국 1%들은 모른다. 강산이 오염되면 까짓것 알라스카산 물 수입해 마시면 되는 사람들에게는 '잃어버린 십 년'의 암흑으로부터 벗어나 이제야 따스한 봄날이 시작되는 것일런지 모른다. 전복된 가치관과 당혹스러움 속에서 인터넷에 떠도는 '다음 달부터 먹어서는 안 될 서른 가지 대표 음식'의 목록을 뽑고, 그 음식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심정을 그들이 진정 이해할 수 있을까?나를 키워준 그 음식을 이젠 독버섯으로 가르쳐야 하나? 먹는 것 하나 내 마음대로 먹일 수 없는 부모, 그렇다고 '다 같이 죽자' 외칠 수 없기에 이래저래 봄날을 보내는 시름은 깊어만 간다./김정수(전주대교수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