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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연재를 마치며] 전북문학, 한국문학의 중심축 기능 담당

고려사 악지에 전해오는 백제오가 중 태평가격인 〈무등산가〉를 제외한 〈정읍사〉와 〈선운산가〉, 〈지리산가〉, 〈방등산가〉 등의 망부가류와 조선조 가사인 정극인의 〈상춘곡〉, 경기체가 형식의 〈불우헌곡〉과 단가형의 〈불우헌가〉는 조선 시가의 남상(濫觴)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제권의 시가작품들은 한결같이 여성의 정절을 테마로 한 망부가(望夫歌)류로 오로지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고 인내하는 망부의 미학을 주조로 하고 있다. 이들 작품 속엔 오지 않는 임에 대한 원(怨)이나 한(恨)을 찾아 볼 수 없고, 오로지 남편만을 믿고 따르는 아름다운 사랑만이 관류하는 여필종부의 유교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불우헌 정극인의 작품은 모두 군신간의 전통적인 유교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우헌가〉나 〈불우헌곡〉은 성종이 내린 삼품산관의 성은에 감읍(感泣)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세상사에 근심하지 않고 자연과 하나 되는 가운데 즐거움을 찾는 낙이망우(樂以忘憂)의 미학을 노래하였다. 조선 가사문학의 효시작인 〈상춘곡〉도 그러한 가운데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미학을 바탕으로 세상의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나 자연처럼 청정하게 살아가는 불우헌의 모습이 투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전북 정읍의 칠보에서 창작된 불우헌 정극인의 가사 〈상춘곡〉은 전남 담양의 송순, 정철 등으로 이어져 ‘면앙정가단’을 형성함으로써 조선조 가사문학권의 산실이 되었다. 남원에서 창작된 현곡 조위한의 가사 ‘유민탄(流民嘆)’은 무능한 조정과 사대부들로 인해 왜란을 막지 못하고 나라가 초토화됨으로써 뿔뿔이 흩어져 유랑하는 백성들의 한탄을 담은 작품이다. 광해군의 탄압이 극에 달한 탓으로 작품이 전해오지 않지만, 홍만종의 「순오지」에는 혼탁한 조정과 탐관오리들의 가혹한 폭정을 고발한 것이라고 한 뒤, 정협의 ‘유민도’와 쌍벽을 이룬다고 하였다. 임란 이후는 사대부들의 전유물 같았던 가사문학이 시조장르와 더불어 평민 부녀자 등으로 확대되면서 시조장르와 더불어 국민장르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조 가전체소설에 이은 조선조 김시습의 몽유록계소설 「금오신화」는 조위한의 한문소설 〈최척전〉으로 발전하여 〈춘향전〉과 허균의 〈홍길동전〉 등 고소설을 낳았고, 〈흥부전〉, 〈콩쥐팥쥐전〉 등으로 이어졌는데 이들 작품들이 이 고장을 중심으로 그 배경이 되어 창작되었다. 홍길동전은 부안 우반동 선계안골 정사암에서 허균이 집필했는데, 소설 속의 율도국이 위도라고 전해오기도 한다. 금오신화 속의 〈만복사저포기〉는 남원의 만복사를 배경으로 남원에 사는 양생이 귀신처녀와 결혼하여 살았다는 몽유세계를 그린 소설이다. 이는 부조리한 현실을 극복하는 초극하는 방법으로 꿈속 세계만이 유일무이한 수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또 향가 〈서동요〉는 익산금마 미륵사를 배경으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노래다. 미륵사 서탑의 복원과정에서 삼국유사의 이 설화가 허구라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문학적으로 화석화된 유사의 기록도 부정할 길이 없다. 고려 고종조 이규보(1168- 1241)는 최충헌의 인정을 받아 전주목에 부임한 뒤 전북을 일순하는 가운데 쓴 수필 〈남행월일기〉를 남겼고, 전북을 배경으로 한 60여수의 자연경물한시가 「동국이상국집」과 「백운소설」에 실려 유전되고 있다. 영조대 신경준(1712- 1787)은 「여암유고」 권1 시62제하에 145수의 시를 남겼는데 여암의 〈시칙(詩則)〉은 백성들의 어려운 삶속에서 우러난 민은시(民隱詩) 10장, 자연의 미물을 현미경적 관찰을 통한 야충(野蟲)과 소충(小蟲) 10장, 전통적인 한시의 형식을 깨뜨리면서 실질을 추구한 고체시 65수 등 세 가지로 대별된다. 즉 그의 시칙은 구시대의 전통적인 시작을 답습하지 않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가운데 개성을 중시하였고, 하찮은 미물 속에서도 문학적 의미를 캐낸 시의 철학을 지니고 있었다. 이 유고를 처음 발견한 정인보는 박학(博學) 무실(務實)의 선견을 지닌 신경준이 조정에서 귀히 등용되었다면 일찍이 왜란 같은 치욕이 없었을 것이며 조선이 일본보다 더 훌륭한 선진국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탄한 바도 있다. 이 외에도 전북 임실군 지사면 영천에 불고정(不孤亭)을 짓고 ‘가사 10장’이라는 제하에 강호한정을 노래한 장복겸(1617- 1703)의 연시조 〈고산별곡〉, 정조 20년 삼례역승으로 좌천됐으나 임금을 그리며 지은 장현경(1730- 1806)의 가사 〈사미인가〉, 선조대 부안 매창(1573- 1610)의 한시와 시조, 영조대 남편 담락당 하립과의 이별과 해후 속에 빚어진 사랑과 그리움을 전통적 시형을 깨뜨리고 생산한 삼의당 김씨의 200여수의 한시, 고종조 마이산의 아홉 절경을 주자의 〈무이구곡가〉나 율곡의 〈고산구곡가〉의 형식을 빌어 지은 이도복(1882- 1938)의 가사 〈이산구곡가〉와 완주군 봉동면의 규방가사 〈홍규권장가〉, 〈상사별곡〉 고창군 대산면의 〈치산가〉 등 한국문학의 질량을 한층 끌어올린 한시, 시조, 가사 등이 모두 이 고장에서 생산되었다.고종조 신재효는 광대가를 창작하며 소릿꾼인 광대가 갖추어야할 인물치레, 사설, 득음, 너름새 등의 네 가지 요소를 정립하고 종래의 12마당의 판소리 가운데 이선유의 5마당에 변강쇠타령을 넣어 를 6마당으로 개작하여 상층취향의 전아한 의취를 살려 판소리를 민족문학예술로 승화시켰다. 익산군 여산에서 태어난 가람 이병기(1891-1968)는 시조는 전통적 시조장르에서 벗어나 실감실정을 표현하고 격조를 변화시키는 등 6가지 혁신론을 제시함으로써 그 정체성을 확립한 현대시조로 계승 발전시킨 공로자다. 그리하여 현대시조는 정형시이면서 자유시이며, 자유시면서 정형시이어야 하고, 전통적인 틀에 구속되지 않으면서 자유시가 되지 않는 점이 묘미라고 정의하였다. 그 결과 조선조의 2대장르 가운데 가사는 박물관화 되었더라도 시조장르만은 지금까지 현대시조시로서 발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결과로 보면 시조와 가사장르, 한시, 몽유록계와 판소리계 소설, 현대시조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학 전반에 걸쳐 문학이론을 정립하면서 전북을 배경으로 많은 작품들을 배태하거나 생산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광해군 때 왜란의 참상이 선조와 지배계층의 무능과 무대책의 결과이며, 그로 인해 힘없는 백성들이 유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발한 가사 〈유민탄(流民嘆)〉과 일본과 중국 등을 배경삼은 한문소설 〈최척전〉을 지은 현곡 조위한 , 연시조 〈고산별곡〉을 짓고 환곡제도를 통해 가렴주구를 일삼는 지방관리들을 고발하며 무위도식하는 유학자들을 각각 업유(業儒)와 업무(業武), 업농(業農)으로 나누어 유의유식(遊衣遊食)하는 무리들을 없애야 한다는 〈구폐소〉를 올린 장복겸과 같은 도학자들이 있었다. 하찮은 곤충 등 미물들에게도 확대경을 들이대고 〈시칙(詩則)〉을 정립하며 지은 미물시와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대변한 민은(民隱)시를 쓰고, 민중을 위해 지리(地理)며 실용적인 기계와 기구를 만들고 박학과 무실을 실천했던 여암 신경준, 면암 최익현과 연재 송병선 선생에 힘입어 이석용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조선의 민족정기의 발원인 마이산을 배경으로 지은 이도복의 〈이산구곡가〉 등을 보더라도 이러한 인간중심의 휴머니스트들의 실천적 정신으로 인해 조선조의 문화가 세계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지나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가람이 분류한 시가와 산문이라는 2대분류의 국문학 장르론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한국문학의 원천은 모두 전북문학이 한국문학의 남상(濫觴)이 되었거나, 한국문학의 중심축으로서의 기능을 감당해 왔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끝〉

  • 문학·출판
  • 기고
  • 2014.06.13 23:02

[(30) 가람 이병기(李秉岐)의 현대시조와 국문학] 청정·고아한 서정, 전북이 낳은 영롱한 별

가람 이병기(1891- 1968)는 전통적인 조선조의 시조장르를 현대시조로 계승 발전시킨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다. 가람은 변호사(이 채)의 장자로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1898년부터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익히다가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읽은 후, 신학문에 뜻을 두고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1913년 관립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시절인 1912년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고, 이듬해부터 전주 제2, 여산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며 국어국문학과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고 시조를 중심으로 우리 국문학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 1921년에 권덕규, 임경재 등과 더불어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여 우리 어문연구에 심혈을 기울였고, 이듬해부터 동광고등학교, 휘문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1926년 ‘시조회’를 발기하고 시조혁신을 제창하는 논문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 11. 28- 12. 13), 〈율격과 시조〉(동아일보 195811.28- 12.1), 〈시조원류론〉(新生 1929. 1-5), 〈시조는 唱이냐 作이냐〉(新民 1930. 1), 〈시조를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 1. 23- 2. 4), 〈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 11) 등 20 여 편을 발표하면서 시조의 본질적 연구를 시도하였다. 그 결과 가람 이병기는 시조의 명칭은 본디 시절을 노래한다는 ‘시절가’로서 ‘시절가조(時節歌調)’를 줄인 말인 ‘시조’에서 나왔으며, 신광수(숙종38년 1712년 -영조51년 1775년)의 〈석북집〉 관서악부 15장에 수록된 ‘일반적으로 시조는 장음과 단음을 늘어놓은 것으로 장안의 가객 이세춘으로부터 나왔다’라고 했던 가장 오래된 시조의 명칭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즉 시조는 당시에 유행했던 민요 창조(唱調)의 유행가였으며, 당대 유명한 대중가수였던 이세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시조는 민요에서 파생하여 시조장르가 나왔다는 향가연원설을 주장하였고, 처음으로 시조를 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 등 세 종류로 분류하여 시조의 장르와 형태연구에 심혈을 기울여서 우리 국문학을 정립한 국문학자로 양주동과 더불어 국문학의 태두로 불리고 있다.1930년에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고, 보성전문, 연희전문 강사를 겸하면서 1942년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국어사전 원고를 안고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출옥한 후 익산 여산으로 귀향했다가 광복을 맞아 상경한 이후 군정청 편수관을 지냈고, 1946년 서울대학교 교수와 여러 대학의 강사를 역임했다. 6.25동란 때인 1951년에는 전시연합대학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장을 역임하다가 1956년에 정년을 하고 1957년 학술원 추천위원, 1960년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었다. 가람은 그의 〈국문학개론〉(1965년)에서 ‘시조는 가곡의 창조(唱調)로 민요에서 파생하여 향가와 병행하다가 고려 초에 향가가 소멸하면서 향가의 장점을 섭취하여 그 형태를 이루었다는 것’과 향가체인 백제의 〈정읍사〉가 시조의 원형이라고 처음으로 주장한 국문학자의 학술적 공과는 이후 학계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다음으로 현대시조는 첫째, 실감실정(實感實情)을 표현하자, 둘째, 취재의 범위를 확장하자, 셋째, 용어의 수삼(數三; 선택), 넷째, 격조의 변화, 다섯째, 연작(連作)을 쓰자, 여섯째, 쓰는 법, 읽는 법 등 6종의 혁신론을 주장하여 전통적인 옛 관점에서 벗어난 새로운 현대시조의 정체성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가사장르와 달리 지금까지도 현대시조시로서 향유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그러므로 현대시조는 정형시이면서 자유시이고 자유시이면서 정형시가 되어야 하며, 전통적인 시조와 다른 점이 정형이라는 틀에 구속되지 않으면서 자유시가 되지 않는 점이 묘미라 했다. 그런 점에서 시조가 정형(定型)이 아니라 정형(整形)이라고 역설한 가람 이병기는 현대시조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좌표를 정립 제시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가람은 1939년부터 〈문장〉지에 김상옥, 이호우, 장응두, 조남령, 오신혜 등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여 시조중흥의 기틀을 마련하는 한편,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적인 것으로 보고 시조창으로부터 분리하여 시어의 조탁(彫琢)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며 시조혁신을 선도하였다. 1939년에는 이러한 정신에 입각하여 창작한 작품들을 엮어 〈가람 시조〉를 발간한 이후 〈국문학개론〉, 〈국문학전사〉, 〈가람문선〉 등 한국문학의 새 지평을 여는 역저를 출간하기도 했다. 가람의 대표적인 시조는 연시조로서 〈가람시조〉와 〈가람문선〉에 실려 전하는데 ‘별’, ‘난초’, ‘냉이꽃’, ‘송별’ 등이 유명하다. 그중 ‘별’의 연시조는 국정국어교과서에 실려져 소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곡으로도 작곡되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바람이 서슬도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산뜻한 초사흘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저별은 뉘별이며 내별 또한 어느게오잠자코 호올로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별)-한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드는 별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새로 난 난 잎을 바람이 휘젓는다깊이든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중략)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정(淨)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받아 사느니라 -(난초)-연시조 ‘별’은 가람의 고향땅 익산 여산에서 늑대 눈 마냥 시퍼렇게 쏟아져 내리는 별밤하늘을 머리에 이고 보면서 읊은 시조다. 저녁밥을 먹고 바람을 쐬러 뜰 앞에 나서니 산바람 싸늘하게 옷깃에 젖어드는 정경을 ‘바람이 서슬도 하여’라 그린 것을 보면 시상도 그러려니와 맑고 청정한 가람의 서정이 흠뻑 베어난다. 초저녁 초사흘 달이 서산을 넘어가고 별들만 총총히 깊어가는 밤에 별을 헤어보면서 저별은 누구의 별이며 내별 또한 어느 것이냐는 동심같은 청징한 시상에 멎으면 가람의 청초하고 담담하며 고아한 우아미가 온 몸으로 번져온다. 이러한 가람의 미학은 7연시조 ‘난초’에 수정처럼 알알이 맺혀 영롱한 빛을 더욱 발한다. 가람의 난은 술복, 글복, 제자복이라는 ‘삼복(三福)’에 버금가는 가람의 재산이며 제 2의 가람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 돋아난 난 잎을 거센 광풍이 꺾어버릴 듯 휘젓고 지나가는 순간 혹여 난 잎이 꺾이면 어찌할까 가슴 조아림은 가람만이 지니고 있는 천진성이다. 마치 어린 아이 손처럼 여린 난 잎이 바람에 흩날리다 꺾여버리는 아픔을 차마 눈뜨고 어찌 보아 넘길 수 있냐는 사려 깊은 통찰력과 완벽한 시상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티끌 한 점 없는 깨끗한 공기와 영양가 하나 없는 비나 이슬 같은 맑은 물을 머금고 태양을 향하지 않고 살아가는 청징무구한 난초처럼 오로지 책과 제자와 술만을 가까이 하며 국문학을 연구해온 가람은 그가 노래한 난초 7연시에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리고 전주 교동 한옥 마을에는 말년에 그가 기거했던 양사재(養士齋)가 있고, 다가공원엔 말년에 병고의 삶을 반추한 연시조 3수가 담긴 가람시비가 공자의 ‘천상탄(川上嘆)’을 되 뇌이듯 흘러가는 전주천을 굽어다 보고 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은 우리 전북이 낳은 영롱한 별로, 청정한 한 포기 난초로 길이 남아 우리 한국국문학의 지남(指南)이 되고도 남는 분이다.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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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30 23:02

[(29) 판소리 6마당 개작자 신재효] 신분 초월한 민족문학예술로 승화

판소리는 소리를 하는 소리꾼 창자와 북을 치는 고수, 보고 듣는 청중의 3자가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판을 이루어서 실행되는 예술행위를 일컫는 장르이다. 판소리란 소리꾼의 소리를 남에게 들려주기 위한 예술형식이기 때문에 많은 청중이 있어야 하며, 흔히들 일고수(一鼓手) 이명창(二名唱)이라 이르듯이 소리에는 반드시 고수의 장단과 추임새가 필수적이다. 판소리의 연행은 창자의 소리와 말인 아니리, 몸짓인 발림(너름새), 고수의 북소리와 흥을 돋우는 추임새(보비위)가 반드시 기본이 된다. 여기에 청중들의 추임새가 어우러지면 판소리는 이런 요소들이 한데 어울려 하나의 소리판이 이루어짐으로써 신명나는 예술행위로 태어난다. 우리나라의 판소리는 대개 조선 숙종조(1675- 1720년) 전후인 18세기 초에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판소리의 기록물로서 1754년 유진한이 한문으로 쓴 〈춘향가〉와 남원의 양주익이 한문으로 쓴 〈춘몽연(春夢緣)〉이 전해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배뱅이굿〉과 〈변강쇠가〉 등의 예를 든 북방계설이 있기도 하지만, 판소리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무당들의 무가(巫歌)를 중심으로 비롯되어 되었다는 남방계설이 통설이다. 신재효(1812- 1884년)는 전북 고창에서 아버지 광흡과 절충장군 상려(常礪)의 딸인 경주김씨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나 35세 이후에 이방이 되었다. 후에 호장(戶長)이 되었다가 1876년 기전삼남(幾甸三南)의 한재민(旱災民)을 구제한 공으로 정3품 통정대부가 되었고, 절충장군을 거쳐 가선대부에 오르고 이어 호조참판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그는 꾸준히 신분상승을 꾀하면서 한시문학보다 판소리의 정신세계에 몰입하여 즐기는 한편, 넉넉한 재정을 바탕으로 판소리 광대들을 모아 그들의 생활을 도와가며 판소리를 가르쳤다. 진채선(陳彩仙), 허금파 등의 여성광대를 최초로 발탁하여 길러냄으로써 여성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최초로 열었고, 김세종, 전해종 등의 명창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가람 이병기는 그가 지은 「국문학개론 1965」에서 판소리는 그 내용에 극적 요소가 많고 그 체제가 소설적이라기보다 희곡적이며, 그 문체가 산문체가 아니고 시가체적인 것이라 하여 극가(劇歌)의 장르라고 최초로 정의하기도 하였다. 신재효는 특히 고졸(古拙)한 소리와 직선적인 성음을 갖추고 박자가 빨라서 너름새를 하기 어려운 동편제와, 화려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갖추면서 느린 박자로 쉽게 너름새가 이루어지는 서편제의 장점을 조화시키면서 듣는 판소리에서 보는 판소리의 묘미를 더해 드라마틱한 면모를 살려낸 판소리 제작자이다. 그리고 춘향가를 남창(男唱)과 동창(童唱)으로 구분하고 어린광대가 수련할 수 있는 대본을 마련하여 판소리의 다양성에도 기여하였다. 또 창 형식을 빌어 판소리의 이론을 처음으로 정립하는 〈광대가〉를 창작하여 판소리의 이론적 바탕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는 여기에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 판소리에서 소리꾼인 광대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 예컨대 판소리는 반드시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라는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져야 한다는 법도를 가사장르에 맞춰 다음과 같이 논리적으로 정리 제시하였다. 거려(居廬)천지 우리행락 광대행세 좋을시고/그러나 광대행세(廣大行勢) 어렵고 또 어렵다/광대라 하난 것은 제일은 인물치레/둘째난 사설(辭說)치레 그 즉차 득음(得音)이오/그 즉차 너름새라 너름새라 하난 것이/귀성지고 맵시 있고 경각(頃刻)의 천태만상/위선위귀(爲仙爲鬼) 천만변화 좌상(座上)의 풍류호걸/귀경하는 남녀노소 울게 하고 웃게 하는/이 귀성 이 맵시가 엇지 아니 어려우며/득음이라 하난 것은 오음(五音)을 분별하고/육율(六律)을 변화하야 오장(五臟)에서 나는 소리/농락하여 자아낼 제 그도 또한 에렵구나/사설(辭說)이라 하난 것은 정금미옥(精金美玉) 좋은 말로/분명하고 완연하게 색색이 금상첨화/칠보단 미부인이 병풍되어 나셔 난 듯/삼오야(三五夜) 밝은 달이 구름 밖의 나오난 듯/세(細)눈뜨고 웃게 하기 대단히 에렵구나 /인물은 천생이라 변통할 수 없거니와 (중략) 이와 같이 광대가 지녀야 할 조건의 세부적인 설명 속에는 판소리에 대한 신재효의 해박한 경지를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즉 너름새는 구성지면서 맵시가 있어야 하며, 때론 변화무쌍한 연기력으로 청중들을 사로잡아 일희일비하도록 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득음(得音)은 오음(五音; 궁, 상, 각, 치, 우의 5음)을 분별하고 육률(六律;12율 중 양성에 해당하는 태주, 고선, 황종, 이칙, 무역, 유빈 등의 6소리)을 변화시켜 오장과 육부에서 나오는 소리로 만들어져 청중들을 농락할 수 있어야 하며, 깨끗하게 정련된 금과 아름다운 옥과 같이 곱디고운 말로서 칠보단을 두른 선녀가 병풍 속에서 나오듯 하거나, 삼오야 밝은 달이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듯 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판소리는 먼저 우아한 표현의 사설이 기본이 되어야 하고 음악적 기교가 뛰어나야 하며,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연기력도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요건을 갖춘다면 반드시 한시문학과 어깨를 겨눌 수 있다는 자부심도 가져야 한다고도 하였다. 그간 전해오던 송만재의 1910년대 「관우희(觀優戱)」에 의하면 판소리는 본디 〈춘향전〉, 〈심청가〉, 〈홍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장끼타령〉, 〈옹고집타령〉, 〈왈자타령〉, 〈강릉매화타령〉, 〈가짜신선타령〉 등 12마당이 있었다. 1940년대의 「조선창극사」에도 송만재의 12마당 가운데 〈왈자타령〉을 〈무숙이타령〉으로, 〈가짜신선타령〉 대신에 〈숙영낭자전〉으로 대체되었지만 12마당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1933년 이선유가 발간한 「오가선집」에는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수궁가〉, 〈화용도(적벽가)〉의 5편만 실려 전해왔다. 신재효는 종래의 12마당의 판소리 가운데 이선유의 5마당 외에 〈변강쇠타령 -가루지기타령〉을 넣어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별가〉, 〈적벽가〉, 〈변강쇠가〉 등 6마당으로 개작하였는데, 여기에 사설을 개작하여 작품 전체가 체계적이고도 합리적인 구성을 갖추게 함으로써 그가 지향했던 상층취향의 전아한 의취를 살려냈다. 기존의 12마당 판소리들 가운데 청중들의 호응을 받은 작품들은 살아났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들은 문장체 고소설로 그 흔적을 남기었다. 기왕의 소박하고 산만한 사설들을 천재적인 문장력으로 바르고 아름답게 개사(改詞)함으로써 양반층을 끌어들이는 계기를 만들었으나 구비문학의 역동성을 깨뜨렸다는 비판을 받음과 동시에 당대 공연되었던 판소리 대본을 살려냈다는 예찬을 아울러 받기도 했다. 그러나 판소리의 창법을 분류하고 개발하여 전수한 신재효의 공은 판소리사에서 역사적이라 할 수 있고, 판소리가 상하층 계급의 관심을 아울러 불러일으키게 됨으로써 신분을 초월하여 민족문학예술로 승화시키는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 신재효는 판소리 외에도 30여 편이 넘는 허두가(虛頭歌)라는 단가를 지었는데, 규방 여인들이 재산 모으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은 〈치산가(治産歌)〉, 외국의 침략으로 인한 시련을 걱정하는 〈십보가(十步歌)〉, 〈심한 西洋되놈〉, 경복궁낙성을 기리는 〈방아타령〉, 〈오섬가(烏蟾歌)〉, 〈도리화가(桃李花歌)〉 등을 창작하여 판소리문학예술의 차원을 드높이기도 했다. 판소리 가집으로 〈신오위장본(申五衛將本)〉이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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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23 23:02

(28) 마이산을 노래한 이산구곡가(하) - 마이산 경치 묘사속 망국 恨·구국 의지 노래

8곡은 옥 같은 물이 소(沼)를 이루어 마치 거문고 소리처럼 아름답게 흐른다 하여 금탄(琴灘)이라 한 것을 노래한 것이다. 옥으로 만든 진(軫)과 금박으로 박은 휘(徽)가 좋은 거문고로 몇 곡을 부르면서 진락(眞樂)에 젖어듦을 읊고 있다. 고조(古調)를 알 이 없으니 혼자 즐겨 하노라는 조선조 사대부들이 흔히 즐겨 쓰는 일종의 관형구이다. 이는 춘추전국시대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가 자신을 알아주었던 유일한 벗인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이를 한탄하고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고사를 용사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정조는 고산 윤선도의 산중신곡 고금영(古琴詠)에서도 이 곡조 알 이 없으니 집겨 놓아 두어라로 이어졌고, 전술했던 현종대 장복겸의 <고산별곡> 10곡 중 9곡 종기(鍾期)를 못 만나니 이 곡조 게 뉘 알리로 연결되었다.<이산구곡가>는 이이의 <고산구곡가>나 주희의 <무이구곡가>와 구성이나 그 내면에 흐르는 은자(隱者)들의 정조가 동질적이다. 이산천석( 山泉石)구경의 서곡 1수, 본곡 풍혈냉천, 수선루, 광대봉과 용연, 용암동천과 와룡선생, 이산묘, 나옹암의 나옹선사, 금당사, 봉두굴과 방사원, 마이산 승경 등 9수로 모두 10연의 형식을 취하였다. 무이구곡가는 7언 절구의 형식이지만 고산구곡가는 연시조이며, 이산구곡가는 전형적인 조선조 은일가사의 형식에 연장체의 구조가 특이하다. <서곡> 어와 우리 벗님네야 젊었을 제 구경가세 봉래방장(蓬萊方丈) 구경 말고 이산천석 찾아가자 무이구곡(武夷九曲) 귀로 듣고 고산구곡(高山九曲) 가서보며 파곳구곡(巴串九曲) 역람(歷覽)하니 이문목도(耳聞目睹) 하던 중에이런 명승도 있으랴 이 내잔 정지하고 구곡가를 들어 보소 서곡은 작자가 유자(儒者)로서 주자의 무이구곡과 이이의 고산구곡을 흠모하고 또 그 곳에서 노래한 작품들이 전범이 되고 있다. 그러면서 이곳 진안 마이산의 9곡이 무이구곡이나 고산구곡에 결코 뒤지지 않는 명승지임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4곡은 삼국지의 제갈량이 용바위에 새겨진 용마그림을 알아낸 뒤, 팔진도의 전법을 벌여 나라를 부흥시킨 역사적 사건을 마이산 이산정사에서 창의한 의병장 이석용 장군의 거병에 용사하여 상징적으로 노래하였다. 1907년 8월 이산묘에서 면암이 의병봉기를 선창함에 따라 이 고장 의병장 이석용과 전기홍을 중심으로 300여명의 우국동지들이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동맹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이산묘 앞 바위 용암에 제단을 설치하고 소를 잡아 천지신명께 제를 올린 뒤 거병하여 진안읍으로 진격한 것이 호남 의병운동의 효시가 되었다.5곡은 이산정사를 노래하였는데 이 이산묘는 친친(親親), 현현(賢賢)의 양계(兩契)가 황단치성(黃壇致誠))의 정신을 이어가는 중심이 되는 곳으로 고종이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덕수궁주인(非禮勿動 德壽宮主人)라 쓴 어필을 하사한 곳이기도 하다. 이산묘의 오른쪽 바위에 주필대라 음각한 글씨가 있고, 바로 옆에는 허준이 쓴 마이동천(馬耳洞天)의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난다.주필대는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1380년) 7월에 왜장 아지발도를 남원운봉 황산에서 물리친 뒤, 꿈속에서 하늘로부터 금척(金尺)을 받은 산이 이 마이산과 흡사했으므로 이곳을 찾아 머문 곳이라 전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읊었다던 <속금산(束金山)>과 <몽금척요(夢金尺謠)>가「태조실기」에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선 개국의 꿈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일 뿐만 아니라 조선이 왜놈에게 짓밟힐 수 없는 나라임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한 민족혼은 연면양옹(淵勉兩翁) 애국사상 7분상(七分像)에 나타나니에 그대로 드러난다. 연면양옹은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 선생을 말하는데 백범 김구가 영광사(永光祠)라 휘호한 사당에 송병선과 최익현 등 조국광복을 위해 충절을 바친 27위를 배향하였고, 해공 신익희가 영모사(永慕祠)라 쓴 사당에는 전문부, 정희계, 남재, 하연 등 역대 청백리와 충신, 효자, 열사 등 32위를 모시고 있다. 또 이산묘 뒤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한광복기념비(大韓光復記念碑)라 친필 휘호한 비각이 있는데, 이곳엔 이렇듯 조선의 건국이나 광복과 관련된 사적들이 모두 산재해 있다.<9곡> 구곡은 어데 인고 마이산 기절형상(奇絶形狀) 금으로 묶으고 독으로 솟은 봉이 말귀 같고 동불(童佛)같이 중중(重重)이 나열하니 채필(彩筆)로 그려내도 형용치 못 하겠다 이 경치를 못 다보면 평생유한(平生遺恨) 되오리라9곡은 마이산의 신기한 형상을 노래한 것으로 이 산은 금강산과 같이 4계절에 따라 그 이름이 다르다. 즉 봄철엔 주위 산들이 마치 바닷물과 같이 초록빛처럼 바람에 흔들리는데 마이산은 그 위에 돛대처럼 우뚝 솟았다 해서 돛대봉, 여름엔 잡목이 우거져서 마치 녹용뿔 같다 해서 용각봉, 가을엔 말귀와 흡사하여 마이봉, 겨울엔 하얀 눈 위에 먹물을 묻힌 붓처럼 생겼다하여 문필봉이라 일컫고 있다. 또 신라 때는 솟다가 섰다라는 뜻의 한자음을 딴 서다산(西多山)이라 했고, 고려 때는 솟는다는 뜻의 용출산 혹은 솟금산이라 했는데 이 솟금산을 태조의 몽금척과 관련하여 금척(金尺)을 묶었다는 뜻으로 속금산(束金山)이라고도 하였다.즉 속금산이란 태조 이성계의 꿈에 나라 다스림의 상징인 금척 여러 개를 묶은 것을 하늘의 신선으로부터 받았다는 의미를 지니므로 조선개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명칭인 셈이다. 또 어떤 때는 말귀와 같이 신기한 형상을 띠기도 하지만, 아기부처와 같이 소담스럽게 보이기 때문에 동불(童佛)같이라고 표현되기도 했다. 마이산기절형상(馬耳山奇絶形狀)은 무이구곡을 주자가 쓴 욕식개중기절처(欲識箇中奇絶處)라는 무이구곡가 서곡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곳 지명을 말귀의 형상으로 신령스럽다는 뜻을 가진 마령(馬靈)이라 칭하고 있는 소이연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기에 「이산구곡가」의 낙구에서 이러한 성지(聖地)를 보지 못한다면 평생에 한이 될 것이라는 기행가사의 형식을 빌어 노래하고 있다.4곡에서는 삼국지의 와룡선생 제갈량을 용사(用事)하여 진안지방에서 거병한 이석용 장군의 창의를 상징적으로 노래하였다. 이러한 정조는 5곡에서 충신열사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의 애국사상으로 이어지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이 머물렀다는 주필대의 유적, 조선 개국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몽금척과 관련이 있는 속금산 기암괴석의 절승을 노래한 9곡으로 귀결된다.이이의 「고산구곡가」는 주자의 「무이구곡가」를 전고용사하고 있으나, 후산 이도복의 이산구곡가는 이들 작품의 구성형식을 빌면서도 서사와 9곡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전범에서 벗어나 마이산 승경의 묘사 속에 망국의 한과 구국의 의지를 구상화하고 있다는 특성이 있다. 또한 이 작품의 서곡은 무이구곡을 귀로 듣고 고산구곡을 가서 본다고 노래한 반면 이 셋의 구곡가 5곡에서는 모두 무이정사, 수변정사, 이산정사에서 성현의 심사에 젖거나 후진들의 강학(講學)에 힘써야함을 노래했다는 공통성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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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16 23:02

[(26) 치부의 노래 치산가(하)] 조선조 여인의 열정적인 치산·교육력 반영

치산하라 이른 말이 우선농사 힘을 쓰소산상육등 박토라도 거름하면 곡식되리옛 사람은 전하되 농불실시(農不失時) 일렀도다상평전(上坪田)에 하평전에 농사하기 재미내소(중략)우마계(牛馬鷄)돝 양식동물 암 짐승을 가려두소육축짐승 잘되기는 사람에게 있나니라온갖 채소 잘 가꾸어 삼시반찬 장만하여서라좋은 반찬 곁에 두고 값진 고기 사지마소(중략)송죽(松竹)이라 하는 것은 여염가에 허다 있어쓰고 남은 송죽베어 팔아다가 전답사소밭을 사고 논을 사면 가세(家勢) 자연 요부(饒富)하리앞에 노적 뒤에 노적 석숭왕가 가소(可笑)로다치산가의 주제인 살림살이와 가난퇴치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서술된 단락이며, 재산을 늘려야만 집안이 번성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물질철학이 두드러진 부분이다. 이는 아마도 실학정신이 들어온 정조대 이후 조선조 말엽의 사회의식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가난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다. 길고 긴 봄날 하루를 죽 한 사발로 연명하고, 아들 손자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동네를 돌면서 걸식(乞食)하는 일이란 부모로서 참을 수 없는 처절한 절망이다. 걸식하는 아이들이 밥은커녕 오히려 매를 맞고 돌아오는 상황이라든지, 우는 아이 달래려고 밥이나 고기를 주겠다고 속임수를 써서 부모가 거짓말로 울음을 달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서러움의 극한상황이다. 매터를 만지면서 매 맞으면 쉬 큰단다/ 우지마라 지발 덕분 우지마라/ 밥을 주마 우지마라 고기주마 우지마라는 극단적인 가난의 고통을 표현하는 패러그랩이다. 부모 자신의 고통쯤이야 스스로 견뎌낼 수 있지만, 분신같은 자식의 고통과 쓰라림은 참고 견딜 수 없는 게 이 세상 부모들의 공통된 심정이다. 오죽했으면 밥을 주고 고기를 줄 테니 우지마라라고 거짓으로 달래었을까 말이다. 이런 처절한 고통은 치산(治産)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치산의 방법을 구체화한다. 첫째, 제초와 시비로 농사에 힘을 기울이면 산상 육등부의 박토(薄土)일망정 수확이 가능하고, 특히 농사란 절대 때를 놓치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윗뜰의 상평전이나 아랫뜰의 하평전이라도 농사하기에 재미를 붙이고, 모맥과 서숙, 두태(豆太)밭에도 제초하기를 힘쓴다면 가을 수확은 양양만가(揚揚滿家)일 것이니 이 아니 좋은 일인가라고 서술하고 있다.둘째, 농사일뿐 만이 아니라 양잠과 길쌈에도 힘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봄, 여름 두 계절에는 마포(麻布)와 저포(紵布)를 힘써 낫고, 석 달 농사가 양잠이므로 누에치기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의식(衣食)이 일체이니 농사만이 아니라, 의복에도 힘을 써서 거느리고 있는 종에게도 옷을 만들어 입힌 후에 남은 것은 내다 팔면 그것 또한 재물이 된다는 것이다. 재물이 많아지면 자연히 귀한 손님도 많이 드나들게 되고 판서자제, 참판, 수령방백들도 모여드는 법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치산가는 재물이 있어야만 집안이 흥성할 수 있다는 생각 끝에 적극적으로 치산에 힘을 써야 한다고 강조하는 교술(敎述)적인 가사이다. 셋째, 소나 말, 닭과 돼지 등은 암컷을 잘 가려둬서 번식시켜야 재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짐승들은 사람이 어떻게 양축(養畜)하는가에 달려 있는 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넷째, 채소를 잘 가꾸어서 반찬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의 경제구조는 순연히 자급자족의 방식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과정 중에 남은 것은 내다 팔아 재물로 만든다는 것이 주된 치산의 방편이다. 채소와 같은 좋은 반찬을 놓아두고 값진 고기를 사지 말 것이며, 삼시 세 때 정성으로 반찬을 마련하되 쓰지도 맵지도 않게 알맞게 장만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음식이란 그 집안의 흥망성쇠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고 경계하는 것도 주목된다. 다섯째, 청결과 불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고 나면 뜰을 쓸고 상 밑과 그릇까지 정성스럽게 닦아 청결을 유지하여 가정의 건강을 돌봐야 하며, 부엌에서 불조심을 게을리 하여 화재를 만난다면 모든 게 헛수고가 된다고 경고를 하고 있다.여섯째, 송죽의 임산관리로 재물을 늘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송죽이라는 것은 여염가에 흔히 있는 것이므로 쓰고 남은 것들을 베어서 장에 내다팔아 논과 밭을 사게 되면 가세가 자연 요부(饒富)하게 된다는 것이다. 양반가에는 울창한 산이 많으므로 나무를 베어내어 팔아다가 전답을 사서 농사를 짓게 되면 앞뜰과 뒤뜰에 노적가리가 가득하여 진나라 때 부호인 석숭(石崇)이가 부럽지 않다는 용사(用事)까지 하고 있다.이렇듯 치산가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역시 치산의 방법이다. 일반 규방가사에선 이 치산조가 얼마 되지 않지만 이 작품은 47행 96구로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개의 내훈조의 규방가사들은 근려(勤勵)와 절검의 덕목으로 입치레 곧 군음식금지, 몸치레의 의복치레금지, 헌옷 기워 입기, 잡음식도 버리지 말 것과 집안 청소, 기명(器皿)간수를 잘하여 그릇이 깨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 등으로 되어 있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치산가는 그 보다도 재산관리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다는데 그 특성이 있다. 옛적의 해임태사 임태(姙胎)하여 태교 하네태교란 뜻 들어 보소 낳기 전에 가르치소궂은 빛과 음탕소리 보고 듣지 아니 하네이렇듯 십삭만에 탄생하매 옥동자라(중략)어진 스승 맞아다가 글공부를 가르치소사서삼경 백가어를 무불통리(無不通理) 가르치소근본재주 있는 고로 수용산출(受容算出) 기지로다문장탁월 무슨 일고 태교 덕이로다태교는 여훈(女訓) 속에 임자(妊子)로 나와 있는데 특히 소학 성학십도(聖學十圖) 입교편의 입태육보양지교(立胎育保養之敎)조를 근저로 하고 있다. 치산가의 궂은 빛과 음탕소리 보고 듣지 아니 하네는 소학 권1 입교편의 목불시사색 이불청음성(目不視邪色 耳不聽淫聲)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다른 규방가사의 경우도 소학의 입교편을 국문으로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말할 정도로 너무 혹사하다. 자식을 가르치는 것도 소학의 맹모삼천지교의 전범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맹자의 어머님은 세 번 옮겨 가르칠 제/ 처음으로는 장가이요 두 번째는 묏가이요/ 세 번째는 학당이라는 여느 규방가사와 같이 소학 권4 계고(稽古)조를 그대로 용사한 것에 불과하다. 어진스승 찾아 가르치니 천고의 맹자로다는 성학십도의 입교 가운데 입사제수수지교(立師弟授受之敎)로 어진 스승 맞아다가 글공부를 가르치소에 그대로 연결된다.치산가가 아니더라도 집안을 잘 다스려서 부자로 만들고 자식을 잘 기르고 가르쳐서 과거에 급제하고 영달(榮達)하게 되는 것은 규방가사의 일반적 내용이며, 이 또한 여인네들의 한결같은 꿈이요, 소망이었다. 그러므로 과거는 거의 모두가 장원급제로 과장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러한 조선조 여인들의 열정적인 치산과 교육력에 의해 자식들이 잘 가르쳐지고 길러져서 가정이 번창을 하였고, 나라가 잘 지켜져서 오늘의 부강한 국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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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02 23:02

[(26) 치부의 노래 치산가(상)] 근세 실학사상 특성 지닌 호남지역 귀중한 자료

치산가는 부녀자를 가르치기 위한 계녀가류(誡女歌類)의 가사로서 주로 재산을 늘려 집안을 일으키는 것을 내용으로 한 작품이다. 이 가사는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여 노래한 망부가나 명당을 찾아 산천을 답사하면서 쓴 답산가와 마찬가지로 재산을 잘 다스려 집안을 일으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가사라는 뜻을 지닌 치산가(治産歌)이다.이 작품은 오래전에 필자가 이 고장 전주의 한 고서화점에서 발견한 것으로 신유년 정월 팔일 효심곡 열녀전합부라 병기하고 한글로 〈열녀젼이라〉고 표제한 것 중의 일부이다. 창작시기는 치산가의 결구 뒤에 임슐년 졍월 쵸파일 치산가 디노라로 보아 임술년 1월 8일인 것은 분명하나, 임술년의 간지가 어느 해인지 분별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그러나 이 작품의 사상적 배경으로 보면 이용후생과 실사구시의 실학이 성행했던 조선 정조대 이후로 추정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순조 2년 1802년이 임술년이고, 철종 13년인 1862년이 임술년인데, 사용된 국어법이나 종이의 지질, 또는 사상적 배경 등으로 보면 1862년 정월 팔일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그리고 치산가 라 표제한 뒤 3221cm의 크기로 한지를 접어 궁체흘림붓글씨체로 14장 28쪽으로 쓴 252행 501구의 장형가사작품과 겁젼이라 한 산문체의 한글소설이 18장 36쪽으로 병합된 수제본이다. 끝에는 고창군 대산면 성남이 成소저시라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성소저(成小姐)는 이 작품을 필사한 사람으로 추정된 여성이다. 이외에 기묘 8월 득용기(得用記)라고 한 동명이작의 치산가가 〈별회심곡〉과 합본된 작품이 또 있으나 취급하지 않고 이 치산가만을 소개하려 한다.작품 내용으로 보면 안빈낙도하는 도학자풍과는 달리 치산을 잘 해야만 집안이 풍족해지고 자식도 잘 가르쳐서 번성할 수 있다는 근세 실학적 물질사상이 근간을 이루는 특성을 지닌다. 그것도 조선조를 주도해 왔던 남성적 언어가 아니라, 규중여인네의 목소리였다는데 주목하고 싶다. 대개 계녀가란 근검절약하여 가산을 잘 보존해야 한다는 것을 치산의 개념으로 하고 있지만, 이 치산가는 그러한 소극적 차원에서 벗어나 치산의 구체적이고도 실천적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어서 다른 계녀가사와 다른 특성을 보인다. 그러므로 〈홍규권장가〉, 〈상사별곡〉과 더불어 영성한 호남지방의 규방가사 가운데 질량을 더해줄 귀중한 자료인 셈이다. 이 치산가는 서사, 화동생지친(和同生至親), 사구고(事舅姑), 행신(行身), 접빈객(接賓客), 봉제사(奉祭祀), 치산, 태교, 육아, 장원급제 및 도문(到門), 진심갈충(盡心竭忠), 결사로 구성되어 있는 영남의 일반적인 계녀가류와는 여러 측면에서 다르다. 치산가의 결언 가운데는 유전(有錢)이면 가사귀(家事貴)라 하여 치산을 잘해야만 자식의 권학에 힘쓸 수 있고, 이후에 온갖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진보적인 자본주의의 물질관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천지간 만물중의 신령(神靈)한 게 사람이라얼굴로 이른 것과 행실로 이름이라신체발부 이내몸은 부모님께 받아있다효도로 지애(至愛)하고 지성으로 봉양하소가막 까치 저 짐승도 반포(反哺)할 줄 능히 아네하물며 사람이야 부모봉양 섬서하랴부모은덕 논란하면 태산이 가벼우니정성 충양 극기하나 반분인들 갚을소냐귀하도다 우리형제 부모정기 함께 받아형수 동기 형제간의 우애화목 아니하랴(중략)행동거지 조심하고 언어수족 삼가하소과년(過年)에 출가하기여자의 예사로다이친출가(離親出嫁) 무삼인고 삼종(三從)이 지중하다 천지간 만물 가운데 가장 신령한 게 사람이라고 시작하는 것은 규방가사의 일반적 형식에 맞춘 것으로 유교적 윤리의 전범에 의거하였다. 〈훈계가〉의 천생만물 하올적에 유인이 최귀로다도 유교적 윤리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소학의 천지지간 만물지중 유인최귀(天地之間 萬物之衆 唯人最貴)를 그대로 용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것은 신체발부 이내몸은 부모님께 받아있다.(身體髮膚 受之父母)라든가 까막까치 저 짐승도 반포할 줄 능히 아네등이 모두 논어, 맹자, 소학, 대학 등의 유교전서에 전거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이런 바탕 위에 송나라 때의 주자가훈이나 주천구가 찬한 여범(女範)이 근간이 된 인효문황후(AD 1407년)의 내훈(內訓) 등은 조선조 규방가사의 전범이 되었다. 내훈은 우리나라에서는 이보다 70년이 지난 조선 성종비인 소혜왕후가 쓴 게 있지만 목록은 비슷하나 내용은 서로 다르다. 명 나라의 내훈은 영조 12년(1736년)에 이덕수가 여사서(女四書)의 권2에 전문을 수록하여 놓았는데 그 목록들은 유교전서 외에도 주자가훈이나 여범(女範), 내훈(內訓), 여사서, 여훈(女訓) 등에 들어있는 덕목으로 여자로서 말을 삼가하는 일, 덕성을 기르는 일, 부지런함, 남편을 모시는 일, 형제간의 우애와 친척간의 화목을 도모하는 일 등 20덕목을 구체화하여 진술되고 있다. 천지간 만물 중에 인간만이 가장 신령스럽고 귀중한 존재이며, 사람의 신체발부는 부모께 받은 것이므로 부모께 지성으로 효도하여 봉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새끼들은 어미가 물어다 준 먹이를 먹고 자라지만, 성장한 뒤에는 어미를 되먹여 살린다는 반포조(反哺鳥)인 까마귀를 용사(用事)하여 때론 인간이 미물인 까마귀만도 못하다는 것을 대조적으로 강조하였다. 부모정기를 함께 받아 태어난 형제간에는 우애하며 화목해야 하고 출가하면 후회하지 않도록 규중범절을 익히면서 침선(針線)과 주조(酒造)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언어와 수족을 삼가 해야 한다고도 하였다. 특히 언문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보더라도 언문은 학문이라기보다 규중여자들의 필수적 수신과목이었음을 알만하다.여자가 과년하면 의당 출가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나 부모 곁을 떠나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를 확인해 보지만 여자는 삼종(三從)의 질곡이 운명이라고 체념을 하기도 한다. 삼종의 의미를 일일이 설명하고 삼강오륜의 뜻을 알고 몸소 실행을 한다면 여자의 행실은 자연 아름다워진다고 호소하고 있다. 삼강 중에서 임금이 신하의 벼리가 되어야 한다는 강상은 지적함이 없이 자식의 벼리는 아버지인 것이며 부처(夫妻)의 벼리는 가장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오륜은 부부간에 친애하고 임금과 신하간에는 충의가 있어야 하며, 부자간에는 분별이 있어야 하고 어른과 소년간에는 차례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도 삼강에서 군신간의 벼리가 빠진 것처럼 오륜에서도 벗들 간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덕목이 결여되어 있다. 출가하여 3일을 지낸 뒤에는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서 시부모에게 공양을 잘 해야 하는데, 시부모께 효양을 잘 하면 세상 여자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효부가 되고 또 가장을 공경하면 세상에서 범상치 않은 열녀가 된다고 하였다. 시부모는 남편의 부모이자 곧 나의 부모가 되기 때문에 어육과 떡, 과실을 얻게 되면 먼저 부모에게 받들어 모셔야 한다고 예거하고 있다. 벗들 간에는 신의가 첫째요, 일가친척 간에는 화목해야 하며 슬하의 노복(奴僕)들은 나의 손발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체하(逮下)의 도리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 옛날 당나라의 장공예(張公藝- 원문에는 종공예로 잘못 기록됨)는 9대에 걸쳐 집안 화목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들어 용사하면서 구세동거(九世同居)의 중요한 요인이 참는 일이며, 따라서 백인지당(百忍之堂)의 집안이면 반드시 화목이 이루어진다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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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25 23:02

[(25) 춘향전과 흥부전, 콩쥐팥쥐전, 홍길동전] 춘향 문화재, 남원 곳곳 산재 '본향 확실'

〈춘향전〉은 작자, 창작년대 미상의 고전소설이다. 숙종조나 영조 초에 판소리로 불리어오다 소설로 정착된 것으로 보이는 장르로 문장체 한글소설과 한문본 소설 등이 있다. 그 종류만 해도 120여종이 넘고 제목도 이본에 따라 다르므로 하나의 작품이라기보다 〈춘향전〉 작품군으로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춘향전〉의 모태가 된 근원설화를 보면 남원에 살았던 춘향이라는 기생이 이부사 자제의 도령을 홀로 사모하다 죽은 후에 원귀가 되어서 남원에 많은 재앙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양진사가 제문으로 창작했다는 액풀이로서의 제의(祭儀)설에 근원을 두고 시작된다. 그리고 노진, 조식, 성이성, 박문수 등 야담에서 전해지는 암행어사 출두설화가 〈춘향전〉에 부합되었다는 설과 조선조에 비롯된 기생과 양반도령과의 애련설화 등의 야담이 바탕이 되었다는 다양한 견해들이 많다.〈춘향전〉의 연구는 1930년대와 1940년대 조윤제의 「교주춘향전」이 나오면서 시작된 이래, 1965년 김동욱에 의해 발표된 〈판소리발생고〉로 본격화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판소리춘향가와 소설춘향가와의 관계를 근원설화로부터 판소리 한마당으로, 이후 판소리 대본 및 판소리계소설로의 정착이라는 전개도식을 실증적으로 제시하였다. 이로써 〈춘향전〉의 소설이 판소리춘향가보다 앞섰다는 선행(先行)설을 극복하고 판소리춘향가의 선행설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근원설화에 관한 연구도 도미설화의 변이형인 구례현에 살았던 부인의 〈지리산가〉 백제오가 열녀설화와 남원에서 노진, 김우항, 박문수, 성이성 어사와 기녀가 사랑했다는 설화들이 있고, 신임부사 생일잔치에서 지은 7언시 설화인 암행어사설화, 남원지방의 추녀기생 춘향과 이도령의 이야기 등 5종이 전해오고 있다. 이 외에도 유사한 연애설화와 아랑설화, 심수경 설화에 얽힌 신원설화(伸寃說話), 성현의 아들 성세창이 평양기생 자란과의 애련설화 등의 염정설화, 허현의 아들이 혼례식날 부친의 급서로 초야정사를 치르지 못하고 여묘(廬墓)살이 하다가 정사를 치러 자식을 낳았지만, 신랑이 죽자 신랑이 주었던 신표로 친자위기를 모면했다는 수기설화(手記說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야기로 발전한 것으로 귀결되어 왔다. 어쨌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인간중심의 사랑이야기인 〈춘향전〉은 남원 광한루와 춘향사당, 춘향묘, 성안의(成安義)부사의 기적비, 이도령이 다니던 박셔틔(薄色峙)고개, 춘향이 버선발로 이도령을 따라갔다는 버선밭과 오리정(五里亭) 등의 배경과 소재들이 남원지방에 실제 산재해 있다. 또 남원에서 매년 시행되는 춘향제 등 민간설화와 더불어 전해지는 유형무형의 춘향의 문화재가 많은 남원은 조선조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의 본향임에 틀림이 없다. 1949년 80세 된 조성국 노인담에 의하면 박색 춘향이 이도령을 위해 수절하다가 옥사한 뒤 남원에 가뭄이 들자, 양진사가 백지 3장에 춘향의 해원(解寃)을 담아 기우제를 지낸 뒤 흉년을 면했는데 그것이 훗날 춘향전으로 발전되었고, 자신이 70 년 전(고종 16년, 1879년) 이용준 남원부사 시절에 남원 광대기생들이 춘향계를 만들어서 춘향의 제사를 춘추에 두 번 지내는 걸 보았다는 목격담이 전해 온다고도 하였다. 〈춘향전〉은 18세기 영국의 새뮤얼 리처드슨 (1689- 1761)이 귀족의 아들 백작 Mr. B와 그 집의 하녀 파멜라가 신분적 차이를 극복하고 정식으로 결혼하게 되는 애틋한 사랑을 편지체소설로 완성한 서구 근대소설의 효시인 〈파밀러〉와도 유사한 이야기 구조를 보이고, 이 소설에 견주어 보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고전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춘향전 외에도 남원군 인월면 성산리나 아영면 성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판소리계 소설 〈흥부전〉과 전북 완주군 이서면을 배경으로 한 〈콩쥐팥쥐전〉 등의 한글소설이 이 고장을 배경으로 하여 창작되었다. 이는 조선 세조 조에 김시습이 남원에서 전해오는 양생과 귀신처녀와의 사랑을 엮은 한문소설 〈만복사저포기〉와 광해군 때 실제 남원에 살았던 최척이 임병양란을 겪으며 옥영과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를 엮은 조위한의 〈최척전〉이 남원의 이러한 산문문학을 낳는 중요한 터전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콩쥐팥쥐전〉은 서구의 신데렐라 소설과도 이야기 줄거리가 유사하고, 더욱이 중국의 옛 문헌에도 실려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와 거의 동일하다는 점으로 보면 이 이야기는 세계 각국에 공통적으로 분포되어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인간 본연의 신분상승 욕구의 분출과 동경이 낳은 소산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이 고장 전북에는 이러한 소설을 뒷받침하는 지명이나 설화들이 산재해 있다. 예컨대 흥부태생마을인 남원 인월면 성산리와 흥부 발복 마을인 아영면 성리에는 흥부가 놀부에게 쫓겨 짚신을 털며 신세한탄을 했다는 신털바위와 박첨지 놀부묘가 실재하고, 박춘보 흥부가 허기져 쓰러졌다는 허기재와 놀부가 흥부에게서 화초장을 얻어 돌아가 쉬었다는 화초장 바위 외에도 연하다리, 연비봉, 흰죽배미, 새금모퉁이, 박놀보설화 등이 실제로 유전되고 있다. 또 완주군 이서면과 은교리 앵곡 마을에는 애통리 두월천 빨래터와 콩쥐가 은혜를 입은 산이라는 두은(斗恩)산, 팥쥐가 콩쥐를 빠뜨려 죽였다는 팥쥐기방죽, 팥쥐가 넘어가 건넜다는 두월천, 아버지 최만춘이 딸 콩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애통한 소식을 처음 듣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애통리, 계모 배씨와 팥쥐가 짜고 콩쥐를 죽였다는 분통터진 소식을 들었다는 분통리(일명 분토리), 앵곡 역참(驛站)의 마방자리, 콩쥐를 도와준 두꺼비가 살았다는 두죽제 등 「콩쥐팥쥐전」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전개에 따른 지명들이 산재해 있다. 실제 이곳은 〈콩쥐팥쥐전〉의 배경을 놓고 김제시와 완주군이 경쟁적으로 서로 다투고 있는 지역이다. 우리나라를 강제 합병한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김제 금구에 속해 있던 은교리와 앵곡마을을 완주군 이서마을로 귀속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서면은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것처럼 ‘젼쥬 셔문밧 삼십리허’에 있다고 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3 전라도 전주부조에 도‘이서(伊西)는 전주 서쪽 30리에서 35리 사이에 있다고 한 기록과 부합된다. 또 앵곡마을에는 전주에 예속된 역참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곳이며, 이 역참은 그 옛날 남북을 오가는 주요한 길목이었다. 그러므로 여러 지역색을 가진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기 때문에 다양한 이야기가 수집되고 혼합 재생산되어 구전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레 〈콩쥐팥쥐전〉이 생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고전소설 〈홍길동전〉도 전북 부안과 위도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홍길동이 이상국으로 건설한 율도국이 부안 위도라는 사실이 민간 전승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상당한 근거를 갖고 논의되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인근인 영광에는 홍길동 마을에 관한 전설이 전해 오고 있고, 실제 연산군 6년(1500)엔 가평, 홍천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소설 속의 홍길동(洪吉童)과 끝자만 다른 명화적(明火賊) 홍길동(洪吉同)이 존재했었다. 또한 조선 중기 여류시인이자 부안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와 쌍벽을 이루었던 매창이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 허균, 이귀 등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왕래하며 교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임으로써 〈홍길동전〉의 율도국이 이 고장 위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허균은 오랫동안 부안 기생 매창과 왕래하며 시로서 교유를 했고, 실제 부안 우반동 선계안골엔 〈홍길동전〉을 집필했던 장소가 정사암이라 전해내려 오고 있다. 그 당시 허균의 장형 허성은 전라관찰사였고, 허균은 충청, 전라도 지방의 세곡을 거둬들이는 수운판관이었기 때문에 부안을 자주 드나들었다. 선조 34년(1601년)에는 수운판관의 벼슬마저 사임을 하고 부안을 자주 내방하면서 매창과 시로서 절친하게 사귀었으므로 〈홍길동전〉을 부안에서 지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조선조 실학자이자 많은 한문소설을 남긴 박지원의 〈허생전〉 가운데서도 부안 변산이 도적소굴의 배경으로 나오는 것을 보더라도 허균의 〈홍길동전〉의 창작이 이 고장 부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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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18 23:02

[(24) 조위한 한문소설 〈최척전〉과 가사 〈유민탄〉] 남원서 창작된 사회 비판 작품 '문학사 보배'

남원 만복사 동쪽에 모친을 일찍이 여의고 부친과 함께 살았던 최척이란 소년이 옥영이란 처자와 임, 병 양란을 겪으며 중국, 일본을 무대로 펼치는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를 다룬 조위한의 〈최척전(崔陟傳)〉도 남원에서 창작된 한문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최척은 임진왜란 때 남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변사정의 막하에 들어가 활약했던 실존인물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주목된다. 그는 82세의 삶을 사는 동안 민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고, 일생동안 사회현실과 관련된 문학 활동을 해왔다. 이미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남원의 만복사를 배경으로 하여 창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임제의 〈원생몽유록〉, 〈화사〉, 〈수성지〉 등 한문계 고소설에 이어 그러한 문학적 환경을 이루어 왔다는데도 의의가 있다.〈최척전〉은 임진왜란 때 우리 민족이 받아야 했던 수난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왜구나 구원병으로 온 명군들에게까지도 당한 치욕과 전쟁으로 인한 이산가족들의 아픔들까지 다루었고, 실제 역사적인 실존인물이 등장을 하면서 중국이나 일본 등 세 나라를 무대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 다큐멘터리적인 작품이다. 특히 작자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건전한 의식을 고취시키고 싶은 작자정신이 깊게 베어난다는 점에서 기존 소설이 따를 수 없는 차별적인 작품이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있는 홍도와도 유사한 내용으로 임진란 때 있었던 최척과 옥영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여 광해군 13년(1631년)에 조위한이 지은 소설로서 현재 한문본 필사본이 서울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전한다. 조위한(趙緯韓)은 명종 22년(1567)에 출생하여 인조 27년(1649) 세상을 떠날 때까지 82년간의 그의 삶 자체는 임진란, 정유재란, 정묘 병자호란 등의 외침과 계축옥사, 인조반정, 이괄의 난 등 내적 난리로 어지러운 세상을 어렵게 살아온 풍운의 사대부였다. 그는 인조반정으로 인해 벼슬길에 오른 이후에도 과감하게 종실(宗室)인 인성군의 만행을 비판하는 ‘위인성군소척인피계(爲仁城君所斥避啓)’의 상소를 올림과 동시에 왕실 사람인 정백창을 논죄하라는 상소도 올렸다. 이러한 죄목으로 인조의 미움을 사서 한때 양양부사로 좌천이 되었지만, 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의 안위를 걱정한 나머지 군사를 거느리고 상경하여 왕을 보호할 만큼 임금에 대한 충성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광해군 10년(1618년) 나이 52세 때 벼슬을 버리고 남원 주포로 이주하면서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생각하며 그 운(韻)을 빌어‘차귀거래사(次歸去來辭)’를 짓고 전란으로 황폐된 강산과 세상의 인연을 끊고 살았다. 두 차례의 왜란과 정묘, 병자호란으로 피폐된 강토와 유랑민들의 참상을 보며 사대부로서 백성들을 보살펴야 하는 일마저 버려둔 채 살아가는 한심한 자신을 이 한시에 담았고, 또 광해군 13년 55세 때 가사 〈유민탄(流民嘆)〉을 지어 유랑하던 백성들의 처절한 한과 아픔을 담아내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참혹한 상황을 보면서 조위한은 잘못된 현실을 묵과하지 않고 작품 속에 반영하였기 때문에 나라 안에 이 작품이 크게 유행하였고, 그런 이유로 광해군은 이를 알아보라고 궁중 밖으로 암행조사의 명을 내린 일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한 까닭으로 가사 〈유민탄〉은 그 작품이 유실되어 전해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억(趙億)이 찬한 ‘현곡조공행장(玄谷趙公行狀)’에는 장종 천계원년 즉 신유년 공이 55세 때 〈유민가〉를 지었는데 그 당시 부역에 시달리고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즐비한 참상을 우리말로 지었다. 노래가사가 슬프고 곡진하니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슬퍼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홍만종은 「순오지」에 홍섬이 지은 〈원분가〉로부터 송순의 〈면앙정가〉, 백광홍의 〈관서별곡〉, 정철의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미인곡〉, 〈장진주〉, 차천로의 〈강촌별곡〉, 허균의 첩 무옥의 〈원부사〉, 조위한의 〈유민탄〉, 임휴우의 〈목동가〉, 무명씨가 지은 〈맹상군가〉 등 당대 굴지의 12가사를 소개하면서 조위한의 가사작품을 열 번째로 실어 놓았다. 그리고 이들 작품 가운데 〈유민탄〉은 ‘현곡 조위한이 지은 것으로 어두운 조정 정령(政令)의 번거로움과 열읍(列邑)들의 세금징수의 가혹함을 자세히 서술했으니 정협의 〈유민도〉와 서로 표리(表裏)가 됨직하다’라고 평설하였다. 또한 홍만종은 송시열이 찬한 조위한의 ‘신도비명’에도 조위한이 지은 〈유민탄〉이란 가사에는 백성들의 고통과 집안이 무너지는 슬픔을 그대로 기술했는데, 임금이 이를 찾아내라 했으나 찾아내지 못했고 훗날 광해실록을 수찬할 때 자신이 그것을 보고 사실로 믿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로 보면 조위한과 같은 조선조 사대부들은 불쌍한 백성들을 걱정하며 그들을 보살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애민사상의 소유자들이었고, 부조리한 정국을 고발하며 이를 광정해야 한다는 비판적 지성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대부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조의 사회문화가 세계적이었다는 문화사가들의 평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우리 전북지방에서 그러한 훌륭한 사대부들 예컨대 신경준, 장복겸, 조위한 등이 가렴주구의 무자비한 세곡징수과 부조리한 정정(政情)을 바로 잡아야만 백성들이 살아갈 수 있는 좋은 나라가 된다는 상소를 하는 한편, 이를 자신의 작품에 담아 많은 저술활동을 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다만 조위한의 가사 〈유민탄〉이 실전되어 안타깝지만, 어무적이란 사람이 지은 동명이작의 〈유민탄〉이란 한시를 보면 이 작품의 대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창생들 어렵네(蒼生難)창생들 살기 어렵네(蒼生難)나는 너희를 구제할 마음 있어도(我有濟爾心)너희를 구제할 힘은 없다네(而無濟爾力)창생들 피나는 고통(蒼生苦)창생들 피 토하는 고통(蒼生苦)추워도 덮을 이불 하나 없는데(天寒爾無衾) 저들은 구제할 힘은 있어도(彼有濟爾力)구제할 마음은 없다네(而無濟爾心) 원컨대 소인의 마음 돌려서(願回小人腹)잠시 군자를 위해 걱정하노니(暫爲君子慮)잠시라도 군자의 귀를 빌어서(暫借君子耳)시험 삼아 백성의 말 들어보아라(試聽小民語)백성들은 말을 해도 그대들은 알아듣지 못하고(小民有語君不知) 지금 백성들은 살 곳을 잃어 버렸네(今歲蒼生皆失所) 비록 대궐에서 임금이 근심하는 백성에게 조서를 내려도(北闕雖下憂民詔)자방관청이 받아 보는 건 쓸데 없는 종이 한 조각이네(州縣傳看一虛紙) - 중략 -억만창생들은 입을 옷가지 하나 없이 헐벗고, 아무리 추워도 덮을 이불 하나 없이 힘들게 살아가는데 구제할 힘이 있는 나라의 관료들은 탐관오리들뿐이라는 부조리한 참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고발한 시이다. 어무적(魚無迹)이라는 작자도 실명을 은익한 사대부일 것으로 보인다. 행동이 기민하지 못한 ‘어물쩍거리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어무적’이라고 지은 필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적 안목을 지닌 사대부들의 작품들, 예컨대 장복겸이 임금께 올린 ‘구폐소’와 연시조 〈고산별곡〉, 장현경의 가사 〈사미인가〉, 조위한의 한문소설 〈최척전〉과 가사 〈유민탄〉, 신경준의 〈시칙〉 등은 우리 한국문학사상 보배로운 국문학적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조 사대부들의 비판적 지성의 사회문화로 인해 조선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상위그룹에 오를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도 더욱 자랑스럽다. 그리고 이토록 훌륭한 사대부들을 전북이 낳고 또 그런 사대부들이 이 고장에서 살아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도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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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11 23:02

[(23) 김시습의 〈만복사 저포기〉] 남원지역 설화 재구성한 한문소설

계유정란을 일으켜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김시습(세종 17년 1435- 성종 24년 1493)은 삭발하고 중이 되어 북으로 안시향령, 동으로 금강오대, 남으로 다도해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 관동록, 호남록을 썼고, 그때 읊은 시들을 정리하여 「매월당시사유록(梅月堂詩四遊錄)」을 남겼다. 그리고 누차 세조의 소명도 뿌리치고 31세(세조 11년 )때에 경주 남산 금오산 자락에 금오산실을 짓고 들어앉아 저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몽유록계 한문소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龍宮赴筵錄)〉 등 5편이 「금오신화」에 실려 전한다.「금오신화」는 김시습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집으로 완본은 전해오지 않으나 육당 최남선이 일본에서 전해오던 목판본을 발견하여 1927년 〈계명〉19호에 실음으로써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이 책은 고종 21년(1884년) 동경에서 발간된 것으로 상, 하 2권이다. 상권은 32장으로 서(序)와 〈매월당소전〉,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등이 실려 있고, 하권은 24장으로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발문, 평(評) 등으로 되어 있다. 본디 이 목판본은 효종 4년(1653년) 일본에서 초간되었던 것을 중간한 것으로 초간본은 오스까(大塚彦太郞)의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자료였다. 국내에서도 1952년에 정병욱 교수가 필사본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을 발견하고 세상에 내놓아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생규장전〉은 개성의 이생(李生)과 최소저와 사랑을 나누었는데 후반에 가서 홍건적의 난에 죽은 아내 최소저와 부부의 연을 다시 이어가다가 영영 헤어졌다는 이야기다. 이생은 학당을 오가다가 근처에 살고 있는 양반집 규수인 최소저와 눈이 맞아 밤마다 담을 넘어 다니며 사랑을 나누었지만 결국 이를 알게 된 이생의 부모가 이생을 먼 울주로 떠나보내어서 이들의 애정행각을 끊어 놓았다. 하지만 최소저의 끈질긴 노력 끝에 양가부모의 허락을 받아서 종국에 혼인을 하였다. 이후 이생은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게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최소저와 양가의 가족이 모두 희생되고 이생 혼자만 남게 되는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부인을 잃은 슬픔에 젖어 있는 이생에게 최씨 부인이 다시 나타나서 수년간 아름다운 사랑을 이어가다가 어느 날 이승의 인연이 끝났다고 홀연히 떠나버리자, 이생도 마침내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죽게 된다는 결말의 구조를 지닌 이야기다. 이생규장전은 일종의 산자와 죽은 자가 사랑을 나누었다는 시애(屍愛)설화라 할 수 있다. 〈취유부벽정기〉는 개성에 사는 홍생(洪生)이 평양으로 장사를 나갔다가 대동강 부벽루에서 술을 마시며 놀게 되었는데 수 천 년 전 선녀가 된 기씨를 만나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다. 본디 개성에서 장사를 하며 살아가던 홍생이 달 밝은 어느 날밤에 부벽루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아름다운 처녀를 만나게 되어 사랑을 하게 된다. 그 처녀는 그 옛날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자의 후예였는데 고국을 너무 그리워하다가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서로 꿈같은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다가 어느 날 하늘의 천명을 어길 수 없다며 승천을 하자, 양생도 병이 들어 죽게 된다는 이야기로 이생규장전과 같은 시애소설의 공통적인 설화구조를 지닌다. 〈남염부주지〉는 미신과 불교를 배척하는 선비인 박생(朴生)이 경주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꿈속에 저승에서 염라대왕과 토론을 하고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용궁부연록〉은 개성에 살고 있었던 한생(韓生)이 꿈속에서 용왕의 잔치에 초대되어 시를 지으며 즐겼다는 이야기다.〈만복사저포기〉는 전북 남원에 사는 노총각 양생(梁生)이 부처와 저포놀이(윷놀이내기)를 하여 승리한 대가로 부처가 수년전 왜구들에게 죽은 처녀귀신과 만나게 해줌으로써 이들은 꿈같은 부부생활을 하다가 헤어졌다는 산자와 죽은 자와의 사랑을 다룬 설화이다. 양생은 일찍 부모를 여읜 후 혼인을 못하고 홀로 살아가는데 부처의 도움으로 왜구의 난에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혼자 정절을 지키며 살다 죽은 원혼을 만나게 되어 며칠간 뜨거운 사랑을 나누다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재회를 기약한 날 양생은 딸의 대상을 치루는 양반집 행차를 목격하고 자신과 사랑을 나눈 처녀가 3년 전에 죽은 그 양반댁의 망자임을 알게 된다. 이 두 사람은 부모가 베풀어준 음식을 먹고 난 후 처녀는 저승의 명을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다며 홀연히 사라지자, 양생도 집으로 돌아 왔다. 그런데 홀연히 그 처녀가 다시 나타나서 자신은 죽어서 다른 나라로 가 남자로 태어났다고 말하였다. 이에 양생은 장가를 들지 않고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평생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이야기로 이생규장전과 같이 산자와 죽은 자의 이야기구조를 지닌 설화다. 이들 한문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그 지방에 많이 살고 있는 대표적인 토속적 성씨들로서 재자가인들이며, 아름다운 문언문(文言文)의 한문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로운 설화를 옮긴 점 등이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성격을 공통적으로 띠고 있는 특성을 보인다. 금오신화의 이야기들은 조선 초에 이르기 까지 계속적으로 서사문학의 원초형태인 설화로 이루어져 전승 변이되면서 소설이 발생될 수 있는 문학사적 기저를 마련했다고 할 수가 있다. 설화나 소설은 동질의 서사문학이기 때문에 이러한 설화의 발달이 한문소설의 발전을 가져온 동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박인량의 「수이전」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있는 수많은 설화들이나 임춘의 〈국순전〉이나 이규보의 〈국선생전〉이나 〈청강사자현부전〉 같은 고려의 가전체소설 등이 금오신화에 내면적 영향을 주었고, 외적으로는 명나라 초 구우(瞿佑)의 「전등신화(剪燈新話)」와 같은 전기체 소설의 영향을 비교문학적으로 받아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금오신화」는 김시습이 세조찬탈이라는 부조리한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관북, 관서, 호남, 영남의 방랑생활에서 얻어진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만복사저포기〉는 전북 남원지방에 있는 만복사를 배경으로 남원 양씨 성을 가진 노총각과 왜구의 출몰로 희생된 처녀귀신과의 이야기구조를 이룬 설화를 수집하여 재구성했다는데 의미를 둘 수가 있다. 그리고 국문학상 고려대의 가전체소설을 이은 최초의 한문소설의 첫 작품 〈만복사저포기〉가 남원 만복사를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또한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남원에서 살다간 최척이란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조위한의 한문소설 〈최척전〉을 낳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가사 〈유민탄(流民嘆)〉이 생산케 되었다는 국문학적 의미가 크다. 그리고 훗날 남원 광한루를 배경으로 전승되는 남원 여인을 중심으로 민간설화를 소설화한 우리나라의 러브스토리 〈춘향전〉이 조선 후기의 주요한 국문학 작품이라는데 큰 의의를 찾을 수가 있다. 〈만복사저포기〉와 〈춘향전〉 이 두 작품은 환상이나 몽상의 공간과 현실공간이라는 배경만 다를 뿐, 주자학적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이념이나 철학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중심적으로 중심축이 이동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특성이 있다. 또한 남성종속적인 여성관에서 여성의 독자적 존재 가치가 부각된다는 점에서 상당한 근대적 가치를 부여할 수가 있다. 이는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남원지방 민중들의 인간중심적인 휴머니티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다. 한문소설의 효시작인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와 광해군이 암행조사를 할 만큼 문제가 된 가사 〈유민탄〉과 임진란 때 실제 남원에 살았던 최척이란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한문소설 〈최척전〉이 남원의 조위한에 의해 이 지방에서 생산되었다는 사실은 이 고장이 우리나라 산문문학의 원천이라는 국문학적 의미를 갖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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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04 23:02

[(22) 신경준의 시론서 시칙(詩則)] 일상속 사물 사실적 관찰…고전 한시 기존틀 깨

여암 신경준(1712~1781년)은 1455년 세조찬탈의 정란 이후 전북 순창 남산대로 낙향하여 귀래정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신말주의 11대손이다. 영조 30년(1754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휘릉별검, 정언, 장령, 서산군수, 좌승지, 순천부사, 제주목사 등을 지냈다. 〈문헌비고〉 편찬에서 〈여지고〉를 담당했고, 〈훈민정음운해〉, 〈평측운호거(平仄韻互擧)〉, 〈산수경(山水經)〉 등 비중 있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 가운데 〈산수경〉은 일제의 산맥 지리서보다 앞선 것으로 우리나라 산줄기를 백두산을 시원으로 날과 씨로 구분하여 과학적으로 그려낸 지리서로도 유명하다. 시의 창작과 이해에 관한 이론서 〈시칙〉도 서구의 이론서에 못지않은 저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시칙〉은 〈여암유고〉 권 8에 전하는데 그의 나이 23세 때 고서에서 읽은 것과 스승으로부터 들은 바를 바탕으로 한시의 이해와 작법을 5개의 도표와 그에 관한 해설로 엮은 것으로 시 창작기법을 겸한 시론서이다. 시의 근본적 기본요소를 체와 의(意), 성(聲)의 세 골격으로 나누고, 성은 다시 가(歌), 사(辭), 행(行), 곡(曲), 음(吟), 탄(歎), 원(怨), 인(引), 요(謠) 등의 장르로 분류하여 대개 5언과 7언을 기본 음수율로 하고 있다. 그리고 궁상각치우의 5음은 황종(黃鐘), 대려(大呂), 태족(太簇), 내종(來種), 고세(姑洗), 중려(中呂), 임종(林鐘), 이칙(夷則), 남려(南呂), 무사(無射), 응종(應鐘) 등 12율과 밀접한 관계를 이룬다고 했다. 의는 주의(主意)와 운의(運意)의 둘로 나누고, 다시 주의는 송미(頌美), 기자(奇字), 우애(憂哀), 희락(喜樂)으로, 운의는 점배(占排), 취사(取捨), 활축(闊蹙), 구결(口訣)로 나누어서 시의 내면적 서정의 표현방식을 구체화했다. 말하자면 여암은 시창작의 원리와 방법론에서 사(事)와 물(物), 정(情)의 문제를 제기하여 이에 대한 시창작의 상관관계를 설명했고, 전체적인 시의 짜임도 기승전결의 일반적 구조로부터 기(起), 승(承), 전(轉), 식(息), 숙(宿), 결(結), 졸(卒)로 세분화하여 풀이했다는 특성을 지닌다. 이는 시가 본디 음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시에 있어 외형률의 음악성 외에 내면적 운율성을 강조한 것으로 시의(詩意)는 5성과 12율이 가지는 정취와 조화시키려했다는 점이 남다르다. 시어마다 성을 다시 5성(五聲)으로 배분해 보려는 시도한 것을 보면 당대로서는 전례가 없는 독창적인 시도였다고 할 수가 있고, 5음과 12율의 배합 속에 시에서의 음악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시에 있어서 시의 강령(綱領), 시의 재료, 시격(詩格), 시례(詩例)의 대강, 시작법총(詩作法叢), 시의 기품, 시의 대요, 시의 형체 등 8항목으로 분류하여 그러한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리하여 시의 강령은 다시 체와 의, 성과 시격 48표현방법, 시례는 14표현기교의 예증, 시의 기품은 10가지, 시의 대요엔 생각에 사악함이 없어야 한다는 〈시경〉의 사무사(思無邪)의 정신을 시창작의 표준으로 삼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시의 형체는 8가지 격식의 작시법을 금기와 바람직한 방법으로 나누어서 설명했다. 그가 남긴 「여암유고」 권 1에는 시 62제하에 145수의 시가 남아 있는데, 그가 관직에 있을 때나 일상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시세계를 구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경준의 시세계는 대개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는데, 첫째, 그가 53세 때 장현현감으로 부임한 시절 백성들의 어려운 삶 속에서 우러난 민은시(民隱詩) 10장과, 둘째, 자연의 미물 - 개구리, 개똥벌레, 개미, 매미, 귀뚜라미, 거미, 파리, 모기 -까지 현미경적인 분석관찰을 통한 야충(野蟲)과 소충(小蟲)의 10장, 셋째, 전통적인 한시의 형식을 깨뜨리면서 실질을 추구한 고체시 65수로 대별할 수 있다. 박명희 교수는 ‘여암 신경준의 생애와 학문관’에서 이러한 신경준의 시세계의 성과를 신경준 개인의 사유와 학문적 지향 및 성과와 무관치 않다고 보고 이를 ‘박(博)’과 ‘실(實)’이라 했고, 특히 시를 통해 실질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 ‘무실(務實)’이었으므로 그의 시작태도를 무실적인 시작태도라 정의했다. 신경준은 관직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강계지〉,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등의 저서 외에 〈여암유고〉에 전해지는 ‘일본증운(日本證韻)’, ‘언서음해(諺書音解)’, ‘평측운호거’, ‘거제책(車制策)’, ‘수차도설(水車圖說)’, ‘논선거비어(論船車備禦)’, ‘의표도(儀表圖)’, ‘산수고(山水考)’, ‘도로고’, ‘사연고(四沿考)’, ‘가람(伽藍)고’ 등 실로 다양하고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잡학이라고 홀대했던 천관(天官), 직방(職方), 성률(聲律), 의복(醫卜)에 이르는 학문과 기벽한 서책 등 정통 사대부들이 기피했던 분야까지 통달했던 선비였기 때문에 그의 학문의 요체를 ‘박학(博學)’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박(博)’이라고 줄여서 말한 것 같다. 신경준의 한시는 일상생활에 밀착되어 있거나 사물에 대한 사실적 관찰을 바탕으로 고전적인 한시의 기존형식을 깨뜨리면서 실질을 추구했으므로 이러한 시문학적인 자세를 ‘무실(務實)’이라는데 이의를 달수가 없다. 홍양호가 쓴 서문을 보더라도 결국 신경준의 시칙은 전 시대인들의 시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구차히 기존의 일정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정통시의 율격을 자유자재로 깨뜨리면서 나름의 개성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고, 야충이나 소충에서처럼 하찮은 미물 가운데에서 문학적 의미를 캐낸 시인으로서의 여암의 남다른 시 철학을 엿볼 수가 있다. 호미를 들고 청산에 가서(提鋤去靑山)맑은 물 논밭에 대고(白水稻田)달 밝은 밤 호미 들고 돌아오니(提鋤歸月明)앞마을엔 푸른 안개 끼었어라(前邨翠烟)하얀 호미자루 겨우 세치(白木柄强三咫)일년 삼백육십오일(一歲三百六十五日)내 생명 너에게 맡겼네(我命托子) - 호미를 들고(提鋤)-시제는 ‘제서(提鋤)’ 즉 ‘호미를 들고’이다. 4구까지는 청산에 있는 밭에 나가 달이 동산에 떠오를 때까지 일하다가 푸른 안개가 내려깔리는 달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한가로운 농촌의 정경을 노래했고, 나머지 시구에서는 비록 작은 호미로라도 농사를 지어야만 우리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노동과 농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여암의 무실의 시세계를 그대로 대변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한 4언과 5언, 6언, 8언 등 정격의 형식을 깨뜨리는 변칙의 운율적 효과를 실험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신경준의 ‘잡언고시’ 중 10구의 ‘우양약(雨陽若)’이나 6구의 ‘앙양(仰陽)’ 등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여암 신경준은 전북이 낳은 실용성을 중시한 선비로 관직생활과 시문학을 통해 박학(博學)과 무실(務實)의 학문과 시세계를 구축하여 국가 사회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1934년 암담한 일제하에 국학운동을 벌였던 위당 정인보가 아니었다면 자칫 실학적인 여암의 훌륭한 박학과 무실의 족적이 사라질 뻔했다. 1939년 위당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여암전서〉가 활자본으로 간행하면서 정인보는 ‘여암이 만약 국정을 담당하는 중요한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나라가 일본에 망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일본을 능가했을 것’이라고 평한 것처럼 신경준의 다양한 저술활동은 우리나라를 위해 절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여암의 학문은 사승(師承)관계가 미미해 후대에 이어지질 못했고, 자신이 스스로 자득한 학문에 그쳤지만 기술과 실용을 중시한 실질적인 학문이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할 수 있다. 실로 신경준의 저술 가운데는 실용적인 학문과 과학기술은 어느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독자성을 구축한 업적들, 예컨대 천문관측기구를 비롯한 도로와 강하의 연구, 독창적인 조선의 지리의 정리, 수레와 선박, 화차 등의 기술적 탐구, 탁월한 언어학적 연구 등은 모두 우리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 했던 그의 실사구시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전근대적인 성리학의 학문과 문학정신에서 의고주의적인 사고나 몰개성적인 철학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실용적인 측면을 몸소 실천궁행했던 근대지향의식을 지향한 실험자요, 선각자였다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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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28 23:02

[(21) 김구의‘떨어지는 배꽃’낙이화(落梨花)] 심미적인 7언절구 '시부의 표준' 칭송

사뿐히 춤추며 날아가다 도로 되돌아와서는거꾸로 나부껴 다시 가지에 올라 꽃 피우려다무단히 꽃잎 하나 거미줄 그물에 걸리니거미 때마침 나비인줄 알고 잡으러 오네 문정공 김구(1211- 1278년)의 시 가운데 가장 서정적이고 심미적인 시로 떨어지는 배꽃 낙이화(落梨花)라는 시제의 7언절구를 꼽을 수 있다. 이 시는 화사한 봄날, 불어오는 바람에 떨어지는 배꽃 잎이 윤무를 그리다가 거미줄에 걸려 흔들거리는 것을 보다가, 마치 나비가 걸린 것으로 착각한 거미가 먹이인줄 알고 엉금엉금 기어오는 곤충들의 먹이사슬을 섬세하고도 희화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희짓는 봄바람과 무수히 떨어지는 배꽃잎, 거미줄과 거미를 소재로 낙이화가 다시 개이화(開梨花)하려는 역리(逆理)성을 꼬집는 지포(止浦)의 시작법이 놀랍다. 그러기에 고려대의 문장가인 문충공 이제현은 이 시를 아름답기가 둘도 없는 작품이라 극찬하였고, 고종대의 문청공 최자는 시부의 표준이요, 모범이라 칭송하였다. 당대의 문호로 추앙받는 문순공 이규보(1168- 1241)는 고려의 문장을 저울질 할 사람이라 경탄을 하였고, 고려의 국왕인 고종도 동쪽 우리나라 대신의 정기를 타고나 서쪽 중국의 문장가들을 자유로이 주무르는 사람이라 칭찬했던 당대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와의 외교에도 능한 정치가였다.김구는 이규보나 이제현처럼 고려대의 다른 문장가들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요, 외교가였다. 고려 고종조 대몽 항쟁기의 한 복판에 서서 민중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몽고를 오가며 감동적인 외교문서를 만들어서 그들을 설득하고 고려와의 관계를 회복시켰던 애국적인 사대부였다. 이는 당 희종 8년(881)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24세의 젊은 나이로 토벌장수 고병(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에게 격문을 써서 반란을 평정함으로써 이름이 천하에 높아진 신라의 최치원과도 비교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최치원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7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선주표수현위를 거쳐 승무랑시어사내공봉의 벼슬에 올라 중국에 문명을 떨친 문장가였다.김구도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시와 문을 잘 지어 칭송이 자자하였고, 여름에 절에 들어가 50일 동안 고문과 율시, 당송시를 공부하고 시와 부를 짓는 하과(夏課)에서는 여러 동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모두들 과거에 나가면 장원을 할 것이라 평판이 높았다는 기록이 지포의 행장에 나와 있다. 하지만 나이 20살에 문과에서 2등으로 뽑히자, 지공거(知貢擧)인 정숙공 김인경이 장원으로 뽑히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겨 자신도 제 2등으로 뽑혔다고 위로하니 김구도 장문의 병려체 계문(啓文)를 지어 사례를 하였다.문정공 김구는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40여년이 지난 희종 7년(1211) 비교적 정치가 안정기에 접어든 최충헌 집권기에 태어났다. 〈고려사〉 열전에는 부녕현(현 부안)인이라 되어 있지만 역사가들은 부안에서 태어났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부친인 김의(金宜)가 중앙관료로 개경에 거주했으므로 부안이 아닌 개경에서 출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 숙종 2년(1836)에 발간된 〈부령김씨족보〉에 의하면 김구의 선대가 부안에 거주하게 된 것은 경순왕의 후손인 김경수가 고려 문종 때 과거에 올라 이부상서 우복야에 이르고 아들 김춘이 부녕부원군에 봉해지면서 부녕을 식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본관이 된 것으로 보인다. 김구의 아버지 김의는 고려 신종 7년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당시 최씨무단정권을 장악한 최충헌에 의해 발탁됨으로써 중앙관료로 진출하였고, 최충헌은 이규보, 최자, 진화, 김극기 등 당대 문신들을 우대하여 무신정권과 학문의 세계를 조화롭게 이끌어간 것으로 보인다. 김구는 당시 제일의 문호인 이규보의 천거에 의해 집권자 최우에게 발탁되어 관직에 올랐음을 〈고려사절요〉에서 엿볼 수 있다. 고종 21년(1234)부터 6년간 제주판관으로 있을 때 제주의 땅은 돌이 많고 메말라서 논농사를 지을 수 없고, 밀, 보리, 콩, 조 등 밭곡식만 재배하는데 소와 말, 노루, 사슴들 때문에 수확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다 땅의 경계도 없어 포악한 무리들이 남의 땅을 잠식하는 일이 많은지라 지포가 부임하자마자 많은 돌을 모아 담을 쌓게 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단번에 해결한 관리로서 제주에서 이름을 날렸다는 사실이 〈동문선〉과 〈탐라지〉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6년간 제주판관을 마치고 내직으로 자리를 옮겨 한림원에 들어가 문사로 활동하면서 나이 30세에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을 때 〈북정록(北征錄)〉이란 기행록을 남겼다. 그리고 가는 행로에 〈과철주(過鐵州)〉, 〈과서경(過西京)〉, 〈출새(出塞)〉, 〈분수령도중(分水嶺途中)〉 등 여러 수의 시를 지었는데 그들 작품 속에는 약소국의 한과 원나라에 대한 강렬한 항몽의식이 작품의 내면에 오롯이 담겨 전한다.당년에 성난 오랑캐들이 국경문을 막으니40여성이 불타오르는 요원같구나산에 기댄 외로운 성 오랑캐길목이구려일만군의 북과 함성 단 한 번에 삼키려 해도백면서생이 이 성곽을 굳게 지켜내어 나라에 몸 바치길 기러기 털처럼 가벼이 하였네.(중략)하룻밤 관아의 창고 붉은 화염 타오르니처자와 함께 기꺼이 불 속에 사라져갔네.충성스런 장한 혼백 가는 곳 어디 멘가.천고에 고을 이름만 철(鐵)이라 허공에 쓰네.〈철주를 지니며〉〈과철주〉의 시제 아래에 지포는 고종 18년 신묘 8월에 몽고 장수 산례탑이 함신진을 포위하고 철주성을 도륙했다. 이 때 그 고을 수령인 이원정이 성을 지키다가 결국 창고를 불사르고 처자와 함께 불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주를 붙여 이 작품의 서사적인 창작배경과 역사적 사실을 밝혀놓았다. 그러므로 이 시는 1231년 몽고의 침략에 보름동안 항거하다 장렬하게 산화한 고을 수령 이원정과 그 처자에 대한 역사적 전쟁서사시임을 알 수 있다. 장수도 아닌 백면서생인 이원정이 인(仁)과 신(信)을 바탕으로 인심을 결속하여 몽고 장수 산례탑과 항전을 할 때 뼈를 태워 밥을 지어먹으며 싸웠던 전장의 참담한 극한상황이 떠오른다. 김구는 이런 용맹한 군사들을 용호(龍虎)로 비유하며 그들의 함성에 천지가 기울었고, 마지막 궁지에 몰린 이원정은 결국 처자와 더불어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서 산화했다는 비장미를 이 시에 담아내었다.김구는 원종조 몽고와 강화가 성립된 이후, 대몽관계에서 중요한 외교문서를 전적으로 담당하여 몽고의 무도한 요구와 압박을 해결했던 표전문의 대문장가였다. 원종도 지난번 몽주(蒙主)의 조서에 올린 글의 뜻이 간절하고 관곡하였다는 말까지 했으니, 그대가 지어올린 표문의 사연과 문장이 곡진하여 몽주를 감동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러한 칭찬이 있었겠느냐고 기뻐할 정도였다. 확실히 지포는 대몽관계에서 외교관계의 훌륭한 표문을 작성하여 고려를 구함과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다짐으로써 재상의 반열인 평장사에 오른 문장가였다.18대손 동호가 동문선과 고려사에에서 김구의 유문(遺文)을 뽑고, 16대손 홍철이 편찬한 연보를 추가 편찬하여 3권 2책의 〈지포집(止浦集)〉을 순조 1년(1801)에 발간했는데, 7언고시 2수, 7언절구 4수, 7언율시 6수, 계 1, 소 5, 서 3, 비명 2, 표전 69 등이 실려 전한다. 만년에 부안 변산 지지포(知止浦)에 지지재(知止齋)란 서당을 짓고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부안군 산내면 운산리에 묘소가 있고, 도동서원에 배향되어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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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21 23:02

[22. 장복겸(張復謙)의 연시조 고산별곡] 세상 시름 잊고 자연 아름다움 노래

필자가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던 「옥경헌유고(玉鏡軒遺稿)」를 접하게 된 것은 1987년 전주대학교 도서관에 근무했던 김종진 씨로부터다. 마침 호남을 중심으로 수집한 고서의 해제작업을 준비하고 있던 그로부터 이 문집에 실려 있는 고산별곡가사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옥경헌 유고에 실려 있는 것처럼 가사문학작품이 아니었다. 거개의 고전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창(唱)으로 향유하기 위한 가사(歌詞)였지, 문학장르상으로 통칭되는 가사(歌辭)문학 장르가 아니라 10수의 연시조였다. 이 고산별곡은 필자의 작품연구를 거쳐 1988년 「국어국문학」 102집에 실리게 되었다.광해군 9년에 전북 임실군 지사면에서 태어난 장복겸(張復謙 1617- 1703)은 영천 위에 있는 고산(일명 독뫼)의 승경과 아래로 아름다운 서호의 중간에 외롭지 않다는 불고정(不孤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가사(歌詞) 10장이라는 연시조 〈고산별곡〉 10수를 지었다. 강호한정을 노래한 이 〈고산별곡(孤山別曲)〉은 조선중기의 은일처사 옥경헌 장복겸이 남원부 거녕현(현 임실군 지사면)에 살면서 지은 연시조이다. 아버지 흥성(현 전북 흥덕)인 장사랑 담(膽)과 효령대군 2세손인 어머니 석성(石城)의 정증손녀 슬하에서 태어났으나, 7-8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조모의 슬하에서 외롭게 자랐다. 고산 윤선도가 6세의 어린 나이에 친부모의 슬하를 떠나 물설고 낯설은 전남 해남의 백부댁에 양자로 입양된 고독한 문학적 환경과 동질적이다.그래서인지 장복겸은 고산 윤선도보다 30년 후세인으로 자신이 지은 〈고산별곡〉은 윤선도(1587 -1671)의 〈산중신곡〉이나 〈어부사시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옥경헌은 그가 양육되었던 외가에 후사가 없고 서자만 있으므로 국전에 따라 전답을 고루 분배함으로 제사를 지낼 서자를 위해 자신에게 분배된 재산을 내놓을 정도로 당시의 서얼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선각자였을 뿐만 아니라, 핍박받던 민중에 대해서도 남다른 애정을 지닌 사대부였다. 그는 현종 11년(1670년) 극심한 흉년으로 기근이 심해지자, 백성들을 위한 환상(還上)제도가 오히려 고리(高利)의 이식(利殖)으로 민생고를 부추기는 원인이 되며, 사농공상 중 농사짓기가 가장 힘든데 선비는 무위도식하는 계층이기 때문에 소학과 사서를 터득한 업유(業儒), 활과 말타기를 익힌 업무(業武), 나머지 무리를 업농(業農) 등 3등급으로 분류하고 유의유식(遊衣遊食)하는 무리들을 없애야 한다는 구폐소(救弊疏)를 올린 민주적인 의무론을 제기한 선각자였다는 것이다. 실제 이 당시에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높은 이율로 국고의 쌀을 대여하고 가을에 수확한 곡물을 무자비하게 착취하여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는 가렴주구의 지방관들이 많았다. 그래서 지방 곳곳에서 민란이 자주 일어났고, 마침내 동학혁명의 농민전쟁이 일어난 도화선도 되었다.옥경헌은 지배계급인 사대부 계층을 혁신하여 각자 소임을 다함으로써 공정한 사회를 이루어야 하고, 민중들을 이러한 지배자의 부당한 수탈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선진사상의 소유자였다. 그런 사대부였기 때문에 고리의 환상제도의 폐해를 없애야 하고 무위도식하는 유학자들을 각자 소양에 따라 업유, 업무, 업농의 3부류로 나누어 일하게 해야 한다는 혁신적인 구폐소를 왕께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사대부들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나면 분연히 의병에 가담하여 나라를 위기로부터 헌신적으로 구해낸 선진 지배자나 민중들이 많았고, 이로써 조선사회의 삶의 문화가 세계적인 선진대열에 설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옥경헌은 집문 밖 시냇가 독뫼(일명 고산)에 불고정(不孤亭)을 짓고 수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우리말과 글로 〈고산별곡〉 10수의 연시조를 남겼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 작품은 「옥경헌유고」 가사(歌詞)편에 〈고산별곡〉이라는 제하에 실었는데, 고산과 서호의 절경에 옥경헌과 불고정을 짓고 달 밝은 밤, 서늘한 바람, 흐드러지게 핀 꽃들 속에서 자연처럼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그 연시조에 담겨있다, 거개의 강호류의 시가들이 자의든 타의든 환로(宦路)에서 벗어나 자연에 묻혀서 그 아픔을 달래고 자위하는 수단으로 음풍농월한 것과는 달리 장복겸의 〈고산별곡〉은 애당초 벼슬길과 무관한 순연한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가치 있는 처사적 인생을 노래했다는데 남다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청산(靑山)은 에워들고 녹수(綠水)는 돌아가고 석양(夕陽)이 거들 때에 신월(新月)이 솟아난다일존주(一尊酒)가지고 시름 풀자 하노라 (중략)[5]옥경헌(玉鏡軒) 잠을 깨어 눈유장(嫩柳莊) 안니다가 청계석(靑溪石) 흩디디어 불고정(不孤亭) 올라가니아이야 일호주(一壺酒) 가지고 날을 찾아 오너라(중략)[10]국 안주(安酒) 깊은 잔 좌상(座上)께 나소오고 노래 춤 장고 북은 젊은이 맡겨두고아이야 종이 붓 먹 들여라 연구(聯句)한 작 하옵세[1]의 청산은은 여타 은일류의 작품이 그러하듯 청산, 녹수, 석양, 신월, 일존주를 주된 소재로 하고 있다. 청산은 첩첩이 안으로 에워싸고 있지만 녹수가 돌아서 주야장천 흘러가는 공간을 제공하는 가운데 한낮이 지나면 석양이 오고 석양이 지나면 동녘에 청신한 새달이 솟아오른다는 만유불변의 이법을 제시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변화무쌍한 인간들에 대한 서글픔을 노래하고 있다. [5]의 옥경헌은 하루의 일상을 압축하여 마치 일기 쓰듯 서술하고 있다. 옥경헌에서 잠을 깨어 눈유장에 있다가 푸른 이끼가 낀 징검다리를 지나 불고정에 올라서 술과 벗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10]의 국안주는 고산별곡의 마무리 장으로서 시주(詩酒)와 벗, 달, 거문고로서 위안을 삼아 보지만 그것만으로 자위할 수 없는 화자는 고려속요 청산별곡의 마지막 8연과 같이 깊은 잔(盞)많은 술에 자신을 의지하여 현실의 아픔을 달래었고, 더욱이 노래, 춤, 장고, 북소리를 즐기며 인간 본연의 고독을 치유하려 안간 힘을 쓰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고산별곡은 청산, 녹수, 석양, 신월, 술, 삼척금(三尺琴) 등 자연을 주요 소재로 삼아 시를 읊조리는 가운데 세상시름과 번뇌를 잊고 자연과 더불어 소일하면서 자오자락(自娛自樂)하는 게 작자의 주된 정서다. 옥경헌의 작품도 이념을 앞세운 정제된 소재나 공식화된 소재로서 시조작품을 생산하는 일반적인 고시조와 마찬가지로 작품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출세하여 세상에 나가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지절을 노래할 때 으레 관례적으로 물이나 달을 등장시키면서 더욱이 인간이 아닌 달을 유일한 벗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은 고산 윤선도가 수석송죽월의 자연을 오우(五友)로 삼고 있는 경지와도 동질적이어서 이 두 작품의 상관성이 있었음직도 하다. 옥경헌의 문학적 배경이 된 불고정은 남원부 거녕현(현 전북 임실 지사면 영천리)에 장복겸이 세운 정자이다. 집문 밖에 독뫼라 부르는 작은 고산(孤山)이 있는데, 그 산 위에 정자를 지어서 불고정(不孤亭)이라 하였다. 이는 정극인이 전북 정읍 칠보 동진강 가에 초옥을 짓고 근심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우헌(不憂軒)이라 이름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고산(孤山)과 불고(不孤)의 아이러니는 옥경헌 스스로의 심회를 드러낸 것이지만, 그 행장을 보면 소동파가 산은 외롭지 않다라고 한 말에서 취의(取義)했다고 기록되어 전한다. 장복겸은 때로 이 정자에 노닐며 스스로 외로움을 달래고 외롭지 않음을 읊조리기도 했고, 달 밝은 창가에 고요히 앉아 도의를 강론하고 학문을 닦는 즐거움을 스스로 누리며 살았는데 바로 이러한 것들이 불고정이라고 명명한 작자의 의취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산별곡〉 10장의 연시조가 300 여 년 전에 전북 임실 영천에서 장복겸에 의해 생산되어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나 〈산중신곡〉과 더불어 나란히 어깨를 겨루고 우리 국문학 의 시가작품의 질량을 높였다는 사실은 자못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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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4 23:02

[21. 김삼의당의 꽃님과 달님의 한시] 평범한 부부 애절한 사랑, 유려한 시로 녹여내

영조 45년(1769) 10월 13일 동년월일 날에 남원 서봉방(현 향교동)에서 태어난 청동옥녀(靑童玉女) 담락당 하립과 삼의당 김씨가 그들 나이 18세가 되던 해인 정조 10년(1786)에 결혼을 하였다. 삼의당 김씨는 연산군 때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일로 영남학파들이 모조리 사형을 당한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했던 사관 김일손의 11대손인 김인혁의 딸이며, 담락당 하립(1769 - 1830)은 세종조 영의정을 지낸 하연의 12대 손으로 두 집안 모두 몰락한 사대부 집안의 후예다.〈김삼의당시문집(金三宜堂詩文集)〉은 하립이 신혼 초야 서로 주고받은 화답시와 2년 후 20세 때 과거를 위해 상경한 뒤 10년간의 긴 이별과 33세 해우할 때까지 부부의 그리움과 고운 정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253편의 한시와 서간문 22여 편이 담겨져 있다. 남원이라는 동일한 공간적 배경을 지닌 춘향전과 다를 바 없는 아름다운 사랑의 시화(詩話)이며, 매창과 쌍벽을 이룬 이 고장의 여성문학이 아닐 수 없다. 담락당(1769 - 1830)은 우리 서로 만나 가연 맺으니 광한루의 신선이네/ 오늘 밤 우리가 부부되니 옛 인연 분명 하네요/ 남녀의 결합은 본디 하늘의 뜻인데/ 공연히 세간의 중매만 분주 했구려라 초야의 밤을 노래하자, 삼의당도 열여덟 신선 낭군 18세 신선낭자/ 동방화촉 밝히니 좋고도 좋은 인연/ 동년 동월 같은 동네 태어나 살다가/ 이 밤에야 서로 만남이 어찌 우연이리까라 화답하였다. 담락당이 신혼 초에 신부 김삼의당과 주고받은 이 화답시는 자신들이 마치 춘향과 이도령이 현세에 다시 환생된 것처럼 자랑스러워하고 있음이 은근히 드러난다. 삼의당 김씨(1769 - 1823)가 자서한 서문을 보면 난 호남의 우매한 부녀자로 깊숙한 규방에서 자라나 경사(經史)를 넓게 알지 못하고 언문으로 소학을 읽어 제가(諸家)들의 시문을 보았다라 했으니 스스로 한문을 배우고 한시를 익혔음을 알 수 있다. 결혼을 한 이후 이들 부부는 춘향과 이도령과 같은 아름다운 사랑과 이별의 세월을 보내며 그들이 주고받은 사랑과 그리움을 한시에 고이 담아내었다. 거의 4언 시경시체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때론 3언과 5언, 7언시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정체시의 규격을 벗어난 새로운 시격을 이루어냈다. 그리하여 마치 언문일치의 국문을 쓰듯 사랑과 이별, 슬픔, 자연의 경물들을 물 흐르듯 유려하게 엮어낸 〈김삼의당시문집〉은 부안의 매창이 남긴 시조나 한시와 더불어 조선 중기 전라문학의 보고라 할 만하다. 1982년 오초(吾超) 황안웅 선생이 마이산 금당사에서 원문에 담긴 사랑의 시정을 오롯하게 시조형에 담아 다시 엮어내니 이들 부부의 작품이 더욱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다. 그는 이 한 봄 고운 꽃에 달빛마저 드리우니/ 달빛에 비친 꽃이 그 더욱 고웁고녀/ 곱고도 또 고운 빛이 우리 집에 비치오 라며 담락당이 읊어내자, 밝은 달 고운 빛이 서로 엉겨 가득한데/ 꽃 같고 달도 같은 우리임을 마주 대하노니/ 그 뉘 세간영욕이 이보다 더하리오라고 신부 삼의당이 서로를 달님과 꽃님이라며 곱고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화답하면서 한 생애를 살다간 담락당과 삼의당의 사랑과 진실이라고 하였다. 미당 서정주도 삼의당 김씨는 때때로는 그 얼굴에 이뿐 분홍꽃빛도 잘 나타내는 미인이시기도 하였던 것 같은데, 〈시경〉 도요(桃夭)편의 그 왼 집안(宜其室家)과 가족(宜其家室)과 심부름꾼(宜其家人)에게 까지 세 가지로 다 얌전하고 의젓이 두루 좋은 삼의(三宜)의 미덕으로만 종생(終生)하셨다니 그 더욱 가찬(可讚)할 일이다라 했다. 또한 낭군(郎君)은 벼슬길에서도 낙제(落第)나 하고 궁거(窮居)하던 촌(村)선비였음에도 불구하고 늘 사랑을 다해서 끝까지 그를 도와 깨끗한 집안을 이루어 내셨다니 참으로 공경해 모실만한 어른이시다. 주부(主婦)가 요로코롬 시인(詩人)노릇도 하기라면 세상의 가장(家長)들은 누구나 다 그 아내가 시인을 겸하기를 바라마지 않을 것 같다고 찬(讚)하기도 했다. 정비석도 부부 사이의 화락(和樂)함을 일컬어 금슬이 좋다고 하는데 의(誼)좋은 부부 사이를 두고 이런 말을 쓰는 뜻은 참으로 의좋은 부부가 그리 많지 않다는 뜻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는 듯싶다라 할 정도로 부부간 금슬 좋은 부부간 사랑의 서정시의 정화(精華)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오초(吾超)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호남의 한 구석에서 그대로 묻힐 뻔한 200여 년 전의 금슬(琴瑟)을 다시 손질하여 고운 금슬의 소리를 재치 있는 솜씨로 재현시켜 놓았다는 김삼의당 시문집 번역 발간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립고 보고 싶어 괴로운데(相思苦 相思苦)닭이 세 번 우니 새벽 오경이네(鷄三窓 夜五鼓)맥맥이 잠 못 이뤄 원앙침 대하니(脈脈無眠對鴛鴦)눈물이 나서 흐르네 비 내리듯이(淚如雨 淚如雨)임 만나기 어려워 정말 어려워(待君難 待君難)어느 때나 돌아와 임을 만날까(待君幾時還)길고 짧은 정자 사이 사람그림자 어리어도(人影長亭短亭間)저녁놀 지는데 임 오지 않고 임 만나기 참 어렵네(夕陽盡 君不來 待君難) 삼의당 김씨가 혼인한 2년 후 남편이 과거공부를 위해 남원을 떠나자, 서울로 올라간 낭군을 그리워하며 노래한 연가다. 그리움과 보고 싶은 마음을 상사고(相思苦) 상사고라 하고 대군난(待君難) 대군난이란 3언의 반복과 7언을 혼용한 파격은 이미 〈시칙〉이란 시론을 펼친 여암 신경준(1712 - 1781)의 실험적인 시창작 기법이었다. 이러한 3언의 반복법은 그립고 보고파라거나, 기다리고 또 기다리네라는 순수 우리말의 간절하고 절절한 심사의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한시는 어려운 문자로 구속되고 제한된 서정의 표출방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언문일치적 작시법이라 할 수 있다. 그리움에 잠 못 든 야삼경(夜三更)을 새벽닭이 우는 계삼창(鷄三窓)이라 하고, 보고 싶음으로 뜬 눈을 지새운 새벽 야오경(夜五更)을 북을 다섯 번 쳐서 새벽을 알리는 야오고(夜五鼓)라 그린 것도 삼의당 김씨 만의 특이한 시심과 시작법이다. 원앙침 베개에 의지하여 잠을 청해 보지만 오매불망 임을 그리는 마음에 잠은 오지 않는다. 오히려 하염없는 눈물만 빗물처럼 흘러 내려 베개를 적시는 정경을 누여우(淚如雨) 누여우라 반복함으로써 그리움이 절정에 달하고 있음을 절절하게 그려낸 서정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시적 정서는 부안의 매창이 서울로 떠나간 유희경에게 읊어 낸 시조 이화우(梨花雨)의 경지와도 같고, 이후 15년간이나 돌아오지 않는 임을 그리워하며 읊은 〈규중원(閨中怨)〉 고운 뜰엔 배꽃 피고 두견새는 슬피 울어/ 달빛이 뜰에 가득 차니 더더욱 서러워지네/ 꿈에서라도 사랑코자 해도 잠은 오지 않고/ 매화 핀 창가에 기대서니 새벽 닭 우는 소리 들리네를 노래하는 듯하다. 삼의당은 이 같은 그리움과 기다림을 유려한 서정시와 서간문에 오롯이 담아내었고, 특히 자유로운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정격시를 깨뜨리고 때론 3언과 5언, 7언과 함께 혼용하면서 마치 언문일치의 한글처럼 시를 읊조리듯 자유자제로 한시를 실험한 선각의 여류시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삼의당 김씨는 1801년 12월 남원을 떠나 진안 마령 방화리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1823년 5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농사를 지으며 전원시인으로 살았다. 당시 조선사회는 허난설헌이나 황진이, 매창처럼 사대부가의 여인이나 기녀도 아닌 여염집의 평범한 여인이 한시를 지으며 이를 향유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하지만 논밭 일까지 마다 않고 해야 하는 어려운 농촌의 삶 속에서도 때때로 부부의 애절한 사랑과 계절에 따른 그리움을 한시 속에 이렇듯 유려하게 녹여낸 삼의당의 문학정신이 드높지 아니할 수 없다. 100여 년이 지난 1930년 광주에서 〈김삼의당 김부인 유고〉가 출간되어 세상에 드러났고, 1983년 이들 부부를 기리는 기념사업회에서 그들이 살다간 진안 마령에 부부시비를 세워 이들을 찾는 방문객들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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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07 23:02

[20. 매창의 '이화우 흩날릴 제'(하)] 탁월한 시재, 지절 갖춘 부안의 대여류시인

유희경이 의병에 가담하기 위해 매창과 이별하고 부안을 떠난 후, 임진왜란이 끝난 지도 15년이 지났지만 사랑하는 매창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는 의병활동을 마치고 서울에 살면서 의병활동의 전공으로 정 3품 통정대부, 종 2품 가의대부를 받아 신분이 상승되었고, 당대의 문사들과 시로서 교유하느라 매창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유희경은 창덕궁 서편 원동의 금천 상류부근에 집을 지어 침류대(枕流臺)라 이름하고 살았다. 이곳은 17세기 당대 유명한 시인과 학자들이 모이는 상류층문화 사랑방이었다. 그리고 종내는 삼청시사(三淸詩社)로 이어져 중인 평민들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산실이 되었다. 완평부원군 이원익과 장유, 이수광, 차천로, 신흠, 조우인 등 당대의 이름난 시인과 학자들이 이 침류대를 수시로 드나들며 풍류를 즐겼다. 이수광은 그가 쓴 침류대기에 대(臺), 즉 너른 바위 둘레에는 복숭아나무 여러 그루가 둘러 심어져 있어 때로는 시냇물 양쪽으로 복숭아꽃비가 흩뿌려져서 마치 비단물결이 춤추는 것 같으니 옛 무릉도원이 어찌 이보다 더 아름답다고 할 수 있으랴며 찬탄하기도 했다. 그런 세월을 보내면서도 유희경은 매창을 꿈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였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내 집은 서울에 있어/ 사무치게 그리워도 서로 만날 수 없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땐 나의 애가 끊어지네와 같은 그리움의 연시(戀詩)들이 10여 편이상이나 〈촌은집〉에 실려 전하는 걸 보면 매창에 대한 깊은 사랑을 짐작할 수가 있다. 지금은 부안과 서울이 두 세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지척간이지만, 그 옛날엔 산 넘고 물 건너가야 할 천 리, 만 리 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서로 처해진 여건과 환경은 물리적인 시공보다 더 훨씬 더 멀고 힘들었기 때문에 보고 싶어도 만나기 어려웠을 게 틀림없다. 푸른 송백 앞에 두고 맹세하던 날(松柏芳盟日)사랑은 바다보다 훨씬 더 깊었더라 (恩情與海深)강남 간 파랑새는 날아 올 줄 모르니(江南靑鳥斷)이 한밤 나 혼자만이 애간장을 녹이네(中夜獨傷心)고운 뜰엔 배꽃피고 두견새 피를 토해 우는데(瓊苑梨花杜宇啼)달빛만 뜰에 가득 차니 더더욱 서러워지네(滿庭蟾影更凄凄)꿈에서라도 볼까 해도 잠은 더욱 오지 않아(相思欲夢還無寐) 매화 핀 밤 창가에 기대서니 새벽닭소리 들리네(起倚梅窓聽伍鷄)-규중원(閨中怨)매창은 유희경을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옛날을 회억하며 그리움과 보고픔을 이토록 애절하게 시로 승화시켰다. 사랑이 익어갈 땐 누구나 눈서리가 내려도 변함이 없는 소나무나 잣나무에 비겨 서로 변치 않을 것을 맹세를 한다. 논어 자한편의 추운 겨울날이 되어야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그 세한송백(歲寒松柏)의 지조와 절개를 들어 사랑의 굳은 맹세를 해 보지만, 그런 사랑도 머지않아 허무에 젖어드는 게 우리 인생사다.서울로 간 그임은 1년이 가고 10년이 되어도 돌아올 줄 모르가 때문에 강남 간 파랑새는 다시 돌아올 줄 모른다고 독수공방의 고독 속에서 시적화자는 괴로워하고 있다. 이러한 고독을 더욱 상승시키는 소재로 두견새, 달빛 가득한 뜰, 매화 핀 창가, 새벽닭 울음소리 등이 동원되면서 그리움은 고조된다. 예로부터 두견은 사랑을 못다 이룬 피맺힌 사랑의 한조(恨鳥)다. 고려조 의종 때 정서(鄭敍)의 정과정곡으로부터 소월의 진달래꽃에 이르기까지 죽어서라도 못다 한 슬픈 사랑을 상징했던 주요소재였다. 그래서 귀촉도, 촉혼, 소쩍새, 불여귀, 자규, 두견새 등 시제나 시의 내포된 의미 따라 제각각 이름을 달리하며 자주 용사(用事)되었다. 매창도 달빛 교교히 쏟아지는 한밤 피를 토해 우는 두견처럼 자신을 한조에 의탁하여 상사의 한을 담아내었다. 꿈에서라도 임을 만나 사랑을 나누려 하지만 짓궂은 새벽닭의 울음소리로 그것마저 이룰 수 없는 화자의 애틋한 상사의 정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적인 재회는 헤어진 지 15년 만인 선조 40년(1607년) 유희경이 회갑을 넘은 나이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그것도 불과 열흘 남짓의 짧은 만남이었음을 촌은이 매창에게 남긴 중봉계랑의 시제 중봉(重蓬)에서 읽을 수 있다. 예부터 임 찾는 일은 다 때가 있다하는데/ 시인께는 어찌하여 이리도 늦어졌는지/ 내 온 것은 임만나려는 뜻만이 아니라/ 시를 논하자는 열흘 기약이 있었기 때문이라오, 외로운 산비들기 물가로 돌아날고/ 날 저문 모래밭엔 안개까지 드리운데/ 술잔을 맞들고서 마음을 주고받지만/ 날이 밝으면 이몸이야 먼 하늘 끝에 가 있으리라며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아픔을 동시에 드러내었다. 그리고 시제처럼 이들은 열흘 만에 다시 헤어졌다. 서울 침류대에 두고 온 문화 사랑방 일도 그러려니와 가정을 가진 유부남과의 기구한 인연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희경이 떠난 3년 후인 광해조 2년(1610년)에 매창은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그리움을 한으로 승화시키는 절명(絶命)시를 남기고 나이 서른일곱에 홀연히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도원에서 맹세할 땐 신선 같던 이 몸이(結約桃園洞裏仙)오늘 이다지도 처량할 줄 그 뉘 알았으리(豈知今日事悽然)애닯은 이 마음 거문고에나 실어볼까(坐懷暗恨五絃曲)만 가닥 온갖 사연 시로나 달래볼까 (萬意千事賦一篇)이 풍진세상 고해에는 시비도 많은데 (塵世是非多苦海)홀로 지새는 이 밤 수 년 같이 길기만 하네(深閨永夜苦如年)덧없이 지는 해를 머리 돌려 쳐다보니(藍橋欲暮重回首)구름 속에 첩첩청산 눈앞만 가리우네(靑疊雲山隔眼前) 허무한 사랑에 지치다 못해 세상을 버린 매창의 부음을 접한 유희경은 맑은 눈 하얀 이에 푸른 눈썹을 지닌 계랑아/ 홀연히 뜬구름 따라 네 간곳 어딘가/ 꽃다운 그대의 혼백 저승으로 갔느냐/ 그 누가 있어 임의 옥골 고향 땅에 묻어주리/ 다행히도 정미년에 그대 다시 만나 즐겨웠는데/ 이제는 슬픈 눈물만 내 옷을 함빡 적시네라 부시(賻詩)하고 통곡하며 애도하였다. 10년간이나 정신적 교유를 하며 매창을 사랑했던 허균도 한 바탕 소리내어 곡을 하고 율시 2편을 지어 매창을 애도했다는 기록이 허균의 〈성소부부고〉에 전한다. 매창은 문재가 탁월하고 옛 백제의 여인들처럼 지절이 있는 기생이었다. 허균의 끈질긴 구애에도 몸을 끝내 허락지 않았고, 대신 자신의 질녀를 허균의 침소에 들여보낼 정도로 몸가짐이 단정했음을 허균의 문집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매창이 술취한 사람에게 준 증취객(贈醉客)이란 5언절구 술 취한 손님 비단저고리 잡으니/ 그 저고리 손길 따라 소리내며 찢기우네요/ 그까짓 비단 저고리 하나쯤이야 어쩌리오만/ 임이 주신 사랑까지 찢겨질까 두려웁네요란 절창에서도 매창의 이 같은 면모가 읽혀진다. 가람 이병기도 이러한 매창의 절조를 담아 지은 매창뜸 연시조 3수가 매창공원의 시비에 새겨졌다. 신석정은 〈매창시집〉을 대역(對譯)하면서 매창을 천생의 서정시인이라 추앙하며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필치로 매창의 한시를 재창작하듯 번역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개경에는 박연폭포, 황진이, 서화담의 송도삼절이 있었다면, 부안엔 직소폭포, 매창, 유희경의 부안삼절(扶安三絶)이 있었노라고 하였다. 이렇듯 매창은 당대의 혁혁한 문사들이 찬탄했던 조선의 단아한 기생이었고, 황진이의 시재를 뛰어넘은 이 고장 부안의 대여류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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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28 23:02

[19. 매창의 '이화우 흩날릴 제' (상)] 여성적 정서로 담아낸 상사지정

매창(1573- 1610)은 선조대에 태어난 부안기생으로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에서 쌍벽을 이룰 만큼 시재가 출중한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호가 매창(梅窓)이며 본명은 향금(香今)인데 계유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계생, 계랑이라고도 했다. 아전 이양종의 딸로 거문고와 시문, 노래에 뛰어나 허균, 유희경, 이귀 등 당대 유명한 문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그들과도 매우 깊은 교분을 맺었다. 유희경(1545-1636)은 을사사화가 일어난 때에 강화에서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병자호란이 날 때까지 92세의 장수를 누린 당대 이름난 시객이었다. 그가 남긴 문집 <촌은집>에는 천얼(賤孼) 출신이라 명기되어 있는데, 불행히도 이는 평생 벼슬할 수 없는 문객의 일생을 운명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천얼이란 첩 소생인 서자도 아니고 비첩(婢妾)과의 사이에서 낳은 천한 얼자란 뜻으로 계급사회인 조선조에서 살아가기 어려운 계층이다. 그러한 유희경이 당대 이름 있는 사대부들과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조가 성리학을 기본으로 한 문치주의의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또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사회적인 대변혁의 시기를 거치면서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유희경은 1591년 46세 때 남도를 방랑 유람하다가 부안에서 처음으로 매창과 운명적인 조우를 하였다. 말로만 전해 듣던 18세 꽃다운 매창을 비로소 만나게 되자 만남의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벅차오르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시로서 읊었다. 일찍이 남국의 계랑 이름 들어 알고 있었네(曾聞南國癸娘名)시 재주와 노래솜씨 장안까지 울려 퍼졌는데(詩韻歌詞動洛城)오늘에야 그 진면목 서로 마주하고 보니 (今日相着眞面目)마치 선녀가 천상에서 내려온 것 같구나(却疑神女下三淸) - 증계랑(贈癸娘)유희경과 매창은 이 때 처음 서로 만나게 되었지만, 이미 서로 상대방의 시세계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다가 꿈에 그리던 매창을 만나게 된 유희경은 천상세계의 선녀가 하강한 듯 이내 황홀경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천민출신과 기생이라는 유유상종의 조화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그들은 곧바로 깊은 사랑에 빠져들었다. 매창은 유희경의 증계랑이라는 증시(贈詩)에 아래와 같이 화답을 했다. 내게는 오래전 연주하는 거문고 있어(我有古奏箏)한번 타면 온갖 정감들이 일어나네(一彈百感生)세상에선 이곡을 알아줄 이가 없더니(世無知此曲)비로소 임의 피리소리에 맞추어 보네(遙和俱山笙)이 두 사람은 28년이란 많은 나이 차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밤이 이슥하도록 시에 화답하며 술잔이 오고 갈수록 정분이 깊어가면서 이내 두 사람은 원앙금침에 들어가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었다. 그러나 한 쌍의 원앙같이 아름답던 이들의 사랑도 그리 오래가질 못하였다. 꿈결 같던 매창과의 1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은 단군이 나라를 세운 이래 처음으로 조선사회에 엄청난 국가사회적 대변화를 가져오면서 민중들의 의식을 일깨운 개안(開眼)의 혁신을 불러온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위기에 처한 왕과 지배계급들은 민중의 힘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민중들은 분연히 앞장서서 의병 봉기를 함으로써 왜병들을 물리치는 전공을 크게 세웠고, 승병들까지도 이에 합세하면서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다. 조선조의 사대부들도 정의가 도전을 받고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의연히 구국의 길에 들어서서 헌신하는 그런 선민적 의리나 정신이 투철한 이들이 많았고, 일반 평민이나 천민들까지도 이에 동참하여 앞장을 선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왜란이 평정되자 선조는 전공(戰功)에 따라 비복들에게도 면천을 해주었고, 사대부들에게도 통정대부 같은 정 3품의 벼슬을 내려 신분상승의 기회를 주어 보상해 주었다. 유희경도 매창과 1년여의 밀월의 단꿈을 박차고 나가 왜놈들에게 짓밟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활동에 앞장을 섰다. 배꽃이 봄비처럼 흩날리던 어느 봄날, 유희경이 구국을 길을 가기 위해 매창의 곁을 떠나가게 되자, 매창은 단장(斷腸)의 이별의 아픔을 이화우(梨花雨)의 시조 한 수에 담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라매창의 대표적인 시조 이화우는 당대문사이자 천민시인이었던 촌은(村隱) 유희경을 이별한 뒤 그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조라는 주가 붙어 시조집인 <가곡원류>에 실려 전해온다. 봄비마냥 배꽃이 비에 젖어 흩날리는 모습을 흡사 임과 이별하며 함빡 젖은 화자의 눈물에 비겨 노래한 이 시조는 우리나라 별리(別離)의 연가 가운데 절창이 아닐 수 없다. 이별한 임과 봄비의 배꽃낙화로부터 가을 추풍낙엽으로 이어지는 별리의 시공을 초월한 이러한 시심은 오로지 유희경으로만 향하는 그리움과 사랑의 절정을 이룬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임과의 이별은 인간사에 있어 가장 슬프고 안타까운 극한상황이다.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의 전장터로 출정하는 마당에 서게 되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절망으로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고려조 시인 정지상도 7언절구 송인(送人)에서 떠나는 사람 고이 보내는 사람이 흘린 눈물로 하여 대동강 물이 언제 마르겠냐는 발성을 토해 냈을까 싶다.유희경이 사랑하던 매창의 곁을 떠나간 지 1년 후에 간단한 편지 한 장과 동봉한 시 한 편이 바람처럼 전해왔다. 헤어진 그대는 아득히 멀기만 하고/ 떠도는 나그네는 그리움에 잠 못 이루네/ 소식조차 끊겨 애가 타는데/ 오동잎 찬비소리는 나를 울리네. 매창은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보내온 편지와 동봉된 시를 밤새워 눈물로 읽고 또 읽으며 임께로 향한 이 같은 그리움을 수많은 시로 남겼다. 봄날이어도 추워서 엷은 옷을 깁는데(春冷補寒衣)따스한 햇볕이 임 마냥 사창을 비치네(紗窓日照時)손길 가는 데로 머리 숙인 채 놓아두니(低頭信手處)구슬 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만 적시우네(珠淚滴針絲) 유희경이 매창에게 보낸 시가 10여수가 넘듯이 매창도 유희경을 그리워하여 읊은 시가 당대의 문사들 가운데 가장 많다. 허균의 문집<성소부부고>에도 허균이 계생과 주고받은 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을뿐더러 매창이 37세로 요절하자, 허균이 곡을 하며 몹시 애도했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계랑의 문집 「매창집」엔 그리움과 보고픔이 응결된 상사지정의 유려한 여성적 정서가 형상화된 <추사(秋思)>, <춘원(春怨)>, <증취객(贈醉客)>, <견회(遣懷)>, <부안회고(扶安懷古)>, <자한(自恨)> 등이 실려 전한다. 이 문집은 현종 9년(1668년) 부안 변산 개암사에서 부안현의 아전들이 대대로 이어 암송해 오던 매창의 한시 수백 수 가운데 5언절구 20수, 7언절구 28수, 5언율시 6수, 7언율시 4수 총 58수를 모아 목판본 2권 1책으로 펴낸 것이다. 실전된 매창의 주옥같은 수백수의 한시를 대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그래도 뜻있는 아전들에 의해 구송되어 오던 작품들을 모아 <매창집>으로 발간되었기 때문에 이 정도만이라도 유전되어서 매창의 시세계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은 천행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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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21 23:02

[18. 이규보의 전북경물한시(하)] 부안 밤바다 아름다운 절경 노래

산골인 마령과 진안 사람들은 얼굴이 잔나비 같고, 꾸짖거나 나무라면 놀란 사슴처럼 금방 달아날 듯 사람됨이 질박(質朴)하여 꾸밈이 없고, 술상이나 음식은 문화가 뒤떨어진 야만적인 풍모기 엿보인다고 하였다. 산을 감돌아 운제까지 갔고, 운제를 지나 고산까지 가는 데는 길이 좁고 고개가 만 길이나 높이 솟아 있어 말을 타고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이 대목은 〈여지도〉 고산현의 형승을 그려내는 부분에서 이규보의 〈남행월일기〉를 그대로 원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낭산에서 금마군으로 가려고 했을 때 지석(支石) 즉 고인돌이란 것을 구경했다고도 하였다. 고인돌이란 옛날 성현이 고인 기적(奇迹)이라 했는데, 일제 때 흔적 없이 사라져버려 지금은 전해오지 않는다. 낭산 땅은 고려 때 지명이며, 조선 성종 조에는 여산현이라 했는데 현재까지도 그 지명이 불리어 오고 있다. 이규보는 부안 객사, 마령객사, 전주객사, 변산노상, 낭산고을, 오수역, 인월역, 남원 원수사, 임실군수에게, 순창 적성강, 보안현, 옥야현, 갈담역, 고부태수 오천유에게, 보안현 진사 이한재에게 등 60 여수가 넘는 많은 작품을 동국이상국집과 백운소설에 담아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전주목에 부임한 지 1년 4개월 만에 면직을 당하기도 했는데, 고종 17년(1230년)에 또 한 사건에 연루되어 부안 위도에 유배를 당하였다. 그러나 8개월 만에 풀려나와 이듬해 고종 18년(1231년) 12월, 63세 때 재목창의 나무베기 감독직인 작목사(斫木使)로 다시 부안으로 오게 되었다. 그가 우리나라 재목창인 부안 변산에 있으면서 한낱 벌목의 감독직인 작목사로 일하는 자신을 한심스러워 하면서 7언시를 남겼다. 호위하는 수레 속에 권세부리니 그 영화 천박하고벼슬이름 작목사라니 부끄럽기 그지없네 변산은 자고로 하늘이 내린 천부라 했는데좋은 재목 골라서 동량으로 쓰리라 최씨 무단정권 아래 세력을 잃어버린 선비들의 초라한 말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안타까워진다. 이듬해 정월 변산 바닷가로 나가니 바다 멀리 군산(群山)섬과 고슴도치같은 위도, 비들기섬 구도(鳩島) 등이 보이는데 하루아침이면 모두 다다를 수 있는 곳이라 했다. 그리고 순풍을 맞으며 쏜살같이 가면 중국도 먼 곳이 아니라는 주민들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산속을 지나 얼마를 가노라니 보안(保安) 땅에 이르렀는데 밀물이 한꺼번에 밀려와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고도 하였다. 밀물이 마치 천군만마처럼 밀려와 급하게 산으로 도망을 하여 겨우 위기를 모면했지만 바닷물이 산까지 쏜살같이 밀려와 타고 있는 말의 배 밑까지 순식간에 닿았다고 했으니 이 땅은 이규보가 그린 것처럼 조수간만의 차가 심했음을 알만하다. 보안은 지금 부안 곰소항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바다를 굽어보니 날씨가 맑다가 흐렸다하여 변화무쌍함으로 파란 물결과 푸른 산들이 들락날락하고 붉은 저녁노을로 하여 바다가 붉으락 푸르락 마치 만첩병풍을 두른 듯이 아름다웠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두 세 사람의 친구와 더불어 이를 시로 읊지 못했음을 한스러워 했다. 그러나 부안의 주사포구를 지나다가 휘영청 밝은 달이 해변의 모래사장을 비추어 밤바다가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나머지 시 한 수가 술술 흘러나와 시를 지었다고 하였다. 이 시가 〈동문선 〉권 14에 부령포구(扶寧浦口)라는 시제로 다음과 같이 실려 전한다. 부령은 지금 부안의 옛 지명이다.아침저녁 들리는 건 물소리뿐바닷가 촌락 너무도 쓸쓸하네맑은 호수 한가운데 달 도장 찍혔구나포구는 탐내듯 드는 밀물 들이켜서물결 찧어 옛 바위 닳아내 숫돌을 만들었네부서진 배는 이끼 낀 채 다리가 되었구나이 강산 온갖 경개 어디 다 읊을 수 있나 화가를 데려와서 단청으로 그려봤으면파도소리 부서지는 한가로운 어촌 마을의 정경이 마치 한 폭의 화폭처럼 아름답다. 길옆 호수 위엔 휘영청 밝은 달이 그림처럼 떠 있는 게 어쩌면 달 도장을 찍어놓은 것만 같다. 포구는 밀물이 세차게 부딪히는 바람에 바위가 흡사 숫돌처럼 매끄럽게 닳아졌고, 배는 부서져 마치 사람이 일부러 다리를 놓은 듯이 누워있었다고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강산의 경개를 시로 다 읊을 수 없으니 화가를 불러다가 그림으로 그려야지 몇 줄의 시로는 그 아름다움을 묘사할 수 없다는 이규보의 한탄이 베어난다. 고려의 대시인인 이규보도 부안 밤바다의 아름다운 절경을 한 줄의 시에 그려낼 수 없었다는 걸 보면 부안 변산의 바닷가는 예나 지금이나 정말 절경이었음을 알만하다. 무단정권의 회오리 정국에서 걸맞은 자리를 찾지 못한 이규보는 스스로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자호하고 전국을 구름처럼 떠돌았고, 우리나라 명시들에 대한 평설과 시론을 엮은 〈백운소설(白雲小說)〉을 펴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소설이란 용어를 썼지만, 이는 장르적인 명칭이 아니라, 시에 관한 자신의 시론과 시에 얽힌 이야기를 엮은 시화(詩話)집에 불과하다. 하지만 12살에 중국으로 건너가 과거에 급제하고 고병(高騈)의 휘하에 들어가 황소격문(黃巢檄文)을 써서 중국을 감동케 한 최치원을 당서 〈예문지(藝文志)〉 열전에 싣지 않고 그보다 훨씬 뒤떨어진 자국의 심전기(沈佺期) 등을 올려놓은 부당성을 제기한 비판 의식은 특기할 만하다. 즉 옛사람들은 문장에 있어서 서로 시새움을 하지 아니할 수 없었겠지만, 그건 최치원이 외국의 외로운 선비로서 중국에 들어가 명망 있는 선비들을 깔아뭉갰던 탓이라는 자국에 대한 높은 자존과 자긍심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유자후(柳子厚)의 문체와 바탕을 평함에 있어 무릇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반드시 글에 있다고 하고서 일찍이 내가 말하기를 그 글을 보아서 마땅히 그 사람을 공경하고 그 문체를 헤쳐보아 그 바탕을 볼 것이다라는 당나라 유자후의 글을 인용하면서 더욱 그런 마음이 절실했다는 이규보의 독자적인 시론도 엿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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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14 23:02

[17. 이규보의 전북경물 한시(상)] 전주목 부임, 타향서 느낀 점 읊어

고려 고종조 이규보(1168- 1241)는 고구려 28왕 705년간의 역사를 읊은 대서사시를 남겼다, 그 중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으로부터 유리에의 사위(嗣位)에 이르는 5언 282구의 시와 이에 겻들인 설화까지 모두 4,000여자가 넘는 장편시 <동명왕편>은 시인의 사명이 드러난 명편이다. 13차 몽고난으로 피폐된 민심과 나라를 걱정하면서 고려는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후국이라는 역사적인 웅혼한 기상과 드높은 민족혼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작자의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여조의 성은 고(高)요 시호(諡號)는 동명인데 (麗朝姓高 諡東明}활잘 쏘는 까닭으로 이름은 주몽이라 (善射故 以朱蒙名)아버지는 해모수요 어머니는 유화(柳花)인데 (父解慕漱 母柳花)하늘의 자손이며 하백(河伯)의 외손이라 (皇天子孫 河伯甥)그동안 구전해 오던 고구려의 건국시조 동명왕의 설화를 엮은 장편의 서사시의 허두이다. 〈동명왕편〉 병서(幷序)에서 이규보는 〈구삼국사〉의 책속에 있는 동명왕 본기(本紀)를 보니 그 신이한 사적(事跡)이 세상에서 듣는 것보다 더했다고 하면서나는 처음 동명왕의 설화를 귀(鬼)와 환(幻)으로 생각했지만, 세 번이나 반복하여 읽은 끝에 점점 그 근원에 들어가니 귀(鬼)가 아니라 신(神)이며 환(幻)이 아니라 성(聖)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물며 국사는 사실 그대로 쓴 글이기 때문에 어찌 없는 사실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김부식이 국사를 쓸 때에 자못 동명왕편을 생략하였으니 그는 국사란 세상을 바로잡는 글이니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그런 것인가. 그러나 난 이것을 시로 엮어 천하에 펼침으로써 우리나라가 본디 성인(聖人)의 나라임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라는 자신의 저작의도를 세상에 천명하였다. 이는 몽고의 연이은 침략으로 피폐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켜서 민족적 저항의식과 희망을 북돋우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해모수는 본디 하늘의 천제의 아들로 오룡차(五龍車)를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자이다. 성 북쪽 청하(淸河)에 살았던 하백에게는 세 딸 유화, 훤화, 위화 등이 있었는데, 해모수가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들을 만났다. 그는 세 딸 가운데 유화를 데리고 하백에게 찾아가 결혼을 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하백은 해모수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이 사람을 가죽가마에 태워 하늘로 보내려 하였다. 술에서 깨어난 해모수는 유화의 비녀를 뽑아 가죽가마를 찢고 혼자 하늘로 올라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하백은 유화를 꾸짖고 태백산 남쪽 우발수 물가에 유화를 버렸으나 강가의 어부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결국 금와왕에게 구함을 받아 주몽을 낳게 되었다. 이후 유화는 해모수로 인해 잉태한 주몽을 알로 낳았다. 한 되만한 큰 알인지라 마굿간에 버렸지만 말이 밟아 깨뜨리지 않았고, 깊은 산 속에 버려도 오히려 짐승들이 보호해줌으로써 결국 주몽은 알속에서 사람으로 태어났다. 왕재로 자라난 주몽은 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서 비류국 송양왕의 항복을 받고 고구려를 세워 동명성왕이 되었고, 동명왕의 아들 유리가 부왕을 찾아가 부러진 단도를 맞춰서(短刀附合) 왕위를 계승했다는 이야기로 펼쳐진 대서사시가 바로 동명왕편이다. 이 이야기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권 13 고구려본기에 유리왕의 황조가와 더불어 전해온다. 이규보는 32세 때인 신종 3년(1200년) 당시 무단정권의 실력자인 최충헌의 시회(詩會)에 불려나가 그를 칭송하는 시를 써서 벼슬을 얻었고, 이후 전주목에 부임하였다. 이때 전주의 속현들을 둘러보며 역사적인 〈남행월일기〉라는 기행적 수필을 남겼다. 9월 23일 처음 전주로 들어오면서 말 위에서 북당에서 눈물 흘리며 어버이를 작별하니/ 어머니를 모시고 관직나간 고인처럼 부끄러운데/ 문득 완산의 푸른 빛 한 점을 보니/ 비로소 타향객인 줄 알겠네(北堂揮涕忍辭親 輦母之官愧古人 忽見完山靑一點 始知眞箇異鄕身)라 읊은 7언절구가 전해온다. 그리고 지금의 전주 효자동을 지나다가 그 곳에 있는 무명의 효자비로 인해 효자리가 되었다는 5언고율시 비석 세워 효자라 표했는데/ 일찍이 이름을 새기지도 않았네/ 어느 때 누구인지 알 수도 없으니/ 어떠한 효행인지 모르겠네(立石標孝子 不曾鐫姓氏 不知何代人 孝行復何似)라 읊기도 했다. 전주는 완산(完山)이라 일컫기도 하는데 옛날 백제의 땅이다. 인구가 많고 집들이 즐비하여 옛 나라의 풍(風)이 있는 까닭에 그 백성들이 치박(稚朴)하지 않으며 아전들이 다 점잖은 사인과 같아서 행동거지가 자상함이 볼만하다. 중자산이란 산이 있는데 나무가 가장 울창하여 이 고을에서 크고 웅장한 산이다. 소위 완산이란 산은 다만 나지막한 봉우리일 뿐, 한 고을이 이로써 이름을 얻은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12월 기사(己巳)에 비로소 속군들을 두루 다녀 보았다. 마령(馬靈), 진안(鎭安)은 산골에 있는 옛 고을인데 그 백성들이 질야(質野)하다. 얼굴이 잔나비 같고 배반(杯盤)과 음식이 만맥(蠻貊)의 풍모가 있는데, 꾸짖거나 나무라면 마치 놀란 사슴처럼 금방 달아날 듯하다. 산을 따라 감돌아가서 운제(雲梯)에 이르렀다. 운제로부터 고산(高山)에 이르기까지 위태로운 봉우리와 드높은 고개가 만인이나 높게 솟아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서 말을 타고 갈 수가 없었다.(중략) 〈남행월일기〉전주는 본래 신라 때부터 완산,완산주라고 불러 왔는데, 이전에는온다라, 온드르라 했던 것을 신라 경덕왕 때 한자로 지명을 바꾸면서 비롯된 이름이었다. 이규보는 전주에는 중자산이란 웅장한 산이 있는데도 전주부의 남천너머 나지막한 봉우리에 불과한 완산의 이름을 굳이 취하여 전주의 지명으로 삼았는지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 하였다. 그리고 〈남행월일기〉라는 기행수필에 전주에 속해있는 속현들 예컨대 마령, 진안, 운제, 고산, 예양, 낭산(朗山), 금마(金馬), 이성(伊城) 등을 두루 둘러보며 그 지방의 산천과 인심, 음식, 풍물 등을 유려한 기행수필로 엮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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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07 23:02

[16. 망부의 한 상사별곡 (하)] 독수공방 슬픔 하소연 애처롭기만

신랑신부 서로 만나 여군동침(與君同寢) 하올 적에섬섬옥수(纖纖玉手) 마주잡고 사랑으로 노닐 적에옥안(玉顔)을 상대하니 여운간지(如雲間之) 명월(明月)이라마음이 호탕(浩蕩)하여 다야담화(多夜談話) 즐길 적에주순(朱脣)을 반개(半開)하니 약수중지(弱水中之) 연화(蓮花)로다은은한 둘의 정(情)을 게 뉘라서 다 알소냐동영(東影)의 비친 달이 서창(西窓)에 다지도록연연(戀戀)한 둘의 심사 파정(罷情)을 못 다하고신혼 초야인데도 신랑 신부의 사랑이 무르녹아 내린다. 마치 고려속요 만전춘별사의 정조와 흡사하다. 동쪽 창가에 비친 달이 긴 밤을 지나 서창에 다지도록 사랑하는 마음을 다할 수 없음이 얼음 위에 댓잎자리를 보아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얼어 죽을망정 이 밤이 더디 새었으면 좋겠다는 만전춘별사 속요의 정조와도 동질적이다. 옥 같은 얼굴은 구름 사이로 보이는 밝은 달처럼 예쁘고, 붉은 입술 방긋이 웃는 모습은 신선이 노닐었다던 중국 서부의 전설적인 강물 약수(弱水)에 떠 있는 연꽃처럼 아름답다고 용사(用事)하였다. 그러나 다른 상사가나 여탄(女嘆)류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고도 육정적인 표현들이 많다. 원앙금침 잔 이불이 운우지정 깊이 든 잠이라 표현된 망부가의 경우를 보더라도 운우지정의 운우(雲雨)는 대담하고도 육정적인 성행위의 상징이며, 금침에 누었으니 이성지합 분명하다/ 부끄러움 멀어지고 인정은 깊어온다라는 여자자탄가도 부끄러움 멀어지고 인정은 깊어온다라는 초야정사 장면이 혼인 첫날 치고는 상당히 과장적이고도 대담한 표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혼례의 초야정사가 끝나면 으레 시가(媤家)의 신행길이 이어진다. 이날이 가까워 오면 시집살이의 두려움과 초조함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게 규방가사의 공통적인 성격이겠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정조를 찾아 볼 수가 없다. 두려움이나 초조함보다 오히려 시댁 형제간 우애와 비복(婢僕)을 다스리는데 있어 인의가 제일임을 교훈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행길이야 말로 응당 여자가 행해야 할 부창부수의 어려운 길일 터인데 오히려 즐거움과 행복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도 허구적이다. 더구나 시집은 시집살이의 고통이나 한이 있는 게 아니라, 부부간의 좋은 금실로 밤낮으로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려지고 있다. 이는 남녀의 결합으로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됨을 강조하면 할수록 망부(亡夫)의 슬픔이 더욱 커지는 그런 대조적인 효과를 노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천지조화로 이뤄진 혼인이었지만 밤낮없이 즐거웠던 신혼의 행복이 갑작스런 남편의 불치의 득병으로 이어져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다. 부부간의 이 같은 깊은 사랑을 천지가 미워한 것인가, 아니면 귀신이 작해(作害)한 것인지, 부부는 천만년 같이 살아갈 것이라 믿어왔는데 백약이 무효라고 한탄을 한다. 이렇듯이 짚은 정을 천지가 미워한가 귀신이 작해(作害)한지 어여쁠사 우리낭군천만세나 믿었더니 우연히 득병(得病)하야백약이 무효로다 의약이 분주(奔走)하야 아무리 치료하되 살릴 길이 전혀 없다(중략)금풍(琴風)이 소슬(蕭瑟)하야 오동잎은 떨어지고오곡이 성실(成實)하야 사계(梭鷄)는 슬피울제동방의 실솔성은 나의 수심(愁心) 자아내고추야장(秋夜長) 긴긴 밤에 어찌 아니 한심할까가을이 돌아가도 우리임은 아니 온다 그렁저렁 동절(冬節)이 돌아오니 백설(白雪)이 분분(紛紛)하니 만건곤(滿乾坤)이라 궁항(窮巷) 적막(寂寞)의 비금(飛禽)주수(走獸)는 깊이 들고 산천 초목(山川草木)이 백발(白髮) 세계(世界)로다고칠 수 없는 병을 얻어 불귀(不歸)의 객(客)이 된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가눌 길 없는 슬픔의 독수공방은 이 상사별곡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 망부의 한과 독수공방의 슬픔의 단락이 이 가사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서 극적 전환을 이루기도 한다.독수공방의 한과 설움을 더해주는 요소로 등장하는 소재는 예나 지금이나 바람, 비, 오동잎, 베짱이와 귀뚜라미들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울어대는 이런 풀벌레들의 구슬픈 울음소리는 상사의 그리움의 정을 더 깊게 만드는 관례적인 소재들이다. 그리고 사별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의 정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더욱 상승되어 나타난다. 동지섣달 긴긴 밤이면 그리움에 비례하여 슬픔이 고조되기 마련이고 과세하기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봄이 오면 잎이 떨어진 나무마다 새잎이 돋아나고 다시 꽃이 피어 나비나 벌들이 날아들기 마련이지만, 쌍쌍이 나는 새들은 춘흥을 못 이기어 화류경(花柳景)을 즐긴다. 그런데 한번 간 우리임은 왜 돌아올 줄 모르는 것이냐며 화자는 한탄하고 있다. 자연경물의 변화에 따라 더욱 임 생각이 간절히 묘사되는 건 속요 동동(動動)과 같은 달거리 노래들처럼 우리 고전시가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요소다. 봄이 가고 사오월이 오면 녹음이 산야에 가득 펼쳐지고 황금 같은 꾀꼬리는 쌍쌍이 날아들어 환호성을 즐기는데 한번 간 우리임은 어찌하여 날 찾거나 부를 줄 모르는 것인가 한탄을 한다. 그러면서 먼 산만 바라보아도 눈물이 나고 긴 한숨 자진 강탄하여 끝내 잊을 수 없다고 절절히 하소연하는 모습이 애처롭다.이 상사별곡은 1897년쯤 창작된 규방가사로 거의 호남에 분포되지 않았다는 종래의 관점에서 벗어나 홍규권장가, 치산가와 더불어 전북지방의 규방가사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전라방언인 ㄱ의 ㅈ화인 구개음화 현상이 뚜렷하고, ㅎ의 음운변화가 표준음 ㅋ이 아닌 ㅅ이나 ㅆ으로 일어났다는 점과 네 목궁기로 피를 내어 그놈 먹고 살아나니와 같이 지시대명사 그놈 등의 용법을 보더라도 상사별곡이 전라도에서 창작되고 수용, 향유되었다고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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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24 23:02

[15. 망부(亡夫)의 한 상사별곡(相思別曲)-상] 사별한 남편 연모하는 규방가사

상사별곡은 규방(閨房)가사이다. 내방(內房)가사, 부녀가사라고도 명명된 이런 가사들은 여탄형(女嘆型)이 주종을 이루지만, 이 외에 계녀(誡女)형, 야유(野遊)형, 기행(紀行)형 등의 유형으로도 대별된다. 특히 상사별곡이라는 명칭의 규방가사들이 많고 필사과정에서 조금씩 변이된 이본(異本)성의 가사들이 있기도 하지만, 이 작품처럼 전혀 별개의 상사별곡들도 많다. 이 가사는 필자에게 수강을 했던 익산군 함열읍 석매리에 사는 정대위 군으로부터 영인하여 받은 것으로 증조모가 소장해 오던 것인데 작자는 확실치 않다고 했다.규방가사의 창작과 수용, 향유의 분포가 영남에 국한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이 상사별곡은 전북 완주군 봉동면에서 발견된 홍규권장가와 더불어 호남의 규방가사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사용된 어휘가 전라방언이 많고, 특히 ㄱ의 ㅈ화 구개음화현상이 뚜렷하며 ㅎ 도 ㅅ이나 ㅆ 으로 바뀌는 음운변화를 보더라도 그렇다. 본문 중 한국충신 손중낭께 전하야다고라는 가사구로 보아 창작한 시기는 서기 1897년 광무 1년 이후일 것으로 보인다. 이 해는 고종 34년으로 그해 10월 일제에 의해 황제즉위식을 갖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했기 때문이다. 이 가사는 사별한 남편에 대한 연모의 정이 곡진할 뿐만 아니라, 상사의 한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산천을 유람하는 기행형을 취하고 있다는데 그 특성이 있다. 조선조 여인네들에게 있어 남편이란 하늘과 같았고 또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그런 남편이 갑자기 득병하여 횡사하는 건 하늘 무너지는 슬픔이며 극복할 수 없는 괴로움이다. 더불어 뼈 속 깊이 파고드는 상사의 그리움은 치유할 길은 없는 절망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산천을 유람하면서 그러한 고독과 괴로움을 극복한다는 것으로 일관한다는 다소 허구성까지 내포하고 있다. 구성을 보면 여자로 태어나 부덕을 닦은 숙녀로 성장한 후, 정혼에 따른 교배례(交拜禮), 초야정사와 신행(新行), 득병과 망부의 한 등 4단락으로 이루어진 상사(相思)의 정과 명산대천과 무변창해(無邊滄海) 유람, 악양루와 고소대의 승경(勝景), 봉황대와 강동의 범주(泛舟) 등 3단락의 유람기행, 1단락의 과부의 애소(哀訴)와 경계(警戒) 등 3부문으로 되어 있다. 어찌 보면 상사별곡과 기행가사 두 편을 묶어놓은 듯 보이는 이러한 구성은 조선 말기 개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규방가사의 변이형태라 할 수 있을 것 같다.그렁저렁 성인하여 십 오 세가 당도하니옥안운발(玉顔雲髮) 고운 얼굴 만인 중에 빼어나매우리부모 이르기를당 명황 시절의 양귀비(楊貴妃)가 갱생한 듯한나라 시절의 왕소군(王昭君)이 갱생한 듯아무도 우리 천하는 우리 딸이 무쌍(無雙)이라인근 읍의 유명하기로 구혼하는 매파(媒婆)들이만수산의 구름이요영주의 호결 뫼듯 사방으로 오고갈 제우리 부모 나를 두고 이아니 고를소냐직서(直書)하기 일을 삼아 각별히 가릴 적에영웅군자 얻으려고 주사야택(晝捨夜擇) 하건마는 천생만민(天生萬民) 하올 적에 각각 짝이 있는지라하늘이 정한 배필(配匹) 인력으로 어찌할까상사별곡의 허두(虛頭)는 하늘과 땅, 해와 달이 차고 기울면서 우주만물이 생성하는 운행의 법칙 따라 각기 남자와 여자로 태어난다는 철학적 해석으로 시작된다. 주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지 않고 여자로 태어남이 분하다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남을 기뻐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즉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에 오히려 관심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재수 교수는 남자에겐 요조숙녀가 필요하고, 여자면 군자호구가 짝이 되어야 하는데 이 양성의 화합으로만 인간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상사별곡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향을 취하여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탄하거나 강한 불만을 토로하는 그런 일반적인 여탄류의 패턴으로 흐르지 않았다. 2, 3세에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여 7, 8세에 이르러서 공자, 맹자, 안자, 증자의 가르침을 받고 부모에게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를 익힌다. 그리고 여자의 덕목의 하나인 침선(針線)과 자수(刺繡)와 방적(紡績)을 배운 후, 나이 15세 꽃다운 나이에 들면 각별히 배필의 취택과정을 밟게 되는 순서가 상세하게 진술되고 있다. 부모의 눈에는 자신의 딸이 당나라 때 절세미인이라던 현종의 비 양귀비보다도 아름답고, 한나라 원제(元帝)의 궁녀였으나 흉노와의 친화정책으로 흉노족장에게 시집간 왕소군보다 더 예쁘고 아름답다고 비유하며 우리 천하는 우리 딸이 무쌍(無雙)이라고 기염을 토한다. 그런 보옥(寶玉)같은 딸이었기 때문에 구혼하는 매파들이 만수산에 구름이요라 자랑하지만 인간의 뜻보다 오히려 하늘의 뜻에 따라 이뤄진 운명을 어찌할 수 없다는 기박한 운명론이 바탕에 깔려 있다. 궁합을 보고 길일을 택한 후 다시 중단(中段)을 보아 각종 옥살(獄煞)을 피하도록 완벽을 기했던 혼사였지만, 종국에 가서는 그것도 무용지물이었다는 허망함을 노래한 규방여인의 한 맺힌 상사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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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1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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